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낙화유수-27화 (28/38)

24장. 다시 찾은 인연

영락 10년의 남정에서 고구려군은 완벽한 승리를 거머쥐었다.

신라 땅을 유린하던 왜군을 모조리 몰아내고, 더 남쪽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힘을 보탰던 가야의 종발성까지 쳤다. 왜군이 빼앗은 신라의 성들도 원래 주인인 신라의 품으로 되돌아왔다.

그 결과 한반도 남쪽의 정세가 완전히 달라졌다.

작은 영토지만 내실 있게 나라를 키워 가던 가야는 이번 전쟁으로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다시는 이런 일을 벌이지 못하도록 깨끗하게 싹을 잘라 냈으니 한동안 재기가 힘들 것이라 했다.

신라는 고구려의 무력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졌다.

담덕은 다시 고구려로 돌아가며 병력의 일부를 신라에 남겨 두었다. 백제와 왜의 움직임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한 나라의 중심지에 타국의 군대가 주둔하는 일은 흔치 않았다. 스스로 나라를 지킬 힘이 없어 타국 군대의 힘을 빌렸으니 한동안 신라는 제 땅에서도 목소리를 내기 힘들 터였다.

가야와 왜를 끌어들인 대대적인 작전이 수포로 돌아간 백제 역시 앞으로 다른 마음을 먹기는 힘들 터.

이제 한반도의 북쪽과 같이 남쪽에도 고구려의 영향력이 높아진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고구려의 전성기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구나.

고구려의 기상을 남쪽 끝까지 알리고 돌아가는 터라 국내성으로 귀환하는 용사들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오로지 나만이 무거운 마음을 안고 그 대열에 합류했다.

그런 내 옆을 태림이 자연스럽게 지켰다. 오래전처럼 이번에도 담덕에게 나를 지키라는 명을 받은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 태림의 임무는 단순 호위가 아닐 것이다.

국내성으로 돌아가는 길. 잠시 휴식이 주어져 병사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아픈 이들에게 약재를 쥐여 주는 내 뒤로 태림이 졸졸 따라붙었다.

“담덕이 날 감시하래요? 어디 도망 못 가게?”

내가 어디를 가든 이 상태였다. 나는 내게서 떨어질 줄 모르는 태림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그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서 눈을 돌렸다.

“아닙니다. 그저 아가씨의 안전을 위해서…….”

“태림, 그거 알아요? 여전히 거짓말을 참 못하는 거. 그동안 능청스러움을 배우지 않고 뭐 했어요?”

오랜만에 만났는데도 태림은 여전했다. 6년이면 사람이 바뀔 법도 한데, 그는 여전히 뻣뻣하고 요령이 없었다.

“정말 거짓이 아닙니다. 폐하께서는 아가씨의 안전을 지키라고만……”

“태림. 거짓말인 거 다 보인다니까요.”

“……그렇게 티가 납니까?”

“네. 아주 많이.”

결국 태림이 한숨을 내쉬며 멋쩍게 웃었다. 세월이 지났는데도 달라지지 않은 사람을 만나니 무거운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다른 사람들도 태림처럼 여전한가요?”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늘 가까이에서 함께했으니 변화를 체감하기 힘들죠. 하지만 폐하께서는 확실히……”

태림이 말을 줄이며 담덕을 바라보았다.

“폐하께서는 그간 많이 변하셨습니다.”

“담덕이요?”

외모는 확실히 달라졌다. 담덕은 내가 기억하는 20대 초반의 모습보다 더욱 무게감이 생겼다. 선은 더 굵어졌고 몸은 더 단단해 보였다.

하지만 성격이나 행동이 변했느냐면 확신할 수 없었다. 한 번씩 생각지 못한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지금까지 담덕은 내가 기억하는 예전의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의아함이 묻어난 내 반문에 태림이 무어라 말하기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내리깔았다.

“아가씨께서 사라지신 동안 폐하께서 어떠셨는지 전혀 모르시죠. 그러니 이런 반응이신 겁니다.”

“도대체 담덕이 어땠는데 그래요?”

“……완전히 다른 분이셨습니다. 무엇에라도 쫓기는 사람처럼 조급하고 예민하셨죠. 마음을 달래시려고 매일 밤 술을 드셨는데 취하지도 않으시더군요. 지설 님은 그걸 보고 ‘술도 통하지 않을 정도로 돌아 버린 상태’라고 했습니다. 과격하지만 저 역시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고요.”

하지만 태림의 말을 들어도 예전과 다름없는 담덕을 보고 있자면 현실감이 없었다.

“믿을 수가 없네요. 예전이랑 똑같아 보이는데. 게다가…… 내가 없는 동안 꽤 잘 지낸 것 같던데요.”

“잘 지내셨다니요?”

“이미 이야기 들었어요. 담덕의 아이, 승평이요. 신라에까지 고구려 소문이 흘러 들어오거든요. 운 도령을 통해서 듣는 것도 있었고.”

“아.”

나는 괜찮다는 듯 웃으며 태림을 보니 그가 난처한 얼굴로 입을 벌렸다.

“승평 님의 일은……”

하지만 태림의 말이 끝까지 마무리되기도 전에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니 그곳에 담덕과 연이 함께 있었다.

담덕은 잠시 주어진 휴식 시간을 연에게 궁술을 가르치며 보내고 있었다. 연이 병사들이 가지고 있는 활에 관심을 보이자 자신이 직접 활 쏘는 법을 알려 주겠다 나선 것이다.

담덕은 태왕인 동시에 고구려 용사들 중에서 제일가는 활잡이였다. 그에게 궁술을 배우는 건 대단한 영광이었다.

태학에서 처음 담덕과 마주쳤을 때에도 예쁘게 활을 쏘는 모습에 눈길이 갔었지.

문득 떠오른 옛 기억에 미소를 짓던 나는 담덕의 옆에 선 연을 보고 금세 입매를 굳혔다.

신라에 있을 때에는 연에게 그런 것들을 전혀 가르치지 않았다.

말을 타고, 활을 쏘고, 검을 휘두르는.

나는 고구려 용사들이 으레 배우는 모든 것에서 연을 멀리 두었다.

가르치지 않아도 그런 일들에 재능이 있으리라는 것은 알았다. 아버지가 누구인데, 가르치면 가르치는 대로 흡수할 것이 뻔했다.

나는 누군가가 연의 핏줄에 흐르는 비범함을 알아챌까 봐 두려웠다. 최대한 평범하고 조용하게 아이를 키우기로 했으니 눈에 띄는 일은 없어야 했다.

그런데 담덕이 연을 가르치고 있다니.

나는 혹시라도 담덕이 이상한 것을 알아챌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에 조용히 그들 곁으로 걸음을 옮겼다. 당연한 듯 태림도 내 뒤를 따랐다.

담덕은 연에게 열심히 자세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건 자세가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흔히 팔에만 힘을 주고 버티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더 중요한 건 하체야.”

연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손으로 활시위를 당기는데 왜 하체가 중요해요?”

“나무를 생각해 봐라. 아무리 가지가 튼튼하다고 한들 뿌리가 약하면 흔들리는 법이지. 활을 쏠 때의 자세도 마찬가지다. 뿌리가 되는 두 다리의 중심을 잡아야 해.”

간단하게 설명한 담덕이 직접 화살 하나를 쏘아 시범을 보였다. 화살은 선명한 파공음을 내며 허공을 가로질러 여지없이 나무의 정중앙에 박혔다.

“우와.”

연이 입을 벌리며 감탄했다. 아마 연의 마음속에서 담덕에 대한 평가가 ‘어머니를 괴롭히는 나쁜 아저씨’에서 ‘어머니를 괴롭히지만 활은 잘 쏘는 나쁜 아저씨’ 정도로 수정되었을 것이다.

“자. 이제 너도 한번 해 봐.”

담덕이 연에게 활을 내밀었다. 어른들이 쓰는 활이라 연이 감당하기에는 커 보였다.

하지만 어차피 처음부터 제대로 활을 쏘는 것을 바라지는 않을 터. 자세를 배우고 요령을 익히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연은 들뜬 얼굴로 활을 받아 들었다. 신이 난 그의 얼굴에 담덕이 피식 웃었다.

“너희 어머니가 활 쏘는 것을 가르쳐 주지 않았어?”

“네. 어머니는 활을 잘 못 쏜다고 하셨어요.”

“그건 옳은 말이다. 네 어머니 활 쏘는 솜씨는 형편없거든. 부디 네 솜씨가 너의 어머니보다는 나아야 할 것인데.”

담덕이 웃으며 연의 자세를 잡아 주었다.

“자, 여기를 단단히 쥐고, 이 위에 화살을 받친 다음 살깃(화살의 뒤 끝에 붙인 새의 깃)과 함께 시위를 당겨.”

담덕의 말을 따라 연이 자세를 잡았다. 반듯하고 단단한 자세. 마치 어릴 적 담덕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좋다. 이제 준비가 되었다 싶으면 시위를……”

담덕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연이 활시위를 놓았다. 허공을 가르는 화살 소리는 경쾌했다.

결과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화살을 쏘았을 때 자세가 흐트러지면 이처럼 좋은 소리가 나지 않는다.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연이 쏜 화살은 담덕이 시범을 보이며 쏘았던 화살들 바로 옆에 꽂혔다.

“……일부러 내 화살을 노리고 쏜 것이냐?”

담덕이 조금 놀란 얼굴로 연에게 물었다. 연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다 쏘라고 나무에 화살을 꽂아 두신 거 아닙니까? 다른 곳에 쏘았어야 했나요?”

“활을 처음 쏜다며?”

“네.”

“……처음 활을 쏘는 놈에게 제대로 된 목표를 맞히라고 하는 사람은 없다. 나무 근처까지 화살이 날아간 것만으로도 성공인데…….”

담덕이 화살이 꽂힌 나무로 시선을 돌렸다. 마치 한 사람이 쏜 것처럼 화살이 가지런히 박혀 있었다.

“단박에 내 화살 옆에다 화살을 쏴? 하, 거참.”

담덕이 헛웃음을 흘리며 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머니와는 영 딴판이구나. 아무리 가르쳐도 활 쏘는 솜씨가 늘지 않던 사람에게서 어찌 이런 신궁(神弓)이 나왔지?”

장난스러운 미소와 함께 담덕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농담임이 분명한 그의 말에 괜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는 최대한 태연한 척 웃으며 턱을 치켜들었다.

“우리 절노부 핏줄을 무시하는 거야? 내가 특이할 뿐이지, 우리 집안사람들 모두 활을 잘 쏜단 말이야.”

“하긴. 너 빼고 다른 절노부 사람들은 모두 활을 잘 쏘지. 특히 제신은 나에 필적할 정도이고.”

다행히 담덕이 나의 말에 납득했다.

“국내성에 돌아가면 좋은 활을 선물해 주마. 그걸 가지고 함께 사냥을 나서도 좋겠어. 내가 좋은 사냥터를 몇 군데 알고 있거든.”

“사냥이요?”

연이 눈을 반짝이며 담덕을 보았다. 사냥이라니. 귀부인의 저택에 얹혀살았던 신라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사냥을 하면 매를 잡을 수 있나요? 여우도요? 호랑이도요?”

“뭐? 호랑이? 이 녀석이 처음부터 꿈이 너무 큰데? 처음에는 토끼만 잡아도 감지덕지다!”

연의 포부에 담덕이 웃으며 그의 머리를 헤집었다. 제법 거친 손길이었음에도 연은 담덕의 손을 밀어내지 않고 기분 좋게 웃을 뿐이었다. 사냥이라는 당근이 잘 통한 것이다.

“토끼는 너무 작습니다. 저는 호랑이를 잡을 겁니다!”

“그래. 꿈은 큰 것이 좋지. 함께 사냥을 나갔을 때, 네가 무엇이든 한 마리만 잡으면 내가 상을 주마.”

“상이요?”

“그래. 첫 사냥감을 잡으면 상으로 네가 갖고 싶어 하는 걸 하나 주지.”

“……제가 원하는 건 아무거나 다 주실 수 있나요? 무엇이든지 다요?”

“그리 말하는 것을 보니 갖고 싶은 것이 있는 모양이지?”

담덕의 질문에 연이 머뭇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힘을 내야겠는데? 사냥감을 잡는 게 그리 쉽지는 않을 테니 활 쏘는 연습을 꾸준히 해야 할 거야.”

“나중에 말 바꾸시면 안 됩니다.”

“내 말은 상당히 무겁다. 빈말은 하지 않아. 하지만 그래도 못 미덥다면 여기 네 어머니를 증인으로 삼자. 그럼 됐지?”

담덕과 연이 나를 보며 씨익 웃었다. 두 사람의 미소에 마주 웃어 주면서도 마음이 복잡했다.

* * *

국내성으로 돌아오니 한바탕 난리가 났다.

내가 6년 만에 나타난 것도 모자라서 커다란 아들을 하나 데리고 나타났으니 사람들이 놀라서 뒷목을 잡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누, 누구야?”

개중에서도 제신의 충격이 대단했다.

그의 충격이 얼마나 심했는가 하면, 오랜만에 만난 누이의 안부를 묻는 것보다 그 옆에 있는 아이의 정체를 묻는 것이 한발 더 빨랐을 정도였다.

나는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모르는 제신의 눈치를 살피는 연에게 웃으며 인사를 시켰다.

“연아. 인사드려야지. 어머니의 오라비란다. 네게는 외숙이 돼.”

“안녕하세요, 외숙부님. 저는 연이라고 합니다.”

깍듯하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하는 연의 모습에 제신은 넋이 나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 그래, 반갑다. 나는 제신이야. 어, 그, 네 어머니의……”

횡설수설하던 제신이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어머니라고? 네가? 이 애의?”

경악에 찬 목소리에 나는 웃음으로 긍정했다.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나와 연의 얼굴을 번갈아 보던 제신의 입이 점점 크게 벌어지기 시작했다.

“뭐야?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제신이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나는 그의 모습에 불안해하는 연을 토닥여 먼저 집 안으로 들여보낸 뒤 제신에게 다가섰다.

“오라버니. 다 이야기할게.”

얼굴을 가리고 있는 제신의 두 손을 잡아 아래로 끌어 내렸더니, 드러난 그의 얼굴이 눈물범벅이었다.

소리도 없이 끅끅 대며 울고 있던 그가 입술을 질끈 깨물며 내 손을 마주 잡았다.

“그동안 어찌 살았어?”

“잘 지냈어.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왜 내게도 알리지 않고 사라져? 내게만은 알렸어야지. 다른 사람들에게는 알리지 않았어도 내게만은 말했어야지. 아버지를 잃고 세상에 너와 나, 우리 남매만 남았는데. 어찌 네가 내게 이럴 수가 있어?”

원망의 말을 쏟아 내던 제신이 그대로 나를 제 품 안에 껴안았다. 익숙한 온기에 내 눈에서도 눈물이 터졌다.

“미안해 오라버니. 정말 미안해.”

“아니, 아니다. 이제라도 왔으니 됐어. 전부 고맙다. 이제라도 나타나 줘서, 여전히 고운 모습으로 돌아와 줘서 고마워.”

“아니야. 내가 다 미안해.”

“아니야. 내가 다 고맙다.”

나는 사과하고, 제신은 고마워하고.

그렇게 우리 남매는 하인들이 오가는 저택 한가운데서 한참이나 서로를 부둥켜안고 통곡했다.

* * *

한바탕 눈물을 쏟고 난 뒤 제신과 나는 엉망이 된 얼굴로 서로를 마주했다.

감동의 재회를 할 때는 미처 몰랐지만 다 큰 남매가 부둥켜안고 울고불고 한 것이 민망해 서로의 입에서 연신 헛기침이 흘러나왔다.

한참이나 시간이 지나서야 민망함을 뚫고 겨우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나는 다로의 경고에 고구려를 떠난 시점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이야기를 제신에게 털어놓았다.

가만히 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제신이 짧게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누구냐?”

“연이?”

“그 녀석 아버지.”

한숨과 함께 흘러나온 말에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제신이 시작부터 가장 어려운 이야기를 꺼냈다.

하지만 매도 먼저 맞는 게 먼저라고 했지.

제일 처음 어려운 이야기를 꺼내면 오히려 그 뒤는 쉽게 풀릴 것이다. 나는 깊게 심호흡하고 입을 열었다.

“담덕의 아이야.”

“……폐하의.”

놀라운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제신의 반응은 생각보다 덤덤했다. 그 평온한 반응에 오히려 내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안 놀라?”

“어느 정도 예상했으니까.”

제신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폐하와 마음을 나누고 연인이 되는 것도 10년이 걸렸는데. 떠나 있는 동안 다른 사람과 연인이 되고, 또 그의 아이를 가진다고? 내가 아는 우희라면 절대로 불가능하지. 난 오히려 폐하께서 짐작 못하신 것이 더 놀라운데.”

“아, 그건…….”

담덕이 연을 제 아이라고 의심하지 못한 이유는 분명했다. 하지만 제신 앞에서는 말하기 민망한 이유였다.

“그건 뭐?”

“그게…… 담덕이랑 나는…… 딱 한 번만 했거든.”

“도대체 뭐가 딱 한 번이라는…….”

내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던 제신이 곧 의미를 깨닫고는 입을 쩍 벌렸다. 민망한 이야기를 들은 그의 표정이 참으로 미묘했다.

“어, 그, 그래. 그렇다면 폐하께서 짐작 못하신 것도 이해가 되네. 한 번에 애가 생기다니, 굉장히 드문 일인데…… 폐하께서는 참으로 강한……”

“오라버니.”

나는 제신을 불러 더 민망해지려는 대화를 저지했다. 횡설수설하면서 헛기침을 하던 제신의 귀가 새빨갰다.

“크흠. 그럼 폐하께는 언제 말씀드릴 생각이야? 아주 기뻐하실 것 같은데. 물론 태어나는 순간과 더 어린 시절을 함께하지 못한 건 아쉬워하시겠지만.”

제신은 연이 담덕의 아이라는 사실을 당연히 밝힌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정치적인 상황에 누구보다 민감한 제신이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난 말하지 않을 생각인데.”

“뭐? 왜?”

“상황이 그렇잖아. 어차피 담덕의 아이가 있으니까. 아이가 있다는 건 그사이에 혼인을 했다는 소리고…… 태왕이라면 부인을 여러 명 두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겠지만 나는 그렇게는 싫어. 연이가 후계 싸움으로 곤란해지는 것도 싫고.”

게다가 내가 떠난 사이 담덕이 얻은 승평이라는 아이가 장수왕일 가능성이 높다.

미래를 아는 내가 담덕의 삶에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자연스럽게 그와 만났을 여인. 그리고 그녀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 비로소 제대로 흘러가는 역사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연우희.”

하지만 내 이야기를 들은 제신의 표정이 이상했다.

“폐하는 혼인을 하지 않으셨다.”

단단한 것이 강하게 뒤통수를 내리치는 느낌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머릿속이 멍해졌다. 나는 몇 번이나 입을 오물거리며 할 말을 골랐다.

“……그게 무슨 말이야? 아이가 있잖아. 혼인도 않고 어찌 아이를 낳는데?”

“그러는 넌 어찌 혼인도 않고 폐하의 아이를 낳았는데?”

“나와는 사정이 다르지. 게다가 내가 떠난 것이 무려 6년이야. 그동안 태왕이 혼인을 하지 않았는데, 아무런 압박도 없었다고?”

혼란스러워 머리를 부여잡으니 제신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압박이야 당연히 있었지. 특히 소노부의 압력이 대단했다. 하지만 폐하께선 어떤 압박에도 굴복하지 않으셨어. 대신 국내성에 붙어 있지를 못하셨지.”

그간의 상황을 설명하는 제신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늘 전쟁터를 전전하셨어. 국내성에 들어오지 않으면 귀족들을 만날 일이 없고, 그러면 혼인 이야기도 들을 일이 없으니까. 그래서 1년 중 대부분을 밖에 계셨다. 그리고 모든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노력하셨지. 패배하는 순간 귀족들이 기다렸다는 듯 자신들의 뜻을 종용하려 할 테니까.”

고구려의 왕이 직접 정복 전쟁에 나서는 건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담덕처럼 자주 국내성을 비우는 왕은 찾기 힘들었다.

그의 아버지인 고국양왕만 하더라도 재위 기간 중 대부분의 시간을 국내성에서 보냈다. 하지만 담덕은 그 반대였다.

나는 담덕의 완벽주의자적인 성향이 그를 전쟁터로 이끌었다고 믿었다. 무엇이든 제 손으로 하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담덕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굴복하지 않기 위해 누구보다 필사적으로 싸우셨어. 잠도 못 이루시고 전술을 고민하고 또 고민하고…… 그러다가 쓰러지신 적이 한두 번이 아냐.”

누구보다 강하게만 보였던 담덕이 쓰러져?

놀라움으로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답답하게 죄여 오는 기분에 나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지금 그분은 누구보다 강한 태왕이시지. 귀족들도, 하물며 그 소노부조차도 폐하의 뜻을 함부로 거역할 수가 없다. 오늘의 왕권을 다지기 위해 그분이 지난 세월을 어찌 살았는지 넌 몰라. 넌 내 누이고, 내 생에서 누구보다 네가 소중하지만, 이 문제에서 난 폐하의 편이다.”

그렇게 선언하는 제신의 얼굴은 단호했다. 어쩐지 그 얼굴에 질책마저 섞여 있는 듯해서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운이와 함께 있었다 했잖아. 그 녀석에게 아무 말도 듣지 못했어?”

“……처음에는 소식을 물었는데, 아이를 얻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론 더 이상 알려고 하지 않았어. 새로운 인연을 찾은 사람을 놓아주고 싶어서.”

“세상에. 승평 님의 소식 때문에 오해가 생긴 거로구나.”

제신이 이마를 짚으며 앓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담덕의 혼인 여부야 나의 오해라 하더라도 아이의 존재는 모두가 확인해 준 진실이었다. 농부가 씨를 뿌린 밭에서 아이가 솟아나지는 않았을 테니, 당연히 그 아이의 어머니가 있을 터.

“그럼 아이의 어머니는 누군데? 왜 그 여인과 혼인하지 않았는데?”

내 질문에 제신이 입을 꾹 다물었다.

“죽은 사람과 혼인할 수는 없잖느냐.”

“……죽은 사람?”

“백제와의 전쟁을 할 때 휘말려 죽었다고 하더라. 그 이상은 누구도 몰라. 승평 님의 어머니가 누구인지, 언제 그 여인과 연을 맺었는지.”

제신은 고구려의 모든 정보를 다루는 비로의 수장이었다. 그조차도 모르는 여인의 정체라니.

의문에 빠진 나의 얼굴을 보았는지 제신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 봐도 말해 줄 것이 더 없다. 어느 날 폐하께서 승평 님을 데려오셔서는 본인의 아들이라 선언하셨고, 귀족들의 추궁에도 승평 님을 낳은 여인에 대해 말을 아끼셨다. 덕분에 그분은 후계자이되 입지가 상당히 불안해. 출생이 불분명하니까.”

전혀 생각지도 못한 내용이었다.

당연히 담덕이 황후를 맞아 아이를 얻은 것이라고 생각했어.

머리가 복잡해졌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결론은 똑같았다.

어쨌든 담덕의 아이였다. 그가 정체 모를 여인과 인연을 맺어 낳은 아이.

그렇다면 내가 그 사이에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

“역시 말하지 않는 게 좋겠어. 혼인은 하지 않았어도 아드님이 있는 건 사실이잖아. 이미 날 떨쳐 낸 사람의 마음을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 괜히 책임감을 건드려서 떠나려는 사람 발목 잡는 것도 싫고.”

“널 떨쳐 내? 폐하께서? 그렇다면 널 다시 만났을 때 다시 고구려로 데려오지 않으셨겠지.”

“오랜 친구로서의 결정이었겠지. 날 떨쳐 낸 것이 아니라면 아이의 존재가 설명되지 않잖아. 우리 폐하께서 마음에 품은 여인을 두고 다른 사람과 동침할 그런 사람이야?”

내 질문에 제신이 입을 꾹 다물었다. 올곧은 담덕이 그런 일을 할 수 없다는 걸 나와 제신 모두가 알고 있었다.

누구보다 담덕을 잘 알기 때문에 아이가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비로소 그의 마음이 내게서 떠났음을 알았다.

“그러니 나는 조용히 살 거야. 담덕도 그렇게 살게 해 준다고 했고.”

나의 미소에 제신의 얼굴이 외려 굳어졌다. 아마도 내 미소가 형편없이 못났기 때문이겠지.

“성문사에서 지내면 어떨까 싶어. 혼인도 하지 않은 내가 아이를 데리고 살면 이상한 소문이 돌 거고, 오라버니와 백부님께도 좋지 않을 거 아냐. 거긴 조용한 곳이니 소문을 피할 수 있겠지. 아픈 사람이 요양을 오면 진료도 도와주고 말이야.”

줄줄이 이어지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제신이 고개를 저었다.

“지난번 다로의 일이 있고 비로를 완전히 개편했다. 본부도 옮겼어. 국내성 외곽의 조용한 다원(茶園)인데, 거기서 지내. 넌 여전히 우리 비로의 대원이니까.”

제신의 입에서 담담하게 다로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그녀와의 일을 묻고 싶었지만 제신은 그것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이제 나는 조카님과 친해져 봐야겠군. 6년의 거리를 좁히려면 힘을 내야겠어.”

* * *

다시 찾은 비로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눈에 익은 사람도 여전히 많았지만, 처음 보는 얼굴도 상당했다. 내가 국내성을 비운 사이 새로이 대원이 된 자들이었다.

“모습이 보이지 않는 이들의 대부분은 소노부의 간자여서 처결한 경우입니다. 일부는 해씨의 도련님처럼 외부에 파견된 경우지만…… 대부분이 전자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간자가 꽤 많았군요. 어째서 그렇게 많은 인원을 간자로 보낸 것일까요?”

지설이 내가 내놓은 차를 마시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게 했습니다. 모두에게 정기적으로 보고를 받고, 누구 하나 말이 다르면 그자가 곧장 배신자임이 드러납니다. 벗어날 수 없는 덫을 친 거지요. 과연 권력의 정점에 있는 사람답게 머리를 잘 썼습니다.”

내가 국내성에 돌아온 이후 담덕은 예전처럼 지설이나 태림, 둘 중 하나를 보내 나를 지키게 했다. 그때는 태왕과 혼약을 한 여인으로서 호위를 받아들였으나 이제는 상황이 달랐다. 하지만 몇 번이나 괜찮다고 사양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태왕이 고집을 부리니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제 담덕은 예전처럼 어설픈 태왕이 아니었다. 백제를 굴복시키고, 신라를 반속국으로 만들어 남쪽을 완전히 평정한 강력한 태왕이었다. 그런 군주의 명을 거스를 수 있는 사람은 이제 고구려에 없었다.

피할 수 없다면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나는 호위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백번 이용하기로 했다. 내가 없던 지난 6년간의 이야기를 전해 듣기로 한 것이다.

“하면 다로는요?”

궁금했지만 제신에게는 들을 수 없던 말이었다.

“다로는……”

나의 질문에 지설이 씁쓸한 얼굴을 했다.

다로는 비로에서도 핵심 인력으로 분류되었던 대원이었다. 태왕인 담덕과 수장인 제신이 그랬듯 지설 역시 그녀를 상당히 신뢰했었다.

“다로가 태림처럼 전쟁터에서 거둬진 아이였다는 사실은 알고 계시지요?”

“네. 들었어요.”

“그녀를 거둔 사람이 해사을이었다는 사실은요?”

해사을이라면 소노부의 사람이었다. 비로의 회의에서 경계해야 할 사람으로 몇 번이나 이름이 올랐던 사람이기도 했다.

내가 놀라서 눈을 크게 뜨니 지설이 이해한다는 듯 옅게 웃었다.

“목숨을 거둬 준 은인의 뜻에 따라 간자가 되었다더군요.”

“……마냥 좋은 뜻으로 거둔 것이 아니었을 텐데요. 유녀로 키워 간자로 살게 한 것을 보면.”

“예. 그래도 목숨을 살려 준 것은 사실이니 그 은혜를 저버릴 수가 없었답니다. 어차피 그가 아니었으면 죽었을 목숨, 지옥 같은 전쟁터에서 자신을 구해 준 해사을에게 주겠다 다짐했다고요. 하지만 아가씨와 우정을 나누고 수장님과는…….”

지설이 내 눈치를 보며 말을 줄였다. 내가 제신과 다로의 사연을 알고 있는지 확인하는 눈빛이었다.

“알고 있어요. 오라버니와 다로가 어떤 사이였는지.”

내 말에 지설이 조금 풀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게 수장님과 아가씨에게 마음을 주는 바람에 딱 한 번 은인을 배신하고 말았다고, 그것이 아가씨를 도망가게 한 것이라고 하더군요. 소노부가 줄곧 아가씨를 노리고 있었답니다. 황후만 태왕의 후계를 낳을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완전히 싹을 자르려고 했던 거지요.”

다로는 분명하게 말했었다.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들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 목숨을 가져갈 거라고.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들이 종종 있었다. 외출한 사이 피 묻은 내 옷이 발견되어 담덕이 깜짝 놀라 성문사에 찾아왔던 일 같은.

그것 역시 소노부의 경고였을까?

등골이 서늘해졌다.

‘요희’를 조롱하는 소문이 퍼지던 그때 나의 배 속에는 연까지 있었다. 그 사실이 알려졌다면 소노부는 더욱 적극적으로 움직였을 것이다.

“끝까지 고민했던 것 같습니다. 목숨을 구해 준 은인과 마음을 나눈 친구 사이에서요. 아시다시피 결론은 아가씨의 목숨은 구하는 것으로 내렸지만요. 아가씨께서 궁을 나오시면 곧장 사람을 시켜 멀리 보낼 준비까지 하고 있었더군요.”

“……하지만 내가 그보다 먼저 멀리 떠나 버렸죠.”

“다로도 아가씨의 그런 무모함은 계산하지 못했던 것이지요.”

“그 이야기, 다로가 전부 털어놓은 건가요?”

“예. 은밀한 장소에 감금한 채 수장님께서 직접 설득했습니다.”

제신에 대해 말하며 복잡한 눈을 하던 다로를 기억한다. 제신이 직접 나섰다면 그녀로서도 마음이 크게 흔들렸을 것이다.

“모든 걸 털어놓고 ‘이쪽’으로 오라고 했습니다. 모든 걸 용서할 테니 제발 그리하자고. 그런데도 한동안 마음의 결정을 못 했습니다. 그러다 겨우 이야기를 털어놓았는데 그날 자객이 들이닥쳤지요.”

자객이 들이닥친 일이라면 신라에 있을 때 운을 통해 들었다. 다로의 죽음으로 끝난 그날의 결말까지도 나는 알고 있었다.

어두워지는 내 얼굴을 보며 지설 역시 쓰게 웃었다.

“그날 대대적인 간자 색출을 시작해 오늘에 이른 겁니다. 완전히 달라진 비로를 보신 소감은 어떠십니까?”

지설이 창밖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를 따라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니 경사진 언덕 아래로 넓게 펼쳐진 차밭이 눈에 들어왔다.

떠들썩한 주점에 차렸던 본부과 달리 국내성 외곽에 조용히 차린 다원은 고요하고 한적했다. 국내성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조용히 살기 좋은 환경이었다.

“난 좋아요. 저한테는 주점보다 다원이 어울리죠.”

“진심이십니까? 아가씨의 술주정으로 태림이 크게 곤란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지설이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보았다. 부끄러운 옛 기억을 끄집어내는 지설의 말에 나는 헛기침을 하며 그의 눈을 피했다.

“그거야 옛일이고요. 이제 나도 진중한 한 아이의 어미라고요.”

“아. 아이요.”

묘하게 장난기가 섞여 있던 지설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의 시선이 차밭에서 일꾼으로 위장한 비로의 대원 뒤를 졸졸 쫓아다니는 연에게 꽂혀 있었다.

“저 아이는……”

“폐하는요?”

나는 연에 대해 물으려는 지설의 말을 질문으로 가로챘다.

“우리 폐하께서도 모든 사연을 알고 있나요? 다로가 누구인지, 소문의 진위는 뭐였는지, 내가 왜 떠났는지, 그런 것들이요.”

“비로에서 중책을 맡고 있는 자들은 모두 알고 있는 일입니다. 소노부 사람인 해씨 도령에게는 숨긴 것도 있지만…… 비로가 아는 일을 폐하께서 모르실 리 없지요. 그게 비로의 원칙입니다. 해씨 도령이 지금 가야에서 벌을 받고 있는 것도 자신이 첩자로서 본 것을 모두 보고하지 않았기 때문이고요.”

나를 도와 운이 벌을 받았다. 그에게 고맙고 미안했다. 그가 다시 돌아오는 날에는 크게 보답을 해야겠지.

하지만 지금 당장은 다른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럼…… 우리 폐하께서는 내가 떠난 사연을 모두 아시면서도 아들을 보셨군요.”

내가 떠난 이유를 몰라서 나를 미워하고 잊은 거라면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로의 입에서 모든 말을 듣고서도 그는 내가 없는 사이 다른 여인을 품고 아들을 낳았다.

왕권을 제대로 잡기 위해선 후계자가 꼭 필요했다.

강력한 왕권. 그걸 위해서 혼인을 결심하기도 하고, 곁을 떠나기도 했으니 왕권이 안정된 지금의 이 상황을 기뻐해야 하는데.

마음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변해 버린 마음이 이렇게 아플 줄 알았다면 다른 여인에게서 아들을 낳으라는 말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폐하와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셨습니까?”

지설이 미묘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이야기요?”

“예. 혼인 문제나 승평 님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없었어요. 국내성에 오자마자 후연 문제로 바빠졌잖아요.”

후연에게 북부의 땅을 빼앗긴 문제로 궁 안의 모두가 비상이었다. 매일 외교 문제와 군사 작전을 논의하느라 이야기는커녕 얼굴 보기도 힘들었다.

예전처럼 내가 궁 안에 살았다면 잠깐 시간을 내어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겠지만 이제는 아니니까.

지금 나와 담덕의 거리는 상당히 멀었다. 단순히 물리적인 거리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 사이에는 6년의 시간이 만든 미묘한 어색함이 함께 흐르고 있었다.

“혼인 문제는 오라버니께 대충 들었어요. 영이와의 혼인을 피하기 위해서 전쟁터를 전전했다고요. 이제 태왕의 위상이 예전과 많이 달라졌으니 더 이상 소노부의 압력은 없는 건가요?”

“폐하의 위상이 달라진 것도 있지만, 더 이상 소노부가 음모를 꾸밀 원동력이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영이가 있는 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소노부의 고추가는 뜻을 이룰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그것이…….”

어렵지 않은 질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지설이 멋쩍게 웃었다. 참으로 그답지 않은 모습이라 나는 어리둥절해져 눈을 껌뻑일 뿐이었다.

“뭐예요, 이 반응은?”

“뭐가 말입니까?”

“상당히 멋쩍어하고 있잖아요. 사씨 도련님께서 그런 표정도 지을 줄 아셨나 싶어서요.”

“……제가 뭐, 무슨 표정을 지었다는 것인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제 얼굴을 매만지는 것이, 지금 자신의 표정을 정확히 알고 있는 눈치였다. 순식간에 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빨리 말해 봐요. 무슨 일인지.”

“……해씨의 아가씨께서 집을 나오셨습니다.”

지설이 여전히 멋쩍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 표정을 보느라 나는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을 한 박자 늦게 이해했다.

“네? 영이가 집을 나왔……! 그러니까 가출을 했다고요? 내가 아는 영이라면 그런 대담한 일을 벌일 수 없을 것 같은데요.”

귀한 아가씨의 표본처럼 보이던 영이었다. 여리고 약하던 그 아가씨가 어찌 이런 대담한 일을 벌였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놀라서 입을 떡 벌리고 있으니 지설이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가출이라기보다는 납치일까요.”

“네?”

이어지는 말도 놀랍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니, 영이 가출을 했다는 것보다 이쪽이 더 놀라웠다.

“납치…… 납치를 했다고요?”

“예. 후에 상황을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기는 했습니다만, 시작은 확실히 납치였죠.”

“누가 그런 일을……?”

“누구긴요. 우리 폐하시죠.”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하도 입을 벌린 나머지 턱이 빠질 것만 같았다.

“……담덕이요? 영이를 납치해요?”

멍청한 얼굴로 되묻는 나를 보며 지설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때가 그즈음입니다. 술도 안 통할 정도로 돌아 있을 때요. 그때 폐하께서 사람 여럿 피곤하게 하셨죠. 가장 큰 피해자는 저였고.”

담덕이 영을 납치하고, 영은 그 상황을 이해했고, 그래서 지금은 아무 문제가 없다고?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당장 담덕을 만나는 건 힘드니 영이라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지금 영이는 어디 있어요?”

투덜거리는 지설을 향해 물었더니 그의 입이 꾹 다물렸다. 과거의 불만으로 찌푸려졌던 미간도 슬그머니 펴져, 조금 전 보았던 멋쩍은 얼굴이 되었다.

갑자기 표정이 또 왜 이래?

빤히 지설을 보고 있으니 그가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제 거처에 있습니다.”

“……지설의 거처요?”

“……예.”

“어…… 영이 왜 거기에……?”

나의 질문을 끝으로 어색한 침묵이 우리를 감쌌다.

* * *

지설과 영이 한집에 산다!

태자의 호위로 낙점된 이후 지설은 순노부 사씨의 저택에서 나와 집을 따로 구했다. 그러니 지금 지설의 집에는 그와 영, 몇 안 되는 몸종들만 있을 터.

도대체 어떻게 된 사연인지 물어도 지설은 묵묵부답이었다. 대신 어울리지도 않는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침묵만 지킬 뿐이었다.

나는 그에게서 답을 얻을 수 없다는 걸 빠르게 깨달았다.

영에게 물어야겠구나.

나는 당장 지설과 그의 집을 방문하기로 결정했다. 두 사람의 사연을 묻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녀와 나눌 이야기도 많았다.

하지만 연을 홀로 두고 다원을 비우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다행히도 걱정하는 내게 제신이 해결책을 제시했다.

“걱정 말고 다녀와. 이 녀석은 내가 보고 있으면 되잖아. 뭐가 걱정이야?”

제신이 연을 안아 들며 웃었다. 담덕이며 제신이 연을 어찌나 가볍게 안아 올리는지, 끙끙대며 연을 안아 드는 내가 바보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연아, 잠시 혼자 있어도 괜찮겠니?”

나는 제신의 품에 가볍게 안긴 연을 보며 물었다.

고구려에 온 뒤 장소와 사람이 낯설었는지, 연은 한동안 내 옆에만 붙어 다녔다. 연이 불안해한다면 영을 만나는 건 뒤로 미룰 생각이었다.

하지만 내 생각과 달리 연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외숙부님이 계시니까 괜찮아요.”

연이 제신의 옷자락을 꼭 잡으며 다부지게 대답하더니, 그의 품에 얼굴을 폭 묻었다. 그간 제법 경계를 하더니 이제는 제신이 많이 편해진 모양이었다.

그 모습이 뿌듯해 웃으며 보고 있으니, 자신에게 파고드는 연을 단단히 붙잡는 제신도 감격에 찬 얼굴을 했다.

“그래! 이 외숙부가 있는데!”

제신은 갖은 외면과 무시 끝에 얻어 낸 조카의 신뢰가 상당히 기쁜 모양이었다. 한없이 위로 올라간 입꼬리가 눈에 띄게 씰룩거리고 있었다.

“같이 말을 타러 갈까? 오늘은 전보다 더 큰 말을 가져왔어.”

제신의 질문에 연이 그의 가슴에 묻었던 얼굴을 번쩍 들었다.

“말도 타고, 활도 쏠래요!”

“활?”

“네. 나중에 호랑이를 잡으려면 열심히 연습을 해야 된다고 했어요.”

“네 어머니가?”

“아뇨. 폐하께서요.”

연의 입에서 나온 말에 제신과 나, 지설이 모두 굳었다.

연은 담덕이 고구려의 ‘태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게 얼마나 대단한지는 아직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연의 앞에서 늘 소탈한 모습을 유지한 담덕 덕분이었다.

연에게 담덕은 자기한테 활 쏘는 걸 가르쳐 준 사람 정도인걸. 더 잘 쳐 주면 고구려 ‘대장님’ 정도인가.

“호랑이를 잡으려고?”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제신이 웃으며 연에게 물었다.

“네. 같이 사냥을 가자고 하셨어요. 거기서 사냥감을 하나 잡으면 소원을 들어주신대요. 그래서 열심히 연습하려고요.”

“그래. 뭐라도 잡으려면 열심히 훈련을 해야지.”

“뭐라도가 아니라, 호랑이를 잡을 겁니다.”

자신감 넘치는 대답에 제신이 픽 하고 헛웃음을 흘렸다.

“거참.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인가? 피는 못 속이겠다. 어찌 호랑이를 홀로 잡을 생각을 해?”

“그 피, 오라버니에게도 흐르고 있거든!”

“생각해 보니 그렇잖아?”

제신이 낄낄 웃으며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뭘 그러고 서 있느냐? 어서 다녀오지 않고. 해 떨어지기 전에 돌아와야 한다.”

꼭 대여섯 살 먹은 어린애에게 하는 당부 같았다.

“내 나이가 몇인데 그런 말을 해?”

“나이가 몇이든 내겐 나보다 어린 누이인걸. 조심해라. 지설이 있으니 걱정은 없지만…….”

제신의 눈빛을 받은 지설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걱정 마십시오. 그렇지 않아도 잘 경계할 생각이었습니다. 아가씨에게 문제가 생기면 역정 내실 분이 궁에도 한 분 더 계셔서요. 전 다시 그 피곤한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 * *

“영아!”

“우희야!”

지설의 집 마당에서 마주한 나와 영은 손을 붙잡고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마주한 영의 얼굴은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나의 마지막 기억보다 여위어 있었다.

“여전히 몸이 좋지 않은 모양이구나.”

“하루아침에 나을 병이었으면 진즉에 나았을 거야. 타고나기를 그렇게 태어났으니 평생 안고 갈 병이라 생각해야지.”

“무슨 소리야? 내가 전에 맥을 짚었을 때는……”

“아가씨들.”

지설이 마당에 덩그러니 서서 대화를 하는 나와 영에게 다가왔다.

“대화는 안으로 들어가서 하시죠. 여기는 사방이 트여서 제가 불안하거든요.”

혹시나 모를 상황이 발생하면 지키기에 좋지 않다는 뜻이다. 나와 영은 서로를 바라보며 눈빛을 교환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우희야, 이쪽으로.”

영이 익숙하게 나를 안쪽으로 이끌었다. 집 안에서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니 하루 이틀 이곳에 머무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확실히 실감할 수 있었다.

“지설 님은 여기서 기다리세요. 여자들만의 대화가 필요해요.”

나는 나와 영을 따라 들어오려는 지설을 저지하고 그대로 문을 닫았다. 닫히는 문 사이로 황당하다는 듯한 지설의 얼굴이 보였지만, 다행히 그는 닫힌 문을 열어젖히지 않았다.

“여자들만의 대화라니.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내 말에 영이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나는 그 맞은편에 자리를 잡으며 작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속삭였다.

“당연히 지설 님과의 사연이지! 네가 어째서 여기 있는 거야?”

“어…… 그게…… 납치를 당했어.”

“그건 들었어. 그런데 이게 어디 납치당한 사람 모습이야?”

전보다 여윈 모습이기는 하지만 영의 얼굴은 밝았다. 예전에는 지설과 눈만 마주치면 움츠리더니 이제는 그의 앞에서도 주눅 든 기색이 없었다.

제 모습을 훑고 있는 나의 시선을 느꼈는지 영이 부드럽게 웃었다.

“시작은 납치였는데 끝은 거래로 결론 났어. 내가…… 소노부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했거든.”

“어째서?”

“폐하께 아버지의 생각이 무엇인지 전해 들었으니까.”

부드럽던 영의 미소가 서서히 흐려졌다.

“그분께서 욕심을 버리시기 전까진 돌아가지 않을 거야. 욕심으로 오라버니와 틀어지셨는데, 그걸 계속 한탄하셨는데…… 어째서 내게까지 그런 걸 원하시는지 모르겠어. 나와도 그리 틀어져도 괜찮다 생각하셨던 걸까? 아니, 내가 어찌 황후가 돼? 내가 어찌 그 권력의 중심에 어울리겠어?”

스스로를 향해 질문을 던진 영이 이내 고개를 저었다.

“난 아버지가 그리 사시는 것도, 내가 그렇게 사는 것도 싫었어. 그래서 돌아가지 않고 납치되기로 한 거야. 폐하께선 기꺼이 내게 안전한 장소를 내어주겠다 하셨고.”

“소노부에선 네가 이곳에 있는 걸 알아?”

“아버지라면 모르실 리 없잖아. 그분이 어떤 분인데. 하지만 지설 님은 폐하의 최측근에다 상당히 강한 분이시고, 이 주위를 지키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고 했으니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싶어. 그래도 잊을 만하면 담 너머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오기는 하지만 말이야.”

복잡한 사연을 설명하면서도 영은 담담했다. 흔들림 없이 말을 이어 가는 그녀를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그간 많이 단단해졌구나.”

“그럼. 언제까지 오라버니에게, 또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며 살 수는 없잖아. 나도 어른인걸.”

여리게만 보이던 귀한 아가씨가 이처럼 변한 까닭이 마냥 좋은 일은 아니라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운과 영, 이 남매의 삶을 오늘까지 끌어온 것은 그들의 자의가 아닌 주변의 욕심이었다.

“그래도 누군가를 의지하는 게 나쁜 건 아니잖아. 어른도 타인에게 의지할 수 있어. 넌 네 오라버니나 주변 사람들에게 의지해도 돼.”

“그런 걸까?”

영이 살짝 상기된 얼굴로 문 쪽을 바라보았다. 아마도 문이 아닌 그 너머에 있을 지설을 바라보는 것이겠지.

“지설 님과는 언제 이런 사이가 된 거야?”

“이런 사이라니?”

“혼인만 하지 않았지 함께 살림을 차린 거나 마찬가지로 보이는데? 너와 지설 님의 모습을 보면 말이야.”

“뭐?”

나의 말에 영이 고개를 휘휘 저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 아냐! 무슨 그런 소리를…… 그저 나만……”

“너만? 너만 지설 님을 마음에 두고 있……”

영이 의아해져서 묻는 내 앞으로 다가와 나의 입을 틀어막았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영은 문밖의 기척을 살피느라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밖에 다 들리겠어!”

작게 속삭이는 영을 보고 있자니 금세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것 같았다.

영은 지설을 좋아하지만 자신만의 마음이라 생각해서 그에게 전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지설도…….

나는 웃으며 내 입을 틀어막은 영의 손을 잡아 내렸다.

“그간 안 좋은 일만 있었던 건 아니구나. 다행이다.”

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나를 보는 영에게 내 옆의 의자를 가리켰다.

“별말 안 할 테니 우선 앉아 봐. 제대로 제 맥을 짚어 보고 싶어.”

오늘 영을 찾아 지설의 집에 온 진짜 이유는 그녀의 건강을 살피기 위해서였다. 오래전부터 영을 제대로 진찰하고 싶었는데 이상하게 기회가 없었다.

게다가 지금은 나 때문에 영의 오라비가 멀리 떠나 있었다. 운을 대신해 그녀를 살피는 게 조금이나마 보답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여러 의원에게 보였지만 별다른 차도가 없었는걸. 아버지도 그랬고, 폐하께서도 태의까지 보내 주셨지만 하는 말은 늘 똑같았어.”

자리에 앉으면서도 영은 크게 기대를 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소매를 걷어 팔을 내 앞에 내미는 모습은 무척이나 자연스러워서, 그녀가 얼마나 많은 의원을 만났는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난 영이 만난 그 의원들과는 달라. 현대 한의학을 배운 사람이라고.

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영의 손목에 손을 얹었다. 결과는 오래전 내가 파악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침세맥. 거기에 겉으로 보이는 영의 증상까지 종합하면 기허에서 온 천식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만성적이라 다루기 쉬운 병은 아니지만 이토록 차도가 없다니. 소노부에서 부른 의원과 담덕이 보낸 태의 모두 제대로 고치지 못했다는 건 역시 이상해.

잠시 까닭을 고민하던 나는 영의 손목을 놓아주며 그녀에게 물었다.

“영. 혹 예전 의원들이 남긴 약방문(藥方文)이 있다면 볼 수 있을까?”

* * *

나는 영으로부터 약방문을 한가득 받아 비로의 다원으로 돌아왔다. 소노부에 있을 때의 약방문은 구할 수 없었지만, 다행히 지설의 집에 머무르기 시작한 이후의 것은 모두 보관 중이었다.

약방문에는 특별히 걸리는 구석이 없었다. 천식을 다스리는 평범한 처방. 처음의 것이 제대로 듣지 않자 후에는 조금씩 약재를 바꿔 가며 영의 상태를 살핀 것 같았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차도가 없을까? 병을 잘못 파악한 건가?

하지만 직접 진맥하고 증상을 살핀 결과를 종합하면 천식이 맞았다. 혹 내가 천식에 대해 놓치고 있는 부분이라도 있는 걸까?

소진으로 살아가며 오로지 한의학 공부에만 매달렸다. 가족도, 연줄도, 돈도 없는 내가 살길이 그것뿐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한의학 지식에는 상당히 통달하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내가 모든 지식을 달달 외우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의서를 뒤져 봐야겠어.

그렇게 생각하며 방을 나서는 순간 멀리서 연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제야 다원으로 돌아온 후 연에게 인사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떠올렸다.

약방문을 보며 고민하느라 다른 생각은 아무것도 못 했네.

나는 서둘러 웃음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말을 타고 활을 쏠 거라더니, 제신과 함께 활쏘기 연습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연아.”

“어머니!”

나의 부름에 연이 웃으며 달려왔다. 하지만 연의 뒤를 따라 내게 다가오는 사람은 제신이 아니었다.

“왔어?”

“담덕.”

마치 내가 손님이고, 자신이 주인인 듯한 자연스러운 맞이였다.

“요즘 바쁘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온 거야?”

“아무리 바빠도 여기에 올 시간도 없을까. 이 녀석과 약속한 것도 있고 해서 잠시 들렀어.”

“이제 날이 풀려서 사냥을 할 수 있을 거래요!”

담덕의 말에 연이 재빨리 설명을 덧붙였다.

그러고 보니 벌써 날이 풀려 이제 국내성에는 제법 봄기운이 느껴졌다. 하지만 날이 풀린 것과 담덕의 시간이 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후연과의 일로 잠도 제대로 못 잔다며. 사냥이라니, 그렇게 시간을 내도 괜찮은 거야? 게다가 이런 시기에 사냥을 가면 보는 눈들도 좋지 않을 거고……”

“괜찮으니 가겠다고 하는 거야. 이제 내가 좀 대단한 태왕이 되었거든. 이 정도는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어.”

내 말을 끊고 들어온 담덕이 웃으며 물었다.

“너도 함께 갈 거지?”

“함께 가실 거죠?”

거기에 연까지 가세했다.

빤히 내 얼굴을 쳐다보는 네 개의 눈에 내가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어…… 그래야지. 연이만 보낼 수는 없으니까…….”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담덕과 연이 마주 보며 활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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