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장. 구원 요청
시간은 화살처럼 흘러갔다. 그동안 삼국의 정세는 혼란을 거듭했다.
가장 큰 사건은 담덕이 백제의 왕, 아신을 발밑에 꿇어 앉힌 일이었다. 영락 6년. 내가 고구려를 떠난 지 2년째 되는 해였다.
그해의 전쟁은 지난 전쟁들과 양상이 완전히 달랐다.
그동안의 전쟁은 백제가 먼저 공격하고 고구려가 반격을 하는 흐름으로 흘러갔지만, 영락 6년의 전쟁은 고구려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되었다.
담덕은 직접 군사를 끌고 전쟁에 나섰다. 육군과 수군을 모두 활용하여 백제의 수도를 포위한 끝에 아신의 항복을 받아 냈다.
이때 고구려의 수중에 들어온 백제의 성이 58개. 아신은 영원한 노객(奴客:복종하여 신하가 되겠다는 뜻으로 사용)이 되겠다 맹세하고 자신의 동생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내야 했다.
더 말할 것도 없는 담덕의 대승이었다. 고국원왕이 백제 근초고왕의 손에 죽은 이후 백제에 이를 갈았던 고구려 사람들은 만세를 부르며 태왕을 찬양했다.
하지만 직접 무릎을 꿇은 후에도 아신은 전쟁을 포기하지 않았다.
대패한 다음 해인 영락 7년에는 왜에 태자 전지(玲支)를 볼모로 보내 화친을 도모했으며,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영락 8년에는 쌍현성을 쌓으며 또 다른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올해가 영락 9년이었다. 내가 고구려를 떠나 신라에 자리를 잡은 지도 벌써 5년 정도가 지난 것이다.
어느덧 나의 나이도 20대 중반을 넘어섰다.
이곳에서 나는 이리 부인의 말벗을 하며 그녀와 집안 하녀들의 건강을 돌봐 주고 있었다. 이리 부인의 소개로 다른 집안 귀부인들의 병을 살펴 주는 일도 왕왕 있었다.
귀부인들이 알음알음 나를 찾는 이유는 간단했다. 남자 의원에게 밝히기 힘든 부인병 때문이었다.
조선 시대에 비해서 개방적이고 여성의 지위가 높은 사회라고는 하나, 은밀한 여성의 사정을 털어놓는 일은 이 시대에도 어려웠다. 때문에 부인병이 있어도 의원에게 제대로 설명을 하지 못하고 병을 키우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나는 같은 처지의 여자 의원이었다. 남자 의원들에게 증상을 설명하는 것보다 훨씬 솔직한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으니 조금 더 정확한 진단과 처방이 가능했다.
덕분에 왕경의 귀부인들 사이에 내 재주가 좋다는 소문이 돌아 최근에는 일주일에 한두 번씩 다른 집으로 왕진을 다녔다.
그토록 바라던 의원으로서의 삶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이제 내게는 한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로서의 삶 역시 중요했다.
“연아!”
나는 이른 아침부터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연을 찾기 위해 분주했다.
저택 곳곳을 돌아다니며 연의 이름을 부르는 나를 보면서도 하녀들은 심각함을 느끼지 못하고 제 할 일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만큼 이 풍경이 익숙하다는 뜻이었다.
이제 다섯 살이 된 연은 또래보다 건장하고 활기가 넘쳐 잠시만 정신을 놓고 있어도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기 일쑤였다.
때문에 사람들은 연이 열 달을 다 채우지 못하고 태어난 아이라는 사실을 들을 때마다 놀라서 펄쩍 뛰었다.
산달을 다 채우지 못한 아이들은 대체로 몸이 약했다. 심각한 경우에는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었다.
그에 비해 연은 건강함이 넘치다 못해 활기를 주체하기 힘들 정도였다. 벌써부터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며 나를 힘들게 하니, 이보다 더 자라면 어떻게 아이를 돌봐야 하나 벌써부터 앞날이 걱정이었다.
다행히도 오늘은 목격자가 있었다. 빨랫감이 수북이 담긴 통을 들고 가던 하녀가 저택의 끝을 가리키며 연의 행적을 알려 주었다.
“아마 정원에 있을 겁니다. 새에게 주겠다며 모이를 들고 가는 것을 보았거든요.”
나는 하녀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한 뒤 빠르게 정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안녕, 새들아. 맛있게 먹어!”
정원에 들어서자마자 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바닥에 모이를 뿌리고 쪼그려 앉은 연이 날아드는 새들을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태평한 그 얼굴을 보고 있으니 열심히 연의 행방을 찾아다닌 내 모습이 허탈해져 절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어머니!”
내 웃음소리를 들었는지 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내게 달려왔다. 나는 품 안으로 파고드는 연을 꼭 껴안으며 머리에 꿀밤을 먹였다.
“아얏! 어머니!”
방심하고 있다가 기습을 당한 연이 억울하다는 듯 입을 비죽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에 절로 마음이 약해졌지만 이 눈에 넘어가면 앞으로가 힘들었다.
“아무 말 없이 사라지지 말라고 했지? 그리 사라지면 내가 걱정한다고. 매일 이렇게 날 놀라게 해야 직성이 풀리나, 우리 아들은?”
나는 짐짓 엄한 척 눈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늘 그랬듯 연에게는 엄한 척이 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새가 왔단 말이에요!”
“그 새?”
“네! 그 예쁜 새요!”
연이 말하는 예쁜 새라면 비로의 전령새였다. 임무의 특성상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새들을 골라 훈련시키는데, 눈썰미가 좋은 연은 집에 자주 드나드는 전령새를 금세 구별해 냈다.
“조금 전에 모이를 잔뜩 먹고 돌아갔어요. 저기요.”
연이 하늘을 가리켰다. 아이의 손끝을 따라 눈을 움직이니 점처럼 작아진 새가 멀리 날아가고 있었다.
이번에는 무슨 소식이 내려왔을까?
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새가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최근 신라를 둘러싼 분위기가 좋지 않아 작은 소식 하나에도 마음이 불편했다.
올해 가을, 혹독하게 전쟁을 준비하는 아신을 견디지 못한 백제 백성이 대거 신라로 도망쳐 왔다.
그렇지 않아도 고구려와 가까이 지내는 신라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백제였다. 이번 일로 아신이 이를 갈며 분노했다는 풍문이 공공연하게 나돌자, 새해를 앞두고서도 왕경은 분위기는 여러모로 흉흉했다.
“어머니, 왜 그러세요?”
나의 걱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는지 연이 시무룩한 얼굴로 내 옷을 잡아끌었다. 괜히 아이를 불안하게 만든 것 같아 나는 일부러 활짝 웃으며 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새에게 모이를 주었으니, 이제 네 배를 채울 차례지. 식사를 준비해 뒀어. 방으로 돌아가자.”
* * *
이른 시간부터 분주하게 움직인 탓인지 식사를 할 때부터 눈을 느리게 깜빡이던 연이 결국 낮잠에 빠졌다.
나는 침상에 누운 연의 몸에 이불을 덮어 주고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운을 찾아가 오늘 날아온 전령새가 가져온 소식이 무엇인지 물을 참이었다. 하지만 운이 나를 찾아오는 것이 먼저였다.
똑. 똑똑똑. 똑똑. 똑똑. 똑똑똑똑.
시차를 두고 가볍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비로의 대원들끼리 공유하는 신호였다. 나는 잠든 연을 힐끗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예상했던 것처럼 운이 서 있었다. 그는 사람들의 눈에 띄기 전 재빨리 방 안으로 들어서며 문을 굳게 닫았다.
“연이는?”
“잠들었어요.”
침상을 가리키며 대답하자 운이 다행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네.”
그렇게 말하면서도 전혀 잘됐다는 얼굴이 아니었다. 심각한 그의 표정에 나는 무엇인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음을 짐작했다.
“전령새가 가져온 소식이 좋지 않았어요?”
“전령새가 온 것은 어찌 알았어?”
“어찌 알았겠어요? 연이가 발견했죠.”
“타고났군. 벌써부터 눈이 그리 좋아?”
운이 피식 웃음을 흘리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덕분에 잠시 그의 표정이 부드러워졌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금세 심각한 얼굴로 돌아 온 운이 목소리를 낮추며 내게 작은 서신을 건넸다.
“아무래도 상황이 심상치가 않다.”
“역시 백제의 움직임이 이상한가요? 최근 분위기가 좋지 않았잖아요.”
“백제뿐만이 아니야. 백제의 동맹인 가야와 왜까지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침략의 전조가 보여.”
전쟁이 날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또다시 전쟁이라니.
고구려를 떠나 겨우 전쟁에서 멀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신라까지 전쟁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왕경을 떠나야 할까요?”
전쟁이 나면 가장 위험한 사람은 역시 여인과 아이였다. 어쩔 수 없이 마주했다면 몰라도 전쟁이 터질 것을 미리 안다면 피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하지만 내 말을 들은 운은 의외라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의외로군.”
“무엇이요?”
“여기 남아서 사람들을 돕겠다고 할 줄 알았거든. 전쟁터야말로 그대가 할 일이 가장 많은 곳이니까.”
“아무리 저라도 일부러 그런 상황 속으로 뛰어들지는 않아요. 눈앞에 환자가 나타나면 그걸 외면할 수 없을 뿐이죠. 게다가 이제는…….”
나는 눈을 돌려 잠들어 있는 연을 바라보았다.
혼자라면 어떤 위험을 무릅쓰든 의술을 배운 자로서의 사명을 다할 것이나, 이제 내게는 꼭 지켜야 할 존재가 생겼다. 지금은 이 아이가 무엇보다 우선이었다.
“역시 변했어. 무모함이 반 정도는 줄었다고나 할까.”
운의 말은 칭찬인지 타박인지 애매했다. 하지만 나는 그의 말을 내가 듣기 좋은 쪽으로 해석하기로 했다.
“칭찬으로 들을게요.”
“당연히 칭찬이지. 난 언제나 그대의 무모함이 염려스러웠거든.”
운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웃다가 곧 진지한 얼굴로 조언을 건넸다.
“신라가 침략을 받는다면 가장 안전한 곳은 이곳 왕경이 될 거야. 수도가 함락된다는 건 곧 나라가 무너진다는 뜻이니 신라도 무슨 수를 써서든 적들을 막아 내겠지. 특히 이리 부인의 집은 왕경에서도 가장 안쪽, 궁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니 신라가 무너지지 않는 이상 안전할 거다.”
“다행이네요. 이리 부인과 연리에게도 아무런 일이 없으면 좋겠는데…….”
이방인인 나를 기꺼이 받아들여 준 사람들이었다. 나는 좋은 사람들에게 불행이 닥치지 않기를 진심으로 기도했다.
* * *
하지만 안타깝게도 불행은 생각보다 빠르고 심각하게 왕경을 잠식했다. 새해를 얼마 앞두지 않은 신라에 적군이 밀려들어 온 것이다.
가야와 왜가 주축이 된 침입이었다. 고구려와의 전쟁 준비로 신라까지 칠 여력이 없었던 백제가 동맹국들을 움직여 고구려의 우방을 무너뜨리려 한 듯했다.
표면적인 명분은 신라가 도망친 백제의 백성을 돌려보내지 않고 받아들인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백제의 속내야 뻔했다. 고구려의 우군인 신라를 먼저 침으로써 조금이라도 고구려를 흔들어 볼 심산이었을 것이다.
왜가 신라를 침입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내가 신라에 오기 1년 전에도 왜군이 밀고 들어와 힘겹게 그들을 무찔렀다는 이야기를 이리 부인에게서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의 침입은 그때와 완전히 달랐다.
백제의 든든한 지지를 받은 왜군은 거칠 것 없이 신라의 땅을 휘젓고 다니며 신라의 심장인 왕경에까지 공격을 감행했다.
거기에 가야까지 힘을 보탰다. 빠른 진격에 신라군은 제대로 손도 쓰지 못하고 왜군의 왕경 입성을 허락하고 말았다.
“설마 왕경이 이렇게 빨리 밀릴 줄이야. 그 전에 여길 빠져나갔어야 했는데…….”
비로로부터 정보를 받고 있던 운도 신라가 단번에 왕경까지 밀려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모두의 예상을 빗나갈 만큼 강하고 체계적인 공격이었다.
때문에 우리는 전란을 피할 때를 놓쳐 신라군의 최종 방어선 안에 갇혀 버렸다. 운은 무척 곤란한 얼굴을 했지만 이미 일이 벌어진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이제는 신라군을 도와 적을 물리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했다.
신라군은 궁성 인근으로 최종 방어선을 치고 격렬히 저항했다. 하지만 갈수록 방어선이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신라의 명운은 바람 앞에 등불처럼 위태로웠다.
멸망의 위기에 놓인 신라가 믿을 구석은 단 하나. 우방인 고구려의 구원뿐이었다.
운은 전령새를 보내 신라의 상황을 상세히 전했다. 왜군이 왕경까지 들어와 신라를 짓밟고 있으며, 신라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적들을 물리칠 수 없으니 원조가 필요하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원조를 청하면서도 운은 원군의 파견을 확신하지 못했다. 올해 초부터 북쪽에서 후연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던 탓이었다.
신성과 남소성이 후연에 의해 함락되고 그 인근 700리 땅이 그들의 손에 넘어가 북쪽의 상황이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신라를 위해 대규모의 병력을 움직이긴 힘들었다.
그 무렵 신라의 왕도 은밀하게 고구려로 사람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는 소문이 방어선 내의 사람들에게 전해졌다.
두려움에 떨던 이들은 곧 강력한 고구려의 군대가 자신들을 구하러 올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마지막 저항을 이어 갔다.
나 역시 그들에게 힘을 보탰다. 수곡성에서 그랬던 것처럼 진료소를 세우고 다친 병사와 백성을 치료했다. 이리 부인은 기꺼이 대문을 열어 저택을 진료소로 제공해 주었다.
하지만 상황은 좋지 않았다. 왜군에게 포위당해 고립된 환경이라 약재와 물품이 부족했고, 식량도 점점 줄어들었다.
어려운 싸움이 이어지는 가운데 우리는 정신없이 영락 10년을 맞이했다. 신라에서 보낸 그 어떤 날보다 우울하고 어두운 새해맞이였다.
나는 마당까지 가득 들어찬 환자들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날이 갈수록 환자는 늘어 가기만 할 뿐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며칠 전에는 그나마 남아 있던 약재마저 동이 나 침술과 외상처치에만 집중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러다 왕경의 최종 방어선까지 무너지면…….
불리한 상황 탓에 좋지 않은 생각이 계속 들었지만, 어린 연은 상황의 심각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인지 밝은 모습을 잃지 않았다.
연은 나를 돕겠다고 종종거리며 사람들을 줄 세우고 있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스스로 제 할 일을 찾아 나선 것이다.
스스로 일을 자처한 것도 기특한데, 심지어 대처가 똑 부러져 진료소를 정돈하는 데 꽤 도움이 되기까지 했다.
“아저씨, 아저씨는 여기 말고 저기 뒤쪽으로 가세요.”
연이 다리를 절뚝거리는 사내의 옷자락을 끌어당기며 말했다. 사내는 갑자기 나타난 꼬마를 시큰둥하게 바라보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꼬마야. 네가 못 봤나 본데, 내가 이놈보다 먼저 왔다.”
“그래도 뒤로 가셔야 해요. 우리 어머니가 줄은 온 순서대로 서는 게 아니라 많이 아픈 사람이 앞에 서는 거랬거든요. 아저씨는 많이 안 아프시죠? 그러니까 저기 뒤로 가셔야 돼요.”
“뭐? 네 어머니가 누군데 그래?”
“여기 사람들 치료해 주고 있는 이분이요.”
나를 가리키는 연의 손가락에 귀찮은 얼굴로 손을 내젓던 남자의 입이 꾹 다물렸다.
진료소에서는 의원이 곧 하늘이었다. 나와 연의 얼굴을 번갈아 보던 남자가 어색하게 웃으며 연이 가리킨 곳으로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연이 턱을 치켜들며 뿌듯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잘했지요, 어머니?’
표정만 보아도 그렇게 말하는 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미소로 연을 칭찬하고는 환자에게로 다시 눈을 돌렸다.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어찌 알았을까?
연은 하녀들이 환자들을 분류하는 모습을 보고 홀로 규칙을 터득했다. 배움이 빠르고 사리에 밝은 아이였다.
일을 좋아하는 것도, 머리가 좋은 것도 다 제 아버지를 닮은 건가.
복잡한 심경으로 연의 뒤통수를 보고 있으니 대문 밖에서부터 하녀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마님! 왔습니다!”
기쁨에 들뜬 목소리였다. 뒷말을 듣지 않아도 좋은 소식이 들려왔음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대문 안으로 뛰어온 사람은 피 묻은 천을 세탁하러 나섰던 이리 부인의 하녀였다.
빨래터에 도착하기도 전에 소식을 들은 것인지 가지고 나갔던 빨랫감이 여전히 더러운 채였다. 하녀에게 일을 맡겼던 이리 부인은 눈빛으로 그녀를 질책하며 입을 열었다.
“아픈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어찌 이리 소란스럽게 굴어?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빨래도 하지 않고 그대로 가져온 게야?”
하지만 이리 부인의 질책에도 하녀의 들뜬 목소리는 가라앉지 않았다.
“마님! 원군이 왔습니다. 고구려에서 원군을 보냈대요! 지금 왜군과 싸우고 있는데 고구려군이 우세하답니다. 밖에서 진을 치고 있던 왜놈들을 금방 몰아낼 수 있을 거래요!”
하녀의 말에 모여든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던 사람들의 얼굴에 점차 밝은 빛이 들어찼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들과 달리 마냥 기뻐하기에는 마음이 복잡했다.
고구려군이라. 누가 병력을 이끌고 왔을까?
평소라면 운을 통해 고구려군의 동향을 들을 수 있었겠지만, 왕경에 완전히 고립된 이후 국내성과 완전히 연락이 끊어져 운도 상황이 어찌 흘러가는지 몰랐다. 마지막으로 왕경의 위협을 알리는 전령새나마 보낼 수 있었던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정보를 듣지 못하니 모든 것을 추측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나는 원군을 끌고 올 만한 사람들의 면면을 머릿속으로 떠올려 보았다.
신라의 왕이 직접 나서서 구원을 요청했다. 그간 쌓아 온 우호 관계를 고려하면 담덕의 측근 중 하나가 병력을 이끌고 왔을 것이다.
평소라면 담덕이 직접 출정했을 테지만 지금은 북쪽 전선이 위태로웠다. 우리 땅을 빼앗긴 입장이니 신라의 구원 요청보다는 그쪽이 먼저일 것이다.
누가 지원군으로 왔든 그와 마주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고구려군이 왕경에서 왜군을 몰아내 준다면, 신라의 왕은 군대를 이끈 용사를 궁 안으로 들여 귀하게 대접할 것이다.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멍하니 대문 밖을 응시하는 내 뒤에서 운이 작게 속삭였다.
나는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며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다행히 사람들은 하녀가 가져온 반가운 소식에 대해 떠드느라 나와 운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아무 생각도 안 합니다.”
“아니긴요. 고구려군 이야기를 듣고도 아무 생각이 없었을 리가 없는데.”
정확한 추측이었다. 대답 없이 입을 꾹 다무는 나를 보고 운이 픽 웃었다.
“잠시 이야기 좀 하죠.”
그렇게 말한 운이 인적이 드문 건물 뒤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는 치료하고 있던 환자에게 양해를 구하고 그의 뒤를 따랐다. 둘만 남는 상황이 되자 운이 평소처럼 말을 걸어왔다.
“어쩔 생각이야?”
무슨 소리인가 싶어 운을 보니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고구려군이 온다. 그들을 따라 돌아가는 게 어때? 이제 아이도 많이 컸으니, 함께 먼 길을 떠나는 것도 어렵지 않잖아.”
“……제가 꼭 고구려로 돌아가야 한다는 듯한 말투네요.”
“그럼 돌아가지 않을 생각이었어?”
운이 별 우스운 소리를 다 듣는다는 양 헛웃음을 흘렸다.
“넌 그렇게 생각했는지 몰라도 난 아니었어. 연이가 어느 정도 크면 널 고구려로 다시 데려갈 생각이었다. 그래서 계속 옆을 지키고 있었던 거고. 그런데 마침 일이 이렇게 되어 고구려군이 신라에 왔으니 그들과 함께 돌아가는 게 좋겠어.”
“……왜 그래야 하는데요?”
“왜냐니. 연이는 태왕의 핏줄이야. 언제까지 이곳에 둘 수 없어. 왕경이 이처럼 외부의 공격에 쉽게 무너지는 위험한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이상 더욱 그래.”
“태왕의 핏줄이기 때문에 더욱 고구려로 돌아가서는 안 되는 거 아닌가요? 고구려에는 이미…… 태왕의 뒤를 이을 아드님이 있잖아요.”
내 말에 운의 입이 꾹 다물렸다.
영락 6년. 담덕이 백제의 아신을 꿇어 앉혔다는 소식과 함께 고구려의 태왕이 아들을 얻었다는 이야기가 신라에까지 흘러들어왔다.
내가 소문의 진위에 대해 묻자 운은 담담하게 그것이 진실임을 알려 주었다.
소문이 사실임을 확인하고 나는 안도함과 동시에 스스로가 우스워졌다. 내가 그간 쌓아 온 마음이 이리도 부질없었던가.
내 도박은 완전히 실패였다.
“……승평 님이 계시지만 폐하의 장남은 연이야. 그건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새로운 삶을 잘 살고 있는 사람 앞에 나타나서 그걸 흔들라고요? 밖으로는 원수를 꿇어 앉히고, 안으로는 굳건한 후계를 세워 겨우 왕위가 안정됐어요. 전 그러길 바라서 고구려를 떠났으니 지금에 만족해요.”
오래도록 서로가 변하지 않는다면 운명이 내 마음을 허락한 것이라 생각하겠다 했는데.
결국 이것이 하늘의 답이었다.
세상이 정한 담덕의 인연은 따로 있었고, 연 역시 장수왕이 될 아이가 아니었다.
“그쪽이 이곳에 머무르는 게 신라에서 세작으로서의 임무를 다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태왕의 핏줄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그럴 필요 없어요. 전 연이와 이곳에서 조용히 살 거예요.”
“그게 네 뜻만으로 되는 일은 아니잖아.”
“그쪽만 아무 말 않으면 되잖아요. 그럼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어요. 어차피 그 사람은 연이의 존재도 모르니까…….”
나의 말에도 운은 납득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운을 설득하지 못하면 고구려에 나의 위치와 상황이 흘러 들어간다.
그러니 어떻게든 운을 이해시켜야만 했다. 하지만 내가 무어라고 더 입을 열기도 전에 연리가 불쑥 나타났다.
“두 분, 여기서 뭐 하세요?”
어느새 아가씨가 된 연리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나와 운을 보았다. 미소가 음흉한 것이 쓸데없는 상상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두 분의 밀회야 언제든 환영이지만 지금은 좀 참으셔야겠습니다. 급한 소식이 있거든요.”
연리가 히죽거리며 팔꿈치로 운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고구려 문제로 따로 이야기하는 모습을 자주 보인 탓인지 이리 부인의 가솔들은 우리가 연인으로 발전할 것이라 큰 기대를 하고 있었다.
당연히 나와 운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펄쩍 뛰었다. 하지만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누구 하나 우리의 말을 믿지 않았다.
결국 나와 운은 우리가 아무런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길 포기했다. 어차피 당사자들만 아무 일 없으면 되는 일이었다.
“급한 소식이라니. 그게 뭔데?”
내 질문에 얄궂게 웃던 연리가 조금 진지해진 얼굴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어요.”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
“네. 좋은 소식은 원군으로 온 고구려군이 엄청나게 많아서 순식간에 왜군을 쓸어 버렸다는 거예요. 이렇게 쉽게 물리칠 수 있는 놈들과 싸우느라 지난 몇 개월 동안 힘들었다니…… 너무 허무한 거 있죠.”
연리가 진심으로 힘이 빠졌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땅으로 꺼지는 숨을 따라 어깨도 아래로 축 처졌다.
“고구려 군대는 신라군에 비해 전쟁에 익숙하니까 어쩔 수 없지.”
“소진 언니, 지금 고구려 출신이라고 젠체하는 거죠?”
“젠체가 아니라 사실이 그렇잖니. 고구려는 늘 전쟁을 하고 사니까…… 그나저나 군대가 많이 왔나 봐?”
“네. 같이 싸웠던 신라 병사들에게 물으니 원군으로 온 고구려 군대가 족히 몇 만은 될 거라고 하던데요.”
“몇 만이나?”
나와 운 모두 놀랐다. 북방 상황이 어려운 지금 고구려가 이렇게까지 많은 병력을 보낼 줄은 몰랐다.
“나쁜 소식도 그것과 관련 있어요. 몇 만이나 되는 사람들이 한바탕 전투를 치렀으니 어디 부상자가 한둘이겠어요? 지금 마당에 환자들이 엄청나게 몰려왔어요. 다들 소진 언니만 기다린다고요. 그러니 두 분, 밀회는 나중에 하세요!”
“밀회 아니라고 했지.”
운이 미간을 찌푸리며 연리의 이마에 꿀밤을 안겼다.
“아!”
연리는 한껏 억울한 표정으로 비명을 지르며 빨갛게 변한 이마를 문질렀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꼭 나중에 손잡고 와서는 ‘저희 혼인합니다’ 하던걸요, 뭐.”
“쓸데없는 소리.”
운의 손이 한 번 더 연리의 이마에 꿀밤을 주었다. 조금 전보다 강한 꿀밤에 연리가 울상을 지었다.
“도림 선생님!”
“쓸 데 없는 소리 할 시간에 진료소로 돌아가기나 하자. 어서.”
운이 원망 섞인 연리의 부름을 무시하며 그녀의 어깨를 밀었다.
* * *
연리의 말처럼 진료소는 혼잡했다. 내가 자리를 비우기 전보다 환자가 두 배는 늘어난 것 같았다.
이거 감당 가능할까?
머리가 지끈거렸다.
단순 외상은 이리 부인과 하녀들도 도와줄 수 있었지만 증상이 심각하면 나밖에 손을 쓸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척 보기에도 늘어져 있는 사람들의 상태가 심각했다.
화살이 박힌 채 부축을 받고 온 사람, 화상을 입어 옷이 팔에 완전히 눌어붙은 사람, 흘러나온 피로 바닥을 흥건히 적신 사람, 다리가 괴이하게 꺾인 사람.
환자들의 면면을 살피던 나는 무엇인가 이상한 것을 깨닫고 걸음을 멈추었다.
부상당한 병사들이 입은 옷들이 꼭……
고구려 군대의 차림새였다.
그러고 보니 곳곳에서 들려오는 말투 역시 고구려 억양이 섞여 있었다.
연리가 다친 병사들이 왔다기에 당연히 신라군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새로이 온 환자의 대부분은 고구려 군대였다.
나는 당황해서 그대로 제자리에 굳어 버렸다.
나보다 먼저 연리와 함께 진료소로 향했던 운도 당황한 듯 제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뒤통수만 보일 뿐인데도 그의 당황이 느껴질 정도였다.
“아저씨는 이쪽으로 오세요!”
당황스러운 내 맘을 알 리가 없는 연은 쏟아지는 환자들 사이를 오가며 바쁘게 움직였다. 아파서 끙끙대던 사람들은 명랑한 연의 목소리에 피식 웃기도 하고, 이름이 무어냐고 묻기도 했다.
진료소를 활보하는 꼬마라니. 당연히 눈에 띄겠지.
갑작스러운 상황에 머리가 딱딱해졌다.
어떻게 해야 하지? 지금이라도 연이를 불러서 방으로 돌려보내야 하나? 아니, 혹 병사들 중에 날 알아보는 사람이 있지는 않을까?
쉽사리 나서지 못하고 있는 그 순간 믿을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인가? 그 진료소가?”
설마. 잘못 들은 거겠지? 고구려군이 왔다고 하니까 내가 괜히 착각한 거야. 그래. 그런 게 분명해.
나는 뻣뻣해진 고개를 억지로 돌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두 눈 속에 들어온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복잡하게 돌아가던 마음의 소리가 뚝 끊겼다.
그곳에 담덕이 있었다.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나는 그대로 몸을 돌려 뒤돌아섰다. 당황스러움으로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북쪽이, 북쪽 전선이 심각하다고 했는데. 그래서 태왕이 직접 올 리는 없다고…….
머릿속으로 쏟아 내는 생각이 요란한 심장 소리에 묻혔다. 온몸이 심장이 된 것처럼 쿵쿵거리는 통에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아저씨는 어디가 아파서 오셨어요?”
하지만 곧 들려온 연의 목소리에 나는 금세 현실로 돌아왔다.
연과 담덕이 마주쳤다.
어떡하지? 어떻게 해야 하지?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운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도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했는지 난처한 얼굴로 나와 연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많이 아픈 사람은 이쪽, 덜 아픈 사람은 저쪽, 안 아픈 사람은 장소가 협소하니 돌아가셔야 해요. 가족이나 친구가 있어도 나중에 보러 오시고요. 해가 지면 조금 한산해집니다.”
“꼬마가 참으로 똘똘하구나. 네가 이 진료소의 대장이냐?”
웃음기 섞인 담덕의 목소리에 다른 병사들이 와하하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는 그냥 연이고요, 대장은 제가 아니라 저희 어머니예요.”
“……네 어머니? 이 진료소를 너희 어머니가 운영한다고?”
담덕이 의아하다는 듯 혼잣말을 하고는 곧 질문을 던졌다. 연이 아닌 뒤에 선 부하에게 묻는 것 같았다.
“이곳이 실성의 모친인 이리 부인의 저택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분이 전쟁 통에 저택을 개방해 진료소를 운영하신다고. 이리 부인에게 이처럼 어린 아이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는데.”
“맞습니다. 저도 그리 들었습니다.”
이어진 목소리도 익숙했다. 태림이었다. 담덕이 있는 곳에 지설이나 태림이 있는 건 당연했으니 그리 놀랄 일도 아니었다.
익숙한 목소리들을 듣고 있자니 점점 그들이 이곳에 있다는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바보처럼 당황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담덕 일행을 힐끗거렸다. 무엇이 그리 심각한지 담덕과 태림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느라 이쪽에는 관심이 없었다.
“와. 저분은 누구신지 참으로 잘생기셨습니다. 우리 도림 선생께서도 한 미모 하시지만, 저분은 또 다른 멋이……”
지금이다.
나는 재빨리 몸을 돌려 연리의 옷깃을 잡아챈 뒤 그녀를 건물 뒤로 끌었다.
“어어!”
멍하니 새로운 손님을 구경하던 연리가 소리를 지르며 내 손에 끌려왔다.
나는 연리의 입을 틀어막으며 소리를 죽인 뒤 고개를 빼 바깥 상황을 살폈다. 다행히 연리의 비명을 듣지 못했는지 그들은 내가 있는 곳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건물 뒤로 몸을 숨기는 나를 연리가 황당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녀가 제 입을 틀어막은 내 손을 밀어내며 눈을 깜빡였다.
“소진 언니, 무슨 일이에요?”
“연리야, 부탁이 있어.”
진지한 내 목소리에 어리둥절하게 날 보던 연리의 얼굴이 굳어졌다.
“무슨 부탁인데요? 언니가 그렇게 진지하게 말하니까 저 조금 무서워요. 심각하고 안 좋은 일이에요?”
“무섭긴 뭐가 무서워? 심각한 건 아냐. 그냥 마당에 가서 연이 좀 데려올래? 다른 건 필요 없고, 방에 데려다 놓기만 하면 돼.”
웃으며 말했지만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말없이 웃고만 있으니 결국 연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아무 일도 없는 거죠? 그냥 연이만 방에 데려가면 되는 거죠?”
“응. 정말 그거면 돼.”
“……알았어요. 저 연이랑 언니 방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거기로 와요.”
“그래. 고마워.”
웃으며 연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니 그녀가 여전히 불안한 표정을 하면서도 진료소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나는 건물에 몸을 바짝 붙인 뒤 한쪽 눈만 내밀어 연리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연아. 아침부터 고생했으니 이제 그만 들어가자.”
연리가 연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연은 고개를 갸웃거릴 뿐 그녀의 손을 잡지 않았다.
“어머니는요?”
“어, 음, 언니도 곧 올 거야. 연이가 먼저 방에 가서 기다리고 있으면 금방 와. 그러니까 누나랑 가자.”
연리가 뻗은 손을 흔들며 연을 재촉했다. 연리의 손을 빤히 바라보던 연이 곧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하지만 연리가 작게 안도의 한숨을 쉬는 것과 동시에 담덕이 입을 열었다.
“이리 부인 댁의 가솔이십니까? 잠시 말을 좀 물어도 될까요?”
“누구시죠?”
“아, 저는 고구려군의 지설이라 합니다. 태왕 폐하의 명을 받고 원군을 끌고 왔습니다.”
담덕의 입에서 뻔뻔한 거짓말이 흘러나왔다. 태왕이 고구려 땅을 비웠다는 소리가 돌면 후연이 공격을 감행하려고 할 테니, 정체를 숨기고 남정(南征)에 나선 모양이었다.
뭐든 제 손으로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완벽주의자가 다른 사람을 보낼 리가 없나.
여전히 담덕다운 결정에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아. 고구려의.”
고구려군을 끌고 온 장수라는 말에 경계심에 차 있던 연리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신라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고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이 집의 여식인 연리입니다.”
“이 집의? 그렇다면 실성 님의 누이 되십니까?”
“오라버니를 아십니까?”
“고구려에서 인연이 있습니다.”
“그러셨군요. 하면 이곳에는…….”
“예. 실성 님의 부탁으로 이리 부인의 안부를 살피러 왔습니다.”
웃으며 대답한 담덕이 진료소를 둘러보았다.
“게다가 도착하고 보니 이곳에서 진료소를 여셨다기에…… 저희가 가져온 약재를 나눠 드리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약재가 부족해 곤란하던 참입니다. 소진 언니가 들으면 크게 기뻐할 거예요.”
“……소진 언니라면?”
“아, 저희 집에서 어머니의 말벗을 해 주고 있는 분입니다. 의술에 재주가 있어서 사람들을 많이 도와주고 있지요. 이 진료소를 열자고 한 것도 소진 언니인걸요.”
“그렇습니까. 그 언니라는 분이 혹……”
담덕의 곤란한 질문이 이어지려는 그때 조용히 숨죽이고 있던 운이 나섰다.
“연리야.”
“선생님.”
“어서 연이를 데려가야지. 손님들은 내가 부인께 모셔다 드리마.”
“아.”
그제야 정신을 차린 연리가 담덕 일행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먼 길을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연리가 연과 함께 담덕에게서 멀어지자 팽팽하던 긴장이 조금 풀어졌다. 저쪽의 상황은 이제 어떻게든 운이 정리를 해 줄 것이다.
그때 얼굴을 찌르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반사적으로 그쪽으로 눈을 돌리니 담덕 뒤에 선 태림이 내가 있는 쪽을 빤히 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분명히 그렇게 느껴지는 순간 태림의 눈이 조금 커졌다. 나는 서둘러 밖으로 빼고 있던 몸을 건물 뒤로 숨겼다.
조금 진정되었던 심장이 다시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확실히 눈 마주쳤지. 아, 정말.
나는 벽에 기대어 쪼그려 앉은 뒤 두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 * *
“이제 나와도 돼.”
한참 뒤 운이 건물 뒤로 찾아왔다.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은 채 한참을 초조해하던 나는 반가운 마음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돌아갔습니까?”
“처음부터 이리 부인의 안부만 확인하러 오신 거니까. 이야기를 나누신 뒤 지금은 신라의 왕을 만나러 궁에 가셨다.”
“그렇군요.”
긴장이 풀려 다리에 힘이 빠졌다. 나는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으며 이마를 짚었다.
“태림과 눈이 마주쳤어요. 날 본 것 같아요.”
“그래? 평소와 다른 것이 없던데. 혹 착각한 거 아닐까? 그대를 봤다면 이렇게 쉽게 돌아갈 리가 없는데.”
내 말에 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직접 눈이 마주친 나는 확신했다. 태림은 나를 보았다.
“그냥 닮은 사람을 봤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죠. 그랬으면 정말 좋겠는데.”
나는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몰아친 사건에 아직도 다리가 후들거렸다. 운이 미간을 찌푸리며 비틀거리는 내 팔을 붙잡아 주었다.
“그에게 뭐라고 설명했어요?”
“무엇을?”
“소진에 대해서요. 의술을 배운 여인이 흔치 않으니까 당연히 의심했을 것 같은데…….”
“……묻지 않으셨어.”
“네?”
“묻지 않으셨다고. 폐하께선 내게 소진이 누구인지 묻지 않으셨다. 요즘 신라 사정이 어떤지만 묻고 떠나셨어.”
기분이 이상했다. 담덕이 ‘나로 추정되는 여인’에 대해 캐묻지 않았다면 안도감이 들어야 하는데. 이상하게 심장이 시큰거렸다.
“……하긴. 그렇네요. 굳이 물을 이유가 없지. 제가 괜히 걱정했어요.”
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가슴을 폈다.
“사실 마주쳤어도 그냥 인사만 하고 돌아갔을 수도 있죠. 어, 안녕, 여기 있었네, 오랜만이다, 잘 지내. 그렇게요. 제가 괜히…… 걱정했어요. 굳이 이렇게 난리 법석 피우면서 숨어 있을 필요도 없었는데. 빨리 환자들이나 치료하러 가야겠어요. 아까 보니까 다친 사람 많던데. 다들 저 기다리고 있겠네요.”
잘된 일이다. 담덕이 아무런 관심도 가지지 않고 여길 떠났으니 잘된 거야.
나는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그렇게 속삭이며 진료소로 향했다.
* * *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 바로 어제인데.
“왜…….”
담덕이 또 여기에 있는 건데!
나는 따뜻한 물을 가지고 와 진료소로 들어서려다 말고 뒷걸음질 쳤다. 진료소 그늘막 아래에 담덕이 느긋한 얼굴을 하고 앉아 있었다.
오늘 담덕은 부하들 없이 혼자였다. 대신 그 옆에 연이 있었다. 연은 한숨을 푹 내쉬며 담덕 앞에 쪼그려 앉았다.
“아저씨는 왜 또 오셨어요? 여긴 안 아픈 사람이 오는 곳 아닌데.”
“나도 환자인데. 볼래?”
겉보기에 멀쩡한 담덕을 보며 연이 못 믿겠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자, 그가 오른팔의 소매를 걷어 보였다. 겹겹이 감은 붕대에 피가 흥건하게 배어 있었다.
전쟁터에서 몸 사리지 않고 나서는 건 여전하지! 검을 쓰는 손인데 어쩌다 저리 다쳤나 몰라. 지혈은 제대로 한 거야?
어쩔 수 없이 의원으로서의 걱정이 튀어나왔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붕대를 풀어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 확인하고 싶었다.
“나 아픈 사람 맞지?”
“네. 아픈 사람 맞아요.”
“그러니 돌아가지 않아도 되는 거고?”
“네.”
담덕의 물음에 연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모습에 담덕이 웃으며 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지만 뒤이어 나온 말은 연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이 녀석이 그렇다니 난 계속 여기 있을 생각인데. 그만 나오지 그래?”
담덕이 고개를 돌려 정확히 나를 보았다.
서서히 나를 향하는 눈빛에는 현실감이 없었다. 나는 이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몰라 멍하니 그를 보았다.
“연우희. 이미 들켰으니 그냥 나오라고. 안 잡아먹으니까. 아, 여기서는 소진이라고 하던가?”
담덕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 앞으로 다가왔다.
가까이 서자 익숙한 향기가 코끝으로 밀려왔다. 그 체향을 맡는 순간 거짓말처럼 6년의 시간이 무너져 내렸다.
손에 힘이 빠졌다. 들고 있던 대야가 낙하하며 발 위로 뜨거운 물이 쏟아졌지만 아무런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그저 멍하니 담덕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여전하구나, 너는.”
담덕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내 발치를 한참이나 보던 담덕이 그대로 나를 안아 들었다.
“내려…… 내려 줘.”
몸이 가볍게 떠올랐다. 담덕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내려 달라고 말했지만 그는 꿈쩍도 않고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내려 달라니까.”
“가만히 있어. 다쳤잖아.”
담덕이 턱 끝으로 내 발을 가리켰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뜨거운 물에 닿은 살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너야말로 다쳤잖아. 네 팔이……”
“괜찮아. 너 정도는 가볍게 들어. 상처는 괜찮아.”
그 말을 끝으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담덕은 나를 안고 저택 밖으로 나섰다.
담덕의 얼굴이 너무 가까웠다. 오랜만에 마주한 그는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더 사내다운 어른이 되어 있어서, 나는 눈을 어디에 둘지 몰라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릴 뿐이었다.
하지만 초조한 나와 달리 담덕은 침착해 보였다.
이리 부인의 저택을 나서면 금방 하녀들이 빨래하는 작은 개울이 나오는데, 담덕은 그곳에 다다라서야 나를 내려 주었다.
담덕은 나를 커다란 돌 위에 앉힌 뒤 내 발을 흐르는 물에 담갔다. 화끈했던 피부가 물의 차가움에 점차 진정되어 갔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흐르는 물만 바라보았다. 정수리에서 나를 보고 있는 담덕의 시선이 느껴져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먼저 입을 뗀 사람은 담덕이었다.
“많이 부었네. 물이 많이 뜨거웠나 보다. 어디에 쓰려고 그리 물을 뜨겁게 끓였어?”
“……침구를 소독하려고.”
“아. 네가 가지고 다니는 그 바늘 말이지.”
“바늘이랑은 조금 달라.”
“뭐, 비슷하게 생겼으니 상관없지 않나.”
서로의 입에서 일상적인 대화가 흘러나왔다. 6년 만에 나누는 대화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여상스러운 흐름이었다.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겉돌기만 하는 대화를 중심으로 가져왔다.
“어떻게 알았어? 내가 여기 있는 건.”
“어제 태림과 눈이 마주쳤다며.”
역시 알아본 거구나. 그래. 모를 리가 없지. 닮은 사람으로 착각하길 바라는 건 무리한 바람이었어.
속으로 한탄하고 있으니 담덕이 말을 덧붙였다.
“게다가 이리 부인께 소진이 누구냐 물었더니 말해 주시던데. 6년 전 겨울에 온 고구려 여인이라고. 의술이 뛰어나서 이번 전쟁에서도 큰 도움이 되었다 했어. 이름이 달라서 고민하긴 했지만 여태까지 종적을 감추고 산 사람이면 진짜 이름은 쓰지 않는 게 당연하지. 그리 생각하니 그 여인이 너라는 답밖에는 나오지 않더라고.”
“그럼 어제는 왜 그냥 돌아갔어? 아는 체하지 않고.”
“아는 체했으면? 밤에 짐을 싸서 도망가기라도 하려고?”
“도망가긴 내가 왜?”
“그걸 몰라서 물어? 여태까지 계속 내게서 도망쳤잖아. 비로의 대원까지 꾀어내서 장장 6년 동안이나.”
“……도망간 거 아닌데. 소원권 썼잖아. 멀리 떠나 조용한 곳에서 살고 싶다고.”
“그 소원 어디에 ‘행방을 감춘다’는 말이 있지? 난 그런 거 허락한 적이 없는데.”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담덕이 곧 질문을 던졌다.
“아이가 있더라.”
민감한 이야기에 푹 숙이고 있던 고개가 번쩍 들렸다.
하지만 고개를 들어 바라본 담덕의 얼굴은 내 예상과 전혀 달랐다. 그는 한 점의 동요도 없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새 혼인을 했나? 아이까지 낳고?”
동요는커녕 미소가 걸린 얼굴이었다. 마치 정말 잘됐다고 축하라도 하는 듯이.
축하? 축하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었다.
혹시라도 담덕을 다시 만나면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몇 번이나 생각했다.
화를 내거나 무시를 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지만 내가 틀렸다. 담덕은 내게 화를 내지도 않았고, 나를 무시하지도 않았다.
“아이가 상당히 크던데. 올해 몇 살이야?”
태연하게 묻는 질문에 무엇인가가 가슴속에서 울컥 올라왔다. 형체도 없는 덩어리에서 묘하게 비린 맛이 느껴져 입안이 씁쓸했다.
눈을 아래로 내리까는 나를 앞에 두고 담덕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여섯 살? 일곱 살? 보기에는 그쯤으로 보이던데. 벌써 그런 나이일 리는 없고. 또래에 비해 큰 편인가 봐?”
“……응. 어렸을 때부터 좀 컸어.”
“그렇구나. 아이 아버지는? 내가 아는 사람인가?”
“……여기 신라 땅에 네가 아는 사람이 어딨겠어.”
“왜? 한 명 있잖아. 내가 아는 사람.”
담덕이 재미있다는 듯 픽 웃었다.
“이리 부인은 ‘소진’과 ‘도림’을 이어 줘야겠다고 벼르고 계시던데.”
비단 이리 부인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두 사람을 어서 혼인시켜야 한다고.
나와 운의 사이를 오해하고 있는 저택 사람들 모두가 우리를 볼 때마다 그런 소리를 했다.
하지만 담덕이 어떻게 그런 소리를 하지? 다른 사람도 아닌 담덕이.
내가 혼인을 했든, 아이를 낳았든 네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구나, 이제.
그럴 법도 했다. 담덕은 이미 다른 인연을 찾아 그 사람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았다. 후계자가 되어 줄 든든한 아들.
모질게 말하고 곁을 떠나 버린 6년 전의 여자애는 더 이상 기억 속에 없겠지.
나는 돌 위에서 내려와 흐르는 물 위에 섰다. 치마 밑단이 축축하게 젖어 들어갔지만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이제 괜찮아진 것 같아. 고마워. 오히려 의원이 환자의 도움을 받아 버렸네. 돌아가면 네 팔의 상처도 봐 줄게.”
“팔? 아, 이거. 별거 아닌데.”
저택을 향해 걸으니 담덕이 내 옆으로 따라붙으며 제 팔을 들어 보였다.
나를 안아 올린 탓인지 조금 전보다 붕대에 스며든 붉은빛이 더 커져 있었다.
“별거 아니긴. 아무래도 상처가 벌어진 것 같은데. 피의 양도 심상치 않고…… 잘못하면 상처가 곪아서 큰일이 날 거야. 제대로 살펴야 돼.”
“……오랜만이네. 그런 잔소리.”
“잔소리는 네가 더 많이 했지.”
예전처럼 잔소리를 늘어놓은 것이 민망해져 나는 헛기침을 하며 말을 돌렸다.
“고구려로는 언제 돌아가?”
“남쪽 원정이 완전히 끝나면. 태림을 시켜서 가야까지 밀어 버리라고 했거든. 내려온 참에 다 쓸어버려야 훗날이 편해. 다시는 이런 침입을 못 하도록 경고를 하는 거지.”
“그 전투는 네가 선봉에 서지 않아?”
직접 나선 전투에서는 항상 선봉에 서는 담덕이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니 이상했다. 의아해져 담덕을 보니 그가 다시 한번 팔을 들어 보였다.
“보다시피 팔을 다쳐서. 태림이 펄쩍 뛰면서 뒤에서 쉬라고 하잖아.”
“……네가 태림의 말을 들을 때도 다 있어?”
“6년이 지났잖아. 나도 이제 부하들의 조언을 잘 듣는 왕이거든.”
“지설이 아주 좋아하겠네.”
“아, 지설의 말은 아직도 잘 안 듣는다. 지설은 너무 안전 지향적이라 재미가 없거든.”
담덕의 이야기만 들었는데도 지설의 잔소리가 귓가를 울리는 것 같았다.
“지설도 여전한 모양이구나.”
“그럼. 사람이 어디 쉽게 변하겠어? 태림이 사흘 후면 가야를 정리하고 돌아올 테니, 곧 고구려로 돌아가 그 얼굴을 보겠지.”
“안부 전해 줘. 내가 소식을 궁금해하더라고.”
“안부?”
내 말에 담덕이 별 우스운 소리를 다 듣는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건 네가 직접 가서 확인하지 그래?”
“뭐?”
“내가 널 보고도 그냥 두고 갈 거라고 생각했어? 너도 함께 돌아가야지. 고구려로.”
웃고 있던 담덕의 얼굴에는 어느새 미소가 사라져 있었다.
“그러니 무엇이든 네가 직접 해. 그러면 되겠네.”
여유롭고 따뜻하다고 생각했던 목소리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서늘하게 느껴졌다.
돌아간다고? 국내성으로?
담덕은 나를 떨치고 앞으로 나아갔을지 몰라도 나는 여전히 6년 전 이별을 고하던 강변에 고여 있었다.
그런 내가 국내성에서 담덕의 다른 여인과 그녀가 낳은 아이, 그리고 그들을 귀하게 아껴 주는 담덕을 보며 아무렇지 않게 지낼 수 있을 리 없었다.
“나는…… 안 가.”
나는 겨우 입을 움직여 내 의사를 표현했다. 하지만 담덕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넌 가야 돼. 내가 여기 널 두지 않을 거니까.”
“난 조용하게 살고 싶어. 이제 그래도 되잖아.”
“그래. 조용하게 살아. 누가 그러지 말래? 더 이상 황후가 되어 달라고, 내 여인으로 남아 달라고 귀찮게 안 해. 네가 원하는 대로 조용하게 살아. 내가 그리 살게 해 줄 테니까.”
담덕의 목소리가 한층 더 높아졌다.
“대신 내 눈에서 벗어나지 마. 뭘 해도 좋으니 내 눈앞에서 해. 다른 사내와 혼인을 하든, 아이를 낳든. 뭐든 내가 보는 앞에서 하라고.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게 숨어 지내며 사람 돌아 버리게 하지 말고.”
도대체 담덕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왜 이렇게 화를 내고 있는지, 왜 이렇게 싸늘한 얼굴을 하는지도 몰랐다.
나는 이제 상관없는 게 아니었나? 이미 다른 사람이 생겼으면서 왜 내게 이러는 거지?
“……담덕.”
나는 얼떨떨해져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담덕은 내 말을 듣지 않았다.
“이번에는 6년 전처럼 사라지기 힘들걸. 네 아들에게 근위대원 하나를 붙여 놨거든. 아들을 두고 도망가는 건 못할 테니까. 자신 있으면 그 눈을 피해서 아들과 함께 도망가 봐. 아마 어렵겠지만.”
나를 향하는 말에는 비웃음마저 담겨 있었다. 나는 급작스러운 담덕의 변화에 어쩔 줄을 몰랐다.
입을 쩍 벌리고 있는 나를 보며 담덕이 비죽 웃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히 알겠다는 표정이었다.
“아, 이번에도 그에게 도움을 청할 건가? 해운? 그를 믿고 있어?”
하지만 담덕이 틀렸다. 나는 운은커녕 다른 어떤 사람의 얼굴도 떠올리지 못했다.
담덕이 이렇게 눈앞에서 영문 모를 말들을 쏟아 내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의 얼굴을 떠올릴 수가 있단 말인가.
“그게…… 아니라…… 네가 갑자기……”
얼떨떨하게 말했지만 이번에도 담덕은 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태림과 함께 가야에 갔어. 한동안 그곳에서 비로 대원으로서 임무를 행하겠지. 왕명을 내렸으니 절대 거절하지 못할 거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임무를 맡겼으니 한동안 이곳에 돌아올 수 없겠지. 여기에 널 도와줄 사람은 없다는 뜻이야.”
그렇게 말한 담덕이 내 어깨를 단단히 붙잡았다. 힘이 들어간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나를 향하는 두 눈동자가 서늘하게 빛났다.
“그러니 포기하고 순순히 날 따라 고구려로 돌아가는 게 좋을 거야. 내가 또 돌아 버리면 이번엔 무슨 짓을 할지 모르겠으니까. 인의, 평화. 너 그런 거 좋아하잖아. 그러니 네가 협조해. 내가 돌아서 또 다른 나라로 쳐들어가기 전에.”
이를 악물고 씹어 낸 담덕의 거친 말이 가슴에 날아와 꽂혔다.
그때 담덕의 등 뒤로 무엇인가가 날아왔다. 작은 돌멩이였다.
갑자기 웬 돌멩이?
고개를 빼 담덕의 등 뒤를 살피니 언제 따라왔는지 연이 잔뜩 심통이 난 얼굴로 씩씩대고 있었다.
“우리 어머니 괴롭히지 마세요!”
예상하지 못한 경고에 담덕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담덕은 물러서기는커녕 재미있다는 듯 슬쩍 웃으며 연을 보았다.
나름대로 비장한 경고를 날렸음에도 담덕이 꿈쩍도 않자 또다시 돌멩이가 날아들었다.
두 개, 세 개, 네 개.
내 눈에도 전부 보일 정도로 느리게 날아왔으니 충분히 피할 수 있었을 텐데, 담덕은 여전히 내 어깨를 붙잡은 자세로 자리를 지켰다. 어린 꼬마와 기 싸움이라도 하는 모양새였다.
지켜보고 있다가는 끝이 없겠어.
나는 한숨을 내쉬며 두 사람을 중재하기 위해 나섰다.
“연아.”
내가 이름을 부르자 멈추지 않을 것만 같던 돌팔매질이 그쳤다. 뒤이어 담덕에게 눈짓하니 그의 손도 내 어깨에서 떨어졌다.
연은 기다렸다는 듯 손에 쥐고 있던 돌을 바닥에 던져 버리고 나를 향해 달려왔다. 나는 불안한 얼굴로 내 품을 파고드는 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다. 괴롭히는 거 아니야. 어머니 친구야.”
“……정말요? 정말 친구예요?”
내 말에도 연은 미심쩍다는 듯 담덕의 얼굴을 쏘아보았다. 제대로 위협조차 되지 않는 어린아이의 살기등등한 눈빛에 담덕이 픽 하고 웃음을 흘렸다.
“아들을 잘 키웠군.”
자신을 우습게 보는 담덕의 웃음에 기분이 상했는지 연이 입을 비죽였다.
“어머니. 저 아저씨 나쁜 아저씨죠? 못된 친구 맞죠?”
내 몸을 끌어당겨 속삭이는 연의 목소리에 담덕이 무릎을 굽혀 연과 눈을 맞추었다.
“다 들린다, 이 녀석아.”
돌을 던진 보복인지 담덕이 연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마구잡이로 머리를 헤집는 손길에 연은 몸을 가누지 못하고 이리저리 휘청거렸다.
“으어어! 그만하십시오!”
“착하구나. 어머니를 지키려고 한 것이지?”
발끈하려던 연이 이어지는 담덕의 칭찬에 입을 꾹 다물었다. 남아 있는 불만으로 입을 비죽이면서도 얼굴이 상기된 것을 보니 그의 칭찬이 제대로 먹힌 듯했다.
“……네, 뭐. 아버지도 안 계시니까, 제가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