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낙화유수-31화 (32/38)

28장. 부훈영(苻訓英)

나의 걱정에도 담덕은 직접 전쟁터에 나섰다. 후연에게 많은 땅을 빼앗기고 난 뒤의 전투였다. 중요성이 큰 만큼 태왕의 친정은 나의 염려나 담덕의 뜻에 상관없이 이미 정해진 일이었다.

이번 후연과의 전쟁이 상당히 길어질 것이라는 사실은 모두가 예상하고 있었다. 최종 목표를 숙군성으로 잡은 것은 그들을 완전히 무너뜨리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숙군성은 요수의 서쪽, 흔히 요서라 불리는 지역에 세워진 성으로 후연의 중심지나 다름없었다.

숙군성을 향해 가려면 요동을 거쳐야 한다. 먼저 요동 지역의 현도성과 요동성을 장악한 뒤 그대로 요서를 치겠다는 계획이었다.

수년이 예상되는 전쟁.

나와 담덕 모두 헤어짐과 기다림에는 익숙했다. 떨어져 있는 사이 상대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불안한 것은 서로의 안위뿐이었다.

나는 중심을 잡으려고 애썼다. 전쟁으로 국내성은 긴장에 가득 차 있었지만, 나만은 태연하게 일상을 보내야 했다.

우리의 왕이 당연히 승리와 함께 돌아오리라는 믿음.

그것을 보여 주는 것이 황후의 일이었다. 매일 밤 불안에 뒤척이면서도 사람들 앞에서는 여유롭게 웃으며 매일을 견뎌 냈다.

하지만 아직 어린 연과 승평에게까지 그런 모습을 강요하는 건 무리였다.

벌써부터 아버지는 언제 돌아오시느냐고 묻는 아이들을 달래고 처소로 돌아오니 멀리서 새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비로의 전령새였다. 혼인을 한 이후 내게 직접 전령새가 날아온 것은 처음이었다.

하늘을 맴돌던 전령새가 유유히 창틀에 내려앉았다. 발목을 보니 돌돌 말린 작은 서신이 묶여 있었다.

혹 전쟁터에서 좋지 않은 소식이라도 있는 걸까?

출발한 것이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초반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도 많았다.

불안한 마음에 재빨리 서신을 펼쳤으나, 깨알같이 작은 글씨로 적힌 서신의 내용은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요동 경계 상. 먼저 요서의 숙군성을 치고 돌아가는 길에 요동을 노릴 것.]

지시인지 정보인지 애매한 글귀. 아래에는 요동의 성들을 거치지 않고 숙군성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었다.

도대체 이게 뭐지?

내게 와서는 안 될 정보였다.

게다가……

서신에 적힌 글씨가 너무 익숙했다. 곱게 웃던 한 여인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야. 그저 필체가 비슷한 것뿐이겠지.

나는 고개를 저어 생각을 흩어 버리고는 서신의 마지막에 적힌 글귀를 바라보았다.

[숲에 까마귀가 있다.]

아군 내에 배신자가 있다는 것을 뜻하는 비로의 은어였다.

나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내용이야.

나는 서신을 품 안에 갈무리하고 달래를 불렀다.

“달래야. 근위대장님을 만나야겠다.”

* * *

담덕은 근위대장인 지설을 국내성에 남겨 두고 태림만을 데려갔다. 혹 예상하지 못한 일이 생겼을 때, 내가 지설과 논의하는 것이 더 나으리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내미는 서신을 보며 지설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서신은 짧았으나 그 내용이 범상치 않았다.

“비로의 전령새가 주고 간 서신이라고요?”

“네. 혹 후연에 심어 둔 세작의 보고인가요? 그게 왜 나에게 왔는지 모르겠지만…….”

나의 대답에 지설의 얼굴이 더 심각해졌다.

“후연에 심어 둔 세작이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필체는 제가 전부 압니다. 그중에 이런 필체는 없습니다.”

지설이 심각한 얼굴로 서신을 빤히 보았다. 턱을 매만지던 그가 곧 무엇을 떠올렸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한데 필체가 꼭…….”

꺼내던 말이 금세 지설의 입속으로 돌아갔다. 그 역시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먼저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고, 금세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겠지.

“다로의 필체와 비슷하죠?”

내 말에 지설이 흠칫했다. 자신만 그리 느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자 심경이 더 복잡해졌는지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

“죽은 자의 필체를 떠올리시다니요.”

“하지만 지설도 같은 생각을 했잖아요.”

“그렇긴 합니다만…….”

지설이 머리를 벅벅 긁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은 그보다 이 내용이 사실인지가 더 중요합니다. 군대가 출발한 지 오래 지나지 않아 아직 요동에 닿기 전입니다. 서신의 정보가 사실이라면 현도성과 요동성을 칠 때 많은 피해를 감수해야 할 터. 둘러 가 숙군성을 치는 것이 현명하지요.”

“이 서신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말이죠.”

문제는 이 서신을 완전히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숙군성의 방비를 든든하게 해 놓은 후연의 계략일지도 모른다. 오히려 그쪽의 가능성이 높았다.

그럼에도 마음이 흔들리는 까닭은 익숙한 필체 때문인가, 아니면 비로 대원들의 부름에만 날아오는 전령새를 통해 서신이 전해졌기 때문인가.

“다른 정보들이야 꾸며 냈다 치더라도 마지막 말이 마음에 걸려요. 정확히 비로의 은어를 썼어요. 대원들이 아니면 모르는 말인데…….”

나의 말에 지설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제가 서신을 가지고 비로에 가 보겠습니다. 혹 제가 모르는 사이 수장께서 세작을 심어 두셨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부탁할게요.”

“제가 당연히 할 일입니다.”

지설이 별 우스운 말을 다 들었다는 듯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너무 걱정하지는 마십시오. 어떤 일이든 폐하께서 잘 대처하실 겁니다.”

“의외네요. 지설이 격려도 할 줄 알아요?”

“……저를 도대체 어떤 놈으로 보신 건지 모르겠군요.”

투덜거리는 지설을 보며 웃음이 터졌다가 금세 미소가 잦아들었다.

“지설은 괜찮아요?”

“괜찮냐니, 어떤 것이 말입니까?”

“영이요. 그날 고추가께서 소노부로 데려간 이후 한 번도 보지 못했잖아요.”

“아, 뭐.”

이 시점에 그런 이야기를 들을 줄은 몰랐다는 듯 지설이 살짝 입을 벌렸다.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오랫동안 영이의 마음을 모른 척한 거고요?”

“그럴 수밖에 없잖습니까. 받아 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런 생각이었다면 대놓고 거절을 했어야죠. 그 애는 지설이 은근히 밀어내고 있었다는 것도 평생 모를걸요.”

내 말에 지설이 픽 하고 웃었다.

“그렇죠. 그 아가씨는 아주 순진한 구석이 있으시니까요. 해서천의 딸이라고 믿기 힘들 만큼.”

“그걸 알면서도 대놓고 거절은 하기 싫었다는 거군요?”

정곡을 찌른 것인지 지설의 입에 걸려 있던 미소가 서서히 사라졌다.

“이렇게 정면에서 사람을 찌르시다니요.”

“지설이 답답하게 구니까요. 내가 담덕과 지지부진할 때 지설도 이런 심정이었을까 싶을 정도라고요.”

“설마요. 제가 그리 답답하지는 않을 텐데.”

지설이 혼잣말 같은 중얼거림과 함께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아가씨 이야기는 왜 꺼내시는 겁니까?”

“귀부인들에게 들은 이야기가 좀 있어서요.”

유력한 귀족 가문의 여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자연스레 들려오는 말들이 있다. 누군가의 혼담도 마찬가지였다.

“소노부의 고추가께서 영이의 혼처를 찾고 계신 것 같았어요.”

“……그렇습니까.”

한 박자 느리게 돌아온 대답은 얼핏 평온해 보였다. 하지만 나는 그가 손에 쥐고 있던 서신이 볼품없이 구겨진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 서신 중요한 건데.”

“아.”

내 지적을 듣고서야 제가 주먹을 꽉 쥐었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지설은 답지 않은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서신을 다시 폈다.

“고집부리지 말고 그냥 인정해요. 뭣하면 예전처럼 보쌈이라도 하든가요.”

“예전처럼이라뇨. 제가 여인을 아무렇게나 납치하는 시정잡배인 줄 아십니까? 그때는 폐하의 명에 따라서……”

“마음 말고 다른 명분이 있어야만 움직일 수 있어요? 그럼 내가 명령 내려 줄게요. 영이가 혼인하기 전에 데려와서 마음을 털어놓으세요, 지설.”

내 말에 지설이 입을 꾹 다물었다. 한참이나 침묵을 지키고 있던 지설이 마침내 헛웃음을 흘렸다.

“그 명령은 평생 못 잊을 겁니다.”

“감동적이어서요?”

“아뇨. 너무 바보 같은 명령이라서요.”

나의 배려를 가차 없이 구겨 버린 지설이 손에 들고 있던 서신을 흔들며 인사했다.

“아무튼 배려는 감사합니다. 과연 마마다운 우스운 배려였지만 말입니다. 서신은 제가 잘 해결하겠습니다.”

* * *

제신은 담덕에게 서신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서신의 내용을 믿느냐고 물었더니, 애매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판단은 폐하께서 하실 거다. 나는 들어오는 모든 정보를 모두 그분께 전할 뿐이야.

제신은 다로의 필체와 상당히 유사한 필체로 적힌 서신을 보면서도 별다른 동요가 없었다. 그것이 다로를 모두 떨쳐 냈기 때문인지,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다른 뒷이야기를 알고 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담덕에게 내가 받은 의문의 서신이 전해졌다.

담덕은 그 서신의 내용을 따르기로 결정했다. 배신자가 있다는 말까지도 신뢰하여, 요동 초입에 진을 치고 전쟁을 준비하던 대군 중 일부만 떼어 내 은밀하게 요서로 향했다.

담덕은 개마기병을 중심으로 한 태왕군의 정예만을 이끌고 숙군성을 공격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요동에 모든 병력을 세워 놓고 있었던 후연은 큰 힘도 쓰지 못하고 한 번에 밀려났다. 성을 지키고 있던 평주자사 모용귀는 갑작스러운 공격에 깜짝 놀라 성을 버리고 도망쳤다.

요동을 지키고 있던 병력들이 서둘러 요서로 귀환했지만 이미 고구려의 정예병들이 숙군성을 차지한 뒤였다.

설상가상으로 빠져나간 숙군성을 향해 병력이 빠져나간 사이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나머지 고구려군이 현도성과 요동성을 쳤다.

이 시대의 전쟁에서는 수성(守城)이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연쇄적으로 주요한 성 세 곳을 모두 잃은 후연은 제대로 된 반격조차 하지 못한 채 뒤로 물러났다.

또다시 태왕의 승리였다.

승전 소식에 국내성이 떠들썩해졌다. 태왕을 칭송하는 소리와 고구려의 영광을 노래하는 가락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온전히 기뻐할 수가 없었다.

서신의 내용이 진실이었어. 그렇다면 아군 안에 후연과 결탁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도 진실이라는 뜻인데…….

아직 후연은 무너지지 않았다. 앞으로 다시 벌어질 전쟁에서도 승리하기 위해서는 숲에 숨어든 까마귀가 누구인지 찾아내야 했다.

그리고 내게 서신을 보내온 사람이 누구인지도 찾아내야겠지.

하지만 지금은 즐겁게 담덕을 맞이할 때였다.

한 차례 큰 승리를 거둔 태왕군이 전열을 정비하기 위해 국내성으로 돌아온다.

나는 오래전 담덕의 귀환을 기다리던 순간을 떠올리며 목욕물을 준비했다.

이젠 예전처럼 당황하진 않으려나? 당황하는 모습 보고 싶은데.

나는 담덕의 반응을 예상해 보며 오랜만에 웃음을 흘렸다.

* * *

“오십니다!”

달래가 다급하게 방 안으로 들이닥치며 내게 속삭였다. 하지만 나는 기다리는 사람이 도착했다는 기쁜 소식에도 마냥 반가워할 수가 없었다.

해가 한참이나 전에 떨어졌다. 전령은 담덕 일행이 오늘 낮 국내성에 도착할 테니 맞이할 준비를 하라 전했었다.

예상보다 병력의 귀환이 늦어진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이후 별다른 기별이 없다는 사실을 위안 삼아 마음을 달래 보았지만, 중간에 무슨 일이라도 벌어진 건 아닌지 안 좋은 생각이 떠오르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별다른 이야기는 없었어?”

“별다른 이야기요?”

“오는 길에 무슨 일이 있었다거나 그런 이야기.”

“저도 그것까진 듣지 못했습니다. 일행이 막 성문을 지났다는 이야기만 듣고 바로 달려온걸요.”

“궐에는 어느 문으로 들어온대?”

“그거야 당연히 정문으로……”

나는 대답을 다 듣지도 않고 방으로 뛰어든 달래만큼이나 다급한 걸음으로 궐문을 향해 걸었다.

“궐문까지 마중 나가시려고요?”

놀란 달래가 재빨리 내 옆으로 따라붙었고, 그 뒤를 다른 시녀들도 줄줄이 따랐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행렬에 궁인들의 시선이 꽂혀 들었다.

정문으로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대규모의 인원이 만들어 내는 소란스러운 기척이 선명해졌다. 조금 더 걸음을 옮기자 마침내 때늦은 소란을 몰고 온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많은 사람들 중에서 담덕을 찾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건장한 고구려 사내들 사이에서도 담덕은 특히나 더 건장했다.

그건 그의 옆을 지키고 선 태림도 마찬가지였다. 커다란 두 사람이 나란히 서 있으니 저절로 시선이 갔다.

그들을 부르려는 찰나. 병사들을 둘러보며 무어라 지시를 내리던 태림이 나를 먼저 발견했다.

“황후마마?”

태림의 중얼거림에 옆에 있던 담덕이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담덕의 눈이 커졌다.

나는 한달음으로 담덕 앞까지 다가갔다. 병사들이 그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지만, 내가 지나가자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자연스럽게 길을 터 주었다.

길을 터 주는 병사들의 얼굴에도 담덕처럼 놀라움이 가득했다. 나는 담덕 앞에 서자마자 눈으로 그의 전신을 훑었다.

우선 갑옷은 멀쩡하고…….

“다친 곳은?”

“없어.”

담덕이 간단하게 대답했지만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는 믿을 수 없었다.

“여기까지 왜 나왔어? 난 깨끗하게 씻은 뒤에 만나러 가려고 했……”

나는 이어지는 담덕의 말을 무시한 채 손을 뻗어 그의 몸을 더듬었다. 몸에 손이 닿자마자 담덕의 말이 뚝 끊겼다.

갑옷이 미처 가리지 못한 팔다리를 더듬거리며 상태를 확인하는 투박한 손길에 침묵을 지키던 담덕이 곧 당황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저…… 우희?”

고개를 들어 담덕의 얼굴을 보니 그가 당황한 얼굴로 주변을 힐끗거리고 있었다. 그를 따라 주변을 둘러보자 병사들이 입을 떡 벌린 채 우리를 보고 있었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그들의 눈빛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 그, 옷에 흙이, 그래, 흙이 참 많이 묻었네…… 그렇네…….”

나는 담덕의 몸을 더듬고 있던 손을 슬그머니 움직여 그의 옷에 묻은 흙을 털어 냈다.

처음부터 흙을 털어 내는 것이 목적이었다는 양 태연한 척을 해 보았지만, 신나게 담덕의 몸을 더듬던 모습을 모두 본 병사들이 그리 생각해 줄 리가 없었다.

멍하니 선 병사들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누군가는 고개를 푹 숙이며 제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금방이라도 터지려는 웃음을 애써 참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민망하다. 정말 민망하다!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이불을 차는 나를 알아챈 것인지 태림이 헛기침을 하며 담덕에게 제안했다.

“폐하. 정리는 제가 하겠습니다. 먼저 처소로 돌아가시는 것이 어떨까요.”

담덕은 태림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래. 다들 고생이 많았다. 어주(御酒 : 임금이 신하에게 내리는 술)를 준비하라 하지. 오늘은 긴장을 잊고 마음 편히 마시고 즐겨라.”

담덕의 말에 병사들의 얼굴이 대번에 밝아졌다.

“감사합니다, 폐하!”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인사를 들으며 담덕이 무리 사이를 빠져나갔다. 나도 재빨리 그 뒤를 따랐다.

병사들 무리에서 조금 멀어지자 담덕이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뭘 달라는 거야?

어리둥절해져 손을 빤히 보고 있으니 담덕이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내 손을 잡았다.

“내 부인께서는 어찌 이리도 눈치가 없을까.”

“이렇게 보는 사람이 많은데 손을 잡고 싶어 할 줄은 몰라서 그랬지.”

나는 우리에게서 조금 떨어진 채 뒤를 따르는 시녀들을 힐끗대며 작게 속삭였다.

태왕과 황후의 사이가 좋은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누구도 뭐라고 할 사람은 없었지만, 지켜보는 사람이 많은 곳에서 공공연한 애정 행각을 벌이는 건 역시 민망했다.

하지만 담덕은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는 내가 우습다는 듯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보는 눈을 그리 신경 쓰는 사람이었나? 조금 전에는 아주 대담하게 내 몸을 더듬었으면서.”

“왜 내 순수한 행동을 음흉하게 받아들이는 거야? 다친 곳이 없는지 확인하려고 했을 뿐인데.”

“다친 곳? 무사히 국내성으로 들어가는 중이라고 전령을 보냈잖아. 걱정하지 말라고 미리 사람을 보낸 거였는데. 듣지 못했어?”

담덕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나는 재빨리 고개를 저어 그의 오해를 풀어 주었다.

“아니. 전령은 제대로 도착했어. 하지만 예상했던 시간보다 훨씬 늦게 도착했잖아. 혹 오는 길에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닐까 걱정했어.”

“아. 확실히 예상보다는 늦어졌지.”

담덕이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병사들이 소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그걸 수습하느라.”

“소란?”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는데 소노부 병사 하나가 대열을 이탈했어. 태림이 눈치채고 따라붙었더니 수상쩍은 태도를 보였다는군. 그래서 심문을 하려고 했는데……”

“쉽지 않았겠지. 소노부 병사니까.”

나의 말에 담덕이 고개를 끄덕이며 씁쓸하게 웃었다.

이번 원정에는 중앙 태왕군 외에도 각 부족에서 보내온 병사들이 함께했다. 고구려군이 대규모의 병력을 꾸릴 수 있었던 것도 4부의 협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후연 정벌이라는 대승적인 목표에 거스를 수 없었던 소노부 역시 순순히 병력을 보냈다. 그 규모가 상당해 4부 중 절노부 다음의 수였다.

하지만 소노부가 다수의 병력을 보냈다고 마냥 좋아할 일은 아니었다.

각 부에서 보내진 병사들은 태왕이 아닌 부족의 명령을 따른다. 전쟁을 치르는 동안 그들을 이끌고 온 부족의 장군이 담덕의 명에 따라 움직이니, 결론적으로는 태왕의 명에 따라 군대가 움직이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때문에 이끌고 온 병력이 많으면 많을수록 부족의 발언권도 강해진다. 이번 후연과의 전쟁에 소노부가 많은 병력을 보낸 것도 단순히 대승적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가 아닐 터.

담덕은 출병 전부터 소노부의 대규모 병력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소노부의 병력을 이끌고 온 장수가 하필 해사을이라는 점이 더욱 그의 신경을 건드렸다.

“해사을이 나섰어. 소노부의 병사이니 자기가 직접 심문하겠다면서. 명분이 없어서 병사를 보내 주었지만 영 마음에 걸려. 비로를 통해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지 알아봐야겠어.”

“해사을이 직접 나서서 감싼 병사라면 뭔가 중요한 일이 엮여 있을 것 같아. 하지만 왜 하필 돌아오는 길이지? 이미 전쟁에서 다 이겼는데. 뭔가 일을 벌일 거라면 시작 전에 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대승을 거두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작당을 벌이기에는 너무 늦은 시점이었다.

“생각은 거기까지만 하는 게 어때?”

담덕이 계속 질문을 던지는 내 이마를 툭 건드렸다.

“이미 비로에 명령을 내렸으니 곧 답이 나올 거야. 너와 난 다른 일에 집중해야지.”

“다른 일?”

“오랜만에 만난 부부가 무슨 일을 하겠어?”

담덕이 사르르 웃으며 내 손을 끌어당겼다.

“이번에도 눈치 없이 굴 건 아니지?”

담덕이 고개를 숙여 내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귓가를 간질이는 목소리에 어깨가 딱딱하게 굳었다.

“무슨 뜻인지는 알지만, 여기는 사람도 많고, 넌 씻기도 전이고…….”

얼굴이 벌게져 횡설수설하는 나를 보며 담덕이 픽하고 웃었다.

“무슨 뜻인지 안다니 다행이고, 사람은 물리면 그만이고, 씻는 건…….”

담덕이 말을 하다 말고 나를 빤히 보았다. 나를 보고 있는 얼굴에 미소가 점점 더 짙어졌다.

나 알고 있어. 담덕이 어떨 때 이런 얼굴을 하는지.

나를 살살 꾀어낼 때 짓는 표정이다.

“같이할까?”

“응?”

“목욕, 같이할까?”

이거 분명 내가 담덕에게 하려고 했던 말인데.

그걸 듣고 당황하는 담덕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그런데 담덕을 당황시키기는커녕 그 말을 입에 올리지도 못했다. 심지어 담덕에게 하려던 말을 빼앗겼다.

“같이하자. 돌아온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목욕 준비는 다 해 뒀을 거 아냐?”

사근사근하게 웃는 얼굴이 여우 같았다.

* * *

나는 욕탕에 앉아 입을 부루퉁하게 내밀었다. 맞은편에 앉은 담덕의 얼굴이 사뭇 여유롭게 보인 탓이었다. 그를 바라보던 내 눈이 가늘어졌다.

“변했어.”

따뜻한 물에 나른하게 늘어져 있던 담덕이 나를 보며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내가?”

“그래. 예전엔 같이 목욕하자는 말에 펄쩍 뛰었으면서. 이젠 먼저 같이 하자고 하질 않나, 욕탕 안에서도 여유만만이고. 변했어. 아주 많이.”

“이봐요, 부인.”

나의 투덜거림에 담덕이 웃음을 흘렸다. 작은 웃음소리가 공간을 울려 기분이 이상했다.

목소리의 궤적을 따라 고개를 돌리는데 바로 앞에서 찰박거리는 소리와 함께 물살이 일었다.

고개를 내리니 어느새 담덕이 내 앞에 다가와 있었다. 그는 한 손으로 내가 기댄 벽을 짚으며 고개를 숙였다.

“나랑 이런 거 저런 거 다 해 놓고, 이제 와 목욕 하나에 펄쩍 뛰길 바라는 건 너무하지 않나? 아니면, 너무 오래 떨어져 있어서 우리가 했던 일들을 부인께서 다 잊으셨나?”

벽을 짚지 않은 손이 뺨을 쓸어내렸다. 서로의 몸을 적신 물기 때문인지 그의 손길이 끈적하게 느껴졌다.

“그걸 어떻게 잊는다고.”

묘한 공기에 차마 담덕을 볼 수가 없어 눈을 내리깔았다. 뺨을 쓸어내리던 손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 목을 지나쳤다.

그 아래는 얇은 옷이었다. 담덕의 손이 물에 젖어 몸에 붙은 옷깃을 만지작거렸다.

“아쉽네.”

“뭐가?”

“잊었다고 하면 다시 생각나게 해 줄까 싶었거든.”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담덕은 내 옷깃에서 손을 뗄 줄 몰랐다. 나는 이 은근한 손길이 무엇을 바라는지 잘 알고 있었다.

“꼭 핑계가 있어야만 그런 걸 하나, 뭐…….”

고개 숙인 채 작게 중얼거리니 옷깃을 만지작거리던 담덕의 손길이 멈추었다. 그것을 깨달음과 동시에 그가 내 턱을 잡아 자신을 보게 했다.

고개를 들자마자 순식간에 얼굴이 가까워졌다. 입술이 맞부딪히고 부드러운 혀가 입안으로 밀려들어 왔다.

오랜만이었다. 국혼을 치른 이후 매일같이 당연한 듯 나누었던 온기. 나 역시 담덕만큼이나 그 온기를 그리워했다.

정신없이 입을 맞추는 동안 담덕의 손이 푹 젖은 옷을 비집고 안으로 파고들었다. 평소에 없던 남자의 조급함에 나까지 휩쓸려 애가 달았다.

나는 손을 뻗어 담덕의 목에 팔을 둘렀다. 그러자 더 이상 가까워질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서로의 몸이 빈틈없이 맞물렸다.

그 순간 맞닿은 입술에서 담덕이 앓는 듯한 소리를 냈다.

“아, 젠장.”

그 뒤로도 욕설 비슷한 것들이 더 쏟아졌다. 답지 않은 거친 소리에 눈을 동그랗게 뜨니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너도 변했어.”

“내가?”

“그래. 예전엔 도망치기 바쁘더니 어느새 사내를 부추길 줄도 알게 되었잖아.”

담덕의 입에서 새어 나온 깊은 한숨이 목덜미를 간질여 몸이 파르르 떨렸다. 그 순간 담덕이 두 손으로 번쩍 나를 일으켜 세웠다.

비틀거리며 중심을 잡으니 담덕이 내 귓가에 속삭였다.

“사내를 부추기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그런 걸 알 리가 없다. 애초에 담덕을 부추기려고 한 행동이 아니었다.

그저 본능적으로 손을 뻗었을 뿐인데.

“부추길 생각은 전혀 없었어.”

“안 들려.”

“들리면서.”

“안 들린다니까.”

눈에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하며 담덕이 다시 입을 맞추었다.

* * *

고작 한 번 손을 뻗었을 뿐인데 후폭풍이 대단했다.

하룻밤에 몇 번이나 아득하게 정신을 잃었는지.

그렇게 사람을 괴롭혔으면 만족했을 법도 한데, 담덕은 나를 놓아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덕분에 어스름하게 동이 트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그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침상 위에 갇혀 있는 처지였다.

전쟁에서 막 돌아왔으면서 피곤하지도 않나.

나는 다른 인종을 보는 기분으로 담덕을 힐끗거렸다. 밤새 크고 단단한 몸에 괴롭힘을 당하고 나면 그와 내가 같은 인종이라는 걸 도저히 믿을 수 없어진다.

“또 부추기는 거야? 그런 거면 난 좋은데.”

눈을 감고 있었는데도 내 시선을 느낀 것인지 담덕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그 말에 얼굴의 핏기가 싹 가셨다.

여기서 더 하면 앓아누울지도 몰라.

나는 서둘러 돌아누우며 반박했다.

“아니. 안 그랬어. 안 부추겼어!”

강한 부정에 작게 웃음을 터트린 담덕이 뒤에서 나를 끌어안으며 등에 입을 맞추었다. 벌거벗은 몸이 맞닿자 어젯밤의 기억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우희. 아무리 나라도 그렇게 격렬하게 거부하면 상처 받아.”

“어제 네가 한 짓을 생각해. 사람을 그리 몰아붙여 놓고는 칭찬을 받을 줄 알았어?”

“흐음. 좋아한 줄 알았는데?”

담덕이 묘한 웃음을 흘리며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허리를 끌어안았던 손이 점점 위로 올라왔다.

설마 또 하려고?

“담덕!”

내가 경악에 찬 목소리로 담덕을 부르자 그가 웃으며 허리를 세웠다. 침상에 기대어 앉은 그가 흐트러진 내 머리를 정돈해 주었다.

“장난이야. 어제 내가 너무 힘들게 했지? 더 안 괴롭힐 테니까 편하게 있어.”

자각은 하고 있었다니 다행일까. 나는 한숨을 내쉬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조금 있으면 연이와 승평이 올 거야. 옷 입어야 돼.”

“연이와 승평?”

“어제부터 기다리고 있었거든. 아버지를 볼 생각에 얼마나 즐거워했다고. 그런데 도착 시간도 늦어졌고, 오자마자 네가 그러는 바람에…….”

그러니 해가 뜨면 곧장 담덕을 만나러 올 것이다.

“그럼 서둘러 준비해야겠네.”

담덕이 침상에서 내려가 옷을 꿰입었다.

나도 일어나야 하는데.

그런 생각을 했지만 녹초가 된 몸은 움직일 줄을 몰랐다. 기운이 빠져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기 싫었다.

“쉬고 있어. 아이들은 침소에 들여보내지 않을 테니까.”

그런 내 마음을 읽은 것인지 담덕이 웃으며 말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니 어느새 옷을 다 차려입은 담덕이 내 이마에 입술을 살짝 부딪쳐 왔다.

다정한 입맞춤에 마음이 편안해진 탓인지 순식간에 졸음이 밀려왔다. 나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아득해지는 정신 사이로 멀리 새의 날갯짓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소리지? 전령새가 왔나?

소리의 정체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수마가 더 강했다. 나는 의문과 함께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 * *

오랜만에 궁에 활기가 돌았다.

역시 궁에는 주인이 있어야지.

내가 아무리 빈자리를 채워 보려고 해도 감당할 수 없는 부분이 분명 있었다. 담덕의 존재감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그만의 것이었다.

“얼굴이 좋아지셨습니다.”

나를 빤히 보던 소하 부인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본래 관노부 진씨의 사람으로, 순노부에 시집가 지설을 낳았다.

지설은 담덕의 측근 중의 측근이니 그의 어머니와 내가 가까이 지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다른 유력가의 부인들과도 종종 차를 함께 나눴지만 소하 부인만큼 편한 사람은 드물었다. 내가 아는 귀족 가문의 은밀한 속사정도 모두 그녀를 통해 들어온 이야기들이었다.

“역시 폐하께서 계시니 좋으시지요?”

“그거야 그렇지만…… 폐하께서 계실 때와 아니 계실 때 제 얼굴이 그리 다릅니까?”

“아무렴요. 폐하께서 전쟁터에 나가 계실 때에는 늘 긴장한 얼굴이셨는데 지금은 아주 편해 보이십니다.”

“그런가요?”

담덕이 없는 동안 긴장을 놓지 못한 것은 사실이었다. 밖에 나간 그가 다칠까 봐, 그가 없는 궁에서 혹 문제가 생기진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 얼굴에 드러나다니 상당히 민망했다. 불안함을 잘 숨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완벽하지 못했다.

민망함에 어색하게 웃는 나를 보며 소하 부인이 배려심을 발휘해 다른 이야기를 시작했다.

“참. 일전에 제게 물으신 이야기 말입니다.”

내가 최근 소하 부인에게 물었던 이야기는 단 하나, 영의 혼담에 관한 일뿐이었다.

“소노부 해씨 아가씨의 혼담 말이지요?”

“예. 그 이야기 말인데, 조금 이상합니다.”

“이상하다니요?”

“소노부의 해씨, 그것도 고추가의 따님 아닙니까. 그런 아가씨라면 혼처도 손에 꼽을 정도지요. 집안이며 나이를 모두 따지면 신랑감이 몇 명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누구도 제안을 받은 사람이 없다지 뭡니까?”

소하 부인이 손가락을 접으며 신랑감으로 적합한 사내들의 이름을 꼽았다. 그중에 지설의 이름은 없었다.

“왜 아드님의 이름은 빼십니까?”

“우리 지설이요?”

소하 부인의 눈이 동그래졌다가 금세 평소처럼 돌아왔다.

“지설은 폐하의 측근이 아닙니까. 소노부의 고추가께서 그런 이에게 귀한 딸을 보낼 리 없지요.”

소노부와 태왕의 대립은 공공연한 사실이니 소하 부인이 그리 생각하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게다가…… 전 그 녀석을 포기했습니다. 어미인 제가 봐도 성격이…… 매번 툴툴거리는 모난 성격을 좋다고 할 아가씨가 있겠습니까.”

제법 신랄한 평가였다. 하지만 틀린 말도 아니어서 나는 속으로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소하 부인은 지설과 영의 관계를 전혀 알지 못했다. 애초에 영이 지설의 집에 있다는 것 자체가 극비였다. 영이 그곳에 오랫동안 머물렀다는 건 비로와 해서천 일당만이 아는 사실이었다.

“혹 모르잖습니까. 그런 걸 좋아할 아가씨가 있을지도요.”

“만약 그런 아가씨가 있다면 제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잡아 와야지요.”

소하 부인이 고개를 내저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절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듯한 얼굴이었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영과 지설의 인연을 털어놓으면 소하 부인은 분명 도움을 줄 것이다.

하지만 소노부와 담덕의 알력 싸움이 엮인 일을 나의 독단으로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내가 고민하는 사이 소하 부인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아무튼 그쪽이 수상합니다. 저희 집안에 제안이 오지 않은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다른 집안에까지 소식이 없으니…….”

“애초에 딸의 혼처를 찾고 있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소문이 아니었을까요?”

“그럴 수도 있지요. 하지만 그 집에서 사들인 물품들이 꼭 혼례를 준비하는 모양새라…….”

소하 부인이 말끝을 흐렸다. 운이야 반쯤 내버려 둔 자식이니, 해서천이 신경 써서 혼례를 준비할 만한 자식은 영뿐이었다.

소문이 오해가 아니라면 영의 상대는 누구일까?

지설의 집에서 마지막으로 보았던 영의 얼굴과 꺼림칙하게 느껴졌던 해서천의 얼굴이 동시에 떠올랐다.

분명 준비하고 있는 것이 평범한 혼례는 아닐 거야.

운과 이야기를 나눠 봐야 할 것 같았다.

* * *

운은 국내성에 돌아온 후 정기적으로 궁을 방문하고 있었다. 연에게 바둑을 가르친다는 명목이었다.

하지만 운이 후연 원정에 함께 오르는 바람에 얼굴을 본 것도 오래전이었다.

운이 후연 원정에 합류한 것은 해서천의 의지가 아니었다. 해사을이 소노부 병사들을 지휘하자 소노부 내의 감시자가 필요해졌는데,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비로 안에 운 하나뿐이었다.

“사실 제가 아는 것도 많지 않습니다.”

소하 부인을 통해 들은 항간의 소문과 나의 의문을 모두 들은 운이 제 턱을 매만지며 짧은 침음을 흘렸다.

“아시다시피 저는 지금 소노부에서 배신자로 낙인찍혀 있습니다. 그런 놈에게 내밀한 사정을 알리진 않지요. 하지만 저도 손을 놓고 있지는 않았으니 대략적인 상황은 파악했습니다.”

“정말 소노부에서 영이의 혼례를 준비하고 있는 건가요?”

“……예. 사실입니다.”

운이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한 건 후연과의 전쟁이 가까워졌을 무렵입니다. 그 후 저는 해사을과 곧장 후연으로 떠났지요.”

“상대는 누구인데요? 5부의 어느 집안도 해씨의 혼담을 받은 적이 없다고 하던걸요.”

“당연한 일입니다. 아버지께서 염두에 두신 혼처는 고구려에 없으니까요.”

이상한 말이었다. 나는 이해할 수 없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혼처가 고구려에 없다니.”

이 시대에 국제 결혼이라도 하겠다는 말인가?

흔치 않은, 아니, 한 번도 본 적 없는 일이었다. 굳건한 동맹을 위해 각 나라의 왕족끼리 혼인하는 경우는 있어도 민간에서는 사례가 없었다.

혼란스러워져 손으로 머리를 짚으니 운이 내 생각을 이해한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저희 아버지의 야심을 아시잖습니까. 그분은 영이를 황후로 세우고자 하셨습니다. 이제와 그 생각이 달라지셨겠습니까? 그 아이를 평범한 사내에게 보내실 리 없지요.”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영을 황후로 만들고 싶었던 게 아니라 자신이 태왕의 장인이 되어 권력을 휘두르고 싶었던 거겠지.

그런 유의 야심은 쉽게 접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고구려가 아니라도 좋다. 그 아이를 왕의 반려자로 만들겠다. 그리 생각하게 된 것도 놀랍지 않지요.”

“……하지만 그게 가능한가요?”

소노부의 위세가 아무리 대단하다고 한들 왕족은 아니었다. 한 나라의 왕이 무엇이 아쉬워 왕족이 아닌 타국의 여인과 혼인을 한단 말인가.

“저 역시 그리 생각했습니다. 너무 허무맹랑한 이야기라 생각해 따로 보고도 하지 않았고요. 하지만 제 생각보다 아버지의 수완이 좋았던 건지…….”

운이 말끝을 흐렸다. 그의 얼굴도 나만큼이나 찌푸려져 있었다.

“일이 잘 진행되었단 말인가요?”

“돌아와 보니 생각보다 일이 상당히 긍정적으로 흘러가고 있는 듯했습니다.”

그에 맞는 후보라면 한 사람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신라의 실성이었다.

올해 봄, 선왕이 세상을 뜨자 많은 사람이 예견했던 것처럼 실성이 그 뒤를 이었다.

고구려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신라의 젊은 왕. 참으로 좋은 상대였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볼모로 오랫동안 국내성에 머물렀던 실성이라면 고구려에서 소노부 해씨의 위상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잘 알고 있을 터였다.

한때는 왕을 배출했던 집안. 여전히 제가 회의를 좌지우지하는 발언권을 가지고 있었다. 제가 회의는 태왕마저도 무시할 수 없는 강한 귀족 집단이었다.

그러니 소노부 고추가의 딸이라면 왕족이 아니라도 나쁘지 않다는 계산을 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단순히 그것뿐이었을까?

따져 보면 완전히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이 찜찜했다.

어두운 내 얼굴을 보며 운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나보다 그의 심정이 더 복잡할 것이다.

“폐하께 이야기를 올리겠습니다. 그분께서 판단해 주시겠지요.”

기시감이 느껴지는 말에 상황을 잊고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전령새로부터 정체 모를 서신을 받았을 때, 지설도 지금의 운처럼 말했다. 담덕이 판단해 줄 거라고.

“재미있네요. 조금만 복잡한 일이 생기면 다들 담덕을 찾아요. 그가 다 판단하고 해결해 줄 거라고요.”

내 말에 운이 당연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분은 태왕이시니까요. 모든 것을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분이시죠. 이 고구려 땅에서 유일하게요.”

그는 얼마나 많은 일을 판단하고 또 결정하고 있을까? 제 판단과 결정으로 인해 요동치는 미래가 두렵지는 않을까?

작은 일 하나를 판단하고 결정하는 일도 두려워 늘 망설임이 많았던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삶.

담덕은 그런 삶을 살고 있었다.

* * *

영락 13년은 기분 좋게 시작되었다. 후연과의 첫 공방전을 승리로 이끈 기세가 새해에도 계속 이어진 것이다.

하지만 마냥 마음을 놓고 있을 때는 아니었다. 요동을 장악하고 요수를 안정적으로 확보했으나 숙군성을 제외한 요서는 여전히 후연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

패배한 후연에 비하면 적은 수였지만 고구려 병력도 피해를 입었다. 게다가 허를 찌르기 위해 여름에 출정을 결정한 탓에 식량도 빠듯하게 끌어 썼다.

이 모든 걸 회복하려면 우리 고구려에도 시간이 필요했다. 다행히 후연은 곧장 반격을 도모하지 않았다.

모용희는 반격 대신 토목 공사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전쟁을 위한 방책을 쌓거나 성을 보수하는 공사가 아니었다.

그는 여가를 보내기 위한 놀이터를 짓고 있었다. 이름도 거창한 용등원(龍騰苑)이었다.

이 용등원이 얼마나 크고 화려한지, 그 안에 가짜 산을 만들고 인공 수로를 건설해 강물을 끌어온다고 했다. 전각이며 정자도 셀 수 없이 많아 후연 백성 모두가 그 공사에 동원되었다더라 하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전쟁으로 크게 패한 상황에서 무리한 토목 공사를 진행하니 내부에서도 반발이 심했으나, 모용희는 공사를 멈추지 않았다. 아름답다고 소문이 난 자신의 두 부인을 위해서였다.

모용희는 왕위에 오르며 전진(前秦:중국 5호 16국의 하나로 ‘진’이라고도 부르며, 383년 비수전투에서 패해 멸망한 나라)의 황족 부모(苻謨)의 딸 융아(娀娥)와 훈영(訓英)을 부인으로 맞이했다. 친자매인 두 사람을 모두 부인으로 삼은 것이다.

나의 상식으로는 전혀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곳에서는 꽤 자연스럽게 통용되는 일인 것 같았다.

모용희는 두 사람에게 각각 귀인(貴人)과 귀빈(貴嬪)의 지위를 내리고 가까이 두었다. 특히 부훈영을 아껴 그녀의 부탁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준다고 했다.

전쟁에서 패한 마당에 한가로이 별장이나 짓고 있었던 것도 부씨 자매의 청 때문이었다. 주변에서 아무리 말려도 그는 꿋꿋하게 용등원을 짓고 부씨 자매와 여가를 즐겼다.

경국지색이라는 말을 이럴 때 쓰는 것일까?

모용희의 눈을 가린 부씨 자매 덕분에 고구려는 수월하게 다음 공방전을 준비할 수 있었다. 우리로서는 고마운 일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의문이 들었다.

“도대체 얼마나 예쁘면 왕이 나라도 잊고 별장을 지어 바치지?”

“갑자기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서신을 쓰다 말고 중얼거리는 나를 보며 담덕이 물었다. 그는 제 집무실을 두고 굳이 내 처소에 장계를 가져와 업무를 보는 중이었다.

“아. 그냥 혼잣말이었어. 연리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주고 있었거든.”

나는 쓰던 서신을 가볍게 흔들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담덕에게 말한 것처럼 신라에 있는 연리에게 쓰는 서신이었다.

내가 처음부터 연리에게 서신을 보낼 생각을 한 건 아니었다. 새해가 밝기 전 신라로 보낸 서신의 수신인은 연리가 아닌 이리 부인이었다.

나는 이리 부인에게 영과 실성의 혼담에 대해 묻고 싶었다.

하지만 속 시원한 답변 대신 연리에게서 답신이 돌아왔다. 부인의 건강이 악화되어 그녀가 앓아누웠다는 슬픈 소식이었다.

그 이후 나는 연리와 꾸준하게 서신을 주고받았다. 상심한 그녀를 위로할 겸 종종 재미있는 이야기를 서신에 담았는데, 지리적 특성상 중원 소식에 어두운 그녀에게 후연 이야기를 전하다 보니 모용희를 흔들리게 만든 경국지색의 사연까지 떠올리게 되었다.

나는 재빨리 서신을 마무리하고 창가로 다가가 전령새를 불렀다.

비로의 전령새를 통해 신라의 세작에게 서신을 보내면, 그가 다시 연리에게 서신을 전해 준다. 이렇게 하면 인편으로 보내는 것보다 훨씬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다.

그렇게 서신을 보내고 돌아서니 문득 떠오르는 일이 있었다. 담덕이 후연과의 전쟁에서 막 돌아왔을 무렵의 일이었다.

“담덕.”

“응.”

담덕이 장계에 시선을 고정한 채 대답했다. 내 말에 집중하고 있는 것인지 의심스러웠지만 그다지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었으므로 나는 선선히 말을 꺼냈다.

“후연과 싸우고 돌아온 날, 우리 방에 전령새가 왔었어?”

가벼운 질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장계를 보고 있던 담덕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표정도 썩 진지했다.

“알고 있었어?”

“음…… 잠결에 새 소리를 들었어.”

“잠결에 들은 새 소리를 아직까지 신경 쓰고 있었던 거야?”

“응. 마음에 걸렸으니까. 후연과 한참 전쟁 중일 때 내게 날아온 그 이상한 서신도 그렇고.”

“그래. 그 서신을 네가 직접 읽었다고 했지.”

담덕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장계를 손에서 내려놓았다. 이 이야기가 길어질 것이라는 뜻이었다.

“내가 물으면 안 되는 일이었어?”

“네가 물으면 안 되는 이야기는 없어. 난 네 사람이니까.”

“그리고 나 역시 네 사람이고.”

재빨리 응수하는 나를 보며 담덕이 픽 하고 웃음을 흘렸다.

“그래. 그러니 궁금한 것을 물어봐. 대답해 줄 테니까.”

가장 궁금한 건 역시 서신을 쓴 사람에 대해서였다. 그 사람의 필체가 어째서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지도 궁금했다.

무슨 질문부터 해야 할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하지만 고민 끝에 흘러나온 질문은 아주 간단했다.

“다로야?”

“음.”

많은 것을 함축한 질문이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직접적으로 다로의 이름을 입에 올릴 줄은 몰랐던지 담덕이 잠시 얼빠진 얼굴을 했다가 곧 웃음을 터트렸다.

“너무 한 번에 핵심을 찌르는 거 아냐?”

답을 바라고 한 질문은 아니었는지 담덕이 쉬지 않고 말을 이었다. 어느새 그의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사라져 있었다.

“후연에 간자를 심어 두었어. 정공법만으로 상대할 수도 있겠지만, 피해를 줄일 수 있는 다른 수가 있는데 무식하게 정면 돌파를 할 이유는 없지. 네가 받은 서신 역시 그 간자가 보낸 거다.”

“지설은 모르는 사람이라고 했어.”

“그랬겠지. 그 간자의 존재는 나와 제신만 알고 있으니까.”

“그럼 그 간자의 이름이……”

다로야?

질문이 채 완성되기도 전에 담덕이 내 말을 가로챘다.

“부훈영.”

담덕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름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순식간에 머리가 새하얗게 물들었다.

“부훈영?”

멍하니 그 이름을 되새기고 나서야 조금씩 정신이 돌아왔다.

“모용희의 부인, 그 부훈영 말이야?”

“그래. 그 부훈영.”

“다로가 아니라?”

내 질문에 담덕이 픽 웃었다.

“동시에 다로이기도 하지.”

대수롭지 않다는 듯 흘러나온 말에 또다시 머리가 멍해졌다.

어째서 고구려의 다로가 모용희의 부인, 전진의 황족 부모의 딸 부훈영이 된 것일까?

하지만 그 의문보다도 먼저 다로가 살아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묘해졌다.

“죽은 게 아니었구나.”

“겨우 살려 냈지. 제신이 애를 많이 썼어.”

나는 신라에서 고구려로 돌아왔던 날 마주했던 제신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날, 다로의 이야기를 생각보다 덤덤한 얼굴로 피하던 그의 모습이 이제야 조금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살려냈으면서 왜 곁에 두지 않은 거야?”

담덕이 아닌 제신을 향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이 자리에 없었으므로, 나의 질문에 대답을 해 줄 수가 없었다.

“다로는 해사을에게 목숨을 구원받아 그를 위한 간자가 되었다지. 하지만 그에게 버림받아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다. 그걸 제신이 구해 줬고. 그럼 이다음에 다로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가는 답이 있었다. 하지만 너무 멍청하고 슬픈 답이었다.

나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이번엔 오라버니의 간자가 되기로 한 거야? 어차피 죽을 목숨을 오라버니가 살려 줬으니까?”

담덕은 아무 말이 없었다. 내 말이 정답이라는 뜻이었다.

* * *

부훈영.

그녀의 정체를 제대로 알고 나니 여태까지 흥미롭게 들었던 이야기들이 모두 비극으로 변모했다.

모용희의 총애, 막대한 부와 권력, 지상 낙원 같은 용등원, 사람들의 시기와 질투 혹은 비난까지도.

다로는 그 어떤 것도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제신이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제신은 다로를 사랑했다. 애틋한 그 마음을 내가 직접 보았는데, 그녀가 간자를 자처하며 모용희의 부인이 되는 꼴을 지켜보기만 했다.

도대체 왜?

“어찌 그런 표정이야?”

씩씩거리며 다원에 나타난 나를 보며 제신이 눈을 껌뻑였다. 찻잎을 정돈하며 나를 훑어보는 눈빛에 억눌렸던 답답함이 한 번에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왔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뭐가?”

“다로 말이야!”

씩씩대는 나를 이상하게 보던 제신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어찌 알았어?”

“후연에서 온 밀서를 받은 사람이 나라는 걸 잊었어? 나도 다로의 필체 정도는 알아.”

“그땐 아무 말 없었잖느냐.”

“다로 이야기를 꺼내면 오라버니가 괜히 신경 쓸까 봐 일부러 묻지 않은 거야. 그런데 어제 담덕에게 물었더니……”

“진실을 전부 말해 주셨어?”

“그래.”

내 말에 제신이 한숨을 내쉬며 멈췄던 손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가 혼인을 하기 전까지만 해도 찻잎 손질에 서툴렀는데, 어느새 제신은 능숙하게 찻잎을 다루고 있었다.

“다 들었다니 이야기가 쉽겠구나. 일이 그리되었어.”

“일이 그리되었다고? 그리 쉽게 정리될 일이야?”

황당해져 제신을 보았지만 그의 시선은 찻잎에만 꽂혀 있었다.

“그리 말하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데?”

“좋아하잖아. 살아 있잖아. 그럼 곁에 둬야지 어찌 다시 간자로 만들어 후연에 보내?”

“곁에 두라고? 다로를?”

제신이 의자에 기대며 헛웃음을 흘렸다.

“내 아버지를 죽게 하고 내 누이까지 죽이려 한 소노부. 그들의 간자였던 다로를 곁에 두라고? 너 지금 그리 말하는 거냐? 그 사람들 때문에 오랫동안 외로웠던 네가?”

제신의 손에 들려 있던 찻잎이 그의 손힘에 뭉개졌다.

“그래. 한때 나는 그 사람을 마음에 품었다. 하지만 그 사람에겐 내가 미처 모르는 어둠이 있었어. 하여 나는 배신당했고, 소중한 것을 잃었고, 그 사람이 미워졌다.”

“정말 미워진 거라면 왜 살려 주었어?”

“그리 쉽게 죽지 않기를 바랐으니까. 내게 미안하다고 말한 채로, 그렇게 편안하게 눈감는 건 용납할 수 없었어.”

제신의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의 목소리는 차가웠지만, 나는 그의 누이로 누구보다 그의 성정을 잘 알았다.

“거짓말.”

단호한 말에 제신이 나를 힐끗 보았다.

“오라버니는 거짓말 진짜 못해.”

나의 타박에 제신이 픽 하고 웃음을 흘렸다.

차라리 찡그릴 것이지.

속없이 웃는 모습에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제신은 여전히 다로를 연모하고 있었다. 연모해서 신뢰하고, 신뢰하기에 그녀의 서신을 담덕에게 전했다.

그의 믿음에 화답하듯 다로의 서신은 모두 진실이었다.

나는 두 사람의 꼬여 버린 인연이 안타까워 치맛자락을 꽉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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