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장. 간자(間者)
국내성으로 연통을 보내고 난 뒤에도 복잡한 마음은 가라앉을 줄을 몰랐다.
다로가 배신자라고?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곱게 웃던 다로의 얼굴을 떠올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직 확실한 것이 아냐. 확실해질 때까지는 나쁜 생각 하지 말자.
나는 제신이 빠르게 답장을 보내 불안한 나의 마음을 다잡을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국내성으로 보낸 연통의 답장이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전령새를 통해 보낸 연통이었다. 일주일이 지났으니 벌써 몇 번이나 서신을 주고받고도 남을 시간. 이상하리만치 늦어지는 답신에 불안감이 커져 갔다.
하지만 불안한 기색을 겉으로 드러낼 수는 없었다. 여전히 우리에게는 할 일이 있었다.
나는 아신이 제공하는 거처에 머무르며 약재를 구하러 온 의원의 역할에 최선을 다했다. 매일 저녁 아신이 식사에 초대해 시답잖은 이야기들을 묻곤 했으므로 조금이라도 빈틈을 보일 수가 없었다.
운은 병사들과 가까이 지내며 아신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경계하던 백제의 병사들도 운의 넉살에 완전히 넘어갔는지, 이제는 그가 곁에 있는 것도 잊고 훈련이니 작전이니 하는 이야기들을 쏟아 낸다고 했다.
아직까지 쓸 만한 정보는 건지지 못했지만 운은 곧 괜찮은 이야기도 들을 수 있을 것 같다며 기대를 하고 있었다. 그의 바람대로만 된다면 다가올 전쟁에서 고구려는 상당히 유리한 위치에 설 수 있었다.
그에 비해 태림은 날이 바짝 섰다.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판단했는지 호위 수준을 강하게 높여 내 곁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지지부진하게 상황이 흘러가는 사이 백제와 고구려의 긴장이 더해 가고 있었다.
편안하게 늘어져 지내던 병사들 사이에 언제부턴가 긴장감이 서리기 시작한 것을 보니 아무것도 모르는 나 역시 전쟁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번 목표는 수곡성이라는군. 수곡성을 치려면 예성강을 건너야 하니, 그 전에 강을 마주 보고 있는 석현성을 치는 게 순서지. 이번 전장은 그쪽이 될 것 같다. 지금 우리 군대는 관미성의 방비에만 집중하고 있는데…. 정말이라면 골치가 아프겠어.”
운이 피곤한 얼굴로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그렇게 병사들과 어울리더니 결국 쓸 만한 정보를 얻어 낸 모양이었다.
“수곡성과 석현성이라면 이곳에서 한참이나 멀리 떨어진 곳 아닙니까?”
태림이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운이 얻어 온 정보가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지는 듯했다.
“아신왕은 전쟁이 벌어지면 선봉에 서지는 않더라도 가까운 성에 주둔하며 전황을 살핀다고 했습니다. 한데 이곳 미추성에서 수곡성과 석현성은 너무 멉니다.”
태림의 말대로였다. 아신이 고구려와의 전쟁을 중시해서 전쟁이 벌어지면 전투가 벌어지는 곳과 가까운 성에 자리를 잡고 전황을 살핀다는 이야기는 유명했다.
한데 이곳 미추홀에서 수곡성은 너무 멀었다. 이번 전쟁의 전장이 수곡성과 석현성 일대로 정해졌다면, 아신은 미추성이 아닌 팔곤성 인근에 머무르고 있어야 했다.
이상한 점은 더 있었다. 개전(開戰)을 기다리는 병사들의 태도였다.
“수곡성과 석현성 쪽에서 전쟁이 벌어질 거라면…… 여기에 있는 병사들이 어째서 이토록 긴장하고 있는 걸까요? 전선이 수곡성과 석현성이라면 여기에 있는 병사들은 참전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잖아요?”
내 말에 태림도 동의했다.
“맞습니다. 전쟁을 앞두고 이동이 길어지면 시작도 전에 사기가 떨어지니, 여기에 있는 병사들을 참전시키기로 했다면 오래전에 이동을 지시했어야 합니다. 한데 그런 움직임은 없더군요.”
“병사들이 군기가 바짝 들었기에 전 이번에도 미추성에서 가까운 관미성에서 전투가 벌어질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한데 수곡성과 석현성이라니…….”
“뭐, 급박하게 이동하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니까.”
운이 미심쩍은 얼굴을 하면서도 어깨를 으쓱거렸다. 하지만 태림은 그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런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면 군단의 구성이 이상합니다. 빠르게 이동하고자 한다면 기병이 있어야 하는데 이곳 미추성에는 보병과 궁병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갈수록 의문점이 늘어났다. 우리 세 사람은 갑갑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 * *
불안한 마음 때문이었는지 나는 한동안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입맛도 뚝 떨어져 밥 생각도 들지 않았다. 며칠째 과편만 조금씩 먹는 나를 보며 태림과 운이 걱정을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두 사람이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내밀어도 입맛이 동하지 않았다. 국내성에서 제신이 연통이라도 보내 준다면 한결 마음이 놓일 텐데, 최초로 보낸 연통 이후에도 몇 번이나 더 연통을 보냈지만 제신에게서는 아직까지도 답신이 오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기이한 꿈을 꾸었다. 며칠째 잠을 설치다 쏟아지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낮잠에 빠져든 날이었다.
꿈속에서 나는 광활하게 펼쳐진 바다를 마주하고 있었다. 평화롭게 넘실대는 바다 위에 따뜻한 햇살이 부서졌고, 나는 보석처럼 반짝거리는 바닷물이 아름다워 치마를 걷어들고 바다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아름다운 풍경은 오래가지 않았다. 맑았던 하늘에 곧 먹구름이 몰려와 천둥 번개가 치기 시작한 것이다.
서둘러 바다를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뭍을 향해 뛰어도 내 걸음은 제자리만 맴돌 뿐이었다.
그러는 동안 요란한 빗줄기가 쏟아졌다. 나는 쏟아지는 빗줄기를 맞으며 추위에 몸을 덜덜 떨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바다에 빠져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쯤이었다. 수평선 저 멀리서 무엇인가 거대한 것이 빠른 속도로 나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나는 얼굴에 들이치는 빗물을 닦아 내며 내게 날아오는 것의 정체를 파악하려고 애썼다. 몇 번이나 얼굴의 빗물을 닦아 낸 끝에 시야가 분명해졌다.
“용?”
수평선 너머에서 나를 향해 날아온 것은 다름 아닌 용이었다. 용도 보통 용이 아니었다. 태양처럼 상서로운 황금빛을 한 황룡이었다.
용이 날아오는 길마다 먹구름이 걷히고 있었다. 바다 멀리서부터 요란하게 쏟아지던 빗줄기가 멈추더니, 용이 내 앞에 다가왔을 때에는 내 얼굴에 들이치던 비도 사라진 뒤였다.
나는 황홀한 기분으로 황룡을 바라보았다. 손을 뻗어 은은하게 황금빛을 발하는 비늘을 만지자 용이 몸을 뒤틀며 내 주변을 맴돌았다.
용에게 표정이 있을 리가 없는데도 나는 용이 웃고 있다고 생각했다. 추운 바닷물 속에 있는데도 몸이 따뜻하고 마음이 편안했다.
모두 황룡이 가져온 따뜻함 덕분이었다. 나는 고마움을 담아 용의 뿔을 쓰다듬었다.
그 순간 용과 나의 눈이 마주쳤다. 용의 눈은 신비했다. 깊고 따뜻했으며, 어딘가 모를 친근함이 들었으나 마음 한구석에서는 경외심이 들었다.
그렇게 기묘한 눈으로 나를 보던 용이 별안간 구슬픈 울음소리를 내며 유리알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왜 우니? 뭐가 그리 슬퍼?”
나는 당황스러워 용의 몸을 쓰다듬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용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 더욱 굵어질 뿐이었다.
용의 눈에서 떨어진 눈물은 바다에 떨어져 붉은 피로 변했다. 나는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쳤지만 어디를 가나 붉게 물들어 가는 바다였다.
도망칠 곳이 없었다. 어느새 내 옷마저 붉은 피로 물들어 온몸에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아아악!”
나는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어났다. 꿈을 꾸며 흘린 땀으로 온몸이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내 비명 소리를 들은 것인지 태림이 놀란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하지만 태림의 부름에도 나는 쉽게 현실로 돌아오지 못했다. 조금 전까지 몸에 닿았던 물의 감촉과 코끝에 닿았던 피비린내가 선명했다.
“우희 님!”
태림이 내 어깨를 강하게 잡아 흔들었다. 그제야 멍하니 꿈속을 헤매던 정신이 현실로 돌아왔다. 점차 선명해지는 나의 시선에 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러십니까? 어디 몸이 안 좋으세요?”
“아뇨…… 그게 아니라…… 내가 이상한 꿈을…….”
더듬거리며 흘러나온 말에 태림이 멍한 얼굴을 했다.
“……꿈이요?”
“네. 너무 선명해서 현실처럼 느껴지던 꿈이었어요. 비가 왔는데, 용이 와서, 눈물이 피로 변하고…….”
횡설수설하는 나를 보며 태림이 다시 한번 강한 힘으로 내 어깨를 붙잡았다.
“그저 꿈입니다. 밖을 보십시오. 비는커녕 날이 맑기만 합니다.”
나는 태림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의 말처럼 창밖은 먹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바다…….”
“예?”
“바다에 가 봐야겠어요.”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다급하게 밖을 향해 걸었다. 그 뒤를 태림이 다급하게 따라붙었다.
“갑자기 바다라니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태림이 답답한 얼굴로 물었지만 대답할 정신이 없었다. 바다가 멀쩡하다는 것을 보아야 이 불안한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았다.
* * *
나는 무작정 바다를 향해 달렸다. 방을 나서서 눈에 보이는 말을 아무렇게나 잡아타고 나루터까지 내달렸다.
하지만 정신없이 서둘렀던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나루터의 풍경은 평화로웠다. 꿈속에서 보았던 섬뜩한 풍경이 모두 환상에 불과하다고 분명하게 말해 주는 것 같았다.
나는 그제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 위에서 내려왔다. 땅에 발을 딛자마자 뒤늦게 나를 따라온 태림이 말에서 뛰어내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보십시오. 아무 일도 없습니다.”
나를 따라잡느라 서두른 탓인지 태림이 드물게 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뒤늦게 미안함이 밀려왔다.
어린애도 아니고 이상한 꿈을 꿨다고 호들갑을 떨어 대다니.
정신없이 내달린 것이 부끄러워져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미안해요. 꿈이 너무 생생해서…….”
“아닙니다. 최근 계속 불안한 일들뿐이었으니, 작은 꿈에도 놀라실 수밖에요.”
나의 사과에 태림이 고개를 저었다. 대신 그는 숨을 고르며 주변을 살폈다. 미추성에 들어선 이후 바다를 다시 찾은 건 처음이었다.
바다는 처음 미추홀에 닿았던 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쪽에는 짐을 싣기 위한 배들이 나란히 줄지어 섰고, 다른 한쪽에는 물자와 사람을 나르는 배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평화로우면서도 분주한 나루터의 풍경.
“응?”
천천히 주위의 풍경을 살피던 나는 처음 바다에 내리던 날과 다른 것을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태림. 저게 뭐죠?”
나루터 한쪽 구석에 작은 배들이 한가득 모여 있었다.
“형태를 보아하니 상선(商船)입니다. 작고 가벼운 대신에 속도가 빨라서 물건을 빨리 이동시켜야 하는 상인들이 많이 쓴다고 들었습니다. 저희가 타고 온 배도 일종의 상선인데, 저것보다 크기가 조금 더 큰 대신 속도가 조금 느렸지요. 그런데…….”
내가 가리킨 배를 보며 대수롭지 않게 설명을 이어 가던 태림이 곧 미간을 찌푸렸다.
“개인이 움직이는 상선이라기엔 규모가 상당하군요. 열 척 정도 되는 것 같은데…… 아무리 미추성의 교역이 활발하다고는 해도 저렇게까지 많은 배를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습니다.”
태림이 의심의 눈초리로 모여 있는 상선들을 바라보았다.
“그러게요. 배는 만들기가 어려워 가격이 꽤 나간다고 들었는데, 저리 많은 배를 가지려면…….”
나 역시 의심스러워져 상선들을 빤히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열을 맞춰 나란히 묶여 있는 상선 앞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태림.”
나는 생각할 것도 없이 태림을 끌어당겨 나루터 앞에 쌓인 물건 뒤로 몸을 숨겼다.
“우희 님?”
얼떨결에 내 손에 끌려온 태림이 의아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나는 대답 대신 조심스럽게 물건 밖으로 고개를 빼며 상선 앞에 선 사람을 가리켰다.
“태림. 저기 상선 앞에 서 있는 사람, 누구인지 보여요?”
태림이 내 뒤에서 살짝 고개를 빼는 것이 느껴졌다. 곧이어 그의 입에서 허탈함과 당황스러움이 동시에 느껴지는 짧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저건 아신왕 아닙니까?”
아신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매일 저녁 식사 시간을 제외하면 저택에서 그의 얼굴을 보기 힘들 정도였으니 미추성에서 중요한 할 일이 있으리라는 것은 짐작했다.
하지만 상선과 아신이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전쟁이 코앞으로 다가온 지금 시점에 백제의 왕이 대규모의 상선을 운용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미추성의 물자를 전쟁이 벌어질 수곡성과 석현성 인근에 보내려는 것이 아닐까요?”
태림의 추측은 그럴듯했다. 하지만 지난 전쟁들에서 백제가 보인 움직임을 고려하면 꺼림칙한 구석이 있었다.
“여태까지 백제는 최소한의 군수품을 가지고 와서 나머지는 현지에서 조달하는 방식을 썼다면서요? 그래서 매년 수확기를 기다려 전쟁을 벌였고, 올해도 상황이 비슷해요. 그런데 이번에만 외부에서 물자를 가져온다고요? 번거롭게 이렇게 많은 배를 준비해서?”
“그것은…….”
태림이 말끝을 흐렸다. 우리 둘만으로는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나는 전쟁을 잘 몰랐고, 태림은 머리를 굴리는 것보다 몸을 쓰는 게 더 익숙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해운은 달랐다.
“돌아가서 운 도령과 이야기를 나눠 봐야겠어요.”
운이라면 시기에 맞지 않는 이상한 움직임의 정체를 금방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나와 태림의 눈이 허공에서 만났다. 우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나루터를 벗어났다.
* * *
나는 저택으로 돌아와 운에게 직접 본 풍경을 상세히 설명했다. 나루터 한쪽에 줄지어 대기하고 있던 상선들과 그 앞에서 무엇인가를 지시하고 있던 아신의 모습을 전해 들은 운이 심각한 얼굴로 턱을 매만졌다.
“확실히 이상하네. 지금 이 시기에 군수품을 이동시키려고 그 정도의 대규모 상선을 운용하는 건 비효율적이야. 현지에 갓 수확한 곡물이 많으니 굳이 외부에서 충당할 필요가 없거든. 수곡성을 노린다고 했을 때, 일반적인 전술을 생각해 보면 먼저 교두보가 될 석현성을 치고, 그곳을 거점으로 강을 건너 수곡성까지 치게 돼. 그럼 석현성의 배와 보급품을 충분히 이용할 수 있으니 굳이 여기서부터 보급품을 옮길 이유가 없어.”
내가 나루터에서 했던 것과 똑같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전쟁을 잘 아는 운이라면 나와 같은 정보를 가지고도 그 이상의 의미를 찾아낼 수 있을 터.
나와 태림은 생각에 잠긴 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런데 대규모의 상선이라…… 굳이 그 많은 배를 운용하는 까닭이 뭘까…….”
미간을 찌푸리며 고민에 빠진 그는 우리 둘의 시선이 느껴지지도 않는지 홀로 고개를 저었다가, 손가락을 튕겼다가, 침음을 흘리기를 반복했다.
“배에 실을 수 있는 것은 보급품뿐만이 아니라…….”
오랜 생각 끝에 운의 입에서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들릴 듯 말 듯 작았던 혼잣말을 내뱉은 그가 곧 무엇인가를 깨달았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물자가 아니라 사람이야.”
다시 한번 흘러나온 운의 말은 조금 더 명확해져 있었다. 그러나 태림과 나는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물자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말은……?”
“백제는 이번 전쟁에 육로가 아닌 수로를 통해 곧장 수곡성으로 갈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것 같아. 그러면 석현성을 치지 않고도 수곡성에 들어갈 수 있으니, 시간과 힘을 절약할 수 있다. 한데 우리는 육로를 통한 공격에만 대비하고 있어. 여태까지 백제가 물길을 사용한 적이 한 번도 없으니까. 만약 백제가 배를 타고 우리 땅에 떨어진다면 속수무책이다. 그에 대한 대비가 하나도 되어 있지 않으니.”
수곡성은 예성강을 끼고 있는 성. 배를 통해 침입하는 것이 불가능한 계획은 아니었다.
하지만 백제는 여태까지 그 방법을 택하지 않았다. 아마 그럴 수 없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태림이 그 이유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운의 말에 납득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품에서 지도를 꺼냈다.
탁자 위에 작은 크기의 지도가 펼쳐졌다. 간략하게 표현되었지만 들어갈 정보는 모두 담겨 있는 지도였다.
태림이 수곡성과 석현성 사이를 지나는 강줄기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예성강은 급류가 많아 배를 운용하기 좋은 곳이 아닙니다. 사방이 트여 있어 드나드는 배가 훤히 보이니 침입 경로로도 좋지 않고요. 게다가 군선(軍船)이 아닌 상선입니다. 상선은 가볍고 약해 외부의 공격에 취약합니다. 작은 공격에도 쉽게 가라앉으니 침입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공격을 받지 않고 땅에 상륙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지 않습니까?”
태림의 반박에도 운은 물러서지 않았다.
“군선이 아닌 상선입니다. 멀리서 다가오고 있는 것을 본다 하여도 그것이 상선이라면 쉽게 공격할 수 없습니다. 군대가 민간의 배를 공격해 격침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렇게 말한 운이 곧 지도에 표시된 성들을 차례로 가리켰다.
석현성, 청목령, 관미성.
모두 지난 전쟁을 통해 우리 고구려 손에 떨어진 땅이었다.
위치만 보더라도 요지 중의 요지라 이곳을 거치지 않으면 북으로 진출하기가 힘들었다. 백제가 줄곧 이곳 성들의 탈환을 위해 노력한 것도 북쪽으로 향하는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들의 계획은 번번이 실패하여 북쪽으로는 한 발자국도 전진하지 못했다. 그들로서는 이 견고한 방어벽을 뚫을 묘책이 필요했을 것이다.
“몇 번의 전쟁을 거치며 우리 고구려가 주요한 성들을 모두 차지했습니다. 하여 백제는 육로와 수로, 어느 쪽으로든 우리 땅을 침입하기 아주 어려운 상황이지요.”
운의 손가락이 방금 짚었던 성 옆의 강을 따라 움직였다. 수곡성에서부터 천천히 내려온 운의 손가락이 석현성 위에서 멈추었다.
“수곡성이 목표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긴 했습니다. 육로를 따라가 수곡성을 치려면 먼저 석현성을 탈환하는 것이 순서인데, 병사들의 입에서는 수곡성이라는 이름만 나왔거든요. 하지만 배를 타고 간다면 이해가 됩니다.”
운의 손가락이 관미성에서 시작해 다시 강을 타고 안쪽 깊은 곳까지 올라갔다.
“육로가 아닌 수로라면 조용히 강을 타고 올라가 석현성을 통하지 않고 단번에 수곡성까지 닿을 수 있습니다. 예성강으로 들어서는 배들을 모두 감시하고 있는 이곳 관미성을 무사히 통과할 수만 있다면 그 뒤는 쉽죠.”
예상하지 못한 순간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의 침입이라니. 고구려군에게는 아주 큰 위협이었다.
“그러니 이 계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는 것, 그리하여 최대한 조용하게 관미성을 통과해 목적지까지 닿는 것입니다. 때문에 군선이 아닌 상선을 선택한 거죠. 약해 빠진 상선이 여럿 다가온다고 한들 누가 위협을 느끼겠습니까?”
듣자마자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었다. 백의도강. 삼국지에 등장하는 전략이었다.
오나라의 여몽과 육손은 장사꾼으로 위장한 정예병을 배에 태워 잠입시켜 관우가 지키고 있던 형주를 손에 넣는다. 아신은 그와 비슷한 전략을 펼치려고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왜 미추성입니까? 배를 띄우려면 비사성 쪽이 낫습니다. 바다를 크게 돌아가지 않아도 되니까요.”
태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미추성에서 배를 띄우면 바다를 통과해 예성강으로 진입해야 한다. 비사성에서 곧장 예성강으로 진입하는 것보다 훨씬 시간이 많이 걸리는 작전이었다.
하지만 운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눈에 띄지 않는 것이 목적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여기 미추홀만 한 곳이 없습니다. 비사성은 관미성과 거리가 너무 가까워 움직임을 들킬 가능성이 높아요.”
의문을 안겨 주었던 수많은 조각들이 이제야 제자리를 찾았다.
전쟁을 준비하는 듯 긴장해 있던 병사들, 기병 없이 궁병과 보병 위주로 이뤄진 군대, 예정된 전선에서 멀리 떨어진 미추성에 머무르고 있는 아신.
그렇다. 그들은 배를 타고 안쪽 깊은 곳 고구려 땅에 침투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태림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미 배가 준비되었으니 곧 군대가 나설 겁니다. 한시라도 빨리 이 소식을 수곡성에 전해야 합니다.”
“가장 빠른 방법은 전령새를 날리는 거예요. 하지만…….”
바로 어제 답 없이 돌아온 전령새를 다시 한번 국내성으로 보낸 뒤였다. 그러니 수곡성에 소식을 전하고자 한다면 우리가 직접 움직여야 했다.
그것을 깨달은 태림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미추성을 떠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국내성에서 내려올 지시를 기다리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상황이 너무 급박했다.
백제군이 움직이기 전에 우리가 먼저 수곡성에 도달해야 한다. 이제는 먼저 움직이고 후에 소식을 전하는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인지 국내성에서는 답이 없고 백제군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으니…… 이번 전쟁, 아무래도 심상치 않겠습니다.”
운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나는 불길했던 꿈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피눈물을 흘리던 용과 그 눈물로 붉게 물든 바다를 떠올리니 불안함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우리는 우선 관미성으로 갑시다.”
“수곡성으로 가지 않습니까?”
태림이 의아하게 물으니 운이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곡성까지 가려면 시일이 많이 소요됩니다. 말을 타고 산을 넘어야 하니 우리가 닿기 전에 백제군의 배가 먼저 도착하겠죠. 그러니 우리는 중간을 잘라야 합니다.”
운이 지도 위의 관미성을 가리켰다. 바다와 강이 만나는 지점이었다.
“배를 타고 수곡성에 가려고 한다면 반드시 이 관미성을 지나야 합니다. 그러니 이곳에서 백제군의 배를 멈춰 세우면 됩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태림이 감탄하며 운과 나를 바라보았다.
“다음 행선지는 관미성으로 정해졌군요.”
* * *
“우희, 안에 있나?”
분주하게 떠날 채비를 하고 있는 내게 아신이 찾아왔다. 나는 복잡하게 널브러진 짐을 대충 정리한 뒤 문을 열어 아신을 맞았다.
“폐하.”
고개를 숙여 인사하며 아신을 안으로 들이니 그가 복잡한 방 안을 둘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떠난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어찌 이리 급하게 떠나?”
변명거리야 이미 정해져 있었다. 미추성에서 아신과 처음 마주했을 때 백제에서만 나는 약재를 구하러 왔다고 했으니, 떠나는 이유는 필요한 약재를 모두 구했기 때문으로 하면 된다.
나는 웃으며 준비한 변명을 입에 올렸다.
“예. 필요한 약재를 모두 구해서요.”
아신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실제로 약재 몇 가지를 구입해 둔 상태였다. 나는 탁자 위에 올려 둔 보따리를 풀어 시장을 돌아다니며 구한 약재들을 아신에게 보여 주었다.
“천문동과 어성초입니다. 다른 것도 몇 가지 있는데…….”
천천히 약재에 대한 설명을 이어 가니 아신의 표정이 묘해졌다.
“……구하기가 쉽지 않았을 터인데.”
아신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추운 고구려에서라면 몰라도 날씨가 따뜻한 백제에서는 쉽게 구할 수 있는 약재들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시장에 매물이 나와 있지 않았다.
“맞습니다. 얼마 전 누군가가 미추성에 도는 약재란 약재를 다 쓸어 가는 바람에 팔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해서 꽤나 고생을 했습니다. 다행히 상인들에게 물어물어 필요한 약재를 구하기는 했습니다만…….”
이야기를 하다 보니 무엇인가가 이상했다.
아신은 약재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 간단한 나의 설명만 듣고 그 약재가 구하기 쉬운 것인지 아닌지 파악할 능력이 없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전쟁 준비로 바쁜 그가 시장에 도는 물품의 상황을 잘 알고 있는 것도 우스웠다. 쌀이나 소금 같은 주요 품목이라면 몰라도 약재처럼 소소한 품목의 유통 상황까지 왕이 신경 써 살피지는 않을 터였다.
“어찌 그걸 아셨습니까?”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아신을 보니 그가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며 내게서 눈을 돌렸다.
“그…… 미추성의 약재를 전부 쓸어 갔다는 자가 바로 나거든.”
“예?”
황당함으로 물든 내 얼굴을 보며 아신이 다시 한번 크게 헛기침을 했다.
“아니, 원하는 약재를 구하고 나면 그대는 금방 고구려로 돌아갈 테니까…… 조금이라도 더 이곳에 머물렀으면 해서…….”
머뭇거리며 이어지는 말에 입이 떡 벌어졌다. 멍하니 저를 바라보는 시선에 아신이 손을 내저었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다. 정식으로 초청을 해서 함께 시간을 보낼까 했는데, 지난번 석현성에서 말로 물었더니 그대가 단칼에 거절을 했잖아. 그래서 이번에는 묻지 않고 다른 방법을 쓴 것이지. 나쁜 마음을 품고 한 일은 절대 아니야.”
방법이 유치하긴 했지만 어쨌든 나를 향한 호의로 시작된 일이었다. 나는 한 나라의 왕이 내 앞에서 어쩔 줄 몰라 변명을 쏟아 내는 것이 우스워 그만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어찌 이러십니까?”
나의 질문에 허공을 휘젓던 아신의 손이 멈추었다.
“어찌 고구려인인 제게 이런 호의를 보이시냐는 말입니다. 폐하의 목숨을 구해 드렸다고는 하나 딱 한 번뿐이었고, 그것마저도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억지로 시작한 일이었는데요.”
오래전 아신을 상징하는 옥패를 받은 것은 생명의 은인에 대한 보은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오늘의 호의는 무엇으로 설명하지?
의아한 나의 눈빛을 본 아신의 손이 아래로 떨어졌다. 그는 여전히 멋쩍은 얼굴이었지만 표정은 한결 진지해져 있었다.
“넌 내게 특별해.”
“어째서요?”
“‘나’를 살렸으니까.”
“하지만 그건…….”
아신이 손을 들어 내 말을 막았다.
“알아. 내가 백제의 태자여서, 포로의 신세를 벗어나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나를 살렸지. 하지만 넌 내가 태자가 아니었어도,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조건이 걸리지 않았어도 나를 살렸을 거잖아.”
당연한 말이었다.
눈앞에서 누군가가 죽어 가고, 나는 그를 살릴 능력이 있다. 그렇다면 그 어떤 외부의 조건도 생각하지 않고 그를 살려야만 한다.
죽어 가는 자가 살인자라도, 내 부모를 죽인 원수라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이 의술을 배운 자로서의 양심이자 의무였다.
“네가 구한 것은 백제의 태자가 아니라 ‘나’다. 그러니 나도 너를 ‘우희’로만 대할 것이다. 네가 고구려인인 것도, 고구려에서 어떤 사람인지도 내겐 중요하지 않아.”
지금 그 말은 마치…….
아신의 말에 묘하게 뼈가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가슴 한구석이 싸해졌다.
“제가 어떤 사람인지 아시는군요.”
확신이 담긴 나의 말에 아신은 대답 대신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돌아갈 배를 구해 주지. 그걸 타고 가. 복잡한 시기이니 이상한 일에 휘말리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이 좋지 않겠나.”
* * *
아신은 몇 해 전 석현성에서 내게 튼튼한 말을 내어주었던 것처럼 이번에도 견고한 배를 구해 주었다.
백제의 동향을 고구려에 전하기 위해 백제 왕이 내어준 배를 타고 고구려 땅으로 향하고 있다니. 참으로 우스운 상황이었다.
사람의 호의를 이런 식으로 이용해도 되는 걸까?
나는 단 한 번도 전쟁의 승리를 원하지 않았다. 아버지와 제신을 도압성에 보낼 때부터 나는 오로지 소중한 사람의 안녕만을 소망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여러 가지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가장 중요한 건 역시 담덕이었다.
나는 담덕이 지휘하는 고구려군이 안전하게 돌아오기를, 그리하여 그가 무사하기를 언제나 바랐다. 그러려면 내가 미추성에서 본 이야기를 고구려 군대에 전해야만 했다.
복잡한 마음을 겨우 다잡는 동안 배는 금세 관미성에 닿았다. 우리가 배에서 내릴 때부터 잔뜩 경계하고 있던 병사들은 가까이 다가간 우리의 얼굴을, 더 정확히는 태림의 얼굴을 보고는 놀라서 성문을 열었다.
태림은 담덕의 가장 가까운 곳을 지키는 호위로 병사들 사이에서 이름이 높았다. 특히 관미성에는 지난 몇 번의 전쟁을 거치는 동안 얼굴을 직접 비춘 적도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병사들이 그를 알아보았다.
태왕의 측근을 대하는 병사들의 태도는 지극히 조심스러웠다. 덕분에 관미성에 얼굴이 잘 알려지지 않은 나와 운까지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성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태림 님! 여기에 오신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장수 하나가 태림의 앞으로 뛰어왔다. 태림이 반가운 기색으로 고개를 숙이는 것을 보니 서로 안면이 있는 사이 같았다.
“예정에 없던 방문입니다. 관미성주를 만나 전할 이야기가 있는데, 그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안에서 폐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폐하? 폐하께서 여기 계십니까?”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우리 모두 놀라서 눈을 크게 뜨니 오히려 장수가 더 놀랐다는 듯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르셨습니까? 며칠 전 폐하께서 관미성에 오셨습니다. 근위대원 다섯만을 데리고 은밀히 오기는 하셨습니다만…… 측근인 태림 님께서는 알고 계시리라 생각했습니다.”
“소수의 근위대? 다른 병력도 없이 오셨단 말입니까?”
“예. 추가 병력은 보름 정도 후에 도착할 예정이라 하셨습니다.”
“겨우 보름 차이인데 어찌 병력과 떨어져 길을 재촉하셨는지…….”
태림이 미간을 찌푸리며 머리를 짚었다. 담덕은 전쟁과 관련해 돌발 행동을 상당히 많이 하는 편이었으므로 안전을 책임져야 하는 지설과 태림은 언제나 골머리를 앓았다.
“당장 폐하를 뵈어야겠습니다.”
“예. 이쪽으로 오십시오.”
한숨 섞인 태림의 말에 장수가 고개를 숙인 뒤 앞장섰다.
* * *
장수를 따라 성안으로 들어가니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국내성에서도 늘 담덕의 곁을 지키는 근위대원들이었다.
“태림 님? 우희 님? 거기다 소노부의 도련님까지…….”
근위대원들은 거의 넋이 나가 있었다. 갑자기 우리가 관미성에 나타난 것이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놀랍기는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를 데려온 장수에게 미리 전해 듣기는 하였으나, 정말로 담덕이 근위대원들 다섯만 데리고 이곳에 왔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자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폐하는 여기 안에 계신가?”
내가 근위대원들이 지키고 선 문을 가리키며 묻자 그들이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답을 들은 나는 누군가가 말릴 새도 없이 문을 벌컥 열어 안으로 들어섰다.
“누구냐!”
예고도 없이 문이 열리자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사람들이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관미성주로 보이는 장군과 잔뜩 찌푸린 얼굴의 지설은 검까지 뽑아 든 채였다.
오로지 담덕만이 의자에 앉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그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는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떠 나를 보고 있었다.
“우희 님?”
날카로운 검을 뻗었던 지설이 내 얼굴을 확인하고는 서둘러 무기를 거두었다. 지설의 행동에 관미성주도 덩달아 무기를 수습하자 나의 길을 막는 방해물이 모두 사라졌다.
나는 아무런 말없이 담덕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나를 보며 담덕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희?”
마침내 내가 담덕 앞에 서자 그가 조심스럽게 내 이름을 불렀다. 내 상태가 어딘가 이상하다고 느낀 것이 분명했다.
나는 대답 대신 담덕의 모습을 구석구석 살폈다. 꼼꼼하게 몸 곳곳을 만지는 손길에 담덕이 당황해 내 손목을 잡아챘다.
“우희, 갑자기 왜 이래? 관미성에는 어찌 왔고?”
담덕이 걱정스럽게 물었지만 대답할 정신이 없었다. 나는 그를 올려다보며 내가 궁금한 것만을 물을 뿐이었다.
“아무 일 없었어?”
“내게?”
담덕은 내 질문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가 내게 무슨 일이 생겼대?”
“누가 그런 것이 아니라…….”
담덕의 질문에 불길했던 꿈이 다시 떠올랐다.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그대로 담덕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익숙한 향기에 얼굴을 묻자 마음이 조금 진정되는 것 같았다.
물론 진정한 것은 나 하나뿐이었다. 담덕은 물론이고 주변의 공기가 당황으로 술렁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지설.”
잠시 머뭇거리던 담덕이 지설을 불렀다. 무어라고 지시를 내린 것인지 곧 나와 담덕을 제외한 사람들이 방에서 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마자 담덕이 어색하게 들고 있던 팔을 내려 나를 마주 안았다. 몸을 감싸 안는 단단한 힘에 그간의 불안함이 한 번에 날아가며 눈물이 터져 나왔다.
“……너 지금 울어?”
앞섶이 축축하게 젖어 들자 담덕이 놀라서 물었다. 담덕이 서둘러 나를 떼어 내 얼굴을 확인하려 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으며 더 강하게 담덕을 끌어안고 그의 품에 얼굴을 묻을 뿐이었다.
몇 번의 실랑이 끝에 결국 담덕이 포기했다. 그는 다정한 손길로 내 등을 쓸어내리며 어린아이를 달래듯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내 귓가에 속삭였다.
“우리 아가씨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응?”
“꿈을 꿨어.”
“꿈?”
“불길하고 무서운 꿈이었어. 그런 이상한 꿈은 처음이야.”
“그래. 우리 우희, 꿈이 무서웠구나. 얼마나 무서웠을까.”
다정하게 말하고 있지만 묘하게 웃음이 섞인 목소리였다. 나는 발끈해서 담덕에게서 떨어져 그를 쳐다보았다.
“왜 웃어?”
“안 웃었는데.”
담덕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시치미를 뗐다. 하지만 입꼬리가 움찔거리는 것만은 감출 수가 없었다.
“안 웃었다고 할 거면 그 입꼬리부터 수습하고 말했어야지.”
“그것까진 너무 어려운데…….”
결국 담덕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점차 내 입이 불만으로 튀어나올수록 그의 웃음소리는 커져 갔다.
“왜 웃어!”
“아니, 우희 네가 너무…….”
나의 타박에 담덕은 배까지 잡고 웃기 시작했다.
“꿈이 무서워서 내게 안겨 운 거야? 네게 이런 귀여운 구석이 있었을 줄이야.”
“그냥 무서운 꿈이 아니었다니까!”
“도대체 무슨 꿈을 꿨기에 그래?”
“그러니까 용이…….”
진지한 얼굴로 설명을 이어 가려는데 담덕의 얼굴에 여전히 웃음기가 가득했다. 나는 맥이 빠져 그의 가슴을 주먹으로 내려치며 고개를 돌렸다.
“됐어. 말 안 할래.”
담덕이 돌아간 내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다시 제 앞으로 향하게 했다. 마주한 담덕의 눈은 조금 전보다 진지하게 변해 있었다.
“왜? 들어 줄게. 말해 봐.”
“싫어. 내 말이 우습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말 안 할 거야.”
“우습다고 생각 안 해.”
“그럼 왜 웃었는데?”
“네가 고와서.”
“뭐?”
“날 걱정하고, 날 끌어안고, 날 위해 우는 네가 고와서 웃었어. 이런 모습은 처음이라서.”
담덕이 웃으며 내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이래도 안 풀리거든!”
“그래?”
담덕이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다시 한번 내게 입을 맞추었다. 그의 입술이 처음보다 길게 내 입술에 머물렀다가 떨어져 나갔다.
“……이래도 안 풀린다니까.”
“그렇단 말이지?”
담덕이 픽 웃더니 천천히 고개를 숙여 나의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그의 혀가 들어와 예민한 곳을 할짝거렸다.
섬세한 움직임에 불안과 안도로 긴장해 있던 몸이 한순간에 녹아내렸다. 나른해진 몸이 무너질 것 같았다.
나는 담덕의 옷자락을 꽉 쥐어 그에게 그만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담덕은 그 신호를 다른 방향으로 해석한 것 같았다.
담덕이 내 두 뺨을 감싸고 있던 손을 내려 내 허리를 단단히 받쳤다. 덕분에 무너지려는 몸은 중심을 찾았지만 집요한 담덕의 움직임 덕분에 숨이 가빠 왔다.
“숨 쉬어야지, 우희.”
입술이 맞닿은 상태에서 담덕이 작게 속삭였다. 그가 말을 꺼낼 때마다 따뜻한 숨이 흘러나와 입술이 간지러웠다.
“숨…… 쉬고 있어.”
“그래?”
담덕이 웃으며 짧게 입술을 부딪쳤다. 허리를 받치고 있던 손은 어느새 내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뭐가 그리 불안해? 난 여기 있어. 강하고 흔들리지 않는 너의 태왕. 확인해 볼래?”
언젠가 내가 성문사에서 그랬던 것처럼 담덕이 눈을 감고 두 팔을 벌렸다. 내 앞에 우뚝 선 담덕은 스스로의 확신처럼 강해 보였다.
하지만 나는 강하지 않은 담덕의 모습을 많이 알고 있었다. 지나가는 말 한마디에 웃고, 사소한 일에도 마음 아파하며, 조그만 불안에도 화를 내던 나의 친구.
“흔들려도 돼.”
나의 말에 담덕이 천천히 눈을 떴다. 묘하게 흔들리는 그의 눈동자가 온전히 드러나는 순간 나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내 앞에서까지 강한 사람이 되지 마. 넌 모든 사람의 강한 태왕이지만, 내게는 그저 담덕인걸.”
담덕을 사내로서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은 후로 나는 그가 역사 속의 위대한 태왕이라는 사실을 잊으려고 무던히 애썼다.
담덕은 담덕. 내 눈 앞에 있는 그저 한 사람의 사내.
머릿속에 선명히 남은 역사를 생각하면 두려움에 그와 함께하는 미래를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 두려움이 담덕을 향한 나의 마음을 오랫동안 억누르기도 했었지.
사람은 언젠가 죽는다. 만천하를 호령했던 광개토대왕에게도 죽음이 찾아왔고, 그의 죽음은 보통 사람보다 이른 편이었다.
내 모든 불안함은 그로부터 시작되었다. 담덕이 내게 소중한 사람이 되면 될수록 나의 가슴속 깊은 곳에는 불안과 두려움이 피어났다.
나는 담덕의 꿈이 무엇인지 안다. 그가 그리는 미래가, 그가 바라는 세상이 무엇인지도 안다.
나는 담덕이 바라는 모든 것을 이루기를 바라면서도 한편으로는 모든 것을 놓고 오래도록 내 옆에 머물러 주기를 바랐다.
나라도 전쟁도 내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두 번째로 얻은 소중한 이 삶을 소중한 사람과 행복하게 보내는 것. 내게는 오로지 그것만이 중요했다.
때문에 나는 담덕을 바라볼 때마다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담덕, 태왕이 아닌 내 사람으로만 남아 줄 수는 없을까?
하지만 모든 것은 언제나 내 마음속에서 맴돌 뿐으로 그 말이 입 밖에 나오는 일은 끝내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나는 그런 꿈을 꾸는 담덕을, 그가 그리는 세상마저 사랑하니까.
먼 훗날 이 땅에 세워질 세상은 소진이었던 내게 불친절하고 어두웠지만 그 세상을 쌓아 올린 역사의 한 귀퉁이에 담덕이 있다는 생각을 하면 모든 것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처음부터 경쟁자가 너무 강했던 거야.
나의 경쟁자는 사람이 아닌 역사였다. 버거운 상대와 맞붙었으니 많은 것을 얻을 순 없었다.
전부 다 달라고는 안 해요. 내가 이 남자를 조금만 빌릴게요. 가지는 것이 아니라 곁에 머무르는 것으로 만족할 테니, 이 남자가 내 앞에서만은 태왕이 아닌 담덕이게 해 주세요.
마음속으로 전한 나의 소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담덕이 나를 껴안았다.
“그래. 난 담덕이야. 이 세상 누가 뭐라고 해도…… 난 너의 담덕이야.”
* * *
밖으로 나오니 지설과 태림이 문 옆에 기대어 서 있었다.
“이야기는 다 끝나셨습니까?”
지설이 기지개를 켜며 나와 담덕에게 다가왔다. 두 사람만 남아 문 앞을 지키고 있었는지 다른 이들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요?”
“돌려보냈습니다. 아가씨께서 무서운 꿈을 꿨다며 폐하께 안겨 엉엉 우는 것을 모두에게 들려줄 수는 없잖습니까?”
어깨를 으쓱거리는 지설의 말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걸 다 들었어요?”
“저라고 듣고 싶어서 들은 것이 아닙니다. 저는 가만히 서 있었을 뿐인데 소리가 알아서 들려오니 어쩔 도리가 없잖습니까?”
망할 놈의 방음 시설!
나는 이를 갈며 문을 노려보았다. 이 시대의 방음은 어이가 없을 정도로 형편없었다.
“아가씨께서는 오히려 제게 고마워하셔야 합니다. 울음소리가 들리자마자 주변 사람들을 죄 물렸으니까요.”
“다른 사람을 물리면서 본인도 자리를 비웠으면 참 좋았을 텐데요.”
“제게 호위 임무를 내팽개치라는 말씀이십니까?”
“임무 때문에 자리를 비울 수 없었다면 태림처럼 모른 척 입을 다물어 주는 배려를 하든가요!”
내 말에 지설이 침음을 흘리며 제 턱을 매만졌다.
“차라리 눈에 뻔히 보이는 거짓말로 배려를 하는 것이 낫다는 겁니까…….”
한참을 고민하던 지설이 곧 얄밉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다음부터는 참고하지요.”
고민 끝에 나온 말이 겨우 ‘다음부터는 참고하겠다’라니. 참고만 하고 그러지는 않겠다는 뜻 아닌가.
어이가 없어져 입을 쩍 벌리고 있으니 뒤에서 담덕이 달래듯 내 어깨를 붙잡았다.
“지설, 우희를 놀리는 것은 그만해라.”
“제가 우희 님을 놀려요? 우리 폐하를 가지신 분을 제가 감히 어찌 놀리겠습니까?”
“……지금 보니 우희만이 아니라 나까지 놀리고 싶은 게로구나.”
담덕이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자 지설이 작게 웃음을 흘렸다.
“장난은 거기까지만 하자. 지금부터는 태림과 우희, 너희가 어찌 관미성에 왔는지 들어야겠다. 도압성에 연 장군의 묘를 보러 간 것이 아니었어?”
금세 화제가 곤란한 쪽으로 옮겨 갔다. 나와 태림이 어색하게 웃으며 시선을 교환하니 담덕의 눈이 가늘어졌다.
“두 사람, 내게 뭘 숨기고 싶어서 이러는 거지?”
담덕에게 미추성에서 본 것을 이야기하려면 내가 그곳에 간 이유부터 설명해야 한다. 그 까닭을 설명하려면 아버지와 관련된 소문을 들었다는 것을 말해야 하고, 그 사정을 말하면 내가 비로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밝힐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내 비밀을 감추겠다고 미추성에서 얻은 중요한 정보를 전하지 않을 수는 없지 않나.
내가 비로의 대원으로 활동하는 것을 담덕이 납득하도록 설득하는 일은 나중 문제였다. 지금은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을 빠짐없이 전해야했다.
“……우린 도압성이 아니라 미추성에서 오는 길이야.”
“미추성이라면 백제 땅이잖아.”
의아하게 우리를 바라보던 담덕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맞아. 거기서 백제군의 이상한 움직임을 발견했어. 그걸 하루라도 빨리 우리 군에 전하려고 관미성으로 온 거야. 네가 여기에 와 있을 줄은 몰랐지만…… 차라리 잘됐어. 어차피 국내성에도 사람을 보내 이야기를 전해야 했으니까.”
“잠깐. 백제군의 이상한 움직임에 대해 말하기 전에 네가 왜, 어떻게 백제 땅인 미추성에 있었는지부터 말해 봐. 그게 먼저야.”
역시 얼렁뚱땅 넘어갈 수는 없나.
나는 한숨을 내쉬며 담덕을 바라보았다.
“정확한 사정은 운 도령이 있어야 설명할 수 있어.”
“해운? 그자도 함께 왔어?”
담덕이 미간을 찌푸리며 나와 태림을 바라보았다. 나를 대신해 태림이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숙이자 담덕의 얼굴이 완전히 일그러졌다.
“나는 까맣게 모르고, 소노부의 운은 너와 함께 움직였다고?”
담덕이 헛웃음을 흘리며 지설에게 지시를 내렸다.
“지설, 해운을 데려와라. 어디 한번 들어나 봐야겠다. 도대체 어떤 대단한 사연이 있어 나를 속이고 이리 몰래 움직였는지.”
* * *
마주 앉은 사람들 사이에서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아버지와 인상착의가 비슷한 남자에 대한 소문을 듣고 국내성을 나선 일부터 미추성에서 아신을 만난 일, 그를 필두로 한 백제군이 수상쩍은 움직임을 보였다는 것까지. 담덕은 굳은 얼굴로 운이 풀어내는 긴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우희 네가 비로 사람이라는 것은 이번 일이 끝나면 이야기하도록 하고.”
담덕이 나를 힐끗 보며 말을 넘긴 뒤 주도적으로 그간의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 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미추성에서 아신이 이끌고 있던 병력은 어느 정도였나?”
“500 정도로 그리 많은 수는 아니었으나 하나같이 잘 단련된 듯 보였습니다. 모두 움직임이 빠르고 활을 쏘는 데 능했지요. 기습 작전에 적합한 병사들임이 분명합니다.”
“상선을 타고 민간의 배로 위장해 막힘없이 수곡성까지 간다…….”
작게 중얼거린 담덕이 이번에는 지설을 바라보았다.
“지설. 만약 우리가 잘 단련된 500의 병력을 상선에 태운 뒤 임진강을 따라 비사성과 어을매(於乙買)를 지나고, 백제의 방어선 안쪽 낭벽성(娘臂城)을 친다고 하면 어떤가? 그대가 지휘관이라면 이 작전, 수행하겠어?”
담덕은 상황을 뒤집어 작전의 주체를 우리 군으로 가정했다. 운이 짐작한 계획이 실현 가능성이 있는지를 조금 더 현실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500의 병사가 어느 정도 훈련이 되었느냐에 따라 다르겠습니다만…….”
탁자 위에 펼쳐진 지도를 보며 고민하던 지설이 곧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상대방이 우리의 상선을 민간의 배로 생각하고 그냥 보내 주기만 한다면 해 볼 만한 작전입니다. 예상하지 못한 상태에서의 기습은 적은 병력으로도 큰 효과를 내니까요.”
“내가 보기엔 여러모로 불안 요소가 많아 보이는데.”
“맞습니다. 불안 요소는 아주 많죠. 하지만 제가 몇 번이나 패배를 겪은 지휘관이라면 기꺼이 모험을 할 겁니다. 어차피 500의 적은 병력이잖습니까? 성공하면 방어선 안쪽의 성을 얻고, 실패해도 500의 병력을 잃을 뿐입니다.”
“……500의 병력을 모두 잃을 각오까지 하고 있다면 가능하다는 이야기로군. 나로서는 마음에 들지 않는 방식이야.”
아군이 아닌 백제의 이야기였음에도 담덕이 불만스럽게 미간을 찌푸렸다. 전쟁의 승리를 위한 작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는 언제나 희생이 따르기 마련이지만, 그는 희생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았다.
우리 군 누구의 희생도 필요 없는 승리.
그것이 담덕의 목표였다. 그가 매일 밤 잠도 이루지 못하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 이유도 전장에 나서는 병사들의 희생을 조금이라도 더 줄이기 위해서였다.
“지설.”
“예.”
“우선 우리는 수곡성으로 가야겠다.”
“예. 관미성주에게 뱃길을 잘 경계하라고 전하겠……”
머리를 숙이며 미리 짐작하고 있던 지시를 되새기던 지설이 무엇인가 이상한 것을 깨닫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예? 수곡성으로 가신다고요?”
“그래. 추가로 내려오는 기병 역시 관미성이 아닌 수곡성으로 방향을 돌리라 전해라.”
“저희의 짐작이 맞는다면 곧 정예병을 실은 백제군의 배가 관미성을 지나갈 겁니다. 여기에서 그걸 저지해야 합니다.”
“아니. 우리는 백제군의 배를 그냥 보내 줄 것이다. 그들이 목표했던 수곡성에 닿을 수 있도록 그냥 둬.”
“눈앞에 뻔히 보이는 적을 그냥 보내 주라는 말씀이십니까.”
“우리는 기병이 강하니 바다보다는 땅에서 싸우는 것이 더 좋아. 그러니 우리의 전장은 관미성의 바다가 아닌 수곡성의 뭍이 되어야 한다. 어차피 기습이란 들키지 않았을 때 큰 효과를 발휘하는 작전이지. 하지만 우리는 이미 백제군의 기습을 짐작하고 있지 않나?”
담덕이 웃으며 지도 위의 수곡성을 가리켰다.
“수곡성에서 입을 벌리고 먹잇감이 들어오기를 기다린다. 그게 우리의 작전이야.”
지설과 운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담덕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모두 동의한 듯하니 우리의 작전은 그리 결정된 것으로 하고. 남은 문제는 이제…… 다로인가.”
웃고 있던 담덕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졌다.
“다로가 간자라고 생각하나?”
다로를 가장 오래 알았던 태림과 지설이 참담한 얼굴로 입을 꾹 다물었다. 비로의 대원이라는 이름 아래 함께 쌓아 온 유대감이 그들을 침울하게 한 것이다.
“없는 소문을 들었다고 한 것은 분명 다로일 겁니다. 다로가 그런 어설픈 소문에 휘둘려 정보를 전할 사람은 아니지 않습니까.”
지설이 미간을 찌푸리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사실만으로 다로를 간자로 보긴 힘듭니다. 다로가 기이한 소문을 전함으로써 일어난 결과가 우리에게 나쁘지 않으니까요. 우희 님께서 그 소문을 듣고 미추성에 갔기 때문에 백제의 동향을 알게 된 것 아닙니까?”
지설의 말이 옳았다.
다로의 이야기를 듣고 미추성에 왔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는 백제의 수상한 동향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결과적으로는 좋은 방향으로 일이 풀린 셈이었다.
“하지만 결과가 좋았다고 의도까지 선했다 말할 수는 없지요. 없는 소문을 만들어 낸 것은 분명 수상한 행동입니다. 게다가 국내성으로 보낸 연통에 답도 오지 않았고…….”
운이 지설의 말에 반박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수장에게서는 별다른 말이 없었습니까? 그쪽으로 몇 번이나 연통을 보냈는데 늘 답신 없이 전령새만 돌아왔습니다.”
“저희가 국내성을 떠나는 날까지 아무런 말이 없었습니다. 비로 대원들 사이에서 특별히 이상한 기색도 없었고요.”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군요.”
누구도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결국 국내성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이번 일의 속사정을 알 수 없다는 뜻이었다.
“먼저 해결할 수 있는 일부터 차례로 해결하지. 우선 우리는 수곡성으로 향한다.”
답답함에 침묵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담덕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다른 사람들도 그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지설, 근위대원들에게 출발 준비를 시켜라. 채비가 되는 대로 관미성을 떠난다.”
“예. 서두르겠습니다.”
“운은 여기에 남아 줄 수 있겠나? 관미성주와 함께 관미성을 지키며 백제군의 움직임이 포착되면 우리 쪽에 연통을 보내 줬으면 하는데.”
“물론입니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태림은 국내성으로 가라. 비로의 사정을 살피고 이상한 점이 없는지 살피도록 해. 최대한 은밀하게 움직여 상황을 파악해 줘.”
“예. 곧바로 출발하겠습니다.”
사람들을 둘러보며 차례로 지시를 내린 담덕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내게 향했다. 나는 그의 입이 열리기 전 재빨리 내 뜻을 전했다.
“나도 수곡성에 따라갈래.”
불길한 꿈의 여파가 아직도 남아 있었다. 이 불안함을 안고 국내성으로 돌아가기는 싫었다.
“따라오지 말라 하면 몰래 뒤따를 거야.”
대답 없는 담덕을 향해 협박 아닌 협박을 했더니 그가 픽 웃음을 흘렸다.
“왜? 내가 없으면 또 무서운 꿈을 꿀까 봐?”
“그냥 무서운 꿈이 아니었다니까!”
“알았다, 알았어.”
씩씩대는 나를 보며 담덕이 고개를 끄덕였다.
“국내성의 상황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