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화유수 4권
22장. 연(璉) (2)
* * *
이리 부인은 유모의 역할을 자처해 많은 시간을 연의 곁에서 머물렀다. 이미 두 아이를 키워 낸 부인은 육아에 대한 지식이 풍부해 많은 면에서 내게 큰 도움이 되었다.
덕분에 나는 한결 편하게 아이를 돌볼 수 있었지만 신세를 지고 있는 처지에 이런 도움까지 받으니 면목이 없었다.
“어찌 매일 찾아오세요? 이러시면 제가 너무 죄송합니다.”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 너무 마음 쓰지 말게. 실성을 멀리 보내고 이제 연리도 다 컸다며 어미를 찾지 않으니 한동안 적적했거든. 남편도 잃고 권력에서 멀어진 이 늙은이가 할 일이 뭐가 있겠어?”
이리 부인이 연을 안아 들자 아이가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상대가 매일 자신을 안아 주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본 것이 틀림없었다.
볼을 매만지는 손가락을 잡으려 애쓰는 연의 모습을 보며 이리 부인의 얼굴에도 미소가 걸렸다.
“아이가 참으로 순해. 낯도 가리지 않고 웃음도 많으니 어디를 가나 사랑받겠어. 아이의 아버지도 이 모습을 보았어야 했는데.”
아이의 아버지.
의식적으로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쓰던 말에 절로 입매가 굳었다. 이리 부인은 그런 나를 놓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자네가 처음 우리 집으로 왔을 때, 혹 실성의 아이를 가진 것은 아닐까 생각했네.”
“예? 실성 님의 아이요?”
“그렇잖은가. 날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일부러 고구려 여인을 신라까지 보냈어. 게다가 그 여인이 아이까지 뱄으니 어찌 그런 생각이 안 들었겠는가.”
처음부터 내게 지극히 호의적이던 이리 부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는 내가 제 아들의 아이를 가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나를 받아들인 것이다.
“아닙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다른 사람이에요. 제가 큰 오해를 안겨 드렸으니 어찌 사죄를 드려야 할지…….”
“자네가 미안할 것이 뭐라고. 내가 멋대로 오해를 한 것인데.”
이리 부인이 인자하게 웃으며 연을 바라보았다.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 이 녀석이 실성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은 바로 알았어. 얼굴 어디에서도 내 아들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거든.”
“이 어린 아이의 얼굴에서도 그런 것이 보이십니까?”
“그럼. 부모는 다 알아보는 게야. 그대도 연의 얼굴에서 아비의 얼굴을 보지 않는가?”
나는 이리 부인을 따라 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찬찬히 그 얼굴을 살피면 이리 부인의 말처럼 곳곳에 담덕의 흔적이 있었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나를 닮았지만 눈매는 담덕을 쏙 빼닮았다.
언젠가 담덕이 이 아이를 보면, 그때 담덕은 제 아이를 한눈에 알아볼까?
그런 생각을 하다 나는 금세 고개를 저어 버렸다.
“……연의 아버지는 살아 있는가?”
이리 부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연이 실성의 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니 이제 아비의 정체가 궁금해진 모양이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을 피했다. 담덕에 대해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말을 못하는 것을 보면 죽은 사람은 아닌 모양인데. 어찌 이리 고운 부인이 홀로 아이를 낳게 했을까. 참으로 죄 많은 사내일세.”
“그 사람 잘못이 아닙니다. 다 제 탓이에요. 오히려 제가 그 사람을 많이 힘들고 아프게 했습니다.”
“어찌 그게 어디 자네의 탓이겠나. 모두 고약한 운명의 탓인 게지.”
“운명이라……. 사람은 홀로 살 운명도 타고나는 것일까요?”
문득 궁금해졌다.
평생 혼자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 있다면, 그 운명이 지독하게 나를 따라다니고 있다면.
나는 이번 생에도 홀로 살아가야만 하는 것일까?
소진이었던 나도, 우희인 나도 결국은 혼자로구나.
서글픈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려는 그때. 이리 부인이 연을 내 품에 안겨 주며 고개를 저었다.
품에 안긴 연의 체온에 가슴이 따뜻해졌다.
“세상에 홀로 사는 운명은 없네. 이것 보게. 자네에게도 이 아이, 연이 있지 않은가. 누구보다 가까운 사람. 혈연으로 묶인 끈끈한 사이. 부모와 자식 간의 인연은 영원히 풀리지 않을 견고한 인연이야.”
이리 부인의 말처럼 부모와 자식의 인연이 영원히 풀리지 않는 견고한 것이라면, 지금의 나는 연과 담덕의 인연을 끊어 놓은 죄인이었다.
나는 웃으며 손을 뻗는 연을 꼭 껴안으며 아이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아이의 몸에서 나는 특유의 향기에 가슴이 죄여 왔다.
* * *
새해가 밝아 영락 5년이 되었다.
몸은 고구려에서 멀어졌지만 나는 여전히 고구려의 기준으로 해를 세고 있었다. 마음이 여전히 고구려에 묶여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날이 조금 풀어져 연과 함께 산책을 나섰던 나는 하늘을 날고 있는 익숙한 새를 보고 깜짝 놀라 새를 쫓았다.
비로의 전령새가 이리 부인의 저택 위를 날고 있었다.
비로는 고구려 주변 국가들의 주요 도시에 정보를 수집하는 세작을 두었다. 신라의 수도인 왕경 역시 그 대상 중 하나였다.
현재 신라의 왕경을 담당하는 세작은 운이었다.
나를 먼저 이리 부인의 저택에 보낸 후 고구려에 돌아갔던 운은 제신과 함께 다로의 문제를 논의하고 다시 왕경을 찾았다. 그가 연리의 스승으로 이리 부인의 저택에 들어온 것은 그 후의 일이었다. 신라에 머물 공식적인 이유를 만들기 위해 번거로운 여정을 감수한 것이다.
나로서는 반길 만한 상황이었다. 비로의 세작이 나의 은둔을 돕고 있으니 그들의 눈을 가리고 귀를 막은 셈이었다. 세작이 다른 사람으로 바뀌기 전까지는 고구려에서 나의 행방을 찾기 어려울 것이다.
운을 공범으로 끌어들여 그의 주군과 친우 모두를 속이게 만들었으니, 이로써 나는 그에게 큰 빚을 지게 되었다.
운은 내게 아버지 일로, 나는 그에게 오늘의 사정으로. 결국 서로에게 하나씩 빚을 진 셈이었다.
새를 따라 걸음을 옮기니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담 근처의 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있는 운이 보였다.
그는 손을 뻗어 하늘을 날고 있는 전령새를 제 손 위에 부르고 새의 발목에 묶여 있는 작은 서신을 풀어냈다.
서신을 읽는 운의 표정은 제법 심각했다. 혹시라도 좋지 않은 소식이라도 적혀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밀려왔다.
“안 좋은 일입니까?”
이미 내가 다가오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 운은 태연하게 고개를 저었다.
“좋은 일이기도 하고 나쁜 일이기도 하다.”
운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내게 서신을 내밀었다. 고개를 빼고 서신의 내용을 살피니 비로의 대원들만 알아볼 수 있는 암호가 검붉은 글씨로 깨알같이 적혀 있었다.
서신에 담겨 있는 내용은 복잡하지 않았다.
국내성에 퍼졌던 괴이한 소문을 퍼트린 자가 비로의 대원인 다로인 것으로 밝혀졌으나 배후를 추궁하던 중 그녀가 의문의 복면인에 의해 피살(被殺)당했다는 사실을 알리는 내용이었다.
비로의 의심이 다로를 향하고 있으니 그쪽에서는 당연히 꼬리를 잘라 내야 한다 생각했을 것이다.
도구로 쓰이기 위해 태어났다더니 결국 그쪽에서도 버림을 받은 건가.
겨울날 눈 위를 함께 뒹굴었던 다로의 환한 미소가 머릿속을 스쳐 갔다. 뒤이어 제신을 좋아한다고 담담하게 말하던 목소리와 도구로 쓰이기 위해 태어났다는 자학까지 떠오르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건 고구려 밖 모든 세작들에게 보내는 공식적인 서신이고, 이건 제신이 내게만 보낸 개인적인 서신이다.”
무거운 마음으로 서신을 읽고 있던 내게 운이 다른 서신 하나를 더 펼쳐 보였다. 다로를 죽인 복면인의 팔에 독특한 문양이 새겨진 것을 보았는데, 혹 운이 알고 있느냐는 내용이었다.
서신에는 제신이 그려 넣은 것으로 보이는 문양이 함께 그려져 있었다. 화살을 타고 올라가는 두 마리의 용.
“소노부 수장의 인정을 받은 용사들의 상징이다.”
운이 담담하게 말하며 제 상의를 살짝 끌어 내렸다. 그의 왼쪽 쇄골 근처에 서신에 그려진 것과 똑같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소노부의 용사들 중에서도 무예에 능하고 부족에 충성하는 자들에게만 새기지.”
“그런 문양을 가진 자가 다로를 죽였다면 이번 일의 배후는 역시…….”
“그래. 소노부다. 예상했던 일이니 놀랍지는 않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운의 심경은 복잡해 보였다.
운이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내 아버지께선 원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하시는 분이야. 아들인 내가 누구보다 잘 안다. 금방 또 다른 수를 찾아내 원하는 것을 손에 넣으시겠지. 폐하에게는 큰 악재야. 상대는 권력을 가졌는데 간자가 죽어 버려 증거마저 사라졌으니 몰아낼 방법도 요원해. 앞으로도 힘든 싸움을 하실 거다.”
운이 전령새를 하늘로 돌려보내며 작게 중얼거렸다.
몸통을 찾지 못하고 꼬리만 잘라 낸 격이니 언제든 새로운 간자가 나타나 그의 눈을 흐리게 할 터. 그의 말처럼 담덕은 여전히 힘든 시간을 보낼 것이다.
“그 와중에 위안이 되는 사람마저 잃으셨으니 많이 힘드시겠지.”
멀리 날아가는 새를 응시하던 운이 고개를 돌려 나와 연을 보았다.
“아직도 돌아갈 생각이 없어? 그분의 곁으로. 아이까지 낳으면 마음이 바뀔 줄 알았는데.”
벌써 몇 번이나 들은 질문이었다. 운은 고구려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내게 아직도 돌아갈 생각이 없느냐고 묻곤 했다.
그때마다 내 대답은 똑같았다.
“한번 땅 위로 솟아난 약점은 무슨 수를 써도 덮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의 말 한마디가 양분이 되어 자라고 또 자랄 뿐이죠. 그러니 제가 없는 것이 모두에게 좋아요. 자기 귀환을 말할 때가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비난도 없는 법이죠. 보십시오. 제가 여기 있으니 괴이한 소문들도 쓸모가 없어졌잖습니까.”
내 말을 진지하게 듣고 있던 운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참으로 우습지 않아? 너와 비녀 하나를 두고 실랑이를 벌이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네가 그런 말을 하는 어른이 다 됐는지.”
“무슨 그런 감탄을 하십니까? 어른은 오래전에 됐습니다.”
“몸만 자랐다고 다 어른이더냐? 늘 천방지축에 말괄량이 아가씨인 줄로만 알았는데 네가 어느새 이렇게…….”
운이 내 품에 안긴 연을 빤히 바라보았다. 내가 한 아이의 어머니가 되었다는 것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사실은 나조차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언젠가…….”
운이 연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어떤 약점도 폐하를 흔들 수 없는 날이 올 것이다. 반드시 그런 날이 와. 그럼 너는 긴 외유를 끝내고 그분의 곁으로 돌아가겠지. 그날엔 이 아이가 태자가 될 것이다. 나는 너와 그분께 마음의 빚이 있는 몸이니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아이를 지킬 거야.”
기묘한 확신이 담긴 다짐이었다. 나처럼 미래를 아는 것도 아니면서 운은 그렇게 확신했다.
우리의 확신처럼 담덕이 어떤 약점에도 흔들리지 않는 날은 반드시 올 것이다. 그날에 역사가 선택한 담덕의 황후와 훗날 장수왕이 될 그의 아이가 정말로 나와 연일까?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히 보인다. 그분의 마음을 믿지 못하는 거냐?”
“제가 믿지 못하는 건 그의 마음이라 시간입니다. 강물처럼 쉼 없이 흐르는 세월에 변하지 않는 건 없어요. 비녀 하나를 두고 실랑이를 벌였던 어린애가 이렇게 한 아이의 어머니가 된 것처럼요.”
“세월이 흘렀는데도 변하지 않으면? 그럼 그건 뭐지?”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하다면…….”
나는 눈을 아래로 내리깔며 오래도록 나를 두렵게 했던 의문을 떠올렸다.
“제가 오래도록 품었던 의문이 있습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고, 앞으로도 말할 수 없을 의문이지요. 고민하고 또 고민했지만 답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역사를 엉망으로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로 인해 내가 알고 있던 모든 것이 뒤바뀌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세월이 흘렀는데도 서로의 마음이 여전하다면 그것이 제 오랜 의문의 답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운명이 허락한 것이라 생각하고 오로지 제 마음만 생각할 수 있겠죠.”
“나는 그대가 품고 있는 의문을 몰라. 그러니 그 답이 무엇인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것 하나는 확실히 알겠어.”
아이를 바라보던 운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마주한 두 눈에는 여전히 강한 확신이 담겨 있었다.
“그대는 분명 마음이 허락하는 대로 살게 될 거야.”
“어째서 그렇게 확신해요?”
“그대가 흔들려도 폐하께서는 흔들리지 않으실 테니까. 그분은 태산 같은 분이시거든.”
운의 확신에 비식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나를 향한 비웃음이었다.
“우습네요. 평생 가까워질 수 없을 거라던 그쪽은 확신하는데, 누구보다 가까이 있다 생각했던 나는 확신하지도 못하잖아요.”
그래서 처음부터 이 일이 도박이라고 말한 것이다. 확실한 일에는 도박이라는 말을 쓰지 않으니까.
“원래 그런 법이야. 가까워서 보이지 않는 것이 있고, 간절할수록 불안함은 커지지. 하지만 난 가깝지도 간절하지도 않아. 그래서 볼 수 있어. 그렇게 때문에 나는…….”
나는 이어질 말을 기다리며 운을 보았지만, 그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그의 침묵과 함께 서서히 봄이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