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낙화유수-18화 (19/38)

16장. 겨울을 닫고 봄을 열다

올해 겨울은 쏟아지는 눈과 함께였다. 아무리 활동적이고 추위에 익숙한 고구려 사람들이라도 이 시기에는 조용하게 시간을 보냈다.

나는 우희가 된 후 사계절 중 겨울을 가장 좋아하게 되었다. 평소의 떠들썩함과는 다른 고요함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것이 좋았기 때문이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도 있었다.

겨울에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 시대의 전쟁은 보급이 무척이나 중요해서, 현지에서 식량을 조달하기 쉬운 수확 직후의 가을 무렵이 가장 싸우기 좋은 시기였다.

그에 비해 겨울은 어딜 가나 말라비틀어진 풀밖에 없어 식량 조달이 힘든 데다 견디기 힘든 추위가 병사들의 사기를 꺾어 전쟁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때문에 겨울은 암묵적인 휴전기로, 사람들에게는 회복의 시기였다. 올해처럼 눈이 많이 쏟아지는 해는 더욱 그랬다.

사람들은 겨울의 눈을 좋아했다. 이 시기에 눈이 많이 내려야 봄에 눈이 녹아 가뭄을 피할 수 있다. 당장 길을 오가는 것이 불편해도 사람들은 다가올 새해의 촉촉한 땅을 기대하며 눈을 견뎌 냈다.

하지만 춥다고 집 안에만 처박혀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초서피(貂鼠皮:노랑 담비의 모피)로 만든 외투를 두르고 겨울 놀이에 나섰다. 제신이나 담덕에게 제안했다면 추운 날씨에 무슨 외출이냐고 타박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나는 죽이 잘 맞을 것 같은 다로를 꼬드겼다.

다로는 사람을 대할 때 주눅 드는 법이 없는 당당한 여인이었다. 대단한 신분의 사람들을 마주하면서도 한 치의 물러섬이 없었다. 할 말은 모두 했고, 자신이 틀렸다면 흔쾌히 받아들였다.

이 땅에는 신분이 있지만 다로는 그에 구애받지 않고 사람을 대했다. 대원들의 출신이 다양한 비로에서 그녀가 어찌 사람을 대하는지 지켜보면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아직까지도 현대인의 사고를 품고 있는 나로서는 다로의 그런 점이 썩 마음에 들었다.

친구란 서로 동등해야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법인데, 귀족 아가씨들은 예의를 생각하며 몸을 사렸고 평민 아가씨들은 내가 귀족이라며 어려워했다.

때문에 나는 진정 마음을 나눌 친구가 많지 않았다. 다로라면 그런 사람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다로는 같이 겨울 놀이를 하지 않겠냐는 나의 제안에 흔쾌히 따라 나섰다. ‘겨울 놀이’라는 말에 제법 흥미를 끈 것 같았다.

이 시대의 놀이란 계절에 상관없이 뻔했다. 투호나 윷놀이를 즐겼고 사내들은 축국을 하기도 했다. 여름이면 특별히 목욕을 하며 물놀이를 즐기기는 했지만 이를 제외하면 계절에 맞는 놀이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겨울 하면 제일 먼저 스키가 썰매, 스케이트가 떠올랐다. 스키나 스케이트는 특별한 장비가 필요하지만 썰매라면 달랐다.

“이걸 타고 내려간다고요?”

나와 함께 언덕에 오른 다로가 짚으로 엮은 돗자리를 바라보며 눈을 크게 떴다. 나는 우리와 함께 온 달래의 손에도 돗자리를 쥐여 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다니까요. 내가 먼저 내려갈 테니까 잘 봐요.”

나는 시범을 보여 줄 요량으로 언덕 끄트머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돗자리의 앞부분을 틀어쥐어 몸을 살짝 뒤로 눕힌 뒤 발을 크게 구르자, 돗자리가 눈길에 미끄러져 엄청난 속도를 내며 아래로 향하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리며 눈발이 얼굴에 들이쳤다. 나는 엄청난 속도감에 비명을 지르며 언덕 아래까지 미끄러졌다. 평지에 이르러 속도가 줄어들며 몸이 눈밭을 굴렀다.

나는 씩씩하게 자리에서 일어서며 언덕 위의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입을 쩍 벌린 채 멍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이렇게 하면 돼요!”

내 외침에 다로가 미심쩍은 얼굴로 내 꼴을 살폈다.

“이게 재미있어요?”

“날 믿고 한번 해 봐요!”

다로와 달래가 서로 시선을 교환하더니, 다로가 먼저 자리를 잡았다. 그녀는 머뭇거리며 내가 했던 것처럼 언덕 끄트머리에 자리를 잡더니 조심스럽게 발을 굴러 돗자리를 밀었다.

천천히 언덕 아래로 미끄러지던 돗자리는 중간쯤에 이르러 제대로 속도가 붙었다. 갑자기 빨라진 속도에 다로가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아!”

속도를 주체하지 못하고 좌우로 흔들리던 다로가 결국 중심을 잃고 언덕을 굴렀다. 데구르르 굴러 언덕 아래편에 엎어진 다로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다로!”

나는 놀라서 다로의 이름을 부르며 그녀 곁으로 뛰어갔다. 몸을 숙이고 걱정스럽게 다로를 살피려는 순간 그녀가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얼굴 전체에 눈이 묻은 다로는 활짝 웃고 있었다.

“하, 하하. 이거 뭐예요?”

즐거워 보이는 그녀의 얼굴에 나도 덩달아 미소가 걸렸다.

“재미있죠?”

“아래로 떨어지면서 속도가 붙으니 기분이 이상해요. 말을 탈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인걸요.”

“그렇죠? 눈썰매 놀이라는 거예요. 눈 오는 겨울에만 할 수 있는 놀이니 계절이 가기 전에 실컷 즐겨야 돼요.”

“그게 바로 오늘이겠죠?”

다로가 웃으며 눈이 쏟아지는 하늘을 바라보는 순간.

“으아아아아!”

달래가 엄청난 비명을 지르며 우리 옆을 지나갔다. 달래가 일으킨 바람에 나와 다로의 머리카락이 휘날릴 정도였다.

어찌나 가속도가 잘 붙었는지 평지에 도착해서도 멈추지 않고 한참이나 더 가던 달래가 그대로 중간에 쌓인 눈 더미에 처박혔다. 엉덩이만 비죽 튀어나온 그 모습에 멍하니 굳어 있던 나와 다로의 입에서 웃음이 터졌다.

“아가씨!”

버둥거리며 눈 더미에서 벗어난 달래가 불만스럽게 외쳤다. 하지만 한번 터진 웃음은 쉽게 가라앉지 못했다. 다로와 나는 서로를 붙잡고 웃으며 눈 바닥을 뒹굴었다.

* * *

우리는 셀 수 없을 만큼 언덕을 오르내리며 어린아이들처럼 눈 속을 뒹굴었다. 덕분에 몇 시진쯤 지난 후에는 완전히 눈에 젖어 꼴이 엉망이었다.

신나게 썰매를 탈 때는 느끼지 못했지만 몸이 지치니 금세 추위가 찾아왔다. 온몸이 붉어져 덜덜 떠는 나를 보며 다로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이러다 한질(寒疾:감기)이 들겠습니다. 어서 돌아가는 게 좋겠어요.”

그렇지 않아도 잘못하면 감기에 걸리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래요. 우리 어서 돌아가…… 에취!”

내가 말을 하다 말고 재채기를 하니 달래가 난리 법석이었다.

“정말 병이 나시겠습니다! 예전에도 비를 맞고 크게 앓아눕지 않으셨습니까. 궁도 절노부의 저택도 먼데 어찌하면 좋을지…….”

발을 동동 구르는 달래를 보며 다로가 조심스럽게 의견을 꺼냈다.

“하면 저희 집으로 가시죠. 여기에서 그리 멀지 않으니 잠시 녹이고 가세요.”

“다로의 집이요?”

“예. 그리 좋은 곳은 아니지만 몸을 녹일 정도는 됩니다.”

실례가 되는 것은 아닐까 고민하니 옆에 있던 달래가 나를 잡아끌며 재촉했다.

“그리하세요, 아가씨. 이 상태로는 먼 길 가기가 힘드십니다.”

“제 생각도 같아요. 누추한 곳이라 발걸음 하기 꺼려지는 것은 아니시죠?”

다로가 달래의 말을 거들었다. 내가 초대를 거절하기 힘든 요령 좋은 말이었다. 나는 픽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그럼 실례인 것은 알지만 잠시 들러 신세를 질게요.”

“예. 환영입니다. 저를 따라오셔요.”

그렇게 말한 다로가 익숙한 걸음으로 앞장섰다.

그 뒤를 따라 걸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다로의 집이 나타났다. 그녀의 집이 국내성 안에서도 외곽에 위치한 탓에 우리가 썰매놀이를 즐겼던 언덕과 그리 멀지 않았던 것이다.

다로의 집은 규모가 크지는 않았지만 정갈하고 깔끔하게 꾸며져 있었다. 작은 정원과 연못까지 있었으니 규모만 작을 뿐 웬만한 귀족가 저택이 부럽지 않았다.

다로는 손님을 맞이하는 방으로 나를 안내한 뒤 갈아입을 옷까지 빌려주었다. 평소 내가 입는 것보다 색이며 문양이 화려한 옷이었다.

“아가씨께서 입으실 만한 옷은 아니지만, 젖은 옷이 마를 때까지만 입고 계세요.”

귀족가 여인들과 유녀가 입는 옷은 분위기가 많이 달랐기에, 다로는 제 옷을 건네면서도 썩 민망한 눈치였다.

나는 일부러 더 밝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에요. 평소에 다로가 입는 옷들을 볼 때마다 예뻐서 한번 입어 보고 싶다고 생각했는걸요. 이리 기회가 생기니 오히려 좋은데요.”

“그러시다니 다행이지만…… 다 갈아입으시면 말해 주세요. 전 밖에 나가서 기다릴 테니까요.”

다로가 웃으며 자리를 피해 주었다. 나는 젖은 옷을 벗어 바닥에 두고 다로가 건네준 옷으로 갈아입었다.

모두 차려입고 내 모습을 내려다보니, 평소에 잘 입지 않는 분위기의 옷인 탓에 스스로도 낯선 기분이었다.

나는 어색함에 주뼛대며 굳게 닫힌 문을 슬쩍 열었다.

“다로.”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다로를 부르니 그녀가 내 모습을 보며 활짝 웃었다.

“화려한 옷도 잘 어울리시네요.”

“그런가요? 난 영 어색한데.”

“이 다로가 장담하는 것이니 틀림없어요. 국내성에서 저만한 심미안을 가진 사람은 드물답니다.”

다로의 안목이라면 유명했다. 그녀가 걸치는 옷이며 장신구는 여지없이 국내성의 유행을 휩쓸었다.

하지만 지금의 말은 내 기분을 맞춰 주기 위한 감언(甘言)일 것이다. 스스로에게 관대한 내가 보기에도 나는 화려한 것이 썩 어울리는 편은 아니었다.

어색하게 웃고 있는 나를 보며 다로가 말을 돌렸다.

“젖은 옷은 제게 주세요. 말려 드릴게요.”

“아, 고마워요.”

내가 서둘러 바닥에 벗어 둔 옷을 건네니 다로가 그것을 받아 들며 질문했다.

“옷이 마르려면 시간이 필요한데…… 괜찮으시다면 술이라도 따뜻하게 데워 드릴까요?”

“술을요?”

“예. 추울 때는 따뜻한 술만큼 좋은 것이 없지요. 뒤쪽 정원에 손님이 오시면 함께 술을 나누는 작은 정자가 있습니다. 내리는 눈을 보며 술 한잔하는 것도 좋을 듯하여.”

그러고 보니 연못 옆에 작은 정자가 하나 있었다. 마치 그림 같던 그곳에서 나누는 술이라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눈 속에서 술 한잔이라. 그리 좋은 놀음을 거절할 수 있을 리가요.”

내 대답에 다로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우희 아가씨라면 그리 말해 주실 것 같았습니다. 하면 준비하지요.”

* * *

다로와 나는 정자 위에서 작은 상을 하나 두고 마주 앉았다.

달래는 이른 시간부터 외출을 준비하느라 진이 빠졌는지, 옷을 갈아입자마자 방에서 잠이 들어 이 자리에 함께하지 못했다.

나는 술잔을 꼭 쥐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변에는 조용히 눈이 내리고, 나는 하얀 풍경 속 고요하게 앉았으니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코끝은 시렸지만, 불이 피어오르는 화로의 온기가 손을 녹여 주었다. 따뜻한 술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자 몸 안이 따끈해졌다.

기분 좋게 풀리는 내 얼굴을 보며 다로가 빈 잔을 채워 주었다.

“사실 오늘 제게 놀이를 함께하자고 하셔서 조금 놀랐습니다.”

“귀족 아가씨가 하기엔 조금 별나고 요란스러운 놀이였지요?”

“아니요, 그것 때문이 아니라…….”

내 말에 다로가 놀라서 고개를 저었다.

“그럼요?”

다로는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고 술잔을 매만지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사실 아가씨께서 저를 불편해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내가요?”

“저는 눈치가 빠른 편입니다. 그래야 제 일을 할 수 있거든요. 사람들의 태도를 보고, 마음을 읽어 내고, 그걸 거스르지 않고 비위를 맞춰 호감을 사는 게 제 일입니다. 제가 그 일에 능했기 때문에 비로의 다로, 국내성의 유녀 다로가 된 것이지요.”

다로가 만지작거리던 술잔을 들어 술을 한 모금 마시며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아가씨께는 그게 잘 통하지 않았습니다. 처음 비로에서 만났을 때부터 경계하고 거리를 두시기에…… 저로서도 말 못하고 고민을 하고 있었어요. 한데 오늘 이처럼 먼저 외출하자 제안을 해 주시니 제가 놀라지 않았겠어요?”

비로에서 여자 대원은 나와 다로뿐이었기 때문에, 나는 처음부터 그녀에게 상당한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사내들을 다루는 그녀의 당당한 모습을 보고서는 더욱 호감이 깊어졌다.

한데 경계하고 거리를 두다니?

내가 영문을 몰라 눈을 깜빡이니 다로가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혹 제가 착각한 것이라면…….”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떠오르는 구석이 있었다.

언젠가 다로가 이처럼 얼굴을 찡그렸을 때, 미인은 이런 얼굴을 해도 미인이구나, 하고 감탄하며 동시에 한 생각이 있었다.

나는 지켜보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주변을 둘러보며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었다.

“다로, 그…… 예전부터 묻고 싶은 것이 있었는데…….”

어물쩍거리는 나를 보며 다로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한번 말씀을 해 보시라 말하는 듯한 얼굴에 나는 가득 찬 술잔을 한 번에 비우며 입을 열었다.

“폐하와 밤을 함께 보냈나요?”

“……예?”

눈을 질끈 감고 물었더니 다로가 얼빠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하지만 그 말을 다시 한번 반복할 용기는 나지 않았다. 처음 던진 질문 역시 고즈넉한 분위기와 속을 데워 준 술이 아니었다면 엄두도 내지 못했을 말이었다.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애꿎은 빈 잔만 매만지는 나를 보며 다로가 차분하게 물었다.

“아가씨께서는 제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고 계시죠?”

“……네.”

“하면…… 폐하와 밤을 보냈냐는 이야기 역시 그걸 생각하시고……?”

다로의 질문에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스스로 술잔에 술을 따랐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던 다로가 무심히 대답했다.

“폐하와 밤을 보낸 적은 몇 번 있습니다.”

밤을 보낸 적이 있다.

차분한 어조였지만 내게는 다로의 목소리가 천둥보다 더 크게 들렸다.

“술이 넘칩니다, 아가씨.”

내가 멍한 얼굴로 다로를 보는 동안 술잔에서 술이 넘치고 있었다.

다로는 손을 뻗어 내 손에서 술병을 가져가 소반 위에 돌려놓았다.

“어찌 그리 충격을 받으셨어요?”

“충격을…… 내가요?”

“예. 아가씨께서요. 제가 폐하와 밤을 보낸 것이 그리 충격이신가요? 어째서요? 게다가 이것 하나를 묻는 것도 아주 어려워하셨지요. 왜일까요?”

다로가 말간 얼굴로 질문을 던졌다. 이어지는 질문 중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랬다. 나는 아주 어렵게 다로에게 물었고, 그녀의 대답에 충격을 받았다. 그건 확실했다.

하지만 왜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었다. 충격을 받은 건 그냥 충격을 받은 것인데, 꼭 이유를 알아야 할까?

“안일한 생각이세요, 그리 도망가시는 건.”

눈치가 빠르다던 말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다로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폐하께서는 언제나 아가씨께 도망가실 길을 열어 주셨겠죠. 그러니 지금도 도망가실 궁리를 하고 있는 거고요. 하지만 전 이리 답답한 상황을 보면 가만히 있지를 못한답니다. 참으로 못된 성미지요.”

다로는 내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내 손에 쥐여 주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술잔을 받아 들어 술이 넘실거리는 술잔을 다시 한번 비웠다.

“제가 어디 한번 아가씨의 마음을 읽어 볼까요?”

목을 타고 내려오는 술기운에 불길이 이는 듯 속이 뜨거워지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 모습을 보며 다로의 묘한 미소가 짙어졌다.

“폐하와 제가 밤을 보냈냐는 질문을 하기 힘드셨던 것은 제가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 두려우셨기 때문입니다. 혹여나 그런 대답을 듣는다면 충격 받고 상심할 것이 분명하니까요.”

다로가 내가 그랬듯 자신의 술잔에 술을 가득 따랐다. 금방이라도 넘칠 듯 한계까지 술을 따른 다로가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하면 제가 폐하와 밤을 보낸 것이 왜 충격적이고 상심할 만한 일일까요?”

나는 입을 꾹 다문 채 다로를 보았다.

애초에 내 대답을 바라지 않았다는 듯 그녀가 제 술잔을 한 번에 비우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결국은 이런 마음이시겠죠? 그 사람이 다른 여인과 밤을 보내는 것이 싫다. 그런 일을 한다면 나와 해야 한다.”

다로의 한마디, 한마디가 바늘처럼 가슴을 찔렀다.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내가 산사에서 담덕에게 한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도 나는 그런 말을 하는 스스로의 마음을 돌아보지 않았다.

마음을 돌아보는 순간 무너지게 되는 것이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고, 가능하면 오랫동안 지키고 싶었다.

하지만 다로는 나와 생각이 달랐다.

“스스로 인정하기 어려우시다면 다른 사람의 말을 빌려 답을 찾아보시죠. 사람들이 그런 마음을 뭐라고 부르는지 아세요?”

“몰라요. 계속 모르고 싶어요.”

내 말에 다로가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어설픈 각오로 지킬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에요, 그분의 옆자리는.”

“어설픈 각오가 아니에요. 나는 폐하를 지키고 싶고, 그래서 그 옆에 있기로 했어요. 하지만…….”

“자신의 마음을 인정하는 건 두렵다?”

무섭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내가 아는 담덕은 역사에 길이 남을 대단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의 곁을 친구로서 지킨다는 것에도 많은 고민과 굳은 결심이 필요했다.

그런데 내가 그 이상을 바란다면 얼마나 더 큰 각오를 해야 하는 걸까?

나는 줄곧 그것이 두려웠다.

“평생 같은 관계를 유지하며 살 수는 없습니다. 세월이 지나 주변의 풍경이 변하듯이 사람의 관계도 바뀌기 마련이지요. 언제까지 친구로 폐하의 곁을 지킬 수는 없습니다. 그 이상의 각오가 없다면 양보하셔야 해요. 하루라도 빨리 그분을 놓아주셔야 합니다. 관계를 바꾸는 것과 그분을 놓는 것, 아가씨는 어떤 것이 더 어려우신가요?”

두 번째 생을 얻으며 내가 원한 것은 단 하나였다. 이번만은 허무하게 죽지 않고 행복하기를.

큰 행복을 바라지도 않았다. 소중한 사람이 있고, 그들과 함께 사소한 시간을 보내고, 웃음이 떠나지 않는 그런 삶이면 족했다.

그러나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어느새 이곳까지 떠밀려 와 있었다.

외면하고 또 외면했다. 담덕의 곁에 머무를 이유를 ‘친구니까’라는 말로 포장하며 아직은 괜찮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모두 위선이었다.

나는 담덕을 누구와도 나누고 싶지 않았고, 그의 시선이 떠나는 것이 싫었으며, 가장 소중한 순간마다 그가 있기를 바랐다.

내가 나의 오랜 친구 담덕에게, 시대를 넘어 모두에게 길이 남을 위대한 태왕에게, 그런 우스운 사심을 품어도 되는 것일까?

“연심이지요?”

다로가 복잡한 내 마음을 한마디로 정리했다.

“아가씨께서는 폐하를 사랑하고 계세요.”

사랑이었다. 어느새 내 안에 숨어 있던 감정은 연심, 경애, 사모, 혹은 말로는 표현하기도 힘든 깊은 마음.

눈이 쏟아지는 열아홉의 겨울, 나는 길고 긴 방황과 고민 끝에 비로소 현실을 인정하기로 했다.

내 마음은 사랑이었다.

“답을 찾으신 게지요?”

복잡한 내 얼굴을 보며 다로가 미소를 지었다. 나의 번잡한 마음이 다로에게는 썩 즐거운 모양이었다.

“그간 폐하께서 얼마나 고민하셨는지 모르실 겁니다. 폐하께서 가지신 걱정의 반이 고구려라면, 나머지 반은 아가씨일 거예요. 그만큼 아가씨를 염려하십니다.”

담덕이 내 이야기를 많이 했다는 사실에 기뻐해야 할지, 다로와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다는 사실에 질투를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혼란스러운 내 표정을 읽어 낸 다로가 크게 웃음을 흘렸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폐하와 밤을 지새운 적은 있으나 아가씨께서 생각하시는 그런 이유는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하고자 한다면 늦은 시간이 좋고, 이야기가 길어지면 동이 트기도 하지요.”

“무슨 말이에요?”

“폐하께서 이곳을 찾으시는 이유는 비로의 대원인 다로를 만나기 위함이지, 국내성의 유녀 다로를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저는 폐하와 남녀 간의 정을 통한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다로의 눈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거짓말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럼 조금 전 내가 받은 충격은? 순식간에 머리를 스치고 갔던 그 많은 생각들은?

나는 억울해서 입을 쩍 벌렸다.

“……하지만 다로가 그런 적이 있는 것처럼 말했잖아요.”

“어머나.”

나의 항의에 다로가 과장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는 밤을 함께 보냈다고만 했는걸요. 그 말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답니다. 해석은 아가씨께서 하셨고요.”

“내가 그런 해석을 하도록 유도했잖아요.”

“그것까지는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옆에서 두 분을 지켜보는 것이 너무도 답답하여.”

다로가 웃으며 나와 본인의 술잔 모두에 술을 따랐다.

뒤이어 그녀가 잔을 들어 함께 마실 것을 청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잔을 마주 들었다.

“두 분의 새로운 관계를 위하여.”

다로가 그렇게 말하며 술을 들이켰다.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져 묵묵히 술잔을 비울 뿐이었다.

“왜 그리 복잡한 얼굴을 하세요?”

마냥 밝지만은 않은 나를 보며 다로가 쓰게 웃었다.

“좋지 않습니까? 청춘을 즐겨 마땅할 나이에, 적당한 상대와 뭇사람이 축복할 마음을 나누게 되셨으니 이보다 좋을 수 없지요. 제가 아가씨만 같다면 세상에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침울한 다로는 처음이었다. 언제나 요요하게 웃으며 사람을 휘어잡는 그녀가 내 처지를 부러워하며 서글퍼할 까닭이 없었다.

의문에 찬 내 시선을 느꼈는지 다로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폐하를 마음에 두어 아가씨를 부러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알아요. 말하는 것을 보니 그런 것 같아요. 다만 다로가 어찌 이리 슬퍼 보이는지 궁금해서요. 난 다로가 걱정이 없는 줄 알았어요. 늘 밝아 보이기에.”

“제가요?”

내 말에 다로가 소녀처럼 까르르 웃었다. 양 뺨이 발그레해진 모습을 보니 적당히 술이 오른 것 같았다.

“어찌 제게 걱정이 없겠습니까. 누군가의 곁에 있기 위해 누군가를 향한 마음을 버려야 하니 참으로 얄궂은 인생인걸요.”

“곁에 있고 싶은 사람이라…… 마음에 둔 사람이 있는 거군요?”

“예.”

다로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국내성에서 제일 유명한 유녀의 마음을 훔쳐 간 자가 누구인가 싶어 다로를 빤히 보니 그녀가 내 시선을 피해 눈을 내리깔았다.

“사람에게 마음을 주면 제가 가장 괴롭습니다. 전 오래전부터 그걸 알고 있었어요. 마음에도 없는 사내들과 밤을 보내며, 가슴속에는 누군가를 향한 마음을 품고 있다면 세상이 얼마나 잔혹하겠습니까? 절 비로에 데려오신 분이 그리 조언하셨습니다. 마음을 단단히 붙잡고 있으라고. 저도 그게 정답인 걸 알았지요.”

“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가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가랑비에 옷 젖듯이…… 그렇게 물드는 것이 마음인데요.”

“맞습니다. 마음먹은 대로 살 수 있다면 이 세상 사람들이 불행할 이유가 없지요. 저도 그런 평범한 사람일 줄은 몰랐지만요.”

다로가 술병을 들었다. 가볍게 들리는 것을 보니 안이 텅 빈 것 같았다.

“술을 더 가져올까요?”

여러모로 술이 고픈 날이었다. 다로 역시 비슷한 기분인 것 같았다. 나는 거절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로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볍게 비틀거린 그녀가 곧 중심을 잡고 정자를 벗어났다.

나는 다로가 멀어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녀가 입은 붉은 옷이 하얀 눈 속으로 사라지고, 어느새 순백으로 물든 설경(雪景)만이 두 눈에 가득 찼다.

무엇에라도 홀린 듯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 정자를 벗어났다.

꽁꽁 얼어붙은 조그마한 연못을 지나 정원 한켠을 지키고 선 나무 앞에 서니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꽃봉오리가 맺혀 있었다.

“매화인가…….”

눈을 뚫고 피는 꽃이라면 매화뿐이었다.

매화 봉오리가 머리를 내밀었으니 곧 새로운 계절이 다가오겠구나. 아직은 눈이 쏟아지는 겨울이지만 머지않아 봄이 오겠지.

어쩐지 싱숭생숭한 기분이었다. 겨울의 끝자락이 가지는 묘한 쓸쓸함 때문인지도 몰랐다.

이 시기에는 무엇이든 버려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새로운 계절에는 새로운 마음으로, 미련한 과거는 이 계절에 두고 돌아서야만 할 것 같다.

이제 나는 담덕을 어떻게 대해야 하지?

나는 꽃봉오리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마음은 인정했지만 한순간에 태도를 바꾸는 건 무리였다.

당장 담덕의 얼굴을 어찌 봐야 할지도 모르겠는걸. 평생 연애해 본 적 없는 티가 여기서 나는구나.

이른 아침 밖으로 나설 때만 하더라도 궁에 있는 처소로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오늘은 힘들 것 같았다. 담덕의 얼굴을 마주하면 혼자 당황해 갖은 실수를 할 것이 뻔했다.

오늘은 절노부의 거처로 가야겠다.

그렇게 다짐하는 순간 뒤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다로. 여기 있었구나.”

한숨 섞인 목소리의 주인공은 제신이었다.

오라버니가 여기에 왜? 아니, 그보다 나를 다로라고 부른 거지 지금?

나는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그대로 굳어 버렸다.

아무래도 내가 다로의 옷을 빌려 입고 있어 사람을 착각한 모양인데…….

공교롭게도 나와 다로는 체격이 비슷해 뒷모습만 보면 크게 차이가 없었다. 옷까지 다로의 것을 입었으니 제신의 착각은 어쩌면 당연했다.

임무 때문에 다로를 찾은 건가?

내가 돌아서서 정체를 밝히기도 전에 제신이 가까이 다가와 뒤에서 나를 끌어안았다.

끌어안아?!

나는 경악에 차 굳어 버렸다.

이게 뭐야. 오라버니가 다로를 왜 안아? 이게 뭐야!

머리가 빙빙 돌기 시작한 나를 알 리가 없는 제신이 긴 한숨을 내쉬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해사을에게 간 뒤 며칠이나 내 앞에 나타나지 않으면 나는 어쩌라는 거야?”

도대체 어쩌긴 뭘 어째?

“널 그리 보낼 수밖에 없는 내 마음도 이해해 줄 수는 없는 것이냐? 나도 네 생각만 하면 머리가 터질 것 같다.”

더 이상 들어서는 안 되는 이야기였다.

나는 서둘러 정신을 다잡고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제신이 어찌나 강하게 안았는지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잠깐만 이러고 있자.”

아니, 나하고 이러고 있어도 소용없대도!

나는 한숨을 내쉬며 제신을 불렀다.

“오라버니.”

“……오라버니?”

뒤에서 나를 안은 제신의 몸이 삽시간에 굳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다시 한번 긴 한숨을 내쉬며 제신의 팔을 벗어났다.

“다로는 잠시 안에 들어갔어.”

돌아서서 제신을 보니 그는 얼빠진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이게 현실이 맞는지 제 뺨을 꼬집기까지 했다.

나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제신을 위해 다시 한번 단호하게 말을 꺼냈다.

“오라버니? 이건 현실이고, 난 우희야. 다로는 잠시 안에 들어갔고.”

“……왜?”

제신이 입을 쩍 벌리고 실없이 되물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이른 아침 다로와 썰매놀이를 하기 위해 나섰던 것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다.

“심심해서 다로와 썰매놀이를 하러 갔어.”

“……네가 어릴 때 알려 준 그 놀이?”

“응. 언덕에서 짚으로 엮은 돗자리 타고 내려오는 거.”

“그걸 왜 다로랑?”

“오라버니하고 담덕은 추운 날씨에 밖으로 나돈다며 잔소리를 할 테고, 또래라고는 소노부의 영이나 다로뿐인데 영이는 몸이 약하잖아. 그럼 남은 사람은 다로뿐이지.”

“그럼 이 옷은 뭔데? 이건 다로 옷인데.”

“옷이 젖었는데 궁이며 우리 집은 너무 멀잖아. 그래서 가까운 다로의 집으로 와 옷을 빌려 입었어.”

막힘없는 나의 대답에 제신이 입을 꾹 다물었다. 나는 그의 어깨를 토닥이며 고개를 내저었다.

“오라버니. 부끄러운 것은 알겠는데, 그만 현실을 받아들여.”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멍하던 제신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그가 제자리에 주저앉으며 제 머리를 헤집었다.

“전부 들은 거지?”

“바로 뒤에서 속삭여 놓고는…… 내가 못 들었기를 바라는 건 너무 뻔뻔한 희망 아니야?”

“아, 젠장.”

나는 민망해서 어쩔 줄을 모르는 제신을 따라 쪼그려 앉으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무 민망해하지마. 오라버니는 성인이고, 음, 연애도 할 수 있고, 음, 그게 다로라면 난 환영이니까……. 물론 두 사람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건 전혀 몰랐지만…….”

어설픈 내 위로에도 제신은 비관적인 태도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다고 그 꼴을 누이에게 보일 것까지는 없었는데.”

“……그건 그렇지만.”

“거기서 동의하면 어쩌자는 거야?”

“거짓말을 하긴 싫은데 어떡해? 게다가 나도 오라버니의 이런 모습을 봐서 당황스럽긴 마찬가지라고! 어찌 누이를 못 알아보고 그래?”

나는 부루퉁하게 입을 내밀었다. 동기(同氣)가 연애하는 모습을 이렇게 직접적으로 보게 된 나도 민망해서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뒷모습으로 어찌 구분해? 게다가 옷도 다로의 것이었잖아.”

“그래서 잘했다는 거야?”

“내가 잘못한 것은 또 뭔데?”

“날 뒤에서 껴안고 느글거리는 말을 했잖아!”

“너인 줄 알았으면 안 했어!”

“그러니까 그걸 못 알아본 것이 잘못이라고!”

그렇게 투닥거리고 있으니 멀리서 다로가 나타났다. 손에 술병을 든 그녀는 갑작스런 제신의 등장에 놀란 눈치였다.

“수장께서 어쩐 일로 여기에 오셨어요?”

다로의 질문에 나와 제신이 시선을 교환했다. 눈빛으로 주고받은 내용이야 뻔했다.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은 둘만 알고 넘어가자.

다로가 알게 되면 피차 민망한 상황이었다.

그렇게 합의를 마친 우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어색한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 우연히 지나가다가 들렀지. 그런데 여기에 우희가 있을 줄은 몰랐네.”

“아하하. 오라버니도 참. 어떻게 우연이 이렇게 겹치지?”

누가 들어도 어색한 웃음소리에 다로의 표정이 묘해졌다.

“……두 분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다로는 어깨동무를 하며 우애 좋은 남매임을 과시하고 있는 우리를 향해 긴 한숨을 내쉬며 술병을 흔들었다.

“두 분 모두 정자로 가시죠. 어찌 오셨는지가 뭐 그리 중요하겠어요? 이리 오신 것이 중하지요. 함께 술이나 기울이고, 눈 오는 풍경을 즐기면 그만입니다.”

그리 말하며 다로가 정자로 먼저 걸음을 옮겼다.

멍하니 어깨동무를 하고 있던 우리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어깨에 올린 팔을 내리고 정자로 향했다.

눈은 여전히 계속 쏟아지고 있었다.

* * *

제신과 다로.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 곁에 있으니 쉴 새 없이 술이 들어갔다.

그건 다른 두 사람도 마찬가지여서 우리는 밤 깊은 시간까지 술잔을 기울였다.

눈 내리는 풍경에 달빛이 내려앉으니 절경이 따로 없었다. 좋은 풍경을 안주 삼아 한 잔, 두 잔 비워 내니 금세 술이 동났다.

다로는 이미 곯아떨어져 제신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고, 제신은 정자 위를 뒹구는 빈 술병들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아쉬운데.”

아쉽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술을 마시며 오늘처럼 정신이 멀쩡한 건 처음이었다.

이렇게 술이 잘 받는 날에는 응당 더 많은 술을 마셔 줘야지.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호기롭게 외쳤다.

“내가 더 구해 올게.”

“네가?”

제신이 가소롭다는 듯 픽 하고 웃었다. 술이 얼큰하게 오른 시점이었던 터라 그 비웃음에 오기가 더했다.

“그럼! 내가 호랑이도 잡았는데, 술 하나 못 구해 올까 봐?”

“왜? 이번엔 오른쪽 팔을 내주고 술을 구해 오려고?”

제신이 호랑이를 잡으며 다쳤던 왼팔을 가리키며 비죽 웃었다.

다친 팔을 붙들고 국내성에 돌아오던 날, 제신은 나를 향해 먹지도 못할 호랑이를 잡으려고 팔을 내준 미련한 녀석이라며 혀를 끌끌 찼다. 그 속에 걱정이 담겨 있음은 모르지 않았으나 제법 약이 올랐던 참이었다.

“이번엔 두 팔 멀쩡하게 돌아올 테니 두고 보라고.”

나는 코웃음을 치고 자리를 벗어났다. 슬쩍 뒤를 보니 제신이 제게 기댄 다로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고 있었다.

내 저럴 줄 알았지.

나는 뿌듯한 마음으로 씨익 웃으며 다로의 집을 나섰다. 술도 구해 오고, 두 사람만의 시간도 만들어 주니 일거양득이었다.

하지만 울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대문을 나서자마자 누군가가 내 걸음을 막아섰다.

“이대로 나서면 위험하십니다.”

도대체 누구인가 싶어 미간을 찌푸리며 상대를 살피니 어둠 속에서 태림의 얼굴이 드러났다.

“태림? 왜 여기 있어요? 오늘 아침에 외출하면서 호위는 필요 없다고 했잖아요.”

다로와 편하게 썰매놀이를 즐기고 싶어 일부러 호위를 데려가지 않았다.

꼭 호위를 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면 어떻게든 설득을 해야겠다 생각했는데, 의외로 태림이 선선히 물러섰었다.

“어쩐지 순순히 물러나더라니. 몰래 따라 붙은 거예요?”

“……죄송합니다.”

태림이 멋쩍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오전 내내 탁 트인 곳에서 시간을 보냈으니 몸을 숨기기도 어려웠을 텐데, 그가 몰래 호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잠깐. 그럼 계속 밖에 있었다는 거예요? 이 추운 날씨에?”

나야 술을 마시고 곁에 화로도 두었다지만 태림은 아니었다. 그의 성격을 생각하면 본인이 추운 것을 챙기며 나를 호위를 했을 리가 없었다.

나는 놀라서 태림의 양손을 붙잡았다. 생각했던 것처럼 그의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괜찮습니다. 추운 곳에서도 견딜 수 있는 훈련을 충분히 받았습니다.”

따뜻한 온기에 놀랐는지 태림이 움찔거리며 손을 빼냈다.

가만히 살피니 차가운 것은 손만이 아니었다. 옷 밖으로 드러난 살이 전부 빨갛게 얼어 있었다.

나는 답답함에 한숨을 내쉬며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태림에게 둘러 주었다.

그 옷마저도 다시 벗어 내게 돌려줄 기세이기에 나는 재빨리 손을 들어 그의 행동을 막았다.

“술기운이 올라 조금 더우니 잠시 태림이 가지고 있어요. 태림이 추울까 봐 둘러 준 것이 아니라, 내 옷을 잠시 걸어 둔 거예요. 알았죠?”

“……그럼 잠시 가지고 있겠습니다.”

나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걷기 시작했다. 그 옆을 태림이 다급하게 따라붙었다.

“정말 술을 구하러 갈 생각이십니까?”

“그럼요. 난 아직도 술이 부족하거든요.”

자신감 넘치는 말에 태림이 내 얼굴을 빤히 보았다. 내가 취하지는 않았는지, 술을 더 마실 수 있는지 파악하려는 것 같았다.

“생각보다 멀쩡하시군요. 술을 그리 많이 드셨는데.”

내가 술 마시는 모습을 다 지켜본 듯한 말투였다.

“다로의 집 앞에서 기다린 줄 알았더니…… 가까이에서 다 지켜보고 있었어요?”

“예.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면 호위를 하겠다고 나선 의미가 없으니까요.”

“어디에서요? 난 전혀 못 봤는데.”

“정자 지붕 위에 있었습니다.”

상상도 못한 위치에 나는 입을 쩌 벌렸다.

“거긴 어떻게 올라갔는데요?”

“어렵지 않습니다. 담벼락을 밟고 뛰면 쉽게 닿습니다.”

태림의 말투가 너무 편안해서 순간 속아 넘어갈 뻔했다. 나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저었다.

“태림, 그거 알아요? 보통 사람은 담벼락을 밟는 것부터가 어려워요.”

“그렇습니까?”

태림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아하니 진심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러니까 보통은…… 아니에요.”

나는 그에게 ‘보통 사람에게 불가능한 일’을 설명하려다가 막막함에 곧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중요한 문제가 아니기도 했다.

“술이나 구하러 가죠. 비로의 본부에서 파는 술이 기가 막히던데. 그쪽으로 갈까요?”

익숙하게 걸음을 옮기는 나를 보며 태림이 다시 한번 감탄했다.

“그런데 정말 멀쩡하시군요. 폐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가씨는 술만 마시면 심하게 취해 고주망태가 된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아가씨께서 술을 마시기 시작하셨을 때부터 상당히 긴장을 하고 있었습니다만…….”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었죠?”

나는 불만스럽게 입을 비죽이며 손을 내저었다.

“우리 폐하는 그 이야기를 어디에까지 퍼트리고 다닐 생각인지 모르겠다니까요. 다른 사람하고 마시면 늘 이렇게 멀쩡한데.”

“폐하께서 거짓말을 하셨다는 겁니까?”

“폐하와 단둘이 마시면 이상하게 기억이 뚝 끊기니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에요. 그래도 폐하를 붙잡고 구토를 했다니 말도 안 되지 않아요? 난 사람을 붙잡고 토한 적이 단 한 번도 없거든요. 내가 기억이 없다고 하니 괜한 말을 지어내는 것이 분명해요.”

“폐하께서 일부러 그러실 분은 아니신데…….”

“지금 폐하 편을 드는 거예요? 지금은 날 호위하고 있으면서?”

내가 눈을 매섭게 뜨자 태림이 난처하게 웃었다.

“됐어요. 내 편을 들어줄 거라고 기대도 안 했어요.”

나는 한숨을 내쉬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검은 하늘에서 쉴 새 없이 하얀 눈송이가 떨어지고 있었다.

얼굴에 차가운 눈송이가 닿아 녹아내리자 얼굴까지 올랐던 열기가 조금이나마 가라앉는 것 같았다.

술이 적당히 취한 탓인지 그 사소한 시원함마저 기분을 들뜨게 했다.

나는 빙긋 웃으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조금 빨라진 걸음에 발이 꼬였는지 몸이 휘청거리자 태림이 다급하게 내 어깻죽지를 받쳤다.

“조심하십시오. 멀쩡해 보이시더니 조금 취하긴 하셨습니다. 평소보다 들뜨셨어요.”

누군가에게 기대어 있다는 사실에 안정감을 느낀 탓일까.

태림이 나를 단단히 붙잡자마자 속에서 눌려 있던 취기가 한꺼번에 올라왔다.

온몸에 술기운이 퍼지는 느낌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어지럽게 머리가 빙빙 돌고 눈을 깜빡이는 것이 느려졌다.

“우희 님?”

무엇인가 이상한 것을 느낀 태림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찮다고 말을 해야 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고 휘청거리기만 했다.

“괜찮으십니까?”

정신은 멀쩡한데 몸이 말을 듣지 않으니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다.

두 다리에 힘을 주고 바로 서기 위해 태림의 손을 밀어냈지만, 그에게서 몸이 떨어지자마자 중심이 크게 흔들렸다.

“우희 님!”

태림이 놀라서 내게로 다시 손을 뻗었다. 조금 전까지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정신을 못 차리니 그도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아무래도 술을 더 드시는 건 안 되겠습니다. 어서 돌아가시죠. 어디로 모실까요? 다로의 집입니까? 아니면 궁으로 가시겠어요?”

바로 옆에서 떠들어 대는 태림의 목소리가 거슬렸다.

나는 손을 뻗어 그의 목을 끌어당겼다. 순식간에 내게 코앞으로 다가온 태림이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태림.”

“……왜 이러십니까?”

“나도 몰라요. 그런데 태림이 너무 시끄러워.”

그때부터 스스로가 느끼기에도 이상한 방향으로 생각이 흐르기 시작했다.

태림은 시끄럽고,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것은 입이고, 나는 저 얄미운 입을 응징해야 했다.

결론은 단순했다.

저 못된 입을 깨물어 버릴 거야.

그렇게 결심하니 머릿속이 모두 그 생각으로 가득 찼다.

나는 입을 벌려 태림의 입술을 깨물기 위해 그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눈을 크게 뜬 태림은 몸이 뻣뻣하게 굳어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었다.

조금씩 태림의 입술이 가까워지고 있을 때. 누군가가 내 뒷목을 끌어당겼다.

가까워지는 것은 오래 걸렸는데 멀어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나는 응징을 방해한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돌렸다.

“어?”

그곳에는 담덕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담덕이 여기에 있을 리가 없는데.

술기운이 머리를 지배한 와중에도 그것만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꿈?”

환상인지 현실인지 모를 상대를 가리키며 물었더니, 눈앞의 담덕이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내 이마에 손가락을 튕겼다.

“꿈 아니다.”

“그럼 진짜 담덕인가?”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물었더니 담덕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진짜 담덕이다. 이래서 내가 너 술 마시면 안 된다고 했지?”

“어떻게 왔어?”

“태림이 연통을 보냈다. 네가 술을 마신다기에 걱정되어서 와 봤더니 역시나…….”

담덕이 다시 한번 내 이마를 두드렸다. 잘못한 것이 없다고 굳게 믿고 있는 나로서는 억울한 벌이었다.

“나 아무것도 안 했는데.”

“내가 막지 않았으면 했을 거잖아. 넌 술만 취하면 왜 이렇게 사람 입술을 물어뜯으려 들어?”

“태림이 잘못했어. 머리가 윙윙 울리는데 계속 시끄럽게 말을 하잖아.”

내가 불만스럽게 태림을 바라보자 담덕이 두 손으로 내 얼굴을 붙잡아 제게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다른 사람 보는 건 금지. 또 입술을 물어뜯게?”

“또라니? 난 아직 아무것도 안 했다니까.”

“내가 안 말리면 할 테니까 한 것이나 마찬가지야.”

“아직 안 했는데 어찌 한 것이나 마찬가지야?”

“그래서, 내가 지금 널 놓아주면 아무 짓도 안 할 거야?”

“아니.”

“그러니 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담덕이 한숨을 내쉬며 내 머리를 헤집었다. 나는 불만스럽게 담덕의 손을 밀어내며 그를 불렀다.

“담덕.”

“왜?”

시큰둥한 대답에 나는 손을 뻗어 담덕의 목을 끌어당겼다. 그가 아무런 저항 없이 내게로 끌려왔다. 하지만 마주한 얼굴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뭐 하려고?”

“나도 몰라.”

나는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너도 시끄러워.”

“야! 너 또……!”

기겁한 담덕이 목을 뒤로 뺐지만 내가 그를 끌어당기는 것이 더 빨랐다.

나는 눈앞으로 다가온 담덕의 얼굴을 놓치지 않고 망설임 없이 그의 입술을 깨물었다.

응징은 제법 효과가 있었다. 쉴 새 없이 떠들어 대던 담덕의 입이 꾹 다물린 것이다.

이제 조용하네.

나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담덕의 입술을 놓아주었다.

하지만 만족스러운 기분도 잠시뿐이었다. 이처럼 늦은 시간에도 거리를 지나는 사람이 어찌나 많은지 시끄러운 소리가 도무지 사라질 줄을 몰랐다.

나는 짜증스러운 얼굴로 삼삼오오 모여 떠들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입을 열 때마다 머릿속이 울려 머리가 깨질 것만 같았다.

저 사람들도 담덕처럼 입을 다물게 해야지.

나는 기세 좋게 지나가는 사람들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담덕이 뒤에서 내 허리를 한 손으로 끌어안아 앞으로 나가려는 나를 저지했다.

“우희.”

조용히 이름을 부르는 담덕의 목소리와 함께 시야가 어두워졌다. 담덕의 손이 내 눈을 덮은 것이다.

“이제 그만 돌아가자. 집에 가서 잠을 자야지, 응?”

담덕이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나를 달랬다.

“잠…….”

그 목소리를 들으니 순식간에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수마가 몸을 덮쳤다. 무엇에라도 홀린 듯 몸이 무거워지고 머리가 둔해졌다.

“응. 졸려. 잘래.”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대로 눈을 감았다. 몸에 힘을 풀고 담덕에게 기대자마자 정신이 흐려졌다.

희미해져 가는 의식 사이로 한숨 섞인 담덕과 걱정이 묻어나는 태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림, 우희가 네게 그러기 전에 다른 사람에게도 그랬나?”

“아닙니다. 휘청거리며 넘어지실 것 같아 붙잡아 드렸더니 갑자기…… 그 전까지는 너무 멀쩡하셔서 술을 마시지 않은 사람처럼 보일 정도였습니다. 아무 일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이 녀석은 항상 그렇다. 어느 순간 갑자기 취해서는 사람을 난처하게 해. 그리고 다음 날엔 기억이 없다며 외려 나를 거짓말쟁이로 몰아붙이지. 너도 난처한 일을 당하지 않으려면 조심해야 할 거다.”

“……예, 그리하겠습니다.”

* * *

나는 타는 듯한 목마름과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달래야, 물 좀 줄래?”

늘 그랬던 것처럼 몽롱한 정신으로 달래를 찾았으나 어쩐 일인지 주변이 조용했다.

“달래야?”

나는 의아해져서 상체를 일으키며 다시 한번 달래를 불렀다. 하지만 몸을 일으키려는 시도는 뒤에서 나를 단단히 붙잡은 힘에 무위로 돌아갔다.

언젠가 이런 비슷한 상황이 있었는데.

나는 묘한 기시감을 느끼며 뒤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예상했던 것처럼 담덕이 눈을 감은 채 내 허리를 단단히 붙들고 있었다.

지난번에 크게 앓았을 때도 이랬지.

같은 침상에서 잠든 것이 두 번째라고 이번에는 놀라지도 않았다. 나는 몸을 일으키려던 것을 포기하고 담덕의 옆에 편하게 몸을 뉘었다.

가만히 누운 채 눈동자만 굴려 방 안을 살피니 풍경이 아주 낯설었다. 내부 분위기나 어제의 상황을 고려하면 다로의 집일 가능성이 높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이상한 점이 있었다.

담덕이 왜 여기 있지?

나는 천천히 지난밤의 기억을 떠올렸다. 술을 구하겠다고 다로의 집을 나선 뒤 갑자기 취기가 올라 휘청거리던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뒤로는 머릿속이 하얬다.

담덕은 도대체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거야? 궁에서 일을 하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의문을 품은 채 몸을 돌려 담덕을 살피니 규칙적인 숨소리를 내며 잠든 그의 얼굴이 무척이나 평온해 보였다.

특별할 것 없이 평소와 비슷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달라진 내 마음 탓이었는지 가만히 담덕의 얼굴을 보기만 하는데도 기분이 이상했다.

내가 이 사람을 좋아한단 말이지.

그렇게 생각하자 가슴이 속에서부터 간질거렸다.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묘한 감정. 우희일 때는 물론이고 소진으로서도 느껴 본 적 없는 감정이었다.

소진일 때 나의 인생은 삭막했다. 홀로 시작해 외로이 끝을 맺었으니 좋은 기억도, 나쁜 기억도 없었다. 그때의 나는 그저 하루를 견뎌 내기에 바빴다.

매일 아침을 시작하는 내 소망은 언제나 하나였다. 오늘이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는 것.

나를 둘러싼 사람들은 나의 삶에 관심이 없었다. 그들 역시 그들의 시간을 견뎌 내느라 분주했으니 나는 언제나 혼자였다.

하지만 우희가 되어 모든 것이 달라졌다.

소중한 사람들을 얻고 그들과 시간을 공유하는 동안 나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하루는 이제 견뎌 내야 할 무게가 아니었고, 어느 순간 나의 소망은 오늘을 길게 살아가는 것으로 변화했다.

그 중심에 담덕이 있었다.

담덕을 볼 때마다 내 마음은 복잡했다. 우희에게 담덕은 둘도 없는 친구였지만, 소진에게 담덕은 역사에 남을 위대한 왕이었다. 그 차이는 아주 컸다.

나는 온전히 우희가 될 수도, 온전히 소진이 될 수도 없다. 머릿속에 남아 있는 각자의 기억이 하나로 뒤섞여 내가 누구인지도 알 수 없었다.

담덕을 향한 마음을 직시하지 못했던 것도 그래서였다. 내가 우희로서 담덕에게 가지는 독점욕을 소진은 옳지 못하다 나무라고, 내가 소진으로서 담덕에게 갖는 경외심을 우희는 가볍게 무시한다.

지난밤의 나는 끊임없이 부딪치는 두 가지의 마음으로도 거스를 수 없었던 진심을 인정하기로 했다.

내가 이 사람을 좋아하게 되면 무엇이 달라질까?

나는 여전히 두렵고 걱정스러웠다. 담덕에 대한 마음을 인정하는 순간을 기점으로 나의 모든 생이 완전히 달라지게 될 것이라는 기묘한 예감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계속 그리 쳐다본다고 어제 일을 그냥 넘어가진 않을 거야.”

복잡한 심경으로 담덕을 보고 있으니 그가 눈을 감은 채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어나 있었어?”

“응.”

담덕이 그렇게 대답하며 천천히 눈을 떴다. 선명하게 드러난 담덕의 눈동자에는 잠의 흔적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언제부터 깨어 있었어?”

“네가 일어나기 한참 전부터.”

“뭐? 그런데 왜 자고 있는 척을 한 거야?”

“그래야 계속 이렇게 있을 수 있으니까?”

담덕이 웃으며 내 허리를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덕분에 몸이 바짝 붙어 얼굴이 담덕의 가슴에 파묻혔다.

평소의 나라면 대수롭지 않게 부딪힌 얼굴이 아프다며 투덜대고 담덕의 품을 빠져 나왔을 테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긴장해서 뻣뻣하게 굳어 버린 나를 보며 담덕이 의아하게 물었다.

“왜 이래?”

“……뭐가?”

“평소랑 다르잖아. 어디 아파?”

“……아닌데.”

“아니긴. 확실히 이상한데.”

담덕이 내 허리를 놓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시선에 내 눈동자가 갈 곳을 잃고 방황했다.

“뭐야. 어디 아파?”

내가 정말 아프다고 생각했는지 담덕이 걱정스럽게 물으며 내 이마에 손을 얹었다. 아픈 것이 아니었으니 열이 느껴질 리가 없었다. 이마에서 손을 떼는 담덕의 표정이 묘해졌다.

“너 혹시 어제 일이 기억나서 이러는 거야?”

“어제 일?”

“어제 네가 술에 취해서 날 붙잡고…….”

담덕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놀라서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내가 술에 취해 담덕에게 할 행동이라면 뻔했다.

“설마…… 내가…… 또 너한테 토했어?”

나는 경악에 차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담덕을 좋아한다고 인정한 날 그에 얼굴에 대고 구토를 하다니. 아름다운 순간으로 남겨 두고 싶은 날에 크나큰 오점이 생겨 버렸다.

앞으로 이날을 떠올리면 담덕의 얼굴에 대고 토했다는 더러운 이야기가 함께 기억나겠지.

나는 절망에 휩싸여 머리를 부여잡았다.

“말도 안 돼…… 그리 중요한 날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어이없는 짓을 하다니…….”

깊게 한탄하는 나를 보며 담덕이 얼빠진 얼굴로 헛웃음을 흘렸다.

“이러는 걸 보니 어제 일이 정말 기억나지 않는 모양이구나. 네가 술에 취해 사람들을 붙잡고 구토를 했다면 내 마음이 이리 무겁지는 않을 것이다.”

“……너한테 토한 게 아니야?”

“그래. 그러지 않았으니, 구토를 한 것이 걱정이라면 그럴 필요 없다.”

“나 위로하려고 그냥 하는 이야긴 아니지?”

“어제 네게 그리 당했는데 뭐가 예쁘다고 위로를 해 주겠어?”

의심으로 가득 찬 내 눈빛에 담덕이 코웃음을 쳤다. 나는 거짓이 담겨 있지 않은 담덕의 눈빛과 목소리에 한시름을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