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장. 이불리간(利不利間)
오랜만에 찾은 수곡성은 여전했다. 담덕의 즉위 이후 성주는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지만, 주인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내 기억 속 모습 그대로였다.
담덕의 지시로 수곡성은 곧장 전쟁 준비에 돌입했다. 병사들은 무기를 점검했고, 장수들은 백제군을 효과적으로 제압할 작전을 논의했다.
담덕 역시 장수들의 논의에 함께했다. 백제군이 이용할 것으로 예상되는 경로를 예측하고 병사들을 매복할 위치를 잡는 것이 논의의 목적이라고 했다.
지도를 분석해 몇 개의 경로를 정하고, 실제로 현장에 나가 매복에 적합한 땅인지를 파악하느라 담덕과 지설은 정신없이 움직였다. 아침 이슬을 맞으며 성을 나서서 늦은 밤 어둠과 함께 돌아오는 일이 다반사였다.
며칠 전 운으로부터 대규모의 상선이 관미성을 지나갔다는 연통이 온 뒤로는 늦은 밤에도 두 사람의 얼굴을 보기 힘들었다. 전쟁이 코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전쟁이 임박했음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뒤이어 국내성에서 출발한 기병대가 수곡성에 도착했다. 담덕과 함께 지난 전쟁을 치러 낸 정예 개마부대였다.
사람들은 개마부대의 위풍당당한 모습을 보며 가까이 다가온 전쟁을 실감함과 동시에 승리를 향한 갈망을 가슴에 새겼다.
모두가 바쁜 와중에 나만 여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는 없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분주하게 움직였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병사들의 건강을 돌보는 일뿐이었다.
제대로 전쟁을 치르려면 최상의 몸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데, 오랫동안 백제와의 전쟁에 시달린 수곡성 병사들의 상태는 빈말로도 좋다고 할 수 없었다.
외상을 방치해 겉보기에도 심각한 경우뿐 아니라 몸의 피로와 정신적 긴장이 누적되어 속이 곪은 사람들도 많았다.
나는 이러한 사람들을 돕고자 수곡성 의원 한 명과 함께 매일 아침 성문 근처에 마련한 작은 막사에서 진료소를 열었다.
말은 간단했지만 진료소를 여는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이 시대에는 진료소라는 개념이 없었다. 사람이 아프거나 다치면 의원을 찾아와 도움을 청하지만, 의원이 먼저 ‘아픈 사람은 여기로 와서 도움을 받으십시오!’ 하고 나서는 경우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덕분에 나는 의원과 병사들에게 진료소의 개념을 이해시키는 데만 꼬박 하루의 시간을 소요했다.
그렇게 진료소의 개념을 이해시키고서도 첫날에는 병사 대여섯만이 진료를 받고 처방을 얻어 가는 데 그쳤다. 그마저도 내가 지나가는 병사를 먼저 붙잡고 억지로 진료를 권한 결과였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자 입소문이 돌았는지 이른 아침부터 아픈 병사들이 몰려들었다.
병사들뿐만 아니라 수곡성의 주민들까지 도움을 얻을 수 있을까 싶어 진료소를 찾았다. 덕분에 우리는 생각보다 더 많은 환자를 맞이해야만 했다.
의원은 사람들의 반응에 썩 놀란 눈치였다. 여태껏 자신을 찾아와 도움을 청하는 사람이 소수였기 때문에 이처럼 많은 환자들이 수곡성에 있다고는 생각지 못한 모양이었다.
“어째서 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아프다는 것을 숨기고 지내 왔을까요?”
의원이 길게 늘어선 줄을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른 아침부터 많은 사람들을 진료했는데도 줄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타인에게 도움을 청하는 건 굉장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거든요. 크게 다치고 아프다면 기꺼이 용기를 내지만, 아픔이 견딜 만하다 생각하면 굳이 용기를 내지 않아요. 하지만 의원이 먼저 손을 내밀어 도움을 주겠다 말하면 환자들은 보다 작은 용기를 가지고도 도움을 청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진료소가 필요한 것이지요.”
“도움을 청할 용기라고요…….”
의원이 작게 중얼거리며 다시 한번 길게 늘어선 환자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감상에 빠져 있을 시간은 길지 않았다.
성벽에서 인근이 분주해지더니 곧 요란한 나팔 소리가 울렸다. 적군의 출현을 알리는 소리였다.
진료소 앞에 서 있던 병사들이 순식간에 줄을 벗어나 자신의 위치로 향했고, 주민들도 사색이 되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현실감 없는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니 성문 근처에서 익숙한 외침이 들려왔다. 지설이었다.
“우희 님!”
성문 밖에서부터 빠르게 말을 몰고 온 지설이 다급한 외침과 함께 진료소 앞에 멈춰 섰다. 말에서 굴러떨어지다시피 내려온 그가 숨을 몰아쉬며 내 앞에 섰다.
“성문 근처는 위험합니다. 서둘러 저택으로 들어가시죠.”
“백제군이 쳐들어 온 건가요?”
“예. 저희의 예상대로 상선을 타고 왔습니다. 모든 것이 짐작대로 흘러가고 있으니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지설은 불확실한 말을 잘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 이가 이토록 승리를 확신하는 것을 보니 그만큼 상황이 유리한 모양이었다.
“폐하는요?”
“늘 그랬듯 직접 병사들을 지휘하실 겁니다. 전 폐하의 명에 따라 우희 님의 곁에 있을 거고요.”
“어차피 난 저택 안에 있을 테니 지설의 호위는 필요 없어요. 폐하의 곁에서 그를 지켜 주세요.”
“저 역시 그리 말했습니다만 시원하게 거절당했습니다.”
지설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이미 담덕과 한바탕 입씨름을 벌이고 왔는지 질린 기색이 역력했다.
“아무튼 안으로 들어가시죠.”
지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성벽 위로 화살이 날아들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고개를 들어 화살을 본 지설이 미간을 찌푸리며 나를 말 위에 안아 올리더니 자신 역시 올라탔다.
“꽉 잡으십시오!”
다급한 외침에 반사적으로 붙잡을 것을 찾았지만 말 위에 옆으로 앉혀진 탓에 눈에 보이는 것은 지설의 상체뿐이었다.
어쩔 수 없이 지설의 허리를 붙잡았더니 그가 침음을 흘리며 말의 배를 걷어찼다. 그러자 자극을 받은 말이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멀어지는 성벽의 풍경을 보고 있는 내게 지설이 난처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모습을 폐하가 보시면 절 죽이려 드실 터인데…… 이거 꼭 비밀로 해 주셔야 합니다!”
* * *
영락 4년 7월.
백제가 수곡성 아래에까지 침투해 고구려를 공격했다. 그동안 백제와 고구려의 전선이 관미성에 형성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수곡성에서의 전투는 이례적이었다.
백제는 고구려의 병력과 관심이 관미성에 집중된 상황을 이용해 수곡성과 석현성 사이의 예성강을 타고 고구려의 영토 깊은 곳까지 침투했다. 허를 찌르는 전략이었지만 이미 그 계획이 들통난 것이 패인이었다.
고구려는 관미성으로 보낼 예정이었던 기병 5천을 수곡성으로 보내 백제의 기습에 대비하고 있었다. 백제군은 이 사실을 모른 채 예정대로 수곡성을 공격했다.
움직임을 읽힌 기습은 더 이상 기습이 아니었다. 담덕이 이끄는 태왕군은 백제의 병력을 손쉽게 제압했다.
수곡성 아래에 침투해 온 병력의 5분의 1이 첫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고, 뒤로 물러나 전열을 가다듬고 있던 나머지 병력들은 어두운 밤을 틈타 도주했다. 기습이 실패했으니 더 이상 전투를 이어 가더라도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지설은 그 부분이 마음에 걸리는 지 쉽게 마음을 놓지 못했다. 백제군이 너무 쉽게 전투를 포기했다는 것이다.
“1차 기습이 실패했어도 2차, 3차 기습을 노릴 수 있었습니다. 첫 전투에서 잃은 병력보다 남은 병력이 더 많았는데…….”
담덕도 그의 말에 동의했다.
“퇴각한 것처럼 꾸민 뒤 다시 기습을 노리는 것일지도 모르겠군. 백제군이 물러난 것이 확실해질 때까지 개마부대와 함께 수곡성을 지키는 게 좋겠어. 지설은 개마대원 몇 명을 차출해 수곡성과 석현성 인근을 샅샅이 수색해라. 수상한 자가 보이거든 반드시 살려서 데려와. 그를 통해 정보를 얻어야 하니까.”
전쟁터에서의 담덕은 국내성에서와 달리 잔뜩 날이 서 있었다.
얼굴 표정이며 말투, 작은 몸짓까지, 내게는 모든 모습이 낯설었다.
잘 벼려진 검처럼 날카롭게 전쟁에 집중하고 있는 담덕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지설과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그를 두고 조용히 저택을 나섰다.
전투는 짧았고 고구려군은 승리를 얻었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도 피해를 입었다. 백제군에 비하면 적은 수였지만 사람이 죽고 다치는 것은 그 수가 적고 많고를 떠나 모두 비극이었다.
나는 다시 성문 앞에 진료소를 열었다. 전쟁에서 다친 병사들이 많았던 탓에 진료소는 예전보다 훨씬 많은 환자들로 복잡했다.
검에 베이고 화살에 맞은 병사들이 몰려들자 의원은 하얗게 질린 얼굴을 했지만, 오히려 나는 마음이 편했다.
보이지 않는 속병을 앓는 사람보다 눈에 보이는 외상을 입은 이들을 치료하는 쪽이 더 직관적이었다. 나는 기계적으로 몸을 움직이며 정신없이 병사들의 상처를 치료했다.
“아가씨. 잠시 쉬었다 하시죠. 얼굴이 창백하십니다.”
의원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그 말에 허리를 펴 주변을 둘러보니 순간 머리가 아찔해졌다.
“아가씨!”
눈앞이 아득해져 휘청거리니 옆에서 의원이 나를 붙잡았다. 그에게 기대 몇 번 눈을 깜빡이니 다행히 금세 시야가 돌아왔다.
“괜찮아요. 잠깐 어지러워서…….”
의원에게 웃어 보이며 스스로 몸을 세웠지만 그의 얼굴에서 걱정스러운 기색은 사라지지 않았다.
“너무 무리하시는 것 아닙니까? 이러다 쓰러지기라도 하시면…….”
“쓰러지긴요. 내가 얼마나 튼튼한데요.”
일부러 턱을 치켜들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으나, 고생을 하기는 한 모양인지 몸에 영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 모습에 의원이 단호한 얼굴로 내 어깨를 붙잡았다.
“역시 안 되겠습니다! 잠깐 앉아서 쉬십시오! 식사도 하시고요! 아침부터 아무것도 못 드셨잖습니까?”
“그건 내가 별로 입맛이 없어서…….”
“맛으로 먹는다 생각지 마시고 약이다 생각하고 드십시오. 뭐라도 드셔야 할 것이 아닙니까?”
의원이 나를 끌어 억지로 의자에 앉히더니 진료소를 돕고 있던 여인을 시켜 요깃거리를 가져왔다.
“대단한 먹거리는 아닙니다만…… 배를 채울 정도는 됩니다.”
의원이 내민 것은 쌀과 조를 섞어 만든 주먹밥이었다.
나는 커다란 주먹밥 한 덩이를 받아 들고 멍하니 주먹밥을 바라보았다. 허기진 상태인 것은 분명한데 먹을 것을 보아도 먹고 싶은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미추성에서 이상한 꿈을 꾼 후로 쭉 이 상태였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몸과 마음이 지쳐 영 입맛이 돌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의원은 내가 주먹밥을 먹지 않는 이유를 다르게 생각한 모양인지 송구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드릴 것이 이런 것뿐이라…….”
“아니에요. 나도 주먹밥을 좋아하는데 정말 입맛이 없어서…….”
서둘러 진실을 말했지만 의원은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주먹밥을 가져온 여인도 내 눈치를 보며 안절부절못했다.
어쩔 수 없나. 억지로라도 먹어야지.
“맛있네요.”
나는 결국 한숨을 내쉬며 주먹밥을 한 입 베어 물었다. 그제야 여인이 안심한 얼굴로 돌아섰다.
맛있다고는 말했지만 사실 입안이 거칠해 주먹밥의 맛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억지로 음식을 먹은 탓인지 속이 울렁거려 토기가 밀려왔다.
먹던 것을 내려놓고 입을 틀어막으니 옆에 서 있던 의원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아가씨.”
조심스러운 부름에 고개를 들었더니 의원이 내게 질문을 던졌다.
“혹 언제부터 그리 입맛이 없으셨습니까?”
“글쎄요, 한 달 정도는 된 것 같은데…….”
“흠.”
묘한 침음을 흘리며 내 안색을 살피던 의원이 곧 내게 손을 내밀었다.
“제가 잠시 아가씨를 진맥해도 되겠습니까?”
“진맥? 나를요?”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의원은 물러설 줄을 몰랐다. 어쩔 수 없이 그에게 손을 내미니 그가 내 손목을 짚어 맥을 살피기 시작했다.
의원은 신중하게 맥을 읽었다. 심각하게 나의 맥에 집중하던 그가 한참의 진맥 끝에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뗐다.
“저…… 아가씨…….”
의원은 나를 부르고서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왜요? 무슨 일이기에 그러는데요?”
“그…… 혹…… 마지막 달거리가 언제였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나는 의원이 무엇을 의심하는지 곧바로 알아챘다.
혹 내가 임신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말도 안 되는 생각에 절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아는데, 그거 아니에요.”
“어찌 그리 확신하십니까? 짐작 가는 일이 전혀 없으십니까?”
의원의 질문에 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짐작 가는 일이 없지는 않았다.
그게 한 번뿐이라 문제지.
확률을 따진다면 단 하룻밤으로 아이가 생길 확률은 무척이나 낮았다.
내가 대답이 없자 의원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태맥(胎脈)입니다.”
태맥이라면 여인이 임신했을 때 나타나는 맥이었다.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 나를 보며 의원이 설명을 덧붙였다.
“아가씨께서도 아시지요? 활맥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좌척맥이 강하며, 촌맥은 미약합니다.”
나는 의원의 설명을 들으며 서둘러 내 손목을 붙잡았다. 눈을 감고 맥에 집중하니 과연 의원의 설명대로였다. 태맥이 확실했다.
“어떻게…… 이런…….”
당황해 입을 틀어막는 나를 보며 의원이 다시 한번 차분한 얼굴로 물었다.
“마지막 달거리는 언제 하셨습니까?”
“……몇 달 전이에요.”
내 대답에 의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면서도 어찌 임신을 의심하지 못했느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바보 같은 일이었지만 나라고 억울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난 달거리가 일정한 편이 아니에요. 게다가 최근엔 여러모로 일이 많아 신경이 날카로워졌고…….”
몸이 예민하고 섬세한 것인지, 정신적으로 압박을 받는 일이 있으면 몇 달씩 달거리를 건너뛰는 일이 종종 있었다.
아버지와 제신을 도압성으로 보낸 처음 몇 달 동안에도, 석현성에 포로로 잡혀 있던 동안에도 달거리가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으레 그런 일이려니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런데 임신이라니, 내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나는 멍하니 내 배를 바라보다 재빨리 담덕과 하룻밤을 보냈던 날을 계산해 보았다.
지금이 7월이고 담덕과 하루를 보낸 날이 4월이니까…….
대략적으로 계산하면 이제 곧 임신 4개월에 접어든다는 소리가 된다. 그동안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
의술을 배웠다는 사람이 자신의 몸에 이리 둔감하다니.
심경이 복잡했다.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이 놀라웠고, 여태까지 눈치채지 못한 스스로가 한심했다.
하지만 그 어떤 감정보다 더 크게 나를 사로잡은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담덕의 아이는 이 땅의 역사에서 무척이나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가 광개토대왕의 뒤를 이어 고구려의 전성기를 이끌어 갈 태왕, 장수왕이 되기 때문이다.
이 아이가 장수왕일까? 만약 그게 아니라면, 장수왕이 될 아이는 누구지? 혹 내가 이 아이를 가짐으로써 장수왕이 탄생하지 않는 거 아니야?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담덕이 광개토대왕이라는 것도, 그를 사랑하게 됨으로써 벌어질 많은 일들도 모두 각오했지만 막상 임신을 하니 머릿속이 복잡했다.
나는 떨리는 손을 배에 얹었다. 임신했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일까. 배 속에서부터 고요한 고동이 울리는 것 같은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감축드립니다.”
의원의 축하 인사에 정신이 번뜩 들었다. 나는 애써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하지만 폐하께는 비밀로 해 주겠어요?”
“예?”
의원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이 좋은 소식을 당장에라도 담덕에게 전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내가 직접 말하고 싶어서 그래요. 그러니 모른 척해 줘요.”
“그렇군요.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의원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말에 납득한 그의 모습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몸이 조금 무겁네요. 먼저 들어가서 쉬어도 괜찮을까요?”
“물론입니다. 무리하시면 안 되지요. 여기는 제게 맡기시고 푹 쉬십시오.”
의원이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나를 진료소 밖으로 떠밀었다.
* * *
나는 저택으로 돌아가는 대신 멀리 강이 보이는 성벽 위로 올라왔다. 잠시 혼자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선선히 부는 바람을 맞으며 떨어지는 해를 보고 있자니 복잡했던 마음도 조금씩 정리가 되는 것 같았다.
돌이킬 수 없어. 이미 나는 아이를 가졌어. 이 아이가 원래 장수왕이 될 아이가 아니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 아이를 그만큼 훌륭한 사람으로 키워 내야만 해. 처음부터 그런 각오를 가지고 담덕을 향한 마음을 인정한 거잖아?
몇 번이나 같은 다짐을 되뇌는 사이 해는 완전히 떨어져 사위가 어둠으로 뒤덮였다. 성벽 위를 밝히는 불빛만이 외로운 섬처럼 둥둥 떠 주위를 밝혔다.
이제 돌아가야지. 내가 있어야 할 곳으로.
나는 바람에 흔들리는 불빛을 바라보며 성벽에 기대고 있던 몸을 바로 세웠다. 성벽의 계단을 하나씩 오를 때마다 머릿속을 채웠던 생각들은 모두 떨쳐 버린 뒤였다.
떨어지는 해를 바라보며 되새겼던 다짐. 그것 하나만 안고 돌아가는 거야.
성벽을 오를 때와는 반대로 계단을 하나씩 내려갈 때마다 걸음이 가벼워졌다. 성벽 위에서 떨쳐 버린 두려움의 빈자리를 설렘이 채우기 시작한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담덕은 무슨 반응일까?
나는 머릿속으로 담덕의 반응을 상상해보았다.
처음에는 놀랄 것이다. 몇 번이고 장난이 아니냐고 물은 뒤에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는 기뻐하겠지.
그러고 보니 먼저 사고부터 치자는 말이 진짜가 됐잖아?
오래전 담덕에게 장난처럼 내뱉었던 말이 진실이 되어 버렸다.
그 사실이 우스워 나도 모르게 웃음을 흘리는 그때, 귓가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귓가를 자극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가만히 소리에 집중하니 점차 알 수 없는 소리가 선명해졌다.
신음 소리?
소리의 정체를 알아차리는 순간 상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살려…… 도와…….”
불분명하지만 누군가 도움을 청하고 있었다.
나는 놀라서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 소리는 성문 근처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진료소는 이미 닫았을 터인데. 거길 찾아온 환자일까?
하지만 성문 가까이 다다랐을 때에도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당황스러워 사방을 살피는 내게 성문을 지키던 장수가 다가왔다.
“아가씨, 무슨 일이십니까?”
“이상한 소리 듣지 못했어요?”
“이상한 소리요?”
장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사람의 신음 소리 같은……”
장수에게 조금 더 자세히 설명을 이어 가려는 순간 쿵 하고 성문이 울렸다.
“……이번엔 들었죠?”
“예. 저도 들었습니다.”
장수가 고개를 돌려 망루를 향해 외쳤다.
“밖에 무슨 일이 있는지 살펴라!”
“예!”
장수의 지시에 망루가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둠을 밝히기 위해 화살에 불을 붙여 아래로 쏘아 내린 병사가 곧 우리를 향해 다급히 뛰어 내려왔다.
“장군. 성문 앞에 사람이 하나 쓰러져 있습니다!”
“사람? 아군이었나, 적군이었나?”
“그것까지는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성문을 열어라. 살아서 귀환한 아군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려야 한다.”
잠시 고민하던 장수가 곧 결심을 굳힌 것인지 병사들에게 손짓했다. 그의 지시를 따라 병사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여 성문을 열었다.
육중한 소리와 함께 성문이 열리자, 문에 기대어 있었던 사람의 몸이 성안으로 쏟아지듯 넘어졌다. 문을 연 병사가 횃불을 들고 쓰러진 사람을 비추었다.
불빛에 드러난 사람은 젊은 남자였다. 등에는 화살이 여러 개 박혀 있었고, 하의는 피로 흥건히 젖어 원래의 옷 색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척 보기에도 위급해 보이는 모습에 나는 망설임 없이 남자에게로 뛰어갔다. 코에 손을 대니 미약하게나마 호흡이 남아 있었다.
“아직 살아 있어요! 진료소로 옮겨서 치료해야겠어요.”
“살려어…… 아프…… 으으…….”
내 목소리를 들은 남자가 신음 소리를 내며 손을 뻗었다. 도움을 청하는 간절한 손이 내 손에 닿았다가 힘없이 아래로 미끄러졌다.
내 손에 남자의 것으로 추측되는 피가 한가득 묻어났다. 나는 다급해져 병사들을 향해 외쳤다.
“뭐해요? 어서 이 사람을…….”
서둘러 고개를 들었지만 어쩐 일인지 장수며 병사들이 제자리에 못 박혀 움직일 줄을 몰랐다. 이상한 분위기에 나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왜 그래요?”
내가 미간을 찌푸리며 묻자 장수가 난처한 얼굴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백제군입니다.”
“네?”
나는 놀라서 쓰러진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의 어디에도 신분을 증명할 만한 근거는 보이지 않았지만, 병사들은 한눈에 그의 정체를 확신한 것 같았다.
혼란스러워하는 나를 보며 장수가 남자의 등에 박힌 화살을 가리켰다.
“저자의 등에 박힌 화살이 우리 고구려군의 화살입니다. 백제와 고구려의 화살은 형태가 달라서, 저희 같은 병사들은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습니다.”
그 말을 확인해 주기 위해 궁병 하나가 자신의 시복(矢箙)에서 화살을 꺼내 내 앞에 내밀었다. 두 개를 놓고 비교하니 무기를 잘 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두 화살의 형태가 꼭 닮아 있었다.
“그렇군요. 이자가 백제군…….”
나는 멍하니 주변을 바라보았다. 주위를 둘러싼 병사들이 일말의 동정심도 없는 싸늘한 시선으로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이 남자를 도와줄 마음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나는 다시 쓰러진 남자를 바라보았다.
“살려…… 살려 주…… 으으…….”
그는 사람들이 싸늘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도움을 청하고 있었다.
나는 멍하니 피가 묻은 내 손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어디에서 힘이 난 것인지 남자가 강하게 내 손을 붙잡아왔다.
“도와주십시오……! 제발……!”
이번의 말은 조금 더 분명했다. 남자의 형형한 눈빛이 정면으로 나를 향하고 있었다.
그 눈빛에 누군가 뒤통수를 강하게 내려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당신을…….”
멍하니 중얼거리는 내 옆에 서 있던 장수가 그를 발로 걷어찼다.
“더러운 백제 놈이 어디서!”
“크헉!”
남자는 저항도 하지 못하고 멀리 굴러갔다. 그러는 동안 화살이 부러지며 더 깊숙이 박혀 그가 고통에 몸을 비틀었다.
그 순간 내 몸이 통제를 벗어났다. 나는 그대로 남자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붙잡았다.
“조금만 참아요. 내가 치료해 줄게요.”
“아가씨!”
내 말에 장수가 놀라서 펄쩍 뛰었다.
“백제 놈입니다! 백제 놈들과 싸우느라 목숨을 잃은 우리 고구려 용사들이 몇인데 이놈을 살려 줍니까?”
“이 사람이 전부 죽인 것은 아니잖아요. 아니, 이 사람이 모두 죽였대도 난 이자를 치료해야겠어요.”
내 눈앞에 환자가 있다면, 상대가 누구든 치료한다. 그것이 의술을 배운 자의 의무였다.
상대가 살인마여도, 부모를 죽인 원수여도.
나의 의무는 언제나 같았다.
의원으로서 사람의 목숨을 살리고, 그가 온전한 목숨으로 죗값을 치르도록 한다.
“아가씨!”
“이 남자를 진료소까지 옮겨야 해요. 도와줄 거예요?”
나는 장수의 외침을 무시하며 그에게 물었다. 그는 입을 떡 벌린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와주지 않을 생각이군요. 그럼 방해하지 말고 비켜요.”
나의 말에 장수가 멈칫거렸다. 내가 이렇게까지 강하게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뭐해요? 비키라니까.”
나는 쓰러진 남자를 부축해 일으키며 장수를 바라보았다. 머뭇거리던 그가 한 발짝 옆으로 비켜섰다.
그 순간 주위가 소란스러워졌다.
“아니, 비켜서지 마라.”
소란과 함께 나타난 사람은 담덕이었다. 그는 서늘하게 가라앉은 얼굴로 나와 내 옆의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희. 지금 뭐하는 거지?”
“다친 사람이 있어서 살리려는 것뿐이야.”
“병사들이 말해 주지 않았어? 이 자가 백제군이라고.”
“말해 줬어.”
“그런데도 살리겠다고?”
“그래.”
내 대답에 담덕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네가 다친 자에게 마음을 쓰는 이유는 알아. 하지만 그자는 적군이다. 적군에게는 자비를 베푸는 것이 아니야. 오늘 호의로 베푼 나의 선행이 내일은 내 목을 겨눌 테니까.”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이 시대,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도 나의 의무를 이해하지 못한다. 나를 누구보다 잘 아는 담덕마저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니 이 순간 나는 혼자였다. 나는 말없이 쓰러진 남자를 부축한 채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우희.”
담덕이 나를 불렀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가 내가 아닌 병사들을 향해 지시를 내렸다.
“저놈의 목숨을 끊어라.”
내가 부축한 병사를 죽이라는 명령이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아니, 죽이지 마!”
“죽이라고 했다.”
“하지 말라고 했어!”
나와 담덕의 대립에 병사들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눈치를 살폈다.
“……제가 하죠.”
모두가 굳어 있는 순간 담덕의 뒤에 서 있던 지설이 정적을 깼다. 그는 검을 빼 들고 나서 망설임 없이 내가 부축한 남자의 복부에 찔러 넣었다.
“크, 허억…….”
무미건조한 검에 남자가 피를 토하며 무너져 내렸다. 나는 늘어지는 그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함께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 순간 복부에 꽂힌 검이 뽑혀 나가며 사방으로 피가 튀었다. 옆에 있던 나의 온몸에 피가 쏟아졌다.
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담덕이 내 눈앞에서 사람을 죽이라 명령했다는 충격과 사람이 죽는 모습을 바로 옆에서 본 두려움, 내 환자를 잃었다는 분노가 뒤섞여 손이 덜덜 떨렸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이유가 뭐야?”
혼잣말에 가까운 중얼거림이었다. 그러나 지독하게 고요한 분위기 덕분에 내 말은 쉽게 멀리 선 담덕에게까지 닿았다.
“지금은 전쟁 중이고 저자는 우리의 적이니까. 그 이상의 이유는 필요 없다.”
“전쟁이라고 모든 것이 정당화돼? 우릴 해칠 의지도, 그럴 능력도 없는 사람이었어.”
“그래. 맞아. 우릴 해할 능력이 없는 자였어. 하지만 그런 능력이 있을 때에는 우리에게 검을 휘둘렀지. 그 검에 죽어 나간 우리 병사들이 몇이었을까? 하나? 둘? 아니. 열 손가락으로 세기 힘들지도 모르지. 넌 그런 자를 살려서 뭘 하고 싶었어?”
“죽어 가는 사람이 있고, 난 그걸 살려. 그게 내가 해야 할 일이야. 죽어 가는 사람을 살리는 데 무슨 목적이 있어야 해?”
“전쟁에서는 필요해. 사람을 살리는 목적.”
멀리 서 있던 담덕이 큰 보폭으로 걸어 내 앞에 다가왔다. 그가 피로 엉망이 되었을 내 꼴을 보며 미간을 찌푸리더니, 곧 손을 뻗어 나를 일으켰다.
“이미 난 백제군에게 기회를 주었어. 검을 섞기 전, 우리에 투항하면 아무 것도 묻지 않고 고구려 사람으로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한데 누구도 나서지 않았지. 투항한 자는 받아들이되 끝까지 저항한 자는 죽인다. 그것이 내 법칙이야.”
나는 그의 시선을 외면한 채 주먹을 꽉 쥐었다. 머리 위로 담덕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는 내 팔뚝을 단단히 붙잡은 채 지설을 불렀다.
“지설.”
“예.”
“시체를 처리해라.”
“경고의 의미로 성문에 걸어 두겠습니다.”
죽인 것으로도 모자라 시체를 성문에 걸어 두겠다니.
반박하려고 고개를 번쩍 드는 순간 담덕이 내 팔을 잡아끌었다. 그의 손을 뿌리치려고 몸을 비틀었지만 소용없었다. 작정하고 힘을 쓰는 담덕을 내가 이길 수는 없었다.
담덕이 이렇게 나의 의지를 무시하고 제 행동을 밀어붙이는 건 처음이었다. 당황스럽고 화가 났다. 화를 낼 사람은 담덕이 아닌 나인데, 그가 화를 내고 있었다.
담덕은 나를 한참이나 끌고 가 인적이 드문 성곽 한쪽에 다다라서야 내 팔을 놓아주었다. 붙잡혔던 팔을 매만지며 담덕을 바라보니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우희, 네가 뭘 하려고 했는지 알아?”
“알아. 사람을 살리려고 했지.”
“사람이 아니라 적군이었어.”
담덕이 빠르게 내 말을 정정했다.
“네가 있는 이곳은 평화로운 국내성이 아닌 전쟁터야. 전쟁터에서는 적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 죄가 된다. 난 네가 죄를 짓게 둘 수 없었고.”
“적군도 사람이야! 전쟁의 승리보다는 인의(仁義)가 먼저고.”
“인의? 전쟁에서 패배해 모두 죽어 버리면 그때는 인의가 무슨 소용인데? 생각해 봐. 네 소중한 사람들이 적의 검에 죽었어. 그래도 넌 인의를 말할 거야?”
“……의술은 사람을 가리지 않아. 난 그런 의술을 행하는 사람이니 어떤 상황에서도 인의를 말할 수밖에 없어.”
내 대답에 담덕이 복잡한 얼굴로 머리를 짚었다. 할 말이 많아 보이는 얼굴이었으나,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길지 않았다.
“……이래서 널 전쟁터에 데려오기 싫었던 거야. 우리의 생각이 너무나도 다르다는 사실을 이런 식으로 알게 될 것이 분명했으니까.”
태왕으로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야 하는 담덕과 의원으로서 어떤 사람이든 살려 내야 하는 나. 서로가 추구하는 길이 이토록 달랐다.
누구도 틀린 사람은 없었다. 우리는 달랐고 각자에 길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네게 나를 준 이후로 난 네 말이라면 뭐든 따랐어. 내 친구, 내 여인 우희는 틀린 말을 하는 법이 없으니까. 그런데…… 미안하다. 오늘은 그리 못 하겠어.”
미안하다고 말하면서도 담덕의 얼굴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건 사과의 말을 듣는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흔들림 없는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먼저 고개를 돌린 쪽은 담덕이었다.
“날이 밝으면 지설과 함께 국내성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어. 아무래도 이곳은 너와 맞지 않는 것 같다. 아직 태림에게 연락이 오지 않았지만 지설과 함께라면 괜찮을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잘 대처할 수 있는 녀석이니까.”
단호한 통보였다. 내가 그 말을 거부하기도 전에 담덕이 몸을 돌려 멀어졌다.
“바람이 차다. 밤이 더 깊어지기 전에 저택으로 돌아가.”
점점 작아지는 담덕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니 다리에 힘이 풀렸다. 나는 제자리에 주저앉다시피 쪼그려 앉으며 두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일이 왜 이렇게 된 거지?
좋은 날이 될 줄 알았다.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당황스러웠지만, 그래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 사실을 들은 담덕이 분명 기뻐할 테니까.
그런데 좋은 소식을 전하기는커녕 담덕과 다투고 말았다. 이런 식으로 서로의 의견 차를 좁히지 못하고 돌아선 것은 처음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아이를 가졌다고 말할 수 있겠어?
나의 깊은 한숨과 함께 다사다난했던 하루가 저물고 있었다.
* * *
날이 밝자마자 지설이 나를 찾아왔다. 그는 평소답지 않은 난처한 얼굴로 내게 국내성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미 담덕의 뜻을 들은 뒤였으므로 나는 순순히 그를 따라나섰다.
“그…… 너무 폐하를 원망하지 마십시오.”
가라앉은 나를 보며 지설이 안절부절못했다. 언쟁을 벌인 것은 나와 담덕인데 외려 주변 사람들이 어쩔 줄을 몰랐다.
“모두 아가씨를 염려해서 한 행동이십니다. 어제 그 남자를 죽이라 명하신 것도, 지금 아가씨를 국내성에 돌려보내시는 것도 전부.”
지설을 슬쩍 보았더니 그가 기다렸다는 듯 설명을 쏟아 냈다.
“지금은 전시(戰時)입니다. 함께 훈련하던 동료가 그들의 검에 다치고 죽었지요. 하여 백제군에 대한 병사들의 적의가 극에 달해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가씨께서 백제 병사를 살리시면 병사들의 미움을 한 몸에 사셨을 겁니다. 사실 그런 시도를 하신 것만으로도 병사들이 좋지 않은 말들을 떠들고 있어요. 폐하께서는 아가씨께서 그들의 비난을 듣지 않기를 바라신 겁니다.”
“알아요.”
“살려서 구슬린 뒤에 백제군의 정보를 얻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예전에 백제군이 이런 식으로 접근해온 뒤 식량창고에 불을 지르려고 한 적이 있어서…… 그 이후로는 상당히 경계하고 있습니다.”
“그랬군요. 이해했어요.”
지설은 짧은 나의 대답을 믿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게 더 이상의 말을 전하지도 않았다. 묵묵히 앞을 바라보는 내 얼굴에서 무엇을 말하든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애초에 담덕을 이해하지 못해 그와 언쟁을 벌인 것이 아니었다.
그저 우리가 너무 다른 사람이라서.
그래서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나는 담덕을 이해했지만, 그만큼 나의 뜻도 중요했다.
우리는 침묵 속에서 묵묵히 국내성으로 말을 몰았다.
* * *
지설과 내가 국내성에 도달했을 때에는 승전 소식으로 국내성이 이미 축제 분위기였다. 우리보다도 수곡성에서의 승리 소식이 먼저 국내성에 도착한 것이다.
하지만 국내성에 전해진 것은 수곡성에서의 승리 소식만이 아니었다.
“우희야!”
내가 국내성에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제신이 곧장 궁으로 나를 찾아왔다. 그의 얼굴은 무척이나 심각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오라버니,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어째서 연통에 답을 하지 않았어? 몇 번이나 전령새를 보냈어.”
“그건…….”
내 말에 제신의 얼굴이 더욱 심각해졌다. 문을 열어 복도를 살핀 그가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태림에겐 이미 사정을 말했지만…… 간단히 말하면 내게 연통이 오지 않았다.”
마주 앉은 제신의 목소리는 한층 낮아져 있었다.
“그럴 수가 있어? 비로의 전령새는 철저한 훈련을 받은 새들이잖아.”
“그래. 그러니 길을 잘못 들었을 리는 없어. 다시 너희에게 돌아갔으니 피격을 당한 것도 아냐. 중간에 누군가가…… 연통을 가로챈 거지.”
“그런 게 가능한 사람은……”
“응. 비로 사람뿐이다.”
제신의 대답에 순식간에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예상하고 있던 사실이지만 제신의 입에서 확답을 들으니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오라버니에게 이런 말 하고 싶지 않지만, 운 도령이 다로를 의심하고 있어.”
“……그것도 들었다. 미추홀에서 다로가 전한 소문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고.”
가장 가까운 친우가 좋아하는 여인을 의심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 의심이 무척이나 합리적이었다. 복잡한 제신의 얼굴이 괜히 내가 미안해져 입을 꾹 다물자 그가 쓰게 웃으며 내 머리를 헤집었다.
“네가 그런 얼굴 할 것이 뭐라고.”
“그래도……”
“너는 네 일만 신경 쓰면 된다. 간자를 색출하고 처벌하는 일은 내 몫이니까.”
“다로가 아닐 수도 있어. 그런 일을 할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는걸. 내 눈도, 오라버니의 눈도 틀리지 않았을 거야.”
“나도 그렇게 믿고 싶지만 감정을 배제하고 사실만을 봐야지. 그래야 비로의 수장이 아니겠니?”
“오라버니…….”
안쓰러운 얼굴로 제신을 바라보니 그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네 이야기가 급하다. 너에 대해 좋지 않은 소문이 돌던데 어찌 된 일이야?”
“좋지 않은 소문이라니?”
“아직 듣지 못한 것이냐?”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자 제신이 난처한 얼굴로 제 머리를 벅벅 긁었다.
“수곡성에서의 승전 소식과 함께 연씨 가문의 딸이 고구려를 배신했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내가 고구려를 배신했다니?”
“고구려의 원수인 백제군을 살리려고 했다고, 이전에 이미 백제의 왕을 살려 준 적이 있다고. 그런 소문이 돌고 있다.”
단순한 소문이 아니었다. 수곡성에서 백제군을 살리려 한 것도, 과거에 아신을 살린 것도 모두 진실이었다.
담담한 내 얼굴을 보며 제신의 얼굴이 미세하게 구겨졌다.
“정말 백제군을 살리려고 한 거로구나.”
“저항할 능력이 전혀 없는 자였어.”
“그래. 네 마음이야 이해하지만……. 하필 전시에 백제군을……. 공격당하기 너무 좋은 상황이다.”
제신이 답답하다는 듯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게다가 오래전 백제 왕을 살린 것이 더해져 널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아. 백부님께서 그건 포로였을 적 모두를 구해 내기 위해 한 일이라 열심히 방어를 하고는 계시지만, 오랜만에 건수를 잡은 소노부가 신이 나서 물어뜯고 있어.”
“하지만 어떻게 내가 아신을 살려 준 것이 알려진 거야? 이런 상황이 발생할 것을 우려해 포로들이 어찌 풀려났는지는 알리지 않았잖아.”
포로로 잡혀 있을 때 어쩔 수 없이 한 일이기는 하나 여러모로 꼬투리를 잡히기 좋은 일이었다. 하여 담덕은 포로들이 풀려날 수 있었던 까닭을 비밀에 부쳤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국내성에 공공연히 떠돌고 있었다.
“소수의 인원은 사정을 알고 있었지. 함께 포로로 끌려간 이들이나, 폐하의 최측근들, 그리고…….”
“비로 사람들까지.”
또다시 비로였다. 시선을 교환한 나와 제신의 표정이 그대로 굳어졌다.
* * *
소문은 빠르게 퍼져 나가 사라질 줄 모르고 국내성을 떠돌았다. 인터넷이 있는 현대라면 모르겠지만, 모든 소문이 구전(口傳)을 통해 만들어지는 고대인데도 이상하리만치 소문이 퍼지는 속도가 빨랐다.
누군가 일부러 소문을 퍼트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소문은 거리의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를 통해 국내성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요희(妖姬)가 태양(太陽)을 홀려 하늘을 백잔(百殘 : 백제를 낮추어 이르는 말)에 바친다네.’
요희는 요사스러운 우희를, 태양은 태왕인 담덕을 뜻하는 말이었다. 노래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거리를 지나면 어디서나 이 노래가 흘러나올 지경이었다.
절노부 저택의 대문에는 매일같이 오물이 끼얹어졌고, 궁 안의 시녀들은 나와 마주칠 때마다 떨떠름한 얼굴로 인사하고 돌아서 뒤에서는 싸늘한 얼굴로 수군거렸다.
이런 상황에 가장 분노한 것은 내가 아닌 담덕이었다. 수곡성에서 돌아온 그는 휴식을 취할 새도 없이 소문의 진원지를 찾기 위해 분주했다.
비로도 바쁘게 움직였다. 안에 숨어 있을 간자를 찾는 문제로도 머리가 아픈데 국내성에 퍼진 소문까지 잡아야 했다.
모두가 골머리를 앓고 있는 와중에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내가 나서면 오히려 역효과를 낸다는 제신의 뜻에 따라 나는 궁에 틀어박혀 두문불출했다.
담덕도 발길을 끊었다. 담덕은 소문이 퍼져 있을수록 더욱 평소처럼 움직여야 한다고 믿었지만, 나를 찾을 때마다 제가 회의의 비난이 쏟아져 결국 발길을 끊을 수밖에 없었다.
홀로 방 안에 틀어박혀 있는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 것뿐이었다. 나로 인해 절노부가, 담덕이 곤란해졌다.
내 행동이 가져온 문제야. 해결할 수 있는 사람도 결국 나뿐이겠지.
이 문제는 내가 상처 입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을 문제였다. 사람들에게 비난받고 돌을 맞더라도 내가 나서야 했다.
나는 그러한 뜻을 몇 번이나 제신과 담덕에게 전했다. 하지만 그들은 내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어떻게든 내가 다치지 않도록 보호하고 싶어 했다.
이대로는 안 돼. 나를 비난하는 건 괜찮지만 그것이 담덕의 입지까지 흔들리게 한다면…….
내가 항상 두려워하던 순간이었다. 나로 인해 무엇인가가 어긋나지 않을까 하는 걱정. 그것이 현실이 되고 있을 때의 두려움. 모든 것이 나를 짓눌렀다.
예상하지 못한 손님이 나를 찾아온 것은 그즈음이었다.
“아가씨.”
입맛이 없어 눈앞의 음식을 뒤적이고 있는 내게 소리 없이 누군가가 다가왔다. 익숙한 목소리였지만 이곳에 나타나기 힘든 사람이었기에 나는 놀라서 고개를 번쩍 들었다.
“다로.”
환청을 들은 것인가 했는데, 고개를 든 곳에는 정말 다로가 있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화려한 유녀의 옷이 아니라 검은 무복(武服)을 입은 모습이었다.
“여긴 어찌 왔어요?”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왔지요.”
“궁 안이에요. 감시가 삼엄했을 텐데.”
“네. 하지만 저는 할 수 있어요.”
“……역시 평범한 유녀는 아니었군요.”
“무술을 배웠습니다. 아주 알량한 재주지만요.”
“근위대의 눈을 피해 여기까지 온 사람이 할 말은 아닌 듯한데요.”
경계심이 가득 담긴 나의 말에 다로가 웃었다.
“너무 경계하지 마세요. 아가씨를 도와드리고 싶어서 온 것입니다.”
“정말 날 돕고 싶은 거라면 당당하게 궐문을 통해 들어와야겠죠. 이리 몰래 나를 찾는 것이 아니라.”
“그리 생각하신다면 어쩔 수 없지요.”
권하지도 않았는데 다로가 나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복장은 평소와 달랐지만 의자에 앉는 움직임은 여전히 우아하고 유려했다.
“요희가 태양을 홀려 하늘을 백잔에 바친다네.”
귀에 못이 박이게 들은 노래가 다로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고운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는 내용에 맞지 않게 영롱했다. 멍하니 그 노래를 듣고 있으니 다로가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제가 만든 노래입니다. 듣기에 어떠신가요?”
“설마 했는데 정말 당신이…… 미추홀의 소문도 다로가 거짓으로 꾸며 낸 건가요?”
“네.”
“그래서 당신이 얻는 이익이 무엇인데요?”
“그 소문을 들으면 아가씨께서 직접 백제 땅으로 가실 테니까요. 그곳에서 아가씨가 백제 왕과 마주치길 바랐습니다. 백제 왕과 아가씨의 연결 고리가 드러나면 황후가 되긴 힘드실 테니까요. 고구려 백성 어느 누구도 백제 왕과 인연이 깊은 여인이 황후가 되길 원하지 않는답니다.”
정말 다로가 간자였다.
이제 명확히 알게 되었는데도 생각보다 충격이 크지 않았다. 미추홀에서부터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서였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다로를 마음에 품은 오라버니를 떠올리자 눈앞이 아득해졌다.
“왜 그랬어요?”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입술을 깨물었다. 좋아하는 사람을 곤란하게 하는 다로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오라버니를 좋아하는 줄 알았어요.”
“정확히 보셨습니다. 저는 그분을 연모해요.”
돌아오는 대답은 무덤덤했다. 눈을 떠 다로를 보니 눈을 내리깐 그녀의 얼굴이 조금 슬퍼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일을 벌인 건가요?”
“처음부터 도구로 쓰이기 위해 길러진 몸. 이제 와 마음을 품었다고 무엇이 달라질까요? 변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전 간자이고, 무슨 수를 쓰든 아가씨를 폐하의 곁에서 떼어 내라는 명을 받았어요.”
“누구로부터요?”
“이미 짐작하고 계시잖습니까.
다로의 말이 맞았다. 이런 일을 벌일 사람이라면 소노부뿐일 테니까.
담덕을 끊임없이 밀어내려다, 그의 전공이 높아지며 그것이 불가능해지자 황후를 자신들의 사람으로 세우려 했지. 그러려면 내가 사라져야 했다.
떨리는 손을 꽉 쥐는 나를 보며 다로가 짧게 말했다.
“떠나세요.”
“난 안 떠나요. 담덕의 곁에 있기로 결심했으니까.”
오랜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담덕에 대한 마음을 인정하기 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그를 떠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지금 나는 아이까지 있어.
하지만 이어서 들려온 다로의 말이 나의 결심을 흔들었다.
“더 심한 소문이 퍼질 거예요. 아가씨와 백제 왕이 미추홀에서 밀회를 가졌다는 이야기가 나올 겁니다.”
“밀회라고요?”
더럽고 황당한 소문이었다. 하지만 내가 미추홀에서 아신을 만난 것은 사실이니 오해의 소지가 분명히 있었다.
“태림과 운 도령이 함께 갔어요. 그게 헛소문이라는 걸 말해 줄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가씨.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상관없습니다. 사람들은 그저 떠들고 싶을 뿐이에요. 백제 왕과 내통한 여인이라니. 이 얼마나 자극적이고 흥미로운 일입니까?”
다로의 말이 옳았다. 사람들은 언제나 흥미로운 이야기를 좇았다. 그것이 진실인지는 상관없었다. 이미 비난받고 있는 자의 소문이라면 더욱 즐기기 좋았다.
“사람들은 아주 쉽게 믿을 겁니다. 아가씨께서 과거에 백제 왕을 살렸다는 소문이 퍼진 지금에서는요. 그 소문이 퍼지면 돌이킬 수 없어요.”
“하, 하하…….”
기막힌 상황에 웃음이 나왔다. 오래전 살기 위해 아신을 고쳤다. 의원으로서의 의무이기도 했다. 지금 다시 그날로 돌아간대도 나는 또다시 아신을 치료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날의 일이 오늘날 나를 깎아내릴 빌미가 되었다.
나의 명예?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에 대한 소문들이 담덕을 흔들고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담덕은 나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내가 어떤 소문에 휩싸여도 나를 믿고 감싸 주겠지.
하지만 그러는 동안 담덕에게 상처가 난다. 내가 가장 바라지 않는 일이었다.
“게다가.”
입술을 질끈 깨무는 나를 향해 다로가 지금까지와는 달리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아이를 가지셨다면서요.”
나는 놀라서 눈을 떴다. 아직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 사실이었다. 그걸 아는 자는 나와 나를 진맥했던 의원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금세 상황을 이해했다. 내가 백제군을 살리려 했다는 사실마저 알고 소문을 만들어 낸 사람도 다로였다. 이미 거기까지 상황을 파악하고 있어도 이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사람들은 아직 몰라요. 제가 말하지 않았으니까.”
“왜 아직 말하지 않았죠?”
“그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아가씨를 폐하의 곁에서 떼어 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을 테니까요. 태왕의 핏줄을 가진 여자를 그들이 절대 살려두지 않을 겁니다. 아가씨께서 황후가 되든 되지 않든, 태왕의 핏줄이 그들에게 엄청난 위협이 될 테지요. 분명 아가씨의 목숨까지 위험해집니다. 저는 그것까지는, 그렇게는 둘 수 없습니다. 그게 제가 지금 여기 있는 이유에요.”
“모두를 배신했으면서 이제와 내 목숨을 걱정하는 건가요?”
“네. 걱정합니다. 아가씨께서 저를 친구로 여기며 다정히 대해주셨기에, 저도 감히 아가씨의 친구 된 마음으로 간절하게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렇게 말하는 다로의 얼굴은 참담했다. 그래서 그녀의 말이 거짓 아닌 진심임을 알 수 있었다.
“제발 국내성을 떠나세요. 모두의 눈을 피해 조용한 곳으로, 고구려 땅에는 그들의 눈이 닿지 않는 곳이 없으니 차라리 다른 나라로, 그렇게 멀리 떠나세요. 그들이 비로에 심어둔 사람도 저 하나만이 아닙니다. 자취를 감추는 것. 그것만이 목숨을 보전하는 방법이에요. 아가씨에게도, 복중의 아이에게도.”
죽음이라는 말보다 아이라는 말에 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하루빨리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의원을 죽여 입을 막았지만, 그가 죽기 전에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를 흘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목적을 위해 무슨 짓이든 해요. 폐하께는 아직 그들을 저지할 힘이 없습니다. 누구보다 제가 잘 알아요.”
다로의 말이 옳았다. 담덕은 아직 완전하게 왕위를 틀어잡지 못했다.
먼 훗날에는 담덕이 진정한 이 나라의 태왕으로 우뚝 설 것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지금은 오랫동안 이 땅의 권력을 잡아 온 소노부의 수장, 그가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시점이었다.
차마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술을 질끈 깨무는 나를 보며 다로가 씁쓸하게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발 도망치세요. 살아야 훗날도 도모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이게 지금 이 다로가 아가씨의 친구로서 드릴 수 있는 유일한 조언입니다.”
그렇게 말한 다로가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소리 없이 조용히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다로가 온 적이 없었던 것처럼 내부가 조용했다.
불길했던 꿈은 담덕의 위험을 알리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비극을 암시하는 것이었나.
나는 지독하리만치 무거운 고요에 짓눌려 가슴을 움켜쥐었다.
* * *
날이 맑았다. 나는 창을 활짝 열고 방 안을 환기했다. 쏟아지는 햇살에 눈이 부셔 손으로 빛을 가리니 뒤에 서 있던 달래가 웃으며 말을 걸었다.
“아가씨. 오늘은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그러니?”
“예. 요즘 계속 우울해 보이셔서 걱정했는걸요. 한데 오늘은 아침부터 식사도 깨끗하게 비우시고, 고운 옷도 찾아 입으시니 제 마음이 놓입니다.”
“내가 달래 네게까지 걱정을 끼쳤구나.”
“그걸 아시면 이제 기운 좀 내십시오. 어디 저뿐입니까? 제신 도련님께서도 제게 매일 아가씨의 안부를 물으십니다. 고작 그런 소문이 뭐라고요? 폐하께서는 신경도 쓰지 않으시면 됐지요!”
달래가 들으란 듯이 크게 외치며 수군거리며 지나가는 시녀들을 흘겨보았다. 쩌렁쩌렁 울리는 달래의 목소리에 시녀들이 화들짝 놀라 창가에서 멀어졌다.
“그래. 네 말이 옳다. 고작 그런 소문이 뭐라고.”
“그렇지요? 소문을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이러다 또 사라지는 게 소문입니다.”
“달래 네가 그런 것도 아니?”
“그럼요! 원래 소문은 저 같은 몸종들이 제일 잘 아는 법입니다.”
“제법 일리가 있는 말이구나.”
“제법 일리가 있는 정도가 아닙니다. 제가 소문에는 빠삭하다니까요.”
달래가 들뜬 목소리로 떠들었다. 요즘 풀이 죽어 있는 내 기분을 띄워 주기 위해 부러 더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다.
참으로 고마운 아이였다. 몸종이지만 내게는 자매 같았다. 오라버니인 제신에게 못 하는 이야기도 같은 여자인 달래에게는 모두 할 수 있었다.
“왜 그리 보세요?”
달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더니 묘한 기운을 느낀 그녀가 의아하게 물었다. 나는 재빨리 고개를 저으며 창틀에 기대고 있던 몸을 바로 세웠다.
“폐하를 만나러 갈 거야.”
“폐하를요?”
내말에 달래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그…… 제신 도련님께서 한동안 폐하와는 만나지 않는 게 좋겠다고……”
“새삼스럽게 왜 그러니? 내가 언제 오라버니의 말을 들었다고!”
“……하긴 그렇지요?”
나와 달래의 눈이 마주침과 동시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