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장. 전야(全夜/前夜)
매서운 겨울이 지나고 영락 4년이 밝았다.
매년 이어진 패배로 가라앉은 분위기를 반전하기 위해 백제는 연초부터 바쁘게 움직였다.
아신은 맏아들인 전지(腆支)를 태자로 삼아 후계를 굳건히 하고, 이복동생인 홍(洪)을 내신좌평에 임명해 내부의 혼란을 다스리고자 하였다.
내부를 다스린 후에는 자연스럽게 외부로 눈을 돌리게 된다. 고구려는 분주한 백제의 움직임을 주시하며 곧 다가올 전쟁을 대비했다.
담덕은 수확철에 맞춰 백제가 쳐들어올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제가 회의의 귀족들도 비슷한 생각이었다.
여태까지 백제가 보여 준 침략 방식에 근거한 결론이었다. 그간 백제는 식량 보급에 유리한 수확철에 전쟁을 벌이는 쪽을 선호해 매년 비슷한 시기에 우리 성을 공격해 왔다.
때문에 고구려는 연초부터 별다른 이견 없이 수확철에 벌어질 전쟁에 대비한 훈련과 물자 확보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제 여름이 깊어지면 본격적인 전쟁 준비에 돌입하게 될 것이다.
조금 더 바빠지기 전에 담덕은 나와 호수에 놀러 가기로 했던 약속을 지켰다. 4월에 접어들어 날이 제법 더워질 무렵이었다.
담덕이 봐 두었다는 작은 호수는 압록강을 따라가면 나오는 곳으로, 국내성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아 짧은 나들이를 다녀오기에는 그만이었다.
원래 물놀이란 사람이 많을수록 즐거운 법이라 호위 임무를 맡고 있는 지설과 태림은 물론이고 제신과 서까지 함께 나들이 길에 나섰다.
오전부터 떠들썩하게 나선 일행은 해가 중천에 떴을 무렵 호수에 도착해 자리를 잡았다. 지설과 태림은 함께 온 병사들을 시켜 호수 근처에 휴식을 취할 그늘막을 쳤고, 달래를 비롯한 시녀들은 먹거리와 갈아입을 옷을 준비했다.
나와 서는 호수를 보자마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겉옷을 벗어 던지고 곧장 물에 뛰어들었다. 그 뒤를 제신과 담덕이 따랐다.
호위를 핑계로 이리저리 내빼던 태림을 끌고 오는 것은 내 몫이었다.
“태림도 빠지면 안 되죠!”
그렇게 태림까지 호수 안으로 들어오니 수영을 못하는 지설만 덩그러니 그늘막 아래에 남았다.
“지설도 들어와요. 물이 그렇게 깊지 않아서 수영을 못해도 괜찮아요.”
“아닙니다. 전 물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어차피 태림과 저, 둘 중 하나는 호위에 집중해야하니 제가 그 역할을 맡으면 됩니다.”
지난번 비로의 작전을 수행하다 물에 빠진 일로 크게 질린 것인지 지설은 호수 근처로는 가까이 다가오지도 않았다.
아무리 즐거운 놀이라도 본인이 싫다면 어쩔 수 없었다. 호위를 위해서라는 핑계도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지설을 설득하지 못하고 돌아섰다.
하지만 제신의 생각은 다른 것 같았다.
“태림.”
장난기 가득한 얼굴을 한 제신이 태림의 귓가에 무어라고 속삭였다. 그의 말을 들은 태림은 순식간에 곤란한 얼굴이 되었지만, 끈질기게 옆에 붙어 설득하는 제신에게 넘어갔는지 마지막에는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의기투합한 제신과 태림의 시선이 지설을 향했다. 몇 번이나 시선을 주고받은 두 사람이 재빨리 호수 밖으로 뛰어나가 지설의 팔과 다리를 들었다.
“뭐하시는 겁니까!”
부지불식간에 두 사람의 손에 덜렁 들린 지설이 답지 않게 당황한 목소리로 항의했다.
안타깝게도 그의 당황한 얼굴이 제신의 장난기를 더욱 부추기고 말았다.
“여기까지 와서 그늘막만 지키고 있으면 되겠습니까, 지설 님?”
“제가 그러고 싶다는데 안 될 이유는 또 뭡니까?”
“에이, 보는 사람이 재미없잖습니까.”
“제가 다른 사람의 재미까지 신경 써 줘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모처럼 놀러 나왔으니 저희 재미에 협조 좀 하십시오!”
그렇게 외친 제신이 태림에게 눈짓을 보내더니 지설의 몸을 그대로 호수 쪽으로 던졌다. 공중에 붕 뜬 지설의 몸이 순식간에 호수 안으로 처박혔다.
지설이 물에 빠지는 요란한 소리에 장난을 주도한 제신은 물론이고 소란을 지켜보던 나와 담덕까지 웃음이 터졌다. 서 역시 헛기침을 하며 속으로 웃음을 삼키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모두의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금세 물 위로 올라와야 할 지설이 한참이 지나도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지설?”
가장 먼저 이상한 것을 알아챈 사람은 담덕이었다. 걱정이 섞인 그의 목소리에 배를 잡고 웃던 제신의 얼굴이 굳었다.
“지설 님?”
제신이 지설을 부르며 천천히 그가 빠진 곳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제신의 부름에도 수면은 고요했다.
“지설 님!”
확실히 상황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린 제신의 걸음이 조금 더 빨라졌다. 첨벙거리며 다급하게 지설이 빠진 곳으로 향하는 그의 모습에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 그 근처로 몰려들었다.
제신의 발이 지설이 빠진 곳에 닿았을 때. 고요하던 수면이 요동치더니 물속에서 야차 같은 얼굴을 한 지설이 불쑥 튀어나왔다.
“제, 신, 님!”
지설이 이를 바드득 갈며 놀란 제신에게로 손을 뻗었다.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지설의 얼굴에 놀란 제신은 방어할 새도 없이 그의 손에 뒤통수가 붙들렸다.
“꼭 이런 장난을 쳐야 속이 시원합니까?”
지설은 제신의 얼굴을 물속에 처박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게 재미있다고 웃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신을 시원하게 응징한 지설이 이번에는 우리를 향해 물을 퍼부었다. 두 손으로 어찌나 요령 좋게 물을 퍼붓는지 눈이며 코로 물이 들어가 숨을 쉬기 힘들 정도였다.
“그만, 좀, 숨 좀 쉽시다!”
서가 허우적대며 지설의 팔에 매달렸다. 얼굴을 향해 쏟아지던 물줄기가 멈추고 겨우 숨이 돌아왔다.
거기에서 모두 멈추었다면 평화로운 결말이 찾아왔겠으나, 안타깝게도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지고는 못 사는 성격들이었다. 아마 모두의 머릿속에 같은 생각이 스쳐 갔을 것이다.
너 죽고 나 죽자. 아니, 너 죽고 나 살자!
그때부터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얼굴을 향해 물을 퍼부어 댔다.
누구에게 물을 뿌리는지는 상관없었다. 제 얼굴을 사수하기 위해 서로가 서로를 공격했다.
나도 그 분위기에 휩쓸려 사방으로 물을 뿌렸다. 팔이 아파 잠깐 손을 멈추면 곧장 얼굴로 물이 쏟아져 숨을 쉴 수 없으니 도무지 팔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이제 그만합시다! 예?”
이러다 팔이 빠지겠다 싶을 때쯤 서가 지친 목소리로 외쳤다.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허공을 쉴 새 없이 오가던 물줄기가 뚝 그쳤다.
쏟아지던 물줄기가 사라지니 그제야 엉망이 되어 버린 서로의 꼴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물에 젖은 것이야 당연했지만 요란하게 물을 맞은 터라 하나같이 머리가 엉망이었다.
허공에서 눈이 마주치는 순간 누군가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것 같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고, 기다렸다는 듯 다른 사람들의 입에서도 차례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찌 다들 적당히 하는 법을 모르십니다.”
서가 투덜거리는 소리에 지설이 씨익 웃으며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그러니 시작을 마셨어야지요. 저는 한번 시작하면 끝을 보는 사람이거든요.”
지설의 말에 불안한 기색을 느낀 서가 당황해서 손을 내저었다.
“잠깐, 시작을 한 사람은 제가 아니라…….”
하지만 서의 말이 마무리되기도 전에 지설이 다시 사방으로 물을 뿌리기 시작했다. 그때부터는 또다시 전쟁이었다.
나는 본격적인 물세례가 시작되기 전 조용히 호수를 빠져나왔다. 나 역시 시작을 하면 끝장을 보는 성격이지만, 때로는 현실을 직시하고 물러설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었다.
기세 좋은 사내들과 싸우느라 벌써부터 팔이 얼얼했다. 저 사이에서 끝장을 보자면 내가 제일 먼저 지쳐서 쓰러질 판이었다.
호수를 빠져나오며 눈치를 살피니 자신들만의 전쟁에 몰두한 사내들은 내가 그 틈에서 빠져나온 것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물놀이를 가자고 할 때는 다들 시큰둥하더니…… 정작 호수에 와서는 나보다 더 즐겁게 놀고 있잖아?
특히 물놀이는 무슨 물놀이냐며 핀잔을 주었던 지설이 제일 열심이었다.
정말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라니까.
호수 밖으로 나오며 피식 웃는 내 곁으로 달래가 달려왔다.
“아가씨, 춥지 않으세요?”
“춥긴. 오히려 시원해서 좋은데.”
“지금이야 그러셔도 물 밖에 나오셨으니 곧 추워지실 거예요.”
달래가 잔소리를 하며 내 어깨에 마른 수건을 둘러 주었다. 내 몸이 폭 싸일 정도로 커다란 수건이었다.
“달래도 걱정이 참 많다니까.”
“아가씨께서 하도 몸을 안 챙기시니 저라도 걱정이 많아야지요!”
“걱정도 적당히 많아야 걱정인 법이다. 너무 그러면 다들 호들갑이라고 할걸.”
“호들갑 소리를 들어도 챙길 건 챙겨야 합니다. 그게 제 일이거든요.”
내 투덜거림에도 달래는 물러서지 않고 제 할 일을 했다.
“따뜻한 차라도 드릴까요? 간단한 요깃거리는 필요 없으시고요?”
이어지는 달래의 질문을 듣고 보니 조금 허기가 지는 것도 같았다.
“그럼 간단히 뭐라도 먹을까.”
“그렇게 하세요. 잠시 기다리시면 차와 간식을 내오겠습니다.”
달래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으며 멀어졌다.
나는 달래가 간식을 준비하는 동안 주변을 둘러보기로 했다. 호수에 오자마자 서와 함께 물에 뛰어드느라 정작 풍경을 구경할 새가 없었던 것이다.
풍경은 훌륭했다.
해모수와 유화가 만났다는 웅심연(熊心淵)의 모습이 이러할까.
앞으로는 맑은 호수가, 뒤로는 수려한 산세가 있으니 가만히 풍경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평온해지는 것 같았다.
주변 풍경에 집중하며 조금씩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 걸음이 점차 산 쪽으로 가까워졌다. 그렇게 호수에서 요란한 물놀이를 벌이고 있는 일행의 소리도 서서히 사라지고 완벽한 고요 속에 남겨졌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쯤. 멀리서 불안한 소리가 들려왔다.
쿠구구궁.
희미한 소리였지만 정체는 분명했다. 천둥소리였다.
비가 오려나?
나는 고개를 들어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하늘을 살폈다. 멀리서부터 빠르게 먹구름이 밀려들고 있었다.
맑았던 하늘이 순식간에 어둠으로 뒤덮였다.
날씨가 이리도 급변하나 싶어 멍하니 하늘을 보고 있으니 곧 얼굴에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들이 날을 잘못 잡았네.”
아쉬운 마음에 중얼거렸더니 그 말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양 가는 빗방울이 금세 굵어졌다. 쏟아지는 빗줄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사방이 빗소리로 가득 찼다.
나는 어깨에 두르고 있던 수건을 들어 머리 위를 가리고 몸을 돌렸다. 이제 그만 일행들에게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소나기일 거야. 금방 그칠 테니 날을 완전히 잘못 잡은 건 아니지.”
차분한 목소리가 다급하게 걸음을 옮기려는 내 발목을 붙잡았다.
고개를 들어 앞을 보니 쏟아지는 빗속에서 담덕의 모습이 보였다.
“어찌 여기에 있어?”
“네가 엉뚱한 곳으로 가기에 혹 사고라도 칠까 봐 뒤따라왔다.”
“내가 여기에서 무슨 사고를 쳐?”
“글쎄. 넌 워낙 생각지도 못한 사고를 많이 쳐서 말이야.”
담덕이 웃으며 내 앞으로 다가왔다.
“잠시 비를 피하자. 물놀이를 하느라 이미 흠뻑 젖었지만…… 그래도 비를 맞는 건 싫잖아.”
담덕이 그리 말하며 산 입구를 바라보았다. 그를 따라 눈을 돌리니 커다란 나무 아래에 너와 지붕을 얹은 집 한 채가 외롭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사람이 사는 곳인가?”
어울리지 않게 덩그러니 놓인 집이 이상해 눈을 크게 떴더니 담덕이 고개를 저었다.
“아마 사냥꾼들이 만들어 둔 집일 거야. 입산하기 전에 활과 검을 정비하고, 잠시 쉬어 가며 체력을 비축하기도 하고…… 그럴 용도로 만들어 두는 곳이지.”
“어쨌든 주인이 있는 곳이라는 거잖아.”
“산에서는 지나가는 사람 모두가 주인이지. 아마 문도 잠겨 있지 않을걸. 걱정 말고 따라와.”
* * *
담덕의 말 그대로였다. 가까이 다가간 너와 지붕 집은 흔한 잠금 장치 하나도 걸려 있지 않았다.
담덕은 익숙한 듯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가더니 능숙하게 중앙에 놓인 화로에 불을 붙였다. 이곳에 몇 번이나 와 본 사람 같은 자연스러운 태도였다.
“전에 와 본 적이 있어?”
“이곳은 처음이지만…… 사냥꾼들이 만들어 둔 집들이야 다들 비슷하니까. 사냥을 나섰다가 생각보다 해가 빨리 떨어지면 이런 곳에서 하룻밤 묵어 갈 때도 있거든.”
불을 밝히자 창 하나 없이 어두웠던 내부가 어렴풋이 모습이 드러냈다. 집 안은 방이라기보다는 창고에 가까웠다.
그래도 주변이 깔끔하게 정돈된 데다 바닥에 바싹 마른 짚까지 폭신하게 깔려 있어 휴식에는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이쪽으로. 화로 앞에 앉아.”
먼저 화로 앞에 자리를 잡고 앉은 담덕이 손으로 제 옆자리를 두드렸다. 나는 그의 옆에 털썩 주저앉으며 푹 젖은 머리카락의 물기를 털어 냈다.
“다른 사람들도 무사히 비를 피했을까?”
문을 굳게 닫았는데도 빗소리가 안까지 요란하게 들릴 정도로 대단한 비였다.
나와 담덕이야 운 좋게 사냥꾼들의 쉼터를 발견했지만, 호숫가에 있는 사람들은 비 피할 곳이 마땅치 않을 것 같았다. 그늘막이 있기는 해도 햇빛을 가리는 용도라 비를 막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나와 달리 담덕은 걱정 하나 없이 태평했다.
“지설과 제신이 있으니 문제없어. 그 두 사람이라면 알아서 상황을 정리하고 있을 거다.”
“태림과 서의 이름은 쏙 빠졌네.”
“사실이 그렇잖아. 태림이야 머리보다는 몸을 쓰는 쪽이고, 서는 비 맞는 게 좋다고 오히려 빗속으로 뛰어들 사람처럼 보이는걸.”
“……그건 그렇지만.”
나는 키득거리며 화롯불 가까이 손을 뻗었다. 그새 얼어 버린 손이 따뜻한 온기에 기분 좋게 녹아내렸다.
“이러고 있으니 예전 생각이 나.”
“예전 생각”
“기억 안 나? 이렇게 나란히 물에 젖었던 적이 꽤 많잖아. 열두 살 때 막 친구가 되었던 그 즈음에도 그렇고, 성문사에서도 그랬고…….”
“도압성에 가던 길에도 함께 물에 빠졌지.”
“그건 상황이 다르지! 네가 날 물에 집어 던진 거였으니까.”
“집어 던지다니. 네 몸에 묻은 늑대 피를 씻어 주려는 좋은 마음으로 한 일이었는데.”
“퍽이나.”
나는 코웃음을 흘리며 두 다리를 끌어안았다. 무릎 위에 턱을 괴고 타오르는 화롯불을 보고 있으니 어쩐지 나른한 기분이었다.
“어쨌든 너와 난 물과 참 인연이 깊은 것 같아.”
“그런가?”
“이렇게 물에 흠뻑 젖어서 함께 시간을 보내고 나면 항상 무엇인가가 달라졌거든. 그러니 인연이 깊지.”
물고기를 잡으려다 강물에 빠졌던 열두 살의 나는 담덕을 친구로 받아들였다. 따지고 보면 우리의 인연이 물과 함께 시작된 셈이었다.
도압성에 가던 길, 냇가에 내던져진 열여섯에는 담덕과 나의 신체적 차이를 실감했고, 성문사에서 함께 비를 맞은 열아홉에는 담덕을 누군가와 나누기 싫은 나의 마음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오늘, 스물의 내게는 어떤 변화가 찾아올까?
“피곤해?”
생각에 빠져 멍하니 화롯불을 바라보는 내게 담덕이 물었다. 피곤해서 멍하니 앉아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몸이 나른한 것도 사실이었다.
“조금.”
“누울래?”
담덕이 그렇게 말하며 제 다리를 두드렸다. 다리를 베개로 내어주겠다는 뜻이었다.
“응.”
나는 사양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고민도 없이 곧장 그의 다리 위에 머리를 뉘었더니 담덕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너는 어찌 거절을 몰라?”
“거절하라고 한 말이었어?”
“그건 아니지만…… 한두 번은 거절해야 되는 거 아니야? 원래 사내의 제안은 쉽게 받아들이면 안 되는 거야. 무슨 흑심이 있을 줄 알고 대뜸 머리를 뉘어?”
“왜? 흑심을 가지고 누우라고 한 거였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더니 담덕이 말이 없었다. 할 말을 잃은 그를 보며 나는 픽 웃음을 흘렸다.
“넌 사내지만 담덕이잖아. 네 제안은 한 번에 받아들여도 괜찮아.”
“어째서?”
“네가 내게 나쁜 제안을 할 리 없으니까.”
“날 너무 믿는 거 아니야?”
“믿으면 안 돼? 경계하고 의심할까? 무엇이든 네가 하라는 대로 할게. 오늘의 나는 네 말을 잘 듣는 우희거든.”
“내 말을 잘 듣는 우희?”
담덕이 별 우스운 소리를 다 듣는다는 듯 장난스럽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내 이마를 두드렸다.
“세상에 그런 우희도 있나? 나는 날 곤란하게 하는 우희밖에 모르는데?”
나는 내 이마를 두드리는 담덕의 손가락을 붙잡으며 입을 부루퉁하게 내밀었다.
“그러니 ‘오늘은’ 말 잘 듣는 우희가 되어 주겠다는 거야. 바쁜 시간을 쪼개 물놀이를 함께하자는 약속을 지켜 주었으니 오늘은 무엇이든 네 말대로 할게.”
“정말로?”
“정말로.”
진심을 담은 대답에 담덕이 미간을 찌푸리며 내 머리를 헤집었다.
아니, 원하는 것을 해 주겠다는데 도대체 왜 이래!
나는 담덕의 손목을 붙잡아 그를 저지하며 불만을 토로했다.
“뭐가 문제야? 무엇이든 해 주겠다는데 좋아해야 하는 거 아니야?”
“넌 항상 이래. 내가 뭘 해 달라고 할 줄 알고 다 해 주겠대? 날 너무 믿지 말라고. 나도 나를 못 믿겠는데, 네가 뭐라고 날 믿어?”
“내가 널 경계하길 바라면 진즉에 그리 말하지 그랬어. 네가 그걸 바라는 거라면 그렇게 할게. 이제부터 널 너무 믿지 않으면 되는 거지?”
그걸 원한다기에 그렇게 해 주마 약속했는데도 담덕의 표정이 여전히 어두웠다.
“하지만 네가 날 믿지 않는 건 싫어.”
“……그럼 믿어?”
“그런데 네가 날 너무 믿는 것도 싫어.”
“……담덕. 지금 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는 알고 있니?”
어이가 없어 웃음을 터트리자 담덕이 머쓱한 얼굴로 엉망이 된 내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었다.
“내 말이 이상하다는 건 알아. 하지만 그게 내 마음이야. 난 네가 날 마냥 믿는 것이 싫어. 그렇다고 네가 날 경계하고 의심하는 것도 견딜 수 없지. 어느 순간에는 너의 가장 믿음직한 버팀목이 되어 주고 싶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널 뒤흔드는 바람이 되고 싶어져.”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손은 다정하고 조심스러웠지만, 나를 똑바로 향하는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어서 기분이 묘해졌다.
“알겠어? 널 생각할 때마다 내 마음이 이리 복잡하다고, 연우희. 아마 내 생에 너보다 큰 골칫거리는 없을 걸.”
진지한 담덕의 눈에 내 얼굴에서도 덩달아 웃음기가 사라졌다. 서서히 굳어지는 나를 향해 담덕이 고개를 숙여 가까이 다가왔다.
“내가 원하는 걸 말하라고 했지.”
“응.”
“너와 한 공간에 단둘이 있을 때마다 내가 하는 생각은 하나뿐이야.”
내 두 눈을 향하던 담덕의 눈동자가 점점 아래로 떨어졌다.
“네 손을 잡고 싶어. 널 끌어안고 싶고, 너와 입을 맞추고 싶어. 네 몸을 만지고 싶고, 세상 누구보다도 너와 가까워지고 싶어.”
코를 지나 입술로, 입술을 지나 가슴으로, 가슴을 지나 발끝까지. 전신을 훑은 담덕의 시선이 다시 내 두 눈으로 돌아왔다.
“이걸 들으니 경계심이 생겨?”
담덕의 시선이 스치는 곳마다 몸이 서늘하게 식는 기분이었다. 그런 서늘한 기분 때문인지 몸이 가볍게 떨렸다. 담덕은 그런 작은 떨림을 놓치지 않았다.
“그러니 원하는 걸 다 해 주겠다는 말은 함부로 하지 마. 특히 나와 단둘이 있을 때는. 알겠어?”
담덕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상체를 세웠다. 다시 멀어지는 담덕의 얼굴을 멀거니 바라보며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그래서…… 안 할 거야?”
“뭘?”
“손잡고, 끌어안고, 입 맞추고, 만지고, 세상 누구보다도 가까워지는 거. 그런 거 하고 싶다며.”
내 말에 담덕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나를 똑바로 바라보던 눈이 순식간에 혼란에 휩싸이는 것을 보며 나는 슬쩍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네 말을 잘 듣는 우희가 될 거라고 했잖아. 그러니 하자. 네가 하고 싶은 거.”
가만히 내 얼굴을 내려다보던 담덕이 이를 바드득 갈았다. 혼란이 가득 찼던 그의 눈에 어느새 노여움이 채워져 있었다.
“연우희. 나 장난하는 거 아니야.”
“그래? 잘됐네. 나도 장난하는 거 아닌데.”
“장난이 아니라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마.”
“내가 마음에도 없는 소리로 널 놀리는 것 같아?”
“그게 아니면 뭔데?”
담덕이 헛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그는 나와 나누고 있는 이 대화가 영 우스운 모양이었다.
그 눈을 보면 볼수록 말을 꺼내기가 어려워졌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속에서 맴도는 말을 툭 던졌다.
“나도 네가 말한 것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그렇게 말한 거야.”
담덕은 대답이 없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눈을 떠 그의 얼굴을 살폈다. 담덕은 혼이 나간 듯 얼빠진 얼굴로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너, 그, 뭐라고?”
한참의 침묵 끝에 겨우 돌아온 대답도 형편없었다. 얼빠진 질문에 나는 담덕의 눈을 슬쩍 피하며 웅얼거렸다.
“그러니까…… 나도 너랑 그런 걸 하고 싶다고. 손잡고, 끌어안고, 입 맞추고, 만지고, 세상 누구보다도 가까워지는 거.”
“그…….”
담덕은 말문이 막힌 듯 입을 꾹 다물었다. 심경이 복잡한 듯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내게 물었다.
“……왜 나와 그런 것들이 하고 싶은데? 내가 너와 그런 걸 하고 싶은 이유는 단순한 흥미 때문이 아냐. 하지만 넌? 넌 왜 나와 그런 것들이 하고 싶은 건데?”
이제 진지해져야 할 순간이었다. 나는 담덕의 눈을 피하지 않고 그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시작했다.
“기억해? 지난겨울에 내가 다로의 집에서 중요한 날을 맞았다고 했던 거.”
“기억해.”
“넌 왜 그날이 중요한 날이냐 물었고, 나는 나중에 때가 되면 말해 준다고 했잖아. 아마 그게 오늘인 것 같아.”
이 공간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밖에는 비가 쏟아지고, 나와 담덕은 흠뻑 젖었고, 무엇인가 변화할 시점이 아닌가 생각했지.
지난겨울부터 올해의 봄을 거쳐 이제 선연한 여름이었다. 고민은 길었고 그사이 단 한 번도 나의 마음은 바뀌지 않았다.
이제 마음을 털어놓아야 할 시간이었다.
“그날 나는…… 내가 친구인 담덕뿐만이 아니라 사내인 담덕도 원한다는 걸 인정하기로 했어.”
옆에서 지켜보고 돕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나는 담덕에게 누구보다 가까운 사람이 되고 싶었고 그러고자 한다면 친구로는 부족했다.
나는 담덕과 연인이, 더 나아가 평생을 함께할 가족이 되고 싶었다.
“친구인 담덕뿐만이 아니라, 사내인 담덕도 내게 달라고 하면 너무 무리한 요구일까?”
나는 손을 뻗어 담덕의 뺨을 매만졌다. 화롯불에 익은 탓인지 담덕의 뺨은 따뜻했지만, 오랜 침묵 끝에 흘러나온 그의 목소리는 손끝에 닿은 온기와 달리 차가웠다.
“우습네. 네가 내게 그런 것을 물을 줄은 몰랐어.”
피식 웃음을 흘린 담덕이 고개를 숙여 내게 가까워졌다.
“난 이미 열여섯에 내 모든 것을 너에게 주었어. 그날 이후로 난 줄곧 네 것인데 어째서 그런 걸 묻지? 말했잖아. 난 무엇이든 네가 원하는 대로 할 거라고. 친구로든 사내로든 상관없이 난 이미 네 사람이야. 그러니 무엇이든 네 뜻대로 해, 우희.”
마지막 말에는 따뜻한 미소가 섞여 있었다.
“그럼…….”
나는 웃으며 담덕에게 손을 내밀었다.
“먼저 손잡는 것부터 할까?”
담덕의 커다란 손이 내 손을 꽉 쥐었다. 담덕의 손가락과 내 손가락이 얽혀 들어 단단히 깍지 지어졌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다음 할 일을 찾기 위해 입을 뗐지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담덕이 입을 맞춰 왔다. 가볍게 닿았다 떨어지는 담덕의 입술에 내가 불만스럽게 미간을 찌푸렸다.
“무엇이든 내 뜻대로 하라더니.”
“그러려고 했는데 그게 내 마음대로 안 돼.”
당당하게 웃은 담덕이 내게 물었다.
“그러니 우희, 지금부터는 내 마음대로 하라고 해 줄래?”
“그러지 말라고 해도 멋대로 할 거면서.”
“허락한 거지?”
“아직 허락은 안 했……”
이번에도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담덕의 입술이 내 입을 막았다.
담덕과의 입맞춤은 처음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의 입맞춤은 여태껏 나누었던 것들과는 느낌이 달랐다.
담덕의 움직임은 지난 기억보다 더 깊고, 끈질기고, 농염했다. 온몸에 밀려드는 이상한 기분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누구도 닿지 않았던 곳에 담덕의 손이 닿을 때마다 나는 두려움에 몸을 파르르 떨었다.
그가 내게 해가 될 일을 하지 않을 것은 알았지만, 아직까지도 내 안에는 겪어 보지 못한 일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이 남아 있었다.
“괜찮아, 우희.”
그럴 때마다 담덕은 내 눈과 뺨에 입을 맞추며 나를 달랬다.
하지만 맞닿는 곳이 깊고 은밀해졌을 때 나는 결국 눈물이 터트리고 말았다.
“거짓말이잖아. 이게 뭐가 괜찮아! 하나도 안 괜찮은데! 네 일이 아니라고 다 괜찮다는 거지! 정말 쓸 데 없이 커서는! 으엉!”
아프고 무서워 이런 걸 괜히 한다고 했나 싶을 정도였다. 거의 통곡하는 나를 앞에 두고 담덕이 난처한 얼굴로 물었다.
“많이 아파? 하지 말까? 네가 힘들면…….”
나는 그렇게 말하며 정말 떨어져 나가려는 담덕의 어깨를 붙잡으며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무슨 소리야. 여기까지 했는데! 다음에 또 이렇게 아프라고? 그냥 지금 해. 한 번에 해치우자.”
“해치운다니…….”
담덕이 한숨을 내쉬며 납작한 배를 쓸어내렸다. 다정한 손길에 서글픈 마음이 조금 줄어드는 듯했지만 아픈 건 여전했다.
“너무 아프면 참지 마. 네가 안 아프게 노력할게. 이건 너와 내가 함께 좋아야 하는 거니까.”
그렇게 말하던 담덕의 손이 조금 더 아래로 떨어졌다.
그때부터는 기분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이상해졌다. 아픔과 동시에 기묘하고 야릇한 감각이 몸을 덮쳐 왔다.
나는 정신없이 소리치고 울며 담덕에게 매달렸다.
담덕은 아프다고, 기분이 이상하다고 횡설수설하는 나의 말에 일일이 대답해 주며 다정히 몸 곳곳을 어루만졌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담덕도 나도 말을 잃었다. 서로의 숨과 체온만이 몸을 가득 채웠다. 아픈 것은 이미 잊은 지 오래였다.
마지막 기억은 나를 껴안는 담덕의 단단한 두 팔과 이마에 내려앉는 부드러운 입술이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이한 기분에 지쳐 버린 나는 나른한 몸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 * *
다시 눈을 뜨니 멀리서 사람의 말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나는 깜짝 놀라서 몸을 일으켰다가 두드려 맞기라도 한 것처럼 온몸을 때리는 동통에 놀라 제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주저앉는 소리가 제법 요란했던지 밖에서 소곤거리던 소리가 뚝 끊겼다.
잠시 후 짧게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곧 문이 열리고 담덕이 안으로 들어섰다.
“일어났어?”
담덕은 옷을 모두 갖춰 입은 단정한 모습이었다. 이곳에 올 때 입고 있던 물놀이 복장이 아니었다.
“밖에 누구였어?”
그렇게 물었더니 목소리가 말이 아니었다. 갈라지는 소리에 미간을 찌푸리자 담덕이 재빨리 수통을 내게 건넸다.
“우선 물부터 마셔.”
나는 사양하지 않고 수통을 받아 들어 물을 마셨다. 목이 말라 한 번에 수통에 든 물을 비워 내니 담덕이 기다렸다는 듯 내 앞에 옷을 내밀었다.
“옷은 이걸로 갈아입어.”
“이게 갑자기 어디서 났어?”
“달래가 네 옷을 준비해 왔던데. 물놀이를 왔으니 갈아입을 옷이 필요하겠다 생각했겠지.”
“그럼 방금 다녀간 사람이 달래야?”
내가 문밖을 힐끗거리자 담덕이 문을 가로막으며 고개를 저었다.
“태림이 다녀갔어. 비가 그친 뒤 우리를 찾아왔다가 이곳을 발견해서…….”
담덕이 머쓱한 얼굴로 볼을 긁적였다. 그 말의 의미를 깨달은 내 얼굴이 순식간에 벌겋게 달아올랐다.
“……태림이 우리가 잠들어 있는 걸 봤다고?”
“설마 내가 그렇게 두었으려고. 사람이 오는 기척이 느껴지기에 내가 먼저 일어났지. 밖으로 나가서 이야기를 나눴으니 아무도 널 보진 못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어쨌든 우리가 뭘 했는지는 다 알 거 아냐!”
아마 우리가 있는 곳을 찾은 태림뿐만 아니라, 오늘 물놀이에 동행한 사람들 모두가 나와 담덕 사이의 일을 짐작했을 것이다.
민망해서 어쩔 줄 모르는 나를 보며 담덕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것까지 모르길 바라는 건 욕심이십니다, 아가씨.”
장난스럽게 내 머리를 쓰다듬은 담덕이 다시 한번 옷을 내밀며 나를 재촉했다.
“부끄러워하는 것까지는 막지 않겠지만 그 전에 옷부터 입자. 밤이 되어 서늘해졌으니 그러고 있다간 또 병에 걸려.”
나는 그제야 고개를 숙여 내 상태를 바라보았다.
속옷 하나 걸치지 않아 훤히 드러난 몸 곳곳에 붉은 자국들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선명한 자국과 함께 떠오른 조금 전의 일들에 얼굴이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그래. 옷……, 옷 입어야지.”
나는 황급히 담덕이 건넨 옷을 꿰어 입었다. 민망한 흔적들을 가리자 조금이나마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겨우 가라앉은 마음은 고개를 들어 담덕의 얼굴을 보는 순간 다시 요동치기 시작했다.
“왜 나를 못 봐?”
“민망해서 못 보겠어.”
내 말에 담덕이 웃음을 터트렸다.
“네가 민망할 때도 있어?”
“넌 민망하지도 않아?”
“민망하긴 왜 민망해? 좋기만 한데.”
“좋기는 뭐가 좋다고.”
“넌 좋지 않았어? 내가 보기엔 좋아하는 것 같았는데.”
“그…… 나중에는 그랬지만…….”
나는 눈을 굴리며 빠져나갈 구석을 찾다 결국 다른 쪽으로 화제를 돌렸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돌아갔어?”
“그럼. 밤이 깊었으니 한참 전에 돌아갔지. 태림만 남아서 이곳을 지키고 있다.”
“우린 오늘 돌아가지 않는 거야?”
“궁으로 돌아가 안전한 곳에서 편히 쉬는 것이 좋긴 하겠지만…… 당장은 네가 힘들지 않나?”
“아.”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려다 동통에 주저앉았던 것을 떠올리며 입을 벌렸다. 담덕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내 옆에 다가왔다.
“그러니 오늘 밤은 이곳에서 보내고 돌아갈 거야.”
먼저 자리를 잡고 누운 담덕이 나를 빤히 보았다. 무엇인가를 바라는 것 같은 눈빛에 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렇게 봐?”
“왜 그렇게 보긴. 옆에 누우라고 그렇게 보지.”
담덕이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양 태연하게 제 팔을 두드렸다.
“팔베개해 줄게. 편하게 누워.”
“……네가 팔베개를 해 주는 게 편할 것 같아? 지금 이 상황에서?”
“오늘은 담덕의 말 잘 듣는 우희가 되어 주기로 한 거 아니었어? 아직 ‘오늘’이 다 지나기 전인데.”
담덕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스스로 내뱉은 말을 거스르지도 못하고 입을 오물거리니 담덕이 웃으며 내 어깨를 눌러 제 옆에 눕혔다.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담덕의 팔을 베고 누웠다. 너무 피곤해서 담덕과 실랑이를 벌일 힘이 없었다.
“오늘 하루가 언제 끝나려나.”
도대체 왜 그런 말을 해서 스스로 무덤을 파니, 연우희.
황망히 중얼거리는 나를 향해 담덕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우희. 오늘은 아직 많이 남았어. 네 생각보다 밤이 길거든.”
* * *
나는 그날 몇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하나, 밤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길다.
둘, 담덕은 생각보다 음흉한 구석이 있다.
셋, 말은 함부로 내뱉는 것이 아니다.
몇 가지 교훈을 남긴 그날 이후 나를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이 조금 달라졌다.
궁의 시녀들은 나를 더욱 조심스럽게 대했고, 지설의 까칠함은 반 정도로 줄어들었으며, 그에 반비례해 태림의 깍듯함은 두 배로 늘어났다.
눈에 띄게 달라진 사람들의 태도를 볼 때마다 나는 민망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하지만 가장 곤란한 것은 역시 담덕의 태도였다.
“왜 또 내 방으로 오는데?”
나는 읽고 있던 의서를 덮으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날 이후 한 달, 담덕은 매일같이 내 방으로 와 잠을 자고 있었다.
“네가 있는 곳이 좋아. 잠이 잘 오거든.”
내 방에 온다고 해서 특별한 일을 하는 게 아니었다.
담덕은 그저 침상에 누워 서책을 읽는 나를 바라보다 그대로 잠이 들었고, 나는 담덕이 잠이 든 것을 확인한 후 등불을 끄고 그의 옆에 누웠다. 그것이 전부였다.
“와서 잠만 잘 거면서 왜 매일 여기에 와? 내 방은 침상도 작은데. 불편하지도 않아?”
나의 투덜거림에 담덕이 턱을 매만지며 물었다.
“도대체 어떤 부분이 불만인 거야? 내가 여기 와서 잠만 자는 것? 네 방의 침상이 작은 것?”
“난 내 방 침상의 크기에 아주 만족해. 너만 오지 않는다면 아주 적당한 크기라고.”
“흠.”
내 말에 담덕이 침상에 드러누워 침음을 흘렸다.
“내가 매일 와야 하니 침상을 좀 더 큰 걸로 바꾸는 게 좋겠네.”
“……네가 오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없니?”
“있을 리가 없잖아?”
단호한 담덕의 대답에 어이가 없어져 입을 쩍 벌리니 마침 창틀에 새가 한 마리 날아들었다. 나는 단번에 새의 정체를 알아챘다.
비로의 전령새.
내게 전령새가 날아올 만한 일은 몇 개 없었다. 대부분은 작전을 수행하던 대원이 다쳐 치료가 필요한 경우였다.
나는 담덕의 눈치를 살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행히 그는 침상에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담덕은 아직까지 내가 비로의 대원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운을 대원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조차 담덕에게 알렸던 제신이 내 존재를 비밀에 부친 이유는 간단했다.
-폐하께선 네 안전에 예민하시지. 때문에 네가 비로의 대원이 되는 것을 납득하지 못하실 거야. 그러니 너에 대해서는 보고하지 않으마. 하지만 폐하께서 네 존재를 눈치채고 널 내보내라고 하신다면…… 난 그리할 수밖에 없어.
결국 비로의 대원으로 일하는 것이 담덕에게 들키기 전까지의 시한부라는 의미였다.
나는 비로에서 동료들을 치료하고 작전에 필요한 약을 제조하며 한 사람의 의원으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이 시대에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자리는 흔치 않았으므로, 나는 비로의 대원으로 오래도록 남고 싶었다.
그러니 조심, 또 조심해야지.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창가로 걸어가 새의 다리에 걸려 있는 종이를 풀어냈다. 적혀 있는 말은 짧았다.
내일 오전 본부로.
지금 당장이 아니라 내일 본부로 오라고? 어째서?
나는 의아해져 고개를 갸웃거렸다.
급한 환자가 생긴 거라면 지금 당장 나를 불렀어야 했다. 작전에 쓸 약이 필요하다면 그것을 만들어 달라는 연통이 왔을 것이다.
이런 식의 연통은 처음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전에 없던 전언에 괜한 불안감이 밀려왔다.
나쁜 일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나는 전언이 적혀 있던 종이를 씹어 삼키며 어느새 저만치 멀어진 새를 바라보았다.
* * *
본부에 도착하니 분위기가 무거웠다. 나는 본능적으로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음을 깨달았다.
“무슨 일이야?”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은 제신과 운, 다로, 단 세 사람뿐이었다. 많은 사람을 불러 모을 수 없는 비밀스러운 일이라는 뜻이었다.
지금까지 나는 그런 비밀스러운 작전에 포함된 적이 없었다. 내 역할을 후방 지원에 한정한 제신의 뜻 때문이었다.
“우선 앉아서 이야기하자.”
제신이 웃으며 내게 자리를 권했다.
하지만 그 미소가 그리 밝지만은 않았다. 나는 여전히 불안한 마음을 품은 채 자리에 앉았다.
“우선 다로가 가져온 정보부터 들어야겠구나.”
제신의 눈짓에 다로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아가씨께서도 알고 계시겠지만…… 저는 요즘 백제 출신 사람들이나 백제에 자주 드나드는 상인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나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수확기가 가까워져 오자 예상대로 백제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 얼마 전부터 비로는 물밑에서 전쟁 준비에 돌입했다.
대원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분주하게 움직였다. 개중에서도 다로는 백제와의 전쟁에서 쓸 만한 정보를 얻기 위해 백제와 관련된 이들을 만나고 있었다.
“한데 백제에 드나드는 상인들이 하나같이 묘한 소문을 입에 올리더군요.”
“묘한 소문이라니요?”
“이번 전쟁의 선봉에 태왕의 전략을 잘 아는 고구려 귀족 출신의 외눈박이 장군이 나설 것이라 했답니다. 하여 이번 전쟁은 백제가 승리할 가능성이 높다고요.”
“그 표현…… 어딘가…….”
다로의 입에서 흘러나온 묘사가 어딘가 익숙했다. 그렇게 생각한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태왕의 전략을 잘 아는 고구려 귀족 출신의 외눈박이 장군. 꼭 우리 아버지를 말하는 것 같지 않느냐?”
“하지만 아버지의 마지막은 운 도령이 지켰다고 하셨습니다.”
확인하듯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운이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해. 내가 그분의 마지막을 지켰다. 내 두 손으로 화장하고 유품까지 거두었으니 소문 속 외눈박이 장군이 연 장군일 리가 없는데…….”
그럼에도 운은 강하게 확신하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그로서도 무엇인가 마음에 걸리는 구석이 있는 걸까?
“소문이 상당히 구체적인 것을 보면 마냥 근거 없는 이야기를 꾸며 낸 것은 아닌 것 같은데요.”
“그러니 우리가 오늘 이 자리에 모인 것이지.”
한숨을 내쉰 운이 제신에게 눈을 돌렸다.
“나는 직접 가서 상황을 살펴보고 싶다. 도대체 왜 그런 소문이 도는 것인지 알아봐야 할 것 같아. 네 생각은 어때?”
운의 말에 제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그 방법이 가장 좋다고 생각해. 하지만 백제 땅에 무슨 수로 들어가겠어? 전쟁을 앞둔 시기라 안팎으로 경계가 삼엄해. 이미 안에 심어 둔 밀정들도 몸을 사리고 있는 상황이다.”
가만히 제신의 말을 듣고 있으니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오래 전 아신에게 받은 옥패였다.
그동안 나는 의식적으로 아신이 준 패를 잊고 지냈다. 사람을 구해 주고 좋은 뜻으로 받은 선물을 사람을 해하는 전쟁을 위해 쓰는 것이 꺼려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백제의 성에 들어가 소문을 확인하는 일 정도라면 이 옥패를 써도 마음이 무겁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제신에게 옥패의 존재를 알리기로 했다.
“오라버니. 내게 아신왕이 준 옥패가 있어. 그가 태자였던 시절 석현성에서 목숨을 구해 주고 받은 건데, 이게 있으면 백제 어느 성이든 무사히 들어갈 수 있어. 석현성에 붙잡혀 있다가 국내성으로 돌아올 때 그 옥패를 사용했으니 효과는 확실해.”
“아신왕이 준 옥패라고?”
내 말에 제신은 물론이고 운과 다로까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왜 진즉에 말하지 않았어? 여러모로 우리에게 도움이 되었을 패잖아.”
“머리 쓰는 사람들은 어찌 이리 반응이 한결 같아? 그때 지설도 오라버니와 비슷한 말을 했었어. 이 패를 쓰면 전쟁에 큰 도움이 되겠다고.”
“나와 지설만 그런 생각을 하는 게 아냐. 고구려의 용사라면 누구나 같은 궁리를 할걸. 우리에게는 전쟁의 승리보다 더 중요한 명분은 없으니까.”
“아쉽게도 난 용사가 아닌 의원이야. 사람을 살리고 좋은 뜻으로 받은 패를 전쟁의 도구로 쓴다니…… 그런 식으로는 생각할 수 없어.”
내 대답에 제신이 미묘한 표정을 했다. 다로와 운도 마찬가지였다.
“우희 너는 선인(善人)이 되고 싶은 거냐? 모두에게 좋은 사람으로 살아갈 수는 없다. 언젠가 모두가 선인이 되어도 좋은 날이 오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제신의 얼굴은 상당히 복잡해 보였다. 누이에게 선인이 되지 말라 설득하는 꼴이니 그의 심정이 복잡하기도 할 터였다.
전쟁으로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이 시대에는 살아남기 위해 누군가를 죽이는 것이 당연했다. 나 역시 그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세상 모두가 그리 생각하며 살아도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내게는 평화로운 시대의 기억이 만들어 낸 윤리관과 의술을 배운 자로서의 사명감이 있었다.
“난 선인이 되고 싶은 게 아냐. 그저 내게 주어진 사명을 다하고 싶을 뿐이지.”
“네게 주어진 사명?”
“오라버니를 비롯한 용사들은 전쟁에서 승리해 이 땅에 평화를 가져오는 것이 사명이겠지. 하지만 나의 사명은 달라.”
의술을 배운 자의 사명이란 생명을 구하고 지키는 것.
그러니 이 세상에 허무하게 죽는 자가 없도록 나의 능력을 다하는 것이 소진과 우희의 사명이었다.
“누구나 자신의 사명이 있지. 모두가 그걸 위해 살아가는 것이고, 나는 오라버니의 사명을 존중해.”
“……그러니 나 역시 네 사명을 존중해 달라?”
내가 대답 대신 살짝 웃어 보이자 제신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너의 사명은 이해하기 어렵다. 특히 백제는 우리 고구려의, 또한 나의 철천지원수이기도 해. 하지만 네가 그리 말한다면…… 그래. 나 역시 네 사명을 존중해 주는 수밖에.”
제신의 한숨에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이런 상황에서 분위기를 환기하는 건 언제나 다로의 몫이었다. 눈치를 살피던 그녀가 요령 좋게 이야기를 다른 쪽으로 틀었다.
“아무튼 잘 되었어요. 백제 성을 문제없이 드나들 수 있는 옥패가 생겼으니 일이 쉽게 풀리겠습니다.”
“소문이 퍼지고 있는 곳이 어디라 했지?”
“미추홀입니다.”
“미추홀이라. 비사성 아래의 땅이로군.”
다로의 대답에 제신이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생각에 빠졌다.
“나는 국내성을 비울 수 없어. 각지에서 들어오는 첩보를 폐하께 전달하는 역할을 하고 있으니까. 미추홀에는 운이 네가 다녀와야겠다.”
“네가 그러지 말라고 해도 그럴 생각이었다. 연 장군님과 관련된 일이라면 무엇이든 내가 나서야지.”
“네 아버지가 순순히 너를 보내시겠어?”
“이미 내 쪽은 포기하셨다. 문제는 영인데…… 내가 없는 사이 아버지가 이상한 술수를 벌이지 않도록 비로에서 잘 살펴 줘.”
“그건 걱정 마라. 평소에도 그 부분은 신경 써서 경계하고 있으니까.”
제신이 그렇게 말하며 다로를 바라보았다. 해사을이 다로에게 푹 빠져 온갖 정보를 다 쏟아 내고 있었으니 해씨 집안의 동향 파악은 문제없었다.
그럼에도 제신이 못마땅한 듯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건 역시 개인적인 이유 때문이겠지.
얄궂은 눈으로 자신을 보는 나의 시선을 느꼈는지 제신이 헛기침을 하며 다로에게서 눈을 뗐다.
“그럼 미추홀에는 운이가 다녀오는 것으로……”
“한데 해씨 도련님 혼자서 괜찮으실까요?”
다로가 서둘러 이야기를 마무리하려는 제신의 말을 가로챘다. 모두의 의아한 시선을 받은 그녀가 턱을 매만지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신왕이 아가씨께 주었다는 그 옥패는 보통 물건이 아니잖습니까. 분명 자신이 옥패를 준 사람을 모두 기억하고 있을 것인데, 생전 처음 보는 자가 옥패를 사용했다는 이야기가 아신왕의 귀에 들어가면 해씨 도련님께서 곤란해지지 않을까요?”
“확실히 그렇군. 대단한 옥패를 보였으니 아신왕에게도 분명 보고가 올라갈 것이고, 옥패를 내민 사람에 대한 이야기도 그에게 전해지겠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문제에 제신이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아주 쉬운 답을 떠올린 나는 그의 길고 긴 고민을 이해할 수 없었다.
“뭘 그리 고민해? 간단한 해결책이 있잖아.”
“네가 직접 미추홀에 가겠다는 것이라면 곤란해.”
제신이 내가 입 밖에 내지도 않은 해결책을 단번에 기각했다.
“그냥 다녀오기만 하는 것인데 뭐가 문제야?”
“미추홀에 다녀오려면 장기간 국내성을 떠나 있어야 해. 폐하께서 분명 이유를 물으실 터인데 무슨 핑계를 댈 것이냐? 비로의 일로 다녀온다는 소리는 당연히 못할 것이고, 웬만한 이유가 아니라면 허락을 받기도 힘들 거다.”
“지설이 말하길 그런 이유를 생각해 내는 것은 머리 쓰는 자들의 일이라던데.”
“그러니 핑곗거리는 내가 생각해 내라고?”
태평한 내 말에 제신이 황당하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며 내 이마를 툭 쳤다.
“완전한 폐하의 여인이 되었다고 이제는 오라버니도 마구 부려 먹겠다 이것이냐?”
제신의 말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갑자기 왜 폐하 얘기를 왜 꺼내?”
“네가 너무 당당히 사람을 부리니 하는 말 아니냐.”
“사람을 부리긴 누가 부렸다고! 그러는 오라버니는 내가 다……”
입에서 다로의 이름이 나오기 직전에 제신이 내 입을 틀어막았다.
“아하하. 우리 누이도 참,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하려고!”
갑작스러운 제신의 태도에 다로와 운이 놀라서 눈을 크게 뜨자 그가 어색하게 웃으며 거칠게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이유야 내가 생각해 내야지! 그게 머리 굴리는 자들이 할 일인 것을!”
* * *
“잠시 남쪽에 다녀오겠다고?”
담덕이 장계를 읽으며 물었다. 그렇게 묻는 목소리가 가벼운 것을 보니 제신이 대신 전해 준 핑계를 듣고 납득을 한 모양이었다.
“응.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태림을 붙여 줄게. 함께 다녀와.”
다른 사람이라면 거절했겠지만 태림은 어차피 비로의 사람이었다.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이리 고분고분 대답하는 것을 보니 날 홀로 두고 국내성을 떠나는 것이 미안하기는 한 모양이다?”
“최대한 일찍 돌아올 거야. 내가 없으면 잠을 못 자는 사람이 있으니 서둘러야지.”
나의 너스레에 담덕이 장계를 내려놓으며 픽 웃었다. 하지만 미소가 오래가지는 못했다.
“아직 전쟁이 벌어지진 않았지만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너무 나서지 말고 조심해야 해. 연 장군의 유해가 묻힌 곳을 보러 간다니 내가 막을 수는 없지만…….”
제신이 생각해 낸 핑계는 아버지였다. 아버지와 관련된 소문을 확인하러 가는 길이니 아버지의 핑계를 댄 것이다.
실제로 나는 아버지가 묻혔다는 도압성 인근의 땅을 방문할 계획이었다. 아버지가 묻힌 장소는 운만이 알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그의 동행 역시 설명할 수 있었다.
물론 나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더 아래로 내려가 백제의 미추홀에 퍼져 있다는 괴이한 소문의 정체를 알아볼 작정이었다.
머릿속으로 앞으로의 계획을 생각하고 있으니 담덕이 조용히 내 이름을 불렀다.
“연우희.”
담덕이 내 손목을 잡아 나를 끌어당겼다. 가까이 다가가니 그가 허리를 끌어안아 내 품에 얼굴을 묻었다.
“내게는 너 말고도 걱정거리가 많아. 내가 조금이라도 안쓰럽게 여겨진다면, 너까지 날 너무 걱정시키지 마라.”
“알았어. 위험한 일에 나서지 않도록 노력할게.”
“이 가여운 사내를 너무 오랫동안 외롭게 하지도 말고.”
“……그것도 노력해 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