소설리스트

낙화유수-33화 (34/38)

30장. 후연의 고구려인

겨울이 지나고 찾아온 봄은 불안한 소식으로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후연이 아닌 백제였다.

지난 전쟁으로 완전히 고구려에 굴복했다고 믿었던 백제가 여전히 욕심을 버리지 못했다는 증거가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증거는 왜와의 관계였다.

백제는 신라에서 크게 타격을 받은 후에도 왜와의 화친을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난번보다 더 공고하게 동맹을 유지하려는 듯한 움직임을 보여 우리 고구려의 심기를 건드렸다.

발단은 이른 봄이었다. 백제 땅으로 왜의 사신들이 방문했는데, 백제는 사신을 보란 듯이 환대하며 자신들의 동맹이 여전히 유효함을 만천하에 보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백제는 직물을 짜고 옷을 만드는 봉의공녀(縫衣工女)를 왜에 보내 실질적인 교류를 이어 갔다.

이처럼 남쪽이 불안한 상황에서 북쪽까지 혼란스럽다면 고구려는 양쪽에서 적을 상대해야만 한다.

다행스럽게도 후연의 상황은 그리 급박하지 않았다.

담덕은 신라에서 돌아온 후 곧장 후연의 세작들에게 의심스러운 정황을 살피라는 지시를 내렸다. 소노부가 후연과 접촉했는지 여부를 알아내라는 지시였다.

하지만 세작들은 어떤 이상한 점도 발견하지 못했다. 후연의 왕 모용희가 부씨 자매에 빠져 다른 여인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있으므로 따로 혼담을 추진할 리가 없다는 것이 그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모든 것이 그저 담덕의 기우(杞憂)였던 걸까?

지설은 역시 담덕의 걱정이 과했다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지만, 담덕은 여전히 의심의 끈을 붙잡고 있었다.

-후연이 아니라면 어디지? 소노부가 줄을 대려는 곳이 어디인지 확실히 나오기 전에는 의심을 내려놓아선 안 돼.

과연 담덕다운 신중함이었다.

그러한 의심이 후연 토벌 계획을 앞당기게 했다.

소노부와 후연의 결탁이 의심된다면, 그들의 관계가 깊어지기 전에 후연을 무너뜨리면 된다. 그것이 담덕의 결론이었다.

하지만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기도 전에 후연에서 생각지도 못한 서신이 도착했다. 후연의 모용운(慕容雲)이 은밀하게 태왕의 사자를 뵙길 청한다는 내용이었다.

모용운은 모용보의 양자로 유명했다. 모용보는 후연의 2대 왕으로, 반란으로 죽음을 맞이한 모용성의 아버지이자 현재 후연의 왕 모용희의 형님이었다.

“모용운이라면…… 고운(高雲)을 말하는 것이로군요.”

그 소식을 들은 지설은 어렵지 않게 모용운의 정체를 떠올렸다.

“고운은 고국원왕 시절 전연(前燕)에 끌려간 우리나라 귀족의 후예인데, 모용보가 태자였던 시절 그의 눈에 들어 양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때 모용이라는 성까지 받았고요. 고구려인이 후연 왕의 양자가 된 것이 특이하다며 세작들이 소식을 전해왔었죠.”

“그런 자가 어째서 우리와 접촉하고 싶어 하지?”

담덕이 팔짱을 끼고 의자에 몸을 기댔다. 지설은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면서도 나름의 짐작을 늘어놓았다.

“모용보의 양자라면 반역으로 죽은 모용성과는 형제가 됩니다. 모용성을 누르고 왕위에 오른 모용희와는 적대적인 관계인 셈이지요. 적의 적은 친구라고들 하니, 우리에게 무엇인가 도움을 청하고 싶어진 것이 아닐까요? 아니면 본인이 우리에게 도움을 줄 생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도움이라…….”

“고운은 고구려인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하다고 들었습니다. 모용희보다 우리 쪽에 더 친근감을 느꼈는지도 모르지요. 한번 만나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렸듯, 적의 적은 친구니까요.”

지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담덕이 곧 고개를 끄덕였다.

“난 적의 적은 친구라는 말을 참 좋아하지. 고운을 한번 만나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하지만 어떤 식으로 사람을 보내야 할지 모르겠군. 고운 정도 되는 자가 우리에게까지 사람을 보낼 정도라면 보통 일은 아닌 듯한데…… 믿고 맡길 사람이 선뜻 떠오르지 않는군.”

“지설이나 태림을 보내면 되지 않아?”

내가 의아해져 물었다. 믿을 만한 사람을 보낸다면 당연히 지설이나 태림의 이름부터 나올 줄 알았는데, 그 두 사람은 담덕의 머릿속에 없는 것 같았다.

“이번 만남은 은밀하게 추진되어야 하는데, 두 사람이 움직이는 건 너무 눈에 띄잖아.”

지설과 태림은 담덕의 최측근이라는 이유로 많은 이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특히 태왕을 견제하는 소노부에서는 이 두 사람의 행적을 눈에 불을 켜고 쫓았다.

“그렇게 따지면 사람 찾기가 정말 힘들겠는데. 믿을 만하면서 소노부의 주목을 받지 않은 사람이 있기는 해?”

담덕의 측근이야 뻔했다. 그들은 모두 소노부의 주목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따진다면 누구도 이번 일에 적합하지 않았다.

“몰래 가기 힘들다면 차라리 당당하게 가는 쪽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럴듯한 핑계를 만들어 후연으로 향하는 거지요.”

지설의 작전은 움직임을 드러내는 대신 목적을 감춘다는 것이었다. 목적을 제대로 감출 수만 있다면 나쁘지 않은 작전이었다.

하지만 담덕은 그럴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어떤 목적이든 우리 쪽 사람이 후연에 간다면 주목을 피하기 어렵다. 적의 시선을 피하는 방법을 생각해야 해.”

“그렇다면 다른 곳에 불을 지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해결책은 의외로 지설이 아닌 태림에게서 흘러나왔다. 자신을 향한 모두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태림이 멋쩍게 제 뒷목을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전쟁에서도 흔히 쓰는 방법이잖습니까. 엉뚱한 곳에 불을 피워서 사람들이 몰리게 만든 후에, 정작 다른 곳을 공격하는 방법 말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흥미로운 이야기로 소노부의 주목을 끈 다음, 그들이 정신이 팔린 사이 뒤로 사람을 움직이자는 말이지?”

“예.”

제 설명을 보충하는 지설의 말에 태림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제시한 해결책이 마음에 드는지 담덕이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씨익 웃었다.

“그렇다면 아주 큰 불을 놓아야겠군. 소노부의 시선을 제대로 끌려면 말이야.”

머릿속에 무엇인가 재미있는 계획이 떠오른 것이 분명했다.

“내가 죽을병에 걸려 두문불출한다는 소문이 돌면 어떨까? 실제로 침소에 틀어박힌 채 나서지도 않고, 밖으로 매일 약 냄새만 풍긴다면 말이야.”

담덕의 말에 지설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당연히 소노부의 입장에서는 애가 달겠지요. 그 소문이 사실인지 알아보려고 모든 수를 동원할 겁니다. 다른 일에 신경 쓸 여력 따위는 없어지겠지요.”

마주 보는 두 사람의 얼굴에 비슷한 미소가 걸렸다.

“하면 불을 피우는 동안 제가 후연에 다녀올까요?”

“아니. 그래도 지설이나 태림은 위험해. 다른 사람을 보낸다.”

“누구를 염두에 두고 계십니까.”

“제신.”

“수장님을요?”

나와 지설, 태림 모두가 눈을 크게 떴다. 제신은 비로의 수장이 된 후 단 한 번도 국내성을 떠난 적이 없었다.

“나의 최측근 중에서는 가장 숨겨진 사람이지. 그러니 이번 일에 가장 적합해.”

담덕은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그 이상의 이유가 있음을 짐작했다.

부훈영. 혹은 다로. 그녀가 후연에 있다.

아마도 담덕은 제신과 다로의 만남까지도 생각한 것이 아닐까?

내 생각이 옳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나를 바라보며 웃는 담덕의 미소가 묘했다.

* * *

제신은 의외의 임무에 넋이 나가 있었다.

“내가 간다고? 후연에?”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몇 번이나 되묻고 난 후에야 현실을 받아들였다.

“그렇구나. 내가 가게 되었구나. 후연에 고운을 만나러.”

“그리고 다로도 만나겠지.”

나의 말에 멍하니 중얼거리던 제신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럴 일은 없다. 내 임무만 마치고 돌아올 거야.”

“오라버니. 괜한 고집 부리지 마. 마음으로는 이미 다로를 용서하고 이해했잖아.”

정곡을 찌른 말에 제신이 내게서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그렇지 않아.”

“말하지 않았어? 오라버니 거짓말 정말 못한다고.”

내 말에 제신이 입술을 질끈 깨물며 다시 나를 보았다.

“난 오라버니가 과거의 일로 다로를 향한 마음을 부정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과거의 일이라……. 그 많은 일들이 그렇게 간단하게 표현되나?”

“그리 간단하지 않은 문제라는 건 알아. 하지만 언제까지 과거에 묶여 있을 수는 없잖아. 시간은 쉼 없이 흐르니 우리는 거기에 맞춰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어. 과거 때문에 현재나 미래를 포기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해.”

나는 여전히 입술을 질끈 깨물고 있는 제신의 두 손을 붙잡았다.

“우리는 모두 난세(亂世)라는 외줄 위를 걷고 있잖아. 언제 어떻게 죽음이 찾아올지 모르는 그런 삶이니 오늘을 살아가는 데 후회가 없어야 해. 오라버니는 훗날 지금의 이 시간을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제신을 향한 말이지만 나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언제 마지막을 맞이할지 모르는 사내의 곁에 머무르며 내가 하루에도 몇 번씩 하는 생각.

고민하고 또 고민해도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함께 있는 지금 이 시간을 소중하게 보내자는 것이다.

“난 이제 제자리를 찾았어. 행복해졌고, 앞으로도 그렇겠지. 다로가 내게 했던 일들이 오라버니의 마음을 가로막는 장벽이라면 더 이상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야.”

제신이 누구보다 가족을 소중히 여기는 걸 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와 누이라면 끔찍하게 아꼈던 제신이다.

그런데 다로가 그런 가족을 다치게 만들었다. 제신의 성격상 쉽게 용서하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제신이 나로 인해 제 마음을 억누르지 않기를 바랐다. 이미 많은 것을 잃은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한 마음마저 버려야 한다면 그보다 더한 비극은 없을 테니까.

“이미 많은 시간을 허투루 버렸잖아. 그러니 지금이라도 최선을 다해 행복해져야지. 아마 돌아가신 아버지께서도 그런 마음이실 거야.”

“정말 그렇게 생각하실까?”

제신은 자신 없는 듯 힘없이 미소 지었다.

아버지를 죽게 만든 소노부. 그 소노부의 간자였던 다로. 과거의 그녀는 분명 우리의 적이었다.

하지만 나는 우리 아버지의 성정을 잘 알았다. 그분은 언제나 우리의 행복을 중요하게 생각하셨다.

“우리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데. 당연히 그러길 바라실 거야.”

“내 누이에게 이런 조언을 들을 줄 몰랐는데.”

“혼인을 하고 아이를 낳아야 제대로 된 성인이 된다고들 하지. 난 혼인도 했고 아이도 낳았는데, 오라버니는 둘 중 하나도 못 했잖아.”

나는 제신의 손을 붙잡은 손에 힘을 주며 강하게 말했다.

“이제 그만 어른이 돼, 오라버니.”

미소와 함께 흘러나온 진심 어린 조언에 제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닌 기묘한 얼굴.

그 얼굴이 제신의 모든 감정을 다 설명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다로는 없어. 모용희의 비 부훈영만 남았지.”

“다로가 부훈영이 됐는데, 부훈영이 또 다른 사람이 되지 말란 법 있어? 마음만 먹으면 모든 것을 되돌릴 방법이 있을 거야.”

“넌 가끔 어려운 일을 너무나 쉽게 말하는 경향이 있어. 그런데 그 말에 구원이라도 받은 듯 마음이 편해지다니…… 나도 참 답이 없다.”

픽 하고 웃음을 흘린 제신이 그대로 붙잡힌 손을 빼내어 나를 끌어안았다.

“고맙다, 내 누이.”

* * *

계획대로 담덕은 곧장 칩거(蟄居)에 들어갔다.

칩거라고 해도 특별할 것은 없었다. 담덕은 평소 하던 것처럼 장계를 보고 지도를 살피며 군사 계획을 고민했다. 침소 밖으로 나서지 않는다는 점만 제외하면 평소와 똑같았다.

단지 그뿐이었는데도 국내성에는 금세 묘한 소문이 돌았다. 태왕의 건강 이상설이었다.

소문의 시작은 비로였다. 담덕의 명을 받은 대원들은 백성으로 위장해 거리에서, 시장에서, 주점에서 ‘태왕의 건강이 나빠졌다더라’ 하는 이야기를 풀어냈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국내성 전체에 태왕의 건강 문제가 화두(話頭)로 떠올랐다.

원래부터 왕의 건강은 나라의 수장이 굳건하길 바라는 백성의 주요한 관심거리였다. 하지만 일부 귀족들에게는 다른 의미로 태왕의 건강이 중요했다.

태왕의 건강은 권력과 직결된다. 가장 중요한 질문은 만약의 상황에 다음 태왕은 누가 될 것인가이다.

지금 고구려의 후계 구도는 상당히 애매했다. 연과 승평을 지지하는 세력들이 각각 나뉘어져 갈피를 잡기 힘들었다.

절노부는 연을, 소노부는 승평을 지지했고, 순노부와 관노부는 누구에게로 더 무게가 실릴 것인지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오래전 나와 영을 두고 누가 황후가 될지 가늠하던 때와 구도가 비슷했다.

담덕의 칩거는 후연에 은밀히 사람을 보내기 위한 방책으로 시작되었지만, 귀족들이 소문에 대처하는 모습을 보면 적과 아군을 구분할 수도 있었다. 우리로서는 일석이조의 좋은 계획인 셈이었다.

제신은 상황이 무르익기를 기다려 계획했던 것처럼 후연으로 떠났다. 고운과 만나 그가 담덕에게 접촉한 이유를 알아 오는 것이 제신의 임무였다.

다행히 소노부는 특이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따라붙는 사람 없이 무사히 국내성을 빠져나갔다는 제신의 연통까지 도착했으니 수가 제대로 먹혀든 셈이었다.

제신처럼 내게도 임무가 하나 주어졌다. 담덕과 함께 그의 침소에 틀어박혀 매일 약을 달이는 일이었다. 누가 보아도 아픈 사람이 있는 것처럼 처소에 약 냄새를 풍기는 것이 나의 임무였다.

나는 일부러 고약한 냄새가 나는 약재들을 엄선해 정성껏 약을 달였다. 덕분에 담덕의 침소 주변은 새어 나가는 약 냄새로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약 냄새를 맡은 궁인들이 밖으로 이 이야기를 전할 거야. 그 이야기를 들은 귀족들은 담덕의 건강에 대한 이야기가 단순한 뜬소문이 아니라고 생각할 거고.

하지만 이 계획을 오래 지속할 수는 없었다. 담덕이 칩거할 수 있는 기간에도 한계가 있었을뿐더러, 태왕의 건강 이상설이 타국에까지 퍼지면 쓸데없는 침략을 불러올 수도 있었다.

길어야 보름. 그보다 짧으면 짧을수록 좋다.

그러나 이제 작전은 담덕의 손을 떠났다. 제신이 얼마나 임무를 빨리 수행하고 돌아오느냐에 따라 칩거 기간이 달라지게 될 터.

“제신은 언제 돌아오려나. 벌써부터 갑갑한데 말이야.”

담덕은 크게 기지개를 켜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처소에 틀어박혀 장계를 보는 것이야 늘 하던 일이지만, 잠깐이라도 밖에 나갈 수 없다는 제한이 걸려 있으니 심리적으로 압박을 느끼는 듯했다.

“아직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어. 벌써부터 갑갑하면 남은 시간을 어찌 견디려고?”

“그러게. 이것 참 곤란하게 됐군. 우희 네가 날 좀 재미있게 해 줄래?”

“재미있게? 내가 그런 걸 알 거라고 생각해?”

“어렸을 때부터 넌 색다른 걸 많이 알았잖아? 얼음 위에서 미끄러지는 신발을 만드는 법이라든가, 눈을 타고 구르는 놀이 같은 걸 알려 줬었지.”

“눈에서 구르는 놀이가 아니라 썰매를 타는 거였어.”

“눈썰매를 타면 꼭 눈밭에 구르게 되니까 결국은 같은 거야.”

“완전히 다르거든!”

나는 웃으며 실내에서 할 만한 현대의 놀이를 떠올려 보았다. 보드 게임 같은 거라면 충분히 할 수 있겠지만, 소진일 때 그런 놀이를 즐기지 않았다 보니 아는 게임이 없었다.

그나마 알고 있는 게임은 포커나 체스 정도?

포커는 카드가 많이 필요하지만 체스 정도라면 종이로 간단하게 말을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종이를 정사각형으로 잘라 내 그림을 그려 간단하게 체스 말을 만들었다. 그다음에는 커다란 종이에 흑백의 체스판까지 그려 냈다.

담덕이 어설프게 만들어 낸 체스 놀이 도구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게 뭐야?”

“이건 먼 나라 사람들이 즐기는 놀이야. 전략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바둑하고 비슷할 수도 있겠다.”

“바둑?”

전략적인 놀이라는 말에 담덕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흥미를 느낀 것이 분명했다.

“응. 이 작은 판 안에서 흑과 백으로 나눠 전쟁을 하는 거야. 간단한 규칙만 숙지하면 어렵지 않아.”

나는 담덕에게 각 말의 이름과 이동 방향을 알려 주었다.

태왕, 여왕, 장군, 제관, 첨탑, 병사.

담덕이 이해하기 쉽게 말에 이름을 붙여 알려 주고 경기의 규칙을 설명하니 그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했어. 무슨 수를 써도 왕이 잡히는 외통수에 몰리면 패배란 말이지?”

“간단하게 말하면 그렇지만…….”

짧은 설명만 듣고 이렇게 빨리 이해하다니.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담덕을 보니 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정말 이해했어.”

“그럼 내기를 해도 괜찮아?”

“내기?”

“그래. 그냥 두기만 하는 건 지루하잖아. 뭔가를 걸어야 재미있지. 재미있는 걸 하고 싶다며?”

자신감을 보이는 담덕에게 나는 얼른 미끼를 던졌다. 신이 나서 이야기를 하는 나를 보며 담덕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미 이 놀이를 알고 있는 너와 오늘 처음 이 놀이를 하는 나, 누가 이길지는 분명한 거 아냐?”

“그거야 뭐…….”

정확한 지적에 내가 시선을 피하며 딴청을 부리자 담덕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네 말대로 승패가 걸려 있어야 놀이가 더욱 불타오르는 법이지. 하자. 내기.”

“그럼 이긴 사람이 진 사람 얼굴에 낙서하기. 어때?”

“좋아.”

“대신 내가 흑을 잡을게. 이 놀이는 백이 먼저 두거든.”

“아, 바둑과 반대로군.”

“응. 하지만 먼저 두는 쪽이 조금 더 유리한 건 똑같아.”

바둑과 비슷하게 체스 역시 먼저 두는 쪽이 훨씬 유리했다. 다른 점은 바둑은 흑이, 체스는 백이 먼저 둔다는 것뿐이었다.

“그렇다면 초심자는 상수(上手)의 배려를 기쁘게 받아들이지.”

담덕의 승낙과 함께 아마도 고구려에서는 최초일 체스 게임이 시작되었다.

* * *

경험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상당하다. 체스처럼 전략이 중요한 게임에서는 더 그랬다.

오늘 처음 체스를 두는 담덕과 소진일 때 체스를 둬 본 적이 있는 나.

둘 중 누가 더 유리할지는 생각해 보지 않아도 분명했다. 당연히 나의 승리가 예견된 상황이었다.

그런데. 분명 그랬는데.

왜 내 얼굴이 낙서로 가득한 거지?

나는 체스 말을 만지작거리면서 즐겁게 웃고 있는 담덕을 보며 입을 쩍 벌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의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즐겁게 웃고 있는 담덕의 얼굴에도 낙서가 있긴 했다. 하지만 겨우 세 개뿐이었다. 그마저도 처음 세 경기에서 져 얻은 낙서였다.

그에 비해 내 얼굴에는 낙서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스스로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셀 수도 없이 많이 졌으니 보지 않아도 엉망인 얼굴 꼴이 충분히 짐작되었다.

처음에는 분명 내 생각대로 일이 흘러갔다. 담덕은 감을 잡지 못하고 연속으로 세 번이나 패했고, 나는 신이 나 담덕의 얼굴에 마구 낙서했다.

눈 주변을 따라 동그라미를 그리고, 코에 커다란 점을 만들어 주고, 간신을 떠올리게 하는 얇은 수염도 죽죽 그어 주었다.

그런데 네 번째 판부터 흐름이 바뀌었다.

-음. 이제 알겠어.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그렇게 말한 담덕은 정말로 그 경기의 승리를 가져갔다.

처음에는 운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섯 번째도, 여섯 번째도, 일곱 번째도 담덕의 승리였다.

그 뒤로 또 얼마나 많은 나의 패배가 이어졌는지 세기도 힘들었다. 담덕은 계속 이기고 나는 계속 졌다.

“이번에 또 외통수야, 우희.”

그리고 방금. 담덕이 내게 외통수를 선언했다.

“말도 안 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나는 믿을 수 없어 몇 번이나 말의 위치를 살폈지만, 아무리 고민해 보아도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았다. 패배. 또다시 나의 패배였다.

“정말 말도 안 돼…….”

힘없이 의자에 늘어지는 나를 보며 담덕이 씨익 웃었다.

“자, 이번엔 어디에 낙서를 해 볼까…….”

먹물에 흠뻑 적신 붓을 들고 내게 다가오는 담덕의 모습이 꼭 야차(夜叉) 같았다.

“어쩌나. 이제 얼굴에는 그릴 곳이 없는데.”

“내 얼굴이 그 지경이 되었단 말이지…….”

한숨을 푹 내쉬자 담덕이 유쾌하게 웃으며 허리를 숙여 의자에 앉아 있는 나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연우희? 자신 있게 내기를 하자고 하더니.”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처음 하는 놀이를 어찌 이리 잘해?”

지금 하고 있는 놀이가 체스가 아니었더라면, 담덕이 이미 할 줄 아는 놀이를 모른 척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놀이도 아닌 체스였다. 담덕이 결코 알 리가 없는 게임인지라 그가 아는 놀이를 모른 척했다고 우겨 볼 수도 없었다.

투덜거리는 나를 보며 담덕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네 말대로 바둑과 비슷하던걸. 몇 수 앞을 생각하면서 두다 보니, 어느새 네 왕이 내 말 앞에 있더라.”

무척이나 쉬운 일을 아주 간단하게 해냈다는 듯한 말투였다. 덕분에 약이 바짝 올라 얼굴이 벌게졌다.

“다음 판에는 내가 이길 거야.”

나는 이를 바드득 갈며 눈을 감았다. 빨리 다음 경기를 해야 하니, 쓸데없이 약 올리지 말고 낙서나 하라는 의미였다.

“이번 판을 하기 전에도 그런 말을 했었던 것 같은데 말이지.”

“담덕!”

“알았어, 알았어. 낙서할게.”

담덕이 웃으며 내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하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얼굴에 붓이 닿는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담덕? 낙서 안 하고 뭐……”

의아해져 질문을 던지는 순간 입술에 무엇인가 부드러운 것이 닿았다 떨어졌다. 아주 익숙한 감촉이었다.

나는 놀라서 눈을 번쩍 떴다. 눈을 뜨자마자 바로 앞에 예쁘게 웃고 있는 담덕의 얼굴이 나타났다.

“지금 나한테……”

“입 맞췄지.”

당당한 말에 내 입이 조금 벌어졌다.

“하라는 낙서는 안 하고 왜?”

“보다 보니 낙서할 곳이 없어서 말이야. 가만히 지켜보니 빈 곳이 입술뿐이잖아. 이제부터는 네가 지면 난 입을 맞춰야겠다. 어때?”

“……담덕. 언제부터 이리 뻔뻔해졌어?”

“내가 뻔뻔한가?”

담덕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얄밉게 갸웃거렸다. 제가 뻔뻔하다는 것을 무척이나 잘 알고 있는 눈치였다. 헛웃음을 흘리는 나를 보며 담덕의 얼굴에도 미소가 걸렸다.

“한 번 뻔뻔해진 거 계속 뻔뻔해져 볼까?”

담덕이 붓을 탁자 위에 내려놓고 두 손으로 내 얼굴을 감싸더니, 그대로 입을 맞춰 왔다. 그가 헛웃음을 흘리느라 벌어져 있던 내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이 뻔뻔한 사내를 어쩌면 좋지.

담덕의 뻔뻔함에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나는 손을 뻗어 담덕의 어깨를 붙잡고는 그를 내게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내가 이럴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는지 담덕이 잠시 멈칫거리더니, 금세 더 깊게 입을 맞춰 왔다.

부드럽게 입안을 휘젓고 떨어져 나가는 담덕의 얼굴에 내가 남긴 낙서가 선명했다.

“세상에.”

그 얼굴을 보며 문득 떠오른 사실에 짧은 한탄이 흘러나왔다. 담덕이 손가락으로 내 입술에 남은 타액을 닦아 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이 꼴을 하고 입을 맞췄잖아!”

나는 팔을 들어 얼굴을 벅벅 문지르며 외쳤다.

“아. 낙서.”

그제야 제 얼굴에 그려진 낙서를 떠올린 것인지 담덕이 입을 쩍 벌렸다.

멍하니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던 우리의 입에서 누가 먼저랄 것도 웃음이 흘러나왔다.

* * *

귀족들의 반응을 살피며 여유롭게 칩거를 즐기던 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후연으로 떠난 제신의 연락이 뚝 끊긴 탓이었다.

별다른 일이 없어도 이틀 간격으로 전령새를 보내 상황을 보고하던 제신의 연락이 사흘 전 완전히 끊겼다.

담덕이 칩거의 최대 기일로 잡았던 보름도 코앞으로 다가왔다. 이제 내일이면 담덕이 침소에 틀어박힌 지 보름이 된다.

“무슨 문제가 생긴 게 틀림없어.”

나는 불안함에 입술을 잘근잘근 물어뜯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연락이 끊길 리 없잖아.”

초조함에 방 안을 이리저리 방황 중인 나를 바라보는 담덕의 얼굴도 심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 제신이 말없이 소식을 전하지 않을 사람은 아니지. 서신을 보내지 못할 사정이 생긴 게 틀림없다. 하지만 그게 꼭 나쁜 사정은 아닐 수도 있어.”

담덕은 나를 위로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나를 가득 채운 불안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제신은 오래전 아버지의 행방을 찾아 곳곳을 떠돌면서도 내게 소식 전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의 소식이 끊길 정도의 사정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방향으로 해석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마지막 서신이 의미심장했던 것이 마음에 걸렸다.

-[고운과 만나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서신이 유출될까 두려우니 자세한 사정은 돌아가서 자세히 전하겠습니다.]

고운과의 만남에서 만에 하나라도 외부에 전해지면 곤란한 중요한 이야기가 오갔다는 뜻이었다.

제신이 알게 된 이야기가 중요하면 중요할수록 그의 안위는 불안해진다. 비밀을 알게 된다는 건 그런 의미였다.

내가 불안함에 깊은 한숨을 내쉬는 그때.

“아버지!”

바깥에서부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의 목소리였다.

담덕을 부르는 연의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곧 문이 벌컥 열렸다. 입구를 지키고 있던 태림이 난처한 얼굴로 나와 담덕을 보았다.

“죄송합니다. 곧장 문을 여실 줄 몰라서 막지 못했습니다.”

연이 고개 숙이는 태림을 지나쳐 담덕에게 뛰어들었다. 멀리서 달려와 제 품에 안긴 연의 무게에 무방비하게 서 있던 담덕이 순간 휘청거렸다.

“연아?”

담덕이 금세 중심을 잡으며 의아한 목소리로 연을 불렀다. 연은 대답 대신 담덕의 목에 두른 손에 힘을 주며 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담덕이 연의 등을 토닥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연이 도대체 왜 이러는 것 같으냐고 묻는 눈이었다.

하지만 나로서도 알 길이 없었다. 모르겠다는 의미로 어깨를 으쓱거리는 순간 이번에는 입구에서 승평이 나타났다.

“아버지!”

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승평 역시 날랜 몸놀림으로 태림을 지나치더니, 담덕에게 달려와 그의 다리를 꼭 껴안았다.

상체는 연이, 하체는 승평이.

담덕을 껴안은 아이들이 이내 울음을 터트렸다. 소리 내어 울며 숫제 통곡하는 아이들의 모습에 담덕의 얼굴이 금세 난처함으로 물들었다.

“아버지 정말 죽어요?”

“거짓말이죠?”

“죽으면 안 돼요!”

“다 거짓말이야! 엉엉!”

다행히 울면서 쏟아 내는 아이들의 말 속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었다.

담덕은 전쟁을 치르느라 국내성을 비울 때를 제외하면 많은 시간을 아이들과 보냈다. 바쁜 정무 중에도 꼭 시간을 내 연과 승평의 놀이 상대가 되어 주었는데, 최근 칩거를 결정하며 아이들에게 발길을 뚝 끊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국내성에 있는 아버지가 긴 시간 자신들을 찾지 않으니 아무리 세상 물정 모르는 아이들이라도 무엇인가 이상한 것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다 궁인들 사이에서 오가는 이야기를 들었을 테고, 그중에는 담덕이 아프다는 말도 있었을 것이다.

“이상한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구나.”

담덕이 쩔쩔매며 아이들의 등을 토닥였다.

바위처럼 크고 단단한 사람이 겨우 작은 아이 둘 때문에 어쩔 줄 모르다니.

그 모습이 어쩐지 보기 좋아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승평, 아버지는 괜찮으셔.”

나는 담덕의 다리를 꼭 껴안고 있는 승평을 달래 품에 안으며 아이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정말요?”

승평이 코를 훌쩍이며 내 품에 기대더니 불안한 눈으로 담덕의 모습을 훑었다.

승평의 시선이 제게 닿자 담덕이 팔을 번쩍 들었다 내려놓기를 반복하며 자신의 멀쩡함을 주장했다.

“자, 봐라. 멀쩡하지?”

어느새 연도 고개를 들어 담덕의 행동을 빤히 보고 있었다. 애초에 아픈 것이 아니었으니 담덕의 안색은 누가 보아도 건강했다. 덕분에 시간이 갈수록 아이들의 얼굴에 안도감이 차올랐다.

“그런데 왜 저랑 승평을 보러 안 오셨어요?”

“맞아요! 매일 찾아와 주셨으면서…….”

다시 생각해도 서러운지 승평의 눈에 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그 모습이 귀여워 입에 걸린 미소가 점점 더 짙어졌다.

“담덕, 아무래도 칩거는 여기까지인 것 같은데. 이 꼬마들에게 멀쩡한 걸 들켜 버렸으니 어쩔 도리가 없네.”

내 말에 담덕이 픽 하고 웃었다.

“그래. 칩거가 이리 끝날 줄은 몰랐는데.”

담덕이 연의 뺨에 입을 맞추며 아이들에게 물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우리 아드님들과 사냥터에나 놀러 갈까? 어차피 오늘까지는 공식 일정을 잡지 않았으니……”

“갈래요! 사냥터에 가요!”

“저도요! 저도 갈래요!”

담덕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연과 승평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만세를 불렀다.

아이들은 언제 통곡을 했냐는 양 잔뜩 신이 났다. 빨갛게 충혈된 눈만 아니었다면, 이 아이들이 조금 전까지 엉엉 울었다는 사실을 누구도 알 수 없을 것 같았다.

“내려 주세요! 저 사냥터 갈 준비 할래요!”

연이 담덕의 품에서 내려와 밖으로 달려 나가자 내게 안긴 승평도 팔을 저어 내 품에서 벗어났다.

“저도요! 저도 준비할래요!”

그렇게 외치고는 제 형님의 뒤를 따라 사라지는 승평의 뒷모습에 나와 담덕의 입에서 웃음이 터졌다. 금세 슬펐다가 또 금세 행복해지는 것이 딱 어린아이다운 반응이었다.

“역시 집안에 웃음을 찾아 주는 건 아이들이라니까.”

담덕이 고개를 내저으며 나를 보았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를 하나 더 낳는 건 어때? 내가 외롭게 자라서 그런지, 아이들에겐 좀 더 북적거리는 환경을 만들어 주고 싶어.”

나도 담덕과 비슷한 마음이었다. 하지만 내가 외롭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은 아이들이 아니라 담덕이었다.

태왕으로서 모든 것을 혼자 견디고 이겨 내는 이 사람의 곁에 소란스러움이 함께했으면 좋겠다.

가족들 사이에서 쉬는 동안만이라도 사람 냄새를 맡고 편안하게 쉴 수 있도록 따뜻한 환경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쉽게 아이가 들어서지 않았다.

연이는 단 하룻밤 만에 생겼는데 말이야.

결국 아이가 생기는 건 하늘의 뜻이었다. 우리의 뜻으로 조절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나도 그러고 싶지만……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되는 문제야?”

“맞아. 그래도 노력을 해 볼 수는 있겠지?”

담덕이 묘하게 웃으며 은근슬쩍 내 손을 잡아 왔다. 엄지손가락으로 내 손바닥을 쓰다듬는 의도가 뻔히 보여서 나는 그의 손등을 툭 쳤다.

“그 노력은 밤에 하시죠, 폐하.”

“마음만 먹으면 낮에도 할 수 있습니다, 부인.”

“그건 내가 사양할게. 게다가 지금은 아이들과 사냥터에 갈 준비를 해야 하잖아?”

내 말에 담덕이 웃으며 내 손을 놓았다. 그놈의 ‘노력’을 포기했나 싶었더니 곧 그가 웃으며 말했다.

“돌아오면 같이 열심히 노력해 보자. 기다리고 있어. 알았지?”

“흠흠!”

담덕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입구에서 커다란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활짝 열린 문 앞에서 태림이 벌게진 얼굴로 서 있었다.

“두 분, 제발 옆에 있는 사람도 생각해 주십시오…….”

힘없이 부탁하는 그의 목소리에 내 얼굴도 덩달아 벌게졌다. 멀쩡한 사람은 지나치게 뻔뻔한 담덕뿐이었다.

“그러지 말고 자네가 익숙해지면 돼. 난 앞으로도 계속 이럴 것 같거든.”

* * *

담덕이 다시 바깥 활동을 시작하자 그의 건강 이상설은 빠르게 자취를 감추었다.

백성 사이에서는 다행이라는 목소리가 흘러나왔지만, 귀족들은 담덕의 건재함을 마냥 환영하지 않았다. 특히 소노부는 대놓고 아쉽다는 기색을 보일 정도였다.

그러는 사이 제신에게서 서신이 도착했다. 연락이 끊긴 지 아흐레 만의 일이었다.

서신은 짧았다. 후연에서의 일을 해결하고 국내성으로 향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우리가 서신을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제신이 국내성으로 돌아왔다. 연락이 잠시 끊겼던 기간을 보상이라도 하듯 빠른 귀환이었다.

제신은 나를 만나러 왔다는 핑계로 입궁해 담덕과 후연에서의 일을 논의했다. 그가 전하는 고운의 이야기는 놀라웠다.

“소노부에서 생각한 사윗감이 고운이었습니다.”

“고운을? 어째서 그런 애매한 상대를 골랐지?”

담덕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말처럼 고운은 무척이나 애매한 상대였다. 후연에서 고운의 위치가 불안하기 때문에, 지금 당장은 소노부가 그와의 혼담으로 얻을 것이 없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본 거지요. 모용희의 위세가 오래가지 못할 거라는 건 누구나 알지 않습니까?”

여인에 빠져 정사 돌보기를 게을리하는 모용희가 무너지는 건 시간문제라는 것이 세간의 평가였다. 모두가 동의하는 그 평가를 정작 본인만 모르고 있었다. 향락에 빠져 주변을 둘러볼 여력조차 없는 것이다.

“이미 여러 세력들이 삼삼오오 모여 훗날을 도모하고 있습니다. 개중에는 고운을 중심으로 한 세력도 있는데, 아직까지는 어느 세력 하나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고 비슷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요.”

제신이 그렇게 말하며 몇 개의 세력을 예로 들었다. 고운을 비롯한 모용보의 여러 자식들이 차기 주자로 떠오르고 있는 것 같았다.

“이를 해서천이 알았다면 그쪽과 혼담을 진행하는 것도 이해가 됩니다. 소노부가 조금만 돕는다면 여러 세력 중 고운이 승기를 잡는 건 어렵지 않지요. 그럼 해서천은 그리도 원했던 왕의 장인이 될 수 있습니다. 서로에게 썩 도움이 될 혼인입니다.”

“확실히 그렇군. 한데 고운은 어째서 우리 쪽에 은밀한 만남을 청한 거지?”

“해서천과 고운의 생각이 달랐습니다.”

제신이 씨익 웃으며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고운은 고구려 출신이라는 자부심이 상당히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후연 사람들에게는 모용운으로 불리고 있지만, 제게는 스스로를 고운이라 소개했지요. 우리말도 아주 능숙했습니다. 소노부 쪽에서 시작된 혼담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던 것도 고구려 여인과의 혼인이 반가웠기 때문이라 하더군요. 한데 해서천은 고운의 이유를 다르게 해석한 겁니다.”

“고운이 권력에 욕심이 있어 소노부의 손을 잡은 거라고 착각한 거겠지.”

“그렇습니다. 그래서 야심을 드러냈고, 고운은 당황해 혼인을 미룬 뒤 저희에게 은밀히 서신을 보낸 겁니다.”

“고운은 우리와 손을 잡겠다고 하던가?”

“아뇨.”

제신이 고개를 저었다. 예상하지 못한 말에 담덕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지만, 제신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손을 잡는 건 동등한 위치의 사람들끼리 하는 거지요. 고운은 스스로를 폐하의 부하라 말했습니다. 그러니 손을 잡을 것도 없습니다. 폐하께서 뜻을 전하면 고운은 거기에 따를 겁니다.”

* * *

“아비가 어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도대체 자식을 뭐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영의 혼담이 어찌 흘러가고 있었는지 모두 알게 된 지설은 드물게 감정을 드러내며 분노했다. 탁자를 내리친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보니 단단히 화가 난 것 같았다.

“다행히 고운이 우리 편이라 혼담이 제대로 진행될 일은 없을 거예요.”

“그렇겠지요. 하지만…….”

내 말에도 지설은 표정이 썩 밝지 않았다. 당장 작은 언덕을 넘었으나 그 뒤에 더 큰 산이 남아 있음을 알기 때문이리라.

확실히 이번 혼담은 운이 좋았다. 상대가 소노부가 아닌 우리를 택했으니 손도 대지 않고 코를 푼 셈이다.

하지만 다음은?

해서천이 욕심을 거두지 않는 한 같은 일은 계속 반복될 것이다. 그는 제 욕심을 채워 줄 사윗감을 찾고, 영은 또 그 놀음에 이용될 터.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하지 못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이런 사정을 전부 알게 되었는데도 생각이 바뀌지 않았어요?”

나는 흥분하는 지설을 보며 차분하게 물었다. 이를 바드득 갈고 있던 지설은 내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듯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생각 말입니까?”

“내가 전에 그랬잖아요. 영이를 보쌈이라도 해서 함께 있으라고요. 그때 지설은 내 제안을 거부했죠.”

“그랬습니다. 아주 바보 같은 말이라고 생각했었지요.”

“해서천이 영이를 어떤 취급하며 데리고 있는지 모두 알게 된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나요? 그 사람이 영이를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도구로밖에 보지 않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요?”

지설이 입을 꾹 다물고 나를 보았다. 팔짱을 낀 채 한참이나 말이 없던 그가 곧 한숨을 내쉬며 제 머리를 헤집었다.

“저라고 좋아서 손 놓고 있는 게 아닙니다.”

“머리 좋잖아요. 평소에는 이런저런 계획을 잘만 세우면서, 왜 제 일에는 이렇게 물러요?”

“……제 일이기 때문입니다. 저를 위해서 계획을 세워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으니까요. 그럴 이유도 없었고요. 제 계획은 언제나 폐하와 이 나라를 위한 것뿐이죠.”

지설은 어딘가 넋이 나간 사람 같았다. 지금껏 자신이 스스로를 위해 살아 본 적이 없다는 걸 이제야 깨달은 듯했다.

“그렇군요. 지금까지 전 스스로를 위해 무엇인가를 해 본 적이 없습니다. 단 한 번도.”

“다른 사람이 지설을 위해 뭔가를 해 준 적은요?”

“그것도 딱히……”

빠르게 대답하던 지설이 말을 끝까지 마치지도 못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저 상당히 인생을 잘못 산 사람 같은데 말이죠.”

“앞으로 스스로를 위한 일도 해 보면 되고, 지설을 위해 뭔가를 해 줄 사람은 주변에 많고. 뭐가 문제인가요?”

나는 웃으며 지설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런 나를 보며 지설이 눈을 가늘게 떴다.

“저를 도와주실 겁니까?”

“당연하죠.”

돕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개인적으로 지설과 영의 행복을 바라기도 했지만, 영을 우리 쪽에 데려온다면 권력을 향한 해서천의 야망을 완전히 끊어 낼 수 있었다.

“어떻게 저를 도와주실 수 있습니까?”

“먼저…… 아주 훌륭한 조력자를 찾아줄 수 있죠.”

“폐하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위치상 폐하께서 직접 움직이시긴 어렵습니다.”

“그건 나도 알아요. 담덕 말고 지설을 도울 만한 사람이 있잖아요. 소노부 안에.”

“아.”

내 말에 지설이 짧은 감탄사를 흘렸다.

“운 도령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네. 그보다 좋은 조력자가 어디 있겠어요? 영이의 행복을 누구보다 위하고, 소노부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고. 완벽하죠.”

“하지만 도움을 줄지 모르겠군요. 세상에 어떤 오라비가 누이를 보쌈해 가는 놈에게 좋다고 누이를 내어줍니까?”

“이건 지설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영이를 위한 일이기도 해요. 운 도령이라면 영이를 위해 무엇이든 할 사람이고요. 그리고……”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지설을 타박했다.

“사내가 어찌 그리 패기가 없어요? 운 도령이 안 도와준대도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져야죠. 영이를 행복하게 해 주겠다, 난 자신 있다. 그렇게 말하면서 허락을 받아 내야죠.”

“그…… 노력은 해 보겠지만…….”

내 말에 얼굴이 벌게진 지설이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우희 님께 이런 조언을 받게 될 날이 올 줄은 몰랐습니다.”

“남녀 문제에 대한 조언을 하는 건 언제나 지설 쪽이었으니까요.”

“본인의 문제가 되면 어렵군요. 그때는 잘 몰라서 건방지게 굴었습니다. 지금이라도 사죄드리지요.”

“이미 지난 일에 사죄는 무슨.”

나는 픽 웃으며 지설의 어깨를 툭 쳤다.

“영이를 행복하게 해 줘요. 조건 없는 애정을 주고, 지설도 영이에게 그런 걸 받아요.”

“조건 없는 애정이요.”

지설이 내 말을 따라하며 복잡한 얼굴을 했다.

조건 없는 애정은 어렵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상대에게 애정을 주며 대가를 바라고, 그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그런 건 보통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나 가능한 말 아닙니까.”

지설의 말이 옳았다. 무조건적인 사랑이 가장 쉬운 관계는 부모와 자식이다.

그러나 영은 가장 쉬운 그 관계에서조차 조건 없는 애정을 얻지 못했다. 영에게 주어진 해서천의 애정에는 늘 조건이 있었다.

내게 권력을 가져다 줄 아이.

해서천은 그렇게 믿고 영에게 애정을 쏟았다. 그건 운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해서천은 운이 제 권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가볍게 그를 향한 애정을 거두었다. 참으로 잔혹하고 무정한 아비였다.

“그 아가씨가 제 아비를 버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오래전에 그 아가씨가 가출을 감행한 건 제 아비가 달라질 거라고, 곧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또 다시 집을 떠나면…… 이젠 돌아갈 수 없어요. 그걸 알면서도 그 아가씨가 제 아비를 떠나려고 할까요?”

“그건 지설에게 달렸죠.”

“도움을 주신다더니…… 결국 운 도령을 설득하는 것도, 아가씨가 절 따라오게 하는 것도 전부 제 몫이라는 말씀이시군요.”

“누가 혼자 하래요? 옆에서 도와줄게요. 하지만 주도는 지설이 해야죠. 미인을 얻을 사람은 지설인데, 본인이 손을 놓고 있는 게 말이 되겠어요?”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지설이 픽 하고 웃음을 흘렸다.

“우스운 논리지만 어떻게든 납득은 되는군요. 그럼 먼저 영 아가씨의 생각을 들어 봐야겠습니다. 이 일은 그분의 의지가 확실해야만 도모할 수 있으니까요.”

“좋아요. 운 도령을 통해 의견을 묻죠. 영이가 그곳에서 나오길 원한다면, 운 도령도 기꺼이 두 사람을 도와줄 거예요.”

* * *

며칠 후 나와 지설은 사람을 보내 운을 궁으로 불러들였다. 오랜만에 만난 그는 예전보다 수척해져 있었다.

“얼굴이 안 좋은데요.”

걱정스럽게 묻자 운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불편한 곳에서, 불편한 사람들과 지내다 보니.”

불편한 곳은 소노부의 저택을, 불편한 사람들은 소노부 식구들을 말하는 것이다. 결국 집과 가족이 불편하다는 뜻이었다.

집과 가족이라. 세상 어느 곳보다 편해야 할 장소와 사람들 아닌가.

“괜찮은 거예요?”

“무엇이요?”

“그냥…… 전부 다요.”

뭐라고 설명할 수 없어 대충 얼버무렸지만 다행히 운은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알아들은 것 같았다.

“괜찮습니다. 무엇이든. 이 정도에 나가떨어질 거라면 진즉에 도망쳤을걸요. 신라에는 무사히 다녀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연리는 좀 어떻던가요?”

“더 말할 것도 없이 침울했죠. 그래도 잘 달래 주었어요. 부인께 인사도 잘 드렸고요.”

운은 소노부의 사정이 급박하여 함께 이리 부인의 빈소를 찾지 못했다. 그도 부인에게 많은 신세를 진 사람이니 사정이 있었다 하더라도 마음이 많이 무거울 터였다.

“제 몫까지요?”

“그럼요.”

“그럼 됐습니다. 부인께서도 이해하시겠죠.”

그렇게 말하며 작게 미소 지은 운이 자리에 앉으며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저와 지설 님과 황후마마라…….”

운이 나와 지설을 차례로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모인 사람을 보니 목적이 뭔지 대충 알 것 같군요.”

“그렇다면 얘기가 쉽겠어요.”

나는 웃으며 지설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는 운이 등장한 이후 그답지 않게 긴장해 뻣뻣하게 굳어 있는 상태였다.

그 모습을 보았는지 운의 시선도 나를 따라 지설을 향했다. 나는 그때를 틈타 눈을 부라리며 지설을 재촉했다.

‘말해요. 어서.’

나의 재촉에 지설이 긴 한숨과 함께 어려운 이야기를 시작했다.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짐작이야 가지만…… 우선 말해 보십시오. 부탁하고 싶으시다는 게 뭔지.”

“제 서신을 영 아가씨께 전해 주셨으면 합니다. 경계가 예전보다 더 삼엄해져 저희 쪽 사람이 들어갈 방도가 없더군요.”

지설이 미리 준비해 둔 서신을 운에게 내밀었다. 운은 제 앞에 내밀어진 서신을 빤히 보다 지설을 향해 물었다.

“서신의 내용이 궁금한데요.”

“……짐작하고 계시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영 아가씨를 데려가려고 해요. 더 이상 그곳에 둘 수 없겠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어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셨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영이의 혼담이 폐하께 위협이 되니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사내로서 영이의 혼인을 두고 볼 수 없기 때문인지.”

운의 질문에 지설이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어느새 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폐하를 위해서이기도, 저를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역시 영 아가씨 아닙니까.”

지설이 주먹을 꽉 쥐며 고개를 들어 다시 운을 바라보았다.

“아가씨께서 좋은 사내와 기꺼운 마음으로 혼인하신다면 저는 막을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아가씨께서 아비의 욕심 때문에 이용당하고 있는 것뿐이라면…… 그건 그냥 둘 수 없어요. 하여 아가씨의 뜻을 묻고자 합니다. 도와주시겠습니까?”

이번에는 지설이 운에게 물었다. 잠시 지설을 바라보며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운이 조금 곤란한 얼굴로 입을 뗐다.

“생각보다 저택 내에서 운신이 어렵습니다. 제가 움직일 때마다 경계와 감시의 시선이 따라붙죠. 그건 영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아이는 아예 방에서 나오질 못해요. 서신 정도야 어떻게 전해 볼 수 있겠지만, 빠져나오는 것이 가능할지…….”

“감금을 당했다는 겁니까?”

지설의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이를 바드득 갈며 분노로 어쩔 줄 모르는 지설의 모습에 운이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지설 님이 좋은 분이라는 걸 압니다. 영이를 얼마나 좋아하시는지도 알겠고요. 처음 두 사람의 마음을 알게 되었을 때는 당황했지만, 결국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습니다. 누이를 둔 오라비가 이렇게 상대를 인정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르실 겁니다. 그 어려운 걸 할 정도로 전 지설 님을 믿습니다. 그간 함께 일해 온 정이 있는데요.”

따뜻한 말에 분위기가 풀어진 것도 잠시뿐이었다. 곧 운의 얼굴이 심각하게 변한 까닭이었다.

“하지만 이번 일은 어떨까요. 그 삼엄한 감시를 뚫고 영이를 데리고 나오실 수 있겠습니까? 실패하면 상황이 더 나빠질 겁니다. 아버지께서 더 극단적으로 움직이실 거예요.”

해서천은 무도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마지막 패를 빼앗기게 생긴 사람이 무슨 일을 벌일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러니 반드시 성공할 계획이 필요했다. 두 번의 기회는 없었다.

“계획은 내가 가지고 있어요.”

나는 팽팽하게 대치하고 있는 두 남자 사이에 끼어들어 입을 열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계획이요? 제게 그런 말씀은 없으셨잖습니까.”

지설이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자리에 나오기 전까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계획이니 그가 모르는 것도 당연했다.

“오래 고민하다 이제 결론을 내렸거든요. 이게 가능할 거라고.”

두 사람이 어서 말해 보라는 듯 눈빛으로 나를 재촉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하고 있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산 사람을 빼내 오긴 힘들어도 죽은 사람을 빼내 오긴 쉬워요. 감시가 덜할 테니까요. 소노부의 고추가가 아무리 무도한 사람이라고는 하나 죽은 사람의 시신까지 삼엄하게 감시하는 미친 사람은 아니겠죠. 그러니 영이를 죽이면 모든 것이 간단해져요.”

내 말에 운과 지설이 얼빠진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한참이나 말을 잇지 못하던 운이 골치 아프다는 듯 제 머리를 짚었다.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말 그대로 영이를 죽여서 빼내 오자는 뜻이에요.”

“죽, 죽여…….”

황당함에 혀를 씹은 지설이 곧 진지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우희 님. 제정신이십니까?”

다짜고짜 사람을 죽여서 빼내 오자 했으니 저런 질문이 나올 법도 했다.

나는 두 사람의 오해를 풀기 위해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정확히 말하면 사람들이 죽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거예요. 탕약으로 숨과 맥을 극도로 미약하게 만들어서 의원을 속이면 돼요. 의원이 속을 정도라면 다른 사람들은 당연히 속아 넘어갈 거고요.”

내 말에 운과 지설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게 가능합니까?”

“가능해요. 쉬운 일은 아니지만요.”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두 사람을 향해 웃었다.

“다행히 전 영이의 몸을 아주 잘 알아요. 약재에 대해서는 더 잘 알고요. 성공할 수 있어요, 내 계획. 물론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 어찌 영이를 데리고 나올지는 지설이 고민해야 돼요. 내 지식은 의술이 전부니까요.”

확신에 찬 나의 표정에 지설과 운의 얼굴이 진지하게 변했다.

“지금 같이 엄청난 경계만 아니라면 사람을 빼내 올 수 있는 방법은 많습니다. 비로의 특기죠.”

지설의 말에 잠시 생각하던 운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 분의 계획을 믿고 영이에게 서신을 전하겠습니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지설이 내민 서신이 들려 있었다.

“감사합니다. 도와주셔서.”

지설이 고개 숙이며 인사하자 운이 픽 하고 웃었다.

“영이를 위한 일이라면 돕는 게 당연합니다. 그리고 영이의 일이라면 그 아이가 결정하도록 해야죠. 제가 마음대로 판단해 지설 님의 제안을 자르는 건 말도 안 됩니다.”

“……좋은 오라버니이시군요.”

“그리되려고 노력 중이죠. 그럼 저는 답신과 함께 돌아오겠습니다.”

그렇게 운이 떠나고 며칠 후.

그는 약속처럼 영의 답신과 함께 궁을 찾아왔다.

영의 답신은 짧고 명확했다.

[떠나겠습니다.]

그렇게 영을 소노부 밖으로 데려오기 위한 계획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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