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화유수 3권
14장. 호우(好雨) (2)
나는 다급하게 담덕의 몸 곳곳을 살폈다. 다행히 눈에 띄는 상처는 없었다.
“폐하.”
내가 걱정스럽게 담덕을 보는 사이 그의 뒤편에서 태림이 나타났다.
태림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뒤로 담덕의 집무실에 드나들며 안면을 익혔던 근위대 병사들이 따르고 있었다.
근위대까지 나설 정도라면 보통 일이 아니라는 소리인데.
상황을 묻는 눈으로 담덕을 보았지만 그는 여전히 굳은 얼굴로 침묵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부근을 샅샅이 뒤졌지만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사이 태림이 담덕의 곁에 다가와 고개를 숙이며 상황을 보고했다. 담덕은 여전히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입만 열어 태림에게 지시를 내렸다.
“궂은 날씨다. 정말 나쁜 마음을 먹고 여기까지 왔다면 멀리 가지 못했을 거야. 혹 수상한 자가 보이거든 모두 잡아들여라. 감히 그런 더러운 수작을 부린 자가 누구인지 얼굴을 꼭 봐야겠다.”
요란한 빗소리를 뚫고 나오는 목소리가 스산하게까지 느껴졌다. 그 외의 결과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한 단호한 지시였다.
“예, 폐하.”
한시가 급한 명에 근위대 병사들이 서둘러 흩어졌다.
하지만 태림은 차마 돌아서지 못하고 나와 담덕을 보고 있었다.
“폐하.”
태림이 조용히 담덕을 불렀다. 그제야 그의 시선이 내게서 떨어져 태림에게로 향했다. 눈빛을 받은 태림이 내 쪽을 슬쩍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비가 거셉니다. 정자에라도 들어가 계시죠. 그자는 저희가 꼭 찾아오겠습니다.”
태림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져 담덕이 쥐고 있는 검으로 향했다.
“주변이 안전한 것은 근위대 병사들이 모두 확인했으니, 검도 이만 거두시고요.”
“아.”
담덕은 그제야 자신이 검을 들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듯 짧은 침음을 흘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담덕이 검을 검집에 넣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러자 담덕이 멍하니 내 손에 끌려왔다.
정자로 담덕을 데려가며 태림을 바라보니 그가 ‘잘 부탁드립니다’라는 눈빛을 보낸 뒤 빗속으로 사라졌다.
“빗물을 닦으실 수건이라도 가져오겠습니다.”
내가 담덕을 이끌고 정자에 올라서자 도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멍한 담덕의 눈치를 살피며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 내고는, 내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정자를 벗어났다.
결국 정자에는 나와 담덕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무슨 일이야? 네가 이러니까 무섭잖아.”
나는 손으로 담덕의 얼굴에서 뚝뚝 떨어지는 빗물을 닦아 내며 그렇게 물었다. 그 질문에 담덕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다친 곳은?”
담덕이 이곳에 와 처음으로 내게 한 말이었다. 나는 어리둥절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친 곳이 있을 리 없잖아?”
“정말이야?”
“그렇다니까. 어디 한번 확인해 볼래?”
나는 담덕이 내 모습을 잘 볼 수 있도록 두 팔을 벌리고 제자리에서 빙글 돌았다. 정자에 앉아 얌전히 바둑만 두었으니 어느 곳 하나 상했을 리가 없었다.
멀쩡한 내 모습에 굳어 있던 담덕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담덕을 위아래로 훑었다.
“오히려 내가 묻고 싶어. 어디 다친 곳은 없어? 무슨 큰일이 생겼기에 근위대까지 데리고 여기 온 거야? 게다가 검까지…….”
내가 허리춤에 걸린 검을 보며 말을 삼키자 담덕이 이를 바드득 갈았다.
“어떤 정신 나간 자식이 이딴 걸 보냈어.”
담덕이 푹 젖은 품 안을 뒤져 무엇인가를 꺼내더니 더 이상 들고 있기도 싫다는 듯 바닥에 내던졌다.
바닥에 떨어진 것을 자세히 살피니 내가 자주 입는 하얀 저고리였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것과 모습이 많이 달랐다. 하얀 저고리는 곳곳이 붉게 젖어 예리한 것으로 난도질되어 있었다.
“세상에.”
나는 숨을 들이켜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저고리를 물들인 붉은 것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분명했다. 비릿한 피 냄새가 코끝을 건드리는 것만 같았다.
“누가 이런 짓을…….”
“네가 자주 입는 옷을 빼냈을 정도이니 너의 가까운 곳에 머무는 사람일 거야. 그런 이가 이딴 걸 보냈으니 내가 무슨 생각을 했겠어?”
“하지만 내 주변에 이런 짓을 할 사람은 없어.”
“너무 경계심이 없는 거 아냐?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 있다가도, 한순간에 등을 돌리는 것이 인간이야. 어찌 그렇게 확신해?”
“그건 알지만……. 정말 짐작 가는 사람이 없어. 난 곁에 사람을 많이 두는 편이 아니라 가까운 사람이라고 해 봐야 손에 꼽을 정도인걸. 전부 네가 아는 사람들일 거야.”
절노부 땅에서부터 나를 따라온 몸종 달래와 핏줄이 이어진 친척들을 제외하면 내 대부분의 인맥은 담덕과 연관되어 있었다. 당장 떠오르는 이름을 몇 외면 그중에 담덕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하면 시녀는?”
“청소나 빨래 같은 사소한 일을 해 주는 시녀들이 있긴 하지만 날 전담해서 돌보는 사람은 달래뿐이야.”
“……그 달래라는 아이는 믿을 만하고?”
담덕의 말에 나는 기분이 상해 미간을 찌푸렸다.
“날 걱정하는 마음은 알겠지만 달래까지 의심하는 건 실례야. 비록 몸종이긴 하나 그 아이 역시 우리 절노부 사람인걸.”
내 단호한 말에 담덕이 머리를 쓸어 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랬지. 상황이 이러하니 내가 너무 성급하게 말했다. 하지만 가장 가까운 사람마저 의심해야 한다는 생각은 변함없어.”
그러는 넌 나를 온전히 믿고 있잖아.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으나, 나는 굳이 그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때 정자 입구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커다란 삿갓을 쓴 도림이 품에 안고 있던 마른 천을 입구에 내려놓고 있었다.
고맙다는 의미로 웃으며 고개를 숙이자 도림이 마주 인사하고 다시 빗속으로 사라졌다. 일부러 자리를 피해 준 것 같았다.
도림이 두고 간 수건은 끝이 조금 젖었을 뿐 물기를 닦아 내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보송보송했다. 그가 쓰고 있던 커다란 삿갓이 비를 잘 막아 준 모양이었다.
나는 수건을 들고 다시 담덕 앞에 섰다. 물기를 닦아 주기 위해 수건을 펴 담덕의 머리 위에 얹자,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수건을 끌어 내렸다.
“나보다 네가 먼저야.”
담덕이 내게서 수건을 뺏어 가 내 얼굴과 몸의 물기를 닦아 내기 시작했다. 커다란 체격에 어울리지 않게 그의 손길은 조심스럽고 섬세했다.
담덕은 미간까지 찌푸린 채 물기를 닦아 내는 데 열심이었다. 내 몸에 있는 물기는 모두 없애 버리겠다는 듯 진지하게 자신의 일에 몰두하는 그를 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내가 부서지기라도 해? 왜 이리 조심스러워? 더 강하게 해도 되는데.”
“……잘 모르겠어. 얼마나 더 힘을 줘도 되는지.”
담덕이 곤란한 얼굴로 손을 멈추었다. 나는 그런 담덕이 이해되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몸을 닦을 때처럼 하면 되잖아. 뭐가 문제야?”
“그렇게 하면 안 될 것 같아. 넌 나랑 너무…… 다르잖아.”
“눈 두 개, 코 하나, 입 하나. 손가락은 열 개고 발가락도 그렇고. 완전히 똑같은데? 너와 나.”
“누가 그런 게 다르대?”
양손을 펼쳐 보이는 나를 보며 담덕이 미간을 찌푸렸다.
담덕은 수건을 내 머리 위에 얹어 두고 내 어깨로 손을 뻗었다. 그의 크고 단단한 손이 둥그런 어깨 끝을 붙잡았다.
“내 몸은 바위 같은데, 네 몸은 도자기 같아.”
모양을 가늠하려는 양 몇 번 어깨를 쓰다듬던 손이 서서히 팔을 타고 내려가 손목에서 멈추었다.
담덕과 나의 눈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부드럽고 연약해. 그래서 내가 잘못 힘을 주면 그대로 깨져 버릴 것 같아. 난 그게 무서워.”
순간 담덕의 눈에 불안이 스쳐 갔다.
나는 담덕이 무엇을 불안해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내가 담덕이 되지 않는 한 그 불안의 정체는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알 수 없는 것을 궁금해하는 대신 담덕의 불안을 지워 주고 싶었다.
“안 깨져. 시험해 볼래?”
“어떻게?”
“더 강하게 잡아 보면 되잖아.”
나는 두 팔을 활짝 벌리며 눈을 감았다.
“자, 시험해 봐. 내가 깨지나 안 깨지나. 장담하는데, 네가 아무리 강하게 잡아도 내가 깨질 일은 절대 없을걸!”
나의 장담에도 담덕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침묵 속에 쏟아지는 빗소리만 가득했다.
“담덕? 시험 안 해 볼 거야?”
눈을 감은 채로 고개를 모로 기울이니 바로 앞에서 한숨 섞인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정말 미치겠다, 너 때문에.”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내 몸이 커다란 몸에 파묻혔다. 담덕이 나를 껴안은 것이다.
“생각해 보니 네가 제대로 본 것 같아.”
“뭘?”
“바위와 도자기 말이야.”
나는 웃으며 담덕을 마주 안았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 바위는 흙이 돼. 도자기는 그 흙으로 빚어내는 거고. 그러니 우린 겉으로 보기엔 조금 다를지 몰라도, 본질적으로는 같은 사람인 거야. 그러니까 네가 불안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네가 강한 만큼 나도 강해, 담덕.”
“그 말이 그렇게도 풀린단 말이야?”
내 말에 담덕이 크게 웃었다.
* * *
성문사 주변을 샅샅이 뒤졌지만 수상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담덕은 포기하지 않고 저고리를 보낸 사람을 찾아내라는 명을 내렸으나 날씨가 도와주지 않았다.
갑자기 찾아온 비는 그칠 줄을 모르고 하루 종일 쏟아져 병사들의 이동을 어렵게 했다. 이 정도 비에 산에서 움직이는 것은 아무리 훈련된 병사들이라도 위험했다.
상황이 그렇게 되니 오늘 안으로 궁에 돌아가려던 계획도 무위로 돌아갔다. 우리는 초조하게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지 않고 하룻밤 사찰에서 신세를 지기로 결정했다.
사정을 설명했더니 순도 스님은 기쁜 마음으로 우리에게 방을 내주었다. 하지만 작은 사찰이라 내줄 수 있는 방이 두 개뿐이었다.
방 하나는 태림과 근위대 병사들이 차지하고, 다른 하나에 나와 담덕이 자리를 잡았다.
담덕은 근위대 병사들과 같은 방을 쓰겠다고 나섰지만, 이미 그들만으로도 방이 꽉 차 발 디딜 틈이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담덕에게 병사들을 불편하게 만들지 말고 나와 한방을 써야 한다며 그를 억지로 끌고 들어왔다.
담덕을 끌고 들어올 때만 해도 별다른 생각이 없었는데, 정작 둘만 남고 보니 분위기가 미묘했다.
산사의 밤이 지나치게 고요했던 탓일까.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울리는 통에 손짓 하나에도 신경이 쓰였다.
쏟아지는 빗소리마저 없었다면 우리 둘을 가득 채운 이 침묵을 견뎌 내기 무척이나 힘들었을 것이다.
다행히 비는 끊이지 않고 늦은 밤까지 이어졌다. 나는 화로 앞에 바짝 붙어 앉아 옷을 말리며 담덕을 바라보았다.
“춥지 않아? 좀 더 화로 가까이로 와.”
젖은 옷을 짜내긴 했지만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젖은 옷 때문에 체온이 떨어지고 있을 것이 분명한데도 담덕은 화로에서 멀찍이 떨어져 벽에 기대앉았을 뿐이었다.
“괜찮으니 난 신경 쓰지 마.”
담덕이 피곤하다는 듯 눈을 감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러고 보니 근래에 일이 많아 잠을 제대로 못 잔다 했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잠을 ‘안 자는’ 것이겠지만.
나는 두 무릎을 끌어안아 그 위에 턱을 괴고 눈을 감은 담덕의 얼굴을 살폈다.
늘 나를 빤히 쳐다보던 눈동자가 보이지 않으니 얼굴을 보기가 한결 편했다.
백제와의 전쟁이 끝난 후 겨우 원래대로 돌아왔다 싶었던 담덕의 얼굴이 다시 핼쑥해져 있었다.
워낙 체력이 좋은 사람이라 버티고 있으나 보통 사람이었다면 벌써 쓰러지고도 남았을 것이다.
담덕은 자신의 체력을 과신하는 면이 있었다.
물론 그의 체력이 객관적으로도 보통 이상인 것은 확실했지만, 아무리 그대로 한낱 인간일 뿐이었다. 인간의 몸은 무한대가 아니라 쉬지 않고 달리면 언젠가 지쳐 쓰러지게 되어 있었다.
체력 보충에 좋은 차를 매일 올리고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휴식이 필요했다.
장마가 끝나면 전쟁이 다시 벌어질지도 모른다는데, 그때도 담덕은 친정(親征)을 고집할까?
이 상태에서 전쟁까지 나간다면 정말로 몸이 버티지 못할 것이다.
나는 어떻게 하면 저 일 중독자를 쉬게 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말로 설득을 하거나 어설픈 협박을 하는 건 더 이상 통하지 않으니 다른 방법을 생각해 내야만 했다.
“뭘 그리 빤히 봐?”
한참 담덕의 얼굴을 보고 있었더니 그가 입을 열었다. 여전히 눈은 감은 상태였다.
“어찌 알았어? 내가 보고 있는 거.”
“그리 빤히 보는데 당연히 시선이 느껴지지. 얼마나 열렬히 보았으면 얼굴에 구멍이 나는 줄 알았다.”
웃음 섞인 타박에 나는 민망해져 담덕에게서 눈을 돌렸다.
“얼굴 좀 봤다고 너무 면박을 주는 거 아니야? 너도 매번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
“……내가 널 그리 빤히 봐?”
“그걸 몰랐어? 나야말로 얼굴에 구멍이 나는 줄 알았다고.”
“흐음……. 내가 그랬구나.”
담덕이 묘한 웃음을 흘리며 입을 다물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느낀 건데, 담덕 넌 사람을 너무 빤히 쳐다봐. 꼭 마음속까지 전부 읽을 것처럼…….”
때문에 나는 종종 담덕의 눈을 보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감출 것이 없다면 속을 보여도 상관없을 터인데, 어째서 담덕의 눈을 보는 것이 부담스러울 때가 있을까?
의문을 해결해 줄 사람은 없었다.
나는 다시 담덕의 얼굴을 보았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얼마 전 다로가 내게 속삭였던 말이 떠올랐다.
-폐하의 외모가 출중하지 않으십니까. 잘난 얼굴에 몸마저 사내다우시니 유녀들 사이에서 아주 인기가 좋으십니다.
그 이후 이어지던 다로의 짓궂은 미소까지 떠오르자 묘하게 기분이 가라앉았다.
“담덕. 네가 유녀들 사이에서 그리도 인기가 좋다며?”
나도 모르게 흘러나온 목소리는 스스로 듣기에도 퉁명스러웠다.
나는 화들짝 놀라 입을 다물었으나 이미 흘러나온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나는 긴장해서 담덕의 입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담덕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담덕?”
나는 조심스럽게 담덕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내가 바로 앞까지 다가갔는데도 그는 여전히 움직임이 없었다.
“……잠들었나?”
손가락으로 담덕의 이마를 살짝 찌르니 그가 짜증스럽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잠들었구나.”
나는 맥이 빠져 손을 담덕의 옆에 주저앉았다.
하긴. 피곤해서 잠이 들 법도 하지. 그래. 그럴 법도 해.
그런데 왜 이렇게 짜증이 나는지.
나는 입을 비죽이며 손가락으로 담덕의 얼굴을 건드렸다.
“나와 단둘이 있으니 마음이 아주 편하지? 잠도 잘 오고?”
이마를 쿡 찌르고 미간을 툭 건드렸다. 그런데도 얼마나 깊게 잠든 것인지 담덕은 미동도 없었다.
밑바닥을 긁던 짜증이 점점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오래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던 담덕이 이처럼 깊게 잠든 것은 분명 환영할 일인데, 이상하게 그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미간을 두드리던 손이 이젠 코로 내려왔다. 그래도 담덕은 여전히 눈을 굳게 감은 채 규칙적으로 숨을 쉬고 있었다.
손이 조금 더 아래로 내려갔다. 이번에는 입술이었다. 손가락이 입술을 가볍게 두어 번 두드리는 순간.
“악!”
담덕이 내 양손을 잡아채 나를 벽에 밀어붙였다.
나를 빤히 바라보는 눈빛은 잠들어 있던 사람이라고 믿기 힘들 만큼 선명했다.
나는 그 눈빛이 부담스러워 또다시 담덕의 눈을 피하고 말았다. 옆으로 고개를 돌린 내게 담덕이 작게 속삭였다.
“하나도 안 편해. 일부러 잠든 척할 만큼.”
그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잠든 게 아니었다고?
고개를 돌려 다시 담덕을 보니 그가 여전히 흔들림 없는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럼 여태까지 했던 것을 전부…….
순식간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내가 이러는 게 싫은 거 아니었어? 그래서 참아 주고 있잖아. 그런데 왜 날 건드려? 내가 유녀들에게 인기가 있는지는 왜 묻는데? 인기가 있으면 뭐 어쩌려고?”
내가 한 번도 듣지 못한 낮은 목소리였다.
무어라고 대답을 하고 싶었지만, 담덕이 묻는 말 중에 시원하게 답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나도 내가 왜 그러는지 모르니까!
답답해 죽을 것 같은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담덕의 눈빛이 더욱 사나워졌다.
“말했지. 난 이제 열두 살 꼬마가 아니라, 하고 싶은 게 많은 어엿한 사내라고.”
담덕이 고개를 숙여 내게 얼굴을 바짝 붙였다. 가까워진 얼굴에 숨을 들이마시니 그가 비죽 웃음을 흘렸다.
“이런 게 싫다면 여지를 주지 마. 내가 네 뜻을 오해하지 않게. 알겠어?”
이렇게 화난 담덕은 처음이었다. 얼마 전 분위기가 묘했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어떻게 말해야 담덕의 화를 풀어 줄 수 있을까 고민하며 눈을 굴렸다.
“여지를 주려는 게 아니야. 그냥 난…….”
무엇인가를 위해서 한 행동이 아니었다.
나는 그저…….
“네가 유녀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다니 신경이 쓰였어.”
담덕에게는 거짓을 말할 수 없었다. 결국 나는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기로 했다.
이런 말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담덕의 두 눈에서 맥없이 힘이 빠졌다.
“……뭐?”
“네가 유녀들과, 다로와 밤을 보냈을까 봐 신경이 쓰였다고. 그걸로는 안 돼?”
내 질문에 담덕은 답이 없었다. 대신 그는 매서웠던 기세를 내려놓고 멍하니 나를 보고 있었다.
“네가 내게 이러는 게 싫은지, 좋은지…… 그런 건 아직 모르겠어. 그래도 네가 다른 사람에게도 이러는 건 싫어.”
“잠깐만, 그건 또 무슨…….”
“날 두고 마음 편하게 잠들어 버리는 것도 싫고…… 아무튼 전부 싫어. 너무 유치한 것 같아서 말 못 했어. 이유는 모르겠고, 그런데 싫기는 싫고…… 그래서 말을 하기가…….”
날것의 마음은 무어라 꾸며 내기 힘들었다.
하지만 이게 진심이었다. 내 진심이 이처럼 보잘것없다면 그건 그것대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리저리 움직이던 눈동자가 담덕의 두 눈을 향했다.
“이걸로는 안 되는 거야? 이건 이유가 안 돼?”
두 눈을 빤히 보며 묻는 내 질문에 담덕이 헛웃음을 흘렸다.
“하.”
작은 웃음이 점점 커지더니 담덕이 붙잡고 있던 내 손을 놓으며 박장대소했다.
도대체 뭐가 그리 웃긴 거야?
나는 부루퉁한 얼굴로 담덕을 보았다. 그 시선에 한참을 웃던 담덕이 두 손으로 내 머리를 헤집었다.
“넌 어디까지 나를 곤란하게 할 셈이냐? 이건 정말 상상도 못했다.”
“……역시 이유가 안 되나?”
풀이 죽어 담덕을 보니 그가 웃음을 멈추고 고개를 저었다.
“네 열여섯 탄일에 날 주었지. 그러니 이유가 된다. 무엇이든 네가 싫다면 그게 이유가 돼.”
담덕이 두 손으로 내 뺨을 감싸더니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앞으로 다른 사람에게 이러지 않으면 되지?”
“응.”
“너와 단둘이 있을 때 편하게 잠들어 버리지 않고?”
“응.”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니 담덕이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네가 그렇게 하라니 난 그리할 거야. 지금은 이 정도로도 충분하다.”
* * *
대단한 비를 맞은 탓인지 사찰에서 돌아오고 난 후 나는 한동안 크게 앓았다. 몸에 열이 끓고 정신이 아득했다.
끙끙대며 대부분의 시간을 누워서 보냈지만 희미하게 주변 상황은 알 수 있었다.
때아닌 열병에 고생하는 동안 과분하게도 궁의 태의가 부지런히 나를 살피러 왔다. 나는 그가 주는 탕약을 먹고 잠들었다가, 깨어나면 다시 탕약을 먹고 잠들기를 반복했다.
덕분에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알 수 없었다. 여전히 밖에서 빗소리가 들리니 장마가 끝나기는 전이구나 싶을 뿐이었다.
장마가 끝나기 전에는 일어나야 하는데.
장마가 끝나면 전쟁이 나고, 전쟁이 나면 누구보다 먼저 담덕이 국내성을 나설 것이다. 이번에도 따라나서는 것은 거부당하겠지만 배웅 정도는 하고 싶었다.
하지만 생각과 달리 열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내 몸을 스스로 진맥하고 약을 처방하고 싶었다.
당연하게도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나는 무기력하게 타인의 손에 내 몸을 맡긴 채 도무지 가라앉을 줄을 모르는 열에 시달렸다.
“어찌 열이 떨어지지 않지?”
탕약을 먹고 잠이 들었는데, 정신을 차리니 누군가 태의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태의에게 이렇게 화를 낼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 담덕뿐이었다.
나는 그가 태의를 나무라지 않기를 바랐다.
태의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열심히 진맥하고, 탕약도 신경 써서 올렸다. 그저 내 몸에 받지 않는 처방이었을 뿐이다.
담덕을 말리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입안이 바싹 말라 듣기 싫은 숨소리만 목구멍을 타고 나올 뿐이었다.
나는 결국 목소리 내기를 포기하고 손을 뻗어 담덕의 옷자락을 끌어당겼다.
“우희!”
그제야 내가 정신을 차렸음을 발견한 담덕이 곧장 침상 앞에 붙어 몸을 숙였다. 겨우 눈을 떠서 본 담덕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했다.
담덕은 익숙하게 나를 부축해 물을 먹여 주었다. 하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아 버리는 것이 반 이상이었다.
내 입가를 닦아 주는 담덕의 입에서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다른 사람은 잘 돌보면서, 어찌 네 몸은 챙기지 못해?”
나로서도 그 부분이 제일 억울했다. 아신 태자를 치료하느라 독을 먹었을 때도 그랬다.
내 의술로 많은 사람을 치료해 줄 수 있지만, 정작 나 자신은 돌볼 수 없다.
스스로에게는 통하지 않는 재능.
그것이 나의 한계였다. 나는 새삼 그것을 실감했다.
“아프지 말고 내 곁에 있으라 했는데. 넌 참 말을 안 들어.”
평소라면 당장에 반박을 했겠으나 몸이 축 늘어져 도무지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돌아오지 않는 반응에 담덕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
담덕의 서늘한 손이 이마에 닿았다. 차가운 감각에 몸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시원한 것을 향해 몸을 움직였다. 담덕의 손을 붙잡고 그를 내게 끌어당겼다.
힘없는 손길에도 담덕은 순순히 내게 끌려왔다. 옆에 선 태의가 헛기침을 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시원한 것을 놓칠 수는 없었다.
나는 다가온 담덕을 꼭 끌어안았다.
* * *
이상하리만치 개운한 느낌에 눈을 뜨니 지난날들과 달리 몸이 가벼웠다.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몸을 일으켰다가 허리에서 툭 떨어지는 손을 발견하고는 기겁해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담덕?”
그곳에 담덕이 잠들어 있었다. 나는 순간 혼란스러워졌다.
이건 꿈인가?
담덕은 왜 여기 있지?
같은 침상에서 잔 거야?
머릿속에서 복잡하게 생각이 스쳐 가는 동안에도 담덕은 눈을 뜨지 않았다. 지친 얼굴로 깊은 잠에 빠진 그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입구에서 반가움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깨어나셨군요. 몸은 어떠십니까?”
내내 나를 돌봐 주었던 태의였다. 나는 고마운 마음을 담아 그에서 웃어 보였다.
“가벼워요. 열도 다 떨어진 것 같아요.”
“다행입니다. 열이 계속 높아 폐하께서도 걱정이 많으셨습니다.”
태의가 마주 웃으며 내 옆에 누운 담덕을 슬쩍 바라보았다.
“그랬군요. 한데 어찌 폐하께서 여기에……?”
많은 의미가 담긴 질문이었다. 태의는 그 질문이 나올 줄 알았다는 듯 웃는 낯으로 헛기침을 했다.
“아가씨께서 지난밤 폐하를 놓아주지 않으셔서…….”
“……제가요?”
없는 정신에도 담덕을 끌어안았던 기억은 있었다.
하지만 그걸 놓지 못하고 끝까지 안고 있었을 줄은 몰랐지.
놀라서 담덕과 자신을 번갈아 보는 내게 태의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예. 아가씨께서 그러셨습니다. 폐하께서 몇 번이나 벗어나려다가 실패하시고는, 결국 돌아가길 포기하시고 여기서 주무셨습니다.”
“……제가 그런 짓을 했군요.”
“오히려 잘되었습니다. 근래에 잠이 부족하셨는데, 아가씨 덕분에 오랜만에 숙면을 취하셨군요. 홀로 계실 때는 거의 주무시질 않거든요.”
태의의 말에 담덕의 얼굴을 보니 과연 피로가 가득했다.
나는 손을 뻗어 담덕의 얼굴을 만져 보았다.
아직 십 대 소년인데 벌써부터 세상 모든 짐을 진 듯한 얼굴을 하고 있다니.
“아가씨께서 계속 곁에 계셔 주신다면 좋을 텐데요.”
태의의 말에 담긴 의도는 명백했다. 담덕과 나의 혼인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내 뜻대로만 되는 것이 아니지. 담덕의 뜻대로만 되는 것도 아니고…….
나는 답답한 마음에 긴 한숨을 내쉬며 창밖을 보았다. 어느새 비는 그쳐 있었다.
긴 장마의 끝이었다.
* * *
예상했던 대로 장마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백제군이 관미성 공략을 위해 출정했다.
영락 3년 8월의 일이었다.
백제군의 선봉에는 아신왕의 외숙 진무가 섰다. 그는 1만이라는 적지 않은 수의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의 남쪽 전선으로 밀고 들어왔다.
진무의 기세는 무서웠다. 그는 단번에 관미성을 포위하고, 이를 발판으로 삼아 지난 전쟁에서 빼앗긴 성들을 되찾으려 했다.
이 소식을 듣고도 담덕은 직접 전쟁에 나서지 않았다. 무엇이든 직접 나서야 직성이 풀리는 그답지 않은 결정이었다.
하지만 이유가 따로 있었다.
담덕은 직접 전쟁에 나서는 대신 지설을 대장군으로 임명해 남쪽으로 보내며 그에게 계책을 일러 주었다.
계책이란 간단했다. 1만이라는 대군이 움직이고 있으니 직접 검을 맞대지 않고 뒤에서 보급로를 교란하는 작전이었다. 때문에 치고 빠지는 기술에 능한 지설을 책임자로 보낸 것이다.
담덕의 기대처럼 지설은 계책을 훌륭하게 수행해 주었다.
원래부터 일행의 보급을 담당하던 지설은 누구보다 빠르게 백제군의 보급로를 파악해 그 길을 끊어 버렸다.
그러자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백제군에게 흘러가야 할 군량미가 뚝 끊어졌다.
타지에 나와 고생하는 것도 서러운데 밥까지 제대로 주지 않으니 백제군의 사기는 날이 갈수록 떨어졌다.
결국 진무는 관미성을 포위하는 대단한 성과를 이루고도 끝내 퇴각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도 고구려가 승리한 것이다.
심지어 이번에는 제대로 된 전투조차 없었다. 이는 고구려의 태왕이 전면전뿐만 아니라 계책에도 능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담덕은 승리에 취하지 않았다. 그는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국내성에 머무르며 다른 일에 더욱 집중하고 있었다.
담덕은 불교의 전파를 위해 평양에 9개의 사찰을 지을 것을 명했다. 선대왕인 고국양왕이 불교를 널리 전파해 백성의 평안을 꾀하라고 하였으니 그 유지를 잇는 행보였다.
불교 전파에는 왕권 강화를 위한 포석이 담겨 있었다. 다양한 부족과 계층으로 나뉜 사람들을 하나의 공통된 믿음 아래 모음으로써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한 것이다.
고대 국가에서 종교가 왕권 강화의 수단으로 사용되는 경우는 셀 수 없이 많았다. 후대의 역사서에는 가까이 있는 백제와 신라 역시 불교를 통해 왕권 강화를 꾀했다고 기록하고 있었다.
왕권 강화를 위해 불교를 들여온 왕이 누구였는지 맞히는 건 학교 시험과 수능의 단골 문제였지.
담덕은 사찰을 창건하는 이유로 전쟁에 지친 백성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라는 뜻을 내세웠다. 귀족들의 반발을 최소화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왕권을 견제하는 귀족들도 바보는 아니었다.
그들이 기저에 깔린 의도를 모를 리 없었다. 당연한 수순처럼 소노부를 중심으로 한 귀족들의 반발이 심해졌다.
담덕은 계획을 강행하기 위해 각 부의 귀족들을 이끌고 사찰 건설이 한창인 평양으로 시찰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귀족들의 불참을 우려해 그들이 참석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만드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번 평양 시찰은 백제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는 사냥제로 둔갑했다. 이런 이유라면 귀족들이 불참할 핑계가 없었다.
그리하여 각 부의 우두머리인 대가들과 사냥제에 참여할 젊은이들이 한 무리를 이뤄 평양으로 향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