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장. 고별(告別)
겨울을 알리는 눈과 함께 남쪽에서 슬픈 소식이 들려왔다. 연초부터 투병 생활을 하던 이리 부인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추운 겨울, 외로운 내 곁을 지켜 주었던 사람이 세상을 떠나다니.
먼 곳에서 날아온 부고에 가슴 한구석이 베여 나간 듯 아릿했다.
왕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으니, 신라와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고구려가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사절을 꾸려 신라로 보낸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담덕을 찾아갔다.
“곤란해.”
집무실로 들어서는 나를 보자마자 담덕이 단호하게 말했다.
“나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무슨 말을 할지 뻔히 아니까 들을 필요도 없어. 신라에 가고 싶다는 이야길 하러 온 거잖아?”
정확한 예측에 입이 꾹 다물렸다.
나는 이제 한 나라의 황후였다. 함부로 거동을 할 수 없는 몸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우희로서의 인연을 모두 묻어 두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닌 이리 부인이었다. 나를 딸처럼 여기며 따뜻하게 대해 주었던 사람의 죽음을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어차피 사절을 보낼 거잖아. 거기에 함께 가면 돼.”
“황후가 조문을 가는 건 과해.”
“정체를 숨기고 가면 되지.”
“그게 쉬운 일이야?”
“어차피 서를 보낼 거잖아. 그럼 자연스레 절노부 사람들이 사절로 꾸려질 테고, 절노부 사람들은 기꺼이 내 정체를 숨겨 줄 거야. 그럼 문제없잖아.”
서는 실성이 볼모로 지내는 동안 말벗을 하며 그와 상당한 친분을 쌓았다. 신라의 사절로 가장 먼저 그의 이름이 꼽히는 건 당연했다.
물 흐르듯 술술 이어지는 말에 담덕의 눈이 가늘어졌다.
“너 혼자 생각한 게 아닌 것 같은데. 누가 도움을 줬어?”
“티 났어?”
“당연하지. 제신? 지설? 누구야, 네 공범이?”
담덕이 기다렸다는 듯 용의자들의 이름을 줄줄 내뱉었다.
“비밀이야. 난 의리가 있으니까.”
“그리 말하는 걸 보면 지설이군.”
겨우 한마디를 했을 뿐인데 담덕이 단번에 정답을 말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신라로 가면 난 당연히 호위를 붙일 거야. 그럼 지설이 그 역할을 자처해 따라갈 생각이었겠지. 거기 가서 실성에게 무릎이라도 꿇을 생각이래? 영과 혼인하지 말아 달라고?”
“설마. 지설 성격에 그럴 것 같지는 않은데.”
“어쨌거나 해영의 혼담 때문에 신라로 가겠다는 거군.”
“……비밀로 하자고 지설하고 굳게 약속했는데.”
내게 수를 알려 준 사람의 정체도, 그 사람의 목적도 모두 들켜 버렸다.
허무하게 모든 패를 잃어버린 내가 황망하게 눈을 깜빡이니 담덕이 다시 한번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이리 부인을 특별하게 여기는 거 알아. 나도 그분께 감사하고 있고. 내가 없는 동안 너와 연이를 잘 보살펴 주신 은혜는 결코 잊을 수 없지.”
거기까지 말한 담덕이 고민하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내 팔을 끌어당겼다. 나는 익숙하게 그의 무릎 위에 앉았고, 담덕 역시 자연스럽게 내 머리에 제 턱을 괴었다.
“우희.”
“응.”
“난 널 궁 밖으로 보내는 게 무서워.”
“왜?”
“또다시 네가 사라질까 봐.”
“내가 그럴 것 같아?”
“아니. 하지만 넌 그때도 그랬어. 사라질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췄지.”
담덕은 종종 그때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죄인의 심정으로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주억거릴 뿐이었다.
“왜 그런 얼굴이야?”
풀 죽은 내 모습에 담덕이 낮게 웃었다.
“미안해서. 이유가 무엇이든 널 떠날 생각을 한 게.”
“내가 더 미안하지. 내 곁에 널 두려는 욕심에 네가 위험해졌었는데.”
“그게 왜 욕심이야? 나도 항상 그런 생각을 하는걸. 널 내 곁에 두고 싶다고. 대고구려의 태왕 폐하를 그런 식으로 묶어 두고 싶다고 생각하는 건 좀 건방진 생각인가?”
“넌 유일하게 내게 건방질 수 있도록 허락받은 사람이잖아. 마음껏 욕심을 부려도 좋아.”
“그것 참 감사한 허락이네. 그럼 나도 권리를 줄게. 담덕 너도 마음껏 욕심부려.”
나는 고개를 돌려 담덕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가벼운 입맞춤을 하려고 했을 뿐인데 담덕이 멀어지려는 내 뒤통수를 붙잡아 입안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언제부턴가 담덕은 나를 잡아먹을 것처럼 입을 맞췄다.
뒤통수를 붙잡고 있던 손이 목을 타고 내려가 등을 쓸어내리고, 한껏 가까워진 몸에 닿은 열기가 뜨겁게 느껴졌다.
이제 나는 여기서 무엇을 하면 이 사내를 더 부추길 수 있는지 안다. 이 사내를 부추기면 이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잘 안다.
그래서 손을 뻗을 수가 없다. 조금만 손을 뻗으면 이 남자는 그때부터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하니까.
그걸 아니까 절대로 손을 뻗지 않은 건데.
내 노력이 무색하게도 담덕의 손이 순식간에 옷 속으로 파고들었다.
“읏! 왜……!”
나 아무것도 안 했는데!
억울함을 토로했지만 입은 막혀 있고 손은 저지당했다. 도대체 어떤 부분이 오늘 이 남자를 자극해 버린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런 내 불만을 눈치챘는지 담덕이 슬쩍 입술을 뗐다.
“억울해 하지 마. 네가 먼저 시작했잖아.”
담덕이 말할 때마다 입술이 간질거렸다.
“난 그냥 입맞춤만 하려고……!”
“누구 마음대로? 마음껏 욕심부리라며. 그래서 그러고 있잖아.”
그 말 때문에 이러는 거라고?
무엇이 담덕을 자극했는지 비로소 깨달은 나는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했다.
앞으로는 말도 조심해야지.
* * *
신라와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는 있으나 두 나라 사이에는 분명한 상하 관계가 있었다. 고구려가 위, 신라가 아래였다.
이를 고려해 조문 사절은 간소하게 꾸려졌다. 실성과 친분이 깊은 서와 담덕의 측근인 지설을 중심으로 절노부 사람 몇 명이 더 추가되었다. 나 역시 그 ‘절노부 사람 몇 명’ 중 하나로 신라에 가게 되었다.
적당한 핑계를 대기 위해 나는 먼저 담덕과 함께 평양성으로 원행을 떠났다. 평양성에서 빠져나와 사절에 합류한 뒤,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담덕과 함께 국내성으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계획대로 나와 담덕은 사절들보다 먼저 평양성에 내려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설 일행이 근처에 다다랐다는 소식도 도착했다.
“태림도 데려가.”
평양성을 떠나는 날 담덕이 내 앞에 태림의 등을 떠밀었다.
이미 지설이 빠져나가 그의 호위에 구멍이 난 상황이었다. 여기서 대단한 호위를 하나 더 늘릴 필요는 없었다.
나는 놀라서 손을 내저었다.
“말도 안 돼. 그럼 넌 누가 지켜?”
“난 내가 지켜. 내가 고구려 땅에서 누구한테 칼이라도 맞을 사람처럼 보여?”
담덕이 팔짱을 끼며 위압적인 태도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바위보다 크고 단단해 보이는 이 사내를 다치게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거야.”
나는 다시 태림의 등을 떠밀어 그를 담덕 옆에 세웠다.
“태왕 폐하가 호위도 없이 원행을 나오는 경우가 어디 있어? 태림은 폐하를 지켜요.”
태림을 향해 신신당부를 하고 있으니, 담덕이 다시 태림을 떠밀어 내 옆에 세웠다.
“아니. 넌 우희를 따라가.”
“난 됐다니까. 이미 지설이 있잖아.”
“외부로 떠날 때는 더 조심해야지. 태림까지 데려가.”
“너도 지금 외부에 나와 있잖아!”
“난 근위대원들이 있어.”
“그걸로는 부족해. 그렇게 따지면 나도 절노부 사람들과 함께야. 우리 절노 사람들의 무력을 무시하는 거야?”
“그러는 너야말로 근위대원들의 실력을 무시하는 거냐?”
말 한마디를 할 때마다 태림이 내 앞으로, 또 담덕 앞으로 떠밀렸다.
끝날 줄 모르는 실랑이를 듣고 있던 태림이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두 분, 그만하시죠. 저는 물건이 아닙니다.”
태림의 말에 나와 담덕의 손이 동시에 그에게서 떨어졌다.
이리저리 떠밀리느라 단정하던 태림의 옷이며 머리가 엉망이었다. 나는 미안해져 어색하게 웃으며 구겨진 그의 옷을 펴 주었다.
“이러다가는 끝이 없겠습니다. 어떤 분을 지킬지는 제가 결정하죠. 두 분 모두 이의 없으십니까?”
묘하게 박력이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나와 담덕을 번갈아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우리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결론은 간단하게 났다. 태림의 선택은 나였다.
“왜 폐하를 지키지 않고요?”
“전 폐하의 사람이니, 폐하의 명을 따릅니다. 당연한 결정이지요.”
도압성으로 떠나는 길에 들었던 말과 똑같았다.
그때도 태림은 자신이 누구를 지키고 싶은지보다 명령을 따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했었지.
“늘 느끼는 거지만…… 태림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네요. 항상 푸른 소나무처럼 한결같은 사람이라고 할까? 안정감이 있어요.”
“그렇습니까? 저는 꽤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했는데요.”
“뭐…… 예전보다 자기주장이 강해지긴 했죠. 요령도 조금 생겼고.”
조금 전 박력 있게 선언하던 태림을 떠올리며 고개를 주억거리자, 그가 민망한 듯 뒷목을 긁적였다.
“그건 두 분께서 끝없이 다투시니까…….”
“그러니까 달라졌다는 거죠. 예전 같았으면 어쩔 줄 모르고 발만 동동 굴렀을걸요.”
“그런 사람이었습니까, 제가?”
“그런 사람이었어요, 확실히.”
내 말에 태림이 멋쩍게 웃었다.
계속 이 이야기를 했다가는 말을 꺼낼 때마다 태림이 민망해할 것 같았다. 나는 너그럽게 다른 화제를 입에 올리기로 했다.
“일행과는 어디서 합류해요?”
내 질문에 태림이 반가운 얼굴로 재빨리 대답했다. 역시 민망한 이야기를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멀지 않습니다. 평양성 외곽의 사찰에서 합류합니다.”
“사찰이라면……?”
“즉위 초기에 폐하께서 세운 곳이지요. 그때 평양성에 직접 내려와 터도 보셨잖습니까.”
그곳이라면 기억에 있었다.
“맞아요. 사냥 대회를 핑계로 사찰 터를 보러 왔었죠. 그때 전 호랑이도 때려잡고…… 벌써 시간이 그렇게 지났구나.”
마지막 말은 혼잣말에 가까웠다. 주변을 둘러보며 감탄하는 내게 태림이 설명을 덧붙였다.
“평양성에는 총 아홉 개의 사찰이 있습니다. 일행과 만나기로 한 곳은 그중에서 가장 규모가 작은 곳이고요.”
성 하나에 사찰이 9개나 된다는 건 일반적이지 않았다. 담덕은 평양성을 귀하게 쓸 생각으로 즉위 초기부터 이 부근에 사찰을 지은 것이다.
장수왕 때에는 평양성으로 도읍을 옮기기까지 하니까 이곳이 보통 땅은 아니지. 아, 그렇다는 말은 나중에 연이가 이곳에서 살게 된다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니 또 기분이 남달랐다.
“이제 거의 다 도착했습니다.”
묘한 기분에 휩싸여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내게 태림이 도착을 알렸다. 그와 동시에 멀리서 누군가가 내 이름을 크게 외쳤다.
“연우희!”
목소리만 듣고도 나는 단번에 그의 정체를 알아챘다.
“연서!”
나와 함께 국내성에 발을 들였던 장난꾸러기 사촌 서였다. 나는 활짝 웃으며 사찰 입구에서 손을 흔드는 서를 향해 달려갔다.
“오래 기다렸어?”
“아니. 우리도 조금 전에 도착했어. 다행히 시간이 잘 맞았네. 정말 오랜만이다!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이야!”
“내가 함께 사절로 갈 줄은 몰랐지?”
“상상이나 했겠어?”
나와 서는 서로의 손을 붙잡고 제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이렇게 서와 얼굴을 마주 보고 대화하는 것이 상당히 오랜만이었다.
태학 교육이 마무리되고 실성마저 신라로 떠난 뒤, 서는 국내성에 남을 이유가 없어져 절노부의 영토로 돌아가 있었다. 생각지 못한 이리 부인의 부고가 아니었다면 그가 다시 절노부 땅을 벗어날 일은 없었을 것이다.
“아차. 이제 이렇게 널 격의 없이 대하면 안 된다고 하셨는데.”
나와 함께 방방 뛰던 서가 어색하게 웃으며 슬그머니 내 손을 놓았다.
“백부께서 그리 말씀하셨어?”
“아버지가 아니면 누가 그러겠어?”
서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오래전, 담덕과 혼인을 약속한 이후로 나를 대하는 백부의 태도는 많이 달라졌다. 말을 조심하고 예의를 차리기 시작했다.
백부는 제신과 서를 비롯한 절노부 식구들에게도 그런 태도를 종용했다.
하지만 얌전히 그의 말을 들을 성실한 자는 이 집안에서 손에 꼽을 정도였다. 물론 서는 그 ‘성실한 자’가 아니었다.
“반가워할 만큼 다 반가워해 놓고는 이제 와 격식을 차리겠다고?”
“그건 또 그래.”
조금 전까지 걱정했던 건 모두 잊었다는 양 서가 다시 웃으며 내 손을 붙잡았다.
“어찌 지냈어? 태왕 폐하와 황후마마의 금슬이 좋다는 소문이 절노부 땅까지 자자하니 걱정은 안 하지만.”
“단순한 소문이 아닙니다.”
서의 질문에 그의 뒤에서 나타난 지설이 대신 대답했다. 그는 질렸다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때는 두 분이 혼약한 사이라기엔 너무 어색하다고 걱정을 했는데, 혼인을 하고 나니 이제는 너무 부부다워서 걱정입니다. 폐하께서 그렇게 변하실 줄은 몰랐죠.”
“그렇게라뇨?”
“일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분인 줄 알았거든요. 일을 좋아하시는 줄 알았고요. 근데 요즘은 종종 일하기 싫다는 말씀을 하시죠. 그럴 때마다 제가 얼마나 곤란해지는지 모르실 겁니다.”
“우리 폐하는 조금 쉬어도 돼요. 매번 전쟁에, 내치에…… 이 나라는 담덕을 너무 부려 먹는다고요.”
“그러라고 있는 자리입니다, 태왕은.”
지극히 당연한 지설의 말에 입이 꾹 다물렸다. 어떻게든 담덕의 과중한 업무가 부당하다 말하고 싶었지만, 이 시대의 군주란 원래 그런 역할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혼자 오신 게 아니군요.”
“우리 폐하께서 나 혼자만 보낼 리가 없잖아요.”
“그렇긴 합니다만…… 태림과…….”
지설이 떨떠름한 얼굴로 태림이 서 있을 내 뒤를 살폈다. 그는 복잡한 얼굴로 몇 번이나 입을 달싹이다 결국 제 머리를 헤집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튼 두 분께서도 충분히 반가워하신 듯하니 이만 출발할까요? 조문을 위한 사절이니만큼 최대한 빠르게 움직여야 합니다. 길은 미리 확인해 두었습니다. 안으로 들어가 설명을 들으시겠습니까?”
지설이 사찰 안쪽을 가리켰다. 지도를 펼쳐 놓고 앞으로 어떤 길을 가게 될지 설명을 하려는 듯했다. 하지만 나는 선선히 고개를 저었다.
“지체할 시간이 없는 거 아니었어요? 지설의 계획이라면 확실할 테니 바로 출발하죠.”
내 대답에 지설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리 말씀하실 줄 알았습니다.”
“……그럴 줄 알았다면서 왜 물어봤어요?”
“저는 예의범절을 상당히 중시하는 축이라. 높으신 분의 의견에는 언제나 귀를 기울입니다.”
“퍽이나 그렇겠어요.”
나는 황당해져 웃으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이번 신라 사절에는 절노부 장수로 합류한 것이니 높으신 분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지설이 일행을 이끌어 줘요. 황후마마라고 부르지도 말고요. 그냥 우희 아가씨로 충분해요.”
지설은 단 한 번의 사양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오랜만에 옛날로 돌아간 기분이 들겠군요. 일행들에게도 이야기해 두지요.”
* * *
일행은 길을 서둘러 신라로 향했다. 해가 떠 있는 동안에는 달리고, 해가 떨어지면 멈춰서 가까운 마을에 신세를 졌다.
지설은 일행들의 체력을 고려해 야영을 최소화하려고 했지만, 그것이 불가능한 날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꼼짝없이 산에서 자리를 펴고 하늘을 이불 삼아 잠을 자야 했다.
그런 강행군 탓에 그간 편안함에 길들어 있던 몸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승마에는 자신이 있었으나 하루 종일 말을 타고 있는 건 또 다른 문제여서 갈수록 다리며 허리가 아파 왔다.
오래전 도압성에 갈 때도 이랬던가?
아마 그때도 이렇게 힘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너무 오래전의 기억이라 미화되거나 희미해져 버린 부분이 있어 이렇게 힘들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다.
게다가 그사이에 몸이 늙어 버린 것도 있지.
한참 기세 좋고 체력 든든한 10대와 서서히 저물어 가는 20대의 몸 상태가 같을 리 없다.
나는 새삼 젊은 시절을 그리워하며 한탄했다. 물론 나보다 훨씬 오랜 세월을 살아온 어르신들이 들으면 코웃음을 칠 한탄이었지만 말이다.
“오늘은 여기서 쉬어 가시죠.”
지쳐서 말에 드러눕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즈음. 가장 앞에서 대열을 이끌던 지설이 손을 들어 일행을 멈춰 세웠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말을 멈추자마자 굴러떨어지다시피 말에서 내려왔다.
“위험합니다.”
놀란 태림이 재빨리 나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나는 손을 저어 그의 도움을 사양했다.
“괜찮아요. 쓰러질 정도로 힘든 건 아니에요. 그냥 더 이상 말 위에 있고 싶지가 않다는 정도지.”
나는 질린 얼굴로 말을 바라보았다. 훌륭하고 순한 말이었지만 며칠째 험한 길을 함께 달리다 보니 이런 눈빛이 절로 나왔다.
“오늘은 저쪽 동굴에서 쉬면 될 듯합니다.”
태림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 쉴 곳을 찾아낸 지설이 근처의 동굴을 가리켰다. 우리는 동굴 앞 나무에 말을 묶어 두고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동굴이라. 옛날 생각이 나네요.”
바닥을 정돈하는 일행들을 도우며 동굴 내부를 둘러보니 태림이 웃으며 대꾸했다.
“도압성으로 향하던 길에도 동굴에 머물렀지요.”
“그때 늑대들의 습격을 받았고요. 오늘은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괜찮습니다. 이번에는 큰 소란이 없을 겁니다.”
태림이 바깥을 힐끗거리며 제법 확신에 찬 말투로 말했다. 조심성 많은 태림이 이렇게 확신하는 건 흔치 않아서 나는 의아해졌다.
“왜요? 늑대가 겨울잠이라도 자나요?”
“늑대는 겨울잠을 자지 않습니다. 오히려 겨울철에는 먹잇감이 부족해서 민가에까지 내려와 사람들을 괴롭히고는 하지요.”
“그런데 오늘은 왜 큰 소란이 없을 거라고 생각한 건데요?”
“그건…….”
내 말에 태림이 곤란한 얼굴로 다시 바깥을 힐끗거리기 시작했다.
“밖에 도대체 뭐가 있기에 그래요? 뭐 특별한 거라도 있어요?”
덩달아 밖을 힐끗거리니 태림의 얼굴이 더욱 곤란해졌다.
“아가씨.”
곤란해하는 태림을 도와주려는 것인지, 아니면 단지 때가 좋았을 뿐인지 지설이 조용히 나를 불렀다.
“네.”
“이쪽에 불 피우는 것을 도와주시겠습니까?”
주변을 살피니 다들 자리를 펴느라 정신이 없어 마른 나뭇가지 더미 앞에는 지설 하나뿐이었다.
“태림. 자네는 마른 나뭇가지를 더 구해 오고. 하룻밤을 따뜻하게 보내려면 이 정도 나뭇가지로는 택도 없겠어.”
“그리하죠.”
태림이 개운한 얼굴을 하곤 서둘러 동굴을 나섰다. 순식간에 홀로 남겨진 나는 도움을 청한 지설의 곁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뭐 숨기는 거 있어요?”
지설의 곁으로 다가가 나뭇가지를 단단히 붙들며 묻자 그가 시치미를 떼며 주머니에서 수리취로 만든 부싯깃을 꺼냈다.
“뭘 숨기다뇨?”
지설이 나뭇가지 위에 부싯깃을 얹고 부싯돌을 부딪치자 작게 불길이 튀었다. 그 위로 입바람을 부니 금세 불길이 일어 나뭇가지에 옮겨붙었다.
나는 서둘러 고정하고 있던 나뭇가지에서 손을 떼며 크게 일어난 불길을 바라보았다. 일렁거리는 불길에 얼었던 손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아니, 그렇잖아요. 바깥에 뭐라도 있는 사람들처럼 내가 밖을 볼 때마다 움찔거리는데.”
“그랬습니까?”
“그랬어요.”
하지만 지설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말하기 싫다면 어쩔 수 없지만요.”
어차피 지설이나 태림이 내게 나쁜 일을 할 리가 없다. 나는 찜찜한 기분을 애써 억누르며 바깥을 힐끗대던 눈길을 모닥불에 고정했다.
* * *
새벽부터 바람이 강하게 불었다. 동굴 안까지는 바람이 침범하지 못했지만 요란한 소리마저 막을 수는 없었다.
잠자리가 불편한 와중에 소리까지 요란하니 더 이상 눈을 붙이고 있을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깊은 잠에서 깨어나 새벽녘에 눈을 뜨고 말았다.
“왜 벌써 일어났어? 아직 순서가 되려면 멀었는데.”
부스럭거리며 일어서니 불침번을 서고 있던 서가 모닥불을 뒤적이며 물었다.
“바람 소리가 시끄러워서 깼어. 지설은?”
분명히 서와 지설이 함께 불침번을 서기로 했는데, 아무리 동굴을 둘러봐도 지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 잠시 밖을 둘러보겠다고 나갔어.”
“추울 텐데.”
“그러니까 말이야. 이 추위에 밖으로 나설 생각이 들다니. 용사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해하기 힘들다니까.”
서는 무를 숭상하는 고구려에서는 보기 드문 백면서생이었다. 어려서부터 검이나 활에는 흥미를 붙이지 못하더니 태학에서도 글공부만 열심히 했다.
오래전이라면 그런 자들을 향해 손가락질하는 사람이 많았겠으나, 유학을 들여온 후 글공부를 하는 사람들에 대한 시선도 많이 나아졌다. 백부나 하 역시 서가 검이나 전쟁을 모른 채 어릴 적의 천진함과 자유로움을 그대로 가지고 살아가기를 바랐다.
덕분에 서와 나는 통하는 구석이 많았다. ‘용사’들이 ‘용사’들만의 감정을 공유하듯, 우리 ‘서생’들도 ‘서생’들만의 감정을 공유했다. 몸부터 움직이는 용사와 머리부터 굴리는 서생은 사고방식이 완전히 달랐다.
하지만 서는 나와 자신이 다르다며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그래도 우희 넌 반 서생, 반 용사지.”
“반 서생 반 용사? 그 이상한 말은 또 뭐야?”
“말 그대로야. 넌 능력치를 따지면 서생이지만, 사고방식을 따지면 용사에 가깝잖아. 제대로 머리를 굴리기 전에 몸부터 던지는 편이라고 할까?”
“그거 상당히 안 좋게 들리는데. 능력도 없으면서 몸부터 나간다는 뜻 아니야?”
“음. 그보다는…… 생각보다 마음이 앞선다고 해 두자.”
“그것도 그리 좋게 들리진 않거든!”
다른 사람이 깰까 봐 낮게 소리쳤더니 서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이것 봐. 이리 발끈하는 것도 용사들의 특징이라고.”
“넌 지금 우리 고구려의 10만 용사들을 모욕했어.”
“10만 용사? 묘하게 구체적인 숫자잖아!”
다시 한번 웃음을 터트린 서가 바깥을 힐끗거렸다.
“그런데 지설 님이 돌아올 생각을 않는걸. 곧 다음 불침번 시간인데.”
“지설이라면 무슨 일이 생겼을 거라는 걱정은 없지만…….”
영의 혼담 이야기로 요즘 지설의 속이 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걱정이 되었다.
혼자 속앓이라도 하고 있는 걸까?
역시 지설을 혼자 두는 것이 내키지 않아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설을 데려올게. 일행을 이끄느라 고생이 많은데 잠시 쉬기라도 해야지. 나간 김에 나뭇가지도 좀 더 주워 오고.”
다 떨어져 가는 나뭇가지를 가리키며 말하자 서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걱정스럽게 물었다.
“너 혼자 괜찮겠어?”
“바로 앞에 나가는 것뿐인데 뭐. 다들 피곤한데 깨우기는…….”
나야 절로 눈이 떠졌다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니었다. 나와 함께 다음 불침번을 맡은 절노부 청년을 보니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서도 그의 얼굴을 보더니 이해한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건 그래.”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금방 돌아올게.”
나는 동굴 밖으로 나서며 활과 화살을 챙겼다.
완벽하게 다루지는 못하지만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밖으로 나서자마자 날 선 바람이 얼굴을 할퀴었다. 그래도 북쪽의 바람에 비하면 봄바람 수준이었다. 요란한 소리에 비해 차가움이 덜해서 다행이었다.
나는 옷을 여미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멀리 가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근처를 아무리 둘러봐도 지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지설 찾기를 잠시 뒤로 미뤄 두고 나뭇가지를 줍기 시작했다.
눈 내리지 않는 겨울에는 마른 나뭇가지 찾는 일이 쉬웠다. 나는 금세 한 무더기 나뭇가지를 모아 품에 끌어안았다.
이제 지설만 찾으면 되는데.
품에 나뭇가지를 가득 안고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여전히 지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무거운데…….”
슬슬 품에 가득 안은 나뭇가지가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먼저 돌아가서 나뭇가지를 내려놓을까, 좀 더 지설을 찾아볼까 고민하고 있으니 멀리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지설? 거기 있어요?”
인기척이 느껴지는 곳을 향해 지설을 불렀지만 상대는 대답이 없었다. 잘못 느꼈나 싶어 인기척을 느꼈던 곳을 향해 고개를 쭉 빼니 역시 검은 옷자락이 눈에 들어왔다.
잘못 본 게 아니었구나.
나는 반가움에 웃으며 지설을 향해 걸어갔다.
하지만 아무리 걸어도 지설이 가까워지지 않았다. 눈앞에 검은 옷자락이 나를 약 올리듯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도대체 뭐 하자는 거람?
나는 황당해져 헛웃음을 흘렸다.
“뭐야. 숨바꼭질이라도 하자는 거예요?”
지설을 향해 소리쳤지만 이번에도 돌아오는 말은 없었다. 이렇게까지 반응이 없으니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설이라면 이 정도 거리에서 내 목소리를 못 들을 리도, 내 기척을 느끼지 못할 리도 없어. 그런데 계속 이렇게 도망간다는 건…….
순간 가슴이 싸해졌다. 추위보다 더한 오싹함이 온몸을 훑고 지나가는 순간.
“아가씨? 여기에서 뭐 하십니까? 안에 안 계시고.”
뒤에서 지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으악!”
“악!”
지설의 목소리라는 걸 인식하면서도 너무 놀란 나머지 입에서 비명이 나왔다. 덩달아 놀란 지설도 나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우리 두 사람의 비명 소리가 으악-, 악-, 하고 산을 울렸다. 나는 힘이 빠져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으며 뒤에서 나타난 지설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뭐 하는 거예요!”
“아가씨야말로 뭐 하시는 겁니까? 다짜고짜 사람 얼굴에 대고 비명을 지르시다뇨.”
“어이없는 장난을 치니까 그렇죠! 어린애도 아니고 이런 장난은 됐거든요!”
“장난이라뇨? 제가 무슨 장난을 쳤다고 그러십니까?”
지설이 주저앉은 나를 일으켜 세우며 내 품에 있는 나뭇가지를 받아 들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나를 보는 얼굴에 거짓은 없어 보였다.
“장난 안 쳤다고요?”
“그러니까 무슨 장난이요?”
“그게…… 그러니까…… 저기서 지설이 도망가면서…….”
나는 조금 전까지 지설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있던 곳을 가리키며 횡설수설했다.
“제가요? 저기서요?”
지설이 무슨 헛소리를 하냐는 듯 나를 보았다. 나는 할 말이 없어져 입을 떡 벌렸다.
그럼 그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은 누구지? 지설이 아니었나? 아니, 애초에 사람이기는 했나?
마지막 결론에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귀신…… 나 귀신에 홀렸나 봐요!”
“……아까부터 무슨 헛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도대체.”
지설이 한숨을 내쉬며 턱짓으로 동굴 쪽을 가리켰다.
“귀신님은 아가씨의 비명에 놀라 도망치신 것 같으니, 이만 동굴로 돌아가시지요.”
“헛소리가 아니라 진짜 뭐가 있었다니까요.”
“예, 예. 알겠습니다.”
알겠다고 말하면서 전혀 내 말을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있었다니까요! 귀신인지 사람인지!”
“예, 예. 알겠다니까요.”
지설이 허공을 향해 삿대질하는 나를 귀찮다는 듯 질질 끌었다.
동굴로 돌아와 있었던 일을 설명했더니 서가 놀라서 펄쩍 뛰었다.
“뭐? 귀신?”
동그랗게 뜬 눈을 몇 번 깜빡이던 서가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코흘리개 어린애도 아니고 무슨 귀신 타령이냐?”
“정말이라니까! 정말로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잠에서 덜 깼구나. 불침번은 내가 대신 설 테니 조금 더 자련?”
서가 한껏 인자한 얼굴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말 그대로 코흘리개 어린애를 달래는 손길이었다.
“연서!”
“왜, 연우희?”
발끈해서 서의 이름을 부르니 그가 시큰둥한 얼굴로 손을 휘휘 내저었다.
“실없는 소리 할 거면 난 그만 잔다. 귀신이 우리 동굴까지 쳐들어오지 않는지 잘 지켜봐.”
서가 휘적휘적 걸어가 빈자리에 몸을 뉘었다.
“무서우시면 저라도 같이 불침번 서 드릴까요?”
서가 떠난 자리로 지설이 다가왔다. 말은 친절하지만 씨익 웃고 있는 얼굴을 보면 그의 속셈을 알 수 있었다. 나를 놀려 먹고 싶어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됐어요…… 그냥 자요…….”
“그러시다면야. 그래도 정 무서우시면 제 옷자락 정도는 잡고 계셔도 되고요.”
“……계속 그렇게 사람 약 올릴 거예요?”
“아뇨. 더 했다가는 한 대 맞겠군요. 이만 놀리고 자겠습니다.”
지설이 서둘러 제 자리로 돌아가 눈을 붙였다. 모두에게 외면받은 나는 억울한 마음을 다스리며 함께 불침번을 서기로 한 절노부 청년을 깨웠다.
* * *
새벽녘 나의 귀신 소동은 일행들에게 소소한 화제가 되었다. 길이 조금만 으슥해지면 너 나 할 것 없이 내게 ‘아가씨, 귀신이 나타났습니다!’ 하고 놀리는 바람에 나는 씩씩대며 내가 헛것을 본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해명해야만 했다. 물론 내 말을 믿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난 왜 이렇게 하찮은 황후인 거지?
내가 그런 자괴감에 한숨을 내쉬는 동안 일행은 부지런하게 움직여 신라의 왕경에 닿았다.
왕경은 지난 전쟁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져 내가 처음 방문했을 때의 화려함을 회복해 있었다. 곳곳에 복구하지 못한 부분이 있긴 했지만, 한참 전쟁에 시달리던 시절에 비하면 눈에 띄지 않을 정도였다.
우리는 제일 먼저 궁으로 들어가 실성을 만났다. 실성에게 조의를 표하며 담덕이 보내는 선물을 전하니, 그는 크게 고마워하며 우리에게 편히 쉬어 갈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우리는 신라에 오래 머무를 수가 없는 입장이었다. 나와 지설, 태림 모두가 국내성을 길게 비울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한 나라 왕의 제안을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는 일. 우리는 사흘간 신라에 머물렀다가 다시 고구려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실성은 나와 연리의 친분을 고려하여 궁이 아닌 사가(私家)에 거처를 제공했다. 일반적인 예는 아니었으나 궁이 아닌 외부의 거처라면 운신의 폭이 훨씬 자유로웠다. 일행은 기쁘게 실성의 배려를 받아들였다.
“소진 언니!”
연리는 일행들과 함께 들어서는 나를 보자마자 눈물을 펑펑 쏟으며 통곡했다. 오라버니는 궁에 보내고, 어머니는 하늘나라로 떠났다. 이제 연리는 혼자였다.
펑펑 우는 연리를 보고 있으니 아버지를 잃었던 내가 떠올랐다. 나는 온 마음을 다해 그녀를 위로해 주었다.
“언니께서 직접 와 주실 줄은 몰랐어요.”
“어찌 내가 안 와? 부인께서 내게 얼마나 잘해 주셨는데.”
“그래도 이제 언니는 대고구려에서 귀한 분이 되셨으니까…….”
연리가 쭈뼛대며 내 뒤에 선 사람들의 눈치를 살폈다. 나를 얼마나 편하게 대해도 될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평소처럼 해. 귀한 사람으로 이 자리에 온 것이 아니니까. 왕께서도 그걸 아시고 우릴 여기에 보내 주신 게지.”
“여전히 제게는 고구려의 귀한 분이 아닌 소진 언니가 되어 주실 건가요?”
“당연한 말을!”
겨우 진정된 연리가 코를 훌쩍이며 웃었다. 눈꼬리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지만 씩씩하게 말하는 그녀를 보니 마음이 조금 놓였다.
* * *
무덤이 완성되기 전까지 시신은 집 안에 안치해 두는 것이 보통이었다. 높은 계급의 사람들일수록 무덤을 화려하게 꾸미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왕의 어머니인 이리 부인의 묘 역시 만드는 데 시일이 오래 걸렸다.
덕분에 나는 시신이 안치된 곳에서 이리 부인과 마지막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등불만 고요하게 켜진 공간에서 나를 딸처럼 대해 주던 그녀의 명복을 빌고 있으니 마음이 착잡해졌다.
친어머니는 나를 낳다가, 아버지는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었고, 어머니와 같이 여겼던 이리 부인도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이제 내게는 만남보다 헤어짐이 더 많이 남아 있었다. 언젠가 소중했던 사람들을 떠나보내야 한다는 사실이 마음을 어지럽혔다. 이기적인 생각이겠지만 나는 이제 더 이상 소중한 사람들을 잃고 싶지가 않았다.
하지만 전쟁이 일상처럼 반복되는 이곳에서 어느 누구도 잃고 싶지 않다는 건 내 욕심이겠지.
나는 몇 번이고 생각한다.
어째서 이 시대일까? 어째서 이처럼 혼란한 시대에 다시 태어나 매일 불안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질문의 끝은 언제나 공허하다. 돌아오는 답도 없는 질문을 반복하고 또 반복하며, 원망인지 간청인지 알 수 없는 혼잣말만을 되뇔 뿐이다.
“부디 다음 생에도 저와 좋은 인연으로 만나 주세요, 부인.”
나는 생이 이번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소진이었던 내가 다시 우희로 태어났듯 이리 부인 역시 다른 사람으로서 생을 다시 시작할 것이다.
나는 마지막으로 이리 부인의 영전(靈前)에 고개 숙이며 자리를 떠났다.
밖으로 나오니 여전히 공기는 서늘했다. 동그랗게 뜬 달빛마저 시리게 느껴져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숨을 따라 하얗게 입김이 피어올랐다. 흐릿해진 시야를 따라 머릿속까지 아득해졌다.
차가운 물로 세수라도 하고 정신을 차려야겠어.
나는 아파 오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이리 부인의 집 바로 앞의 냇가로 걸음을 옮겼다. 담덕과 재회해 우스운 말다툼을 벌였던 그 냇가였다.
냇가로 와 차가운 물로 얼굴을 씻으니 정신이 조금 맑아졌다. 그렇게 선명해진 정신 사이로 언젠가 느꼈던 묘한 기척이 느껴졌다.
지설은 아니다. 태림도, 연리도 아니었다.
그때, 그 동굴 근처에서 느꼈던 기척!
익숙한 감각에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뒷골을 당기는 묘한 기척에 신경을 곤두세운 채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과연 내가 걸을 때마다 기척이 조용히 따라붙었다.
사람인지, 귀신인지도 모를 기척.
본능적으로 따돌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설이나 태림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해.
냇가에서 처소는 멀지 않았지만 그 짧은 길에 해코지를 할까 봐 걱정스러웠다. 나는 뒤를 신경 쓰며 천천히 걸음을 옮기다, 저택이 확연히 가까워졌을 때 안으로 달음박질을 시작했다.
그러자 뒤에서 나를 따라잡는 기척도 빨라졌다. 심지어 최선을 다해 뛰고 있는 나보다 속도가 더 빨랐다.
나는 순식간에 묘한 기척에 따라잡혔다. 내 어깨를 붙잡는 손길에 비명을 지르려고 했지만, 커다란 손이 내 입을 틀어막는 것이 먼저였다.
비명이 그대로 입속으로 말려 들어갔다.
속으로 삼킨 비명과 함께 몸이 뒤쪽으로 끌려갔다.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는 나를 달래기라도 하듯 상대가 나를 꼭 껴안았다.
“연우희, 나야.”
익숙한 목소리였다. 이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의 목소리. 나는 놀라 발버둥을 멈추고 뒤돌아섰다.
돌아서니 익숙한 얼굴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쉿’ 하고 침묵을 요구하는 사람은 지금 평양성에서 오랜만의 여유를 즐기고 있을 담덕이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어째서 네가 이곳에 있느냐는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멍하니 눈을 껌뻑이는 나를 보며 담덕이 픽 웃으며 입을 틀어막은 손을 내려놓았다.
“미안. 비명을 지르면 소란스러워질까 봐.”
“지금 그런 사과를 할 때야?”
태연한 사과에 나는 황당해져 담덕을 다그쳤다.
“네가 어떻게 여기에 있어? 지금 평양성에 있어야 하는 거 아냐?”
“그렇지. 그런데…….”
나의 추궁에 담덕이 어색하게 웃었다. 말을 잇지 못하는 그를 보며 내 눈이 가늘어졌다.
담덕이 도술이라도 부려 순간 이동을 했을 리도 없고, 결국 나와 비슷하게 평양성을 떠났다는 뜻인데.
“따라온 거야, 따로 온 거야?”
“당연히 따라왔지.”
“언제부터?”
“처음부터.”
“그럼 그 동굴 밖에서 본 검은 옷의 귀신도 너야?”
“검은 옷의 귀신? 동굴 밖에서 널 보고 몸을 숨기긴 했지만…… 내가 귀신인 줄 알았어?”
“그래. 꼼짝없이 귀신인 줄 알았어. 도대체 왜 몰래 따라와서는 몸을 숨긴 거야?”
“거기서 들켰으면 돌아가라고 했을 거잖아. 처음부터 따라간다고 했으면 거절했을 거고. 하지만 난 너 혼자 보내긴 영 불안했거든. 그러니 방법이 없잖아? 몰래 따라가는 수밖에.”
물 흐르듯 술술 흘러나오는 말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쉼 없이 이어지는 말이 어찌나 자연스러웠는지, 잠깐 정신을 놓고 있으면 그의 말이 상당히 논리적이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너무 태연하게 말해서 속아 넘어갈 뻔했어.”
“아쉽네. 잘 넘어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내가 바보야? 이걸 그냥 넘어가게! 도대체 어찌 여기까지 따라온 거야?”
“조금 떨어져서 너희 뒤를 밟았지.”
담덕의 간단한 대답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곤란한 내 질문을 일부러 못 알아듣는 척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걸 묻는 게 아니잖아. 평양성은 어쩌고?”
“어차피 휴양을 핑계로 원행을 나온 거였잖아. 비워도 크게 상관은 없어. 혹시 몰라서 대리 태왕도 세워 두고 왔고.”
“대리 태왕?”
“응. 형오에게 내 옷을 입혀 주고 왔지. 그 녀석이라면 내 행세를 제법 잘할 거야.”
“확실히…… 넉살 좋은 형오라면 가짜 태왕 연기도 잘하겠지만…….”
생각보다 계획이 빈틈없이 진행된 것이 마음에 걸렸다.
“보아하니 하루아침에 세운 계획이 아닌데. 내가 신라로 가겠다고 할 때부터 이럴 작정이었어?”
내 질문에 담덕이 대답 대신 씨익 웃었다.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다는 뜻이다.
“어쩐지 순순히 허락하는 게 이상하다 했어. 지설과 태림은 이미 알고 있었던 거지?”
지금 생각해 보면 미묘했던 지설과 태림의 태도가 다시 떠올랐다.
-혼자 오신 게 아니군요.
태림과 함께 나타난 나를 보며 묘한 얼굴을 하던 지설.
-괜찮습니다. 이번에는 큰 소란이 없을 겁니다.
동굴 밖이 안전할 거라며 나를 안심시키던 태림.
모두 담덕이 나를 따라오고 있다는 걸 알고 한 말이었다. 두 사람 역시 담덕과 한패였던 것이다.
그랬으면서 귀신 타령을 하며 날 놀렸단 말이지?
나는 부루퉁해진 얼굴로 날 끌어안은 담덕을 밀어냈다.
“여태까지 몰래 따라왔으면서 왜 갑자기 나타나서 사람을 놀라게 해? 계속 귀신 노릇이나 할 것이지.”
“이제는 돌아가라고 말하기엔 너무 늦었으니까. 그리고……”
담덕이 허리를 숙여 나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내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는 시선에 깊은 속마음까지 들킬 것 같았다.
“지금은 위로가 필요해 보여서. 내가 틀렸나?”
내 기분을 제대로 읽어 낸 담덕 덕분에 마음 가득 찼던 심술이 날아가 버렸다.
“……아니. 마침 잘 나타났어.”
“역시.”
담덕이 씨익 웃으며 두 팔을 벌렸다. 조르르 그에게 다가가 활짝 열린 품 안으로 파고들자 단단한 두 팔이 기다렸다는 듯 나를 감싸 안았다. 추위를 녹이는 따뜻함에 어쩐지 울컥하는 기분이었다.
“작별 인사는 잘했어?”
“응.”
“좋은 분이니 좋은 곳에 가셨을 거야.”
“응. 알아.”
고개를 주억거리자 담덕의 커다란 손이 등을 쓸어내리며 나를 위로했다. 이처럼 다정한 담덕의 손길을 느끼고 있노라면, 내 안의 걱정과 슬픔이 모두 먼 곳으로 날아가 버리는 것만 같았다.
“연우희, 너 거기 있어?”
서로를 마주 안고 있는 우리의 곁으로 서가 다가왔다. 이리 부인께 인사를 하겠다며 사라진 내가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자 걱정이 되어 찾으러 나온 모양이었다.
“뭘 하느라 돌아오질 않고…….”
멀리서 사람의 형태만 보고 다가온 것인지 나와 담덕을 본 서가 말끝을 흐리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 얼굴 한 번, 담덕의 얼굴 한 번.
우리 두 사람의 얼굴을 몇 번이나 번갈아 보던 서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며 손가락으로 담덕을 가리켰다.
“폐, 폐, 폐……!”
“가륜이다.”
담덕이 서의 말을 가로채며 웃었다. 나는 뒤이어 짧은 설명을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우리를 계속 쫓아다니던 귀신님이지. 폐하를 많이 닮은 것 같지만, 절대 아냐.”
* * *
인터넷에 검색만 하면 국가 원수의 사진을 볼 수 있는 시대는 아직 오지 않았다.
덕분에 지금 이 시대, 고구려 태왕의 얼굴을 아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우리 일행 중에서도 나와 지설, 태림, 서만이 태왕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근위대 가륜입니다. 폐하의 명으로 여러분을 지키기 위해 왔습니다.”
담덕은 그 점을 이용해 자신의 정체를 감추었다. 일행들은 이제 와 갑자기 새로운 근위대원이 나타난 것을 이상하게 여겼지만, 근위대장인 지설이 침묵하자 그의 합류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담덕은 나를 홀로 보내는 것이 걱정스러워 신라 사절을 따라왔다고 말했지만, 사실 그 외에도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실성과 영의 혼인 문제였다.
담덕의 입장에서 두 사람의 혼인은 결코 환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고구려와 신라가 혼인으로 끈끈한 관계를 맺는 것은 나쁘지 않지만 그 연결 고리가 소노부 해씨가 된다면 여러모로 곤란했다.
거기에 지설의 개인적인 이유까지 더해져, 우리는 어떻게든 혼담을 깨뜨려야 하는 입장이었다.
이번 혼담에서 가장 중요한 건 결국 실성의 의사였다. 소노부가 아무리 원한다 하더라도 그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소용이 없었다.
담덕은 실성과 친분이 두터운 서를 통해 그의 의중을 떠보기로 했다. 혼담을 대하는 실성의 태도가 어떠한가에 따라 그 뒤의 대처도 달라지게 될 터였다.
그리하여 서는 실성과 독대를 청하여 그와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실성은 자신의 고구려 생활을 다방면으로 도와준 서를 기쁘게 맞이해 주었는데, 정작 그와 독대를 마치고 돌아온 서는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실성 님은 소노부 해씨는커녕 어떤 고구려 사람과도 따로 이야기를 주고받은 적이 없다 합니다.”
담덕과 나, 지설과 태림까지, 관련자들이 은밀하게 모인 자리에서 서가 머리를 긁적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혼인을 계획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으나 그 상대는 미추왕의 딸인 아류(阿留)라 했습니다.”
“미추왕이라면 김씨 가문의 첫 왕이었지. 불안한 정통성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라면 그의 딸만큼 좋은 왕비감은 없을 거야.”
담덕의 말에 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지금은 내부의 혼란을 수습하는 것만으로도 벅차 외부로 시선을 돌릴 여력이 없다는군요. 아시다시피 선왕의 어린 아들을 밀어내고 조카인 실성 님이 왕위에 오른 모양새라…… 내부를 다스리는 일이 급하다고 판단한 것 같았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전쟁이 끝난 후 왕경을 복구하는 일과 왕위 계승의 정당성을 증명하는 일, 두 가지 문제로 신라 왕이 분주하다는 이야기를 나 역시 들었다.
하지만 집안 문제를 타개하는 방법이 꼭 내부에만 있는 건 아니었다. 강력한 외부 세력을 끌어들임으로써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었다.
담덕은 실성이 이를 위해 소노부와 혼담을 주고받은 것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다.
“혹 소노부와 깊은 이야기가 오가서 우리에게 숨기는 것은 아닐까요?”
지설의 질문에 잠시 생각하던 서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실성 님과는 상당한 친분이 있다고 자부합니다. 거짓을 말하는 기색이 아니었을뿐더러, 혼담이 오간 것이 사실이라면 제게 그 사실을 숨길 분도 아니라 생각합니다.”
“그 의견, 참고하도록 하지.”
“예. 다른 임무가 더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저를 찾아 주십시오.”
이번 일에 제법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느꼈는지 서가 뿌듯하게 웃었다.
“기억하지.”
담덕 역시 웃으며 화답하자 서가 기분 좋은 얼굴로 고개 숙여 인사한 뒤 자리를 떠났다. 이후 비로의 대원들끼리 조금 더 깊은 이야기가 오갔다.
먼저 이야기를 꺼낸 사람은 지설이었다.
“그렇다면 저희가 잘못 짐작한 걸까요? 소노부가 외부 세력과 혼인을 도모한다면 분명 신라일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지설이 미간을 찌푸리며 턱을 매만졌다. 아마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터였다.
주변 국가 중 고구려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곳은 신라뿐. 그렇다면 소노부와 혼담을 주고받고 있다는 그 ‘외부 세력’은 도대체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어쩌면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곳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지도 모르지.”
담덕이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눈을 내리깔았다. 열심히 고민 중인지 그의 표정이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후연…….”
고민 끝에 담덕이 작게 중얼거렸다.
“후연이요? 어째서 후연입니까?”
생각지도 못한 이름에 지설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정작 말을 꺼낸 담덕은 차분했다.
“후연과의 전쟁에서 돌아오는 길에 해사을이 의심스러운 모습을 보였지. 생각해 보면 해사을이 직접 병력을 이끌고 가겠다 나선 것도 이상하고…… 모종의 거래를 하기 위해 원정길에 올랐을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후연입니다.”
지설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같은 철천지원수라고는 하나 백제와는 말이라도 통하지요. 기본적으로는 백제와 우리의 뿌리가 통한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고구려의 시조인 추모대왕의 왕비 소서노와 비류, 온조 형제가 남쪽으로 내려가 백제를 세웠다. 고구려에서 내려간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나라이니만큼 백제와 고구려는 생활 양식이 상당히 비슷했다.
그런 배경 탓에 고구려 사람들은 백제를 원수라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그들과 한 민족이라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들을 미워하면서도 결국에는 우리가 품어야 할 식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후연은 다릅니다. 그들은 완전한 이민족이에요. 그런 자들에게 소노부가 손을 내밀었을까요? 정신이 제대로 박힌 사람이라면 절대 그러지 못합니다.”
“정신이 제대로 박힌 사람이라.”
담덕이 픽하고 웃음을 흘렸다.
“사람은 궁지에 몰리면 무슨 일이든 하지. 소노부의 고추가가 딱 그런 상황 아닌가? 앞으로 갈 수도, 뒤로 물러설 수도 없는 상황이지. 그런 상태라면 무슨 짓을 저질러도 이상하지 않아.”
“그게 사실이라면 해서천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겁니다. 후연이라니…… 중앙 계루부만이 아닌 고구려 전체를 기만하는 행위입니다.”
지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건 태림도 마찬가지였다.
“아니길 바라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겠지. 후연에 있는 세작들에게 서신을 보내. 우리가 궁금해하는 이야기를 알아내 달라고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