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낙화유수-23화 (24/38)

21장. 별리(別離)

“담덕!”

“우희?”

집무실에 얼굴을 배꼼 내미는 나를 발견한 담덕이 장계를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얼굴에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소문이 해결되기 전까지 최대한 만나지 않기로 결정을 내린 뒤였으니 나의 갑작스러운 방문이 놀랍기도 할 터였다.

게다가 우리 둘 사이에는 수곡성에서 다투고 헤어진 뒤의 어색함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담덕은 생각지도 못한 방문에 얼떨떨한 얼굴을 하다가 곧 반가운 미소로 나를 맞았다.

“살다 보니 이런 날이 오기도 하는 구나. 네가 날 먼저 찾아오기도 하고.”

“언제는 내가 널 먼저 찾은 적이 없는 것처럼 말한다?”

“처음 맞아. 크고 작은 다툼을 한 뒤에 네가 나를 먼저 찾은 건.”

“……그랬나?”

담덕이 날 먼저 찾는 날이 더 많았던 건 분명했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갸웃거리니 담덕이 내 앞에 다가와 단호하게 말했다.

“그랬어! 이 지독한 녀석!”

입으로는 나를 타박하면서도 두 팔로는 나를 꼭 껴안았다. 예상하지 못하게 담덕의 품에 안겨 버린 내가 손을 어디에 둬야 하나 망설이는 사이 그가 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아, 정말 죽는 줄 알았다. 조금 더 빨리 와 주지. 홀로 밤을 보내는 내가 불쌍하지도 않았어?”

“그리 보고 싶었으면 먼저 날 찾아오지 그랬어.”

“소문에 가장 힘든 사람이 너인데 내가 어떻게 그래?”

그렇게 말한 담덕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내 허리를 끌어안은 담덕이 고개만 숙여 찬찬히 내 얼굴을 살폈다.

“많이 여위었다.”

“그러는 너도.”

“나야 요즘 잠을 못 자서…….”

담덕이 멋쩍게 웃으며 탁자에 쌓인 장계를 가리켰다. 척 보기에도 양이 보통 많은 것이 아니었다.

“……저걸 전부 다 보는 거야? 오늘?”

“내가 요즘 생각이 많아 보였는지 지설이 일거리를 많이 안겨 주더라고. 머리가 복잡할 땐 일에 몰두하는 게 제일 마음 편하다면서.”

“그건 다 헛소리야. 머리가 복잡할 땐 좋은 풍경을 보면서 편안하게 늘어지는 게 최고라고.”

“그런가?”

“그럼. 그런 의미에서 좋은 풍경이나 보러 가는 건 어때?”

“좋은 풍경?”

“응. 나 호수 보러 가고 싶은데. 날이 좋으니 나들이 가기 좋을 것 같지 않아?”

“전에 물놀이 갔던 곳? 거길 가고 싶어?”

내가 고개를 끄덕이니 담덕이 짧게 침음을 흘렸다.

“음. 지금은 날이 쌀쌀해져서 물놀이를 하긴 힘들 텐데.”

“그냥 구경만 하면 돼. 아, 일이 너무 많아서 힘든가?”

쌓여 있는 장계를 바라보며 말하니 담덕이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아니. 괜찮아. 돌아와서 더 보면 돼. 해가 떨어지기 전에 닿으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겠는데.”

“노을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그래. 어떤 것이든 좋다. 너와 함께라면.”

담덕이 나를 보며 씨익 웃었다. 나 역시 담덕을 향해 마주 웃어 주었지만 마음 한구석이 무거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지금은 아무 생각 안 할래.

나는 어색하게 허공에 두었던 두 팔을 움직여 담덕을 꼭 껴안았다.

* * *

나의 기억 속에 남아 있던 푸르른 녹음의 호수는 없었다. 계절이 계절인지라 풍경은 어느새 완연한 가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겨우 몇 개월 만에 풍경이 이렇게도 변하는구나.

새삼스러운 기분에 멍하니 말 위에 앉아 호수를 바라보니, 담덕이 팔을 뻗어 나를 땅에 내려 주었다.

“뭘 그리 보고 있어?”

“풍경을 보고 있었어.”

“풍경?”

“응. 시간이 빠르게도 흘렀다 싶어서.”

“그러네. 여기 온 것이 여름이었는데 이제는 가을이구나.”

담덕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가 바라보고 있는 호수 쪽으로 눈을 돌렸다. 서서히 아래를 향해 떨어지는 해와 함께 하늘이 점차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나는 담덕의 팔을 잡아끌어 호수 바로 앞에 자리를 잡고 나란히 앉았다. 그러고 있자니 열두 살의 어느 하루가 떠올랐다.

“기억해? 우리 어릴 때도 이렇게 나란히 앉아서 노을이 지는 걸 봤잖아.”

“강물에 빠져서는 물에 홀딱 젖은 채로 말이야.”

“맞아. 그랬어.”

오랜 기억에 절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때만 해도 담덕과 내가 이런 사이가 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땐 둘 다 유치했지.”

“둘 다? 유치했던 건 우희 너뿐이었어.”

“뭐라고? 그때 네가 얼마나 유치하게 굴었는지 다 잊었어?”

“난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데?”

“세상에. 그땐 거짓말도 잘 못하는 꼬마였는데 어느새 이렇게 못된 어른이 됐담.”

“나만 어른이 됐어? 너도 마찬가지잖아. 우리 함께 어른이 된 거야.”

담덕의 말 한마디에 어린 시절을 지나 이 시간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함께 겪어 온 많은 일들이 스쳐 갔다.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는 좋은 추억들이었다.

나는 조금 더 고개를 들어 하늘 높은 곳을 보았다. 붉게 물든 하늘 위에는 당연한 듯 어둠이 따라붙는다. 붉은 노을빛 위에는 짙은 남색이 켜켜이 쌓인다.

밤이 아래로 서서히 떨어지고 있었다. 어둠이 낮을 삼키고 달빛을 불러온다.

하늘을 비춘 호수에도 적색과 남색이 뒤섞였다.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시간의 흐름. 나와 담덕을 어른으로 만들어 버린 그 시간.

나는 고개를 돌려 호수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담덕을 바라보았다. 떨어지는 노을에 담덕의 얼굴도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손을 뻗어 붉은색이 내려앉은 담덕의 뺨을 매만지니 그의 눈이 나를 향했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서로의 머릿속에 같은 것이 스쳐 갔다는 예감이 들었다.

이 사람과 입을 맞추고 싶다.

내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담덕이 제 뺨을 매만지던 내 손을 붙잡고 고개를 숙여 내게 입을 맞춘 것이다.

말캉한 혀가 부드럽게 다가와 당신에게 닿을 길을 열어 달라는 듯 입술을 쓸어내리고, 저항 없이 열린 길을 따라 담덕이 조금 더 깊은 곳까지 다가왔다.

입맞춤은 조급했지만 조심스러웠고, 그러면서도 나를 모두 집어삼킬 듯 간절했다.

나는 담덕의 목에 팔을 둘러 그를 가까이 끌어당겼다. 내가 이처럼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처음이었다.

담덕이 당황했는지 잠시 멈칫거리는 것이 느껴졌으나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조심스러웠던 그의 움직임이 조금 더 깊어졌다.

그가 힘에 밀려 비틀거리는 내 어깨를 붙잡아 지탱하고 내 모든 것을 가져가겠다는 듯 내 안을 휘저었다. 술을 마시지도 않았는데 꼭 술을 마신 것처럼 속이 달아올랐다.

입맞춤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나는 이상하게도 서글퍼졌다. 이처럼 달콤한 입맞춤인데, 이처럼 따뜻한 입맞춤인데.

나는 벌써부터 입맞춤이 끝난 뒤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입맞춤을 멈추고 싶지 않았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조급하게 매달리는 나의 태도에 결국 담덕이 무엇인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챘다. 입술이 떨어져 나가고 담덕이 나를 불렀다.

“우희.”

담덕은 내 얼굴을 살피고 있었다. 나는 최대한 덤덤한 척 그의 시선을 받아 냈다.

“말해 봐. 무슨 일이야?”

“아무 일도 없어.”

“그런데 네가 이런다고?”

“그냥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뿐이야.”

“……그게 뭔데?”

담덕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무엇인가 좋지 않은 예감을 받은 것 같았다.

나는 담덕을 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담덕은 일어서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일부러 담덕이 아닌 호수 쪽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담덕의 얼굴을 보면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내가 며칠 동안 열심히 생각을 해 봤어.”

“무엇에 대해서?”

“내 미래에 대해서.”

“……하지 마.”

“생각도 못 하게 하는 거야?”

“너는 항상 쓸데없는 생각을 하니까 그냥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편이 더 좋아. 생각은 내가 할게. 머리 아픈 거, 복잡한 거, 전부 다 내가 할 테니까 넌 여기에 그냥 너로 있으면 돼.”

“그러면 내가 연우희야?”

나는 활짝 웃으며 담덕을 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담덕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미묘한 분위기에 불안함을 느낀 걸까?

역시 감이 좋은 녀석이었다.

“예전에 평양성에서 사냥제를 열었을 때 내가 호랑이를 잡았잖아. 그때 영광의 상처도 얻었고 말이야.”

나는 팔을 걷어 그때의 상처를 보았다. 옷을 걷어 드러낸 팔에는 의원의 걱정대로 흉터가 남았다. 상처를 본 담덕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런 상처까지 얻으면서 받은 소원권이라 오랫동안 고민했어. 언제, 어떻게 써야 잘 썼다고 소문이 날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말이야. 널 놀라게 해 줄 대단한 소원을 쓰려고 꽤 노력했어.”

나는 접어 올렸던 소매를 풀어 내리며 어깨를 폈다. 들이마신 숨에 서늘해진 공기가 폐를 가득 채웠다. 차가운 공기에 속이 얼어붙을 것만 같았다. 그래도 나는 어깨를 움츠리지 않았다.

“그런데 아무리 고민해도 모르겠더라고. 사실 소원권을 쓰지 않더라도 담덕 넌 내 부탁이라면 언제든 들어줬잖아. 소원권이 아깝지 않으려면 네가 평소에는 절대 들어주지 않을 부탁을 해야 하는데……. 어디 그런 게 흔해? 그래서 고민을 한 거지. 몇 날 며칠을. 그리고 이제 결론을 내렸어.”

다로가 떠나고 난 뒤 몇 번을 고민했지만 답은 언제나 하나였다.

담덕은 굳건히 왕좌를 지키는 흠결 없는 태왕이 되어야 했다. 만약 내가 그 길에 걸림돌이 된다면 당연히 비켜 줘야 했다. 나의 사심을 채우고자 욕심을 부릴 수 없었다.

게다가 지금의 내게는 꼭 지켜야 하는 것도 있었다.

나는 고개를 숙여 최근 들어 조금씩 부풀어 오르고 있는 배를 바라보았다. 이 시대에는 옷이 헐렁해 누구도 나를 보며 임신을 알아채지 못했다.

내가 작정하고 감추니 나를 가장 가까이서 챙기는 달래조차도 나의 임신을 몰랐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을 것이다. 담덕은 누구보다 강한 왕이 될 테고, 나는 분명히 알고 있는 훗날을 믿으며 고요히 기다릴 뿐이었다.

지금은 버티고 있을 때가 아니다. 지금은 그때를 기다리며 소원을 빌 차례였다.

“나 지금 그 소원, 말해도 돼?”

“……그 소원이 뭔데?”

“소원은 무조건 들어주는 거야. 네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맞지?”

담덕이 확답을 주기 전까지는 입을 열지 않을 생각이었다. 나의 의도를 알아챘는지 담덕이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아.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무조건 들어줄게. 그러니까 말해 봐. 내가 평소라면 절대 들어주지 않을 그 소원이 도대체 뭔데?”

바라던 말이 담덕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는 불안함과 의문이 섞인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밝게 웃으며 몇 번이고 되새겼던 말을 담덕에게 던졌다.

“나 너랑 혼인 안 할래.”

나의 말와 함께 정적이 흘렀다. 멍하니 나를 보던 담덕이 한참이나 지난 후 겨우 입을 뗐다.

“……뭐?”

“생각해 보니까 황후가 되는 거 별로인 것 같아. 그러니까 나, 너랑 혼인 안 할래. 멀리 떠나서 조용한 곳에서 살고 싶어. 그게 내 소원이야.”

“……무슨 헛소리야? 농담이 너무…… 재미없다. 그만하자.”

담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내게서 등을 돌렸다. 금방이라도 말을 타러 갈 것 같은 그의 등에 대고 나는 다시 한번 내 뜻을 전했다.

“농담 아니야 담덕. 나 너하고 혼인 안 할래.”

“그 농담, 재미없다니까!”

담덕의 목소리가 한층 높아졌다. 그는 다시 뒤돌아서 나를 바라보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미 그도 내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알면서 왜 그래? 나 진심이야.”

“도대체 왜? 갑자기 왜 그런 소원을 말하는 건데?”

“별다른 이유는 없어. 아무리 생각해도 난 황후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냐. 그게 전부야.”

담덕을 납득시키기 위해서라면 혼인을 원치 않는 이유는 오로지 나의 마음 탓이어야 했다. 담덕이 유일하게 거스를 수 없는 것이 나의 뜻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로에게서 전해 들었던 이야기도 말할 수 없었다. 내막을 안다면 담덕은 소문 따위 신경 쓰지 않고 나를 곁에 둘 것이다.

그러면 수많은 사람들이 담덕을 조롱하고 깎아내리려 하겠지. 내가 낳게 될 아이는 또 어떤 비난을 받게 될까?

백제의 왕과 정을 통한 여자가 낳은 아이일지도 모른다고, 제대로 된 태왕의 핏줄이 맞느냐고 수군거릴 것이다. 담덕은 소문을 믿지 않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달랐다. 나로 인해 담덕을 향한 사람들의 평가가 최악으로 치닫는 것을 나는 참을 수 없었다.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은 더욱더 비밀에 부쳐야 했다. 그것을 알게되면 담덕이 나를 놓아줄 리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너한테 황후답게 살아 달라고 하지 않았어. 그냥 너인 채로 내 곁에만 있어 달라고 했잖아.”

“담덕. 넌 그걸로 충분하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아. 내게 끊임없이 황후다운 모습을 요구해. 난 그렇게 살 수가 없는 거야.”

내 말에 담덕이 입을 꾹 다물었다. 가만히 내 얼굴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가 당황으로 흔들렸다가 곧 실망으로 물들었다.

“혹 수곡성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그래? 그때 내가…… 사람을 살리려는 네 행동을 막아서?”

고작 그런 이유로 담덕과의 혼인을 포기할 리 없었다. 나는 그날 그가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이해했다.

하지만 나는 입을 다물었다. 내가 담덕의 곁을 떠나는 이유를 그가 납득하기만 한다면 어떤 이유든 진실이 될 수 있었다.

내가 입을 다물자 담덕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고작 한 번이었다. 열두 살 처음 만났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 길고 긴 시간 중에서 그날 딱 한 번이었다고. 나는 네게 나 자신을 주고 어떤 일이든 네 뜻대로 했어. 그런데 넌…… 고작 그 한 번을 못 넘어가? 그냥 한 번쯤은 넘어가 줄 수 있잖아.”

쉴 새 없이 쏟아지던 말이 뚝 그쳤다.

“아니, 아니다. 내가 잘못했어. 무엇이든 네 뜻대로 하라고 했는데 내가 그걸 막았다.”

담덕이 이내 고개를 저으며 횡설수설했다. 답답한 듯 제 머리를 헤집는 손길이 다급해 보였다.

“담덕.”

내가 조용히 담덕을 불렀지만 그는 대답 없이 제 말을 이어 갈 뿐이었다.

“그래……. 그러니 다짐을 지키지 못한 내 탓이 크다. 모두 내가 잘못했으니 그런 소원은 빌지 마, 우희야.”

“담덕.”

나는 조금 더 강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제야 불안하게 떠돌던 담덕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네가 잘못한 거 아냐. 그냥 우리가 달라서, 그래서 그래.”

“달라도 돼. 내가 맞출 수 있어.”

“아니. 못 해.”

나는 고개를 저으며 담덕 앞에 섰다.

“넌 끊임없이 사람을 죽여야 해. 전쟁에서 승리하고, 이 나라를 지키고…… 그게 너의 일이지. 그런데 난 끊임없이 사람을 살려야 해. 적군도 아군도 상관없어. 다치고 죽어 가는 사람이 있다면 난 누구든 살릴 거야. 서로의 신념이 이리도 다른데 어찌 한길을 걷겠어?”

나는 손을 뻗어 담덕의 두 손을 잡았다. 맞잡은 그의 손이 얼음처럼 차가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힘겹게 말을 이었다.

“게다가 난 자유로운 게 좋아. 궁에 붙어사는 지루한 일상은 견뎌 내기 힘드니 어찌 황후가 되겠어? 처음부터 무리한 결심을 한 거야. 그걸 너무 늦게 깨달은 거지.”

“그래서.”

담덕이 이를 악물며 제 손을 잡은 나의 손을 꽉 쥐었다.

“나를 떠나겠다고?”

“그래.”

“내가 사람이나 죽이고 다니는 게 마음에 들지 않고, 궁에서 사는 것도 싫으니 나를 떠나?”

“……그래.”

“그럼 넌 내가 다른 여자와 혼인해도 상관없어? 그 여인에게 너와 했던 일들을 하고, 그 사이에서 후사를 보아도 상관없어? 그런 거야?”

당연히 싫었다. 담덕 옆에 다른 사람이 서는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쏟아지려는 눈물을 아래로 내리눌렀다.

“……응. 넌 태왕이니 당연히 황후를 들여 후사를 봐야지. 그게 옳은 거야. 누구보다 황후에 어울리는 사람, 그런 사람과 혼인해.”

마음에도 없는 소리가 잘도 흘러나왔다. 그러나 거짓을 말하며 담덕을 바라보는 것까지는 힘들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으니 머리 위에서 담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게 정말 네가 바라는 거야?”

“그래.”

“거짓말.”

담덕의 목소리는 서늘했다. 겁도 없이 늑대에게 활을 날렸던 그날 내 앞에 섰던 담덕의 목소리가 꼭 이랬다.

담덕이 손을 뻗어 내 턱을 붙잡았다. 그가 억지로 고개를 들게 해 나와 눈을 맞추었다. 선명히 마주친 눈동자에 몸이 얼어붙었다.

“그렇게 고개를 숙이고 말하면 내가 기대를 하게 되잖아. 네가 한 말들이 전부 거짓말이라고.”

“……이런 거짓말을 왜 하겠어? 진심이야.”

“진심이면 내 눈을 똑바로 보고 다시 한번 말해 봐. 그럼 믿어 줄 테니까.”

입에 딱딱하게 굳었다. 하기 힘든 말을 하려니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몇 번이나 입술을 잘근잘근 씹은 끝에 감각이 돌아왔다. 나는 타인의 입을 빌려 말하는 듯한 낯선 기분으로 기계처럼 말을 쏟아 냈다.

“난 네가 다른 여인과 혼인해도 상관없어. 나와 했던 걸 해도, 그 여인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아도 괜찮아.”

조금씩 입을 열 때마다 칼날이 가슴을 후벼 파는 것 같았다. 겨우 내뱉은 말에 담덕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허.”

담덕의 입에서 내뱉은 숨이 공기를 울렸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것만 같았다.

“너는 여전히…… 쉽구나. 여전히 그런 말이 참 쉬워.”

담덕이 붙잡고 있던 내 턱에서 손을 떼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답답함을 담아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는 그의 얼굴이 어느새 깔린 초어스름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연우희. 네가 참 밉다. 오늘처럼 네가 미운 날이 없었어. 그런데 앞으로는 매일…… 오늘처럼 네가 미울 것 같아.”

“미워해. 모든 것이 널 감당하지 못한 내 잘못이니까.”

“그리할 거야. 미워하고 또 미워해서 평생을 미워할 거야. 그게 날 버린 사람에 대한 복수나 될지 모르겠지만.”

그 말이 꼭 나를 평생 잊지 않겠다는 말로 들렸다면 착각일까.

“그건 제대로 된 복수가 아니지. 내게 복수하고 싶다면 위대한 태왕이 돼. 내가 어느 곳에 있어도 네 소식을 들을 수 있도록, 그리하여 네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내가 가슴 깊이 후회하도록. 그보다 좋은 복수가 어디 있겠니?”

“그래. 꼭 복수하마.”

나는 어울리지도 않는 으름장을 놓고 있는 담덕의 마음을 믿었다.

이 사람이 내게 가진 마음의 무게를 안다. 이 사람이 얼마나 변하지 않는 사내인지도 알고 있었다.

나는 답답할 정도로 올곧은 이 사람의 변하지 않을 마음을 담보로, 기다림이라는 도박을 하려는 것이다.

담덕에게 필요한 것은 시간이었다.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그는 진정한 태왕이 된다. 나는 그때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것이다.

도박에 이기게 될까?

확신은 없었다. 기다림이란 언제나 불확실해서 누구도 확신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떠난 사이 담덕의 마음이 변할지도 모른다. 그 사실이 너무도 두려웠지만, 그 이상으로 담덕의 미래를 빼앗는 것이 싫었다.

위대한 태왕으로 역사에 길이 남을 담덕의 미래는 오롯이 그의 것이었다. 지금 내가 담덕의 곁에 있다면 그 미래가 흔들린다.

그래서 나는 얼마가 될지 모르는 긴 도박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이 사내의 마음을 믿기에 할 수 있는, 바보 같은 도박이었다.

* * *

나는 최대한 조용히 짐을 꾸렸다. 어디로든 떠나려면 먼저 궁에서 나가야 했다.

짐을 챙기는 내 옆에서 달래는 거의 통곡에 가까운 눈물을 쏟아 냈다.

“나도 안 우는데 네가 어찌 울어?”

“아가씨께서 안 우시니 제가 우는 겁니다! 어찌 폐하께서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아무리 이상한 소문이 퍼졌어도 그렇지, 어떻게 아가씨를 쫓아낼 수 있어요?”

“폐하께서 날 쫓아내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나가는 거야. 혹 폐하께서 날 쫓아내시는 거라고 하더라도 그건 당연한 처사고. 오히려 지금까지 소문을 무시하고 날 안에 두신 게 잘못된 거지.”

구구절절 옳은 말에 잠시 달래가 할 말을 잃었다. 그칠 줄 모르던 울음도 어느새 멈추어 있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달래가 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그래도…… 그래도 너무하십니다! 아가씨께서 나간다고 하셔도 안 된다고 붙잡으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폐하께선 늘 내 뜻을 존중해 주는 분이셔. 하니 달래 네가 상상하는 일은 없을 거다. 그러니까 빨리 짐을 챙기는 게 좋을걸. 이러다 해가 떨어지겠다.”

“예에…….”

달래가 훌쩍거리며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전히 행동은 느렸지만 짐을 꾸리는 사람이 한 명 더 늘어나니 속도가 조금 붙었다.

원래 궁에 있던 것과 담덕이 준 것을 제외하니 가져갈 짐은 많지 않았다. 덕분에 생각보다 빠르게 짐을 꾸려 해가 떨어지기 전 궁을 나설 수 있었다.

최대한 조용히 궁을 떠나기 위해 나는 평소 드나들던 정문이 아닌 궁인들이 사용하는 쪽문을 통해 궁을 떠나기로 했다. 어느 누구도 떠나는 나를 배웅하지 않았다.

나는 밖으로 나서는 문 앞에 서서 한동안 머물렀던 궁을 바라보았다. 선대왕인 고국양왕이 주인일 시절부터 제 집처럼 드나든 곳이었다.

과분한 행운을 안고 이곳에서 좋은 인연들을 많이 만들었다. 크고 넓은 궁의 곳곳마다 추억들이 묻어 있었지만 이제 한동안, 아니, 어쩌면 다시는 올 일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쉽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머뭇거리는 걸음에 수많은 순간들이 눈앞을 스쳐 갔다.

담덕과 우연히 마주쳤던 태학. 그곳에서 모든 이야기가 시작되었지.

매일 함께 활을 쏘고 말을 탔던 담덕의 개인 연무장. 그곳에 두고 차마 가져오지 못한 나의 활은 담덕이 알아서 버려 줄 것이다.

담덕이 매일같이 머리를 감싸고 일에 열중하는 집무실. 매일 깊은 밤까지 불이 꺼지지 않던 그 방에 앞으로는 이른 휴식이 닿았으면 좋겠다.

함께 끌어안고 잠들었던 담덕의 침실. 그곳에는 이제 새로운 사람이 따뜻하게 자리를 데우겠지.

익숙한 풍경을 천천히 눈에 담는 나를 보며 달래가 울 것 같은 얼굴로 내 팔을 잡아끌었다.

“아가씨…….”

달래의 얼굴을 보니 조금 더 지체했다가는 또다시 그녀의 요란한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그래. 이만 나가자.”

모든 것은 이곳에 두고 가야지. 좋았던 추억도 힘들었던 기억도 이곳에 남겨 두고 나는 흘러가는 역사 속에서 조용히 기다리는 거야.

나는 남아 있는 모든 것을 두고 무거운 발걸음을 돌렸다. 연우희로 쌓아 왔던 수많은 순간들과의 이별이었다.

* * *

문을 나서니 운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달래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지만, 미리 서신을 보내 그를 찾은 사람이 나였다.

“정말 나왔구나.”

내 서신을 받고서도 내용을 믿지 못했던 것인지 운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럼 다로에 대한 이야기도 진짜라는 소리겠군.”

서신에는 비로의 대원들만 알아볼 수 있는 암호로 다로가 확실한 간자이며, 그녀 외에도 더 많은 간자가 있으니 유의하여 대처하라는 이야기도 적었다. 그들의 배후는 짐작하는 그대로라는 이야기도 함께였다.

“제가 그런 걸로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운에게 웃으며 대답한 뒤 나는 달래를 바라보았다.

“너는 먼저 절노부 저택으로 돌아가 있어. 나는 해씨의 도련님과 할 이야기가 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제신과 사이가 돈독한 운이었다. 달래는 별다른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겠습니다. 짐은 제게 주시면 가져갈게요.”

“아니다. 네 짐도 무거운데 무슨 짐을 더 늘리려고 해? 이건 내가 돌아갈 때 가져가마. 넌 그것만 챙겨 가라.”

내가 들고 있는 보따리가 작은 편이긴 했지만, 달래가 든 것까지 합치면 양이 상당해진다.

내 말에 제 손에 들린 짐과 내 손에 들린 짐을 번갈아 보던 달래가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 둘 다 가져가긴 무리라고 결론을 내린 것 같았다.

“그럼 저택에서 뵙겠습니다, 아가씨.”

“그래. 나중에 보자.”

달래가 인사하고 멀어지자 옆에서 가만히 자리만 지키고 있던 운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서신에 쓴 건 뭐야?”

“보신 그대로입니다. 오라버니께도 비밀로 하고 나온 것이지요?”

“그래. 하도 신신당부를 하기에 제신에게도 비밀로 하고 나온 참이다.”

주변을 살펴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운이 목소리까지 낮추며 내게 물었다.

“그런데…… 고구려를 떠나겠다는 게 무슨 말이야?”

“무슨 말이 더 필요합니까? 멀리 떠나려고 합니다. 저를 아는 사람이 없는 곳으로. 혼자서는 힘드니 운 도령이 좀 도와주세요. 제게 빚이 있으시잖아요.”

고구려를 떠나는 걸 도와 달라.

제신에게는 절대 부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결코 내가 떠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오랜 고민 끝에 내게 마음에 빚이 있는 운을 떠올렸다. 내 예상대로 ‘빚’이라는 말에 운의 표정이 미묘하게 흐려졌다.

“빚이야 있지만……. 네 부탁을 들어주는 것이 연 장군께서 바랄 일인지는 모르겠다. 폐하와 혼인하지 않는다고 굳이 고구려를 떠날 필요는 없지 않느냐. 소문 때문에 고구려에 남아 있기가 괴로운 거라면…….”

“국내성에 떠도는 소문을 피하고자 했다면 절노부로 돌아가면 됐겠지요. 단순히 소문을 피해 떠나려는 게 아닙니다. 누구도 저를 알지 못하는 곳으로 가야 해요.”

담덕의 시선이 닿는 곳에서 아이를 낳아 키울 수는 없었다. 고구려 안이라면 모두 그의 눈이 향하고 있으니 다른 나라로 가야만 했다.

하지만 이런 사정을 모르는 운에게는 나의 뜻이 이상하게만 보일 터였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구나.”

운이 한숨을 내쉬며 제 머리를 헤집었다.

“네가 부탁하기에 배를 구해 두기는 했다. 아무리 설득해도 듣지 않을 것이 뻔하니, 그럴 바에는 내 손으로 보내 주는 것이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 그래야 어디로 가는지나 알 수 있을 것 아니냐.”

“현명한 선택이십니다.”

“그다지 칭찬으로는 들리지 않는구나.”

운이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떠나려면 신라가 좋아. 말이 통하니 후연보다 낫고, 고구려에 호의적이니 백제보다 안전하다.”

신라. 남쪽에 있으니 날이 따뜻하여 어쩌면 고구려보다 살기에 좋을지도 모른다.

“감사합니다. 어려운 부탁을 들어주셔서.”

“대신 하나만 약속해. 나와는 연락을 끊어선 안 된다. 그것 하나만 약속하면 네가 부탁했던 것처럼 누구에게도 너의 행방을 알리지 않겠어.”

“그리할게요.”

“네 아버지의 이름을 걸고 맹세할 수 있어?”

애초에 운과 연락을 끊을 생각도 없었다. 그라면 내가 연락을 끊어도 나의 행방을 추적할 수 있도록 수를 써 두었을 테니 잠적하려고 힘을 빼는 건 쓸데없는 짓이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보던 운의 얼굴이 그제야 풀어졌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두고 거짓을 맹세할 리는 없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좋다. 그럼 가자.”

운이 준비해 둔 말 위에 오르며 손을 뻗었다.

“같은 말을 타고 갑니까?”

“네가 떠나면 남은 말은 어쩌라고 두 마리를 가져오겠어?”

퍽이나 옳은 말을 하며 운이 나를 향해 뻗은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시간 끌지 말고 어서 잡으라는 뜻이었다.

퉁명스러운 재촉에 나는 입을 비죽이며 운의 손을 잡았다. 손을 잡자마자 끌어당기는 힘에 몸이 가볍게 말 위에 안착했다.

“배를 타려면 바다로 가야지. 그곳까지 안전하게 모셔다 드리죠, 아가씨.”

그렇게 말하며 운이 말의 배를 걷어찼다. 출발 신호를 기다렸다는 듯 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포구에 도착하니 이미 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말에서 내린 운이 내가 내리는 것을 도와준 뒤, 배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남자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오셨습니까요, 어르신.”

운보다 훨씬 나이가 많아 보이는 남자였지만, 이곳에서야 돈 많고 신분이 높으면 모두 어르신이었다. 운은 익숙한 듯 남자의 인사를 받았다.

“배가 뜰 수 있겠나?”

“예. 다행히 날씨가 좋습니다. 매일 오늘만 같으면 저 같은 뱃사람들은 걱정이 없다니까요.”

“다행이군.”

남자와 이야기를 마친 운이 내 쪽을 보았다. 나는 서둘러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신라까지 모셔 갈 분이야.”

“아아, 이분이.”

운의 소개에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제가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뱃사람으로 태어나 평생을 배를 띄웠으니 믿으셔도 좋습니다.”

넉살 좋은 인사에 마주 고개를 숙이니 남자가 능숙하게 나를 배로 이끌었다.

“배에 오르시죠. 곧 출발하겠습니다.”

배는 생각보다 컸다. 이만한 배를 구하려면 돈을 꽤 많이 써야 했을 것이다.

“배가 생각보다 크군.”

“예. 먼 길을 떠나야 하니 이 정도 크기는 되어야 파도를 견딥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난간에 몸을 기댔다. 소진일 때의 기억을 더듬어 봐도 먼바다로 나가는 배들은 모두 크기가 컸다.

나는 곧 배가 떠나게 될 먼바다를 바라보았다. 바다를 보니 이제 고구려를 떠난다는 실감이 났다.

지난번에 배를 탔을 때는 백제로 향했는데, 이번에는 신라인가.

어쩌다 보니 삼국을 두루 유람하게 되었다. 어린 시절 절노부의 땅에서만 지낼 때는 상상하지도 못한 일이었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바다에 시선을 빼앗긴 나의 뒤로 남자가 크게 소리쳤다. 출발을 알리는 소리가 들려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배가 서서히 바다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배의 움직임에 따라 바람도 점차 거세지고 있었다.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있으니 뒤쪽에서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바닷바람이 참 시원하지?”

나는 놀라서 뒤를 바라보았다. 지금 여기에서 절대 들려서는 안 될 목소리였다. 내게 배를 태워 주고 돌아갔어야 할 운이었다.

“여, 여, 여기서 뭐하십니까?”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더니 운이 내 어깨에 손을 두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리 놀라느냐? 내가 구한 배에 내가 타겠다는데.”

“따라오면 어떡합니까!”

“왜? 뭘 하려고 못 따라오게 해?”

“뭘 하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당당하게 나오니 말문이 턱 막혔다. 당황해서 입만 뻥긋대는 나를 보며 운이 씨익 웃었다.

“너와 같이 갈 거다. 어차피 연락을 끊을 생각이 없었다니, 함께 가도 상관없겠지?”

“절 따라 고구려를 떠난다고요?”

“그래. 몰랐다면 모를까, 네가 혼자 떠난다는데 어찌 그냥 보내? 내가 따라가 줘야지.”

“누구 마음대로요?”

“내가 가는 곳은 내 마음대로 정하지, 누구 마음대로 정하겠어?”

점점 더 할 말이 없어졌다. 나는 황당함에 입을 쩍 벌리며 어깨에 둘러진 운의 손을 떼어 냈다.

“국내성에 할 일이 많으시잖아요. 영이는 어쩌고요?”

“내가 제 누이를 봐주는데, 내 누이는 제신이가 봐줘야지. 서로 돕고 사는 세상 아니냐.”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전 누구와도 같이 못 갑니다! 어서 내리십시오!”

그렇게 소리치며 운의 어깨를 떠밀었지만 내 힘으로 그를 밀어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 정도 힘으로 날 밀어낼 수 있겠어? 게다가…….”

코웃음을 흘린 운이 턱 끝으로 육지 방향을 가리켰다.

“이미 내리기엔 멀리 오지 않았나? 나보고 바다로 뛰어들라는 건 아니지?”

어느새 배가 육지에서 한참이나 멀어져 있었다. 내가 돌려보낼 수 없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아는 척을 한 것이다.

나는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떠났어야 했다. 그런데 시작부터 계획이 틀어졌다. 당황스럽고 화가 나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뛰어내리십시오! 그냥 확 바다에 뛰어내리세요!”

나는 이를 악물고 운의 팔을 잡아당겼다.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서라도 이 얄미운 남자를 바다에 집어넣어야 했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운은 바위처럼 무거워 아무리 힘을 써도 내게 끌려오지 않았다.

“에이, 그렇게는 못 한다. 나도 내 목숨 아까운 줄은 아는데 어찌 그래?”

“그리 목숨 귀한 줄 아시는 분이 왜 저를 따라오셨습니까? 편히 국내성에 계시면 얼마나 좋아요?”

“그러는 그대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지만 어느새 목소리는 진지해져 있었다. 운이 웃음기 없는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왜 굳이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가려는 건데? 이유가 있을 거 아냐.”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나는 붙잡고 있던 운의 팔을 놓고 고개를 돌렸다.

“나는 이유를 들을 자격이 있지 않나? 그대의 황당한 도주를 아무것도 묻지 않고 도왔어. 공범이 되었으니 이유 정도는 말해 줄 수 있잖아.”

“이유를 듣고 싶으시면 그쪽도 진지한 이유를 말하세요. 제가 친구의 누이라서, 갑자기 그럴 기분이 들어서……. 뭐 그런 이유 때문에 따라오지는 않았을 거 아닙니까. 도대체 무슨 생각이에요?”

난간에 몸을 기대며 슬쩍 운을 보았더니 그의 표정이 복잡해 보였다.

“그저……. 널 혼자 두기 싫었을 뿐이다. 어딜 가나 사건을 몰고 다니는 녀석인데, 혼자 떠나면 또 무슨 일에 휘말릴지 걱정이 되잖아. 멀리 보내는 것을 돕겠다고 마음먹었으면 안전까지 책임져야 한다 생각했을 뿐이야. 그게 연 장군께 부끄럽지 않은 길이라 생각했고.”

“……보호자는 필요 없어요. 저도 성인입니다.”

“알아. 하지만 내 마음이 불편해. 단지 내 마음이 편하고자 그대를 따라온 거니까 부담 가질 필요 없어.”

“그쪽이 절 따라온 것 자체가 부담이라는 생각은 전혀 없습니까?”

“부담스러워도 참아. 떠나는 걸 도와준 사람이니.”

당당한 명령이었다. 운이 아니었으면 이렇게 쉽게 고구려를 떠나지 못했을 것은 분명했으므로 할 말이 없었다.

“그럼 이제 네 차례야.”

입을 꾹 다문 나를 보며 이제는 운이 물었다.

“왜 떠날 결심을 했는데? 실연에 상심한 여인의 일탈이라기엔 너무 거창한데.”

나는 한숨을 내쉬며 운에게 다로가 추가로 퍼트리려고 계획한 소문에 관해 설명했다. 그러나 조용히 나의 이야기를 들던 운은 무엇인가 부족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 네가 왜 폐하의 곁을 떠나려고 생각했는지는 알겠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지 못한 이유도. 하지만 고구려 땅까지 떠날 이유는 없잖아.”

“그건…….”

나는 머뭇거리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운이 나를 따라온 이상 언제든 알게 될 일이었다. 눈치가 빠른 사람이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들키는 것보다는 내가 먼저 말하는 게 낫겠지.

그렇게 결론을 내린 나는 운의 손을 붙잡아 내 배 위에 얹었다. 갑작스러운 나의 행동에 당황해 손을 빼려던 운이 곧 이상한 것을 느끼고 내 배를 더듬었다.

“……배가 왜 이래?”

그의 멍한 눈이 나를 향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운의 손을 놓았다. 내 배에 닿았던 운의 손이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그…… 제가…… 임신을 해서…….”

“뭐?”

얼굴을 바라보던 멍한 눈이 그대로 움직여 내 배로 떨어졌다. 한참이나 내 배를 바라보던 운이 다시 한번 멍하니 외쳤다.

“뭐어?”

“그게…… 임신을…….”

“허?”

운이 비틀거리며 난간을 짚었다.

“폐하……, 폐하의 아이야?”

“네.”

“폐하는 알고 계시고?”

내가 고개를 젓자 운이 헛웃음을 흘리며 제 입을 틀어막았다.

“도대체 너는 무슨 생각으로……!”

버럭 소리를 지르려던 운이 내 배를 바라보며 입을 꾹 다물더니, 곧 차분한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폐하께는 왜 말을 안 한 거야? 네가 아이를 가진 걸 아셨다면 그분은 절대 널 보내지 않으셨을 거다.”

“그러니까 말 안 한 거예요. 떠나야만 하는 상황인데, 아이가 있다는 걸 알면 절대 안 보냈을 테니까.”

“허……. 이거 참……. 대책이 없는 아이인 줄은 진즉에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리 대책 없지는 않았습니다. 돈이 될 만한 것은 제법 챙겨 왔고, 어디서든 의원으로 일하면 굶어 죽지는 않을 겁니다. 아이도 혼자 잘 키울 자신이 있고요.”

사람의 몸에 대해서라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아이를 낳아 키우는 건 문제없었다.

“여자 혼자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게 어디 쉬운 일인 줄 알아? 게다가 이 아이는 보통 아이가 아니라……, 왕의…….”

운이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간자 문제가 해결되면 고구려로 돌아갈 생각이지? 아니, 물을 필요도 없어. 넌 그래야만 해. 이대로 영원히 도망치면 그분께 큰 죄를 짓는 거야.”

“문제가 해결되면……이라고요? 이 문제가 해결되기는 하나요?”

“왜 해결이 안 돼? 제신이가 해결할 거야. 그렇지 않아도 조용히 움직이며 다로에 대해 조사하고 있었다. 곧 관련자들을 찾아낼 수 있어.”

물론 시간이 더 주어진다면 제신은 훌륭하게 일을 해결해 줄 것이다. 다로와 그 뒤에 있는 자들이 누구인지 결국에는 찾아내겠지.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다로를 잡아내 배후를 색출하면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요?”

운이 내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슬쩍 웃으며 내게 협박하던 다로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아가씨와 백제 왕이 미추홀에서 밀회를 가졌다는 이야기가 나올 겁니다. 백제 왕과 내통한 여인이라니. 이 얼마나 자극적이고 흥미로운 일입니까? 사람들은 아주 쉽게 믿을 겁니다. 아가씨께서 과거에 백제 왕을 살렸다는 소문이 퍼진 지금에서는요.

다로의 그 말이 내게 많은 것을 일깨워 주었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과거의 일들이 나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그 일이 이번 한 번에 그치지 않으리라는 불행한 예감 역시도 머릿속을 스쳐 갔다.

“전 백제 왕의 목숨을 살려 주었어요. 과거를 바꿀 수는 없으니 그 일들이 영원히 꼬리표처럼 제 뒤를 따라다니겠지요. 그러니 제가 태왕의 곁에 있는 한 언제 어디서든 약점을 잡힐 겁니다. 다로와 그 일당을 처리하면 상황이 괜찮아진다고요? 전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왕을 흔들고자 하는 이들은 많으니 또 다른 사람이 나타나 과거를 들추고 비난하고……. 몇 번이나 그런 일들이 반복되겠지요.”

“비난이 두려운 것이냐?”

“저를 향한 비난은 두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비난이 소중한 사람에게 향하는 건 두려워요. 저를 향한 비난으로 인해 태왕의 입지가 흔들린다면…… 그거야말로 큰 죄가 아닐까요?”

떠나면 담덕을 상처 입힌다.

떠나지 않으면 태왕을 상처 입힌다.

그렇다면 누가 상처 입지 않도록 할 것인가?

그 갈림길에서 나는 태왕이 상처 받지 않는 쪽을 택했다. 담덕의 원망은 받겠으나 태왕으로서 그에게는 잘된 일이었다.

“……백제 왕을 살린 건 어쩔 수 없이 한 일이었어. 그러니 시간이 지나면 말도 안 되는 억측들도 사라질 거다.”

시간이 지나면.

운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았다.

“맞아요. 시간이 지나면 그리되겠죠. 하지만 지금 이 시간이 우리의 태왕에게 가장 중요한 시기예요. 재위 초기의 5년. 이때 사람들의 신뢰를 잃으면 남은 날들이 힘들어집니다. 선대 태왕께서도 즉위 초기에 분위기를 잡지 못해 재위 내내 고생을 하셨죠.”

고국양왕의 즉위 초기는 여러모로 힘들었다. 후사가 없는 소수림왕의 뒤를 이어 준비 없이 급하게 왕위에 오른 데다, 내부로는 가뭄이, 외부로는 다른 나라와의 전쟁이 이어져 민생이 피폐했다.

고국양왕은 그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많은 노력을 펼쳤다. 빼앗긴 성을 회복하고 가뭄을 다스릴 대책을 강구했다.

하지만 끝내 재위 초기에 얻은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왕위에 오른 지 7년 만에 붕어(崩御), 아들인 담덕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그걸 아는 제가 사람들의 신뢰를 흔들 만한 기회를 던져 주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에요. 간자를 찾아냈다고 끝이 아니죠. 더 긴 시간이 필요해요.”

담덕은 제 아버지의 선례를 살펴 재위 초기부터 강력하게 왕권을 장악했다.

그 방법이 끊임없는 전쟁과 승리였다. 외부에서 승전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담덕의 입지는 조금씩 더 단단해졌다.

담덕이 목숨을 걸고 외세와 맞서 싸운 끝에 얻어 낸 백성과 귀족들의 신뢰였다. 그것을 나의 추문으로 무너뜨릴 수는 없었다.

담덕이 왕이 아니라 평범한 사내였다면 할 필요가 없는 고민이었다.

고구려의 평범한 사내와 여인이 만나 마음을 나누었다면 서로를 믿고 위하는 것이 사랑의 전부였을 것이다. 상대를 향한 신뢰만 굳건하다면 추문이며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담덕은 고구려의 태왕이었다. 누구보다 위대하게 기억될 고구려의 광개토 대왕.

나는 그런 왕을 위한 선택을 한 것이다.

“너무 대단한 사람을 사랑해 버렸어요.”

담덕은 너무나 위대한 왕이었고, 나는 그 위대한 왕의 길을 위해 때로는 나의 마음을 한켠으로 접어 두고 ‘왕’을 위한 선택을 해야 했다.

아마도 나는 그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간 담덕을 향한 마음을 부정하고 외면했던 것도 그래서였겠지.

하지만 그를 향해 흘러가는 마음은 억지로 멈출 수 없었고, 나는 결국 그를 사랑하게 되어 오늘의 괴로움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이제 와서 후회가 돼?”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는 내게 운이 물었다.

후회하냐고?

우스운 질문에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어떻게 후회를 하겠어요? 깊고 소중한 마음을 받아 그 결실을 얻은 지금, 제가 어찌 후회를 해요? 말도 안 되는 소리죠.”

다만 상상을 할 뿐이다. 우리가 다른 시간, 다른 공간, 다른 사람으로 만났다면 어땠을까 하는 우스운 상상이었다.

먼 미래, 전쟁도 왕위도 없는 그 평화로운 세상에서 왕이 아닌 담덕과 만났다면 우리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지금과는 상황이 썩 다르지 않았을까.

그런 상상들이 오래 이어지지 못하고 말없이 허공으로 흩어지는 까닭은 그것이 부질없는 꿈임을 알기 때문이다.

나는 우희고, 그는 담덕이었다. 죽는 날까지 변하지 않을 그 사실이 우리를 만나게 했고 또 헤어지게 만들었다.

나는 애써 우울한 기분을 떨쳐 버리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였다.

* * *

여정은 길었다.

몇 날 며칠이나 배를 타고 이동하여 신라 땅에 내린 뒤, 그곳에서도 한참이나 마차를 타고 들어가서야 왕경에 닿았다.

왕경(王京)은 현대의 경주로 천 년의 역사를 이어 갈 신라의 도읍이었다.

후에 삼국을 통일할 신라의 본거지였지만 이 시기의 왕경은 이제 막 왕권이 확립되어 나라의 기틀을 잡아 가기 시작한 상태였다.

고구려에 왕족인 실성을 볼모로 보낸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지금의 신라는 삼국 중에서 가장 힘이 없는 나라였다.

중국과 땅이 맞닿은 고구려나 바닷길로 소통하는 백제와 달리 산맥 뒤에 고립되어 발전이 더딘 것이 문제였다.

지금의 신라는 한반도의 패권을 다투는 고구려와 백제의 경쟁에서 비켜나 조용히 힘을 키우고 있었다. 고구려와 백제가 서로 격렬하게 싸우는 시기를 틈타 빠르게 발전, 후에는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무너뜨리며 삼국의 승자가 된다. 물론 먼 미래의 일이었다.

국내성과는 다른 분위기의 왕경을 둘러보고 있으니 운이 앞으로의 계획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땅에 정착하려면 그 나라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

“하지만 신라에는 아는 사람이 없는걸요.”

“내가 아무런 생각도 없이 신라로 가라고 추천했겠느냐.”

그렇게 말한 운이 품속에서 서신을 꺼내 들었다.

“실성 님께 부탁해 받아 온 서신이다. 어머니인 이리 부인께 쓴 것인데, 이 서신을 가지고 가는 사람을 집에 들여 말벗으로 삼으시라는 내용이 적혀 있어.”

실성은 고구려에 볼모로 와 있는 신라의 왕족이었다. 서가 그의 말벗으로 지내며 나와도 친분을 쌓았는데, 사이가 나쁘지는 않았으나 이런 도움을 받을 정도는 아니었다.

“실성 님께서 어찌 그런 서신을 써 주셨어요?”

“얼마 전 실성 님께서 서를 통해 신라에 보낼 고구려 여인 하나를 소개해 달라고 하셨다. 아들을 고구려에 보내고 어머니께서 많이 외로워하시는데, 자신이 지내는 곳의 사정을 잘 아는 여인을 말벗으로 보내 드리면 기분이 나아지실 것 같다고 말이야. 서는 그걸 제신에게 부탁했고, 제신이는 바쁘다며 그 일을 내게 떠넘겼지. 하여 적당한 사람을 물색하고 있었는데…….”

“마침 제가 고구려를 떠나야 한다고 도움을 청한 것이로군요.”

“때가 잘 맞았지.”

나는 운이 건넨 서신을 받아 들며 묘한 기분에 빠졌다.

하필 이런 식으로 일이 겹치기도 하나?

운명이 나를 이곳으로 이끈 것은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내 뻔한 생각을 읽었는지 운이 고개를 저으며 나를 재촉했다.

“이상한 생각은 그만하고 날이 저물기 전에 이리 부인을 찾아가.”

“그쪽은요?”

“나는 다른 방법을 통해 그 집에 들어갈 거야.”

“정말 신라에 계속 있겠다는 겁니까? 비로의 일도 있고, 소노부에서도 그쪽을 찾을 것인데 도대체 무슨 생각이세요?”

“그건 오히려 내가 묻고 싶다. 폐하도 절노부도 너를 찾을 것인데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그런 식의 공격은 치사합니다.”

“내가 치사한 것이 어디 하루 이틀이냐.”

말로는 도무지 운을 이길 수가 없었다. 나는 더 이상 그를 설득하지 못하고 깊은 한숨과 함께 돌아섰다.

* * *

“내 아들 실성의 필체가 분명하구나. 그 아이가 나를 생각해 이리 사람을 보내 주다니…….”

이리 부인은 아들의 서신을 가져온 나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슬픔에 젖은 얼굴로 몇 번이나 서신을 읽어 내려간 그녀가 내게 물었다.

“그래. 고구려에서는 궁에 있었다고?”

“예. 그랬습니다.”

궁에서 머물렀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이리 부인은 나의 말을 ‘궁에서 시녀로 일했다’는 뜻으로 알아들은 것 같았지만, 나는 굳이 오해를 바로잡지 않았다.

“그래, 그래. 궁에서 일했다면 내 아들을 보기도 했겠어.”

“예. 몇 번 뵌 적이 있습니다.”

“그 아이는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는가? 서신에는 늘 좋은 말만 써서 보내니 내가 믿을 수가 있어야지.”

“실성 님께서는 건강히 잘 지내십니다. 고구려의 태왕께서도 그분을 귀하게 대접해 주시어 궁에 있는 사람 누구도 그분을 함부로 대하지 못했습니다.”

“참으로 고맙구나. 참으로 고마워.”

나의 말에 이리 부인의 얼굴이 따뜻하게 풀어졌다. 단순히 소식을 전해 주었을 뿐인데 그녀는 나를 향해 몇 번이나 고맙다는 말을 반복해 인사를 듣는 내가 민망해질 정도였다.

“방을 하나 내어줄 터이니 이곳에 머무르며 종종 내게 이야기를 들려주게. 젊은 사람이 나이 든 노인의 말벗을 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자네도 사정이 있어 고구려를 떠나 신라로 온 것이겠지?”

이리 부인의 시선이 나의 배로 향했다. 여태까지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는데, 아이를 낳은 여인의 눈은 피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말로 다하기 힘든 사정이 있기에…….”

멋쩍은 얼굴로 웃으며 배를 쓰다듬으니 이리 부인이 인자하게 웃었다.

“이해하네. 궁에 있던 여인이 아이를 배었으니 복잡한 사정이 있지 않겠나. 이유는 묻지 않을 것이니 마음 편히 가지고 머무르게. 집안사람들에게도 귀한 손님으로 모시라고 할 것이야.”

“귀한 손님이라니요. 시녀를 하나 두었다 생각하시고 무엇이든 일을 시켜 주시면…….”

“무슨 소리. 내 아들의 소식을 가져온 사람을 어떻게 종처럼 부리겠나. 게다가 아이까지 밴 사람을……. 나를 그리 인정머리 없는 사람으로 만들고 싶은 것은 아니겠지?”

짐짓 엄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이리 부인의 뜻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사정을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인.”

“그러고 보니 아직 이름을 묻지 못했군. 내가 자네를 뭐라고 부르면 될까?”

우희라는 이름은 쓸 수 없었다. 혹 실성을 통해 서에게 이야기가 흘러간다면 곤란했다.

“……소진.”

그렇다면 나의 또 다른 이름을 쓰는 수밖에 없었다.

“소진이라고 합니다, 제 이름.”

“소진. 우리 식솔이 된 것을 환영하네.”

이리 부인의 다정한 인사와 함께 신라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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