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낙화유수-20화 (21/38)

18장. 소문

우리는 늦은 시각 최대한 조용하게 국내성을 빠져나왔다. 요란하게 움직여 이목을 집중시키고 싶지 않았던 터라 누구의 배웅도 받지 않았다.

모든 인사는 떠나기 하루 전에 마쳤다. 아침에는 절노부 가족들과, 점심 무렵부터는 담덕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우리는 늦은 밤까지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다가올 짧은 이별을 아쉬워했다.

5월의 끝자락에 국내성을 떠난 일행은 6월이 되어서야 도압성 인근에 다다랐다. 모두 말을 타는 데는 일가견이 있었으므로 상당히 여유를 부리며 달려온 것치고는 빠르게 도착한 편이었다.

오랜만에 찾았는데도 도압성 인근의 풍경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도압성은 앞으로는 강과 평야를, 뒤로는 치악산의 산세를 품은 땅이었다. 산과 강이 어우러진 풍경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이 땅에서 몇 번이나 대단한 전투가 벌어졌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괜찮으십니까?”

미묘한 기분에 빠져 산 아래로 작게 보이는 도압성의 풍경을 살피는 내게 태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희미하게 웃으며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기분이 썩 좋진 않아요. 이 땅에서 좋지 않은 일들을 많이 겪었으니까요.”

모두 오래전의 일이었다. 백제군의 손에 넘어갔던 도압성은 다시 고구려의 차지가 되었고, 인질로 잡혀가 고생했던 석현성도 이제는 우리의 땅이 되었다.

하지만 기억 속에는 여전히 그날의 일들이 살아 있었다. 이 땅에서 겪었던 모든 일들이 내 안에 생생했다.

“우희, 이쪽으로.”

잠시 지난 일들을 떠올리는 사이 길을 찾으러 갔던 운이 돌아왔다. 앞장서서 걷기 시작하는 그의 얼굴에는 씁쓸함이 가득했다.

“다시 오면 단번에 길을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날의 풍경이 아직도 눈에 선하니 그럴 수밖에 없겠다 생각했지. 그런데 이곳이 너무 많이 달라졌구나. 그 시절에 멈춰 선 내 기억은 아직도 이리 선명한데, 나만 두고서 이곳의 풍경만 낯설게 변해 버렸어.”

운의 감상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과거에 멈춰 선 기억과 홀로 변해 버린 현재.

우리는 복잡한 마음을 속으로 삭이고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여기다. 이 안으로 들어가면 연 장군의 유해를 묻은 곳이 나와.”

묵묵히 걸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운이 빼곡하게 들어찬 나무들 사이를 가리켰다. 하늘을 가릴 듯 위로 자란 나무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운이 기가 찬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때만 하더라도 이 나무들이 키가 아주 작았다. 내 허리 정도에 왔던가……. 그랬던 나무들이 이리 자랐으니 하마터면 모르고 지나칠 뻔했어.”

운이 억울하다는 듯 투덜거리며 나무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그가 내준 길을 따라 나무 사이로 들어가니 곧 작은 공터가 나타났다.

“저건…….”

다양한 식물들이 뒤섞여 자라고 있는 작은 공터의 중앙에 익숙한 검이 하나 꽂혀 있었다. 아버지의 검이었다. 그런 생각을 운이 다시 한번 확인해 주었다.

“장군의 검이다. 검이 꽂힌 곳 아래에 유해를 묻어 두었어.”

나는 천천히 걸어가 아버지의 검 앞에 섰다.

아버지의 손을 잡았을 때의 온기를 기대하며 검의 손잡이를 붙잡아 보았지만 느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검을 손에서 놓고 그 앞에 쪼그려 앉아 미리 준비해 둔 수통을 꺼냈다. 평소 아버지가 좋아하시던 술이 담긴 수통이었다.

마개를 열어 검 주변에 술을 뿌리니 아버지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너무 늦게 와서 죄송해요, 아버지. 더 일찍 오고 싶었는데……. 그간 이쪽 땅이 많이 혼란스러웠거든요. 그래도 이제는 완전히 고구려 땅이 되었으니 걱정 마세요. 담덕이 얼마나 훌륭한 왕이 되었는지는 보고 계시죠? 지금 우리 고구려는 더 남쪽 전선에서 싸우고 있어요. 아버지가 지키려고 했던 이 땅은 이제 안전해요.”

나는 오래 전 아버지의 앞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던 것처럼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제신 오라버니도 오고 싶어 했는데, 지금은 중요한 할 일이 있어서 안 된대요. 백제와의 전쟁이 코앞이라 여러모로 바쁜 모양이에요. 제신 오라버니는 지금 아버지가 생전에 하시던 일을 하고 있거든요. 그러니 오늘 함께 찾지 않은 것을 너무 괘씸하다 여기지 말아주세요.”

술을 뿌리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이어 가다 보니 금세 수통이 가벼워졌다.

나는 술이 모두 떨어지기 전 수통을 바로 세워 검 앞에서 가볍게 흔들었다.

“마지막 술은 제가 마십니다. 이제 저도 술에 익숙한 어른이거든요. 이리하면 아버지와 함께 술 한잔한 것이지요?”

어른이 되면 같이 술이나 한잔하자던 아버지였다. 나는 그분의 유해 앞에서 수통에 남은 술을 모두 들이켰다.

담덕이 함부로 술을 마시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지만…… 오늘 이 순간 정도는 이해해 주겠지.

멋대로 결론을 내리고 빈 수통을 든 채 자리에서 일어서니 가만히 나를 지켜보고 있던 태림이 입을 열었다.

“유해를 수습해 가지 않으십니까?”

아버지의 유해를 가까이 두고 자주 찾아뵐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와 제신은 그렇게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백부도 우리의 생각에 동의했다.

“자신이 싸우다 죽은 땅에 묻히는 것이 고구려 용사의 가장 큰 명예 아닌가요? 내 욕심으로 아버지 명예를 깎아내릴 수는 없어요.”

나는 허리를 펴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무로 둘러싸인 작은 공간이 썩 안락해 보였다.

“무엇보다 아버지께서 이곳에 남는 것을 바라실 거예요. 죽어서도 자신이 지키고자 했던 땅을 수호하는 일, 그것이 아버지께서 바라는 안식일 겁니다.”

내 말에 운과 태림의 얼굴에 그리운 미소가 걸렸다.

“내가 기억하는 연 장군이라면 분명 그러시겠지.”

“전쟁이 일어났다고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던 분이셨지요.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고요.”

고향. 아버지는 전쟁터를 그렇게 표현했다. 안식은 고향에서 맞는 것이 옳으니, 아버지의 유해는 이곳에 두는 것이 옳았다.

“한데 누가 이상한 소문을 퍼트려 장군의 안식을 어지럽게 하는 것일까요?”

태림의 말에 모두의 입가에 희미하게 걸려 있던 미소가 사라졌다.

“그러니 미추홀로 가야죠. 동음홀로 가서 배를 탄다 했던가요?”

내 말에 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추홀은 바다를 끼고 있어 말을 타고 산을 넘는 것보다 배로 가는 편이 낫다.”

“배를 타고 바닷길로…… 소문을 파악하고자 온 것인데 뜻하지 않은 유람을 하게 생겼네요.”

우희로 태어나서는 처음 접하게 될 바다였다. 어쩔 수 없이 기대에 찬 표정이 흘러나왔는지 운이 피식 웃었다.

“유람이라. 그런 마음으로 나서는 것도 나쁘지 않지. 두 사람 다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는 건 처음이지?”

운의 질문에 태림이 조금 긴장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바다란 변화무쌍하여 위험하다 들었습니다. 바다 위에서는 인간의 모든 능력이 의미가 없어진다고.”

그 말을 누가 했을지는 분명했다.

“그거 지설이 한 말이죠?”

“……그렇습니다.”

“물을 무서워하는 지설이니 그렇게 말했겠죠.”

태림의 대답에 나와 운의 입에서 웃음이 터졌다. 나는 고개를 휘휘 저으며 태림의 오해를 바로잡아 주었다.

“바다는 위험하지만 그 이상으로 아름다운 곳이에요. 태림도 분명 바다를 좋아하게 될걸요.”

“아름다운 곳이라고요…….”

태림이 상상이 되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 * *

“우웨엑!”

사방에서 구역질 소리가 들려왔다. 하루 종일 그 소리를 듣고 있다 보니 내가 배 위에 있는 것인지, 동네 주점에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을 정도였다.

“……바다 위는 아름다운 곳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태림이 핼쑥한 얼굴로 힘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원망이 가득한 눈빛에 민망해진 나는 슬쩍 그의 눈을 피했다.

“태림이 이렇게 멀미를 심하게 할 줄 몰랐죠.”

나는 태림의 손에 멀미를 완화하는 침을 놓아 주며 어색하게 웃었다.

새끼손가락 끝과 손바닥이 만나는 지점의 소부혈과 엄지손톱 뿌리의 가로선과 세로선이 만나는 곳의 소상혈, 새끼손가락과 넷째 손가락 사이 움푹한 부위의 중부혈까지.

필요한 자리에 모두 침을 놓고 나니 하얗게 질렸던 태림의 혈색이 조금이나마 돌아왔다.

“이제 좀 괜찮아요?”

“조금 전보다는 나아졌습니다. 감사합니다.”

“멀미가 더 심해져서 견디기 힘들면 차라리 잠을 자는 게 나아요. 잠들 수 있게 침을 놓아 줄 테니, 못 견디겠으면 참지 말고 바로 말해 줘요.”

“침술로 사람을 재울 수도 있습니까?”

“사람을 재우는 것이 아니라 잠이 잘 오게 돕는 정도예요. 보조적인 수단이지요.”

“그래도 대단합니다. 침술로 생각보다 많은 일을 할 수 있군요.”

태림이 감탄하는 것과 동시에 옆에서 찢어질 듯한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요란한 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진원지로 향했다.

고개를 돌려보니 젊은 여인이 어린아이를 안고 난처하게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그 옆에 선 사내도 연신 아이의 등을 쓸어내리며 어쩔 줄을 몰랐다.

“어찌 이리 울어, 응?”

자신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둘 늘어날 때마다 여인의 얼굴은 울상이 되었다. 하지만 초조한 엄마의 마음을 모르는 어린 아기는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울음을 터트릴 뿐이었다.

아이 키우는 일이 보통 힘든 것이 아니구나.

그런 생각을 하니 어느새 여인의 얼굴이 나로 변해 있었다. 놀라서 곁에 선 사내를 보니 그는 언제부터인지 담덕이 되어 있었다.

아이를 돌보는 나와 담덕이라니. 나는 스스로가 하고 있는 생각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연우희!

“도와주지 그러느냐?”

“예? 뭐라고요?”

운의 말에 나는 내 생각을 들킨 것처럼 화들짝 놀라 그에게 되물었다. 과한 내 반응에 오히려 운이 놀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저들을 도와주고 싶어서 빤히 본 것이 아니었어? 너무 나서는 것은 곤란하지만 이 정도 도움은 괜찮지 않나 싶은데.”

“아.”

운의 말을 듣고 다시 여인과 사내를 보니 어느새 그들의 얼굴이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그렇지요. 도와줘야지요. 이 정도야 괜찮을거예요.”

나는 횡설수설하며 태림의 손에 놓았던 침을 수습해 난처하게 아이를 달래고 있는 부부에게로 다가섰다.

“죄송합니다. 곧 아이를 달랠 것이니…….”

다가온 나를 보며 사내가 대뜸 고개를 숙였다. 아마도 나를 아이가 시끄러워 항의를 하러 온 사람이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항의를 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많이 곤란하신 듯 보여 작은 도움이나 드릴까 해서요.”

나는 두 사람이 안심할 수 있도록 최대한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를 꺼냈다. 내 말에 긴장해 있던 부부의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그리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만 어찌 도와주시겠다는 것인지……?”

사내가 의아한 눈으로 나를 살폈다. 아이 달래는 일에 전혀 익숙해 보이지 않는 젊은 여자가 자신들을 돕겠다 하니 상당히 의아한 눈치였다.

“아이가 배에 타는 것이 익숙지 않아 우는 듯합니다. 차라리 잠을 재우면 아이도, 두 분도 모두 편하실 겁니다.”

“그것이야 그렇습니다만…….”

여인이 난처한 얼굴로 아이를 보았다. 그 눈빛이 말하고 있는 이야기는 분명했다.

이리 요란하게 울고 있는 아이를 어찌 재우란 말인가?

나는 웃으며 두 사람 앞에 침을 내밀었다.

“침술을 사용해 아이가 진정하도록 할 수 있습니다. 편하게 잠드는 것도 도울 수 있고요.”

두 사람이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두 사람이 놀란 이유는 내 말 때문이 아니었다.

“침술이라면……. 아이의 몸에 이 바늘을 찌르겠다는 겁니까?”

여인이 아이를 꼭 안으며 펄쩍 뛰었다.

“아이의 몸에…… 바늘을…… 아파서 더 크게 울지나 않을까 걱정입니다.”

여인이 아들을 보호하려는 듯 아이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날카로운 침을 아이의 몸에 찔러 넣는 것이 아무래도 내키지 않는 모양이었다.

시술에 대한 의심과 경계심을 없애는 것도 의원의 일이었다. 나는 내 손에 침을 놓은 뒤 그 모습을 두 사람에게 보여 주었다.

“아프지 않아요. 피도 나지 않고요. 위험한 방법이 아닙니다.”

“하지만…….”

“계속 울면 아이에게도 좋지 않아요. 어떻게든 진정을 시켜야 하니 잠시만 제게 맡겨 보세요.”

계속 울고 있는 아이를 힐끗 보며 말하니 여인이 머뭇거리며 사내를 바라보았다. 잠시 망설이던 그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를 안고 있던 여인이 내게로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섰다.

“신경이 예민해져 있을 때는 이를 진정시켜 주는 혈 자리에 침을 놓으면 좋습니다. 가장 많이 알려진 곳이 신문혈과 삼음교혈인데, 이 두 곳에 침을 놓으면 양의 기운을 누르고 음의 기운을 높여 마음을 차분하게 해 주지요. 양기는 낮이고 음기는 밤이니 음의 기운을 높이면 잠이 잘 옵니다.”

나는 두 사람이 불안하지 않도록 차분하게 설명을 이어 가며 아이 손목의 신문혈과 정강이 복사뼈 위의 삼음교혈에 침을 놓았다.

다음은 지압이었다. 구미혈(鳩尾穴:갈비뼈 사이의 명치 부위) 또한 몸과 마음을 안정시키기 좋은 혈 자리이니 아이를 달래는 데 안성맞춤이었다.

“평소에도 아이가 울고 보채면 이곳을 엄지손가락으로 가볍게 눌러 주세요. 아이의 호흡에 맞춰 둥글게 만져 주면 금세 안정을 찾을 겁니다.”

구미혈을 가볍게 어루만지기 시작하니 배가 부서져라 울던 아이의 울음소리가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했다. 아이의 울음이 작아질수록 두 사람의 눈에 옅게 서려 있던 의심이 점점 걷혀 나갔다.

“이, 이제 안 웁니다!”

마침내 아이의 울음이 완전히 멈추자 여인이 눈을 크게 떴다. 나는 웃으며 지압을 멈추고 아이의 손목과 다리에 놓았던 침을 거두었다.

“제가 알려드린 혈 자리를 손으로 계속 눌러 주세요. 그럼 곧 잠에 빠질 겁니다. 깨어 있으면 계속 보챌 것이니 재우는 편이 아이와 두 분 모두에게 편하겠지요.”

“예, 그리하겠습니다.”

한결 깍듯해진 태도로 고개를 숙인 여인이 손을 뻗어 아이의 구미혈을 어루만졌다. 어머니의 손길에 아이가 점차 편안하게 몸을 늘어뜨리더니, 곧 눈을 깜빡이는 속도가 느려졌다. 졸음이 쏟아지고 있는 것이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내가 크게 감탄하며 내게 고개를 숙였다.

“참으로 신통하십니다. 평소에도 예민하여 우는 일이 잦은 아이였는데, 한번 울면 무슨 수를 써도 그치지 않았습니다. 한데 이렇게 쉽게 울음을 멈추다니요.”

말이 제대로 통하지 않는 어린아이 환자를 돌볼 때가 얼마나 곤혹스러운지는 나도 알고 있었다. 자신의 의사를 울음으로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나이라면 더욱 힘들었다.

잠깐 환자로서 만나는 것도 힘든데 하루 종일 아이를 돌보는 부모의 어려움이야 말하지 않아도 뻔했다. 나는 안쓰러움과 존경을 담아 아이의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한참 많이 울고 보챌 나이지요. 고생이 많으시겠습니다.”

“어쩌겠습니까. 그러려니 해야지요. 우리가 낳은 우리 자식 놈 아닙니까.”

사내가 멋쩍게 웃으며 여인과 아이를 바라보았다. 가족을 향하는 눈빛에 애정이 가득하여 지켜보는 마음이 따뜻해졌다.

나를 낳으신 아버지와 어머니도 저런 모습이었을까?

소진으로서는 단 한 번도 받아 보지 못한 시선이었다. 우희로서도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의 애정은 받아 보지 못했다.

유일하게 남은 아버지마저 전쟁에서 목숨을 잃으셨으니 나는 부모의 애정을 기대할 수 없는 몸인가.

아버지가 묻힌 곳까지 보고 돌아온 터라 기분이 더욱 가라앉았다. 우울해지려는 기분을 건져 올린 사람은 막 잠에 빠진 아이의 등을 쓸어내리던 여인이었다.

“한데 어찌 이리 아이를 잘 아십니까?”

“예?”

“젊은 아가씨가 이처럼 아이를 잘 아는 것이 신기해서요. 혹 아이가 있으십니까?”

“특별히 아이를 잘 안다기보다는…….”

나는 사람의 몸을 공부하는 사람이었다. 아이 역시 사람이니 그에 대해 잘 아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인은 이미 홀로 결론을 내린 모양이었다. 그녀가 내 뒤쪽을 바라보며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이의 아버지는 누구입니까? 역시 저기 서 계시는 고운 도령이지요?”

여인을 따라 시선을 돌리니 바닥에 앉아 울렁거리는 속을 진정시키고 있는 태림과 난간에 기대어 바닷바람을 맞고 있는 운이 있었다. 그녀가 말하는 고운 도령이란 운이 분명했다.

운이 아이의 아버지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아니, 그 전에 나는 아이도 없다고!

“아니 저는…….”

하지만 내 변명이 나오기도 전에 사내가 여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무슨 소리야! 저기 바닥에 앉아 있는 믿음직한 도령이지. 얼굴만 고운 사내를 어디에다 쓰겠어?”

“여인의 마음을 참으로 모르시오. 얼굴 잘난 것이 제일이지! 그렇지 않습니까?”

여인이 동의를 구하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사내는 내 대답을 기다려 주지 않았다.

“얼굴은 소용이 없다니까 그러네. 딱 봐도 저쪽은 뺀질거리게 생겨서 실속이 없어 보여. 묵묵하게 제 일 하는 믿음직한 청년을 잡아야 평생 편하지.”

“아이고, 묵묵하게 제 일만 하는 사내랑 살면 속 터져 죽어요! 그나마 얼굴이라도 잘났으면 속이 터지다가도 그 잘난 얼굴 보면서 속이 풀려. 그러니 아가씨, 얼굴 잘난 사내를 잡아요.”

“아니, 아닙니다. 묵묵하게 제 일을 하는 믿음직한 사내를 잡아야 편해요, 아가씨.”

두 사람이 나를 향해 열정적으로 조언을 쏟아 냈다. 물론 내게는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 조언들이었다.

난처한 얼굴로 운과 태림을 보니 내 시선을 받은 두 사람이 무슨 일이냐는 듯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사내와 여인을 바라보았다.

“둘 다 아닙니다.”

내 말에 열정적으로 소리를 높이던 두 사람이 넋이 나간 얼굴로 나를 보았다.

“예?”

“두 사람 다 제 정인이 아닙니다. 전 아직 혼인도 하지 않았어요.”

여인이 머쓱하게 웃으며 아이의 등을 쓸어내렸다.

“어머나. 우리가 큰 실례를 했네요. 아직 혼인도 하지 않은 아가씨에게 아이 아버지 이야기를 물었으니…….”

“괜찮습니다. 나쁜 마음으로 물은 것도 아닌데요.”

나의 말에 안도한 듯 여인이 미소 지었다.

“하면 정인은 어떤 사람이에요? 저리 괜찮은 사람들을 곁에 두고서도 다른 사람에게 눈이 갔다면 분명 좋은 사내겠죠?”

여인의 질문과 함께 담덕의 얼굴이 떠올랐다.

생긴 것도 잘났고 제 할 일도 묵묵하게 잘하는 사내. 두 사람의 말에 따르면 최고의 남편감이었다.

하지만 담덕이 좋은 정인인 이유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좋은 사람이에요. 어떤 상황에서든 날 믿고 내 길을 응원해 주거든요.”

내 말에 여인이 남편의 눈치를 살피며 내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그래서, 잘생겼어요?”

“예?”

“다른 거 다 필요 없어요. 결국엔 잘생긴 게 최고예요. 혼인해 본 내가 하는 말이니 틀림없어요.”

일관적인 여인의 주장에 웃음이 터졌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질문에 대답했다. 담덕이야 고민할 것 없는 미남이었다.

“예. 잘생겼어요.”

“그럼 됐어요. 그 사내 절대 놓치지 말아요. 이 세상에 고민 없이 잘생겼다고 할 수 있는 사내가 많지 않아요.”

여인이 다시 한번 강조하며 제 남편을 힐끗 바라보았다. 위아래로 그를 훑은 여인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가끔은 저리 가만히만 있어도 얄미워질 때가 있다니까요.”

진심이 가득 담긴 목소리와 눈빛은 농담이 아니었다. 저를 향하는 시선에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내를 보며 나는 다시 한번 큰 웃음을 터트렸다.

“저기…….”

여인과 마주 보며 웃고 있는 그때, 중년의 사내가 머뭇거리며 내게 다가왔다. 무슨 일인가 싶어 사내를 보니 그가 고개를 숙였다.

“옆에서 지켜보니 의원님이신 듯한데 제 동료도 좀 봐 주시겠습니까? 배에 타기 전부터 힘이 없다고 하더니 조금 전부터 열이 심하게 올라 정신을 못 차리고 있습니다.”

그를 시작으로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몰려왔다.

“제 아이도 좀 봐 주십시오. 뭘 잘못 먹었는지 계속 배가 아프다고 합니다.”

“저희 형님도 부탁드리겠습니다. 배에 오르다 발목을 접질렸는데 퉁퉁 부어서 상태가 말이 아닙니다.”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목소리에 난처하게 운을 보니 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알아서 잘 해결해 보라는 뜻이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주변을 바라보았다.

“한 번에 모두를 살피지 못합니다. 차례로 말씀하시면 모두 도와 드릴게요.”

여러 사람을 진료를 할 때는 병증이 심각한 사람부터 돌보는 것이 법칙이었다. 나는 쏟아지는 목소리들 중 가장 시급한 것으로 생각되는 환자에게로 눈을 돌렸다.

“우선 열이 심하다는 분부터 볼까요?”

* * *

시간은 정신없이 흘러갔다. 가진 것이 침구뿐이었기 때문에 한계는 있었지만, 크게 아픈 사람이 없어 임시방편 정도는 제공할 수 있었다.

“지금 제가 한 것은 임시 처방입니다. 배에서 내리면 곧장 의원을 찾으세요. 당장은 병증이 나아진 것 같아도 그대로 두면 다시 증상이 나타날 겁니다.”

“그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의원님!”

마지막 남은 환자를 살피고 조언을 건네고 있으니 가까이서 나를 지켜보고 있던 운이 나를 불렀다.

“우희.”

허리를 펴고 운을 쳐다보자 그의 뒤편으로 자그마하게 뭍이 보였다. 배가 도착지인 미추홀에 가까워진 것이다.

“도착이군요.”

“그래. 이제부터 조금 긴장해야겠다.”

운이 작게 속삭였다. 아신의 옥패를 가지고 있다고는 하나 백제 땅이었다. 고구려와 백제는 철천지원수이니 조심하지 않으면 문제에 휩쓸릴 수도 있었다.

“그래야지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점차 가까워지는 땅을 바라보았다.

* * *

미추홀은 현대로 치면 인천 지역이었다. 소진으로 몇 번 가 본 적이 있는 땅이었지만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그때의 기억과 완전히 달랐다. 높고 낮은 건물들로 빼곡히 채워졌던 땅에는 흙과 풀이 자라고 있었고 자동차가 지나가던 길은 느리게 걷는 사람들이 차지했다.

부둣가는 부지런히 배가 드나들어 활기가 넘쳤다. 근처에는 배를 기다리며 사람들이 쉬어 갈 수 있도록 주점이 작게 만들어져 있었는데, 그곳에서 떠들썩한 소리와 맛 좋은 음식 냄새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잠시 주점에서 쉬고 계시면 말을 구해 오겠습니다.”

배에서 내려 평소의 모습을 되찾은 태림이 주점을 가리키며 말했다. 국내성에서 타고 왔던 말은 배에 태울 수 없어 도압성에 맡겨 두고 왔기 때문에 미추홀에서 사용할 말이 필요했다.

“태림의 임무는 우희를 지키는 것 아니었습니까? 곁을 비우면 곤란할 테니 말은 제가 구해 오겠습니다.”

“하지만…….”

태림이 난처한 얼굴로 나와 운을 살폈다.

나를 지키는 것이 그의 임무이기는 하나 귀족 도련님인 운에게 잡다한 일을 시키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 듯했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간단했다.

“그럼 다 같이 다녀오죠.”

나는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거리며 저 멀리 말이 보이는 곳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러자 태림과 운이 다급하게 내 옆으로 따라붙었다.

“오랫동안 배를 타고 왔으니 피곤하실 겁니다. 앞으로 쉬지 않고 움직여야 하니 잠시라도 체력을 비축하시는 편이…….”

“배를 타느라 제일 피곤했던 사람은 태림 아닌가요? 멀미 때문에 고생했잖아요.”

내 말에 태림이 입을 꾹 다물었다. 말문이 막힌 태림을 두고 이번에는 운이 나섰다.

“배 위에서 쉬지 못하고 계속 환자를 돌봤잖아. 지금이야 괜찮다고 느껴질지 몰라도, 조금 더 무리하면 쌓였던 피로가 한 번에 몰려와 힘들어질걸.”

“제 상태는 제가 잘 압니다. 아직 괜찮아요.”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꼭 중간에 나가떨어지던데.”

운이 미심쩍은 눈으로 나를 살폈다.

하지만 나는 정말 상태가 좋았다. 배 위에서 바쁘게 환자들을 살폈더니 오히려 정신이 맑고 몸이 개운했다. 무료하게 국내성에서 시간을 보내던 때보다 몸도 마음도 훨씬 가벼웠다.

분주하게 움직였는데 몸이 오히려 더 가볍다니. 평생 이 일을 하고 살아야 할 팔자인 거지.

“걱정 마십시오. 그럴 일은 없을 테니까.”

단호하게 손을 내젓는 사이 우리의 걸음이 마시장에 닿았다. 상인 하나와 말 예닐곱 마리가 전부였으니 마시장이라는 명칭은 거창했지만, 딱히 말을 사고파는 장소를 대체할 이름이 없었다.

“어서 오십시오!”

다가오는 사람을 발견한 상인이 특유의 밝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말이 필요하십니까?”

“세 마리. 오래 달려도 지치지 않을 놈으로.”

태림이 짧게 말하자 상인이 웃으며 우리를 말 앞으로 안내했다.

그러면서도 그의 눈이 바쁘게 움직여 우리의 행색을 살폈다. 이런 곳에서야 정해진 가격이라는 것이 없었으니 말값으로 얼마를 불러야 할지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중인 것 같았다.

“여기 있는 놈들 모두 튼튼합니다. 어떤 말을 고르셔도 만족하실 테지요.”

제 상품을 두고 좋은 말만 하는 상인의 이야기는 신뢰할 수 없었다. 우리는 옆에서 떠드는 상인의 목소리를 무시한 채 말을 상태를 살폈다.

사람들이 자주 드나드는 곳에 세워진 마시장은 대체로 말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길을 오가는 여행자들이 짧게 타기 위해 사고파는 말이니 군마처럼 좋은 녀석들은 기대할 수 없었다.

상태가 좋은 말을 사기 위해서는 말이 나고 자라는 사육장으로 가야 한다. 하지만 여정 중간에 일부러 먼 길을 돌아갈 수 없으니 지금은 이런 마시장에 만족해야 했다.

늘 질 좋은 말을 타고 다니던 사람들이니 웬만한 말은 눈에 차지 않는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적당한 타협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말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말의 모습을 살피며 운과 태림의 얼굴이 난처함으로 물드는 것이 보였다.

아무리 급해도 이처럼 상태가 나쁜 말은 곤란했다. 말이 지쳐서 멈춰 버리면 그 순간부터 말은 이동 수단이 아닌 짐이 되어 버린다.

“이보다 좋은 말은 없습니다.”

우리의 표정이 난처해지는 것을 본 상인의 말투가 금세 퉁명스러워졌다. 우리 셋은 눈으로 의견을 교환했다.

‘어찌할까요?’

‘여기 말고는 살 곳이 없으니…….’

‘하지만 말 상태가 너무 안 좋잖아요?’

“안 살 거면 길 막지 말고 비키십시오! 다들 못 사서 안달인데 왜 이러시나 몰라.”

투덜거린 상인이 거칠게 나를 밀어냈다. 예상하지 못한 일격에 몸이 휘청거리며 뒤로 넘어갔다.

“이게 무슨 짓이지?”

태림이 넘어지기 직전 나를 붙잡으며 상인을 노려보았으나, 장사를 하루 이틀 한 것이 아닌지 상인도 태림의 기세에 밀리지 않았다.

“장사를 방해하니 그렇잖습니까?”

“사람을 밀어 놓고 뭐가 어째?”

상인의 뻔뻔한 태도에 운까지 나섰다. 금방이라도 싸움이 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아가씨?”

그때 뒤쪽에서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뒤를 돌아보니 익숙한 사람이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배에서 우리 형님을 봐 주신 그 아가씨 맞지요?”

형님이 발목을 접질렸다며 도움을 청했던 청년이었다. 내 얼굴을 확인한 그가 환해진 얼굴로 우리 앞에 섰다.

“역시 그 아가씨로군요! 배에서 내릴 때는 정신이 없어 미처 고맙다는 말도 못 했습니다.”

“아니에요. 형님의 다리는 좀 괜찮으신가요?”

“지금 주점에서 쉬고 있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찜질을 해 주고 있으니 곧 나아지겠지요. 그런데…….”

힐끗 주점 쪽을 바라보았던 청년이 심상치 않은 우리의 분위기를 보며 말끝을 흐렸다. 상인과 뒤에 늘어선 말을 보며 대충 상황을 파악한 것인지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 말을 구하시는 겁니까?”

“예. 안쪽의 성까지 이동해야 해서요. 하지만…….”

나는 상인과 말을 바라보며 말을 줄였다. 많은 의미가 담긴 말에 상인의 미간이 다시 한번 찌푸려졌으나, 그가 미처 거친 말을 꺼내기도 전에 청년이 입을 열었다.

“성으로 가신다면 저희가 그쪽까지 갑니다. 장사를 하는 처지라 배에서 내리자마자 말과 수레를 구했는데 물건을 싣고 남은 빈자리가 있습니다. 거기라도 괜찮으시다면 타고 가시지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기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보니 운과 태림의 표정도 나쁘지 않았다.

“고마워요. 그럼 신세를 질게요.”

“신세라니요. 도움 주신 것에 보답하게 되어 오히려 제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활짝 웃는 청년과 반대로 상인의 얼굴이 보기 좋게 구겨졌다.

“그럼 가실까요.”

청년의 안내에 따라 걸음을 옮기며 상인을 힐끗 바라본 태림이 바닥의 작은 돌을 걷어찼다. 가벼운 동작에도 빠른 속도로 날아간 돌이 그대로 상인의 이마의 적중했다.

“아악!”

이마를 감싸 쥐는 상인의 비명에 놀라 태림을 바라보니 그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양 뚱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전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재빠른 변명에 태림을 바라보는 내 눈이 가늘어졌다.

“난 아무 말 안 했는데요.”

“……그러셨습니까?”

“태림은…… 내 생각보다 뒤끝이 기네요. 그런 거 없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농담 섞인 핀잔에 태림이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멀리 던졌다.

* * *

우리 세 사람은 청년이 만들어 준 자리에 나란히 앉아 성으로 향했다. 짐이 가득 찬 수레 끄트머리에 짚단을 깔고 그 위에 자리를 잡으니 생각보다 안정감이 있었다.

짐에 몸을 기대고 흘러가는 하늘을 바라보자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가 살랑거리며 흩어졌다. 때아닌 여유였다.

하지만 기분 좋은 바람에 마음이 풀어지는 것도 잠시뿐이었다. 빠르게 달리던 수레가 점점 느려지더니 불어오는 바람이 잦아든 것이다.

고개를 빼고 앞을 바라보니 어느새 수레가 성안으로 들어가는 긴 행렬이 펼쳐져 있었다. 멀리 입구에서는 창을 든 병사들이 성문을 지나는 사람들을 검문하는 중이었다.

“여기가 미추성(彌鄒城)입니다.”

때마침 앞에서 말을 몰고 있던 청년이 성의 입구에 도착했음을 알려 주었다. 우리의 동행도 여기까지였다.

“그럼 여기까지만 신세를 지겠습니다.”

“신세는요. 인연이 되면 다시 뵙지요.”

우리는 느려진 수레에서 내려서며 청년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우리 셋을 내려 준 청년은 빠르게 수레를 몰아 긴 행렬 뒤에 합류했다.

“미추성이 이리 생긴 곳이었군요.”

나는 멀리 미추성을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수많은 물자와 사람이 드나드는 교역의 장이자 기묘한 소문이 흘러나온 장소.

이곳에서는 또 무슨 일이 일어날까?

“서둘러 안으로 들어가자. 사람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어.”

운이 멍하니 성을 바라보는 나를 재촉했다. 그의 말처럼 우리가 잠시 걸음을 멈춘 와중에도 사람들이 끝없이 검문 행렬의 뒤에 합류하고 있었다.

“그럼 가 볼까요?”

품속에는 성문을 무사히 통과하게 해 줄 옥패가 있었다. 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당당한 걸음으로 행렬의 끝에 섰다.

* * *

까다롭게 검문을 하는 것인지 행렬은 느리게 줄어들었다. 한참 만에 검문을 담당하는 병사 앞에 섰을 때는 기운이 빠져 잔뜩 긴장하고 있던 어깨의 힘마저 풀어졌을 정도였다.

“방문 목적.”

병사가 귀찮음이 가득 묻어나는 얼굴로 짧게 말했다. 나는 대답 대신 품 안에서 옥패를 꺼내 그의 앞에 내밀었다.

“뇌물을 줘도 소용없으니 방문 목적을…….”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투덜거리며 옥패를 받아 든 병사가 곧 말끝을 흐리며 눈을 크게 떴다.

“이건……!”

익숙한 반응이었다. 오래전 석현성에서 국내성으로 돌아오는 길, 백제의 성을 지날 때도 병사들이 이런 반응이었다.

병사의 눈이 재빠르게 나와 운, 태림을 살폈다. 그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태림의 허리에 걸린 검에 잠시 멈췄다가 다시 내게로 돌아왔다. 옥패를 건넨 사람이 나이니 내게 사정을 물으려는 것 같았다.

“이 옥패는……?”

“보는 그대로입니다. 귀하신 분께서 준 옥패예요.”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꺼낸 말에 병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잠시 어쩔 줄 몰라 방황하던 그가 곧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어느새 병사의 말투가 달라져 있었다. 그는 반듯하게 각이 잡힌 자세로 내게 고개를 숙이고는 그대로 성안으로 사라졌다.

잠시 제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병사가 조금 더 계급이 높아 보이는 남자와 함께 나타났다. 허겁지겁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남자의 얼굴도 병사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옥패를 건네신 분이십니까?”

“네. 내가 옥패를 가져왔어요.”

“인상착의는 대충 맞는 것 같은데…….”

남자가 나를 위아래로 살피며 작게 중얼거렸다.

“인상착의?”

예상하지 못한 반응에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니 남자가 당황하여 손을 내저었다.

“아니, 아닙니다. 잠시 확인할 것이 있으니 저를 따라오시겠습니까.”

운과 태림이 나를 보았다. 예전에도 이런 과정을 거쳤냐는 뜻이었다. 하지만 나로서도 이런 반응은 처음이었다.

나는 운과 태림을 향해 작게 고개를 저은 뒤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전 조용히 미추성에 들어가고 싶을 뿐이에요.”

“예. 아가씨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만…… 잠시 확인을 거치도록 협조해 주시겠습니까? 확인이 완료되면 그 뒤에는 미추성 어디든 원하시는 곳으로 가실 수 있습니다.”

남자의 태도는 깍듯했지만 분위기가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난처한 얼굴로 운과 태림을 바라보았으나 그들도 딱히 답을 내놓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운이 짧게 의견을 내놓았다.

“따라가자.”

그렇게 말하는 운의 눈에도 경계심이 가득 차 있었다.

따라는 가되 경계를 늦추지 말자는 의미겠지.

나는 긴장으로 서서히 축축하게 젖어 드는 손을 꽉 쥐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알겠어요. 어디로 가면 되죠? 앞장서면 따라가겠어요.”

내 대답에 남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남자는 우리를 성벽의 망루로 안내했다. 좁은 계단을 따라 위로 향하는 동안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긴장된 시간이었다. 고요한 가운데 앞장선 남자가 입은 갑옷이 절그럭대는 소리만이 좁은 공간에 울렸고, 태림은 언제든 검을 뽑아 들 수 있도록 손을 검 손잡이 가까이 두고 있었다.

마침내 모두의 걸음이 망루의 가장 높은 곳에 닿았을 때 남자가 안으로 들어서며 깊게 고개를 숙였다. 나를 대할 때의 깍듯한 태도가 우습게 느껴질 만큼 정중하고 반듯한 인사였다.

“모셔 왔습니다, 어르신.”

고개 숙이는 남자 너머로 의자에 기대어 밖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의 뒷모습이 보였다. 검은 머리가 선명한 뒷모습은 어르신이라는 호칭에 그다지 어울리지 않았지만, 남자는 그를 향해 과할 정도로 예를 갖추고 있었다.

“데려왔다고?”

의자에 앉아 있던 자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데 다급하게 외치는 그의 목소리가 어딘가 익숙했다.

설마 이 목소리는…… 그럴 리가 없는데…….

“우희!”

설마 하는 생각이 결론에 도달하기도 전에 익숙한 얼굴이 반가운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생각지도 못한 얼굴에 나는 입을 쩍 벌렸다.

“아, 아, 아, 아신?”

너무 놀란 나머지 존칭조차 나오지 않았다. 썩 무례한 외침이었지만 다들 그 사실보다는 아신이라는 이름에 크게 반응했다.

“아신?”

남자는 내가 감히 왕의 이름을 함부로 부른 것에, 운과 태림은 눈앞의 이자가 백제의 왕 아신이라는 사실에 놀란 것 같았다. 놀라지 않은 사람은 아신 하나뿐이었다.

“그래, 나다!”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린 아신이 내 앞으로 걸어와 나의 두 손을 붙잡았다.

“이게 몇 년 만이냐!”

오랜 친구를 만난 것 같은 반가운 인사에 나는 얼떨떨해져 아신을 바라보았다. 반겨 주는 그에게는 미안했지만 고맙다는 마음보다는 의아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생명을 구해 준 일이 있기는 하나 벌써 몇 년 전의 일인데, 지금도 나를 이리 반겨 주나?

이제 아신은 목숨을 위협받던 태자가 아닌 한 나라의 당당한 왕이었다. 달라진 처지에 과거의 기억은 모두 잊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의 기억 속에는 여전히 내가 호의적인 모습으로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마지막으로 석현성에서 뵈었으니 오래전의 일이지요.”

“그래, 그래. 오래전이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동안 원하던 것도 이루셨고요.”

그 시절 아신이 원하던 것은 단 하나, 왕위에 올라 더 이상 목숨을 위협받지 않는 것이었다. 그때 나누었던 대화를 기억하는 것인지 아신이 멋쩍은 얼굴로 내 손을 놓았다.

“그래. 원하던 것을 손에 넣었다.”

“한데 기쁘지만은 않으신 듯 보입니다.”

“하나를 손에 넣었더니 또 다른 것을 얻고 싶어지더구나. 사람의 욕심이 원래 그런 거겠지.”

“백제의 가장 높은 자리에 계시는 분께서 마음대로 갖지 못하시는 것도 있습니까?”

내 질문에 아신이 묘한 표정을 했다.

“정말 몰라서 묻는 것이냐? 지금 내가 바라는 것은 너희 고구려가 앗아 간 우리의 땅을 되찾는 일이다. 그러다 너희의 땅까지 가져오면 더 좋겠지만…… 우선은 우리 땅을 가져오는 것이 급하지.”

아신의 말에 나를 망루에 데려온 남자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아신을 상징하는 옥패를 가진 자가 고구려인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듯했다.

“어찌 고구려 사람 앞에서 그리 당당하게 선전포고를 하십니까?”

“안 될 것은 또 무어냐? 이 세상에 내가 그 땅을 원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자가 없거늘. 너희 고구려에서는 내가 매번 너희 왕에게 박살이 난다며 조롱을 한다지?”

차마 아니라고 말해 줄 수가 없었다. 몇 년째 대승을 이어 가고 있는 백제전은 국내성 이야기꾼들의 좋은 소재였다. 그 속에서 아신은 주로 무능하고 주제도 몰라 매번 담덕에게 혼쭐이 나는 멍청한 왕으로 등장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묘한 기분이었다. 아마도 내가 백제의 왕 아신이 아니라, 나의 환자 아신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찌 그런 이야기까지 아십니까.”

“이 자리가 원래 그렇다. 여기저기서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까지 모두 읊어 대니 어쩔 수 없이 각지의 소문이 내 귀에 흘러들지. 참으로 피곤한 일이다.”

아신이 피곤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잔뜩 찌푸려진 그의 얼굴에는 질린 기색이 역력했다.

“자리에는 책임이 따르니까요. 원하던 자리에 오르셨으니 그 정도 피곤함은 감수하셔야지요.”

“……내 심복들과 똑같은 말을 하는구나.”

그렇게 말하는 아신은 묘하게 배신감이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너라면 그런 피곤함은 건강에 좋지 않다고 이런저런 약을 드시고, 이런저런 침을 맞으셔야 하고…… 그런 말을 할 줄 알았는데.”

“……저도 늘 의원다운 말만 하는 건 아닙니다.”

너무 선생 같은 잔소리를 했나 싶어 멋쩍게 웃으니 아신이 픽 웃었다.

“그런데 너는 여기에 어쩐 일로 온 것이냐? 그때 고구려로 떠나고 오랫동안 옥패를 쓴 사람의 소식이 들려오지 않기에 다시는 백제 땅에 오지 않을 줄 알았다. 석현성에서 큰 고생을 했으니 이제 이 땅을 밟기도 싫은 것인가 하였지.”

나는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누군가에게 사정을 설명해야 할 일이 생겼을 때 댈 핑계 정도는 만들어 두었지만, 이야기 상대가 아신이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기 때문에 걸리는 부분이 많았다.

원래는 백제인 가족이 여행을 하고 있는 것으로 이야기를 맞추었다. 내가 막냇누이고, 운이 첫째, 태림이 둘째라는 설정이었다.

하지만 아신은 내가 고구려인이라는 것도, 오라버니가 하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석현성에서 파상풍을 치료하며 나눈 대화 덕분이었다.

나는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아신이 이상하게 여기지 않도록 거짓 사연을 정리했다.

고구려인인 내가 몇 년 만에 갑자기 백제에 나타나도 이상하지 않을 핑계라면…….

“약재를 구하러 왔습니다.”

“약재?”

“따뜻한 지역에서만 나는 약재가 있어요. 고구려 땅은 추워서 그런 약재들 찾기가 쉽지 않지요.”

나는 아신의 기억 속 내가 의원이라는 점을 활용하기로 했다.

“그간 약재상을 통해 들여왔지만 이번엔 제가 직접 눈으로 보고 싶었어요. 이런 사소한 일에 귀한 옥패를 사용해서 송구합니다.”

다행히 내 말에 제법 설득력이 있었던지 아신이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그의 표정은 어딘가 뿌듯하고 기뻐 보이기까지 했다.

“송구하기는. 애초에 그러라고 준 옥패인 것을. 우리 백제 땅에는 좋은 약재가 많다. 앞으로도 종종 오너라. 미추성도 미추성이지만 내가 지내는 위례성에는 더 많은 약재가 있어. 앞으로는 그쪽으로 와라.”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데 폐하께서는 어찌 위례성이 아닌 미추성에 계십니까?”

한창 전쟁 준비를 하고 있을 시점이었다. 아신이라면 당연히 수도인 위례성에 머무르며 부하들을 지휘하고 있어야 옳은 것 아닌가.

“그것은 일이 조금…….”

난처한 질문이었는지 웃고 있던 아신의 얼굴이 조금 굳어졌다. 그는 내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뒤편에 선 태림과 운에게로 관심을 돌렸다.

“그나저나 이 두 사람은 누구지? 가만히 보니 이쪽은 얼굴도 제법 눈에 익은데.”

두 사람을 바라보던 아신의 시선이 곧 태림 앞에 멈췄다. 석현성에서 아신을 치료하던 당시 태림도 그의 방에 드나들었으니 당연히 기억에 있을 것이다.

오라버니라는 핑계는 통하지 않는다. 그 당시 태림과 나의 모습은 누가 보아도 남매가 아니었다.

“이 녀석은 제 친구 놈입니다.”

내가 고민하는 사이 운이 웃으며 태림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운 특유의 넉살 좋은 웃음이었다.

“저는 우희의 오라버니고요.”

“아, 그때 도압성에 있었다는…….”

아신이 우리 셋을 훑어 보며 제 턱을 매만졌다. 무엇인가 고민을 하는 것 같았다. 한참의 침묵 끝에 아신이 입을 열었다.

“미추성에는 얼마나 있을 생각이지?”

구체적인 일정은 정하지 않았다. 소문의 정체를 파악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므로 우리는 이를 알아낸 뒤에야 국내성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필요한 것을 구하고 난 뒤에 돌아갈 생각입니다. 정확한 기간은 정해 두지 않았어요.”

“그런 생각이라면 내가 거처를 제공하고 싶은데.”

“거처를요?”

생각지 못한 제안에 눈을 크게 뜨니 아신이 어색하게 웃으며 뒷목을 긁적였다.

“아니, 어차피 나도 한동안 미추성에 있을 예정이거든. 이곳에 임시 거처를 마련해 두었는데 쓸데없이 커서 빈방이 많아. 그냥 두고 놀리느니 누구라도 사용하는 편이 낫지 않나.”

“그거야 그렇겠지만…….”

나 혼자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슬쩍 운과 태림을 보니 그들 역시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의견을 교환하고 있었다.

이번 미추홀 탐색 일행의 우두머리는 운이었다. 거취 문제에 대한 결론은 그가 내려야만 했다.

빤히 그를 보고 있으니 태림과 의견 교환을 마친 운이 활짝 웃으며 아신에게 고개를 숙였다.

“거절할 이유가 없지요. 기꺼이 그리하겠습니다. 과분한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폐하.”

* * *

“넙죽 그러겠다고 하시면 어떡합니까!”

아신이 미추홀에 두었다는 임시 거처로 오자마자 태림이 머리를 짚으며 운에게 외쳤다.

“이제 와서 그러면 저도 곤란합니다, 태림.”

하지만 상황이 골치 아프게 되었다는 듯 연신 한숨을 내쉬는 태림을 보면서도 운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내가 눈으로 ‘알겠다고 할까요?’ 하니 태림도 ‘그럽시다!’라지 않았습니까?”

“제가 언제 그랬습니까. ‘아신의 소굴로 걸어 들어가는 건 위험하니 거절하는 게 좋겠습니다’라고 말했지요.”

“그랬습니까? 내가 태림의 눈빛을 영 잘못 읽었습니다. 앞으로는 눈빛만 보아도 의견이 척척 맞도록 오늘부터 더 깊은 친분을 쌓아 봅시다.”

그렇게 말하고는 허허허 웃으며 어깨를 두드리는 운의 태도에 태림이 입을 쩍 벌렸다.

“그게 무슨…… 이런 식으로 어물쩍 넘어갈 일이 아니잖습니까.”

태림이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젓자 가볍게 웃고 있던 운의 얼굴이 조금 진지해졌다.

“좋은 거처를 내어주겠다는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거절했다가 괜한 속셈이 있는 것으로 보이면 곤란하죠. 차라리 상대의 소굴로 들어와 있는 편이 낫다 싶었습니다.”

그렇게 말한 운이 바깥을 힐끗거리며 한층 목소리를 낮추었다.

“게다가 아신왕이 위례성이 아닌 미추성에 와 있는 것도 마음에 걸리지 않습니까? 가까이서 지켜보면 의외의 정보까지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정보의 중심이라는 비로의 어느 누구도 아신왕이 위례성을 떠나 미추성에 있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가 이곳으로 온 것이 극비 중의 극비라는 뜻이었다.

실제로 아신은 왕이라는 자신의 정체를 감추고 있었다. 우리를 망루로 데려왔던 남자를 비롯해 이곳 거처에서 머무르고 있는 병사들 모두가 그를 ‘어르신’이라 부르고 있었다.

상황이 그러하니 무엇인가 비밀스러운 일을 꾸미고 있다는 의심이 드는 건 당연했다. 운은 아신의 주위에 머무르며 그 비밀스러운 일의 정체까지 알아보고 싶은 모양이었다.

“저희끼리라면 당연히 그리했겠지만 우희 님까지 위험한 상황에 끌어들이는 것은 곤란합니다.”

“우희가 위험해져요?”

태림의 걱정에 운이 헛웃음을 흘렸다.

“우희를 대하는 아신왕의 태도를 보았잖습니까. 무슨 일이 벌어져도 그는 우희를 상하게 하지 않을걸요. 다른 쪽으로의 위험이라면 몰라도…….”

운의 말에 태림이 입을 꾹 다물었다. 이런 방면으로는 눈치가 없는 태림이 보기에도 아신이 내게 깊은 호감을 표현한 듯했다.

태림이 자신의 말에 수긍하자 이번에는 운의 조언이 나를 향했다.

“우희. 아무리 목숨을 구해 준 사람이라고는 하나 그대를 향한 아신왕의 너무 호의가 깊어. 여러모로 조심하는 것이 좋겠어.”

“호의가 깊은데 조심을 하라고요?”

의아해져서 고개를 갸웃거리니 운이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백제 땅에 남고 싶은 건 아닐 것 아냐? 아신왕이 지난번에 그대가 떠나는 것을 용인해 줬다고 해서 이번에도 그러라는 법은 없잖아. 그때는 위치가 불안한 태자였으니 그대를 강제하기 힘들었겠지만 이제는 한 나라의 왕이야. 게다가 이곳은 아신왕의 힘이 미치는 그의 땅이지. 조심해서 나쁠 것이 없어.”

하지만 나는 운의 진지한 말이 우습게만 들렸다.

“도대체 제가 뭐라고 아신왕이 절 잡아 두겠어요?

믿을 수 없다는 듯 웃어 버리는 나를 보고 운이 다시 한번 강하게 조언했다.

“친구로, 의원으로, 여인으로……. 무엇이든 이유가 될 수 있겠지. 그대는 설마 하는 마음이겠지만, 설마가 사람 잡는 세상이야. 그러니 내 말을 새 듣고 아신왕을 조심해. 늘 태림과 함께 움직이고.”

운이 이처럼 진지하게 나오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그만큼 그가 지금의 상황을 걱정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태림을 바라보았다. 그도 비슷한 생각인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 시선을 기다렸다는 듯 태림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태림 역시 운의 말에 동의하고 있었다.

너무 다른 성향의 두 사람이 같은 조언을 했으니 영 쓸데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알겠어요. 두 사람 모두 그리 말하니 신경 쓸게요.”

내 대답에 운과 태림의 딱딱한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이제는 본격적인 우리의 목표에 대해 이야기할 시간이었다.

“아신의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죠. 여기 온 목적은 괴이한 소문의 진위를 파악하기 위해서이니 그 방법을 고민해야 해요.”

“우선은 소문이 흘러나왔다는 시장을 둘러봐야겠지.”

“운 좋게 백제 병사들과 같은 공간에서 지내게 되었으니 그쪽을 찔러 봐도 좋겠지요.”

운과 태림이 차례로 의견을 내놓았다. 모두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하면 우희와 태림이 시장 쪽을 맡아 주고, 나는 이 저택에서 병사들과 이야기를 나눠 보지. 아신에게 약재를 구하겠다는 핑계를 대었으니 시장을 둘러보는 건 이상하지 않을 거야. 그리고 병사들과 이야기를 나눠 보는 건…….”

“그런 건 그쪽의 특기죠. 잘 알고 있습니다.”

도압성에 가는 길에 병사들과 잘 어울리던 운의 모습을 떠올리며 말하자 그가 어색하게 웃었다.

“특기까지는 아니고 역할을 나누자면 이게 낫다는 것이지. 태림에게 병사들과 친해지라고 하면 몇 년을 주어도 해내지 못할 것 같아서.”

나와 운의 시선이 태림을 향했다. 운의 말대로 태림에게 그 임무를 맡겼다가는 몇 년을 주어도 시간이 부족할 터였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시선에 태림이 헛기침을 했다.

“그리 보지 않으셔도 제가 붙임성이 없다는 건 잘 압니다.”

태림의 말에 운이 눈을 크게 떴다.

“그걸 알고 있다니 놀랍군요. 모르고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러게요. 그런 건 전혀 모를 줄 알았는데.”

거기에 나까지 맞장구를 치니 태림이 상기된 얼굴로 뒷목을 매만졌다.

“……계속 절 놀리실 겁니까?”

“오, 놀림당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이건 정말 의외입니다.”

“……해운 님.”

원망 섞인 태림의 목소리에 나와 운의 입에서 웃음이 터졌다.

* * *

태림과 나는 아침 일찍 미추성의 시장으로 향했다. 소문의 진위를 파악하고자 나선 시장 나들이였지만, 정작 미추성의 시장에 도착하고 보니 처음 보는 활발함에 감탄부터 쏟아졌다.

바다를 통해 물자가 드나드는 곳답게 미추성의 시장은 규모가 대단했다. 시장에 오르는 물품들 중에는 국내성에서 보지 못한 것들도 많았다.

나는 신이 나서 시장의 곳곳을 구경했다. 그런 나의 뒤를 태림이 묵묵히 따라붙었다.

“과편이에요!”

하지만 내 발걸음이 멈춘 곳은 결국 과편 앞이었다. 내 과편 사랑은 이미 유명해서 태림은 놀라지도 않은 얼굴로 값을 치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사자고 한 말은 아니었어요.”

“사지 말자고 한 말도 아니시지요.”

어제 놀렸던 앙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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