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장. 평양(平壤)
영락 3년 9월.
사냥제로 둔갑한 시찰을 위해 국내성에서 대규모의 인원이 평양으로 길을 나섰다.
각 부의 대가들은 냉랭한 얼굴로 말을 몰기 바빴지만, 젊은이들의 분위기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이번 원행에는 비슷한 나이 대의 유력 귀족가 자제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덕분에 평양으로 가는 길이 어느새 거대한 사교장처럼 변해 있었다.
귀족가 자제들이 모이는 무리에도 큰 구분은 있었다.
먼저 계루부와 절노부가 한 무리를 이루고, 소노부와 관노부가 또 다른 무리를 이루었다.
순노부는 여러 갈래로 쪼개져 앞서 언급된 두 개의 무리를 기웃거렸다. 각 부족 간의 상황이 그대로 드러나는 행태였다.
상황이 그러한 탓에 나란히 말을 몰고 가는 나와 운은 귀족가 자제들 사이에서 상당히 눈에 띄었다.
소노부와 절노부의 조합이라니.
한쪽은 태왕을 견제할 유일한 사람으로 평가받은 소노부 해씨의 장남이었고, 다른 한쪽은 태왕의 황후로 이름이 오르내리는 절노부 연씨의 여인이었다. 사람들의 의아한 시선이 따라붙는 것도 당연했다.
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귀족가 자제들과 교류가 거의 없었던 터라, 절노부의 친척들을 제외하면 내가 아는 얼굴이 운 하나뿐이었다.
모르는 사람과 어색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긴 여정을 버티는 것보다는 주변의 시선을 받더라도 운과 동행하는 쪽이 내게는 더 편했다.
물론 그것은 내 사정일 뿐, 운은 여러 귀족가 자제들과 친분이 두터웠다. 다른 무리에 합류할 수도 있는 사람이 굳이 내 곁에 붙어 있는 이유를 몰라 얼굴을 보니 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사람을 그렇게 봐?”
“왜 다른 무리에 가지 않고 제 옆에 있는 것인지 궁금해서요.”
내 말에 운이 피식 웃으며 떠들썩한 무리들을 가리켰다.
“저쪽은 너무 시끄럽거든.”
“요란한 걸 좋아하는 편 아니었어요?”
“요란한 것에도 정도가 있지. 저렇게 시끄러운 것은 나도 질색이야.”
그리 시끄러운가?
나는 삼삼오오 모여 떠들고 있는 무리를 바라보았다. 남녀가 섞여 들떠 있는 모습을 보니 청춘이다 싶었다.
“그다지 시끄러워 보이지는 않는데요.”
내 목소리에서 호의적인 분위기를 읽어 냈는지 운이 의외라는 얼굴을 했다.
“저런 분위기에 끼고 싶어?”
“그런 것은 아니지만…… 보기에 나쁘지는 않은데요? 누가 뭐래도 한창때 아닙니까. 남녀가 어울려 마음을 나누기 좋은 시기지요.”
“그대는 가끔 말을 이상하게 하더라. 꼭 자기는 한창때가 아닌 것처럼 말이야.”
나도 모르게 애늙은이 같은 말투가 나온 모양이었다. 나는 속으로 뜨끔한 것을 애써 감추며 괜히 대수롭지 않은 척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 저야 이미 갈 길이 정해진 몸이잖습니까.”
“하긴. 넌 이미 폐하와 혼인을 약속하였으니…….”
운이 슬쩍 눈을 돌려 가장 앞에서 가고 있는 담덕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의 옆으로 나의 백부와 운의 아버지를 비롯한 각 부의 수장들이 말을 몰고 있었다.
“후회 같은 건 없어?”
“폐하와 혼약한 것에 대해서요?”
내가 되묻자 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혼약을 하였다지만 제가 회의에서 쉽사리 승인이 떨어지지 않고 있잖아.”
“그게 전부 그쪽의 소노부 탓이라는 건 알고 있죠?”
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흘겨보자 운이 억울하다는 듯 두 손을 들었다.
“나는 빼 주지 그래? 난 적극적으로 폐하의 빠른 혼인을 주장하고 있다고. 내 누이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폐하께서 빨리 다른 사람과 혼인해 버리는 게 좋잖아?”
“그 말은…… 아직까지도 고추가께서 영과 폐하의 혼인을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거군요.”
“뭐, 그렇지. 내가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으니 아버지 입장에서는 방향을 돌릴 수밖에.”
그간 운은 자신이 명백한 태왕의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처음에는 운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노력하던 소노부의 고추가도 통제할 수 없는 그의 행보에 백기를 들었다.
운을 포기했다면 남은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영을 우 황후처럼 만드는 것.
“그분에게는 영이 황후가 되는 것이 마지막 보루야. 나를 포기할 때는 다른 선택지가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렇지 않으니 쉽게 물러서지 않으실 거다.”
운의 얼굴에 옅은 죄책감이 스쳐 갔다. 자신의 반항으로 누이인 영에게 무거운 짐이 넘어갔으니 여러모로 미안한 감정이 드는 듯했다.
“그러니 그쪽이 옆에서 잘 지켜 주셔야죠. 그럴 능력이 있는 분이시잖아요?”
“위로를 해 주는 거야?”
“그리 들으셨다면 위로겠지요.”
턱을 치켜드는 나를 보며 운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그건 위로였다.”
운의 웃음소리에 근처에 있던 소녀들이 얼굴을 붉히며 저들끼리 무어라 속삭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할지는 뻔했다.
“인기가 아주 좋으십니다.”
“갑자기 무슨 말이야?”
“저기, 저 아가씨들이 그쪽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얼굴 붉어진 거 보이시죠?”
내가 소녀들을 가리키며 말했지만 운은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날 본 것이 아닐 거다. 얼굴에 흉한 상처까지 있는 자를 두고 뭐하러 얼굴을 붉히겠어?”
“아닙니다. 그쪽이 웃으니 얼굴을 붉혔다니까요. 게다가 흉한 상처라니요. 상처가 조금 크긴 하지만 흉하진 않습니다. 얼굴이 워낙 잘나셔서 그 정도는 흠으로 보이지도 않아요.”
“……얼굴이 워낙 잘나셨다고?”
운이 어이없는 소리를 들었다는 양 나를 보았다. 그의 표정에 나야말로 어리둥절했다.
“왜요? 그런 말 한 번도 듣지 못하셨습니까?”
내가 보기에 운은 미남 소리를 듣고도 남을 얼굴이었다.
현대에서 말하는 아이돌상에 가깝지 않을까?
아이돌 그룹 중에서도 비주얼 센터를 맡을 만한 잘난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는 외모 칭찬이 영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런 말을 하는 건 그대가 처음이다. 잘나신 건 폐하께서 잘나셨지.”
“물론 우리 폐하께서도 잘나셨습니다만…….”
둘은 서로 다른 부류의 미남이었다.
운이 아이돌상이라면, 담덕은 배우상에 가까웠다.
조금 더 선명하게 생긴 미남형이지.
고구려에서는 운과 같은 곱상한 미남은 통하지 않는 건가?
하지만 운을 보고 얼굴을 붉히는 아가씨들을 보면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운의 얼굴을 빤히 보며 고민하다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말을 너무 얄밉게 하시니, 아가씨들이 칭찬을 하려다가도 울면서 도망가는 거 아닙니까?”
“뭐라고?”
“그게 아니라면 그 얼굴을 하고 어찌 잘생겼다는 말을 한 번도 듣지 못할 수가 있습니까?”
“그냥 네 눈이 이상한 것은 아니고?”
“아니라니까요! 잘생겼어요, 그쪽.”
단호한 내 말에 운이 입을 꾹 다물었다.
“제가 좋아하는 분위기로 잘생기기도 했지만, 객관적으로도 절대 빠지지 않는 얼굴이에요. 장담해요. 지나가는 아가씨들을 붙잡고 물어도 열이면 아홉은 잘생겼다 할걸요?”
이어지는 내 말에 운이 고개를 휙 돌렸다. 뒤통수만 보이는 얼굴에 귀가 새빨갛게 변해 있었다.
“……설마 지금 부끄러워하는 겁니까?”
“그런 말을 대놓고 하는 네가 이상하다.”
운이 투덜거리며 앞으로 말을 몰았다. 나는 재빨리 그 옆으로 따라붙으며 키득거렸다.
“그리 부끄러움이 많아서야 어디 연애나 제대로 하겠습니까?”
“연애?”
운이 별 우스운 말을 다 들었다는 양 픽 웃었다.
“그런 건 이미 포기한 지 오래다.”
“왜요? 포기하지 말고 자신감을 가지세요. 연애란 좋은 거잖습니까. 명문가 도련님에 얼굴도 잘나셨으니 아가씨들이 그냥 두지 않을 겁니다. 성격이 조금 모나긴 했지만 그 정도야 감당할 만하고요.”
내 말에 운이 묘한 얼굴로 물었다.
“그리 괜찮으면 그대는 왜 날 그냥 둬?”
“아시다시피 저야 이미 정해진 길이…….”
“꼭 가야 하는 길은 아니잖아?”
장난인 줄 알았더니 운의 얼굴이 썩 진지했다. 내가 입을 꾹 다물자 운이 고개를 돌려 정면을 보며 말을 이었다.
“절노부와 태왕의 결합을 위해서라면 다른 절노부 여식도 있잖아? 어차피 고추가께서는 양녀를 들이시는 거니까…… 네가 굳이 ‘희생’을 할 필요는 없는 거 아냐?”
“폐하와의 혼인을 희생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어요.”
“왜 희생이 아니지?”
운의 목소리가 어쩐지 삐딱했다.
“네 말대로 연애란 좋은 거잖아? 그런 걸 제대로 해 보지도 못하고 폐하와 정략적인 혼인을 약속했는데, 그게 희생이 아니야? 억울하다는 생각은 한 번도 못 해 봤어?”
“그거야…….”
그런 생각을 해 보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처음 담덕과의 혼인을 고민할 때에도 그 부분이 억울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대답을 못 하고 우물거리는 나를 보며 운이 혀를 끌끌 찼다.
“그대도 제대로 된 연애를 못 해 봤으면서 내게 조언을 한 건가?”
“저와 그쪽은 상황이 다르지요. 연애를 건너뛰긴 했지만 전 혼인할 사람이 있으니 그쪽보다는 사정이 낫습니다.”
“그래서 더 절망적인 거 아니야? 이대로 평생 연애는 못 하고 곧장 혼인을 해 버리는데.”
“……말이 그렇게도 되나요?”
머릿속이 멍해졌다. 운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벌써 혼약을 한 나보다는 자유의 몸인 운이 연애를 해 볼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
충격을 받아 입을 쩍 벌린 나를 보며 운이 웃었다.
“혹 혼인을 하기 전에 짧은 외유를 하고 싶다면 내가 도와줄 수도 있고. 연애를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잖아?”
대단한 은혜를 베풀어 주겠다는 듯한 그 얼굴에 나는 손을 휘휘 내저었다.
“됐습니다. 무슨 놀림을 당하려고…… 외유를 해도 다른 사람과 하지 그쪽이랑은 절대 안 할 겁니다.”
단호하게 말하고 고개를 돌리려는데 바로 옆에서 담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뭘 안 한다는 거야?”
“담덕!”
나는 주변의 눈치를 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이쪽으로 와도 돼? 고추가와 대가는?”
“내가 내내 붙어 있으면 그들도 피곤할 거야. 쉴 시간 정도는 줘야지.”
일리 있는 말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사람들 입장에서는 어린 상사와 함께 주말 등산을 하는 기분이겠지.
“저는 이만 자리를 피해 드리겠습니다. 이야기 나누시죠.”
담덕이 오자마자 운이 인사를 하고 소노부 자제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떠났다.
나름의 신뢰 관계를 확인한 뒤에도 두 사람의 관계는 여전히 껄끄러워서, 지금처럼 한 사람이 나타나면 다른 한 사람이 사라지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쌓아 온 불편한 관계가 하루아침에 달라질 리는 없으니 여전히 어색한 것은 이해할 수 있었으나, 언제까지 이런 관계를 유지할 수도 없었다.
“언제까지 이럴 셈이야?”
내 질문의 의도를 알아차린 담덕이 운을 힐끗거렸다. 시끄러운 것은 싫다더니, 어느새 그는 소노부의 자제들 사이에서 떠들썩하게 웃고 있었다.
“아마 평생? 해운과 나는 성향이 안 맞아.”
“그래도 잘 지내는 게 좋지 않겠어? 어쨌든 같은 배를 타기로 한 거잖아.”
“한배에 탔다고 모두 손잡고 하하 호호 웃으며 지내는 건 아니지. 아마 해운도 나와 비슷한 생각일 거다. 애초에 그는 자신을 믿어 달라고 하지 않았어. 필요하다면 곁에 두고 감시하라고 했지. 그게 우리의 최선이야.”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관계였다. 믿는 것도, 믿지 않는 것도 아닌 애매한 관계는 무엇이든 끝장을 내고 보는 나로서는 견디기 힘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내 표정을 읽었는지 담덕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확실히 너에겐 힘들겠지만, 세상에는 이런 관계도 있어.”
“어찌 그리 복잡하게 살아? 너도, 해운도.”
“시작이 복잡했으니 끝도 복잡할 수밖에.”
“하면 나와는 시작도 단순했으니 끝도 단순하겠네?”
“단순하다라…….”
내 말에 담덕이 잠시 생각하더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의미에서는 단순하지. 처음 만난 순간부터 난 너를 옆에 두고 싶었으니까. 이유야 달라졌지만, 결론이 동일하다면 단순한 것으로 생각해도 되겠지.”
“이유가 어찌 달라졌는데?”
“처음에는 절노부의 유능한 꼬마 의원이 필요했던 것이고, 지금은 그 이상의 의미로 네가 필요하지.”
나는 그 이상의 의미가 무엇인지 묻지 않았다.
아마 그 의미란 말로 다 설명하기 어려운 것일 테니까.
나는 담덕의 얼굴을 보며 다 이해한다는 듯 웃어 보였다. 그런 내 표정을 보는 담덕의 얼굴이 복잡하고도 미묘했다.
* * *
후에 고구려의 세 번째 수도가 되는 곳이지만 이 시기의 평양은 허허벌판이나 다름없었다.
평양성이 있기는 하지만 규모가 작고 초라해 누군가를 붙잡고 후에 이곳이 고구려의 수도가 된다고 하면 절대 믿지 못할 정도였다.
그래서 더욱 사냥을 하기는 좋았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산 곳곳에 다양한 짐승들이 살고 있기 때문에 보지 못했던 짐승들도 많이 만날 수 있을 것이라 했다.
국내성에서 내려온 손님들 덕분에 조용하던 평양성은 오랜만에 떠들썩해졌다.
고국원왕이 이곳에서 백제의 화살에 맞아 죽음을 맞이한 이후 한동안 평양성은 아픔을 상징하는 땅이 되었다. 그런 인식 탓에 근래에 이처럼 떠들썩할 일이 없었다.
성에 도착한 첫날은 국내성에서부터 오랜 길을 달리며 쌓인 피로를 풀기 위해 특별한 일정이 없었다.
이후 둘째 날에는 평양성 인근을 시찰하며 사찰을 올릴 장소를 파악하고, 셋째 날에는 귀족가의 자제들이 참여하는 사냥제가 열릴 예정이었다.
실질적으로 내가 참여해야 하는 일정은 셋째 날의 사냥제뿐이었으니 둘째 날인 오늘은 제법 여유가 있었다.
그것은 나와 함께 온 귀족가의 다른 자제들도 마찬가지였다.
시간과 사람이 모두 많으면 자연스레 놀이판이 벌어지기 마련이었다. 덕분에 평양성에도 술과 음식이 함께하는 놀이판이 한창이었다.
나는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다른 귀족 자제들과 안면을 텄다. 국내성에 오자마자 담덕과 가까워지는 바람에 친분을 쌓지 못했던 사람들이었다.
사냥제에 참여하기 위해 오랜만에 절노부 땅을 나선 사촌 오라버니 하가 중간 역할을 잘해 주었다.
늘 절노부에서만 지내다 동맹제가 있는 날에만 국내성을 찾았던 하가 몇 년간 국내성에서만 머물렀던 나보다 인맥이 더 넓다니?
그 사실에 자괴감을 느낄 새도 없이 귀족가의 자제들이 내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대체로 나에게 친절했다. 담덕과 나의 혼인이 확정적이라는 소문이 한몫을 한 것 같았다.
특히 또래의 아가씨들은 담덕에 대해 관심이 아주 대단했다.
처음에는 장신구 이야기로 가볍게 시작했다가, 마지막은 담덕에 대한 질문으로 끝을 맺으니 나는 갈수록 대화가 피곤해져 금세 자리를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대화 자리에서 얻은 거라고는 이 술 한 병뿐이구나.
나는 떠들썩한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와 회랑에 걸터앉으며 술을 들이켰다.
“청승맞게 혼자서 뭐하는 거야?”
병을 통째로 들고 홀로 술을 들이켜는 내가 우스웠던지 담덕이 웃으며 옆에 걸터앉았다.
“청승이 아니라 여유라고 해 줘.”
“여유로운 얼굴이 아닌데?”
“음…… 피곤한 대화를 했더니 그런가 봐.”
만났던 사람들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리니, 담덕이 내 손에서 술병을 빼앗아 술을 들이켰다.
“연우희, 넌 절대 술은 안 된다.”
“얼마 마시지도 않았는데.”
“그래도 안 돼. 또 지나가는 사람을 전부 붙잡고 토하려고?”
있지도 않았던 일을 꾸며 내는 담덕의 말에 내가 발끈했다.
“그런 적 없어.”
“내가 그냥 두었다면 그리했을 테니 일어난 일이나 다름없지.”
말도 안 되는 궤변이었다. 하지만 내가 반박을 하기도 전에 담덕이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사람들과는 무슨 대화를 했는데?”
“잘 기억도 안 나. 그냥 장신구 이야기, 옷감 이야기, 그리고…….”
“그리고?”
담덕의 질문에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사람들이 너에 대해 묻더라’라는 말을 하는 건 아무래도 실례 같았다.
나는 담덕이 그랬던 것처럼 다른 이야기를 던져 화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담덕, 네 술버릇은 본 적이 없는 것 같아.”
“당연하지. 언제나 네가 먼저 취하니까.”
“도대체 얼마나 마셔야 취하는 거야? 단 한 번도 네가 취하는 걸 본 적이 없어.”
감탄하며 물으니 담덕의 얼굴이 미묘해졌다.
“너하고 있을 땐 취하지 않으려고 특히 조심하고 있으니까.”
나와 마실 때는 일부러 술을 자제한다니. 완전히 반대였다.
“나하고 있으면 편해서 더 많이 마시게 되지 않아? 난 그런데.”
“그래서 다른 사람 앞에서는 멀쩡했구나? 어쩐지 다른 사람들은 네가 취하면 어찌하는지 전혀 모르더라. 꼭 내 앞에서만 그 난리를 피우기에 왜 그런가 했더니…….”
담덕이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담덕과 술만 마시면 자주 필름이 끊기는 나로서는 변명도, 반박도 할 수 없었다.
“좋은 거야. 내가 그만큼 널 믿는다는 뜻이니까.”
“그런 의미라면 더더욱 좋지 않은데.”
담덕이 미간을 찌푸리며 남은 술을 모두 들이켰다. 그 많은 술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을 보며 나는 눈을 빛냈다.
“오늘은 술에 취해 볼 생각이야?”
“꿈 깨시죠, 아가씨. 내가 네 앞에서 술 취하는 날은 절대 오지 않을 테니까.”
담덕의 확신은 대단했다.
상대가 이렇게 확신하면 변덕이 끓어 그것을 깨부수고 싶은 건 나만이 아닐 것이다.
“어찌 그리 확신해? 술이라는 게 마시다 보면 취할 수도 있는 것인데.”
“알아. 그러니 조절을 하는 거지.”
“내 앞에선 그런 거 안 해도 돼. 네가 취해도 내가 잘 챙겨 줄 테니까.”
물론 거짓말이었다.
담덕이 내게 술에 취한 모습을 보이는 날이면 그 모습을 하나부터 열까지 세세하게 기록에 남겨 여태껏 나를 놀려 댄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할 생각이었다.
그러면 역사서에 광개토 대왕님의 술버릇이 아주 선명히 남게 되겠지.
죽고 나서도 술버릇이 역사에 길이길이 새겨진다니. 이보다 더한 놀림이 어디 있을까.
복수 아닌 복수를 꿈꾸고 있는 나를 보며 담덕이 택도 없다는 듯 비죽 웃었다.
“내가 그 말을 믿겠어? 무슨 속셈인지 빤히 보이니까 상상은 거기까지만 하지?”
“하지만 나도 보고 싶은데. 담덕이 흐트러진 모습.”
이건 제법 진심이었다. 늘 반듯한 태왕 폐하의 모습만 보이는 담덕이 제대로 풀어지는 모습을 한 번쯤은 보고 싶었다.
나만 술에 취해 완전히 풀어진 모습을 보여 준 게 억울하기도 하고 말이야.
“이 아가씨가 무서운 줄도 모르고 그런 소리를 잘도 하네.”
담덕이 빈 술병을 내게 건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대로 방에 들어가서 자. 내일 사냥제는 이른 새벽부터 시작하니, 일찍 눈을 붙이는 게 좋을 거야.”
* * *
사냥제는 이른 새벽부터 시작해 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하는 시간까지 계속된다.
그 안에 가장 많은 사냥감을 잡아 제단에 바친 사람이 사냥제의 우승자가 되어 태왕에게 소원을 하나 청할 수 있었다.
비록 실력은 모자라지만, 나 역시 활을 들고 당당히 사냥제에 참가했다.
“절노부의 명예를 걸고 꼭 한 마리라도 잡아 오겠어요.”
전의를 불태우는 나를 보며 하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것 참 현실적인 목표로구나.”
“제가 주제 파악은 참 잘하거든요.”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손에 든 활을 내려다보았다.
움직이지 않는 과녁을 맞히는 건 이제 많이 익숙해졌지만, 움직이는 동물을 맞히는 건 무리였다.
“그래. 자신의 실력을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지. 너무 사나운 짐승은 노리지 말고 토끼처럼 작고 순한 짐승만 노리거라. 괜히 사나운 짐승을 어설프게 건드렸다가 위험해질 수 있으니 말이다.”
나는 하의 조언에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설프게 건드렸다가 낭패를 본다는 건 이미 값비싼 수업료를 주고 배웠다. 담덕을 향해 달려들려는 늑대에게 활을 쏘았다가 거의 죽을 뻔하지 않았던가.
내가 조언을 진지하게 듣는 것같이 보였는지 하의 잔소리가 점점 길어졌다.
제단에서 너무 먼 곳까지는 가지 마라, 화살이 반쯤 떨어지면 다시 보충하러 돌아와라, 사나운 짐승을 만나면 소리를 질러 자신을 불러라…….
“하 오라버니. 누가 보면 오라버니께서 제 아버지인 줄 알겠어요.”
나는 도무지 끝날 줄 모르는 하의 잔소리를 겨우 끊어 내고는, 그의 잔소리가 다시 시작되기 전에 재빨리 주변을 물색했다.
하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서라면 그가 쉽게 다가올 수 없는 사람의 옆으로 가야 했다.
내 인맥 안에서 그런 사람은 해운 하나뿐이었다. 나는 재빨리 해운의 옆에 붙어 섰다.
내 예상대로 내가 운의 옆에 서자마자 하가 입을 꾹 다물고 딴청을 피우기 시작했다.
소노부 해씨의 장남 앞에서 유치하게 투닥대는 모습은 보여 주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나는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 하의 잔소리를 퇴치해 준 운을 바라보았다.
“그쪽이 이리 쓰이네요. 하 오라버니의 잔소리에서 겨우 벗어났습니다.”
“상대를 이용했다는 걸 너무 자랑스럽게 공개하는 거 아냐?”
“이상한 거짓말을 하는 것보다는 솔직하게 말해 주는 것이 낫지 않습니까? 그게 억울하시면 그쪽도 절 한번 이용하시든가요.”
“너를 이용해서 뭐에 써? 특히 오늘 같은 날에.”
운이 미심쩍은 눈으로 내 손에 들린 활을 바라보았다. 단지 손에 들고만 있을 뿐인데도 어설픈 실력이 티가 나는 모양이었다.
“한동안 특훈을 했으니 웬만한 것은 모두 맞힐 수 있을 겁니다.”
“야생에서 사는 짐승을 잡을 때에는 웬만한 실력으로는 곤란하다. 너도 알지 않느냐?”
“……너무 사실을 말하지 마십시오. 시작도 하기 전부터 제 의욕을 모두 꺾을 생각이십니까?”
나는 불만스럽게 입을 비죽이며 다시 한번 속으로 다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한 마리는 꼭 잡는다!
마음속으로 굳은 다짐을 하는 것과 동시에 사냥제의 시작을 알리는 뿔 나팔 소리가 들려왔다.
* * *
시작과 동시에 사람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제한된 시간 안에 많은 짐승을 잡는 사람이 우승하는 방식이다 보니 다른 사람과 겹치지 않는 곳으로 가 근처의 사냥감을 독식하는 것이 우승에 유리했다.
하지만 나의 목적은 우승자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한 마리만 잡으면 목표를 달성할 수 있으니, 사냥감을 잘 찾을 것 같은 사람을 따라가는 편이 좋았다.
나는 고민할 것도 없이 운의 뒤를 따랐다. 어차피 바로 옆에 서 있기도 했고, 그라면 내가 뒤따라도 크게 눈치를 주지 않을 것 같았다.
예상대로 운은 뒤따르는 나를 보고서도 별말이 없었다.
“우승을 노리는 게 아닙니까?”
“이왕 참가했으니 우승을 하면 좋겠지.”
“그런데 어찌 제가 그냥 따라오게 두세요?”
내 질문에 운이 몰라서 묻느냐는 듯 코웃음을 쳤다.
“내가 작정하고 노리는 사냥감을, 네가 뺏어 갈 수 있을 것 같으냐?”
“……불가능하겠죠.”
“그러니 그냥 두는 것이다. 어디 할 수 있으면 재주를 부려 내 사냥감을 빼앗아 보든지.”
운은 그렇게 말하고는 산길에 난 짐승들의 발자국과 배설물이 가리키는 길을 따라 사냥감을 찾기 시작했다.
그의 감은 상당히 정확했다. 산길에 남은 흔적을 보고 ‘근처에 멧돼지가 있네’ 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정말 멧돼지가 나타났다.
잡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활을 쏘았다 하면 백발백중 급소에 적중해 한 방에 산짐승들이 죽어 나갔다.
“이리 사냥을 잘했습니까?”
“제신이에 비하면 실력이 못한 편이야. 네 오라비가 왔다면 다른 사람들은 감히 우승은 생각도 하지 못했을 거다. 당연히 그 녀석이 우승을 차지할 테니까. 제신이가 네게는 요령을 가르쳐 주지 않았어?”
그럴 리가 없었다. 제신은 어렸을 때부터 누구보다 열심히 내게 사냥을 가르쳤으나, 지지부진한 내 궁술 실력처럼 사냥 역시 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사람은 잘하는 것이 다들 다르니까요.”
괜히 찔려 변명부터 내뱉었더니 운이 알 만하다는 듯 씨익 웃었다.
“그런 말은 보통 상대가 위로해 주겠다고 하는 말 아닌가? 그런 말을 스스로…….”
운이 말을 하다 말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의 시선이 바닥에 난 동물의 발자국을 심각하게 살피고 있었다.
“……무슨 동물의 발자국인데 이리 커요?”
잘 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보통 큰 발자국이 아니었다. 본능적으로 긴장해 어깨가 굳어졌다.
“아무래도 호랑이 발자국 같은데.”
“호랑이라고요!”
운은 차분하게 말했지만 나는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그 와중에도 목소리 낮추는 것은 잊지 않았다.
아직 호랑이가 근처에 있다면 소리를 듣고 우리를 공격할지도 모르니까.
긴장한 내 모습에 운이 설명을 조금 더 덧붙였다.
“생긴 것이 얼마 되지 않은 발자국이야. 아직 근처에 호랑이가 있을 가능성이 높으니 조심해서 움직여야겠다.”
운이 답지 않게 진중한 말투로 내게 조언했다.
늘 여유로운 말투로 사람을 놀리던 운이 진지해지자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느껴졌다.
호랑이가 근처에 있다면 아주 위험한 상황이었다. 검을 잘 다루는 용사들도 서넛이 붙어야 겨우 때려잡는다는 호랑이를 나와 운 둘만 있을 때 마주친다면…….
나는 소리 내어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정말 호랑이가 나타날까 싶은 생각이었지만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발자국은 저쪽으로 나 있으니 그 반대 방향으로 돌아서…….”
발자국으로 호랑이가 향한 곳을 가늠한 운이 손가락으로 서쪽을 가리켰다.
나의 시선이 자연스레 운의 손끝을 따라 움직였다. 그렇게 움직인 시선이 한 지점에 우뚝 멈추었을 때, 나는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저기…… 지금…… 제가 보고 있는 것이…….”
“호랑이네.”
더듬거리며 현실을 부정하려는 내 말을 운이 한마디로 정리했다.
우리의 눈앞에 커다란 호랑이가 있었다.
“호랑이…… 호랑이가 왜 여기 있어요?”
내가 당황해서 묻자 운도 상황을 모르겠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사냥제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모두 유력 귀족가의 자제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을 위험한 곳에 몰아넣을 수는 없으니 사냥제가 열리는 사냥터는 사전에 병사들의 철저한 점검을 거치게 되어 있었다.
점검 과정에서 너무 위험한 동물이 있으면 쫓아내거나 죽여 안전을 확보하는데, 당연하게도 호랑이는 경계 대상 1순위였다.
특히 이번 사냥제는 태왕인 담덕이 직접 참관하는 행사였다. 다른 사냥제보다 점검을 철저하게 했을 것이 다.
“원래 이런 애들은 없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내가 운의 팔을 붙잡으며 속삭이는 동안 호랑이가 느린 걸음으로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우리를 주시하는 호랑이의 형형한 눈빛 때문일까.
그저 여유롭게 걸음을 옮기고 있을 뿐인데도 온몸에서 위협적인 기운이 느껴졌다.
“우선 뒤로 물러나.”
운이 나를 자신의 뒤로 보내며 검을 빼 들었다. 호랑이를 바라보며 대치하고 있는 모습에 긴장감이 가득했다.
“싸우려고요?”
내가 놀라서 펄쩍 뛰었다. 운은 여전히 호랑이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고개를 저었다.
“싸워서는 승산이 없어.”
“그럼 역시 도망쳐야 하는 거죠? 하지만…….”
나는 호랑이를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도망치는 속도보다 호랑이가 우리를 따라잡는 속도가 더 빠를 것이 분명했다.
운은 내가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한 이야기가 무엇인지 금세 알아챘다.
“그러니까 방법은 하나야.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리고 도망간다.”
운이 검을 고쳐 쥐며 긴장된 숨을 들이마셨다.
“내가 시선을 끌 테니 넌 그사이에 도망가.”
“예?”
“한 사람에게 집중하면 다른 쪽은 신경 쓰지 않을 거다.”
시선을 끈다는 말로 순화했지만, 결국 내가 도망갈 시간을 벌기 위해 호랑이와 싸우겠다는 뜻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얼굴이 단번에 구겨졌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시선을 끌면 호랑이가 금방 달려들 텐데 혼자 뭘 어쩌려고요? 싸워서는 승산이 없다면서요? 싸울 생각이면 같이 해야죠.”
“어차피 넌 크게 도움이 안 돼. 차라리 내가 싸우고 있을 동안 다른 사람을 찾아서 도움을 청하는 것이 더 낫다.”
크게 도움이 안 된다는 말에 할 말이 없었다. 검은 어설프게 쥐는 것이 전부이고, 그나마 활을 다룰 줄 알지만 그것도 뛰어난 편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운의 말에 따라 그를 두고 도망칠 수도 없었다.
“제가 바보인 줄 아십니까? 다들 뿔뿔이 흩어져서 가까운 거리에 도울 만한 사람은 없습니다.”
나는 활시위에 화살을 걸며 호랑이를 주시했다.
“싸울 생각이라면 저도 같이 있을 겁니다. 손이 하나라도 더 있어야 이길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높아지죠.”
“도망가라 했어.”
“저도 싫다고 했습니다.”
“넌 무섭지도 않으냐?”
“안 무서우면 제 손이 이렇게 떨리겠어요?”
화살을 잡은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의식하지 않으려고 해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 말에 내 손을 힐끗 쳐다본 운이 다시 호랑이를 응시하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 도망가라고.”
“제가 도망가면 그쪽은요?”
“둘 다 위험해지는 것보다 한 사람이라도 안전한 게 낫잖아.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도망가.”
“알아서 하긴 뭘 알아서 해요?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소리 계속할 시간에 어떻게 하면 저놈을 잡을 수 있을지나 고민하는 게 어때요?”
자신을 이기겠다는 내 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호랑이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목 아래에서 깊게 울리는 그 소리에 그렇지 않아도 굳은 어깨에 더 힘이 들어갔다.
나는 화살을 쥔 손에 힘을 주며 몸과 함께 굳어 버린 머리를 굴리려고 애썼다. 호랑이에게 뛰어난 신체적 능력이 있다면, 인간에게는 그걸 이겨 낼 머리가 있다.
그러니 고민하면 분명 답이 나올 거야.
하지만 답을 쉽게 알아낼 수 있다면 호환(虎患)을 당하는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먼저 공격하는 게 좋을까요?”
내 질문에 운이 한숨을 내쉬며 작게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을 해도 내가 자신을 혼자 두고 가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깨달았는지 더 이상 도망가라는 말은 없었다.
“직접 공격하는 건 좋지 않아. 우선 천천히 뒷걸음질을 치다가 어느 정도 거리가 벌어졌다 싶으면 화살을 저쪽으로 날려.”
그가 턱 끝으로 호랑이의 옆쪽을 가리켰다.
“호랑이가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우린 도망친다.”
“……도망칠 수 있어요?”
“그럴 수 있기를 바라야지.”
그렇게 말한 운이 천천히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나도 그를 따라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타고 온 말은 호랑이가 나타난 방향에 있었으므로 도망 역시 두 다리에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호랑이도 함께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어 거리가 멀어지지 않았다.
“조금 더 빠르게 뒤로 움직일게.”
운이 작게 속삭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금 빨라진 그의 걸음에 맞춰 발을 재게 놀렸다.
그러자 조금씩이지만 호랑이와의 거리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이대로 조금만 더 멀어지면 무사히 도망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안일한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무엇인가 발에 밟혔다. 마른 나뭇가지였다.
내 무게를 못 이긴 나뭇가지가 뚝하는 소리를 내며 부러졌다. 놀란 내가 걸음을 멈추는 것과 동시에 호랑이의 눈빛이 변했다.
“지금, 화살!”
운의 외침에 나는 반사적으로 화살을 날렸다.
호랑이의 머리가 제 옆을 스쳐 가는 화살을 따라 움직이는 것을 보며 운이 내 손목을 잡아끌었다.
그때부터 우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음박질치기 시작했다.
호랑이가 따라오는지 뒤를 돌아볼 여유도 없었다. 그저 우리는 앞을 향해 달리고 또 달렸다.
주변의 풍경이 빠르게 지나갔다. 나뭇가지에 몸이며 얼굴이 쓸려 잔상처가 났지만 호랑이로부터 도망칠 수만 있다면 이런 상처쯤이야 몇 개가 나도 상관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을 때 운이 정신없이 다리를 움직이는 나를 아래로 끌어당겼다.
몸이 그대로 무너져 땅에 엉덩이가 바닥에 닿았다. 반사적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니 위로는 조금 전까지 죽어라 달리던 길이, 양옆으로는 굵은 나무뿌리가 보였다.
나는 다시 도망치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제대로 자리에서 일어서기도 전에 옆에 있던 운의 손이 내 어깨를 눌렀다.
“왜 그러는…….”
영문을 몰라 운을 보니 그가 한 손으로 내 입을 틀어막으며 다른 손으로는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가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이자 운이 내 입을 틀어막고 있던 손을 뗐다.
그의 손이 떨어지자마자 머리 위에서 묵직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호랑이의 그르릉거림이 들려왔다.
덕분에 나는 우리가 호랑이에게 따라잡혔다는 것을 깨달았다. 손도 못 쓰고 공격당할 수는 없으니 최후의 수단으로 길 아래에 몸을 숨긴 것이다.
여기에 있는 걸 들키면 끝이야.
나는 숨을 죽이고 머리 위의 기척에 온 신경을 기울였다. 호랑이의 기척이 점점 우리 쪽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대로 호랑이가 우릴 알아채지 못하고 지나가는 걸 기다려야 하나?
그런 불확실함에 기댈 수는 없었다.
나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활과 화살. 그리고 가방에는 작은 수통과 사냥제에 나서며 혹시 몰라 준비해 온 약들이 몇 가지 있었다.
지혈에 쓰는 황단산, 예리한 것에 당한 상처에 쓰는 일념금, 그리고 상처가 깊을 때 마취를 위해 쓰는 초오산…….
“초오산?”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운이 놀라서 내 입을 틀어막았다.
동시에 머리 위에서 여유롭게 움직이던 호랑이의 발소리가 뚝 그쳤다. 호랑이가 우리의 위치를 알아차린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내 입을 막고 있는 운의 손을 치우고 가방에서 수통과 초오산이 든 병을 꺼내 들었다. 초오산 전부를 수통에 털어 넣고, 초오산이 섞인 물로 내 화살과 운의 검을 적셨다.
“뭐 하느냐? 지금 이럴 때가 아니야.”
운이 초조하게 속삭이며 내 팔을 잡아끌었다. 다시 도망을 칠 생각인 것 같았다.
하지만 이렇게 거리가 가까워진 이상 도망은 무리였다. 나는 운의 손을 뿌리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몸을 일으키자마자 우리가 숨어 있는 곳을 응시하고 있던 호랑이와 눈이 마주쳤다. 호랑이는 눈을 빛내며 망설임 없이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나는 재빨리 활시위에 화살을 걸어 호랑이를 향해 날렸다. 호랑이와 눈을 마주하고 있으니 심장이 두근거려 터질 것만 같았다.
빠르게 날아간 화살은 호랑이의 몸통 곳곳에 꽂혔다. 치명적인 부위에는 맞지 않았지만, 화살이 꽂힐 때마다 호랑이가 고통스러운 소리를 내며 몸을 뒤틀었다.
나는 멈추지 않고 계속 화살을 쏘았다. 하지만 호랑이도 마찬가지였다.
상처를 입은 호랑이는 분노에 들끓어 나를 향해 몸을 날렸다. 공중으로 붕 떠오른 몸이 순식간에 나를 덮쳤다.
“연우희!”
운의 경악에 찬 목소리와 함께 화살을 쏘려던 몸이 호랑이와 함께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등이 아팠다. 하지만 고통에 신경 쓸 새가 없었다. 호랑이의 머리가 바로 코앞에 있었던 것이다.
호랑이의 입에서 쏟아져 나온 뜨거운 입김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화살을 쥐자마자 호랑이가 입을 쩍 벌리며 큰 소리로 포효했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손에 쥔 화살을 호랑이의 혓바닥에 찔러 넣었다. 동시에 운이 호랑이의 등에 검을 찔러 넣었다.
날카로운 고통에 호랑이가 난동을 부리며 나를 쳐 냈다. 호랑이의 커다란 발에 맞은 몸이 힘없이 날아갔다.
“윽!”
종잇장처럼 날아간 몸은 그대로 나무에 부딪혔다. 등에 엄청난 충격이 전해지며 숨이 턱 막혔다.
호랑이에게 맞은 팔도 상태가 좋지 않았다. 날카로운 발톱에 제대로 긁힌 것인지 팔 전체가 화끈거리며 뜨끈한 피가 쏟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연우희! 너 제정신이야?”
어느새 내 곁으로 다가온 운이 내 팔을 꽉 눌러 지혈하며 무서운 목소리로 외쳤다.
“후, 그래도…… 호랑이를…… 잡았잖아요.”
나는 몸을 일으켜 나무에 기대며 운의 등 뒤를 가리켰다. 그제야 자신이 호랑이를 두고 등을 보였다는 사실을 깨달은 운이 서둘러 뒤를 바라보았다.
“호랑이가…….”
운이 말을 잇지 못하고 멍하니 제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았다. 온몸에 화살과 검이 꽂힌 호랑이가 비틀거리더니 바닥에 쿵 하고 쓰러진 것이다.
“이 정도 상처로 죽을 리가 없는데…….”
운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화살로 입힌 상처야 자잘했고, 등에 꽂은 검도 급소는 찌르지 못했다. 오히려 상처 입은 호랑이가 더 날뛰어야 할 상황이었다.
“죽은 게 아니에요.”
차분한 설명에 운이 나를 바라보았다.
“마취가 된 겁니다. 제 화살과 그쪽의 검에 초오산을 발랐거든요.”
“마취?”
“예. 한동안 깨어나지 못할 거예요. 장정 열 명은 족히 마취할 양을 전부 털어 넣었으니까요.”
멍한 얼굴로 호랑이와 나를 번갈아 보던 운의 입에서 결국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허. 겨우 그걸 믿고 호랑이에게 덤볐다고?”
“겨우라뇨. 효과가 확실하다고요. 보세요. 호랑이가 완전히 늘어졌잖아요.”
“그게 제대로 통하지 않았다면 넌 이미 호랑이의 먹이가 되었을 거다!”
“그렇게 되지 않았으니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운이 내 말을 끊으며 버럭 소리쳤다.
“그러지 않았으니 되었다고? 엉망인 네 꼴을 봐라! 겁이 없는 녀석인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
운이 미간을 찌푸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눈을 굴려 내 꼴을 보니 확실히 엉망이기는 했다. 바닥을 구르는 바람에 온몸이 흙투성이에다 팔은 쏟아진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 꼴을 보면 놀라서 달려들 사람이 도대체 몇 명인지.”
담덕은 물론이고 사촌인 하까지 놀라서 나를 다그치겠지.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늘어진 호랑이를 가리켰다.
“……호랑이를 잡았는데 그래도 혼이 날까요? 잘했다고 칭찬을 받을지도 몰라요.”
“잘도 그러겠구나.”
내 말에 운이 택도 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제 옷을 찢어 내 팔을 감았다.
* * *
“호랑이를…… 잡았다고?”
커다란 호랑이를 앞에 두고 사람들은 모두 말을 잃었다. 사냥터에 호랑이가 나타난 것도 놀랍지만, 그걸 잡아 온 사람이 있다는 것이 더 놀라운 듯했다.
“운이 네가?”
소노부의 고추가가 운에게 물었다. 그렇게 묻는 고추가의 얼굴에 묘한 뿌듯함이 담겨 있었다.
혼자서도 호랑이를 때려잡는 아들이라니. 당연히 뿌듯하긴 할 것이다. 하지만 그의 기대와 달리 운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뇨. 호랑이를 잡은 건 제가 아니라 이쪽입니다.”
운의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그 옆에 선 내게 꽂혀 들었다. 호랑이를 볼 때부터 놀란 얼굴을 하고 있던 사람들은 내 얼굴을 보며 숫제 경악에 찼다.
“……연씨의 딸이 호랑이를 잡았다고?”
소노부의 고추가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나를 훑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누구보다도 나를 잘 아는 절노부 사람들이 가장 놀란 듯했다.
사냥제 참가 명단에 이름을 올리기는 하였으나 평양성 원행에 동행하기 위한 형식적 절차였을 뿐이다. 그런 내가 대단한 사냥 실력을 보여 주리라 기대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떡하니 호랑이를 잡아 왔다.
나는 얼빠진 사람들의 얼굴을 보며 다친 팔이 아픈 것도 잊고 활짝 웃었다. 사람들의 기대를 뒤엎는 건 언제나 짜릿한 일이었다.
“정말 우희 네가 잡은 것이냐?”
하가 얼떨떨한 얼굴로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랑스럽게 호랑이를 가리켰다.
“말했잖습니까. 하나는 꼭 잡아 온다고.”
“그래. 그리 말했지. 작은 토끼나 잡아 오면 다행이다 싶었더니 호랑이를…… 게다가 네 꼴이 이게 뭐야.”
멍하니 호랑이를 보던 하가 곧 내 상처를 살피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리 다쳐 올 바에야 아무것도 안 잡아 오는 것이 더 낫다. 어찌 제 몸 챙길 줄을 몰라? 아프지 않으냐?”
“조금 아프긴 하지만…… 그래도 함께 있던 운 도련님이 지혈도 빨리 해 주셨고, 상처는 의원에게 보이면 큰 문제가 없을 정도일 겁니다.”
내 말에 하의 시선이 운을 향했다. 하는 잠시 어색한 얼굴로 운을 보다 그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제 사촌 누이를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아닙니다. 덕분에 호랑이를 만나고도 무사했으니 오히려 제가 감사할 일이죠.”
두 사람이 어색하게 인사하는 사이 주변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고개를 돌려 소란의 중심을 바라보니 담덕이 태림과 함께 다급한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사람들은 빠르게 옆으로 비켜서 담덕에게 길을 터 주었다. 덕분에 그는 순식간에 나와 호랑이 앞에 설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얼빠진 담덕의 시선이 호랑이와 나를 차례로 훑었다. 그의 눈동자가 나를 향하는 순간 나는 차마 그 두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 옆으로 슬쩍 시선을 돌렸다.
“이게 무슨…….”
담덕이 말을 잇지 못하고 머리를 짚었다. 그로서도 눈앞에 보이는 이 풍경을 쉽게 믿기 힘든 모양이었다.
“호랑이를 잡아? 네가?”
“……예.”
주변을 둘러싼 사람들을 보며 예의 바르게 대답했더니 담덕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따라와라.”
나는 주뼛대며 돌아서는 담덕의 뒤를 따랐다. 함께 고생한 운을 두고 가도 될지 몰라 슬쩍 그를 보았더니, 그가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나는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담덕을 따라나섰다.
담덕과 함께 도착한 곳은 조금 전까지 그가 머무르고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작은 막사였다.
“태림. 태의를 불러와라.”
“예.”
담덕이 나와 함께 뒤따르던 태림에게 명령하고 막사 안으로 들어섰다. 그 뒤를 따라 안으로 걸음을 옮기니 참가자들이 사냥을 하는 그 잠깐 사이도 쉬지 못하고 일을 했는지 곳곳에 문서들이 널려 있었다.
“여기까지 와서도 일이야?”
문서 하나를 집어 들며 담덕을 힐책했더니 여태까지 말이 없던 그가 어이가 없다는 듯 장목했다.
“지금 그런 말을 할 때야? 태림을 함께 보냈어야 했는데.”
“사냥제에 참여하는데 어찌 태림과 함께 다녀? 태림이 네 호위인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보기에 좋지 않아.”
“뒤에서 수군거리고 말겠지. 그게 뭐 그리 대수라고.”
“귀족들에게 약점이 될 만한 것을 만들고 싶지 않다고 했잖아. 그런 사소한 일이 커져서 약점이 되는 거랍니다, 폐하.”
“말이나 못하면. 이만 됐으니 상처나 좀 보자. 어서 자리에 앉아 봐.”
담덕이 나를 의자에 앉히고 피로 범벅된 팔을 살피기 시작했다. 상처 부위는 운의 옷을 찢어 만든 천으로 단단히 묶여 있는 상태였다. 고급스러운 천의 재질을 확인한 담덕이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이건 누가 해 줬어?”
“그건 해운이 옷을 찢어서…… 그러고 보니 나 때문에 좋은 옷을 버렸네. 나중에 한 벌 사 줘야겠다.”
“아, 그와 함께 있었다고 했던가?”
“바로 내 옆에 있었는데. 못 보았어?”
“다른 사람을 볼 정신이 있었겠어?”
깊은 한숨을 내쉰 담덕이 조심스럽게 천을 풀었다. 압박되어 있던 곳에 다시 피가 통하면서 아릿한 고통이 느껴졌다.
“으.”
내 신음에 담덕의 손이 잠시 멈추었다.
“아파?”
“아파.”
“그러게 나서길 왜 나서? 도망이나 열심히 칠 것이지 뭘 믿고 호랑이를 잡겠다고…….”
“그래도 잡았잖아.”
“누가 너한테 호랑이 잡아 달랬어?”
“어쨌든 나도 사냥제 참가자야. 잘 잡아 왔다고 칭찬을 해 줘야지.”
어서 칭찬해 달라는 의미로 담덕 앞에 머리를 들이댔더니 그가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칭찬? 칭찬은 무슨.”
담덕의 손가락이 이마를 때렸다. 가볍게 툭 건드린 것 같았는데 머리가 띵하게 울렸다.
“환자를 때리기까지 하는 거야?”
이마를 문지르며 입을 비죽 내밀었더니 때마침 밖에서 태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태의를 데려왔습니다.”
“들여보내.”
담덕의 허락에 막사의 장막이 걷히고 태의가 안으로 들어섰다.
전쟁에 나설 때가 아니면 태의를 대동하지 않는 담덕이지만, 이번에는 사냥제가 열리니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일부러 태의를 데려왔다. 물론 그 태의의 치료를 내가 받게 되리란 것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미련하게도 호랑이와 맞서다 다쳤다는군. 상처를 살펴봐라.”
태의가 깊게 허리를 숙여 제대로 인사말을 꺼내기도 전에 담덕이 그를 재촉했다.
“예, 폐하.”
담덕의 독촉에 태의가 인사를 하다말고 허리를 펴 다급한 걸음으로 내 앞에 섰다. 피로 젖은 내 옷을 본 태의가 손에 든 나무 상자를 내려놓으며 허락을 구했다.
“아가씨. 먼저 상처 부위를 씻어 내 얼마나 다치셨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옷을 잘라 내야 하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치료를 하는데 당연한 절차였다. 나는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팔을 내밀었다. 아릿한 통증이 밀려왔지만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내가 하지.”
내가 내민 팔을 붙잡은 사람은 태의가 아닌 담덕이었다. 그는 품 안에서 단검을 꺼내더니 능숙하게 손을 놀려 상의의 팔 부분을 잘라 냈다.
옷이 잘려 나가자 태의가 곧장 물을 부어 상처 부위를 씻어 냈다. 팔이 훤하게 드러나니 다친 곳이 선명하게 보였다.
천으로 가려졌을 때에는 그다지 심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는데, 두 눈으로 확인하니 생각보다 상처가 깊었다.
상처가 깊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간사한 몸이 대놓고 고통을 호소했다. 곁에 고통을 돌봐 줄 사람도 있으니 아프다는 걸 참을 이유가 없었다. 순식간에 내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본 태의가 슬쩍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상처 부위를 씻어 내느라 자극이 가서 통증이 심하실 겁니다. 성으로 돌아가면 통증을 줄여 주는 약을 지어 드리겠습니다.”
아마 방풍(防風)이 들어간 약일 것이다. 방풍은 통증을 줄이고 파상풍에도 효과가 있기 때문에 지금 상황에 쓰기 좋은 약재였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태의가 조금 더 자세히 내 상처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런데 상처가 상당히 깊군요. 우선 지혈이 제대로 되어 다행입니다만…….”
물기를 닦아 낸 태의가 말끝을 흐렸다. 나와 담덕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것이다. 그는 나무 상자에서 꺼낸 하얀 가루를 상처 위에 뿌리며 설명을 덧붙였다.
“검에 베였다면 더 빨리 나았을 겁니다. 하지만 동물에게 당한 상처는 단면이 거칠어 아무래도 아무는 속도가 느리지요. 하여 흉터가 심하게 남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보겠지만…….”
뒤에 생략된 말이 무엇일지는 뻔했다. 그러기는 힘들다는 뜻이었다.
“괜찮아요. 다쳤을 때부터 흉터는 남겠다 생각했거든요.”
내 말에 태의의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그는 약을 꼼꼼하게 뿌린 뒤 깨끗한 천으로 내 상처를 감싸 치료를 마무리했다.
“상처 치료는 이것으로 되었습니다. 혹 불편한 것이 있으시면 언제든 저를 찾아 주십시오.”
그렇게 말한 태의가 인사하고 막사를 떠났다. 그가 떠난 후에도 한참이나 침묵을 지키던 담덕이 곧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너와 함께 있으면 어찌 마음 놓을 새가 없는 것 같다. 정말 흉터가 크게 남아도 괜찮은 거야?”
“흉터가 어때서? 호랑이를 잡고 얻은 상처이니 오히려 영광이지.”
무를 숭상하는 고구려에서는 흉터가 큰 흠이 아니었다. 특히 전쟁에 나서는 용사들은 흉터를 적과 당당히 맞서 싸운 용감함의 상징으로 여겼다.
물론 귀족가 아가씨들은 조금 사정이 다르지만…….
나는 담덕이 그 부분을 지적하기 전에 웃으며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의 옷소매를 조금 걷어 올리니 금세 크고 작은 흉터들이 보였다.
“네게도 흉터가 많잖아? 그에 비해 난 겨우 하나인걸. 게다가 팔에 난 흉터라면 평소에는 보이지도 않아. 전부 옷으로 가리니까.”
여름이면 반팔 옷을 입는 현대에서라면 팔의 흉터가 신경 쓰였겠지만, 이 시대에는 사시사철 소매가 긴 옷을 입어 몸을 가린다. 남자든 여자든 얼굴에 난 상처가 아니라면 다른 사람이 알아차리기 어려웠다.
담덕만 해도 그랬다. 전쟁터에서 얻은 흉터가 몸 곳곳에 있었지만, 평소에는 옷을 차려 입고 있어 누구도 흉터를 보지 못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귀족가 아가씨들은 작은 흉터에도 속상해 한다던데 넌 어찌 이리 태연해?”
“음…… 담덕, 귀족가 아가씨들이 작은 흉터에도 속상해하는 건 혹여나 혼인할 때 흠이 잡히지 않을까 걱정해서거든…….”
조심스럽게 흘러나온 내 말에 한바탕 잔소리를 쏟아 낼 기세이던 담덕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니까 이미 혼처가 정해진 내게 흉터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니야. 아, 네가 흉 있는 여인이 꺼려진다면 문제가 되겠다. 넌 내게 흉이 있다면 부인으로 맞아들이기 싫어?”
내 질문에 담덕이 할 말을 잃은 듯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다. 긴 침묵이 대신 전하는 답은 명확했다.
“괜찮다는 거지? 그러니 내가 흉터에 크게 상심하지 않아도 되는 거 맞지?”
“……상황을 이리 빠져나가기도 하는구나.”
담덕이 앓는 소리를 내며 머리를 짚었다. 나는 또다시 담덕의 말이 길어지기 전에 웃으며 그의 팔에 난 흉터를 매만지며 화제를 돌렸다.
“이 흉터는 어디에서 얻은 거야?”
“글쎄. 모든 흉터를 기억하지는 못해. 한 번 전투가 벌어지면 새로운 상처가 몇 개씩 생겨나니까.”
“이런 상처가 몇 개씩이나?”
대수롭지 않은 담덕의 말에 오히려 마음이 무거워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