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장. 연(璉) (1)
가을을 지나 겨울이 깊어졌다. 곧 새해를 맞이하는 1년의 마지막. 영락 4년 12월이 다가왔다. 고구려를 떠난 지도 벌써 몇 개월이 지난 것이다.
고구려의 상황은 어떨까? 담덕과 가족들은 나를 찾고 있겠지. 매일 밤 복잡한 생각에 머리가 아파 왔지만 지금은 당장의 오늘을 살아가야만 했다.
안주인인 이리 부인이 나를 귀하게 대해 준 덕분에 신라 생활은 생각보다 편안하게 흘러갔다.
하지만 갑자기 집안에 들어온 이방인에 대한 하인들의 경계심은 대단했다.
특히 오랫동안 부인을 옆에서 모셨다는 하녀들은 갑작스러운 경쟁자의 등장이 마뜩잖은 것 같았다. 덕분에 나는 마냥 마음 편하게 시간을 보낼 수만은 없었다.
어느 곳에서든 잘 지내려면 높은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도 중요했지만, 실질적으로 일을 봐주는 이들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사람들과 잘 지내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야 뻔했다. 바로 의술이었다.
재주라고는 사람의 건강을 살피는 일뿐이었으니, 여기서도 그 재주를 이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정말 이리하면 손이 나아져요?”
주변에 동그랗게 모인 하녀들이 미심쩍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매일 빨래며 설거지를 하느라 손이 습진으로 엉망이기에 나아지는 방법을 알려 주었는데, 아직 낯선 나의 말에 따르는 것이 거부감이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밑져야 본전이잖아요. 속는 셈 치고 딱 보름만 해 봐요. 이 물로 꾸준하게 손을 씻으면 아픈 게 훨씬 나아질 거예요. 아침에 한 번, 저녁에 한 번. 하루에 딱 두 번씩만요.”
자신감이 느껴지는 나의 말에 조금 흔들렸는지 모여 있던 하녀들 중 하나가 내게 물었다.
“그게 무슨 물이기에 그리 신통방통한 효과가 있는데요?”
“황백(黃柏)을 달인 물이에요. 황백이라는 약재가 습진과 가려움증에 좋거든요. 양지(陽池)에 쑥뜸도 함께 뜨면 효과가 더 좋고요. 마침 쑥뜸을 몇 개 만들어 놓았는데, 혹 관심이 있으면 떠 줄게요.”
질문을 던진 하녀가 주위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더니 불쑥 손을 내밀었다.
“해 볼래요!”
한 사람이 나서니 그 뒤로 다른 하녀들도 우르르 손을 내밀었다.
“나도 해 줘요.”
“나도 한번 해 볼래요.”
“여기 있는 분들 모두 할 정도는 있으니 너무 서두르지 않으셔도 돼요. 여기 편안히 앉아 보시겠어요? 지금 떠 드릴게요.”
내게 날을 세우던 하녀들이 호기심 어린 눈을 하고 나란히 자리에 앉았다. 새로운 사람을 경계하기는 했으나 기본적으로 순박한 사람들인 것 같았다.
나는 웃으며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하녀들의 손에 뜸을 올렸다. 손등 쪽 손목 부분의 중앙, 양지에 뜸을 뜨면 손의 습진이나 두드러기 해소에 좋았다.
“뜸이 다 타려면 시간이 걸리니 그 참에 조금 쉬세요.”
“오래 걸리나요?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우면…….”
하녀 하나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나는 웃으며 일부러 목소리를 낮춰 그들에게 속삭였다.
“부인께서 뭐라고 혼을 내시면 제가 붙잡았다고 하세요. 다 이해해 주실 거예요.”
비장하게 속삭이는 나의 목소리에 하녀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지금 보니 아가씨가 넉살이 참으로 좋으시네요. 도련님이 일부러 보낸 분이시라기에 깍쟁이인 줄로만 알았거든요.”
“아가씨라니요. 그저 부인께 신세를 지고 있는 사람인데 그런 호칭은 과합니다. 그냥 소진이라고 불러 주세요.”
“어휴, 큰일 날 소리를! 마님께서 귀한 손님이니 잘 모시라고 했어요.”
나는 종종 이리 부인에게 실성이 고구려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그가 지내고 있는 고구려가 어떤 곳인지를 이야기하며 함께 시간을 보냈다.
내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꽤 흥미로웠는지 저녁 늦게까지 환담(歡談)이 이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따뜻한 남쪽의 왕경과 추운 북쪽의 국내성은 분위기며 문화가 완전히 달랐다. 그런 차이들이 평생을 신라에서 살아온 부인에게는 재미있게 느껴지는 듯했다.
고작 이야기 몇 개로 귀한 손님 취급을 받으니 굉장히 민망했다.
내가 어색하게 웃음을 흘리는 사이 하녀들은 자기네들끼리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나저나 그 이야기 들으셨습니까? 연리 아가씨의 새 글 선생이 미남이라고 하녀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연리는 이리 부인이 늦은 나이에 얻은 딸로 올해 아홉 살의 어린 아가씨였다.
아들을 멀리 보낸 부인이 애지중지 귀하게 키우는 바람에 굉장한 응석둥이로 자라 그녀를 모시는 하녀들이 고생이 많다고 했다.
까탈스러운 아가씨의 응석을 버티지 못하고 글 선생도 몇 번이나 바뀌었다는데 며칠 전에 새로 온 글 선생이 하녀들 사이에서 화제였다. 물론 내가 아주 잘 아는 인물이었다.
‘해운, 이 사람은 뒤에서 여자들이 이러는 걸 전혀 모른단 말이야?’
난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며칠 전 운은 ‘도림’이라는 이름의 글 선생으로 이리 부인의 저택에 들어왔다. 정체를 감추고자 성문사의 어린 스님 도림의 이름을 빌려 온 것이다.
그가 저택에 들어온 날부터 하녀들이 소란스러워졌다.
잘생긴 미혼의 글 선생이 왔다고 신이 나서 떠드는 것을 보니 고등학교 시절 잘생긴 교생 선생님을 보며 소란을 피웠던 친구들이 떠올랐다. 남자 보기가 힘든 여고에서 잘생긴 교생 선생님은 연예인 이상의 인기를 끌었다.
이곳 이리 부인의 저택도 여고와 분위기가 비슷했다.
연리를 낳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인 대서지가 죽자 집안의 위세가 크게 꺾였다. 현왕의 아들을 대신해 조카인 실성이 고구려에 볼모로 보내진 것도 가장을 잃은 가문의 설움이었다.
실성까지 고구려로 떠나자 저택에는 이리 부인과 어린 딸 연리만 남았다.
여인들만 머무르는 저택이다 보니 소수의 일꾼을 제외하면 집안의 종들도 대부분 하녀였다. 그나마 있는 남자 일꾼들은 모두 나이가 찬 노인들뿐이었다.
그런 집에 젊은 글 선생이 등장했으니 하녀들이 오랜만에 신이 난 것이다. 뜸을 뜨며 하녀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으니 그중 하나가 조심스럽게 내게 말을 걸었다.
“아가씨는 그 잘난 글 선생에게 관심이 없어요?”
“저요?”
“예. 저희야 하녀이니 그저 눈요기나 할 뿐이지만 아가씨는 다르시잖아요. 부인께서 귀하게 대하시는 것을 보면 좋은 집 아가씨가 사정이 있어 이곳에 머무르는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며 하녀가 이제 눈에 띄게 불러 온 내 배를 바라보았다. 산달이 점점 가까워져 배가 부르니 이제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내가 임신한 것을 알아챘다.
이 집에 머무르는 하인들도 모두 내가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 것을 알면서도 사내를 꾀어내라니.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애를 밴 사람이 어찌 낭군을 두고 다른 사내에게 눈을 돌려요?”
“무슨 소리예요! 낭군이 제대로 된 사람이면 이리 혼자 왔겠어요? 홀로 애를 뱄으니 더 다른 사내를 붙잡아야죠. 이 험한 세상에 여인 혼자 어찌 아이를 키웁니까?”
“그래서 저더러 그 글 선생을 꾀어내라고요?”
“할 수만 있으면 그러는 게 좋지요!”
하녀들이 이구동성으로 입을 모았다.
“무슨 이야기를 그리 재미있게 하십니까?”
그때 뒤에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끄럽게 떠들던 하녀들이 놀라서 입을 꾹 다물었다. 하필 나타난 사람이 화제의 중심이었던 운이었다.
“글 선생께서 어찌 여기에 오셨습니까?”
당황한 하녀들을 대신해 물었더니 운이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연리가 아가씨를 찾습니다. 어제 하던 놀이를 마저 해야 한다고 하던데요?”
어제 연리와 했던 놀이라면 오목이었다.
요즈음 연리는 운에게 글과 함께 바둑을 배우고 있었는데, 글은 하루가 다르게 느는 반면 바둑 실력은 제자리걸음이었다. 실력이 늘지 않으니 흥미도 뚝 떨어져 기반(棋盤) 앞에 앉는 것도 싫어했다.
그런 연리를 기반 앞에라도 앉히자 싶어 시작한 것이 오목 놀이었다. 바둑알 다섯 개를 먼저 놓으면 되는 오목은 단순하면서도 머리를 써야 하는 놀이라 연리가 꽤 재미를 붙였다.
매일같이 찾아와 오목 놀이를 하자고 조르기에 바둑 공부를 성실하게 마치면 상대가 되어 주겠다고 했었지.
연리가 과연 그 약속을 지킨 것인지 궁금했다.
“오늘 바둑 공부는 제대로 다 마쳤나요? 공부를 다 하지 않으면 함께 놀아 주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았는데.”
“어쩐지 연리가 쉬지도 않고 바둑 공부를 하는 것이 이상하다 했더니. 아가씨가 손을 쓰신 게로군요.”
이곳에 온 이후로 운은 내게 높임말을 썼다. 모르는 사람인 척하려는 의도는 알았지만 괜히 낯간지러운 기분이었다.
나는 하녀들의 손에서 뜸을 내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연리에게 가 볼게요.”
“아닙니다. 제가 연리가 있는 곳까지 모셔다 드리죠. 방이 아니라 다른 곳에 있거든요.”
“방이 아니라 다른 곳에 있다고요?”
“예. 따라오시면 알 겁니다.”
앞장서서 걷기 시작하는 운을 따라 움직였더니 뒤에서 하녀들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작게 수군대는 탓에 뭐라고 하는지는 들리지 않았지만, 조금 전까지 나누던 이야기가 있었기에 그들이 어떤 말을 나누는지는 뻔히 알 수 있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뒤쪽을 힐끗거렸다.
“일부러 이러시는 겁니까?”
“뭐가 말이냐?”
내가 작게 속삭이자 운이 슬쩍 웃으며 나를 보았다. 듣는 사람이 없다고 그의 말은 어느새 반말로 바뀌어 있었다.
“하녀들이 뭐라고 수군대는지 알고 있으면서 일부러 이러시는 거죠?”
“왜? 또 시녀들이 나를 꾀어내 살림이라도 차리라고 하더냐?”
“그걸 잘 아시는 분이 왜 자꾸 이러십니까? 그쪽도 저런 소문이 도는 게 싫으실 것 아니에요.”
“이런 소문이라도 없으면 하녀들이 이 무료한 생활을 어찌 견디겠어? 그런 소문의 대상이 되어 주는 것도 사내의 미덕이지.”
“그쪽의 미덕을 위해 저까지 희생해야 합니까?”
“뭘 그리 대단한 희생을 한다고 생색이야?”
그렇게 운과 투덕대다 보니 저 멀리서 연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진 언니!”
고개를 돌리자 연리가 정원의 커다란 나무 아래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 옆에 기반까지 놓인 것을 보니 오늘은 방이 아닌 정원에서 바둑 수업을 한 모양이었다.
“선생께서 잘 이야기해 주셨지요? 제가 오늘 바둑 수업을 열심히 들었다고요.”
“그래. 다 들었다. 참으로 기특해.”
“제가 약속은 꼭 지킵니다.”
연리가 뿌듯한 얼굴로 웃으며 나를 기반 앞으로 잡아끌었다. 몸이 무거워 휘청거리니 옆에서 운이 나를 붙잡으며 연리를 꾸짖었다.
“연리. 소진 아가씨는 아이를 가져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한다고 하지 않았니.”
“마음이 급해서 그랬습니다. 소진 언니는 가만히 있는데 왜 선생께서 저를 나무라세요?”
연리가 입을 비죽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렇지요, 언니?”
“그러게나 말이다. 네 글 선생은 참으로 참견이 심한 사람 같구나. 그런 사람을 스승으로 모시게 되었으니 참으로 고생이 많아.”
“어휴. 그런 사정을 이해해 주는 사람은 언니뿐이에요. 다들 좋은 선생을 만나 좋겠다고만 하니…….”
“다들 선생의 실체를 모르는 게지.”
“맞습니다! 글공부를 할 때도 제대로 대답을 못하면 어찌나 무섭게 다그치시는지……. 저를 부럽다고 하는 하녀들도 한번 수업을 들어 봐야 합니다. 그러면 선생의 실체를 알게 될걸요!”
나와 연리의 공세에 운이 아무런 대꾸도 못하고 헛웃음을 흘렸다. 성공적인 협공에 나와 연리가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 * *
“여기에 놓으면 또 내가 먼저 다섯 개를 놓았구나.”
“또요?”
연리가 기반에 얼굴을 바짝 들이댄 채 소리쳤다.
“아니, 도무지 모르겠네. 어쩌다 검은 돌이 벌써 다섯 개가 되었지?”
“네 돌을 쌓느라 방어를 소홀히 하니 내가 그 틈을 들어간 것이지. 공격과 방어 모두를 신경 써야 승리할 수 있는 거야.”
“사람이 어찌 두 가지 모두에 신경을 기울일 수가 있어요? 전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이래서 제가 바둑에 재능이 없나 봐요. 선생과 바둑을 두면 매번 집니다.”
“바둑은 네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선생이 너무 잘해서 그렇다. 누가 두더라도 선생을 이기기는 힘들걸.”
“언니도 선생과 바둑을 둬 본 적이 있어요?”
기반을 보던 연리가 고개를 번쩍 들어 눈을 깜빡였다.
“네가 선생과 수업하는 모습을 보았지. 아주 실력이 대단하시던데.”
대충 연리의 말을 웃어넘겼더니 그녀가 자세를 바로 하며 눈을 반짝였다.
“그럼 한번 둬 보세요!”
“바둑을? 내가 선생과?”
“네!”
연리가 옆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운의 팔을 잡아당겨 제가 앉아 있던 자리에 그를 앉혔다.
“어서요! 다른 사람의 바둑을 보는 것도 좋은 공부가 된다고 선생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오늘 그 구경을 시켜 주십시오.”
기반에 있던 돌을 치우고 눈을 반짝이는 모습을 보니 어떻게든 우리의 대결을 보고 싶은 모양이었다.
어찌할까요?
운에게 눈짓으로 물었더니 그가 대답 대신 하얀 돌을 손에 쥐었다.
“아가씨께서 저를 상수로 봐 주셨으니 제가 백돌을 쥐지요. 몇 수 접고 시작하시겠습니까?”
“그럼 세 개만 깔겠습니다.”
“세 개로 되시겠습니까? 여섯 개는 깔아 두시죠.”
“저를 뭘로 보시고. 저도 제법 바둑 솜씨가 좋습니다.”
“그렇습니까? 이 ‘도림’을 석 점 깔고 이길 수 있을 만큼 좋다는 거지요?”
운이 일부러 ‘도림’이라는 이름을 강조했다. 그가 성문사에 지낼 때 도림 스님에게 바둑을 가르쳤는데, 나는 그가 바둑을 가르친 도림 스님에게도 이긴 적이 거의 없었다. 도림 스님마저 이기지 못한 내가 자신을 이길 수 있겠느냐 묻고 있는 것이다.
“시작이나 합시다, 도림 선생.”
나는 괜히 약이 올라 기반 위에 검은 돌 세 개를 올려놓았다. 거칠게 기반 위에 얹힌 돌 세 개를 보며 운이 픽 하고 웃었다.
“원하신다면 시작하지요.”
본래 바둑은 냉정하게 미래의 수를 내다보는 경기였다. 잔뜩 열이 오른 채 시작한 나도 바둑을 두면 둘수록 머릿속이 차분해졌다.
일부러 나를 자극하며 놀리던 운의 입에서도 점차 미소가 사라졌다. 우리는 바둑에 집중해 신중하게 한 수, 한 수를 놓았다.
운과 마주 앉아 한가로이 바둑을 두고 있으니 이곳이 신라가 아닌 고구려처럼 느껴졌다. 고요한 성문사의 정자에 앉아 바둑을 두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고구려의 겨울에 비해 한참이나 따뜻한 이곳의 날씨가 내가 있는 장소를 실감하게 했다.
이곳은 신라의 왕경이었다. 나는 소중한 사람들을 모두 두고 이곳으로 왔다.
모두를 등지고 떠난 내 곁을 지키는 사람이 운이라는 사실이, 그런 그와 함께 여유롭게 바둑이나 두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우스웠다.
머릿속의 생각들이 복잡하게 얽혀 들어간 탓이었는지, 아니면 원래 나의 실력이 모자란 탓이었는지 기반 위의 전세는 점점 내게 불리해졌다.
수를 놓는 시간이 조금씩 길어지는 나에 비해 운은 여전히 짧은 시간에 돌을 내려놓았다. 흔들림 없는 그의 태도에 내 마음만 초조해졌다.
조급하게 굴다 보니 자연스레 실수가 생겼다. 그러자 그렇지 않아도 불리했던 전세는 완전히 기울어져 결국 나는 돌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졌습니다.”
“잘 두었습니다. 역시 석 점만 깔고는 무리지요?”
운이 얄밉게 웃으며 우리를 구경하고 있던 연리에게 시선을 돌렸다.
“자. 우리가 둔 바둑이 공부가 되었…….”
하지만 운의 말은 마무리되지 못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연리가 있던 자리가 텅 비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연리야?”
나는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얌전히 바둑을 구경하고 있을 줄 알았던 연리가 그새를 참지 못하고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김연리!”
운도 다급하게 연리를 불렀지만 어디서도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아이가 사라졌음을 깨닫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너무 불안해하지 마라. 연리가 이런 식으로 사라지는 것이 한두 번이 아니거든. 툭하면 수업이 듣기 싫다고 구석으로 숨어드는데, 오늘도 그 버릇이 나온 것 같다.”
운이 내 어깨를 토닥이며 나의 불안을 달래 주었다.
“어차피 밖으로는 나가지 못했을 테니 집 안에 있을 거야. 천천히 찾아보자. 너는 하녀들에게 말을 전해. 연리가 또 숨었다고.”
“예. 알겠습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운이 먼저 움직여 연리를 찾기 시작했다.
나도 연리를 돌보는 하녀들에게 그녀가 사라졌다는 말을 전했다. 운의 말처럼 연리가 숨어드는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는지, 하녀들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제 아가씨를 찾아 나섰다.
“분명 어디 나무 위나 지붕 위에 올라가 있을 겁니다.”
“나무나 지붕 위요?”
“예. 아가씨께서 나무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타시거든요.”
하녀 하나의 말을 듣고 주위를 보니 다들 고개를 위로 들고 연리를 찾고 있었다. 그 풍경이 우스워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연리야!”
한 차례 웃음을 흘린 뒤 나도 하녀들의 행렬에 합류했다. 고개를 위로 들어 높은 곳을 살피여 연리를 불렀지만 한참이 지나도 그녀를 찾을 수가 없었다.
시간이 점점 지체되자 태평하던 하녀들의 얼굴에도 불안이 내려앉았다. 초조하게 행동을 재촉하는 하녀들을 보니 가슴속에 자책감이 밀려왔다.
바둑에 정신이 팔려서 연리를 전혀 신경 못 썼어. 태평하게 바둑이나 두고 있을 때가 아니었는데.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집 안 곳곳을 뒤졌다. 여기저기서 나처럼 연리를 찾고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한참을 헤매고 있으니 순간 뒷골이 서늘해졌다.
잠깐. 처음에 운 도령과 바둑을 두던 곳에도 큰 나무가 있었잖아.
나와 운이 함께 있던 곳에는 당연히 연리가 없을 거라는 생각에 누구도 그곳을 찾지 않았다.
분명 거기 있을 거야.
연리가 그곳에 있으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나는 빠르게 발걸음을 놀려 바둑을 두던 자리로 돌아왔다.
기반이 놓인 커다란 나무 아래에 서 위를 바라보니 예상대로 연리가 있었다. 사철 푸른 소나무 위에 기대어 앉은 그녀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순간 안도의 한숨이 나옴과 동시에 걱정이 들었다. 저렇게 졸다가 아래로 떨어지면 크게 다치게 될 것이다.
“김연리!”
다급하게 이름을 불렀지만 깊게 잠에 빠져든 것인지 연리는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몇 번이나 더 이름을 불러도 마찬가지였다.
“연리야!”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크게 연리의 이름을 불렀다. 이번에도 반응이 없으면 나무를 탈 수 있는 사람을 데려올 생각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이번에는 연리에게 반응이 있었다. 느리게 눈을 뜬 연리가 손으로 눈을 비비더니 길게 하품을 했다.
“우응…….”
그것이 문제였다. 연리가 비몽사몽에 몸을 움직이느라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연리야!”
“으앗!”
경고의 말을 채 꺼내기도 전에 연리의 몸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떨어지는 연리를 받아 냈다.
“윽!”
무사히 연리를 받아 낸 대신 엄청난 충격이 내 몸에 내리꽂혔다. 연리가 또래에 비해 작고 가벼운 편이긴 했지만 위에서 떨어지는 사람을 받아 내는 충격이 보통이 아니었다.
나는 연리를 안은 채 그대로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리고 식은땀이 흘렀다.
“어, 어어, 어어엉!”
놀라서 꺽꺽대던 연리가 곧 상황을 파악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그 소리에 연리를 찾고 있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몰려들었다.
“연리 아가씨!”
나는 기겁해서 뛰어오는 하녀들에게 연리를 넘겨주며 상황을 설명했다.
“연리가 나무 위에서 잠이 들었나 봐요. 제가 불렀더니 순간 중심을 잃어서 떨어지는 바람에……. 그래도 아래에서 잘 받았으니 크게 다치지는 않았을 거예요. 많이 놀라서 울음이 터진 것 같으니 잘 달래 줘요.”
“예. 알겠습니다.”
내 말에 하녀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다 찌푸려진 얼굴로 나를 빤히 보았다.
“그런데 떨어지는 연리 아가씨를 받으셨다고요? 하면 충격이 상당하셨을 터인데……. 아가씨께선 괜찮으세요?”
하녀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녀의 걱정을 덜어 주고자 웃으며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줘 자리에서 일어섰다.
“괜찮아요. 놀라서 힘이 빠지긴 했지만…….”
하지만 내 마음과 달리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다시 주저앉으려는 나를 어느새 내 곁에 다가온 운이 붙잡았다.
“식은땀이 심하게 흐르는데 정말 괜찮은 겁니까?”
운의 질문과 함께 이상하게 배가 조여 왔다.
괜찮다고 대답을 하고 싶은데 조용히 시작된 통증이 점점 심해져 도무지 입이 열리지 않았다.
“……아가씨.”
입술을 질끈 깨무는 나를 보며 운의 얼굴이 대번에 심각해졌다. 나는 그의 옷을 꽉 틀어잡으며 겨우 입을 뗐다.
“배…….”
“배? 배가 아픕니까?”
“네. 배가 너무…….”
이번에도 끝까지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인가!”
그때 저 멀리서 소란을 전해 들은 것인지 이리 부인이 다급하게 달려왔다. 그녀는 울고 있는 연리를 두고 곧장 내게로 달려와 나의 상태를 살폈다.
빠르게 내 몸을 살피던 이리 부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산달이 아직 남았다 하지 않았나?”
이리 부인의 말처럼 산달은 두 달 후였다. 겨우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을 표했더니 그렇지 않아도 굳어 있던 이리 부인의 얼굴이 더욱 심각해졌다.
“한데 벌써 양수가 터진 것 같네.”
그제야 아래가 축축하게 젖은 느낌이 들었다. 양수가 터졌다는 것을 인식하자마자 통증이 더욱 심하게 느껴졌다.
“흐윽.”
입술을 질끈 깨물며 배를 감싸 쥐자 당황한 얼굴로 서 있던 이리 부인이 다급하게 외쳤다.
“선생, 소진이를 방 안으로 옮겨 주시겠습니까?”
“예. 그리하겠습니다.”
운이 대답과 동시에 나를 안아 들었다. 조심스럽지만 신속한 손길이었다.
그에게 안겨 방으로 향하는 동안 뒤쪽에서 이리 부인의 목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너는 어서 산파를 데려와라. 산달이 아직 남았는데 벌써 양수가 터졌으니 한시가 급한 상황이야. 서둘러라, 어서!”
“예, 부인!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다급한 사람들의 목소리 때문이었는지 주변의 공기마저 다급하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조산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었다. 특히나 이 시대에는 아이를 낳다가 죽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나라고 그런 상황을 피해 갈 수는 없을 터. 기이한 불안함과 소란 속에서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 * *
시간이 갈수록 진통이 심해졌다. 정신을 제대로 차릴 수도 없을 만큼 심한 고통이었다.
사람이 이렇게 아플 수도 있어?
제정신이 아닌 와중에도 나는 속으로 소리를 질러 댔다. 그중에는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할 욕설도 섞여 있었다.
출산의 고통이 손발이 잘리는 것만큼이나 심하다는 말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는데 이제는 확실히 말할 수 있었다. 비록 손발이 잘려 본 적은 없지만 출산은 그에 버금가는 엄청난 고통이 확실했다.
내가 왜 애를 가져 가지고!
엄청난 고통에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왔다. 애를 가지게 만든 담덕도 얄미워 죽을 것 같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원망할 상대가 곁에 없다는 것이 서러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내가 자초한 일임을 알면서도 서러움에 눈물이 줄줄 흘러나왔다.
“아이고, 세상에! 벌써 이렇게 됐네!”
아파서 어쩔 줄 모르는 나를 두고 막 방으로 들이닥친 산파가 펄쩍 뛰었다.
“따뜻한 물하고 깨끗한 수건 좀 가져와요! 탯줄 자를 가위도!”
그녀의 지시에 따라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모두가 바쁜 와중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소리를 지르며 고통에 시달리는 것뿐이었다.
그때 이리 부인이 내 손을 꽉 잡아 주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너무 걱정 말게. 다 잘될 거야. 실성과 연리를 모두 받아 준 산파이니 실력이 확실해. 그러니 산파의 말을 믿고 그대로 따르기만 하면 금방 아이가 나올 것이야. 자네가 힘을 내야 무사히 아이를 만날 수 있어. 알겠지?”
나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것처럼 산파의 지시가 이어졌다.
“아파도 다리를 오므리면 안 돼요. 그러면 아기가 나오다 크게 다칠 거예요. 대신 무릎 뒤쪽을 붙잡고 힘을 줘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참고 있다가 내가 힘을 주라고 하면 그때 아래에 힘을 주면 돼요. 이해했어요?”
배가 아파서 제대로 알아들은 것은 절반뿐이었지만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산파도 내 말을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이 정도로 정신이 없으면 제 말을 듣지도 못한다는 것을 아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산파는 지시를 멈추지 않았다.
“자, 숨을 들이마시고 그대로 멈춰요.”
산파의 말에 따라 숨을 들이마셨지만 그 이상은 무리였다.
아파 죽겠는데 어떻게 숨을 참아!
억울했지만 그 억울함을 토로할 새도 없이 산파의 다음 지시가 이어졌다.
“이제 힘을 줘요! 그래, 잘하고 있어요!”
그 뒤로 한참이나 같은 지시가 반복되었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잠시 참은 뒤에, 산파의 외침에 맞춰 힘을 준다.
그럴 때마다 산파는 ‘얼마 남지 않았다’거나 ‘이제 아이가 나온다’는 말을 했다. 하지만 그 뒤로도 한참이나 같은 지시가 이어진 것을 보면 모두 내게 힘을 주기 위한 거짓말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 선의의 거짓말이 내게 힘을 주었다. 너무 힘들어 이대로 포기하고 싶다가도 이제 아이가 보인다니 조금만 더 힘을 내 보자는 결심이 들었다.
“거의 다 됐어요! 이제 아기 머리가 보여요!”
이번 말은 조금 달랐다. 본능적으로 이제 곧 아이가 나올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나는 있는 힘껏 아래에 힘을 주었다. 산파가 배를 눌러 그런 나를 도왔다.
그 순간 아래에서 무엇인가가 쑥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동시에 아이의 울음소리가 요란하게 귓가를 울렸다. 산파도 감탄할 정도로 큰 울음소리였다.
“산달도 다 못 채우고 나온 놈이 목청 하나는 좋네. 사내아이예요. 울음소리가 쩌렁쩌렁한 것이 나중에 대단한 장군이 되겠어요.”
산파가 탯줄을 잘라 낸 뒤 아이를 천에 감싸 내 가슴 위에 올려 주었다. 밭은 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이니 작은 아이가 손을 꼼지락거리며 울고 있었다.
이게 내가 낳은 아이…….
기분이 이상했다. 손을 뻗어 아이의 따뜻한 뺨을 매만지니 더욱 기분이 이상해졌다.
“빨리 나온 아이치고 상당히 크고 건강한 편이에요. 산모도 문제가 없고. 조산인데 두 사람 다 이렇게 멀쩡한 건 흔치 않은 일이에요. 하늘이 도우신 게지요.”
아이가 건강하다는 말에 긴장의 끈이 풀리며 몸이 나른해졌다.
느리게 눈을 깜빡이니 이리 부인이 여전히 붙잡고 있던 내 손을 쓰다듬었다.
“고생했네. 큰일을 해냈어. 이제 걱정 말고 푹 쉬게. 자네가 잠시 눈을 붙이고 있는 동안 아이는 내가 잘 봐 줄 터이니.”
그 말을 듣는 순간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나는 그대로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들었다.
* * *
산파의 말처럼 아이는 산달을 채우지 못한 것치고 체구가 크고 건강했다.
이리 부인은 아이를 보고는 열 달을 다 채우고 나온 아이 같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골이 장대한 제 아비를 닮은 거겠지.
나는 어쩔 수 없이 담덕을 떠올렸다. 그간 애써 잊고 지냈던 얼굴이었지만 아이를 낳고 나니 담덕의 얼굴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그 뒤로 돌아가신 아버지와 제신, 기억에도 없어 내 멋대로 상상한 어머니의 얼굴이 스쳐 갔다.
그럴 때마다 나는 외로워져 아이를 품에 꼭 안았다. 따뜻한 아이의 체온을 느끼고 있으면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마음이 놓였다.
아이의 이름은 연(璉)으로 정했다. 논어의 공야장(公冶長)에서 따온 이름으로, 호련(瑚璉 : 제사 지낼 때 쓰는 옥으로 만든 귀한 그릇)에 비할 만큼 그릇이 큰 사람이 되라는 뜻이 있었다.
공자의 제자 중 자공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는 학식이 뛰어난 정치가로 이름을 날린 사람이었다.
어느 날 자공이 스승에게 자신이 어떤 사람이냐고 묻자 공자가 망설임 없이 그를 ‘호련’이라 말했다.
나는 아이가 그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바랐다.
아이의 이름을 들은 이리 부인은 참으로 좋은 작명이라며 몇 번이나 아이의 이름을 불러 주었다. 좋은 이름은 많이 불릴수록 복을 가져온다는 그녀의 믿음 때문이었다.
출산 후 삼칠일 동안은 이리 부인과 하녀 한 명만 방을 드나들었기에 아이의 이름을 불러 줄 만한 사람이 이리 부인밖에 없었다.
하지만 삼칠일이 지나자 제법 많은 사람들이 내 방을 찾았다. 가장 먼저 나를 찾은 손님은 연리였다.
내가 아이를 낳고 쉬는 동안 연리는 내가 자신을 돕다가 조산을 한 거라며 이리 부인에 크게 혼이 났다고 했다.
그래서였는지 나를 찾아온 연리는 잔뜩 기가 죽어 있었다. 나를 보자마자 제일 먼저 한 말도 미안하다는 말이었다.
“제가 왈패처럼 구는 바람에 언니와 아기님이 위험했대요. 죄송해요, 언니.”
“나와 아이 모두 무사하니 미안할 것도 없어. 이럴 땐 축하한다고 하면 되는 거야.”
나의 말에도 연리는 여전히 풀이 죽은 채였다. 나는 웃으며 그녀에게 포로 감싼 아이를 내밀었다.
“한번 안아 볼래?”
“제가요? 아기님을요?”
“아기님에게는 연이라는 이름이 있어.”
“연…….”
연리가 아이의 이름을 작게 중얼거리며 조심스럽게 연을 안아 들었다. 이리 부인에게 신신당부를 들었는지 행동이 아주 조심스러웠다.
“와아.”
아이를 품에 안은 연리가 눈을 크게 뜨며 감탄했다.
“이렇게 작은데 숨을 쉬어요. 손가락도 움직이고, 눈도 깜빡여요!”
이렇게 작은 아이가 살아 움직이는 것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연리도 이런 때가 있었어.”
“저한테도요?”
연리가 내 말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거짓말. 제가 어찌 이렇게 작았어요? 저는 이렇게 큰데. 보세요. 손이 이렇게 큰걸요!”
“나중에 이 아이도 연리처럼 커질 거야. 물론 그때는 연리가 더 커져 있겠지만.”
“네에? 저처럼 커진다고요?”
연리는 도무지 내 말을 믿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심각한 얼굴로 한참이나 아이를 바라보던 연리가 결심했다는 듯 비장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매일 와서 지켜볼래요. 매일매일 언제 커지는지 봐야겠어요. 제가 못 보는 사이에 쑥 커 버리면 큰일이잖아요.”
갓난아이를 본 적이 없는 연리는 아이가 하루 만에 갑자기 커지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아이다운 귀여운 생각이었다.
나는 그녀의 생각을 정정해 줄까 하다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알게 될 일이었다. 아직까지는 그녀의 귀여운 상상을 깨부수고 싶지 않았다.
“참. 제 글 선생께서도 아이가 궁금하신가 봐요. 제게 은근히 아기님에 대해서 물으셨다니까요.”
아이를 안고 있던 연리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이 방에 들어온 이후 운을 만나지 못했다. 갓 해산한 산모의 방에 사내를 들이지 않는 법이니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운은 연리의 글 선생으로 대외적으로는 나와 관계가 없는 사람이었다.
아무리 삼칠일이 지났다고는 해도 그런 사람의 방문까지 허락하지는 않는다.
이제 몸이 조금 나아졌으니 산책도 할 겸 운 도령을 찾아가 봐야겠네.
정신이 없었지만 운이 나를 안고 방까지 데려다준 것은 기억하고 있었다. 늦었지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해야 했다.
그때의 감사 인사를 한다는 이유로 운을 찾아가면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도 이상하지는 않겠지.
그런 계획을 세우고 있으니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궁금함을 참지 못한 연리가 내게 아이를 안겨 주고 문을 활짝 열었다.
“눈이에요!”
열린 문 너머로 하얀 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아마도 올겨울의 첫 번째 눈이었다. 하얀 눈을 보자 자연스럽게 겨울 추위가 매서운 고구려가 떠올랐다.
아마 고구려에는 더 일찍 눈이 내렸겠지? 다들 이제는 눈이 지겹다며 투덜대고 있을 거야.
아마도 제신과 지설이 제일 많이 투덜거릴 것이다. 태림은 평소와 다름없이 하루를 보내고 담덕은 폭설로 곤란해진 민생을 고민하겠지.
나는 멍하니 하얀 눈을 보며 멀리 있을 담덕에게 말을 건넸다. 물론 그에게는 절대 닿지 못할 말이었다.
담덕, 아이가 태어났어.
나는 그 짧은 보고 뒤로도 아이를 낳다 죽을 뻔했다느니, 정말 상상 이상으로 아팠다느니, 울고불고 하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느니 하는 투정을 부렸다. 옆에 있었다면 담덕은 그런 나의 투정을 모두 들어 주었을 것이다.
“언니. 추워요? 문 닫을까요?”
멍하니 밖을 바라보는 내 얼굴이 어두웠던지 연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렇게 춥지 않은걸. 눈 내리는 풍경이 보기 좋으니 조금만 더 열어 두자.”
“역시 그렇죠?”
연리가 웃으며 문 앞에 엎드렸다. 턱을 괴고 바깥 풍경을 바라보던 그녀가 곧 무엇인가를 발견한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큰일 났다.”
연리의 얼굴에 낭패감이 가득했다. 왜 그러는 것인지 몰라 밖을 보니 운이 한숨을 내쉬며 방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김연리. 수업을 빼먹고 어딜 갔나 했더니 여기에 있었구나?”
어쩐지 연리가 오랫동안 내 방에 머무른다 싶더니 글공부를 빼먹고 온 듯했다. 나와 운 양쪽으로 질책 어린 눈빛을 받자 그녀가 억울하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죄송해요. 하지만 아기님이 너무 보고 싶었단 말이에요. 선생도 한번 보세요! 아기가 정말 예뻐요.”
연리가 한쪽으로 비켜서 아이를 가리켰다. 운의 시선이 나와 아이에게 닿았다가 빠르게 연리에게로 옮겨 갔다.
“핑계가 참으로 좋기도 하구나. 그런 소리 말고 어서 네 방으로 돌아가라. 아무리 아기가 보고 싶어도 수업을 빠지면 안 되지.”
“하지만…….”
연리가 불만스럽게 입을 비죽였다.
“연리. 글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앞으로는 문을 열어 주지 않을 거야. 그러면 아기님이 언제 자라는 지도 못 보겠지?”
내가 운의 말을 거들자 연리가 펄쩍 뛰었다.
“그건 안 돼요! 공부하러 갈 테니까 꼭 문 열어 줘야 해요! 알겠죠, 언니?”
“그래. 그러니 공부를 게을리하면 안 된다.”
연리가 내게 몇 번이나 확답을 듣고서야 제 방으로 떠났다. 그 뒤를 따르던 운이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곧 찾아갈게요. 그때 이야기 나눠요.”
“……그래.”
짧은 대답과 함께 운이 돌아서서 멀어지자 문밖의 풍경은 금세 하얀 눈으로 가득 찼다. 나는 추운 줄도 모르고 한참이나 그 풍경을 바라보았다.
하염없이, 한참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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