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장. 연의 소원
얼마 후 우리는 사냥에 나섰다.
이번 사냥은 태왕의 공식적인 일정이 아니었기 때문에 꾸려진 인원도 무척이나 단출했다. 담덕과 태림, 나와 연이 전부였다.
물론 사냥터 외곽의 경계는 근위대들이 빈틈없이 지키고 있었다. 태왕의 개인 사냥터인 만큼 평소에도 사람들의 출입이 제한되는 곳이지만, 오늘은 태왕이 직접 걸음을 한 만큼 지키는 인원이 더 늘어난 상태라고 했다.
사위(四圍)가 긴장으로 가득 찬 것과 달리 사냥터 안쪽은 평화로웠다.
연은 사냥감을 잡겠다는 결심으로 과하게 진지했고, 담덕은 그런 연의 장단에 맞추어 주며 어린아이처럼 천진하게 웃고 있었다.
두 사람의 사냥은 마치 아이들의 소꿉장난 같았다. 사냥감이 보이면 풀숲에 후다닥 몸을 숨기며 숨을 죽였다가, 사냥감이 먹이에 정신이 팔린 틈을 노려 활을 쏘았다.
아직 움직이는 사냥감을 겨누는 일에 익숙하지 않은 연의 화살은 번번이 동물들을 빗겨 갔다. 그럴 때마다 연은 시무룩한 얼굴을 했고, 담덕은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갈수록 화살이 사냥감 가까이 가는구나. 다음엔 잡을 수 있겠는데?”
“네에…….”
하지만 담덕의 위로도 연에게는 큰 힘이 되지 못했다. 움직이지 않는 과녁을 두고는 백발백중이었는데, 정작 사냥터에 나와서는 힘을 못 쓰고 있으니 기운이 빠진 것 같았다.
“네 화살이 왜 안 맞는 것 같으냐? 과녁은 잘만 맞혔는데 말이야.”
시무룩한 연을 향해 담덕이 물었다. 그러자 연이 별 이상한 걸 다 묻는다는 듯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폐하도 참. 제가 그걸 알면 왜 토끼 한 마리도 못 잡고 있겠습니까? 어찌 그리 당연한 걸 물으세요?”
“큭.”
질책마저 섞인 듯한 연의 타박에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태림의 입에서 억눌린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는 예전부터 담덕이 태왕답지 못한 취급을 받을 때 이리 웃음을 흘리는 경향이 있었다.
“태림.”
“흠흠.”
담덕이 제 이름을 부르자 태림이 헛기침을 하며 딴청을 피웠다.
“폐하!”
그때 연이 또 다른 사냥감을 발견했는지 담덕의 팔을 잡아끌며 작게 속삭였다. 태림에게 한 소리를 하려던 담덕이 순식간에 연의 손에 끌려가 몸을 숙였다.
이번 사냥감은 작은 새였다. 나뭇가지에 앉아 여유롭게 지저귀고 있는 새를 보며 이번에는 담덕이 활을 꺼내 들었다.
“움직이는 놈을 잡으려면 예측을 해야 한다.”
“예측이요?”
“그래. 과녁은 움직이지 않으니까 내가 쏘아 낼 화살의 궤적만 상상하면 되지만, 사냥감은 날아오는 화살을 피하니 움직임을 잘 관찰해서 이놈이 어디로 도망갈 것인지 예측을 해야 한다. 그리고 그 예측한 방향으로 조금 틀어서 화살을 날려야지.”
새를 겨누고 있던 담덕의 팔이 옆으로 조금 빗겨 났다. 이대로 화살의 궤적을 그려 보면 새의 몸통에서 살짝 벗어난 허공이었다.
“허공을 향해서 화살을 쏘라는 건가요?”
연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과녁을 두고 맞히는 훈련만 한 연에게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화살을 쏜다는 것이 영 이상한 모양이었다.
“허공도 다 같은 허공이 아니다. 곧 채워질 허공, 그곳으로 화살을 날려야 해.”
대답과 동시에 담덕이 화살을 잡은 손을 놓았다. 날아오는 화살에 놀라서 나뭇가지를 떠나려던 새의 배에 그대로 화살이 박혔다.
“와아!”
땅으로 툭 떨어지는 새를 보며 연이 감탄했다. 오늘 사냥을 시작하고 잡은 첫 사냥감이었다.
“내가 하나 먼저 잡았구나. 너도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되겠는데?”
“전 오늘 처음 사냥을 시작하는 어린아이고, 폐하께서는 사냥을 몇 번이나 한 어른이시니 폐하께서 먼저 사냥감을 잡는 건 당연한 겁니다. 사냥터를 떠나기 전까지 한 마리만 잡아도 제가 폐하께 이기는 것이니 전 초조하지 않아요.”
저를 놀리는 담덕의 목소리에 연이 차분하게 대꾸했다.
“……보아하니 내가 지금 이 녀석에게 설교를 들은 것 같은데. 그렇지?”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었는지 담덕이 입을 벌리며 나와 태림을 보았다.
“네. 그러신 것 같습니다.”
곧이곧대로 담덕의 질문을 받아들이고 진지하게 대답하는 태림의 모습에 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태림. 내가 대답을 바라고 물은 것 같은가?”
“그게 아니라면 왜 질문을 하신 겁니까?”
“……자네가 아닌 지설을 데려오는 건데.”
“지설 님은 오늘 폐하께서 사냥을 나오시느라 미뤄 둔 일들을 대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따라온 것이고요.”
“태림. 내가 이것도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이…… 하. 됐네. 자네에게 뭘 기대한 내가 잘못이지.”
때아닌 만담을 나누는 두 사람을 멍하니 바라보던 나의 입에서 웃음이 터졌다. 곁에서 눈을 깜빡이던 연도 마찬가지였다.
웃음소리에 나뭇가지에 앉아 있던 새들이 멀리 날아가 버렸지만 누구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오랜만의 여유로운 한때였다.
* * *
멀리서 하늘이 울렸다. 천둥소리에 하늘을 보니 멀리서 먹구름이 밀려오고 있었다.
“비가 오려나?”
아쉽지만 오늘 사냥은 여기까지만 해야 할 것 같았다.
그 말을 하기 위해 담덕을 보니 어느새 그도 멀리서 밀려오는 먹구름을 보고 있었다.
“우희, 이만 돌아가야겠다.”
“응.”
아직 연이 사냥감을 잡지 못했다. 아쉬워서 떠나지 않으려 할 것이 분명하니 그를 달랠 일이 벌써부터 걱정이었다.
“연아, 비가 올 것 같아. 아쉽지만 오늘은 돌아가자.”
그렇게 말하며 연이 있던 담덕의 옆으로 시선을 돌렸지만 그곳은 텅 비어 있었다.
“……연아?”
담덕의 주변을 돌며 그의 양옆, 앞뒤를 모두 살폈지만 연의 모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 녀석이 또!”
익숙한 순간이었다. 이리 부인의 저택에 있을 때도 연이 이런 식으로 사라진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덕분에 나는 추적의 귀재가 되어 버렸다. 각종 단서를 조합해 아들을 찾는 데에는 도가 텄다.
재빨리 땅을 보니 연이 걸어간 길을 따라 풀이 쓰러져 있었다. 방향이 좀 더 깊은 숲 쪽으로 향한 것을 보니 무엇인가 발견하고 뒤를 따른 모양이었다.
저쪽으로 사라진 게 분명해.
“우희.”
담덕이 당장 그 길을 따라 움직이려는 나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와 동시에 머리 위에서 비가 후두둑 쏟아졌다. 두 손으로 머리를 가리고 하늘을 보니 생각보다 빠르게 찾아온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하지만 곧 머리 위에 쏟아지는 비가 멈추고 하늘을 향한 시야가 가려졌다.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담덕이 겉옷을 벗어 내게 떨어지는 비를 막아 주고 있었다.
“태림이 연을 따라갔어. 금방 데려올 거다.”
태림이 연을 따라갔다면 안심이었다. 그는 나보다 더 추적에 능할 테니 이리 번쩍, 저리 번쩍하는 연을 무사히 데려올 것이다.
“지금 움직이면 다 젖을 테니, 두 사람을 기다리며 잠시 비를 피하고 있자. 비가 쉽게 그칠 것 같지는 않으니까.”
담덕이 나를 근처에 있는 커다란 나무 아래로 이끌었다.
무성하게 자란 잎이 비를 막아 주는 것인지 나무 아래는 빗방울 하나 없이 보송했다.
담덕은 내게 쏟아지는 비를 막아 주었던 겉옷의 물기를 짜내며 나무 밖을 바라보았다.
“어찌 너와 나들이를 나서는 날은 항상 비가 오는 것 같다.”
“내가 비를 몰고 온다는 거야?”
“말이 그렇게 되나?”
담덕이 피식 웃으며 젖은 옷을 나뭇가지에 대충 걸쳤다. 그 뒤로는 계속 침묵이었다.
고구려로 돌아온 후 담덕과 단둘만 남아 서로를 마주한 적이 없었다. 덕분에 어색함이 가득해 손끝이 저릿할 정도였다.
늘 둘이서 시간을 보내고 웃었던 지난날을 생각하면 오늘날의 어색함이 우습기만 했다. 그나마 비가 내려 어색한 침묵을 가려 준 것이 다행이었다.
“네 아들은 기운이 넘치는구나. 총명하고 다부진 것이 나중에 큰 사람이 되겠다.”
“큰 사람은 무슨. 그저 건강하게만 자라 주면 바랄 것이 없겠어.”
체격이 크고 활력이 좋은 연이지만 나는 언제나 그의 건강이 염려스러웠다.
산달을 채우지 않고 태어난 아이들은 대개 잔병치레가 많다고 하는데, 반대로 연은 잔병치레가 없는 대신 꼭 1년에 한두 번을 크게 앓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어머니이자 의원으로서 진땀을 빼며 연의 곁을 지켰다.
“건강? 지금 하는 것을 봐서는 건강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잠시 놀아 주고서 진이 다 빠진 것인지 담덕이 질린 얼굴로 웃었다. 그 모습이 꼭 연과 한바탕 놀이를 하고 난 후의 내 모습 같아 나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때였다.
“아아악!”
빗소리를 뚫고 귓가에 도달한 비명소리에 웃음이 뚝 끊겼다.
“이건 연이 목소리……!”
그 사실을 인식하자마자 몸이 먼저 튀어 나갔다.
나는 나무를 벗어나 그대로 연의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 뒤로 나를 따라붙는 담덕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온몸으로 비가 세차게 부딪혔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귓가에 연의 비명 소리가 윙윙 맴돌아 정신이 아득했다.
“연아!”
“아가씨! 폐하!”
연의 이름을 부르며 달린 지 오래 지나지 않아 태림이 나와 담덕을 불러 세웠다. 나는 그대로 태림에게 달려가 그를 붙잡았다.
“연이는요?”
“그것이…….”
다급하게 물으니 태림이 곤란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붙잡을 새도 없이 갑자기 튀어 나가는 바람에 놓쳤습니다.”
그가 면목이 없다는 듯 절벽 아래를 가리켰다.
“설마 저 아래로 떨어졌다고요?”
“예. 하지만 그렇게 높은 절벽은 아닙니다. 아래에도 나무들이 있고…….”
태림의 말을 듣고 마음을 가라앉힌 뒤 아래를 살피니 그의 말처럼 높은 절벽은 아니었다. 아래에는 나무도 울창하게 자라 떨어지면서 충격이 제법 완화되었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걱정이 씻은 듯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이성적인 계산은 계산일 뿐, 연이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놀란 가슴이 진정되지 않아 몸이 덜덜 떨리고 심장이 쿵쾅거렸다.
“제가 내려가 살펴보겠습니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태림이 떨리는 내 어깨를 토닥이며 나를 진정시켰다. 덕분에 떨림이 조금 잦아들어 심호흡을 하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옆에서 큰 그림자가 움직였다.
나와 태림의 고개가 반사적으로 돌아갔다. 그림자의 정체를 확인한 우리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담덕!”
“폐하!”
담덕이 망설임 없이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진 것이다.
절벽의 경사면을 타고 아래로 미끄러져 가는 담덕을 보며 나와 태림이 경악에 찼다.
담덕의 모습이 금세 나무들 사이로 사라졌다.
말릴 새도 없이 일어난 일에 나와 태림 모두 절벽으로 달려갔다.
절벽 끝에 몸을 붙이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마침 나무들 사이로 담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이를 찾았어. 잠깐 정신을 잃은 것 같은데…… 숨은 멀쩡하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지금 데리고 올라갈게.”
담덕은 연을 등에 업고 가파른 절벽을 잘도 기어 올라왔다. 바위틈 사이에 발을 디디고 절벽에 뿌리를 내린 나무를 붙잡아 한 걸음씩 전진하더니 금세 절벽 위에 안착했다.
“한번 살펴봐.”
담덕이 나를 근처 나무 아래로 데려가 땅 위에 연을 내려놓았다.
서둘러 연의 상태를 살피니 그의 말처럼 잠시 정신을 잃었을 뿐 목숨에는 지장이 없는 것 같았다.
아래로 떨어지며 생긴 생채기들도 경미했다. 팔다리 어느 곳도 심각하게 부러진 곳 없이 긁힌 상처뿐이었다. 이마가 찢어져 피가 나기는 했지만 절벽에서 떨어지고 이 정도라면 운이 아주 좋은 축이었다.
연이 무사하다는 걸 확인하자마자 나는 담덕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나의 날카로운 시선을 받은 담덕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왜라니? 갑자기 절벽 아래로 뛰어들면 어떡해! 태림이 내려간다고 했잖아.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면 되지 왜 네가 뛰어들어? 다치면 어쩌려고!”
“다쳐? 내가? 고작 저 정도를 내려가는데?”
담덕이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내게는 가파르고 위험해 보이는 저 절벽이 담덕에게는 ‘고작 저 정도’일 뿐인 듯했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위험하면 하지 말아야지.”
나는 동의를 구하기 위해 재빨리 태림을 보았다. 이번에는 그도 내 편이었다.
“폐하. 부디 호위를 하는 제 입장도 생각해 주십시오.”
“오늘은 잔소리꾼이 두 명이네.”
담덕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얼굴에 쏟아지는 빗물을 닦아 냈다. 투덜거리면서도 정작 그의 기분은 나빠 보이지 않았다.
“으으…….”
담덕을 향해 한 소리 더 하려는 그때, 잠시 정신을 잃었던 연이 끙끙대며 몸을 일으켰다.
“연아.”
눈을 뜨자마자 엄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내 모습과 마주한 연이 숨을 들이켜며 어깨를 움츠렸다.
“어머니이…….”
꾸지람을 면하려는 듯 애교가 섞인 목소리였다. 여기에 넘어가면 앞으로가 고달프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흔들리지 않고 연의 어깨를 붙잡았다.
“어머니가 뭐라고 했지?”
“……말도 없이 사라지지 말라고요.”
“또?”
“위험한 곳에서는 뛰지 말고 주변을 잘 살피라고도 하셨어요.”
“그런데 오늘 약속을 두 가지나 어겼구나. 연이가 약속을 어길 때마다 이 어미의 마음이 참 아픈데.”
나의 말에 연의 두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잘못했어요, 어머니. 연이 때문에 마음 아프시면 싫어요. 앞으로 약속 꼭 지킬게요.”
나는 연의 마지막 다짐까지 받아 내고 나서야 미소를 짓고 연을 꼭 끌어안았다.
“어디 아프지는 않니? 이마는 쓰라리지 않고?”
“괜찮아요.”
“많이 놀라서 지금은 아픈 줄도 모를 거야. 집에 돌아가서 다시 아픈 곳이 있는지 잘 살펴보자.”
“네.”
연이 울음을 삼키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는 기특한 마음을 담아 연의 등을 토닥였다.
“어찌 이리 위험한 짓을 했어? 조심하지 않고.”
“하지만…… 토끼가 보여서…… 아!”
훌쩍이면서도 할 말을 하던 연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내 품에서 빠져나오며 제 옷 속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연이 손을 몇 번 휘저은 끝에 그의 품속에서 작고 하얀 토끼 하나가 빠져나왔다.
“이거 보십시오! 제가 잡았습니다! 그러니 폐하와의 내기는 제가 이긴 거예요!”
연이 뿌듯하게 손을 내밀었다. 토끼는 연의 두 손바닥을 합쳐 놓은 것보다 조금 컸다. 아직 어린 토끼였다.
토끼는 연의 손 위에서 얌전히 앉아 입을 오물거리고 있었다. ‘잡았다’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상태가 멀쩡했다.
애초에 담덕와 연의 내기는 ‘활을 열심히 연습해서 사냥감을 잡는 것’이었다. 그런데 활을 쓰지 않고 사냥감을 잡았으니 상황이 애매했다.
“활을 쏴서 잡은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제가 제 손으로 잡았습니다!”
연이 그렇게 말하며 담덕의 눈치를 살폈다. 제 말에 어느 정도 억지가 섞여 있다는 것을 본인도 잘 아는 것 같았다.
“이걸 잡겠다고 절벽으로 몸을 던진 거냐?”
담덕이 쪼그려 앉아 연과 눈을 맞추었다. 연은 잠시 머뭇거리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토끼를 잡으려고 쫓아갔는데, 저 때문에 도망치다가 절벽 아래로 떨어지기에……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가…….”
“잡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구하려고 한 것이구나.”
“……네.”
연이 여전히 머뭇거리며 고개를 끄덕이자 담덕이 그의 이마에 꿀밤을 놓았다.
“아얏! 또 왜 때리십니까!”
“토끼를 살리겠다고 네 목숨을 던져? 경중을 따지면 어리석은 일이지. 백번 혼이 나도 할 말이 없다.”
“네에…….”
“그래도 착한 마음씨를 탓할 수는 없지. 오늘 내기는 네가 이긴 셈 치마. 어쨌든 사냥감을 하나 잡았으니 말이다. 호언장담하던 호랑이보다는 훨씬 작은 놈이지만.”
“정말요? 그럼 제 소원을 들어주시는 겁니까?”
시무룩한 얼굴로 땅을 바라보던 연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반짝이는 눈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아이의 시선에 담덕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래. 들어주마.”
연은 담덕과의 내기에서 이기기 위해 한동안 열심히 활쏘기 훈련을 했다. 담덕이 직접 그 모습을 보기까지 했으니, 노력을 감안해 갖고 싶어 하는 것을 하나 주기로 한 모양이었다.
“그러니 이제 말이나 들어 보자. 도대체 무엇을 갖고 싶어서 이리 열심이었느냐?”
담덕이 작은 단서라도 달라는 듯 나를 보았지만 나로서도 아는 바가 없었다. 나 역시 담덕과 같은 의문을 가지고 연에게 물었지만, 아이는 비밀이라며 입을 꾹 다물고 내게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았다.
내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고개를 젓자 담덕이 연을 보았다. 연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토끼를 품에 끌어안으며 나를 힐끗거렸다.
나를 왜?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니 연이 고개를 푹 숙였다.
“제가 갖고 싶은 것은……”
“응. 네가 갖고 싶은 것은?”
“그것이……”
담덕은 끈기 있게 연의 말을 기다렸다. 고요하게 자신을 기다리는 그의 태도에 용기를 얻었는지 곧 연이 눈을 질끈 감으며 소리쳤다.
“제가 갖고 싶은 것은 아버지입니다!”
연의 외침에 모두가 얼어붙었다. 빗소리 사이로 ‘아버지입니다!’ 하는 연의 외침만 메아리처럼 울리고 있었다.
“……뭐?”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사람은 연의 부탁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담덕이었다.
“아버지…… 그러니까 아버지를 갖고 싶다고? 그, 어머니, 아버지 할 때의 그 아버지?”
최대한 차분하게 대꾸하려고 한 듯했지만 담덕의 목소리에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처럼 담덕도 연이 말이나, 검, 활 정도를 요구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도 주고받을 수 있는 물건이라고 생각했겠지.
그런데 연이 뜬금없이 사람을, 그것도 아버지를 갖고 싶다고 했으니 당황스러운 것은 당연했다.
“네.”
“하지만 넌 이미 아버지가 있잖아? 멀리 장사를 떠났다며?”
“그 아버지는 싫어요.”
연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저를 찾아오지도 않고, 서신으로 안부도 안 전하는 아버지는 싫습니다. 연리 누나는 아버지 얼굴이라도 알았지…… 전 아버지 얼굴도 모른단 말이에요. 이런 애는 세상에 저 하나뿐일 거예요.”
연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내 입이 점점 벌어졌다.
내 앞에서 연은 단 한 번도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아버지를 보고 싶다거나, 그의 사랑을 원한다거나.
하지만 생각해 보면 말하지 않아도 아이가 아버지의 애정을 갈구하는 건 당연했다.
그럼에도 연이 아무 말 못 한 것은 나 때문이었을 거다. 아버지 이야기만 하면 곤란해하는 어머니의 미묘한 분위기를 아이가 느낀 것이다.
오히려 아이라서, 더 예민하게 그런 것을 느꼈을지도 모르지.
“연아.”
내가 입술을 질끈 깨물고 연을 불렀지만 아이는 내가 아닌 담덕만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폐하께서는 뭐든 다 주실 수 있다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제게 아버지를 주시면 안 되나요? 네?”
간절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연의 눈빛에 담덕의 얼굴이 난처하게 일그러졌다. 그의 눈이 입술을 질끈 깨물고 있는 나를 향했다가 다시 연에게로 돌아갔다.
“음…… 그건 내가 어떻게 해 줄 수가 없는 건데.”
담덕이 씁쓸하게 웃으며 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장난스럽게 머리를 헤집는 것이 아니라, 손끝마다 다정이 서린 듯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담덕의 손길에 연의 고개가 아래로 푹 떨어졌다.
연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입을 꾹 다물고 침묵을 지켰다.
말 대신 눈물이 땅을 적셨다. 한 방울, 두 방울. 조금씩 떨어지던 눈물이 금세 비처럼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럼에도 연은 울음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소리도 없이 울고 있는 여섯 살 아이를 보고 있으니 가슴이 턱 막혀 왔다.
내가 저 아이를 저렇게 만들었구나. 울면서 소리조차 낼 수 없게. 그렇게 만들었어.
연을 바라보는 눈이 시큰거렸다. 하지만 나까지 이 자리에서 펑펑 울 수는 없었다.
“……연이가 쓸데없는 소리를 했어. 미안.”
나는 그대로 연을 안아 들었다. 평소에는 버겁게 여겼던 무게가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오늘 시간 내줘서 고마워. 이제 나랑 연이는 돌아갈게.”
담덕은 서둘러 떠나려는 나를 막지 않았다. 다만 그 역시 무엇인가 생각에 빠진 듯 홀로 침묵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다행이었다.
나는 그대로 몸을 돌려 사냥터를 빠져나왔다.
* * *
집에 돌아와 따뜻한 물로 씻고 젖은 옷을 갈아입은 뒤에도 연은 입을 열지 않았다. 새빨갛게 변한 눈으로 입을 꾹 다물고 슬픈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연아.”
나는 침상에 앉은 연의 옆에 다가가 아이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아버지가 갖고 싶어?”
아버지라는 말에 여태껏 침묵을 지키던 연이 반응했다. 고개를 들어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던 연이 곧 짧게 대답했다.
“네.”
“언제부터 갖고 싶었는데?”
“신라에 있을 때부터요.”
“그런데 왜 어머니한테 말 안 했어?”
“……어머니가 슬퍼하실 것 같아서요.”
연은 나이에 비해 어른스러운 면이 있었다. 연을 또래보다 성숙하게 만든 것이 어쩌면 아이가 겪을 필요가 없었던 상실이라는 사실에 속이 쓰렸다.
“그랬구나. 우리 연이, 어머니 생각을 먼저 하고. 착한 아들이네.”
나는 연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연에게 물었다.
“왜 아버지가 갖고 싶어?”
“다른 사람들은 다 있는데, 저만 없어서요. 다들 아버지 이야기를 할 때면요, 저는 할 말이 없어요. 그냥 멀뚱멀뚱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요. 그럴 때면 사람들이 물어요. 연이 아버지는 어때? 그럼 전 대답하죠. 전 아버지가 없어요. 멀리 떠났어요. 그럼 사람들의 눈빛이 변해요. 그 눈빛 하나에 전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아이가 된 것만 같아요.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도요.”
“……그랬구나.”
나는 내 눈을 바라보는 이 아이의 모든 생각을 알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내가 낳았고, 나를 닮았고, 내가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한 아들이 짐작조차 못했던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 사실이 뼈아팠다.
여태까지 난 너무 내 생각만 한 거야. 연이의 마음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어.
“연이는…… 어떤 아빠가 갖고 싶어?”
“……말하면 아버지를 만들어 주시나요?”
“들어 보고 내 마음에도 들면?”
긍정적인 대답에 연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럼 전 도림 선생님 같은 아버지요!”
“도림 선생? 왜?”
“모르는 것이 없으시니까요. 전 똑똑한 아버지가 좋아요.”
“그렇구나. 또 없어?”
“있어요! 외숙부님 같은 아버지도 좋아요.”
“음. 네 외숙부는 왜?”
“저랑 잘 놀아 주세요. 매일매일 새로운 걸 가져오셔서 외숙부님과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몰라요. 그리고……”
“그리고?”
“폐하 같은 분이요. 그런 분이 아버지였으면 좋겠어요.”
연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이 굳었다.
“……처음에는 싫어했잖아.”
“네. 매일 절 놀리고, 어머니도 괴롭혔고…… 그래서 싫었는데요, 이젠 좋아요.”
“왜?”
“절 아주 좋아하시거든요. 또 어머니도요. 저희를 바라보는 눈이 정말 따뜻해요. 전 그게 정말 좋아요.”
“……그렇구나. 그게 우리 연이 생각이구나.”
나는 웃으며 연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겉으로는 웃으면서도 마음속은 복잡했다.
하지만 복잡한 생각 끝에 내린 결론은 간단했다.
이기적인 일을 하나 해야겠어.
* * *
연에게는 미안한 일이 많았다.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것에 관심이 많은 것을 알면서도 부러 가르침을 피했고, 혹 신라를 찾은 고구려 사람들의 눈에 들까 싶어 대부분의 시간을 저택 안에서 보내게 했다.
하지만 가장 미안한 일을 꼽으라면 당연히 아버지의 부재였다. 자라나는 어린아이에게 아버지의 존재가 얼마나 절대적인지는 나 역시 알고 있었다.
게다가 연은 꿈과 호기심이 충만한 소년이었다. 나에게 차마 말하지는 못했지만 말을 함께 타고 활쏘기를 가르쳐 줄 아버지를 언제나 소망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그간 나는 아버지의 빈자리를 부족함 없이 메우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하지만 연의 입에서 아버지가 갖고 싶다는 말이 나온 이상 지난 노력들은 모두 실패로 돌아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지난 노력이 허망하다며 연을 원망할 수는 없었다. 애초에 연은 그러한 상실조차 누릴 필요가 없는 아이였다. 원하는 모든 것을 누리고 행복하게 살 수도 있었다. 아버지의 사랑도 당연히 연이 누려야 할 것 중 하나였다.
그 당연한 권리를 빼앗은 사람이 나였다.
광개토 대왕이라는 대단한 사람의 미래를 위해서라고, 역사의 중요한 줄기를 그려 내는 장수왕의 시대를 위해서라고.
미래를 알고 있기에 두려웠고, 두려워서 달아날 수밖에 없었던 나. 하지만 연에게까지 그 모든 것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연은 고작 여섯 살의 아이였다. 역사도, 미래도 그 아이에게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연은 이 시대에 태어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전생을 기억하고 미래를 보았던 나와 달리 그 아이에게는 지금의 이 삶만이 전부였다.
어째서 그 사실을 외면하고 있었을까.
연뿐만이 아니었다. 우희로 태어나 내가 인연을 맺은 모든 사람이 그랬다.
담덕. 아버지. 제신. 운. 태림. 지설. 영. 그들 역시 연과 다르지 않았다.
오로지 지금의 삶만이 그들에게는 의미가 있었다. 그런 이들과 인연을 맺으며 나는 지겹도록 소진으로서 역사와 미래를 생각했다.
소진으로 쌓았던 지식과 기억들이 우희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음은 부정할 수 없었다. 많은 사람을 살린 이 의술로 담덕과 인연까지 맺었으니 전생의 기억을 완전히 끊어 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도 나는 우희였다. 고구려 여인, 절노부 연씨의 딸, 연의 어머니이자 한때는 한 남자의 연인이었던.
흘러갈 역사보다도 우희로서의 삶이 중요하다고 몇 번이고 다짐했건만 정작 중요한 갈림길에서 나는 언제나 소진으로서 생각하고 판단했지.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지.
보통의 고구려인이 갖지 못하는 생각과 행동들이 매력적으로 여겨지는 순간이 있었던 반면, 이 시대의 사상으로는 결코 받아들여지지 않는 순간도 있었다.
그런 장벽에 부딪힐 때마다 나는 미래를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더 발전된 현대를 살아온 사람으로서 나의 판단이 당연히 더 옳은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어리석은 오만이었다.
연이에게는 아버지가 필요해. 정말 그 아이를 사랑해 줄, 진짜 아버지.
언제나 바르다 믿었던 나의 결정이 틀렸다고 처음으로 인정한 순간이었다.
이제 와 담덕에게 연의 존재를 알리는 것이 올바른 것일까?
당연한 고민이 따라붙었지만 연의 얼굴을 보며 이기적으로 굴자고 마음먹었다.
지금은 연이의 마음만 생각하자. 여태까지 그 아이가 응당 누려야 할 것을 잃게 만들었으니 이제라도 돌려줘야 해.
하지만 막상 그렇게 마음을 먹고 나니 걱정과 두려움이 밀려왔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담덕은 무슨 반응을 보일까?
이런 비밀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있었던 나를 원망할지도 모른다. 이제와 쓸데없이 핏줄이 생겼다며 귀찮아할 수도, 외려 지금보다 연을 더 멀리할 수도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기에 손이 놀아? 이 지루한 일을 내게만 떠맡기려는 건 아니지?”
복잡한 마음에 찻잎을 손질하던 손이 멈추었던지 맞은편에 앉아 있던 제신이 불만스럽게 투덜거렸다.
위장을 위해 운영하고 있는 다원이지만, 정체를 감추기 위해 찻잎을 재배하고 판매하는 것까지 제대로 하고 있었다. 오래전 국내성 중심부에서 비로의 본부로 주점을 운영할 때도 제대로 된 장사를 했었다.
그때와 비슷하게 비로의 대원들은 외부로 임무를 나가지 않는 날이면 다원에서 일을 했다. 임무를 나갈 때는 찻잎을 팔기 위해 길을 떠나는 것으로 위장했다.
하지만 절노부의 도련님으로 널리 알려진 제신은 일꾼으로 위장할 수가 없었다. 때문에 그는 차를 자주 구입하는 단골손님으로 위장해 다원에 드나들었다. 지설과 태림도 마찬가지였다.
손님으로 위장을 한 만큼 제신은 다른 대원들처럼 다원의 일을 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내가 열심히 찻잎을 손질하는 모습을 보더니 꽤 흥미를 느꼈는지 순순히 내 일에 동참하겠다고 나섰다.
어차피 큰돈을 벌고자 다원을 운영하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대부분의 대원들은 설렁설렁 일을 했다.
하지만 나는 이왕 기르기 시작한 찻잎을 제대로 활용하고 싶었다. 제대로 키운 찻잎은 맛이 좋을 뿐만 아니라, 종류에 따라 병을 다스리는 데도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 없이 흥미로만 일에 나선 제신은 단순 작업이 반복되는 찻잎 다듬기에 금세 질려 버리고 말았다.
“아무것도 아냐.”
나는 은근슬쩍 찻잎에서 손을 놓는 그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담덕의 상황과 연의 정체를 모두 알고 있는 제신이라면 나의 고민에 좋은 상담 상대가 되어 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라버니, 나 고민이 있는데.”
“응. 뭔데?”
나의 부름에 의미 없이 찻잎을 뒤적이던 제신이 반갑게 대답했다. 재미없는 찻잎 다듬기를 하는 것보다 내 고민을 함께 나누는 것이 훨씬 재미있을 거라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연이 말이야. 아버지가 갖고 싶대.”
하지만 이어지는 나의 말에 제신의 입에 걸렸던 미소가 서서히 흐려졌다. 나의 고민거리가 재미있게 떠들 만한 가벼운 일이 아니라 제대로 된 고민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연이가 그런 소리를 했어?”
“응. 그것도 담덕 앞에서.”
“뭐?”
“오라버니도 알지? 담덕과 연이가 한 사냥 내기. 거기서 연이가 이겼는데, 소원으로 아버지를 갖고 싶다고 하더라.”
난감했던 당시의 내 기분을 지금 제신도 느끼는 것일까. 그의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폐하께서는 뭐라고 하셨는데?”
“뭐라고 하겠어? 그건 자기가 아니라 나에게 달린 문제라 들어줄 수 없다고 했지.”
“그렇구나.”
그렇게 대답하고 잠시 침묵을 지키던 제신이 머뭇거리며 뒷말을 이었다.
“사실 네게 말하지 못한 것이 있어.”
“말하지 못한 것?”
“그것이…… 이걸 들으면 넌 분명히 역정을 내겠지만……”
제신이 면목 없다는 듯 제 머리를 긁적이며 어설프게 웃었다.
“그게…… 네가 연이의 아버지에 대해서 말한 다음 날에 폐하께 전부 말했거든.”
“뭐라고?”
나는 너무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내가 필사적으로 감추려고 했던 사실이 가장 믿었던 사람의 입을 통해서, 이처럼 쉽게 담덕의 귀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오라버니를 믿고 이야기한 건데!”
원망과 당황이 뒤섞인 눈으로 제신을 보고 있으니 그가 나보다 더 당황한 얼굴로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아니, 아니. 중요한 사실은 말하지도 못했으니 너무 그렇게 보지 마라!”
“……그건 또 무슨 말이야?”
“그러니까, 나는 말하려고 했거든. 연이가 그분의 아들이라는 거. 내가 이 문제에서만큼은 폐하의 편이라는 건 이미 말했잖아.”
“그래서 이 누이를 배신하고 담덕에게 모든 걸 말해 버렸다는 거야?”
“아니, 말했잖아. 그러려고 했는데 정작 중요한 사실은 말하지도 못했다고.”
제신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폐하를 찾아가 말했어. 연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네게 직접 들었다고. 원하시면 누구인지 말하겠다고. 그런데 폐하께서 가만히 내 이야기를 듣고 계시더니 아무런 말이 없으신 거야.”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인지 제신의 미간이 미묘하게 찌푸려졌다.
“그러더니 물으시더라. 우희 네가 지금 이 상황을 알고 있냐고. 내가 모른다고 대답했더니, 자기는 그 이야기를 들을 생각이 없다고 하시더군. 고민도 없이 그러시기에 나도 더 이상 아무 말도 못 하고 돌아왔지.”
신라에서 나를 발견했을 때도 비슷했다. 그때의 담덕은 내게 연의 아버지에 대해 은근슬쩍 묻긴 했지만, 적극적으로 진실을 밝혀내려고는 하지 않았다.
“넌 연이에게 어찌 아버지를 만들어 줄 생각이야?”
조용히 생각에 잠긴 나를 보며 제신이 물었다. 나는 연의 소원을 들은 이후 홀로 생각했던 마음을 그 앞에 털어놓았다.
“연이의 말을 듣고서 많이 생각해 봤어. 여태까지 내가 너무 내 욕심만 밀어붙인 게 아닌가 하고. 이제 내 욕심을 접고 연이를 생각해 보려고. 연이가 바라는 건 아버지의 역할을 할 사람이 아니라 진짜 아버지겠지. 그러니 담덕의 반응이 어떻든, 진짜 연이의 아버지에게 연의 존재를 알릴 거야.”
“폐하께서 내게 그러셨던 것처럼 그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다고 하시면?”
“……그럼 다른 방법으로 연이의 소원을 들어줘야겠지. 이곳 국내성에 애 딸린 여인을 받아 줄 사내가 있으려나?”
장난스럽게 말해 보았지만 제신은 전혀 웃지 않았다.
“만약 폐하께서 네게도 그리 나오신다면 난 그분께 크게 실망할 거야.”
“언제는 담덕의 편이라더니.”
웃음 섞인 나의 타박에 제신의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이제 난 네 편도, 폐하의 편도 아니야. 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건 지쳤다. 오늘부터는 그냥 마음 편하게 연이의 편에 서야겠어.”
“비로의 수장을 제 편으로 만든 아이라니. 벌써부터 뒷배가 든든하잖아?”
“내 조카인데 그 정도는 되어야지.”
제신이 턱을 치켜들며 잔뜩 젠체를 하는 바람에 웃음이 터졌다.
그런 나를 따라 제신의 입에서도 밝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그의 얼굴이 다시 진지하게 변했다.
“만약 폐하께서…… 정치적인 상황을 고려해 연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겠다고 하셔도 너무 상심하지 마라. 그분이 아니라도 너와 연이를 아끼는 사람은 많아. 나부터가 그래.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너와 연이가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찾아 줄 거다.”
“알아. 오라버니의 마음이 어떤지.”
“알긴 뭘 알아? 하나도 모르면서.”
제신이 불만스럽게 투덜거렸다. 6년 전 말 없이 국내성을 떠난 일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 분명했다. 나는 할 말을 잃고 입을 꾹 다물었다.
“우희 넌 어려서부터 무엇이든 척척 해내는 아이였다. 누구의 손도 빌리지 않고 홀로 모든 것을 해냈지. 총명하고 용감했어. 아버지는 그런 너를 자랑스러워하셨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불안과 걱정을 안고 계셨어. 세상은 너무 크고, 모든 것을 홀로 이뤄 낼 수는 없으니 언젠가 네가 벽에 부딪힐 거라고. 혹 그런 날이 오면 가족에게 기대길 바라셨지.”
우리 남매는 어릴 적 어머니를 잃고 전쟁에서 아버지까지 떠나보냈다. 피를 나눈 친척들은 많았으나 한 가족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둘, 나와 제신뿐이었다.
“난 이미 소중한 이들을 많이 잃었어. 내게는 너와 연이가 마지막이야. 부디 그걸 잊지 마라.”
어렸을 적 나는 소진으로서 제신을 보며 항상 그가 어리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잊지 않을게, 오라버니.”
나는 언제나 내 편이 되어 줄 든든한 오라버니를 향해 세상의 모든 고마움을 담아 웃었다.
그것을 본 그의 얼굴에도 비로소 웃음이 번졌다. 그 뒤로 진심인지 농담인지 모를 호언장담이 이어졌다.
“만약 폐하께서 연이를 외면하시거든 내가 좋은 사내 하나 찾아 주마! 좋은 아버지를 갖고 싶다는 조카님의 소원은 꼭 들어줄 테니 걱정 마라!”
* * *
제신과의 대화 이후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덕분에 담덕에게 제대로 연의 이야기를 할 용기를 얻었지만 결심이 무색하게도 그의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다.
“한동안 궁 밖으로 나오긴 힘드실 겁니다.”
고민도 없이 어깨를 으쓱거리는 지설의 말을 들으며 나는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볼 수 있던 사람이 이제는 손이 닿지 않는 먼 곳의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을 실감할 때마다 기분이 이상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 미묘한 표정이 담덕의 출타가 어려운 이유를 묻는 것이라 생각했는지 지설이 설명을 덧붙였다.
“폐하께서 직접 처리하셔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신라에 주둔시켜 둔 병력 문제도 있고, 후연에게 빼앗긴 영토를 어찌 수복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도 계속 이어지고 있어서요. 얼마 전 사냥을 나가신 것도 상당히 무리를 하신 겁니다. 덕분에 저를 비롯한 신하들이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그럼 한동안 만나기는 힘들겠네요.”
“폐하께서 나오시기만을 기다린다면 그렇겠지요.”
다른 방법이 있다는 투였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지설을 보니 그가 어렵지 않다는 듯 간단한 해결책을 제시했다.
“아가씨께서 궁으로 가시면 되잖습니까? 그럼 잠시 이야기를 나눌 시간 정도는 만들 수 있지요.”
“네? 제가 궁에 간다고요? 어떻게 그래요?”
의외의 말에 나도 모르게 눈이 커졌다.
내가 직접 궁에 간다는 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6년 전 스스로 궁을 나온 이후 그곳은 내가 결코 발을 들일 수 없는 곳이 되어 버렸다.
무엇보다 궁은 국내성에서 보는 눈이 가장 많은 곳 중 하나였다. 최대한 조용히 살겠다고 절노부의 저택을 떠나 다원에서 지내는 내가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설은 이번에도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거리며 손쉬운 해결책을 제시했다.
“정문으로 당당히 들어가고자 한다면 보는 눈이며 떠들 입들이 많아 걸리는 구석이 많지요. 하지만 꼭 그렇게 궁에 들어가라는 법은 없지 않습니까? 폐하께서도 늘 당당한 길로만 궁을 나오시는 건 아니거든요.”
당당하지 않은 길이라.
그러고 보니 담덕이 몰래 궁을 빠져나올 때 어떤 방법을 사용하는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모두의 눈을 피하겠다고 그 높은 궁궐의 담을 넘지는 않았을 테니 어딘가 은밀한 길이 있었을 것이다.
“폐하께서 은밀하게 사용하시는 쪽문이 있습니다. 주로 잠행을 나오실 때 쓰는 문인데…… 누구에게도 알려 줄 수 없는 문이지만, 아가씨께 문의 존재를 알렸다고 폐하께서 화를 내실 것 같지는 않군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궁으로 가 보시겠습니까?”
꼭 그렇지만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어지는 지설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겨우 다잡은 용기가 흔들리기 전에 담덕과 만나 이야기가 하고 싶었다.
“그럼 가시죠.”
내 답을 이미 예상했었다는 듯 지설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 * *
지설을 따라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길로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자니 나쁜 일을 앞둔 아이처럼 심장이 두근거렸다.
아니지. 경계가 삼엄한 궁에 몰래 들어왔으니 벌써 나쁜 짓을 해 버린 셈이야.
하지만 잔뜩 긴장한 나와 달리 지설은 태연하게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태평한 그를 보고 있으니 혼자만 긴장한 내 모습이 우습게 느껴졌다. 덕분에 긴장으로 잔뜩 굳어 버린 나의 어깨에도 금세 힘이 빠졌다.
어깨에 힘이 빠지니 그제야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사람들의 눈을 피하느라 낯선 곳으로만 움직이고 있었으나 공간을 채운 정취는 익숙했다.
나는 이곳이, 이곳에서 쌓았던 추억들이, 함께 추억을 쌓은 사람들이 늘 그리웠다.
그럼에도 그리움을 억누르고 살았던 것은 또다시 이곳에 올 날이 영영 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누군가는 평생에 한 번 발을 들이기도 어려운 궁궐이다. 그곳을 제 발로 나온 사람에게 오늘과 같은 행운이 다시 오리라 생각하기는 힘들었다.
“지금은 아마 집무실에 계실 겁니다. 일에 집중하시는 동안은 시중도 일절 받지 않으시니 곁을 지키는 건 태림뿐이겠지요.”
그건 나도 익히 알고 있었다.
일하는 동안 집중이 깨지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담덕은 집무실에 있는 동안에는 어떠한 시중도 받지 않았다. 덕분에 일에 열중하며 식사를 거르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 습관은 여전하네요.”
“앞으로도 여전할 것 같습니다. 특별한 계기가 없다면 습관을 바꾸긴 힘드니 말이지요. 덕분에 주변 사람들만 발을 동동 구릅니다. 제발 식사는 거르지 마시라 몇 번이나 말씀 올렸지만, 어디 우리 폐하께서 아랫사람들의 조언을 듣기나 하신답니까?”
“이제는 아랫사람들의 조언도 잘 듣는 왕이라 하던걸요.”
“그 아랫사람에 저는 들어가지 않나 봅니다. 제 말은 죽어라 안 들으시니.”
지설이 불만스럽게 투덜거리며 걸음을 멈추었다. 어느새 목적지에 다다른 것이다.
담덕이 아직도 일에 열중하고 있는 것인지 전각은 드나드는 사람도 없이 무인도인 양 고요했다.
지독한 고요함을 깨뜨리고 안으로 들어서자 홀로 공간을 지키고 있던 태림이 나를 발견하고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아가씨? 어찌 이곳에……”
“폐하께서는?”
지설이 태림의 질문을 잘라 내며 물었다. 태림은 잠시 혼란스러운 얼굴로 나와 지설을 보더니 고갯짓으로 집무실을 가리켰다.
“아직 그 상태 그대로십니다.”
“내가 다원에 간 이후로 쭉?”
“예.”
지설이 다원에 온 것이 이른 새벽이었다. 그때부터 해가 지고 있는 지금까지, 담덕은 쉬지도 않고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달라지지 않은 궁의 정취만큼이나 여전한 사내 아닌가.
참으로 애매한 뚝심이었다. 백성의 입장에서는 고맙지만, 친구의 입장에서는 절로 고개를 젓게 된다.
나는 오랜만에 담덕이 업무에서 손을 놓게 만들었던 친구 우희의 마음으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
“들어가 봐도 될까요?”
“아가씨라면 문제없습니다.”
조심스럽게 물었으나 태림은 아주 쉽게 대답하며 입구에서 비켜섰다.
“……이렇게 쉽게 비켜 줘도 괜찮은 거예요? 아무리 그래도 왕의 집무실인데.”
“하지만 아가씨이신데요.”
태림이 내 질문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왜 이런 것을 묻는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나와 담덕이 격의 없이 어울리던 것은 오래전의 일인데도 지설과 태림은 그 시절처럼 나를 대해 주고 있었다. 어쩐지 민망했다.
하지만 들어가라는 허락을 받고도 멀뚱멀뚱 입구에 서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어색하게 헛기침을 흘리며 담덕의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변함없던 궁의 정취처럼 집무실 안도 여전했다. 종이와 먹의 냄새, 고요한 분위기, 그 안에 흔들리지 않고 자리를 잡고 있는 한 남자까지. 변화가 없는 공간에 들어서니 내 마음도 오래전처럼 과감해졌다.
나는 척척 안으로 걸어 들어가 담덕 앞에 섰다. 다시 국내성으로 돌아온 뒤 지금처럼 내가 먼저 그에게 다가간 것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담덕은 놀라지 않았다. 아니, 놀랄 수가 없었다.
“……잠들었나?”
담덕은 장계를 들고 의자에 반듯하게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흔들림 없는 자세를 보면 그가 잠들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생각 같았다.
하지만 내가 주위에서 열심히 인기척을 내도 담덕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눈앞에 대고 손을 흔들고, 주위를 빙빙 돌아도 마찬가지였다.
“잠들었네.”
잠도 제대로 못 잘 만큼 바쁘다고 들었는데 지금 그를 깨울 수는 없었다.
나는 그렇게 결론 내리고 옆에 있는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작은 소리에도 담덕이 깰까 봐 걱정스러웠으나 다행히도 내가 자리에 앉을 때까지도 그는 움직임이 없었다.
의자에 앉아 자리를 잡은 뒤 나는 한 손으로 턱을 괴고 담덕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렇게 마음 놓고 그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았으니, 마음껏 그 기회를 누려 볼 참이었다.
담덕의 얼굴은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나는 허공에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따라 손을 움직였다.
손을 스치고 가는 것은 텅 빈 공기였지만 어쩐지 그의 얼굴을 만지고 있는 것처럼 손끝이 간지러웠다.
이마를 지나 코, 코를 지나 눈, 눈을 지나 뺨을 어루만지고 굳게 다문 입술까지 스쳐 지나가니 더 이상 손이 갈 곳이 없었다.
나는 그의 턱 끝에서 멈춰 버린 손에 힘을 주어 주먹을 쥐었다. 하지만 손에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손이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어떤 것에도 닿지 못한 손이 무척이나 허전했다.
겨우 잠든 사람을 방해할 수는 없지. 이야기는 그냥 다음에 해야겠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선뜻 자리에서 일어설 수가 없었다. 얼굴을 보는 것 정도는 조금 더 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그래. 얼굴만 조금 더 보고 가자. 그건 크게 방해되지 않을 거야.
말없이 흘러가는 시간과 멈춰 버린 듯 고요한 공간은 지나칠 정도로 안락했다.
따뜻하고 평화로운 분위기에 취한 탓인지 잠든 담덕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내 눈꺼풀도 덩달아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그걸 깨달은 시점이 너무 늦은 것이 문제였다.
잠들면 안 되는데.
몇 번이나 눈꺼풀에 힘을 주며 눈을 부릅떴지만 보람도 없이 금세 힘이 풀렸다.
나는 저항할 수 없는 수마에 이끌려 눈을 굳게 감았다.
* * *
한없이 몸이 나른했다. 잠에 빠져 있기 딱 좋은 환경이었다. 소음 없이 고요한 분위기와 적당한 온도에 절로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아, 좋다.
그렇게 생각함과 동시에 무엇인가 이상한 기분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 내가 눈 감기 전에 마지막으로 본 것이…….
기억을 더듬을 것도 없이 눈을 감고 있는 담덕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아, 좋다가 아니잖아!
아무리 변함없는 풍경에 마음이 편해졌다지만, 이처럼 대책 없이 잠들어 버리다니. 스스로의 태평함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나는 제발 담덕이 계속 잠들어 있기를 바라며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다음 순간, 곧바로 눈을 뜨고 있는 담덕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나처럼 턱을 괴고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눈을 뜬 상태 그대로 굳었다. 자연스럽게 무어라도 말해야 할 것 같았지만 너무 놀라 눈을 깜빡일 수조차 없었다.
몸이 굳어 있는 동안 머리는 빠르게 돌아갔다.
먼저 자연스럽게 인사를 하자. 이야기를 하려고 왔다가 네가 잠들었기에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고 말하고…….
머릿속으로 할 말을 정리하는 사이 나처럼 침묵을 지키고 있던 담덕이 먼저 입을 열었다.
“조금만 더 가까이 와 주면 안 되나?”
뜻밖에도 담덕은 태연했다. 내가 어찌 궁에, 그것도 제 집무실에 들어와 있는지는 궁금하지도 않은 것 같았다.
“역시 안 되는 건가.”
대답 없는 내게 실망한 것인지 담덕이 눈을 내리깔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아래를 향하던 그의 시선이 금세 위로 올라와 나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니. 돼.”
나른한 담덕의 눈과 마주치는 순간 나도 모르게 입이 움직였다.
“가까이 갈 수 있어.”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 천천히 담덕의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의 눈이 천천히 나의 움직임을 좇았다.
차분하게 걸음을 옮기니 금세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가 되었다. 담덕은 그렇게 되기를 기다렸다는 듯 내 손목을 붙잡아 제 앞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만질 수 있는 걸 보니 헛것은 아니었네.”
의외라는 듯 담덕의 눈이 커졌다.
내 모습을 발견하고 헛것이라도 보고 있다고 생각했던 걸까?
그렇다면 뜬금없이 궁 안 집무실에 들이닥친 나를 보고서도 태연했던 그의 태도도 이해할 수 있었다.
나 홀로 담덕의 태도를 납득하는 사이 그의 입꼬리가 살짝 위로 올라갔다.
“다행이야. 내가 그렇게까지 돌아 버린 건 아니길 바랐거든. 아무리 그래도 한 나라의 왕이 미친놈이면 곤란하잖아.”
내 손목을 잡은 건 단순히 확인을 위해서였는지 나를 붙잡고 있던 담덕의 손이 떨어졌다. 나는 그의 손이 닿았던 손목을 매만지며 픽 하고 웃음을 흘렸다.
“애초에 왜 날 헛것이라고 생각한 거야?”
“네가 이곳에 나타날 리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여긴 어찌 왔어?”
“할 이야기가 있어서. 지설에게 말했더니 네가 나오는 건 한동안 힘들 거라잖아. 그래서 내가 왔지.”
“지설과 함께 온 거라면…… 역시 그 문을 이용했나?”
담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설은 괜찮을 거라고 말했지만 역시 마음에 걸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응. 혹 내가 그 문을 알게 된 것이 마음에 걸린다면……”
“그럴 리가. 오히려 잘했다고 말하고 싶은데.”
담덕이 재빨리 내 말을 가로채며 손을 저었다.
“그래서 할 이야기는 뭔데?”
“으음.”
할 말이 있어 담덕을 찾았지만 그의 앞에 가득 쌓인 장계들을 보니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고민거리를 하나 더 얹어 준다는 게 미안했다.
그런 내 마음을 읽었는지 담덕이 의자에 기대며 웃었다.
“여기까지 직접 온 것을 보면 중요한 이야기 아닌가? 괜찮으니 해 봐. 언제 찾아오든 어차피 지금보다 장계가 줄어 있는 날은 없을 것 같거든.”
담덕이 질린 얼굴로 쌓여 있는 장계들을 바라보았다. 그 얼굴을 보니 입을 열기가 더욱 어려워졌지만, 그의 말처럼 언제 찾아오든 상황은 비슷할 터. 하루라도 빨리 이야기를 전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연이의 소원 때문에 왔어.”
“아. 그 소원. 아버지를 갖고 싶다고 했지.”
나를 향한 담덕의 시선에 곤란한 기색이 스쳤다.
“그때도 말했지만 그건 내가 어떻게 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기꺼이 해 주겠지만 말이야. 언제든 원하는 것이 생길 때 소원을 말하라고 해.”
직접 이야기를 꺼낸 이상 연은 결코 소원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간절하고 오랜 소망이었다.
“아무래도 네가 바라던 답은 아니었던 것 같네.”
나의 침묵에 담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떤 답이면 좋았을까?”
“어떤 답을 바란 건 아냐. 다만…… 난 연이의 소원을 이뤄 주고 싶어.”
“어떻게 할 생각인데?”
“우선 연이의 진짜 아버지에게 부탁을 해 봐야지. 연이 곁에서 아버지로 살아 줄 수 있겠느냐고. 그게 먼저라고 생각해. 연이도 그걸 가장 바랄 테니까.”
“그럼 멀리 떠나 버렸다는 연이의 친아버지를 찾을 생각인가? 그래서 도움을 청하려고 온 거고? 그렇다면 비로의 대원 하나를 보내 줄게. 부족하다면 그 이상도 보내 줄 수 있어.”
정말 담덕은 연의 아버지가 자신이라고는 생각지도 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