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장. 진정한 귀환
나와 연은 궁으로 초대받았다. 이번에는 비밀스러운 쪽문을 이용하지 않았다. 당당하게 정문을 이용해 공식적으로 궁을 찾았다.
이제 국내성 곳곳에 내가 돌아왔다는 소식이 퍼질 것이다. 정보에 밝은 사람들은 이미 내가 돌아온 것을 알고 있었겠지만, 이번 궁궐 방문으로 나의 귀환을 공식화했다는 것이 중요했다.
게다가 내 옆에 연이 있었다. 내게 씌워졌던 수많은 의혹들 때문에 연에게도 좋지 않은 소문들이 따라붙을 것이다. 또 다른 파란의 시작이었으나 결국엔 이겨 내야 할 문제였다.
하지만 여섯 살 난 연은 그런 복잡한 사정은 알지 못했다. 그저 멀리서만 보던 궁궐이라는 곳에 방문하게 된 것에 잔뜩 들떠 있을 뿐이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크고 위엄이 묻어나는 전각들. 기합이 잔뜩 들어간 근위병들과 분주하게 움직이는 시녀들. 처음 보는 모든 것들이 연을 들뜨게 한 것 같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연을 신나게 한 것은 함께 정원을 산책하던 담덕이 꺼낸 말 한마디였다.
“그때 네가 말했던 소원을 내가 들어줄 수 있을 것 같구나.”
“네? 정말요?”
정원 위를 맴돌고 있는 매를 보며 손을 흔들고 있던 연이 담덕의 말에 기뻐서 펄쩍 뛰었다.
“제게 아버지를 주실 건가요?”
“그래. 네 어머니가 허락하셨거든.”
“와! 감사합니다, 어머니!”
담덕의 말에 연이 내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여태까지 연에게서 아버지를 빼앗았던 장본인인 터라 아이의 인사를 받기가 민망했다.
하지만 연은 어색해서 웃고 있는 내게 큰 관심이 없었다. 연은 어느새 담덕을 바라보며 눈을 빛내고 있었다.
“제게 어떤 아버지를 주실 건가요, 폐하?”
“이미 정해 두었지. 부디 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담덕은 조금 긴장한 얼굴이었다. 최대한 부드러운 얼굴로 웃고 있었지만, 그를 잘 아는 내게는 긴장한 것이 뻔히 보였다.
내가 모든 사실을 밝히고 연의 아버지가 되어 달라고 말한 후, 담덕은 아주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하면 귀족들에게 연을 제대로 된 아들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아니었다.
-연이가 날 마음에 안 들어 하면 어떡해?
심각하게 묻던 담덕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혹여나 연이 저 말고 다른 사람을 아버지 삼고 싶다 말할까 봐 며칠 전부터 고민으로 끙끙 앓았다.
커다란 사내가 어린아이의 인정을 받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모습이 제법 귀여웠다.
때문에 나는 연이 이미 담덕 같은 아버지를 갖고 싶다고 했다는 것을 말하지 않고 발을 동동거리는 그를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혹 내가 네 아버지가 되면 어떻겠느냐?”
잔뜩 긴장한 담덕의 질문에 연이 딱딱하게 굳었다. 기쁨으로 만면에 차올랐던 미소도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폐하께서요? 제 아버지요?”
아버지를 만들어 주겠다는 말에 방방 뛰었던 연의 목소리가 어느새 한 단계 낮아져 있었다.
가라앉은 연의 기색에 담덕은 물론이고 나까지 당황했다.
담덕이 아버지가 되어 준다고 하면 당연히 좋아할 줄 알았는데.
나는 당황만 했을 뿐이지만 담덕은 완전히 돌처럼 굳어 버렸다. 누군가가 손가락으로 쿡 찌르면 순식간에 가루가 되어 멀리 날아가 버릴 것 같았다.
그러니 상황 수습은 내 몫이었다.
“연아, 폐하가 아버지면 싫어?”
나는 몸을 숙여 연과 눈을 맞추었다. 연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내 품에 뛰어들었다.
“어머니, 제가 꿈을 꾸고 있나 봐요. 어쩐지…… 너무 좋은 일이 계속 생긴다 했어. 이게 다 꿈이라서 그런가 봐요.”
연이 굳어 있는 담덕을 힐끗거리며 내게 속삭였다. 시무룩한 얼굴에 실망이 가득했다.
그러니까 담덕이 아버지가 되는 것이 싫은 게 아니라, 담덕이 아버지가 되는 것이 너무 좋아 꿈만 같다는 이야기지?
나는 비로소 긴장을 풀고 웃음을 터트렸다.
“이게 꿈 같으니?”
“네. 그게 아니면 어떻게 모든 것이 이리 좋을 수가 있어요?”
이게 무슨 애늙은이 같은 말이람.
나는 더 크게 웃으며 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연아. 현실도 그리 좋을 수가 있단다. 아마 앞으로는 계속 그리 좋을 거야.”
제 머리를 헤집는 생생한 손길에 연의 눈이 점점 커졌다.
“어…… 그럼…… 이게 정말 꿈이 아닌가요……? 정말 폐하께서 제 아버지가 되어 주실 거예요?”
연이 혼란스러운 눈으로 나와 담덕을 바라보았다. 연의 말에서 긍정적인 신호를 읽어 낸 담덕의 입꼬리가 기쁨으로 움찔거렸다.
“그럼! 당연하지!”
담덕이 한 번에 연을 안아 올렸다. 순식간에 위로 떠오르는 몸에 얼떨떨한 얼굴을 하던 연이 금세 손을 번쩍 들었다.
“와아! 와아!”
신이 나서 만세를 부르던 연이 위로 뻗어 올린 손을 그대로 내려 담덕의 목을 끌어안았다. 제 품 안으로 파고드는 아이의 체온에 담덕의 입꼬리가 한없이 위로 올라갔다.
누가 보아도 행복한 부자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보면서도 내 마음은 마냥 편하지 않았다.
승평.
아직 한 번도 얼굴을 보지 못한 담덕의 또 다른 아들 때문이었다.
* * *
담덕은 내게 단 한 번도 승평에 대해 말한 적이 없었다. 내 앞이라 일부러 말을 조심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늘 편안한 얼굴로 이야기하는 담덕을 보고 있자면 꼭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덕분에 나는 신라에서부터 들은 소문과 담덕의 측근들의 이야기로만 승평을 알고 있었다.
내가 가진 정보는 많지 않았다. 영락 6년에 태어난 소년이라는 것, 외부 활동이 지극히 적다는 것, 어머니가 누구인지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 모두 시원치 못한 정보들뿐이었다.
공식적으로 궁을 방문한 이후 자주 궁을 드나들게 되었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승평을 보지 못했다.
결국 나는 정면 돌파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지난 6년간의 내 이야기를 전부 털어놓은 마당에 나만 담덕의 이야기를 모른다니 불공평했다.
“담덕.”
진지하게 자신을 부르는 내 목소리에 침상에 누운 연에게 서책을 읽어 주고 있던 담덕이 눈만 돌려 나를 보았다.
“연이는 이미 잠들었어. 이제 내게 시간을 좀 써 주는 게 어때?”
조곤조곤한 담덕의 목소리에 연은 이미 잠에 빠진 뒤였다.
태왕의 침상을 당당히 차지한 것도 모자라 태평하게 잠까지 들다니.
하지만 제 침상을 내어준 담덕은 외려 즐거운 표정으로 잠든 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예쁜 녀석이 나왔지? 역시 내 아들이야.”
나는 싱글벙글 웃으며 연의 머리를 정돈하는 담덕을 보며 입을 떡 벌렸다. 그는 내가 연이 제 핏줄이 맞는다고 확인해 준 이후 줄곧 이런 상태였다.
“진짜 아들이 아니었어도 상관없다더니, 지금의 이 모습은 뭐야?”
내 말에 담덕이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헛기침을 했다.
“그땐 정말 그렇게 생각했어. 연이의 아버지가 누구든 어머니는 확실히 너니까, 네 아들이라면 당연히 받아들일 수 있었어. 내가 진짜 이 녀석의 아버지이길 간절히 바란 것도 사실이지만…….”
담덕이 씨익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타박을 할 테면 하라는 태도였다.
“날 닮은 아이가 있는 게 이렇게 좋은 건 줄은 몰랐지.”
“연이는 날 닮았거든!”
“외면보단 내면이 더 중요하지 않아? 활 쏘는 걸 봐. 네가 아니라 날 빼다 박았다니까. 쏘는 족족 과녁을 벗어났던 너와는 천지 차이야.”
“내가 언제 쏘는 족족 과녁을 벗어났다고 그래? 과녁 맞히는 것 정도는 나도 했어.”
“그랬던가? 활 쏘는 네 모습을 떠올리면 바로 코앞에 화살을 내다 꽂던 것밖에 기억이 안 나서.”
담덕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바닥을 가리켰다.
과장된 말이었다면 거짓말이라고 반박이라도 했을 텐데, 명백한 사실이라 반박조차 할 수 없었다.
“……그건 정말 예전이라고.”
나는 불만스럽게 투덜거리고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그럼 네 다른 아들은 어때?”
“무슨 말이야?”
“내가 없는 동안 아들이 생겼던걸. 이름이 승평이라고 들었는데. 그 아이도 널 닮았어?”
“아.”
승평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 담덕이 미간을 찌푸렸다.
“네게 벌써 승평의 이야기가 들어갔어?”
“벌써라니. 신라에 있을 때부터 알았는걸.”
“뭐? 신라에 있을 때부터?”
“네가 얼마나 유명 인사인데. 내가 네 소식을 못 들었을 거라고 생각한 거야?”
“여태까지 별다른 말이 없기에 모른다고 생각했어.”
그렇게 말한 담덕이 잠시 생각하더니 곧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연이에 대해 별로 궁금해하지 않았을 때에 너도 이런 기분이었나?”
“지금 네 기분이 어떤데?”
“뭐라고 설명할 수는 없지만…… 굉장히 마음에 안 들어. 왜 진즉 승평에 대해 묻지 않았어? 궁금하지 않던가?”
얼마 전 우리의 모습에서 역할만 바꾼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 사실이 우스워서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궁금했지. 하지만 내가 물어도 되는 일인지 확신할 수가 없었어. 그런데 이제 내 이야기는 모두 털어놓았으니, 네 이야기도 들을 수 있겠다 싶었지.”
“승평의 이야기를 해 달라는 거구나.”
담덕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제 뒷목을 매만졌다.
“우선…… 승평의 어머니가 누구인지 궁금하겠지.”
“이미 세상을 떠났다고 들었어.”
“그래. 승평을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목숨을 잃었지. 불행한 일이었어. 하지만 아예 없는 일도 아니지.”
그랬다. 내 어머니만 하더라도 나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이 시대에 아이를 낳는 건 상당히 위험한 일이었다. 의학이 발달한 현대에서도 출산을 하다 숨지는 사람이 제법 있었는데, 고대는 그보다도 의학 수준이 낮았다.
그러니 당연히 더 상황이 좋지 않았다. 고대의 여인들은 출산을 하다가 목숨을 잃거나, 겨우 출산을 마치고도 몸이 쇠약해져 급사하는 등 어머니로서 혹독한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담덕의 말이 매정하게 느껴졌던 까닭은 그가 말하는 불행한 일의 대상이 제 아이를 낳은 여인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마치 타인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무덤덤한 얼굴로 승평의 친모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백제 원정을 하러 남쪽으로 내려갔다가 만난 여인이었어. 지설과 함께 은밀히 정찰을 나섰다가 보았지. 만삭의 몸으로 제발 도와 달라 청하기에 차마 외면할 수가 없었어.”
담덕이라면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그는 전쟁 중에는 한없이 무서운 태왕이지만, 그 외의 시간에는 병사들과 현지 백성 모두에게 친근하고 따뜻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동행한 의원을 불러 상태를 봐 주라 했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를 낳았더군. 그게 승평이었어. 하지만 원래부터 몸이 약했는지 그 여인은 아이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죽고 말았어. 제발 아이를 잘 부탁한다는 말만 남기고.”
슬픈 사연이었다. 하지만 이야기 속의 거슬리는 말 한마디가 나의 슬픔을 짓누르고 있었다.
“……여인이 만삭의 몸일 때 만났다고?”
“그래.”
“그럼 승평은……”
“내 핏줄이 아니지.”
담덕은 무척이나 충격적인 사실을 지극히도 담백하게 털어놓았다.
고구려 사람들 모두가 그의 아들이라 믿고 있는 승평이, 사실은 그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아이라니.
하지만 나를 경악하게 만든 것은 고구려 사람들이 자신들의 태왕에게 속았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승평이 담덕의 핏줄이 아니라면……
자연히 연이 담덕의 유일한 핏줄이 된다. 담덕의 아들은 훗날 장수왕이 될 대단한 인재인데, 지금 이 시점에서 담덕에게 피를 이어받은 아들은 연 하나뿐이었다.
세상에. 연이가 장수왕이 될 아이야?
나는 놀라움에 차 손으로 내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지 않았다면 너무 놀라 비명을 질러 버렸을 것이 분명했다.
속으로 겨우 비명을 삼킨 나는 담덕에게 어째서 이처럼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진 것인지 물었다.
“그런데 왜 그 아이를 아들이라며 거둔 거야?”
“이유를 들으면 넌 실망할 거야. 네 신념과는 아주 먼 이유거든.”
담덕이 조금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 눈치를 살폈다.
“난 네가 돌아올 자리를 만들고 싶었어. 물론 네가 돌아올지, 돌아와도 내 곁에 머무르고 싶어 할지는 알 수 없었지만, 혹시라도 네가 돌아오고 싶어 할 때를 위해 자리를 비워 두고 싶었어.”
담덕이 말하는 ‘내 자리’는 아마 황후의 자리일 것이다. 국내성을 떠나기 전까지는 분명히 나의 자리였던 그곳.
“제가 회의에서 늘 혼인하시라고, 황후를 들여 안정을 도모하시라고 했던 이유는 모두 후계 때문이었다. 거꾸로 말하면, 후계가 확실할 경우 내게 굳이 혼인을 종용할 필요가 없다는 거지. 그래서 만들었어. 후계자를. 마침 적당한 아이도 있었으니까.”
지설과 은밀히 정찰을 나섰다가 만난 여인이 낳은 아들. 사람들을 속이는 건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만삭의 여인을 진료한 의원에게도 적당히 말을 꾸며 낼 수 있었다. 담덕이 지난해 전쟁을 위해 나섰다가 취한 여인이라 하면 그도 크게 의문을 가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왕들이 친정을 하러 나설 때에는 성주들이 먼저 나서서 시중들 여인들을 왕의 방으로 밀어 넣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니 영락 6년의 일도 말을 꾸며 내기에 따라 충분히 진실로 만들 수 있었다.
담덕이 그 일을 해낸 거구나. 그라면 어렵지 않았겠지.
담덕의 말에 따라 생각지도 못한 지난 사연의 앞뒤를 정리하는 사이 그가 씁쓸하게 웃었다.
“서두가 길었지만…… 간단하게 말하면 그 아이를 이용한 거야. 내가 원하는 걸 지키기 위해서. 역시 네 신념에는 맞지 않지?”
당연히 내 신념에는 맞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도 그런 일까지 벌인 담덕의 결심이 더 크게 느껴졌다.
“어떻게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아이를 거뒀어? 그것도 후계로 삼을 아이라 동네방네 떠들면서. 너를 마지막으로 계루부의 시대가 끝나도 상관없었어?”
“정말 승평이 왕위에 올라야 하는 상황이 오면 계루부 고씨의 피를 이어받은 여자아이 중 하나를 골라 혼인시키면 되겠다고 생각했어. 그럼 계루부의 시대는 계속 이어지는 것이니 먼저 세상을 떠나신 아버지께도 죄스럽지만은 않겠다 싶었지.”
“선왕 폐하께서 잘도 그렇게 생각하시겠다!”
나는 담덕의 등을 내려치며 소리 질렀다.
아무리 추후의 혼인까지 염두에 뒀다고는 하지만, 가짜 아들을 후계로 세우고, 만약의 경우 정말 왕위를 물려줄 생각까지 했다니. 너무나 대담한 발상이었다.
무덤에 계신 선왕께서 벌떡 일어나 호통을 치지 않으신 것이 이상할 정도인걸.
“내 자리가 뭐라고. 그게 뭔데 이렇게까지 했어.”
“널 위해서만은 아니었어. 나의 자기만족이 가장 큰 부분이었지. 사실 난 아직도 네가 진정으로 황후의 자리를 원하는지 모르겠어.”
담덕이 미간을 찌푸리며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넌 그 자리에 앉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에 소노부의 표적이 되고, 목숨을 위협받고, 고향을 떠나야만 했어. 지금은 그때보다 상황이 훨씬 나아졌지만 그래도 그 자리는 위험하지. 언제나 그래. 네가 모든 위험을 감수하고, 단지 내 곁에 있다는 것 말고는 아무런 이득도 없는 그 자리에 앉고 싶어 할까…… 줄곧 그런 생각을 했어.”
“그러면서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말이지.”
“……말했잖아. 나의 자기만족이었다고. 물론 꼭 그렇지만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지.”
진지하던 말이 마지막에는 장난스럽게 마무리되었다. 한없이 무거워지는 분위기를 어떻게든 벗어나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제대로 이야기를 마무리 짓기 전에는 도망칠 생각이 없었다.
“넌 여전히 내가 너의 황후가 되길 바라니?”
“아니.”
내 질문에 담덕은 고민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내가 바라는 건 황후가 아니야. 난 그저 나의 아내를 원해. 내 마음속의 여인이 고구려 태왕의 황후가 아니라, 담덕의 아내가 되어 주길 바라.”
담덕이 곧 고구려의 태왕이었다. 그러니 지금 그의 말은 모순투성이였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
고구려의 태왕이 아닌 담덕의 아내.
“열여섯에는 네가 먼저 내게 청혼했지. 이왕 혼인을 할 거라면 너랑 하자고. 그 말, 이번에는 내가 하면 어떨까?”
담덕이 청혼이라 말하기에도 민망한 과거의 이야기를 꺼내며 내게 물었다.
“평생 혼자 살 것이 아니라면, 그래서 누군가와 혼인을 할 거라면, 그렇다면…… 그거 그냥 나랑 하면 안 될까? 고구려의 태왕이 아니라, 너와 오래 마음을 나누었던 담덕과 혼인한다고 생각하고 그리해 줄 수 있어?”
오래전 그런 생각을 했었다.
다시 만나는 날까지도 서로의 마음이 변하지 않았다면 그것을 하늘의 뜻으로 알고 나의 마음이 가는 대로 하겠다고.
그리고 나는 오늘 비로소 하늘의 대답을 얻었다.
“아니…… 뭐…… 그건 이미 끝난 이야기 아닌가?”
담덕의 입매가 굳어졌다.
“끝난 이야기?”
나는 금방이라도 일그러질 것 같은 그의 얼굴을 보기가 민망해 고개를 푹 숙였다.
“난 네게 이미 연의 아버지가 되어 달라고 했어. 하지만 순서가 그렇잖아. 연이의 아버지가 되려면 내 남편이 되어야 하고, 내 남편이 되려면 나와 혼인을 해야 하는걸. 그러니까 이번 청혼도 내가 먼저 한 거야.”
* * *
둘 사이의 이야기가 정리되자 그 이후는 쉬웠다. 빠르게 국혼 날짜가 정해지고 궁 안이 태왕의 혼인 준비로 분주해졌다.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일을 보며 나는 어리둥절해졌다.
이게 이렇게 쉽게 될 일인가?
빠르게 돌아가는 상황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나를 보며 태림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제는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까요. 폐하께서는 예전의 폐하가 아니시고, 제가 회의도 예전의 제가 회의가 아니지요.”
즉위 초기 어린 왕의 기세를 누르기 위해 이리저리 뻗대었던 제가 회의는 담덕이 백제의 아신을 꿇어앉힌 이후 발언권이 크게 줄어들었다.
주도권을 잡은 담덕은 이후에도 꾸준히 외부 세력들과의 전쟁을 통해 왕권을 강화했다.
나 역시 멀리 신라에서 그런 소문을 들었다. 국내성에서 태왕의 위세가 심상치 않다고 했었다.
하지만 직접 궁에 와 현실을 보니 상상 이상으로 담덕의 권위가 대단해졌음이 느껴졌다.
궁을 제 집처럼 활보하는 연을 보면서도 누구 하나 쑥덕거리는 사람이 없었다. 궁인들은 우리를 극진히 대했고, 말하지 않아도 필요한 것을 먼저 챙겨 주었다. 담덕이 미리 언질을 해 둔 것 같았다.
물론 반발이 완전히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반발의 진원지는 역시 소노부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는 제가 회의였다.
나는 백부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제가 회의의 분위기를 엿들을 수 있었다.
소노부와 관노부는 내가 과거에 백제의 왕과 사통했다는 소문을 내세워 혼인 불가론을 내세웠다. 이미 아이가 있는 것도 문제인데, 아이의 피에 백제인의 것이 섞였으면 어쩔 것이냐는 모욕적인 말도 흘러나왔다.
과거에도 다소 중립적인 입장에 섰던 순노부 역시 이 부분을 우려했다. 그리하여 혼인은 진행하되 아이는 입적하지 않는 것으로 의견을 올렸다.
하지만 담덕은 연이 나와 자신 사이에 태어난 아이라는 것을 증명할 근거를 찾아 제가 회의에 제시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했다.
현대라면 유전자 검사를 통해 쉽게 친자를 확인할 수 있지만, 이 시대에는 사람들의 증언과 당사자의 확신만이 근거의 전부였다.
당사자인 담덕의 확신과 멀리 신라에서 날아온 이리 부인의 서신이 제가 회의의 반발을 틀어막았다.
이리 부인의 서신이 큰 힘이 될 수 있었던 까닭은 지금 신라의 상황과 연관이 있었다.
왜군과 치열한 전쟁을 치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신라 왕의 건강이 크게 악화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안색이 좋지 않고, 금세 지치며, 매사에 의욕이 없어 침상에 누워 있는 시간이 많다고 했다.
길어 봐야 한두 해. 현왕(現王)의 시대가 오래가지 않으리라는 예상이 곳곳에서 흘러나왔다.
그러자 사람들은 자연스레 다음 왕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예측이 오갔지만 도달하는 결론은 비슷했다.
지금 신라 왕에게는 아들이 있었다. 하지만 한두 해 안에 왕위를 잇기에는 나이가 너무 어렸다. 다른 후보가 필요했다.
그렇다면 다음 왕은 누구인가?
가장 유력한 주자는 지금 고구려에 볼모로 와 있는 그의 조카 실성이었다.
그러니 이리 부인은 단순한 신라의 귀족이 아니라, 곧 왕이 될지도 모르는 사람의 어머니가 되는 셈이었다. 순식간에 그녀의 말이 무거워졌다.
게다가 제가 회의는 이미 출신이 불분명한 승평을 태왕의 후계자로 인정한 전력이 있었다. 담덕이 그때의 결정을 언급하자 그들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제가 회의가 승평을 후계로 인정한 속셈이야 뻔했다. 아이의 출신이 불분명하니, 꼭두각시처럼 세워 두고 움직이기 좋을 것이라는 계산이 있었을 것이다.
어떻게든 밀어붙여 제 집안의 여식을 황후로 세우면 권력을 잡는 건 쉽다. 그런 속셈이 지금에 와서 발목을 잡을 거라고는 누구도 생각지 못했겠지.
하지만…….
“왜 그러십니까?”
문득 드는 생각에 미간을 찌푸리는 나를 보며 태림이 물었다.
“그냥 갑자기 궁금한 게 생겨서요.”
“제가 아는 것이라면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태림이라면 알 거예요. 담덕의 최측근이니까.”
“폐하에 관한 것이었습니까…….”
태림이 조금 곤란한 얼굴을 했다. 아는 것이라면 대답하겠다고는 했지만, 그 주제가 담덕이라면 부하인 그로서는 곤란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가 말을 바꾸기 전에 재빨리 입을 열었다.
“담덕은 어디까지 생각하고 승평을 거둔 걸까요?”
“그 말씀은……?”
“그렇잖아요. 승평을 거두면서 많은 문제가 해결됐어요. 제가 회의에서 혼인을 재촉하는 일도 줄었고, 후계가 생기니 왕권도 안정되었고, 이번에 나와 연이를 받아들이는 일까지…… 앞의 두 가지야 누구나 예상 가능한 일이었지만 마지막은 다르잖아요. 담덕이 어디까지 포석을 깔아 두었던 걸까, 그게 궁금해져서요.”
“그에 대한 답이 중요합니까?”
태림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덕분에 일이 잘 풀렸는데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나는 이 미묘한 기분을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고민스러워졌다.
“담덕과 고구려의 태왕. 각자의 모습이 너무 달라요. 난 담덕으로서의 그 사람을 잘 아는데, 태왕으로서의 그 사람은 잘 모르거든요. 그래서 태왕으로서의 그 사람을 볼 때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내 말에도 태림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어차피 한 사람 아닙니까? 아가씨께서도 그걸 잘 알고 계시고요. 그저 다른 사람보다 아가씨께 더 너그러우실 뿐이잖습니까.”
“태림의 결론은 언제나 간단하고 명확하네요.”
과연 태림다운 결론에 웃음이 터졌다.
“하지만 ‘모두에게는 차갑지만 나에게만은 따뜻한 내 남자’ 정도로 이해하기에는 둘 사이의 간극이 너무 크단 말이에요. 태왕으로서의 담덕은 내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대단할 때가 많아서요.”
“그렇습니까……. 저는 태왕으로서의 폐하밖에 겪어 보지 못했으니 아가씨의 입장을 이해하기 힘들 겁니다. 오히려 아가씨의 눈에 보인다는 평범한 청년으로서의 모습을 상상하는 게 더 힘들죠. 물론 아가씨를 대하는 모습은 많이 보았지만, 제게 그러시지는 않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태림의 얼굴이 미묘해졌다. 머릿속으로 담덕이 ‘평범한 청년’으로서 자신을 대하는 것을 상상해 보는 것이 틀림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태림이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역시 상상이 안 됩니다. 폐하는 폐하시니까 말이죠.”
“태림에게는 그렇겠죠.”
“그렇다면 아가씨 역시 마찬가지인 거 아니겠습니까?”
“저도요?”
“예. 제게 그분이 ‘폐하는 뭘 해도 폐하’인 것처럼, 아가씨께 그분도 ‘담덕은 뭘 해도 담덕’인 거 아닐까 하고…….”
이번에도 태림의 정리는 간단했다. 나는 망설임 없이 복잡한 문제를 정리해 버린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태림은 가끔 묵직하게 사람을 찔러요.”
“제가요?”
“네. 게다가 성실하고 친절하죠. 지설에게 똑같은 말을 했다면, 아마 ‘별 쓸데없는 생각을 다 하시는군요’라는 소리를 들었을걸요.”
지설의 말투와 목소리를 흉내 내는 내 모습에 태림이 드물게 소리 내어 웃었다.
“확실히 지설 님이라면 그랬겠죠.”
“잘 아시니 다행입니다. 정말 별 쓸데없는 생각을 다 하시는군요.”
태림의 말과 동시에 뒤에서 불쑥 지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으앗!”
놀라서 소리를 지르며 뒤를 보니 지설이 뚱한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 뒷이야기로 의기투합하고 계셨습니까?”
“아니에요!”
나는 재빨리 반박했다. 일종의 뒷말을 하기는 했지만, 그 대상은 지설이 아닌 담덕이었다.
당당한 나의 대답에 지설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럼 폐하의 뒷말이라도 하셨다든가?”
거짓말 못하기로 소문난 태림과 찔리는 구석이 많은 나. 두 사람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눈만 깜빡이자 지설이 픽 하고 웃었다.
“이 국내성에서, 아니, 이 고구려 땅에서 폐하의 뒷이야기를 당당히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아가씨뿐일 겁니다.”
“왜 태림은 빼는 거예요?”
“태림이야 아가씨에게 휩쓸렸을 뿐일 테니까요.”
지설은 툴툴거리는 나를 향해 생각할 가치도 없다는 듯 짧게 대답하더니, 금세 제 할 말을 꺼냈다.
“아무튼 아가씨께서 해 주셔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제가 할 일이요?”
궁에 드나들고는 있지만, 정식으로 혼례를 올리기 전까지는 손님에 불과한 내가 해야 할 일은 많지 않았다. 필시 연이의 문제일 것이다.
“연이가 무슨 사고라도 쳤어요?”
놀라서 물었더니 지설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랬다면 제가 여기까지 달려오지도 않았겠죠. 작은 도련님이 친 사고는 수습할 사람이 많으니까요. 하지만 사고를 친 사람이 폐하시거든요. 아니, 다행히 아직 사고는 치기 전인데…… 그냥 두면 곧 사고를 치실 테니, 사고를 친 것이나 마찬가지이기도 하고…….”
횡설수설 이어지는 말에 입이 떡 벌어졌다.
“지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황당함이 고스란히 담긴 내 목소리에 지설이 제 머리를 헤집으며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튼 폐하를 좀 말려 주십시오. 폐하께서 고집을 부리실 때 그 뜻을 꺾을 수 있는 사람은 아가씨 한 분뿐이거든요.”
* * *
도대체 무슨 일인가 했더니.
나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의자에 기대어 앉은 담덕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로 이걸 하겠다고? 장난친 게 아니라?”
“장난이라니. 지설도 이 정도 선에서 납득한 줄 알았는데, 갑자기 널 데려오다니…….”
담덕이 내 옆에서 승리자의 미소를 짓고 있는 지설을 노려보며 말했다.
나는 믿을 수 없어져 손에 든 종이에 적힌 글씨를 다시 읽어 보았다. 몇 번을 보아도 믿을 수가 없었다.
종이에는 나와 담덕이 국혼을 올리기 위해 준비해야 할 품목들이 가득 적혀 있었다. 품목은 일반적이었지만 요구하는 품질이나 수량이 지난 사례의 몇 배에 달했다.
“……혼례를 이렇게 요란하게 올릴 생각이었다고?”
“그러면 안 되나?”
담덕이 그게 무슨 문제냐는 듯 되물었다. 그 말에 지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고구려의 혼례 문화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검소(儉素)였다. 사치 없이 수수한 혼례가 정착되어 남녀가 서로 마음이 통하면 서로 주고받는 것 없이 혼인하여 부부가 되었다.
으레 생각하는 지참금도 없었다. 딸을 시집보내며 돈을 받는 것은 딸을 그 집의 종으로 파는 것이나 다름없는 행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남자 쪽에서 준비하는 술과 돼지고기로 한바탕 잔치를 벌이기는 했으나 그뿐이었다. 평민들뿐만 아니라 명문 귀족가도 이런 풍속을 따랐다.
왕가의 혼례도 마찬가지였다. 태왕의 위엄을 세우고자 보통 혼례보다 잔치를 조금 더 크게 열었다는 점만이 달랐다.
하지만 담덕의 계획은 ‘조금 더 큰’ 정도가 아니었다.
“이렇게 요란하게 혼례를 올렸다가는 백성에게 손가락질을 받을걸.”
“요란하다고? 이것이? 사실 난 그것도 마음에 차지 않아. 지설의 잔소리 때문에 줄이고 줄인 결과라고.”
“뭐? 줄이고 줄여서 이 정도라고? 도대체 처음 목록은 얼마나 요란했던 거야?”
내가 기겁하자 지설이 옆에서 푹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처음으로 폐하의 판단력을 의심한 순간이었죠.”
“내 판단력은 멀쩡해. 나라도 안정되었고, 올해 수확량도 안정적이고, 큰 잔치를 열기에는 제격이지.”
담덕이 부루퉁한 얼굴로 반박했다. 꼭 떼를 쓰는 어린아이 같은 얼굴이었다.
조금 전 태림과 함께 ‘너무 대단한 광개토 대왕’을 어떻게 대해야 하나 고민했었는데.
태림과 나누었던 대화가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입에서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두 사람은 내가 웃는 것도 모르고 여전히 심각한 얼굴로 말을 주고받는 중이었다.
“아직 후연과의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백제의 아신도 계속 왜와 교류하며 기회를 엿보고 있고요. 아직 마음을 놓으실 때는 아닙니다. 게다가 제가 회의를 겨우 달래서 하는 혼례이니 최대한 조용하게……”
“그럼 나는 언제 마음을 놓지? 백제 왕의 무릎을 꿇어앉히고, 왜군을 몰아내고, 가야를 깨부수고, 신라를 발아래 두었다. 지난 몇 년간 한시도 마음을 놓은 적 없이 달려왔어. 그런데 아직도 부족한가?”
담덕의 서늘한 목소리에 지설이 입을 꾹 다물었다. 덩달아 내 입가에서도 미소가 사라졌다.
“후연을 물리치면 그 뒤에는 마음을 놓을 수 있나? 그때는 또 어떤 불안이 나를 가로막지? 나는 도저히 모르겠군. 그러니 지설, 자네가 말해 봐. 나는 언제 마음을 놓을 수 있나?”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어울리지 않게 할 말을 잃은 지설이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이다 나를 보았다. 아무래도 자신이 수습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지설이 고개 숙여 인사하고 조용히 집무실을 나섰다.
나와 담덕 둘만 남은 공간.
“지설은 할 일을 한 거야. 계속 경각심을 일깨워 주는 거. 그게 지설의 일이잖아. 그러니 나도 지금부터 내 할 일을 해야겠다.”
나는 여전히 무거운 공기를 밀어내기 위해 미소를 지으며 담덕의 얼굴을 살폈다.
“지쳤어? 마음 놓고 쉬고 싶은 거야?”
내 질문에 담덕이 나를 빤히 바라봤다. 그는 상당히 얼떨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마 그랬었나 봐. 나도 지금 말을 내뱉고서야 알았다. 그랬구나. 난 지쳐 있었던 거야. 아주 오랫동안.”
담덕이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는 듯 제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걸 느낄 새도 없었지. 생각할 틈도 없이 무작정 달려오기만 했으니까. 그런데 네가 왔어. 내 유일한 쉴 곳, 내 모든 것을 보여 줄 수 있는 네가. 오래도록 잃었던 쉼터를 다시 찾은 거야.”
한참 제 손을 바라보던 담덕이 다시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그러니 오래도록 눌러 온 피로가 몰려온 거지. 난 지금, 아마도 투정을 부리고 싶은 것 같아.”
“투정?”
“그래. 내가 여태까지 이렇게 힘들었다고, 누구에게도 이런 걸 말하지 못했다고, 그러니 유일한 사람인 네가 나를 좀 안아 달라고. 그런 투정.”
“뭐, 어렵지 않네.”
나는 담덕의 무릎 위에 앉아 그를 꼭 끌어안았다. 등을 토닥이는 느린 손길에 화답하듯 담덕이 나를 마주 안았다.
분명 먼저 껴안은 사람은 나인데, 체격 차이 때문인지 내가 담덕에게 안겨 파묻힌 모양새가 되었다.
담덕의 손길이 느리게 내 등을 쓸어내렸다.
“좋다. 네 체온, 네 향기. 이걸 느끼고 있으면 어깨의 힘이 풀려. 이렇게 네가 날 안아 주는 것도 참으로 오랜만이다.”
담덕이 웃으며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가 입술을 움직여 말을 꺼낼 때마다 목덜미가 간지러웠다.
“이젠 계속 할 수 있잖아. 그간 부족했던 만큼 다 해.”
“정말?”
“정말.”
“흐음, 그래?”
내 대답에 담덕이 묘한 웃음을 흘렸다.
“후회할 텐데. 내가 지난 6년 동안 참으로 많이 참았거든.”
담덕이 그렇게 말하며 내 목덜미를 깨물었다. 여린 살이 예기치 못한 자극에 파르르 떨리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나는 당황해서 담덕을 밀어냈다. 그래 봤자 담덕의 무릎 위라 가까운 거리는 여전했지만, 내 목덜미에서 그를 떼어 낸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 이, 이런 건 혼인한 뒤에 해! 내가 말한 건 껴안는 거 정도였단 말이야!”
“새삼스럽긴. 혼인 전에 애까지 낳은 사이인데 이제 와 내외하겠다는 거야? 상당히 의미 없는 짓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이미 사고를 쳤으니 지금부터라도 제대로 절차를 밟으셔야죠, 폐하.”
일부러 정중하게 예를 갖추는 내 말투에 담덕이 미간을 찌푸렸다.
“우희. 넌 네가 얼마나 가혹한지 모르지?”
“하지만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한 달이나 남았는데, 그게 얼마 남은 게 아냐?”
길일을 택해 준 제관(祭官)이 들었다면 펄쩍 뛸 이야기였다. 제관들이 담덕의 재촉에 몇 번이나 길일을 당겨 잡느라 진땀을 뺐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이 시대에는 ‘하늘’의 뜻이 중요했다. 우리가 하늘로부터 선택받았다는 믿음, 올해도 하늘이 우리를 지켜 줄 거라는 희망. 매년 동맹제를 열고 제를 올리는 이유도 결국은 그런 문제였다.
신에 대한 백성의 믿음은 대단했다. 그러니 아무리 태왕이라도 하늘의 뜻을 대놓고 거스를 수는 없었다.
하늘의 뜻은 제를 주관하는 제관들의 입을 통해 전해졌다. 때로는 제관들의 말이 태왕과 제가 회의의 발언보다 강했다. 그중 하나가 택일(擇日)이었다.
국가의 대소사의 모든 일은 제관을 거쳐 정해졌다. 제관이 달과 별의 움직임으로 하늘의 뜻을 읽어 적합한 날짜를 올리면 태왕이 이를 받아들여 일이 진행된다.
보통은 큰 문제 없이 한 번에 일이 진행되는데, 담덕은 세 번이나 제관이 올린 길일을 반려했다.
-내 길일이 이렇게 늦을 리 없다. 혹 제관들이 하늘을 잘못 읽은 것은 아닌가?
좀 더 날짜를 당겨 잡으라는 압박이었다. 제관들은 눈치 빠르게 ‘제가 별을 하나 놓쳐서’, ‘이제 보니 달의 위치가 달라서’, ‘생각해 보니 이 해석이 더 좋아서’ 더 좋은 날짜를 찾아야겠다며 다시 날을 올렸고, 그런 과정을 거친 끝에야 한 달 뒤로 국혼일이 정해졌다.
그간 제관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 그들이 적당히 장단을 맞춰 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감히 하늘의 뜻을 거스른다고 소란이 일었을 것이다.
“하루라도 빨리 혼인을 올리고 싶어. 일이 틀어질까 봐 불안하다.”
“제가 회의의 승인도 이미 떨어졌는걸. 혼인 이후에도 많은 문제가 있겠지만, 우선 혼인이 틀어질 일은 없을 거야.”
제법 어른스럽게 담덕을 위로했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표정이 이상했다.
“연우희. 내가 불안해하는 건 너야.”
“어? 나?”
내가 왜?
어리둥절해져 눈을 껌뻑이니 담덕이 두 손으로 내 머리를 붙잡았다.
“이 조그만 머리로 또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 내게서 도망치면 어떡하나, 난 그게 걱정인 거라고.”
“안 그래.”
“이미 전적이 있잖아.”
“바보가 아닌 이상 같은 짓을 두 번 저지르진 않아. 내가 바보는 아니잖아?”
당연히 ‘그렇지’라는 대답이 돌아와야 하는데 담덕은 아무 말이 없었다. 복잡 미묘한 표정으로 깊은 침묵을 지켰을 뿐이었다.
“왜 대답이 없어? 내가 바보라는 거야?”
발끈하는 나를 보며 담덕이 픽 웃더니 손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면 왜 대답을 못 해?”
“넌 가끔 내 예상을 뛰어넘는 일들을 해 버린다고. 스스로 독을 먹질 않나, 맨몸으로 호랑이를 때려잡질 않나, 그러더니 훌쩍 떠나 6년이나 나타나지 않았지.”
“그건……”
“알아. 사정이 있었지. 하지만 난 널 볼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해. 네가 정말 이곳에 뿌리내리고 있는 걸까?”
담덕이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던진 질문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는 내가 온전히 ‘우희’로 살지 못했다는 것을 모두 보았구나.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정처 없는 말이 입안을 맴돌았지만, 애초에 대답을 바란 것이 아니었는지 담덕의 말이 이어졌다.
“우희 넌 너무 달라. 그런 너라서 마음을 주었지만, 한편으로는 환상처럼 네가 사라질 거라는 불안을 안고 살았는지도 몰라. 그래서 조금 더 확실히 널 이 땅에 묶어 두고 싶은 거고.”
담덕이 손을 뻗어 내 옷소매를 매만졌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이라도 당장 너와 혼례를 올리고 이 땅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크고 화려하게, 그래서 그걸 본 사람 모두가 너와 나의 인연을 알 수 있도록. 내 불안한 마음을 타인을 통해 붙들어 보려는 건 역시 이기적인가?”
담덕은 조심스러워 보였다. 내 눈을 보지도 못하고, 내 손을 잡지도 못하고 옷소매 끝자락만 매만지는 그를 보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입이 움직였다.
“그럼 해 버릴까?”
의미 없어 보이는 중얼거림이 확신으로 자리 잡는 건 금방이었다.
“하자, 담덕.”
좀 더 명확해진 내 말에 담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뭘?”
“혼례 말이야. 오늘 하면 되잖아.”
“……오늘?”
“태왕과 황후로서 국혼을 치르기 전에 먼저 담덕과 우희의 혼례를 치르자. 필요한 건 별로 없어. 민가의 연인들은 그렇게 하잖아. 서로 마음이 통하면 하늘에 평생의 인연을 맹세하고 술 한 잔을 나눈 뒤에 부부가 되지. 우리도 그리하면 되잖아.”
이어지는 내 말을 들으며 담덕의 입이 점점 벌어졌다.
“담덕, 나로 인한 불안을 타인을 통해 없애려 하지 마. 그냥 나에게 요구해. 널 불안하게 하지 말라고 당당히 말해 줘. 넌 내 것이라며? 그러니 너의 불안을 없애는 건 널 가진 내가 할 일이지.”
마침내 내 말이 끝났을 때.
“여전하다, 연우희. 지금 또 내 예상을 뛰어넘어 버렸어.”
뭐라 형용할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멍하니 보던 담덕이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그리하자. 꼭 국혼만 혼례가 아닌걸. 너와 나의 혼례가 더 중요하지.”
* * *
국혼이 치러지는 장소는 정해져 있다. 하지만 나와 담덕의 개인적인 혼례라면 어디든 우리가 원하는 곳에서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큰 의미가 있는 곳에서 하고 싶었다. 담덕의 생각도 비슷했다.
그렇게 뜻을 모으자 나와 담덕은 오래 고민할 것도 없이 같은 장소를 떠올렸다. 함께 물놀이를 하고, 하루를 보내고, 헤어짐을 맞이하기도 했던 호수였다.
우리는 말을 타고 호수에 도착했다. 오래전에는 담덕과 다시는 보지 못할 결심을 하고 이곳에 왔는데, 오늘은 혼례를 하겠다고 찾아왔다.
그러고 보니 풍경도 비슷했다. 무엇인가 달라질 미래를 암시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날과 같은 노을이 지고 있었다. 주홍빛이 서서히 하늘을 물들였다.
“그런데 넌 알아?”
나와 나란히 서서 하늘을 바라보던 담덕이 내게 물었다.
“뭘?”
“혼례 말이야. 민가에서는 보통 어떻게 혼례를 치르지? 대충 어떻게 한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직접 본 적은 없어서.”
“어…….”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주변에 혼례를 치른 사람이 없다 보니 직접 눈으로 볼 기회가 없었다. 여기저기서 들은 이야기야 많았지만 정확히 어떻게 혼례가 진행되는지는 몰랐다.
“나도 모르는데.”
“뭐? 자신 있게 먼저 혼례를 치르자고 하더니 어떻게 치르는지도 모른다고?”
“네가 당연히 알고 있을 줄 알았어. 선선히 그러자고 하기에.”
“그건 네가 워낙 당당하게 말하니까 네가 잘 알고 있을 거라고…….”
“그럼 어떡하지?”
내 질문을 끝으로 침묵이 흘렀다. 한참이나 답을 찾지 못하고 멍하니 담덕을 바라보고 있자니 어이가 없어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건 담덕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배를 잡고 웃었다.
“도대체 이게 뭐야? 꼭 중요한 순간에 이렇게 어설프다니까.”
웃다가 지쳐 땅에 주저앉으니 얼마나 대책 없이 이곳까지 왔는지 실감이 났다.
“그럼 이제 어떡하지?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고 와야 하나? 그것도 우스운데.”
담덕이 가져온 술병을 흔들며 말했다. 그 와중에 어디서 들은 건 있어 술은 챙겨 온 것이 우스웠다.
“그래도 술은 가져왔네.”
다시 웃음이 터진 나를 보며 담덕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것마저 없었으면 정말 아무것도 못 한다고.”
담덕이 먼저 술을 한 모금 마시고 내게 병을 내밀었다. 나는 그가 내미는 술을 받아 마시며 순순히 수긍했다.
“그건 그렇지만.”
“그러는 넌 뭘 가져온 건데?”
담덕이 내 옆에 앉으며 작은 보따리를 가리켰다. 그와 궁을 나서기 전 급히 사람을 시켜 다원에서 가져오라 부탁한 것이었다.
담덕의 뒷배가 되어 주기 위해 혼인을 결심했을 때는 준비할 생각도 하지 않은 물건이었다.
하지만 담덕과 하루를 보내고 진심으로 마음이 닿은 후 조용히 준비해 두었다. 그 모습을 보며 달래는 왕실의 혼례에서는 준비하지 않는 물건이라 말해 주었지만, 그래도 나는 담덕에게 이것을 주고 싶었다.
나는 태왕이 아닌 담덕과 혼인하려고 마음먹은 거니까.
“마음에 둔 사내와 혼인하는 날 여인이 유일하게 준비하는 것이래.”
나는 보따리를 풀어 담덕 앞에 내가 준비한 것을 내밀었다. 보따리를 풀자 드러나는 새하얀 옷을 보며 담덕의 얼굴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수의(壽衣)구나.”
고구려는 전쟁이 잦은 나라였다. 전쟁에는 당연히 죽음이 따른다. 수많은 적들의 목숨을 거두지만, 아군의 희생도 만만치 않았다.
고구려인들은 삶과 함께 늘 죽음을 생각했다. 아버지가 당당하게 전쟁터에 나서 목숨을 바쳤던 것도 그가 어쩔 수 없는 고구려인이어서였다.
백제나 신라에 비해 척박한 땅. 살아남기 위해서는 밖으로 눈을 돌려야만 한다.
전쟁을 통해 발전할 수밖에 없는 나라의 특성이 누구보다 이들을 호전적인 민족으로, 죽음에 초연한 민족으로 만들었다.
고구려 사람들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었다. 죽음이란 또 다른 시작에 불과할 뿐. 어떤 측면에서는 불교의 윤회 사상과도 통하는 면이 있었다.
혼인이라는 새로운 시작의 날에 죽음을 맞이한 순간 입을 수의를 준비한다. 이 모순은 고구려 사람들에게 삶과 죽음이 어떤 의미인지 가장 잘 알려 주는 사례였다.
“처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런 생각을 했어. 혼인을 하며 남편이 입을 수의와 내가 입을 수의를 함께 준비하는 건, 이번 생에서뿐만이 아니라 죽어서 다음 생에까지 인연을 맺겠다는 맹세가 아닐까 하고. 그렇게 생각하니 너에게 꼭 주고 싶었어. 태왕에게 수의를 선물하는 건 불경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아마 왕실에서 이러한 풍속을 따르지 않는 건 감히 태왕에게 죽음을 떠올리게 하는 수의를 건넬 수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담덕은 아무 말 없이 내가 내민 수의를 바라보았다. 수의를 응시하는 눈은 생각이 깊어 보였다.
역시 받기 힘든 걸까?
태왕이 수의를 받는다는 건 여러모로 힘들 것이다. 그가 받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건 예상했으므로 나는 담담하게 수의로 손을 뻗었다.
“받지 않아도……”
“받지 않을 리가 없잖아.”
내 손이 닿기도 전에 담덕이 수의를 집어 들었다. 신성한 것을 받아 드는 듯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수의라. 네가 내게 이런 걸 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 민간에 이런 풍속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담덕이 말끝을 흐리며 천천히 수의를 살폈다.
“네가 직접 만든 거야?”
곳곳에서 서툰 흔적을 발견한 것인지 담덕이 물었다. 어설픈 솜씨를 들킨 것이 부끄러워 얼굴이 달아올랐다.
지금도 바느질은 완벽하지 않았지만, 저 수의를 만들 때의 실력은 더 형편없었다. 어떻게든 수의의 모양을 잡긴 했지만 한 나라의 태왕이 입기에는 지나치게 초라한 수의였다.
“응. 원래 부인이 직접 만드는 거래서…….”
“언제 만든 건데?”
“그…… 너랑 그, 음, 하루를 보내고 난 뒤에…….”
그날의 일을 언급하는 것도, 그날이 지난 후 수의를 만들었다는 것도 전부 부끄러웠다. 부끄러운 마음 때문인지 그렇지 않아도 어설픈 수의가 더 엉망으로 보였다.
“흐음. 그랬구나.”
담덕이 묘한 눈으로 수의를 보았다. 그 눈길에 나는 더욱 민망해졌다.
“어설픈 게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만들게.”
허둥지둥 손을 뻗었지만 담덕이 나를 피해 수의를 제 뒤로 감췄다.
“무슨 소리. 난 이게 좋아.”
“하지만……”
“난 이게 좋아, 우희야.”
담덕이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장난기 없이 오롯하게 진심이 담긴 얼굴이었다.
“지금 네가 건넨 이 수의가 내게 얼마나 큰 확신을 주는지 모를 거야. 무척이나 안심이 돼. 수십, 수백 사람의 확인보다 더 소중한 확인이야.”
어쩐지 담덕은 감격에 찬 것 같았다. 어설프게 지은 수의 하나에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는 그를 보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마음을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기뻐하는 사람인데. 나는 여태까지 그거 하나조차 해 주지 못했구나.
나는 싱글벙글 웃으며 수의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담덕의 뺨에 손을 얹었다. 닿아 온 손길에 담덕이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함께 술을 나눠 마시고 수의도 주었으니 다음은 맹세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맹세를 하는 것인지는 알지 못한다. 나는 그저 마음에 맴도는 말을 하기로 했다.
“난 혼인이 뭔지 잘 모르겠어. 하지만 생각해 보면 서로에게 서로를 주는 게 부부가 아닐까 싶어. 하지만 오래전 넌 이미 내게 너를 주었으니, 오늘은 내가 너에게 날 줄게. 오늘부터 나 연우희는 네 것이야.”
내 말에 담덕이 미묘한 얼굴을 했다. 웃는지 우는지 모를 이상한 얼굴이었다.
“이상하네. 오늘은 내 탄일도 아닌데.”
“탄일이 아니라 혼례일이지. 그러니까 마지막 맹세.”
나는 담덕에게 다가가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입술이 닿았다 떨어질 때까지도 담덕은 미동조차 없었다. 조금 커진 눈으로 나의 움직임을 쫓고 있을 뿐이었다.
말도 안 되는 짓을 하는 것처럼 나를 보는 담덕의 눈빛에 나는 순식간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너, 너무 분위기에 취했나? 나 방금 뭐한 거지!
다시 만난 이후 입을 맞추는 건 처음이었다. 고작해야 껴안는 것이 전부였는데, 뜬금없이 입을 맞추었으니 담덕의 입장에서는 놀랍기도 할 것이다.
한참 나를 보던 담덕이 제 입술을 매만지며 물었다.
“……이게 맹세?”
“어, 음, 이게 그, 맹세의 입맞춤이라고……”
“처음 듣는데.”
“먼 나라에 있어. 산 넘고 바다 건너가면…….”
“산 넘고 바다 건너면 있는 나라의 풍습이라.”
아닌가? 이 시대에는 서양에도 이런 풍습이 없나?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날 빤히 보는 담덕의 시선에 머릿속이 빙빙 돌았다.
혼란스러워 눈을 이리저리 굴리는 내게 곧 담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나라, 어디인지 모르겠지만 참 좋은 나라네.”
“어?”
“좋은 나라라고. 그런 훌륭한 풍습을 가졌다니 말이야. 그런 좋은 건 빠르게 배워야지. 난 배움이 빠른 편이거든.”
이번에는 담덕이 씨익 웃으며 내게 입을 맞추었다. 잠깐 닿았다 떨어진 나와 달리 그의 입맞춤은 조금 더 길었다.
점점 더 가까워지는 담덕의 무게에 몸이 뒤로 밀려났다. 그가 허리를 단단히 붙잡아 주지 않았다면 힘없이 뒤로 넘어갔을 것이다.
한참이나 집요하게 내게 붙어 있던 담덕이 숨이 턱 끝까지 닿을 때쯤 나를 놓아주었다.
“어때?”
“뭐가?”
“내가 그 나라의 풍습을 제대로 배웠나?”
너무 잘 배워서 문제야!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말을 속으로 삼키며 입을 떡 벌리니 담덕이 웃었다.
“고마워, 우희. 널 내게 줘서. 오늘이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순간이 될 거야.”
* * *
국혼은 간소하게 치러졌다. 담덕과 이미 둘만의 혼례를 치른 후였기 때문에 정작 우리에게 국혼은 큰 의미를 가지지 못했다.
순식간에 마음을 돌린 담덕을 보며 지설은 의아해했다. 내게 담덕을 설득해 달라고는 했지만, 그가 끝까지 뜻을 바꾸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그럴 거면 왜 내게 도움을 청한 것이냐 물으니 지설은 담백하게 대답했다.
-제 뜻을 꺾고 벌인 일이니 제발 마음이라도 불편하시라고요. 제 반대에는 코웃음도 안 치시겠지만, 아가씨의 반대에는 속앓이를 꽤 하실 거 아닙니까.
참으로 담덕을 잘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담덕의 측근으로 오래도록 곁을 지키고 있는 거겠지.
국혼을 치르고 나의 거처는 당연히 궁으로 바뀌었다. 오래전에도 궁에서 지낸 적이 있었지만 황후의 거처는 그때 지내던 곳과 차원이 달랐다.
연 역시 정식으로 담덕의 자식으로 입적되어 궁으로 왔다. 담덕은 당장 연을 태자로 세우고 싶은 눈치였으나, 이번에는 차례대로 하나씩 해결해 보자는 지설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전적으로 연을 위한 결정이었다. 어설프게 밀어붙여 태자로 책봉한다면 귀족들의 온전한 지지를 얻을 수 없었다.
궁에 들어온 뒤 연은 서서히 자신을 둘러싼 일들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어렸을 적 담덕이 그랬던 것처럼 태학을 다니기 시작했고, 왕실의 관례에 따라 혼자만의 처소를 얻었다.
태학에는 다양한 귀족가의 자제들이 있었다. 그 안에서 연이 마주하게 될 세계가 어떨지 걱정스러웠지만 나는 아이를 믿기로 했다. 물론 그 전에 확실히 해 둘 부분도 있었다.
“연아.”
“네, 어머니.”
연이 태학에 나가는 첫날. 나는 아침 일찍 내게 인사를 온 연을 붙잡고 아이가 받아들이기에는 복잡할 거라며 미뤄 왔던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래전에 신라에서 네 아버지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이 있지?”
“네.”
“뭐라고 했는지 기억해?”
“그럼요. 연이는 전부 기억해요.”
연이 뿌듯하게 웃고는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 가며 입을 열었다.
“아버지는 바다 건너며 장사를 하는 분이고, 너무 멀리 계셔서 절 보러 올 수 없고, 절 아주 많이 사랑하신다고요.”
“그래. 잘 기억하고 있구나. 그 아버지 말이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