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낙화유수-30화 (31/38)

27장. 돌아오는 사람과 돌아가는 사람

길고 길었던 영락 10년이 저물고 영락 11년이 다가왔다. 그간 신라 왕의 건강은 꾸준히 나빠져, 결국 신라에서 볼모로 보냈던 실성을 데려가고 싶다는 뜻을 전해 왔다.

볼모로 타국에 보냈던 왕의 조카를 다시 데려간다.

이는 곧 신라 왕이 죽고 실성이 왕위에 오를 거라고 선언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신라의 왕위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이 없었지만, 그 자리에 오를 사람이 실성이라면 감회가 남달랐다.

이리 부인께서 기뻐하시겠어.

아들이 돌아오는 것만으로도 기쁜데 그가 왕위에 오른다. 그녀로서는 경사가 겹친 셈이었다.

나는 신라로 돌아가는 실성의 손에 이리 부인에게 보낼 서신을 부탁했다.

그간 몇 번 서신을 주고받았으나 실성이 직접 가져가는 서신은 남다른 의미를 가질 터였다.

담덕은 신라로 떠나는 실성을 끝까지 환대했다. 백제가 여전히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북쪽의 후연이 우리를 압박하고 있는 상황이니 신라와의 관계를 긍정적으로 끌고 나갈 필요가 있었다.

실성이 신라로 돌아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빈자리를 채우듯 멀리 남쪽으로 떠났던 사람이 돌아왔다. 담덕의 명으로 가야에 머물렀던 운이었다.

나는 누구보다 그의 귀환이 기뻤다. 운은 나를 돕겠다고 태왕에게 정보를 숨겼고, 그 잘못을 이유로 길고 긴 징계를 받았다. 꼬박 1년을 가야 땅에서 홀로 지냈으니 대단한 벌이었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가장 먼저 담덕에게 복귀를 보고한 운은 그 뒤에 나의 처소를 방문했다. 소식을 듣고 나와 함께 운을 기다리고 있던 연이 반가워서 펄쩍 뛰었다.

“도림 선생님!”

“오랜만이네요, 그 이름.”

깍듯하게 높임말을 쓰는 운을 보며 연이 눈을 크게 떴다.

“왜 그러세요?”

“이제 대고구려의 왕자님이 되셨으니 응당 존중을 받으셔야지요.”

“하지만…… 도림 선생께서 그러시면 이상한데요…….”

연은 잘못을 저지르는 자신을 향해 ‘연이 너 이 녀석!’ 하고 호통을 치던 운이 깍듯하게 변한 것이 영 어색한 것 같았다. 운은 크게 웃으며 어색해서 어쩔 줄 모르는 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금방 익숙해지실 겁니다. 한 번씩 제 호통이 그리워지시면 그건 해 드릴 수도 있고요.”

“아뇨. 그건 안 그리워집니다.”

연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고민도 없이 흘러나온 대답에 운의 입에서 다시 한번 큰 웃음이 터졌다.

“역시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나는 웃음을 멈출 줄 모르는 운에게 자리를 권하고 차를 내주었다. 연을 돌려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연아, 너는 이제 태학으로 돌아가야지. 선생을 보겠다고 잠시 나온 거니까.”

“예. 하지만 나중에 또 찾아뵐 거예요.”

“이제 자주 만날 수 있을 겁니다. 또 바둑이나 두지요.”

“바둑…… 연습을 많이 해 두겠습니다.”

연이 어색하게 웃으며 서둘러 처소를 나섰다. 매번 지기만 하는 바둑을 또 두는 건 내키지 않는 모양이었다.

“어지간히도 지는 걸 싫어해요, 연이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왕자님의 승부욕은.”

우리는 사라지는 연이를 보고 웃다가 비로소 지난 이야기들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가야에선 뭘 하고 지내셨어요?”

“신라에서 늘 하던 일이죠. 이상한 일이 없는지 살피고, 중요한 일이 있으면 보고하고. 흔한 세작 노릇입니다.”

연을 대하는 말투만이 아니라 나를 대하는 말투 역시 달라져 있었다. 어색함에 나도 모르게 말문이 막혔더니 그가 씨익 웃었다.

“어찌 아드님과 똑같으십니다. 황후 자리에 오른 것도 제법 되었는데, 아직까지 이런 말투가 어색하십니까?”

“다른 사람들이 그러는 건 괜찮아요. 태림은 물론이고 지설도 말투는 원래부터 깍듯하게 했었고……. 하지만 운 도령은 아니잖습니까.”

“차차 익숙해지실 겁니다. 마마도, 저도.”

“마마…… 운 도령이 그리 말하니 왜 이리 소름이 돋죠?”

“말하는 저도 마냥 편한 건 아닙니다만.”

운이 그렇게 대꾸하며 제 팔을 걷어 보였다. 과연 그의 팔에도 오소소 닭살이 돋아 있었다.

말투만 높임말로 변했을 뿐이지 태도는 여전하군.

운의 속이 여전하다는 것을 깨닫고 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내가 국혼을 올린 후 태도를 완전히 뒤바꾼 사람이 많았다. 스스럼없이 나를 대하던 비로의 대원들 중에도 나를 어려워하는 사람이 생겼다.

황후라는 자리가 원래 그런 것이겠지만 순식간에 ‘우희’가 아닌 ‘황후’로 받아들여지는 건 느낌이 이상했다. 아마 담덕은 늘 이런 기분을 느끼고 살았을 것이다.

“멀리 가야에서도 소식은 들었습니다. 승평 님과도 잘 지내신다면서요?”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으니까요.”

“……대단하시네요. 그새 마음 정리를 잘하셨군요.”

결론적으로 내가 돌아올 자리를 만들어 준 아이였다. 미워할 일은커녕 고마워할 일들뿐이니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기꺼이 그 아이를 나의 또 다른 아들로 키웠다. 연도 동생이 생겼다며 크게 기뻐했다.

승평의 진짜 정체를 모르는 사람들은 지금의 운처럼 나의 관대함을 칭찬했다. 과연 나라의 어머니다운 배포라고 말이다.

속사정을 전부 아는 나는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민망해서 귀가 화끈거렸다. 승평이 정말 다른 여인과 그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라면, 지금처럼 순수하게 애정을 줄 자신이 없었다. 그러니 나를 향한 칭송은 모두 허상이었다.

“가야에서 힘들지 않았어요? 전부 나 때문에 일어난 일이에요. 어떻게 사죄를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늘 말했지만 제가 원해서 한 일입니다. 마마께서 미안한 마음을 가지실 이유는 없지요. 그래도 영 마음에 걸리시거든 좋은 보답이나 해주시면 되지요.”

“좋은 보답이요?”

“지설 님을 통해 들었습니다. 영이의 병을 돌봐 주고 계시다고요.”

“아.”

영을 다시 만난 후 나는 그녀의 병을 꾸준히 살피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한 번에 답을 찾지는 못했다.

나는 현대의 한의학을 모두 기억하지 못하고, 이 시대의 의서는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 결국 내가 답을 찾아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약방문을 살피며 조금씩 약재를 바꿔 보는 중이었다. 약재를 바꿀 때마다 호전되는 증상과 악화되는 증상을 정리하며 증상에 대처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시원한 성과가 있었다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텐데…… 그렇지 않아서 그게 보답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게다가 난 운 도령에게 진 빚이 아니었더라도 영이의 병환을 살폈을 거예요. 그러니 그거 말고 다른 보답을 생각해 줘요.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거라면 꼭 들어줄 테니까.”

“……기억하지요.”

운이 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영이는 어찌 만나십니까? 영이의 상황을 생각하면 그 아이가 궁에 들지는 못할 것이고……”

“답은 하나뿐이지요! 매번 위장을 하고 궁 밖으로 나가십니다!”

어느새 비어 버린 찻잔을 다시 채워 주기 위해 다가온 달래가 기다렸다는 듯 소리쳤다.

달래는 내가 신라에 숨어 지내는 동안 절노부의 영토로 돌아가 있었다. 절노부로 돌아간 뒤 제가 아가씨를 잘 지키지 못해 이 사단이 난 거라며 자책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래서 국혼을 치른 뒤 다시 달래를 부르려고 했을 때에도 그녀는 아가씨를 모실 자격이 없다며 극구 사양했다. 몇 번이나 어르고 설득해 시녀로 들였더니, 몇 달 만에 그녀는 예전처럼 내게 할 말을 다 하는 몸종 달래로 돌아왔다.

“어찌 그러시는지 모르겠다니까요. 밖에 위험한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혹시나 마마를 알아보고 해코지하는 자가 있으면 또 어째요? 폐하께서도 마마의 비밀스러운 나들이를 전부 아시는데, 어찌 눈감아 주고 계신지 모르겠다니까요.”

오랜만에 아는 얼굴을 만났다고 달래는 신나게 내 뒷말을 늘어놓았다.

아니, 내 앞에서 늘어놓으니 뒷말은 아닌가?

쓸데없는 고민을 하고 있으니 운이 픽 웃음을 흘렸다.

“오래전에도 느꼈지만 참으로 좋은 시녀구나. 하지만 너무 걱정할 것 없다. 폐하께서 그냥 두시는 건 다 이유가 있어서니까. 보이지는 않아도 주변에서 마마를 지키는 눈들이 많을 거다.”

실제로 내가 밖에 나설 때마다 호위가 두엇 따라붙었다. 눈에 띄는 태림이나 지설이 아니라, 위장 호위를 정식으로 훈련받은 근위대원들이었다.

개중에는 형오도 있었다. 오래전 도압성으로 떠나던 길에 동행했던 병사였다. 어느새 그가 훈련을 받고 정식 근위대원이 되었다고 했다.

밖으로 나설 때마다 나를 따라오는 호위가 있다는 것도 익숙한 그의 얼굴을 발견하고서야 깨달은 일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말을 걸었더니 내가 제 얼굴을 아직까지 기억할 줄은 몰랐던지 형오가 감격에 찬 얼굴을 했었다.

-어찌 저를 다 기억하십니까?

-내가 한 번 살렸던 사람이잖아? 그런 사람들의 얼굴은 절대 잊어버릴 수가 없지.

형오, 그 말에 더 감격한 것 같았지.

나는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운의 말에 동조했다.

“그래. 너도 이제 알잖니. 매번 익숙한 얼굴들이 우리를 따라온다고.”

“마마께서는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는 분이시니 그 정도 사람들로는 택도 없습니다.”

“보셨죠? 제 시녀가 이리도 저를 못 믿습니다.”

운을 바라보며 신세를 한탄했으나 그도 내 편은 아니었다.

“전적이 있으시니 말이지요.”

전과자에게도 갱생의 기회는 주는 법이거늘, 이곳 사람들은 내가 훌쩍 떠났던 날의 기억을 잊어 줄 생각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그러는 건 이해하지만 공범께서 그러시면 곤란하지요.”

“주범은 마마십니다.”

“그리 말하면 또 제가 할 말이…….”

아무튼 말로는 지는 법이 없는 사내였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영이의 상태를 살피러 가는 날입니다. 함께 가시겠습니까?”

“예. 폐하께 이미 들었습니다. 마침 마마께서 나서는 날이시니 함께 가 보는 게 어떻겠느냐고요.”

“……아무리 그래도 비밀 나들이인데. 너무 공공연하게 떠들고 다니시네요, 우리 폐하께서.”

“제가 마마의 일에 대해 입이 얼마나 무거운지는 그분께서 가장 잘 아시니까요.”

운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니 오늘은 제가 모시지요.”

“지설의 집은 알아요?”

“……네? 지설 님의 집이요? 그분은 순노부 사씨의 저택에서 나와 홀로 지내지 않습니까?”

오래전 비로에서 함께 임무를 수행한 적이 있어 지설의 사정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여유롭게 웃던 운의 얼굴에 처음으로 금이 갔다. 나는 설마 하는 심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영이가 지금 지설의 집에 있잖아요. 그리 지낸 것이 한두 해가 아닌데요.”

“……한두 해가 아닙니까, 심지어?”

“폐하께서 말 안 하셨어요?”

“그저 믿을 만한 곳에서 보호하고 있다고만 하셨습니다. 전 감사하다고 인사를 올렸고요. 장소는 마마께서 아신다고만…….”

멍하니 말을 잇던 운이 미간을 찌푸렸다.

“역시 이건 폐하의 소심한 복수일까요?”

“아주 소심한 복수죠, 그거.”

오래전 지설의 집에 영이 있다는 것을 듣고 얼빠졌던 내 얼굴과 지금 운의 얼굴이 완전히 똑같을 것 같았다.

“이래서야 안내는 힘들겠어요. 오늘은 내가 운 도령을 모시죠.”

나는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서 달래를 바라보았다.

“달래야. 나들이 준비하자.”

* * *

나는 거리의 평범한 여인들처럼 소박한 옷차림을 하고 궁을 나섰다. 오늘은 비로의 본부까지 가 볼 생각이었으므로 달래는 궁 안에 남겨 두었다.

담덕이 잠행을 할 때 사용하는 문을 통해 익숙하게 궁을 빠져나가는 내 모습에 운이 고개를 저었다.

“궁을 나서는 게 아주 자연스러우십니다?”

은근한 질책이 담긴 목소리였다.

“뭐, 그렇죠.”

나는 일부러 운의 질책을 모른 척하며 앞으로 걸었다. 황후가 되었으니 얌전히 궁에 붙어 지내야 한다는 건 알고 있지만, 내가 견뎌 내기에 궁 안은 너무 평화로웠다.

그만큼 담덕이 궁 안을 잘 장악하고 있다는 뜻이지만.

이런 평화를 지켜 내느라 담덕은 정무에 많은 시간을 쏟았다. 늦은 밤에나 처소로 돌아와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으니 해가 떠 있는 동안 나는 혼자서 고요함을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

얼굴 보기 힘든 것은 연도 마찬가지였다. 태학에서 공부하며 친구 사귀는 일에 재미를 붙이더니 이제는 이 어미를 찾지도 않았다.

일곱 살이 되었으니 이제 그럴 때가 되긴 했지.

서운한 마음을 애써 누르며 나도 내가 할 일을 찾아 나섰다. 궁의 살림을 살피고, 유력한 귀족가 부인들과 친분을 쌓으며 황후로서 할 일을 했다.

하지만 우희로서의 할 일도 포기할 수 없었다. 국내성으로 돌아와 다원에서 키우기 시작한 차나무가 이제 겨우 쓸 만해졌고, 다친 대원들의 건강도 걱정되었다.

비로는 담덕의 가장 중요한 창과 방패였다.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도 있지만 그들을 돌보는 일 역시 내 손으로 하고 싶었다.

다행히 제신을 비롯한 비로의 대원들도 나의 마음을 이해해 주어 이렇게 비밀스러운 나들이를 나서는 날이면 한 번씩 비로에 들러 차나무와 대원들을 살폈다.

-한번 비로는 영원히 비로지요! 어떻게 의리가 변합니까?

그렇게 말해주던 고마운 얼굴을 떠올리면 웃음부터 나왔다. 이제 위치가 달라져 버린 나를 부담스러워하는 대원들도 있었지만 그런 시선에도 익숙해지는 수밖에 없었다.

이제 나는 우희면서 황후니까.

하지만 오늘은 지설의 집이 먼저였다. 운이라면 비로의 새로운 본부보다 여동생의 얼굴을 먼저 보고 싶을 것이다.

나는 조심스레 운의 얼굴을 힐끗거렸다. 좋은 집안의 도련님으로 태어나 팔자에도 없는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는 이 남자의 외로움에 내가 크게 한몫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거웠다.

운과의 인연이 여기까지 흘러올 거라고 누가 생각했을까?

머리에 꽂는 비녀 하나 갖겠다고 실랑이를 벌였던 때에는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하지만 운이 자원해 도압성으로 출병한 이후 많은 것이 달라졌다.

“뭘 그렇게 보십니까?”

힐끗거리는 시선을 기어이 느꼈는지 운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힐끗거리는 시선에 그다지 좋은 생각이 담겨 있지 않다는 걸 느낀 것 같았다.

“아뇨. 그냥 참 신기하다 싶어서요. 처음 만났을 때는 비녀 하나를 두고 싸웠는데, 이제는 든든한 동지처럼 나란히 걷고 있잖아요.”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유대감이 있다. 강하고 두터운 신뢰.

그런 것이 나와 운 사이에 생기다니.

“저라고 생각했겠습니까.”

피식 웃음을 흘린 운이 곧 눈을 내리깔았다.

“그랬죠. 한때는 비녀 하나를 두고 다투던 앙숙이었는데 말입니다.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군요.”

먼 옛날을 회상하는 그의 눈빛이 흐렸다. 어쩐지 분위기가 무거워진 것도 같았다.

운이 말하는 ‘이렇게 되었다’는 어떤 의미일까?

흐려진 그의 얼굴을 보니 선뜻 질문이 나오지 않아서, 나는 금세 다른 쪽으로 화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그때 그 비녀는 어찌 됐어요?”

“비녀요?”

“그때도 궁금했거든요. 도대체 왜 그렇게 기를 쓰고 비녀를 가져가나 하고요. 여인의 것이니 본인이 쓸 수 있는 것도 아닌데요.”

“아.”

의아함을 가득 담은 나의 물음에 흐렸던 운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걸렸다.

“딱히 쓸모가 있어서 가져간 건 아닙니다.”

“……네?”

담백한 대답에 어이가 없어졌다.

그렇게 기를 쓰고 빼앗아 갔으면서 딱히 쓸모가 있었던 건 아니라니!

떡 벌어진 내 입을 보며 운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처음엔 그냥 도와줄 생각이었습니다.”

“……세상에. 그리 시비 거는 걸로 사람을 돕기도 하나요?”

“아니, 시비를 걸겠다고 나선 것이 아니라……”

운이 멋쩍은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 장사치가 시장에서 유명한 자입니다. 어수룩한 귀족 아가씨들한테는 곱절이나 돈을 올려 받지요. 그날도 그런 아가씨가 하나 걸려들었기에 도와줘야겠다 생각했는데 말이죠.”

“……그 어수룩한 귀족 아가씨가 나였던 거군요. 그리 좋은 생각을 했으면 도와주기만 할 것이지 왜 비녀는 가져갔어요?”

“처음에는 그러려고 했죠. 그런데 발끈하면서 뭐라고 종알거리기 시작하는데, 말 한마디도 지지 않고 받아치는 그 모습이…….”

부드럽게 웃으며 그날의 일을 이야기하던 운이 곧 말끝을 흐렸다. 이어질 말을 기다리며 그를 바라보니 그가 미묘하게 미간을 찌푸리며 깊게 숨을 들이켰다.

“……그 모습이 아주 얄미워서 순순히 비녀 주기가 싫더군요.”

“뭐라고요!”

발끈하는 나를 보며 운이 픽 하고 웃었다.

“아. 지금처럼 발끈하셨죠, 그때도.”

“지금이라도 내게 줄 생각은 없어요? 설마 아직까지 내가 얄미운 건 아닐 거 아녜요?”

“……그러고 싶습니다만, 이제 없습니다.”

“잃어버린 거예요?”

“……네. 아주 오래전에.”

그렇게 말한 운이 다시 한번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니 드리고 싶어도 드릴 수가 없습니다. 이제는요.”

“그러게 왜 그렇게 가져갔어요? 처음부터 필요한 사람에게 줬으면 아깝게 잃어버릴 일도 없잖아요.”

“그러게 말입니다. 처음부터 가지지 말았어야 했는데…….”

운이 묘하게 기운 빠진 말투로 중얼거릴 즈음 우리는 지설의 집에 도착했다.

영이 머무르기 시작한 이후 비로의 대원들이 저택 근처를 지키고 있었으므로, 접근하는 사람을 발견한 대원 하나가 먼저 우리에게 다가왔다.

“오셨습니까.”

눈에 익은 대원이라 반갑게 인사를 하려는데 그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왜 그래요? 얼굴이 안 좋은데.”

“저…… 오늘은 먼저 온 손님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돌아가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대원이 나와 운을 쳐다보며 난처한 듯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지설이 손님을 만나고 있을 동안 난 영이를 보면 되죠. 늘 그렇게 하잖아요?”

어차피 나의 목적은 영이었다. 지설이 손님맞이를 하고 있다는 이유로 내가 돌아갈 까닭이 없었다.

하지만 내 말을 듣고서도 대원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것이…… 오늘 손님은 지설 님이 아니라…… 아가씨를 찾아오신 분이라…….”

머뭇거리며 흘러나온 말에 나의 눈이 커졌다.

“영이를 찾아온 손님이라고요?”

영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몇 없었다. 그 몇 안 되는 사람 중에 영을 만나겠다고 찾아올 자는 손에 꼽을 정도였고, 그 손에 꼽을 사람 중에 지설이 순순히 집 안으로 들여보낼 사람은……

그런 사람이 있기나 한가?

머릿속을 떠도는 의문에 눈만 껌뻑이는 내게 대원이 모래를 씹은 사람처럼 불편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소노부의 고추가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이름에 나와 운의 눈이 커졌다.

* * *

초상집보다 못한 분위기였다.

지설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서 있었고, 영은 눈물만 뚝뚝 흘렸고, 고추가는 귀신처럼 매서운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노부의 수장. 고추가 해서천.

멀리서 본 적은 많았지만 이처럼 가까이에서 그를 마주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멀리서 볼 때도 그랬지만 가까이서 마주하니 기세가 더 대단했다. 돌아가신 선대왕이 조용히 때를 기다리는 신중한 맹수였다면, 이쪽은 이빨을 세우고 으르렁거리는 예민한 맹수였다.

“대단한 손님이 오셨군요.”

방 안으로 들이닥친 나를 보며 해서천이 코웃음을 쳤다. 뒤이어 그의 시선이 나와 함께 온 운에게 닿았다.

“거기에다 뒤에는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몰랐던 놈까지 달고 계시고.”

싸늘한 비웃음에 뒤에 있던 운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내게는 원수 중의 원수지만, 운에게는 아버지였다. 오랜만에 보는 아버지를 앞에 두고 그의 마음도 복잡할 터였다.

“이곳엔 어찌 오셨습니까?”

내 물음에 해서천이 픽 웃었다.

“제가 못 올 곳에 왔습니까? 딸아이를 만나러 온 아비에게 어찌 그런 것을 물으시는지. 당연히 귀한 딸을 만나러 왔지요.”

“지난 몇 년간 발길을 않으셨다 들어서요. 그런 분인 줄 제가 미처 몰랐습니다.”

차분하게 대답하는 나를 보며 해서천이 팔짱을 끼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황후를 앞에 두고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다.

“얼굴이 아주 좋아지신 걸 보니 황후 자리가 좋기는 한 모양입니다. 부디 그 자리를 잘 지키셔야 할 텐데요.”

“아버지.”

“해운. 그 입 다물어라. 네가 날 아버지로 생각하기는 하더냐? 집안을 내팽개치고 떠돌아다닌 주제에 태연하게도 나를 부르는구나.”

“아버지 뜻을 따르지 않으면 자식이 아닙니까? 피는 진해서 거스를 수 없다고 하셨잖습니까.”

“그래. 그리 말했지. 그런데……”

해서천의 눈이 운과 영을 훑었다. 그의 시선에 영이 움찔거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집안 꼴이 아주 개판입니다. 누구 덕분인지, 이것 참.”

해서천이 이번에는 웃으며 나를 보았다. 오래전에 그를 보았을 때와는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그때 해서천은 전형적인 귀족이었다. 야심으로 속이 새카맣기는 했으나, 겉으로는 반듯하게 예의를 지키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해서천은 아니었다. 반듯하던 자세는 흐트러졌고, 야심으로 빛나던 눈은 악에 받쳐 있었다.

왕으로 세우고자 했던 아들도, 황후로 만들고자 했던 딸도 그를 따르지 않고 떠났다.

모든 계획이 틀어져 버린 그는 예민하고 날카로워져 오랫동안 굶주린 맹수처럼 위험해 보였다.

“내 딸을 데려가겠다.”

해서천이 지설을 바라보며 선언했다.

“불가합니다.”

“내가 내 딸을 데려가겠다는데 사씨의 꼬마가 무슨 권리로?”

다 큰 어른을 꼬마라 부르며 해서천이 웃었다. 일부러 지설의 신경을 긁겠다고 한 말이 분명했다.

“내 딸을 내어주지 않을 생각이었다면 처음부터 문을 열어 주지 말았어야지. 끝까지 여기엔 없다며 눈 가리고 아웅이라도 했어야 할 거 아닌가.”

“그건…….”

지설이 곤란한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영이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가 열어 달라고 했어요. 아버지와 대화 정도는 하고 싶다고요.”

“저 자식보다는 네가 조금 더 낫구나. 이 아비를 완전히 버리지 못했어. 그래. 넌 어려서부터 그랬지. 이 아비를 살뜰하게 챙겼어.”

영의 말에 해서천이 운을 힐끗 바라보며 그녀의 앞에 다가갔다.

“영아. 가출은 여기서 끝이다. 이제 네가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야지.”

“말씀드렸잖아요. 아버지께서 욕심을 버리시면 그때……”

“욕심!”

해서천이 헛웃음을 흘리며 영의 두 손을 잡았다.

“이제 와 내가 무슨 욕심을 부리겠느냐? 폐하를 칭송하는 목소리가 온 땅에 울려 퍼지고, 아드님을 두신 황후까지 계신데…… 이제 와 내가 무슨 욕심을 부려? 난 그저 내 딸을 되찾고 싶을 뿐이다.”

영을 향한 해서천의 목소리는 다정했다. 따뜻한 목소리에 영의 두 눈이 흔들렸다.

“참말이세요? 참말로 그리 생각하시는 건가요?”

“그럼. 내 나이가 몇이냐. 이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어. 그 아까운 시간을 소중한 딸아이와 함께하며 보내고 싶구나.”

“아버지!”

영이 감격한 목소리로 해서천을 끌어안았다. 그런 영을 마주 안는 해서천의 얼굴에는 은은한 미소가 가득했다.

따뜻한 아버지의 미소.

하지만 그 미소가 꺼림칙하게 느껴지는 사람은 나뿐일까?

* * *

결국 영은 해서천과 함께 떠났다. 지설은 한달음에 궁으로 돌아가 담덕에게 그 사실을 고하며 고개를 숙였다.

“제 불찰입니다, 폐하. 무슨 일이 있어도 문을 열어 주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지금까지 해영을 우리 쪽에 둘 수 있었던 건, 그녀의 협조가 있었기 때문이야. 그녀가 마음을 돌렸으니 어쩔 수 없다.”

담덕은 생각보다 담담하게 상황을 받아들였다.

“해운은?”

“그도 함께 갔습니다. 아가씨만 혼자 그 저택으로 보낼 수는 없다면서요.”

“그래. 그랬겠지.”

담덕이 미간을 찌푸리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마침 해운이 돌아왔을 때를 맞춰 이 일을 벌였다. 둘 모두를 집안으로 데려가기 위한 수였겠지. 이빨이 빠져도 호랑이는 호랑이. 과연 만만치 않은 상대다.”

“그럼 폐하께서는 욕심을 버렸다는 해서천의 말을……”

“당연히 믿지 않는다. 새빨간 거짓이겠지. 그리 쉽게 버릴 수 있는 욕심이었다면 진즉에 버렸어. 소노부 쪽으로 감시를 더 강화해야겠다.”

“예, 폐하.”

“우희와 연의 호위도 더 늘리고.”

지설에게 지시를 내린 담덕이 이번에는 내게 당부했다.

“당분간 궁을 나서지 않는 게 좋겠다. 답답하겠지만 고추가의 속셈을 알아내기 전까지만 참아 줘.”

“나도 보고 들은 것이 있어. 네가 말하지 않아도 당연히 그렇게 할 거야.”

내 대답에 담덕이 의외라는 듯 물끄러미 나를 보았다.

“왜 그렇게 봐? 내가 그렇게까지 신뢰가 없었어?”

여태까지 내가 그렇게 날뛰었던가? 내가 과거의 행적을 반성하는 사이 담덕의 눈이 반달처럼 휘어졌다.

“착하네, 우리 우희.”

담덕이 칭찬과 함께 손을 뻗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애정이 가득 담긴 손길이 나쁘지는 않았으나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신경 쓰였다.

담덕의 손을 밀어내며 지설의 눈치를 보니 그가 못 말리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전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편하게 이야기 나누십시오.”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지설이 재빨리 공간을 떠났다. 담덕과 함께 덩그러니 남겨진 나는 더욱 민망해졌다.

“갑자기 왜 어린애 취급이야?”

“글쎄. 이 차림을 보니 옛날 생각이 나서 그런가. 이런 모습은 또 오랜만이네.”

담덕의 눈이 내 모습을 살폈다. 갑자기 일어난 일로 급히 돌아오느라 머리며 옷차림이 나설 때 그대로였다. 눈에 띄지 않고 수수한 차림을 하느라 화장도 하지 않았다.

지금 이 모습을 궁인들이 보면 곤란하겠다.

그런 결론에 이르자 옷부터 갈아입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급하게 오느라 옷 갈아입을 생각을 못 했어. 갈아입고 올게.”

하지만 담덕이 자리에서 일어서는 내 팔을 부드럽게 잡아끌었다. 앞으로 나서려던 몸이 그대로 뒤를 향해 끌려가 담덕의 무릎 위에 안착했다.

한 손으로 내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은 담덕이 다른 손으로 길게 풀어 내린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밖에 다닐 땐 항상 이렇게 머리를 내려?”

담덕은 내 머리카락이 장난감이라도 된 것처럼 만지작거리며 질문을 던졌다. 궁에 있을 때에는 늘 머리를 올리고 다니니 풀어 내린 머리로 그를 만나는 건 오랜만이었다.

“응. 나들이를 갈 때는 늘 이 모습이야. 오랜만이지?”

웃으며 물었더니 담덕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유부녀가…….”

무언가 이야기하려던 담덕이 중간에 말을 멈추고 입을 꾹 다물었다. 왜 그러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니 담덕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이건 너무 유치한 말이지.”

“왜? 무슨 말을 하려고? 유부녀가 뭐? 말해 봐. 유치하다고 안 할게.”

내 말에 잠시 망설이던 담덕이 조금 불만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유부녀가 왜 처녀 행세를 하고 다니는데?”

혼인을 한 여자들은 머리를 올린다. 그게 맞긴 하지만.

담덕을 바라보는 내 눈이 가늘어졌다.

“……유치해.”

“유치하다는 말은 안 한다며?”

“들어 보니 너무 유치해서 유치하다는 말을 안 할 수가 없었어. 유치한 태왕 폐하.”

“도대체 몇 번이나 말하는 거야?”

불만스럽게 투덜거리는 모습에 웃음이 터졌다.

“머리 올리는 건 불편해서 그래. 움직이다 보면 흐트러지는데, 올림머리는 혼자서 손질할 수가 없단 말이야.”

다원에서 차나무를 돌보며 분주하게 움직이다 보면 머리가 금세 흐트러진다. 풀어 내린 머리야 혼자 만질 수 있지만, 올림머리는 손이 많이 가서 비밀스러운 나들이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의 설명에도 담덕은 불만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그래도 마음에 안 들어. 네가 임자가 있는 것도 모르고 온갖 놈팡이들이 꼬일 거 아냐.”

“네가 붙여 준 근위대원들이 가까이 다가오려는 사내들은 다 차단하던걸, 뭐.”

“그러니까…… 다가오려던 사내들이 있기는 했다?”

“뭐. 아주 없지는 않지. 내가 좀 곱게 생기긴 하였잖아?”

한 나라를 뒤흔들 미모는 못 되어도 못난 얼굴은 아니었다. 턱을 치켜들며 일부러 젠체를 하자 담덕의 얼굴이 더 일그러졌다.

“앞으로는 얼굴 가리고 다녀. 삿갓 큰 거, 그런 거 쓰면 되잖아.”

얼굴을 가리라고 말하면서도 밖으로 나가지 말라는 말은 않는 것이 담덕다웠다.

속에서부터 마음이 따뜻해졌지만 손으로 삿갓 크기를 가늠하는 담덕의 얼굴이 진지했다. 여기서 납득했다가는 앞으로 외출을 할 때마다 정말 불편한 삿갓을 쓰고 다녀야 할 판이었다.

“차라리 이마에 유부녀라고 써 붙이고 다니라고 하지, 왜?”

타박을 하겠다고 던진 말에 담덕의 얼굴이 묘해졌다.

“그거…… 참으로 좋은 생각인데?”

“뭐라고?”

“남편이 있는 여인은 이마에 유부녀라는 글을 쓰고 다녀야 한다는 법을 만들어야겠어.”

담덕의 손가락이 글을 쓰는 듯 내 이마 위에서 가볍게 움직였다.

“농담을 진담으로 받으면 곤란하거든요, 폐하?”

나는 담덕의 손을 잡아끌어 내리며 불만을 토로했다.

“그리고, 왜 여인만 그래야 해? 여인에게 그리하라고 할 거면 부인이 있는 사내들도 유부남이라고 이마에 새겨 넣어야지.”

“그거 좋네. 내 이마에 적어 줄래? 유부남이라고.”

말도 안 된다며 펄쩍 뛸 줄 알았던 담덕은 외려 눈을 감으며 제 이마를 내 앞에 내밀었다.

“내가 못 할 줄 알고?”

나는 손가락으로 담덕의 이마에 글씨를 새겼다. 유부남, 바보, 고집쟁이, 일중독자…… 멈출 줄 모르는 내 손가락에 담덕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도대체 뭘 그렇게 쓰는 거야?”

“모르겠어?”

“음. 다시 천천히 써 봐.”

담덕이 자세를 고쳐 잡았다. 나는 한결 진지해진 그를 빤히 내려다보며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고담덕은 연우희의 남편이다.

“뭐라고 썼는지 알겠어?”

“내가 네 남편이라고.”

대답하는 담덕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었다. 기분 좋게 올라간 예쁜 입꼬리를 보니 몸이 절로 움직였다.

나는 담덕의 어깨에 두 손을 올리고 그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닿았다 떨어지는 감촉에 굳게 닫혀 있던 담덕의 눈이 번쩍 뜨였다.

“……글을 쓰랬더니 뭘 하는 거야?”

그렇게 묻는 담덕의 얼굴이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이게 무슨 사춘기 청소년 같은 반응이람.

순진한 아가씨를 희롱한 아저씨가 된 기분이었다.

아니, 내가 내 남편한테 입을 맞추는 게 뭐가 문제라고?

나는 일부러 더 뻔뻔하고 태연하게 눈을 깜빡이며 담덕을 보았다.

“뭐 하긴. 입 맞췄지.”

“태왕의 집무실에서 참으로 대담하시네요, 황후.”

“매번 집무실에서 제 입술을 물고 빠는 분이 하실 말씀은 아닌 듯합니다, 폐하.”

“많이 하고서 그런 소리를 들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억울하면 많이 하시든지요.”

“그래도 되나?”

“되지. 그런 게 되니까 부부지.”

“부부.”

부부, 남편, 아내. 담덕이 좋아하는 몇 안 되는 말 중 하나였다.

“그러네. 그런 게 되니까 부부구나.”

시원하게 씨익 웃어 보인 담덕이 나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내 뒤통수를 단단히 붙잡았다.

“그럼 사양 않고.”

뒤이어 닿아 온 입술은 따뜻했다. 저항하지 않고 열린 입술 사이로 들어온 말캉한 살덩이가 입안의 여린 부분을 문질렀다. 따뜻하고 다정했다.

온몸이 바짝 긴장했다. 담덕의 어깨를 잡은 손에도 힘이 들어갔다.

그건 담덕도 마찬가지였다. 맞닿은 몸에 딱딱하게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가 내 뒤통수를 더욱 자신의 가까이로 끌어당기자 입맞춤이 더 깊어졌다.

여기서 입맞춤이 더 깊어지면 곤란했다. 아직은 날이 밝았고, 밖에는 귀가 좋은 태림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만하라는 뜻을 담아 뺨을 쓸어내렸는데, 어째서인지 잠시 멈칫했던 담덕이 강하게 내 입술을 깨물었다.

아파서 미간을 찌푸리자 그걸 달래기라도 하듯 그가 입술을 할짝거렸다.

“병 주고 약 주는 거야?”

내가 황당해져서 물으니 담덕이 불만스럽게 투덜거리며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는 너야말로 왜 날 자극해? 참기 힘들단 말이야.”

“역사는 밤에 쓰셔야죠, 폐하.”

“이제 곧 해가 떨어질 텐데? 그리고 역사는 왜 꼭 밤에 써야 해? 그런 편견은 버려, 우희.”

담덕이 내 목덜미에 입을 맞추고 고개를 들었다. 웃고 있는 얼굴이 어쩐지 야릇하게 느껴져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유혹은 네가 먼저 해 놓고 왜 그렇게 얼굴이 빨개져?”

“내가 뭘 유혹했다고?”

“먼저 입 맞추신 게 어디의 누구였더라?”

담덕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할 말이 없어져 담덕의 시선을 피하며 괜히 딴청을 부리니 그가 픽 웃으며 손으로 내 머리를 헤집었다.

“네가 좀 덜 고왔으면 좋겠다. 다른 사내들이 널 안 보게.”

“덜 고왔으면 너도 날 안 좋아했을지도 몰라.”

“아니. 난 좋아했을 거야. 네가 어떤 모습이든…… 난 좋아했을 거야.”

어느새 나를 바라보는 담덕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사라져 있었다. 진지한 얼굴에 담긴 진심에 그렇지 않아도 빨간 얼굴이 더 뜨거워졌다.

나는 또다시 이상하게 달아오르려는 분위기를 가라앉히려 일부러 헛기침을 하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난 지금 네 얼굴이 좋은데.”

“뭐?”

“그러니까 꼭 이 얼굴이어야 돼. 난 잘생긴 게 좋거든. 보기 좋은 떡이 맛도 좋다잖아?”

“흐음.”

저를 떡에 비유하는 나의 말에 담덕이 묘한 침음을 흘렸다.

“그러니까 네 말은, 내가 보기 좋은 떡이다?”

“응.”

“그래서? 맛은 좋았나?”

“음…….”

나는 담덕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며 씨익 웃었다.

“그건 더 먹어 보고 말해 줄게.”

담덕의 입술에 재빨리 입을 맞추고 후다닥 도망을 가는데, 얼마 가지 않아 그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연우희.”

내 이름을 부르는 담덕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장난이 너무 심해서 화가 났나?

걱정스럽게 돌아보니 담덕이 나를 보며 씨익 웃었다.

“난 두 번은 못 참는데.”

“뭘 두 번은 못 참는다는…….”

다 묻기도 전에 스스로 답을 깨달았다. 깨달음으로 점점 벌어지는 내 입을 보며 담덕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러게 사람을 너무 자극하면 쓰나.”

담덕이 나를 확 끌어당겼다. 단단한 품에 갇혀 오도 가도 못 하는 상황이 되자 여러모로 머리가 복잡했다.

“바, 밖에 사람 있는데?”

“태림.”

그게 무슨 문제냐는 듯 담덕이 밖을 향해 외쳤다. 짧은 부름에 잠시 인기척이 느껴지더니 곧 바깥이 조용해졌다.

“자. 이제 밖에 사람 없어.”

그렇게 말하며 담덕이 뿌듯하게 웃었다.

* * *

담덕과 하루를 꼬박 보내고 난 다음 날은 늘 녹초가 된다. 나는 침상에 늘어져 무거운 눈꺼풀을 느리게 깜빡이며 마음속으로 불만을 토로했다.

말로는 뭐든 네 뜻대로 하겠다, 천천히 할게 그러면서.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자기 속도로 밀어붙인다고, 이 남자는.

눈을 굳게 감고 있는 담덕의 머리통을 불만스럽게 노려보았다. 어제 일을 생각하면 아주 얄미워 죽겠다.

아니, 따지고 보면 어제뿐만이 아니지.

태왕 폐하의 잘난 이성이 뚝 끊어지고 난 이후에는 아무리 애원해도 들어주는 법이 없다.

그때부터는 감당하기 힘든 그의 속도에 맞춰 이리저리 흔들릴 뿐이다. 그리고 다음 날이 되면 항상 이 상태였다.

손 하나 움직이기 싫은 나른함에 몸을 늘어뜨리고 있으니 담덕이 내 품으로 파고들었다.

“우희, 일어나기 싫어.”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힘들어 죽겠어.”

“많이 힘들어?”

“당연하지. 사람을 그리 몰아붙이는데 안 힘들어?”

“그럼 내가……”

한껏 입술을 내밀고 투덜거리자 담덕이 미안한 얼굴로 내 뺨을 쓸어내렸다.

“보약이라도 지어 줄까?”

“……이럴 땐 다음엔 안 힘들게 할게, 하고 말하는 게 평범하지 않아?”

“난 지키지 못할 약속은 하지 않는 편이라서.”

“결국 앞으로도 네 맘대로 하겠다는 거야?”

“그래서 싫어?”

담덕이 입술로 내 목덜미를 지분거리며 천진한 척 물었다.

이 수법에 마음이 약해져 다음에 땅을 치고 후회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걸 뻔히 아는데, 그래도 싫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거야…… 뭐…….”

할 말이 없어 우물거리자 담덕이 마지막으로 뺨에 입을 맞추고 몸을 일으켰다. 한참 전에 잠에서 깬 뒤 내가 일어나기를 기다렸던 건지 침상을 벗어나는 움직임에 망설임이 없었다.

“꼭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데.”

홀로 옷을 챙겨 입는 담덕을 보며 작게 중얼거리니 그가 내 쪽을 바라보았다.

“뭘 기다려?”

“내가 일어날 때까지 기다리잖아.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누워서.”

“일어났을 때 혼자면 쓸쓸하지 않나? 난 그렇던데.”

담덕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게다가 잠들어 있는 네 얼굴 보는 게 좋아. 나만 볼 수 있는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별로 놓치고 싶지가 않은데.”

“잠에서 막 깨서 퉁퉁 부은 얼굴이 뭐가 좋다고?”

“예쁜데. 세상에서 제일.”

이야기를 하는 동안 옷을 모두 다 챙겨 입은 담덕이 내 입술에 입을 맞추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었다.

그 기회를 틈타 나는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후연과의 전쟁에 직접 나설 거야?”

“전쟁이 다가오고 있는 건 어찌 알았어?”

“나도 귀가 있는걸.”

궁에 머무르면 자연스레 들리는 이야기들이 있었다.

궁인들은 후연과의 전쟁이 가까워지고 있다며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비로의 대원들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담덕은 전쟁에서 조금이라도 손해를 보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했다. 확실한 기회를 노려 상대를 치는 편을 선호하는 성격 때문에 적군에게는 악명이 높았다.

지난번 후연에게 영토와 백성을 크게 잃은 후, 곧장 큰 전쟁을 벌이지 않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도 담덕의 그런 성격 때문이었다.

그런 기다림이 헛되지 않았는지 최근 후연의 정세가 심상치 않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후연의 왕, 모용성을 향한 불만이 곳곳에서 쏟아져 나온다는 이야기였다.

모용성은 패도(霸道)의 길을 걷는 왕이었다. 그간 나라가 혼란스러웠던 까닭이 선왕 모용보의 무른 통치 때문이었다고 믿는 것 같았다.

왕위에 오른 후 그는 왕의 권위를 강화하고 엄격한 법과 형벌을 내세웠다. 혼란스러운 정국에 효과가 좋은 방법이었다.

그 덕분에 모용성은 나라의 혼란을 빠르게 잠재우고 강한 군사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혼란을 다잡은 뒤에도 같은 태도를 고수한 것이 문제였다.

어느 정도 혼란이 사라지면 사람들은 인의(仁義)와 덕(德)을 찾는다. 그러나 모용성은 혼란을 수습한 뒤에도 패도를 버리지 않았다.

엄격한 법치에 조정은 공포에 떨었다. 자그마한 실수에도 목이 달아나니, 공포를 비집고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다는 불만이 생기는 건 당연했다.

결국 반란이 일어났다. 좌장군 모용국, 전상장군 진여, 단찬이 힘을 모아 모용성을 몰아내려 했으나 일이 실패로 돌아가 외려 본인들이 모두 죽었다.

하지만 닷새 만에 다시 반란이 일어났다. 이번 반란은 성공이었다.

모용성은 검을 들고 직접 반란 진압에 나섰지만 결국 실패하고 큰 부상을 입었다.

이것이 악화되어 모용성은 세상을 떠났다. 후연의 조정을 공포에 떨게 만든 왕의 죽음이었다.

그 뒤를 이은 자는 모용성의 숙부 모용희였다. 선왕의 아들 모용정이 살아 있는 상황에서 숙부가 뒤를 이었으니 뒷말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가혹한 법치와 그에 따른 반란, 깔끔하지 못한 왕위 계승까지.

지금의 후연은 말 그대로 혼란이었다. 후연에 이를 갈고 있던 고구려로서는 제대로 된 기회를 포착한 셈이었다.

“내가 직접 갈 가능성이 높아. 후연과의 일전은 중요하니까.”

담덕의 말 그대로였다.

고구려에게 후연은 백제 못지않은 원수였다. 건국 이후 조금씩 고구려의 영토를 침범하거나, 백성을 붙잡아 가는 일을 반복하더니 영락 10년에는 700리 땅을 빼앗아 가기까지 했다.

계속해서 일진일퇴를 반복하며 고구려의 신경을 건드린 과거를 생각하지 않더라도 후연과의 전쟁은 중요했다. 후연이 차지한 땅, 요동 지역 때문이었다.

요동은 오래전부터 전략적 요충지로 손꼽혔다. 요수(潦水)가 흘러 방어에 용이했기 때문에, 그곳을 차지하면 중원의 강한 나라들로부터 우리 땅을 지키기 좋았다.

때문에 돌아가신 선대왕 역시 요동 장악을 욕심냈다. 하지만 요동을 장악하려면 먼저 남쪽 상황을 정리하는 것이 중요했다.

북을 노리는 동안 백제가 뒤를 친다면 고구려는 큰 손실을 피할 수 없다. 신라를 구원하는 동안 후연이 우리 뒤를 친 것처럼 피해가 따를 것이다.

담덕이 그간 신라와의 관계 구축과 백제의 섬멸에 힘을 쏟은 것도 결국은 요동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니 운명처럼 찾아온 이번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나는 다가오는 전쟁의 예감에 마음이 불안해졌다. 담덕이 늘 승리만 누렸던 왕이라는 건 알지만, 그의 수명이 길지 않았다는 사실 역시 알고 있었다.

혹시라도 다가오는 전쟁이 담덕의 마지막일까 봐.

나는 늘 그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했다.

“웬만하면…… 직접 나서지 않았으면 좋겠어.”

철없는 소리라는 걸 안다.

담덕이 직접 나서는 전투와 그렇지 않은 전투는 완전히 다르다. 그가 전쟁터에 나서는 것만으로도 병사들의 사기가 몇 배나 올라가고, 태왕의 친정을 알리는 깃발이 세워지면 상대는 싸우기도 전에 놀라서 꽁무니를 뺐다.

그럼에도 나는 담덕이 직접 나서는 전투가 많이 없었으면 했다.

“정말 중요한 전투라면 나설 수밖에 없겠지만…… 그래도 웬만하면 국내성에 있어 줘. 안전한 곳, 나와 연이의 곁에.”

담덕은 내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얼굴을 빤히 보는 시선에 민망함을 감출 수 없었다.

“미안. 역시 너무 철없는 소리였지.”

내 사과에 담덕의 표정이 더욱 묘해졌다.

“내가 직접 전쟁터에 나갈 거냐고 묻기에 그럴 거면 너도 데려가라는 말을 할 줄 알았는데. 안전한 곳에서 가만히 기다리기만 하는 황후는 되기 싫다고 했었잖아.”

“부탁하면 그렇게 해 줄 거야? 아니잖아.”

고구려 땅에서 가장 안전한 국내성에 있으면서도 나의 안전을 염려하는 담덕이었다. 그런 그가 나를 전쟁터에 데려갈 리 없다는 건 명백했다.

“그걸 아니까 다른 부탁을 하는 거야. 내가 따라갈 수 없다면 네가 이곳에 있어 달라고.”

상대가 보여야 안심할 수 있겠는데 따라갈 수는 없으니 눈에 보이는 곳에 눌러 앉히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

나로서는 당연한 결론이었는데, 그 이야기를 듣는 담덕의 표정이 이상했다.

“도대체 그 얼굴은 뭐야?”

연신 히죽거리며 나를 보는 게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내가 전쟁터에 나가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은 이 고구려에서 너 하나뿐일걸.”

“크게 다칠까 봐 걱정되는데 어쩌란 말이야?”

“크게 다칠까 걱정을 해 주는 사람도 너 하나뿐이고.”

승리를 부르는 무신(武神). 고구려 사람들이 그의 출정을 간절히 바라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나에게 담덕은 태왕이기 전에, 무신이기 전에, 평생을 약속한 연인이었다. 둘만의 혼례를 올리며 우희와 담덕으로서 연을 맺지 않았나.

“이 세상에 그런 사람이 있어, 담덕. 그러니 부디 몸을 아껴 줘. 날 과부로 만들 생각이 아니라면 말이야.”

“우스운 걱정.”

담덕이 가볍게 웃으며 내 턱 밑까지 이불을 끌어 올렸다.

“천천히 일어나. 난 그만 일하러 갈게.”

아마 후연과의 전쟁을 논의하러 가는 거겠지. 굳게 닫히는 문과 함께 심장이 아릿해졌다.

나는 왜 한의학을 배웠을까? 한국사를 전공했으면 지금 더 많은 도움이 되었을 텐데.

아니, 군사학을 배웠어야 했나? 그랬으면 전쟁에서 이기는 법을 알고 있었을 거 아냐?

이어지는 생각은 모두 지난 후회라 시간 낭비일 뿐이었다. 나는 부정적으로 흐르는 생각을 흩어 버리며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할 수 있는 일.”

* * *

나는 그날부터 약을 만들기 시작했다.

전쟁에서 필요한 약이란 뻔했다. 지혈을 돕는 약이나 진통제가 가장 많이 필요했다.

약재만 구한다면 약을 만드는 건 일도 아니었다.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필요한 양이 많았기에 태의들의 힘을 빌렸다.

비로에서 키우던 차나무도 재배를 시작했다. 전쟁 중에 차를 끓여 마시는 건 사치였지만, 수통 안에 잎을 띄워 두고 우려내기만 해도 효과가 있었다.

나는 피로 회복을 돕는 찻잎들을 말려 작은 주머니에 나눠 담았다. 아직 병력의 규모가 정해지지는 않았으나 적어도 수천은 될 것이다. 다원의 창고는 금세 찻잎을 넣은 주머니로 가득 찼다.

그러는 사이 착실하게 시간이 흘렀다. 병력의 규모가 정해지고, 공격 시기가 정해지고, 공력 방향과 출전할 장수도 확정되었다.

영락 12년 여름. 전쟁은 여름에 하지 않는다는 편견을 깨고 태왕의 군대가 후연의 숙군성(宿軍城)을 향해 출정했다.

짧은 평화가 끝나고 다시 전쟁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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