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장. 황후
어느새 완연한 겨울이 되었다.
비밀스러운 조직에 들어왔다는 생각에 두근거리던 것도 처음의 며칠뿐, 비로가 된 후에도 나의 일상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이따금씩 제신의 입에서 임무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오지 않았다면 내가 비로가 되었다는 것도 진즉에 잊어버렸을 것이 분명했다.
그사이 담덕의 군대는 백제군과의 대치 끝에 전투를 시작했다.
지난 몇 개월간 저 멀리 남쪽에서 들려온 소식은 놀라웠다. 담덕이 순식간에 백제 10개 성을 함락시켜 고구려의 땅으로 만든 것이다.
사람들이 헛소문은 아닐까 의심할 정도로 들려오는 이야기들은 현실성이 없었다.
지난 20년간 예성강을 사이에 두고 벌인 백제와의 전투는 지지부진했다.
백제가 우리 성을 하나 먹으면, 그다음엔 우리가 백제의 성을 하나 먹는 식의 지겨운 공방이 무려 20년간이나 이어져 왔다.
한데 담덕이 즉위 1년 만에 남쪽으로 4만의 군사와 함께 떠나더니 첫 전투에서 한 번에 10개의 성을 쓸어 담은 것이다.
놀라운 속도에 백제의 진사왕이 혼비백산했다는 이야기도 함께 들려왔다.
고구려 사람들은 백제 왕이 우리 태왕 폐하의 용맹함에 꼬리를 말고는 그대로 궁 안에 숨어 버렸다며 진사왕을 조롱해 댔다.
담덕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최종 목표였던 관미성을 향해 가고 있었다.
하지만 관미성은 지금까지 함락한 성들과 환경이 많이 달랐다.
사면이 절벽으로 바다에 둘러싸인 관미성의 위치는 해전에 약한 고구려군에게 큰 악재였다.
하지만 승승장구, 연전연승을 이어 가고 있는 태왕군의 기세가 워낙 매서웠다.
귀족들은 이대로 가면 정말 관미성이 고구려의 손에 떨어질 수도 있다며 큰 기대를 하고 있었다.
이 분위기를 못마땅해하는 사람은 소노부의 고추가뿐이라고 했다. 사람들이 태왕의 용맹을 찬양할수록 그의 입지가 줄어드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소노부의 고추가가 제가 회의에서 늘 뚱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흘러나오기 시작하던 그즈음.
담덕이 관미성을 함락했다는 소식이 국내성에 닿았다.
먼 곳에서 전해진 승전보에 국내성은 축제 분위기였다. 관미성 전투에서 보여 준 태왕의 놀라운 용병술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지자 분위기는 더욱 뜨거워졌다.
담덕은 병력을 일곱 갈래로 나누어 관미성의 사방을 공격했다. 수성의 이점을 가진 백제군을 혼란에 빠뜨리기 위해서였다.
담덕의 전략은 정확하게 먹혀 들어갔다.
백제군은 사방에서 쏟아지는 공격에 어느 쪽으로 병력을 집중해야 할지 결정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병력을 이곳으로, 또 저곳으로 이동하는 동안 병사들은 지쳐 갔다.
병사들이 지치니 방어선을 구축하는 속도도 날이 갈수록 느려졌다. 그에 비해 고구려군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이었다.
방어하는 측의 이동 속도가 느려지자 결국 방어선에 구멍이 생겼다. 당연한 수순이었다.
담덕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병력을 집중시켰다. 한번 흔들린 방어선은 다시 견고해질 시간도 없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그렇게 천해의 요새 관미성은 쏟아지는 4만 군에 굴복했다. 관미성에서 첫 합을 벌인 지 불과 20일 만의 일이었다.
관미성을 함락하는 동안 태왕군의 피해는 미미했다. 담덕은 처음 출병했던 4만의 군대를 거의 손실 없이 유지하고 있었다.
그에 비해 백제군은 풍비박산이 났다. 한동안 전력을 회복하기 힘들 정도라고 했다.
기세를 몰아 더 남쪽으로 가자는 쪽과 이제 그만 돌아와야 한다는 의견이 대립하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하지만 담덕은 다른 모든 사람들의 의견을 물리치고 국내성에 돌아오는 쪽을 택했다.
그가 내게 귀환을 약속했던 10월의 어느 날이었다.
* * *
귀환을 결정한다고 바로 국내성에 돌아올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관미성과 국내성은 상당히 먼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4만이라는 대규모의 군대가 다시 돌아오는 데에도 상당한 시일이 소요되었다.
그렇게 담덕이 국내성을 향해 돌아오고 있던 즈음, 백제의 진사왕이 급사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절대 잃어서는 안 되는 전략적 요충지인 관미성을 잃고 전의를 완전히 상실한 그가 행궁에 사냥을 나갔다가 사망해 버린 것이다.
진사왕의 정확한 사망 원인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땅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무능한 왕을 누군가가 죽여 버린 것이 아니냐는 묘한 소문이 돌았다.
소문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결국 백제는 땅과 왕을 모두 잃은 것이다. 연이은 비보로 백제 전체가 실의에 빠졌다.
죽은 진사왕의 뒤를 이은 자는 아신 태자였다. 이제는 아신 태자가 아니라 아신왕이 되는 것이다.
이제 아신은 숙부와 그의 부하들로부터 목숨을 위협당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옛 환자의 처지가 나아졌음을 마음으로나마 축하했다.
담덕의 고구려와 아신의 백제.
새로운 왕들의 즉위와 함께 삼국의 질서도 새롭게 재편되고 있었다.
한때 고구려의 왕을 죽이며 기세등등하던 백제는 관미성을 빼앗기며 크게 위세가 죽었고, 신라는 여전히 고구려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아마 이때가 삼국 중 고구려의 힘이 가장 강한 시기겠지.
앞으로 고구려는 지금의 광개토 대왕과 미래의 장수왕으로 이어지는 황금기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한 나라가 황금기를 맞이하면 다른 나라는 자연스레 그 기세에 눌려 힘을 잃을 수밖에 없다.
아마 아신은 죽는 날까지 담덕의 그늘에 가려 빛을 발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어려운 시기에 왕위에 오른 그가 조금 안쓰러워졌다.
* * *
해가 바뀌기 전 담덕이 국내성으로 돌아왔다.
태왕의 군대가 도착하기 며칠 전부터 국내성 사람들은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야단법석이었다.
제일 앞에서 당당하게 들어오는 태왕 폐하의 얼굴을 볼 수만 있다면!
사람들은 그런 바람을 가지고 며칠 전부터 노숙을 하는가 하면, 온 가족이 번갈아 가며 자리를 지켰다.
사람들 틈바구니에 휘말릴 수는 없는 노릇이라 나는 일찌감치 밖에서 담덕을 맞이하는 것을 포기했다.
대신 나는 궁에서 고운 옷을 차려입고 담덕의 귀환을 기다렸다.
돌아오면 가장 먼저 따뜻한 물에 씻고 싶을 테니 목욕물을 준비하고, 욕조 안에 피로 회복에 좋은 약초와 꽃을 띄워 놓았다.
기다리는 동안 몇 번이나 물이 식었다. 나는 시녀들과 함께 조금씩 따뜻한 물을 부어 물이 식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장정 10명이 들어가도 남을 정도로 욕조가 컸기 때문에 물이 식지 않게 하려면 분주하게 움직여야 했다.
시녀들은 내가 자신들 틈에 섞여 물을 데우기 위해 부엌을 오갈 때마다 곤란함에 발을 동동 굴렀다.
어쩔 줄 모르는 시녀들이 안쓰럽긴 했지만 그래도 양보할 수는 없었다. 오랜만에 돌아오는 담덕의 목욕물이니 내가 직접 챙겨 주고 싶었다.
“아가씨! 지금 막 궁에 들어오셨답니다!”
다시 따뜻한 물을 한가득 가져와 욕조에 붓고 있으니 시녀 하나가 뛰어 들어와 담덕의 소식을 알려 주었다.
드디어 담덕이 오는구나!
나는 신이 나서 담덕의 방으로 달려가 맛있는 음식이 가득 차려진 탁자 앞에 앉았다.
자리를 잡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방문이 열리고 담덕이 들어섰다.
거의 반년 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그새 담덕은 더욱 자라 사내다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키는 원래도 컸고, 선은 조금 더 굵어졌네. 전쟁터에서 고생을 많이 해서 그런지 살은 더 빠진 것 같은걸.
내가 찬찬히 담덕의 얼굴을 살피는 사이 무표정한 얼굴로 방 안에 들어선 그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두 손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담덕은 아직 나를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다. 나도 구태여 그를 부르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담덕이 하는 양을 관찰했다.
담덕이 검을 내려놓고 갑옷을 벗기 시작했다. 혼자 벗기는 힘든 갑옷이었지만 전쟁터에 나선 동안 수없이 혼자 했는지, 그는 제법 요령 좋게 갑옷을 벗어 냈다.
그는 갑옷을 대에 걸고 제 몸에 코를 박아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지독한 냄새가 났는지 담덕의 얼굴이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이제 담덕의 걸음이 내가 있는 탁자 쪽으로 향했다. 이곳을 지나야 침상이 나오고, 갈아입을 옷은 그쪽에 있었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탁자를 스쳐 가던 담덕이 별안간 걸음을 멈추었다.
잠시 그 자리에 굳어 있던 담덕이 뻣뻣하게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나는 가볍게 손을 흔들며 웃었다.
“우희?”
나를 부르고서도 담덕은 움직임이 없었다. 그는 느리게 눈을 두어 번 깜빡이다 무엇인가를 깨달았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여기서까지 헛것을 보는군.”
스스로를 향해 혀를 끌끌 찬 담덕이 다시 고개를 돌려 침상 쪽으로 향했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활짝 웃으며 담덕에게로 달려가 뒤에서 그를 껴안았다.
“담덕!”
담덕이 양팔을 어색하게 벌린 채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런다고 뒤에서 그를 껴안은 내가 보일 리 없었다.
담덕이 서둘러 내 팔을 풀어내고 뒤돌아섰다. 경악에 찬 그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헛것이 아냐?”
“왜 멀쩡한 사람을 헛것으로 만들어?”
“……정말 헛것이 아니라고?”
“아니라니까!”
나는 그렇게 외치며 다시 담덕을 꽉 껴안았다. 나의 기세에 담덕이 뒤로 살짝 밀려났다.
“진짜구나. 진짜 우희야.”
작게 중얼거린 담덕이 나를 마주 안았다. 어찌나 강하게 마주 안았는지 숨이 턱 막힐 정도였다.
하지만 내가 숨이 막힌다며 투덜거리기도 전에 담덕이 화들짝 놀라며 내 어깨를 붙잡아 나를 밀어냈다.
영문을 몰라 눈을 깜빡이니 담덕이 민망한 듯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그…… 냄새가 심하게 나서…….”
“그게 걱정이었어?”
나는 크게 웃으며 담덕의 팔을 끌었다.
“그럴 줄 알고 내가 목욕물을 준비해 뒀어. 물도 따뜻해. 너 목욕하는 거 좋아하잖아. 전쟁터에 나가 있을 동안 목욕도 제대로 못했지?”
사실 담덕뿐만이 아니라 고구려인들은 하나같이 목욕을 즐겼다. 고대인들은 잘 씻지 않았을 거라던 막연한 나의 편견이 틀린 것이다.
고구려의 목욕 문화는 건국 신화에서도 잘 드러나 있었다.
고구려의 건국 신화는 물의 신 하백의 딸 유화가 목욕을 하다가 하느님의 아들인 해모수를 만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 유화에게서 태어난 이가 바로 고구려의 시조 주몽이었으니, 신화대로라면 고구려인들에게는 물의 신 하백의 피가 흐르는 셈이었다.
그래서인지 고구려인들은 냇가에서 몸을 깨끗이 하는 일에 익숙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잘 모르는 사람과도 얼굴을 보고 목욕을 하곤 했다.
물론 현대인으로서의 기억이 있는 내게 그 풍경은 목욕이라기보단 물놀이에 가까웠다.
이곳 사람들은 다른 이들과 함께 목욕을 할 때 의관을 벗고, 가장 안쪽의 속옷만 입었다.
현대로 치면 비키니를 입은 정도일까?
비키니보다 가려지는 부분이 많았으니 수영복을 입은 것보다 덜 부끄러운 차림이었다.
나는 담덕의 손을 끌어 그를 세욕장 안으로 밀어 넣었다. 내 기세에 담덕은 아무 말도 못하고 세욕장 안으로 들어섰다.
“자, 어서 목욕하자!”
“목욕하자?”
담덕이 멍한 얼굴로 되물었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담덕을 커다란 나무 욕조 앞으로 이끌었다.
“욕조에 꽃잎과 약재를 풀었어. 향도 좋고 피로 회복에도 좋을 거야. 내가 등도 밀어 줄게!”
그렇게 말하며 나는 겉옷을 벗기 시작했다.
고구려에 와서 친구와 물놀이라니. 대한민국에서도 못 해 본 일인데!
어쩐지 들뜨는 기분이었다.
소진일 때는 자주 어울려 지내는 친구가 없었기 때문에 워터 파크는커녕 동네 수영장에도 가 보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 내게는 친구가 있지 않은가.
눈앞의 나무 욕조는 워터 파크에 비교하면 한참 작았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성인 남자 열 명이 들어가도 거뜬할 정도로 컸으니 담덕과 함께 물놀이를 하기에는 충분할 터였다.
내가 옷을 훌렁훌렁 벗으니 굳어 있던 담덕이 손을 뻗어 어깨를 눌렀다. 벗으려던 옷이 담덕의 손에 걸려 다시 내 몸에 내려앉았다.
“너도 벗어. 안 벗고 뭐하니?”
“너야말로 뭐하는 거야?”
담덕이 미간을 찌푸리며 내게 물었다. 나는 커다란 욕조와 담덕을 번갈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목욕하자는 거잖아?”
“너랑, 나랑, 같이?”
그렇게 묻는 담덕의 말이 뚝뚝 끊어졌다. 나를 바라보는 담덕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그 눈빛에 들떴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왜? 나랑 목욕하는 게 싫어?”
“싫고 좋고의 문제가 아니라…….”
내 질문에 담덕이 골치 아프다는 듯 머리를 짚었다.
“너랑은 못 해.”
‘안 된다’거나 ‘싫다’가 아니라 ‘못 한다’였다. 어감이 완전히 다른 말에 나는 눈을 깜빡였다.
“왜?”
내 질문에 담덕은 대답이 없었다. 그저 곤란해서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길게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말로 설명하기는 힘든데. 아무튼 조금 곤란해, 너랑은.”
“지설이나 태림이랑은 같이 목욕했다며? 나도 서나 오라버니랑 같이 목욕했었는데?”
“그거야, 후, 아무튼 사정이 다르다고. 너와 그 녀석들은.”
“도대체 뭐가 다르다는 거야? 제신 오라버니도 내가 네 목욕물을 준비해 줄 생각이라 했더니 아예 같이 하는 게 어떠냐고 했는걸.”
“……제신이?”
“응.”
“……제신이 말이지…….”
담덕이 어쩐지 스산한 얼굴로 몇 번이나 제신의 이름을 중얼거리며 이를 갈았다.
“나와 목욕하는 게 싫어?”
나는 다시 한번 담덕에게 물었다. 처음으로 친구와 물놀이를 하게 되어 신이 났던 기분이 한 번에 축 가라앉았다.
그러자 저주라도 하는 것처럼 연신 제신의 이름을 씹어 삼키던 담덕이 당황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네가 친한 사람들이랑은 다 목욕을 함께한다기에 나도 그럴까 싶어서…… 사실 나 가족 말고 다른 사람하고는 목욕을 해 본 적이 없거든. 별로 친구가 없어서…….”
달래가 몇 번 냇가에 목욕을 하러 가겠느냐고 물은 적이 있었지만 내키지 않아 거절했다.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섞여 홀로 물놀이를 할 정도로 낯이 두껍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 세상에.”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이는 나를 보며 담덕이 손을 들어 제 눈을 가렸다.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는 담덕의 얼굴에 답답함이 가득했다.
“국내성에 돌아오자마자 이게 무슨 시련이지?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런…….”
혼자서 의미 모를 말을 중얼거리던 담덕이 곧 결의에 찬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우희.”
“응.”
“하자.”
“응?”
“목욕, 같이 하자고.”
* * *
결국 나와 담덕은 같은 욕조에 몸을 담갔다. 담덕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그만 상의를 모두 벗고, 나는 가장 바깥의 포만 벗은 상태였다.
욕조 안에 들어와서도 담덕은 나와 가장 먼 곳에만 골라 앉았다. 내가 조금만 가까이 다가가도 움찔거리며 자리를 옮겼다.
“네 목욕을 도와주려고 온 건데.”
나는 혼자서 열심히 몸에 물을 끼얹고 있는 담덕을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오랜 여정으로 피곤해 혼자 목욕하기 힘들 것 같아서 돕겠다고 나선 것인데, 그저 멀뚱히 담덕이 목욕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시중은 원래도 받지 않는 편이야. 혼자 하는 것이 편해.”
‘그러니까 다가오지 마’라는 말이었다.
본인이 그렇게까지 말하니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홀로 씻고 있는 담덕을 두고 물놀이를 즐기기 시작했다. 소진일 때의 기억을 되살려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수영도 해 보고, 욕조 안으로 잠수했다가 떠오르기도 했다.
생각보다 재미있는데?
생각보다 즐거운 물놀이에 나는 함께 목욕을 가자던 달래의 제안을 몇 번이나 거절한 것을 뒤늦게 후회했다.
혼자 수영만 해도 꽤 재미있구나. 이렇게 재미있는 줄 알았으면 진즉에 나가 보는 건데.
신이 나서 물장구를 치는 내게 담덕이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좋으냐?”
목욕을 도와주려고 왔다는 녀석이 혼자 신이 나서 놀고 있으니 어이없기도 하겠지.
나는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 세상에는 즐길 거리가 많지 않았다. 말을 타거나, 책을 읽거나, 활을 쏘거나. 그것이 전부였다.
재미있는 일도 일주일이면 질린다는데, 나는 벌써 18년째 같은 것만 하고 살았다.
이곳 고구려는 매일 새로운 것이 쏟아지는 현대에 비하면 너무 단조로운 세상이었다.
그런 와중에 물놀이라는, 제법 취향에 맞는 놀이를 발견했으니 나로서는 기꺼운 일이었다.
고개를 주억거리는 나를 보며 담덕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다음에는 더 큰 호수에 가자.”
“호수?”
“국내성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사람들이 잘 모르는 호수가 있어. 예전에 사냥을 갔다가 보았는데, 수영하고 놀기에 좋을 거야.”
“벌써 기대되는데.”
“그러니 오늘은 이만 나가자. 얼굴이 다 익었어.”
담덕의 말에 나는 손을 뻗어 내 얼굴을 만졌다. 따뜻한 물속에 있었으니 얼굴이 달아오르긴 했을 것이다.
“참, 너 배도 고프지? 음식도 한 상 가득 차려 두었는데.”
그제야 나는 정신을 차렸다. 목욕은 빨리 끝내고 맛있는 것을 잔뜩 먹일 생각이었는데, 물놀이에 정신이 팔려 모두 잊고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욕조를 벗어났다. 그 순간 눈앞이 깜깜해지며 머리가 핑 돌았다.
“우희!”
앞에서 물이 요란하게 튀는 소리가 나더니 담덕이 나를 붙잡았다. 나는 제대로 중심을 잡기 위해 그의 어깨를 맞잡으며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갑자기 일어서니 그렇지.”
한숨 섞인 타박과 함께 서서히 두 눈의 시야가 돌아왔다.
선명해진 눈앞에는 살짝 그을린 살이 가득 펼쳐져 있었다. 담덕의 가슴팍이었다.
예상하지 못한 풍경에 나는 얼떨떨해 눈을 깜빡였다.
멀리서 봤을 땐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가까이에서 보니 기분이 묘한걸.
순간 알 수 없는 이유로 얼굴에 열이 확 몰렸다. 당황한 나는 담덕의 어깨에 얹었던 손을 후다닥 떼어 내며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여전히 담덕이 내 허리를 붙들고 있는 상태였다. 몸이 뒤로 가지 못하고 발이 헛돌자, 내 몸이 다시 앞으로 튕겨 나가 담덕의 가슴팍에 머리를 부딪혔다.
코와 입술이 담덕의 가슴팍에 부딪히자, 이번에는 그가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그 순간 담덕이 발을 헛디뎠다. 평소라면 절대 그럴 일이 없겠지만, 이곳은 미끄러운 세욕장이었다.
나는 앞으로 넘어지고, 담덕은 뒤로 넘어갔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우리는 바닥에 처박혔다.
고통을 예상하며 눈을 질끈 감았는데 생각 외로 몸이 멀쩡했다.
나는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자 엉덩이에 닿는 느낌이 확실히 이상하다는 것이 느껴졌다.
바닥보다는 부드럽고, 그런데 또 마냥 부드럽지만은 않은…….
나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을 닦아 내며 내가 밑에 깔고 앉은 것의 정체를 확인했다.
그건 담덕이었다. 내가 담덕의 배를 깔고 그 위에 앉은 것이다.
놀라서 입을 쩍 벌리니 내 밑에 깔린 담덕도 넋이 나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희.”
담덕이 겨우 내 이름을 불렀다. 그 소리에 번뜩 정신을 차리니 담덕의 얼굴이 몹시 곤란하게 일그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미안. 바로 일어, 일어날게.”
하지만 말뿐이었다. 놀라서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몇 번이나 일어서려고 해도 다시 담덕의 배 위에 주저앉을 뿐이었다.
담덕이 제 눈을 가리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가만히 있어 봐.”
그렇게 말한 담덕이 상체를 완전히 일으키자 순식간에 담덕의 얼굴이 코앞에 다가왔다. 숨결이 닿을 듯 가까운 거리였다.
어쩐지 긴장해 숨을 흡 들이켰더니 어깨가 절로 굳어졌다.
내 눈을 바라보던 담덕의 시선이 얼굴 가까이까지 올라온 어깨로 향했다.
“긴장했네.”
혼잣말로 작게 중얼거리던 담덕이 다시 내 눈을 바라보았다.
“왜?”
“……응?”
“왜 긴장했어? 조금 전까진 아무렇지 않게 옷을 벗어 던질 기세더니, 갑자기 왜 이렇게 긴장하고 있냐고?”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왜 이렇게 긴장한 것인지는 나조차도 몰랐다. 사정이 그랬으니 담덕에게 알려 줄 수 있는 이유도 없었다.
곤란해서 눈을 굴리는 나를 보며 담덕이 짙은 미소를 지었다.
“흐음……. 긴장했단 말이지.”
담덕이 묘한 웃음을 흘리며 조금 더 내게 가까워지는 순간, 잊고 있던 힘이 속에서부터 올라왔다.
“나, 나가자. 여긴 너무 덥고, 어지럽고, 답답하고…… 아무튼, 그래, 여기서 나가야 돼.”
나는 본능이 시키는 대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도망치다시피 세욕장을 벗어났다.
뒤쪽에 남겨진 담덕에게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 * *
태림과 지설이 국내성에 돌아왔으니 비로의 새로운 대원인 나와 운을 소개하는 자리가 만들어졌다.
만남의 장소는 비로 본부였다. 비밀스러운 조직답게 국내성 외곽에 본부가 있을 것이란 나의 예측과 달리, 비로는 소란스러운 저잣거리 한가운데 있는 작은 주막을 본부로 삼고 있었다.
평소에는 평범한 주막처럼 장사를 하다가, 비로 사람들이 모이는 날에는 문을 닫는다고 했다.
“폐하께서는 아십니까?”
본부에 도착한 지설이 내 얼굴을 보자마자 미간을 찌푸렸다.
태림도 말은 않지만 내가 이곳에 있는 것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대원을 선발하는 건 수장의 몫이야.”
제신이 짧게 설명했다. 원칙적으로야 옳은 말이었지만 지설은 납득하지 못했다.
“그래도 어찌 황후님이 되실 분을 비로의 대원으로 씁니까? 비로는 쓰고 버리는 데 거리낌이 없는 패여야 합니다. 한데 폐하께서 이분을 그리 쓰실 수 있겠습니까.”
“전면으로 나서는 일은 하지 않을 거야. 뒤에서 우리를 보조하는 역할이다. 게다가 폐하께서 비로의 모든 대원을 아시는 것도 아니잖아. 여기 있는 녀석들 중에서도 반은 폐하께서 모르는 이들이고……. 우희도 그렇게 뒤에서 일을 할 것이다.”
밖에서는 서로 높임말을 쓰는 사이였지만, 비로 안에서의 제신은 수장으로서 지설을 대했다. 거침없는 하대에도 지설은 익숙한 듯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뭐, 그건 그렇다고 칩시다. 한 명 정도야 어찌 감당할 수도 있겠죠. 한데 다른 한 사람은 또 소노부 해씨의 장남이라고요?”
지설의 눈이 뻔뻔하게 웃고 있는 운을 향했다.
제신에게 죽기 직전까지 두드려 맞은 이후 운은 조금이나마 예전의 모습을 되찾았다.
종종 어두운 얼굴로 생각에 잠길 때도 있었지만 내가 이름을 부르면 언제 그랬냐는 듯 예전과 같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곤 했다.
“해씨와는 연을 끊을 겁니다.”
짧고 단호한 운의 말에도 지설은 고개를 저었다.
“끊는다고 끊어질 인연입니까? 물보다 진한 피라고 했습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중요한 순간에는 피에 이끌릴 겁니다.”
“지설.”
제신이 투덜거리는 지설의 이름을 불러 경고했다. 지설은 못마땅한 얼굴을 지으면서도 입을 꾹 다물었다.
“백제나 신라 등 다른 나라에 첩자로 가 있는 자들, 지방에 분위기를 살피기 위해 파견된 자들을 빼면 국내성에 남아 있는 비로는 여기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다. 자리에 없는 사람이 하나 있긴 하지만…… 그 녀석도 곧 올 거야.”
어수선하지만 분위기가 어떻게든 분위기가 정리되자 제신이 둘러앉은 사람들을 하나씩 소개하기 시작했다.
“지설과 태림은 대외적으로도 알려진 이들이니 잘 알 것이고…….”
소개는 지설과 태림으로 시작해 신입 대원인 나와 운에서 끝났다.
나와 운은 대원들에게 인사한 후 신입으로서 간단한 포부를 밝히고 비로의 일원이 된 것을 축하하는 의미로 모든 대원들이 주는 술을 받아 마셨다.
“어머나, 벌써 시작해 버린 건가요?”
어느 정도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주막 안으로 여자 하나가 들어섰다. 화려한 차림의 유녀였다.
술기운이 올라 벌겋게 익은 얼굴로 유녀를 살폈더니, 어딘가 모습이 눈에 익었다.
“어!”
나는 곧 유녀가 눈에 익은 이유를 알아챘다. 오래전 저잣거리에서 담덕과 함께 있던 여자였다.
내가 손으로 가리키자 유녀가 요요히 웃었다.
“우희 아가씨지요? 이렇게 비로에서 뵐 줄은 몰랐습니다.”
무례할 수도 있는 내 손가락질에도 유녀는 우아한 여유로운 동작으로 내게 인사를 건넸다.
“저는 다로입니다. 아가씨께서는 저를 잘 모르시겠지만, 저는 수장님과 폐하께 아가씨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답니다.”
“내 이야기를요?”
“예. 덕분에 전 아가씨가 무척이나 친근해요. 지금껏 비로의 홍일점이라 쓸쓸했는데 이리 동료가 생기니 좋습니다. 아가씨께서도 아시겠지만 사내들은 눈치도, 재미도 없거든요.”
“다로!”
다로의 말에 대원 하나가 항의하듯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다로는 눈도 꿈쩍하지 않았다.
“보세요. 저리 무례하게 사람의 이름을 부른다니까요.”
“다로. 놀리는 건 그만하고, 다녀온 일이 어찌 되었는지나 말해 봐.”
내 귓가에 속삭이는 다로를 향해 제신이 말했다. 그러자 다로가 우아하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해야지요. 우리의 새로운 수장님께서는 제가 가져오는 이야기에만 관심이 있으시니…….”
“다로.”
“예, 예. 쓸데없는 이야기는 더 안 합니다.”
다로가 고개를 내저으며 내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소노부의 해사을과 시간을 보내고 오는 길입니다.”
“해사을?”
익숙한 이름이었는지 운이 그 이름을 반복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누구이기에 그러느냐는 눈빛으로 운을 보니 그가 떨떠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사을이라면 내 육촌 형님이다.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곁에 두고 키웠는데, 많은 가솔들 중에서도 심복 중의 심복이라 할 수 있지.”
“맞습니다. 그런 사람과 시간을 보내고 왔으니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가져오지 않았겠어요?”
“다로.”
제신이 다시 한번 다로의 이름을 불러 재촉했다.
그녀는 못 말린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시다시피 지금의 소노부는 상당히 곤란한 상황입니다. 백제에게 대승을 거둬 폐하의 입지가 높아진 데다,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왕으로 내세울 사람의 행방이 묘연하지요.”
그렇게 말한 다로의 눈이 잠시 운을 향했다가 떨어졌다.
“하여 방법을 바꿨다 합니다.”
“어떤 방법을 쓰겠다 했는데?”
“혼인입니다.”
“혼인?”
제신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자 다로는 미소가 사라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고추가는 제 딸을 우 황후처럼 만들고자 합니다.”
우 황후.
그 이름 하나가 많은 이야기를 함축하고 있었다.
운이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영이를 패로 쓰겠다고요? 내 아버지가 정말 그리 생각한다고요?”
운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다로는 씁쓸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 우 황후로 쓸 만한 패는 한 사람뿐이지요. 해씨의 도련님께서 생각하시는 그분이요.”
“그 아이는 우 황후처럼 될 수 있는 아이가 아닙니다.”
운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영과 우 황후를 모두를 아는 내게도 그리 생각되었다.
우 황후는 고구려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는 인물이었다. 특히 귀족들이라면 그녀의 대단한 사연을 모두 꿰고 있었다.
우 황후는 소노부에 속한 우씨 가문의 딸로 고국천왕의 황후였다. 본래 소노부는 해씨를 중심으로 움직였으나, 당시에는 황후의 입김으로 우씨의 힘이 막강했다.
하지만 우 황후를 필두로 국정을 휘어잡고 권력의 단맛을 누리던 우씨 가문은 곧 다가온 고국천왕의 죽음으로 큰 위기를 맞게 되었다.
우 황후와 고국천왕 사이에 후사가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고민하던 우씨 가문은 묘책을 떠올렸다. 우 황후로 하여금 고국천왕의 여러 동생 중 하나인 연우를 남편으로 맞게 해 그를 태왕으로 만든 것이다. 그 왕이 바로 산상왕이었다.
태왕이 될 사람을 선택한 황후.
사람들은 우 황후를 그렇게 불렀다.
또한 2대에 걸쳐 외척이 된 우씨 가문은 동천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어마어마한 권력을 누렸다.
소노부 해씨는 그때 우 황후와 우씨 가문이 그랬던 것처럼 외척으로서 권력을 휘어잡을 생각인 걸까?
내가 그런 예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기라도 했는지 운이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께서 그릴 리 없습니다. 저는 패로 써도, 영이는 그러지 못할 거예요. 그 아이를 아주 아끼십니다. 몸도 약해 안에서만 돌리는 아이를 어찌 험한 정치에 끌어들이신다고…….”
“해씨의 도련님.”
연신 고개를 젓는 운을 보며 다로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당신의 아버지는 생각보다 권력욕이 강한 자입니다. 그가 권력을 잡기 위해 어떤 일까지 벌였는지…… 이미 아시잖아요?”
다정한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는 날카로운 진실이 들어 있었다.
이미 소노부의 고추가는 말갈을 흔들어 도압성을 무너지게 한 전력이 있었다.
운이 대답을 못 하고 입술을 질끈 깨물자 이번에는 제신이 내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외척의 강한 힘에 휘둘렸던 계루부는 이 일을 거울삼아 이후 소노부 출신의 황후를 단 한 번도 들이지 않았어.”
하지만 귀족의 도움 없이 왕권을 유지하는 건 힘들었다.
해서 계루부는 절노부와 손을 잡고, 절노부에게 왕비족의 이름을 허락하며 동반자가 되기를 제안했다.
“소노부 출신의 황후를 원치 않는 건 귀족들도 마찬가지일 거야. 제가 회의에서도 소노부에게만 강한 권력이 가는 것은 옳지 않다 하여 이후 소노부가 황후 후보를 내세워도 승인해 주지 않았다. 그런데 소노부가 이제 와 무슨 수로?”
“조금 다르게 생각해 보십시오. 제가 회의의 승인만 얻어 낼 수 있다면 누구나 황후가 될 수 있습니다. 전 소노부의 고추가께서 사람을 회유하는 데 대단한 재능이 있으시다고 들었는데……”
“소노부의 고추가가 아무리 사람을 잘 다룬대도 폐하의 의중까지 흔들 수는 없을 텐데.”
“하지만 태왕께서도 제가 회의의 의견은 무시하기 힘듭니다. 어쨌든 우리 고구려는 다섯 부족이 힘을 합쳐 세운 나라니까요.”
살포시 웃은 다로가 절노부 사람인 제신과 순노부 출신의 지설을 번갈아 보며 의심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절노부야 당연히 소노부의 꼬임에 넘어가지 않겠지만, 순노와 관노는 어떨까요? 이번 백제 원정에 도움을 준 것을 보세요. 그들은 언제나 더 많은 것을 줄 수 있는 쪽에 붙을 준비가 되어 있답니다.”
다로의 말에 자리에 앉은 모두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해영이 담덕과 혼인하여 황후가 되고, 소노부는 외척으로서의 지위를 갖는다고?
지금 상황만 두고 보면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소노부의 고추가는 이미 상상 이상의 행동을 한 적이 있었다. 그것을 고려하면 아예 불가능한 상상도 아니었다.
도압성을 일부러 무너뜨린 자가 국혼이라고 마음대로 못할 것 없어.
하지만 만약 그렇게 된다면…….
만약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이상하게 가슴이 답답했다.
* * *
다로에게서 우 황후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것이 얼마 지나지 않아 제가 회의에서 황후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담덕이 즉위한 이후 백제와의 전쟁에 집중하느라 국혼을 올리지 못하였으나, 이제 그 전쟁이 마무리되었으니 황후의 자리를 논의할 시기라고 했다.
가장 먼저 이름이 오른 사람은 나였다.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담덕이 즉위하기 전부터 절노부와의 혼인 이야기가 오갔던 데다가, 즉위 이후에는 내가 궁에서 지내며 담덕과 가까이 지낸 탓에 우리가 혼약을 나누었다는 사실이 공공연하게 퍼져 있었다.
때문에 백부는 나와 담덕의 혼인이 매우 순조롭게 진행되리라 생각한 것 같았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제가 회의에서 큰 반발이 있었던 것이다.
“소노부가 크게 반대를 하더구나. 거기에 관노부가 동조했어.”
다로의 이야기를 통해 어느 정도 예상했던 상황이었다.
나와 제신은 눈빛을 주고받으며 백부에게 제가 회의의 상황을 물었다.
“관노부는 이미 폐하의 쪽으로 돌아선 것 아니었습니까? 어찌 갑자기 소노부의 편을 드는 것인지……?”
제신의 말에 백부가 피곤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관노부야 원래부터 소노부와 인연이 깊은 곳 아니냐. 지난 백제 원정에 병력과 물자를 내어놓은 일이 특이했던 게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간 것일 뿐이니 이상하게 여길 필요도 없다.”
“그 말씀은 곧 순노부 역시 소노부 쪽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높다는 뜻입니까?”
“순노부는 관노부에 비해 소노부와 연이 적다. 하지만 여태까지 그들에게 동조했던 과거가 있음은 분명해. 순노부 역시 언제든 돌아설 수 있다고 생각해야겠지.”
백부의 말에 제신이 질린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소노부 출신의 황후라니, 말도 안 될 일입니다. 관노부와 순노부는 어찌 소노부에게 그리 큰 권력을 주려는 겁니까? 지금도 다른 부족에 비해 많은 힘을 가진 소노부인데요.”
“그들의 입장에서는 소노부가 권력을 잡으나, 폐하가 권력을 잡으나 달라질 것이 없다. 언제나 옆으로 밀려나 있던 자들이 아니냐.”
고구려는 5부족이 함께 모여 만든 나라였지만 그 안에서는 묘하게 서열이 나뉘어져 있었다.
계루부는 왕족으로, 절노부는 왕비족으로, 소노부는 한때 왕을 배출했던 부족으로 목소리를 높였지만 관노부와 순노부는 상대적으로 목소리가 작았다.
부족의 수장에게 ‘고추가’라는 호칭이 주어진 곳도 절노부와 소노부뿐이었다.
관노부와 순노부의 수장은 ‘고추가’라는 호칭을 받지 못해 단순히 ‘대가’라고만 불렀다.
“상황이 이러하니 폐하께서는 순노부마저 돌아서기 전에 국혼을 서두르자고 하신다.”
“폐하의 뜻이 그렇더라도 소노부 쪽에서 강하게 나온다면 힘들 텐데요. 예전보다 힘이 조금 꺾였다고는 해도 여전히 제가 회의를 장악하고 있는 곳은 소노부잖습니까. 제가 회의에서 승인이 떨어지지 않으면 국혼은 무슨 수를 써도 불가능합니다.”
제신의 염려에 백부가 턱을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신이 네 말이 옳다. 그러니 방법을 고민해 봐야지.”
* * *
제가 회의에서 국혼 문제가 지지부진하게 논의되는 사이 영락 3년이 밝았다.
백제의 아신왕은 새해가 밝자마자 고구려에 빼앗긴 관미성을 되찾겠노라고 천명했다.
이를 위하여 아신은 외숙인 진무를 좌장에 임명하고 관미성을 비롯한 북부의 땅들을 되찾아오라 명했다.
진무가 그 뜻을 받들어 고구려 침공 준비에 열을 올리고 있다는 소문이 돌자 우리 고구려도 분주해졌다. 다시 물자를 모으고 병력을 훈련시켜야 할 시간이었다.
흔히 외부의 침략이 내부의 결속에 도움이 된다는 말이 있는데, 이번에도 그 말이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매일같이 국혼 문제로 삿대질을 해대던 제가 회의가 백제라는 공공의 적을 두고 하나로 뭉친 것이다.
그들은 국혼 문제를 잠시 내려 두고 마음을 합쳐 전쟁 준비에 돌입했다.
소누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그들 역시 대단한 애국심으로 백제의 괴멸을 외치며 힘을 합하고 있었다.
물론 백부와 담덕은 그들을 믿지 않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음 전쟁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국혼을 올려야 해. 한 번 더 전쟁이 벌어지면 또 얼마나 국혼을 미뤄야 할지…….”
담덕은 눈으로 제 앞에 가득 찬 장계를 살피면서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나는 지난 전쟁 때문에 한 번 국혼을 미룬 것만으로도 힘들었어. 그런데 여기서 또 미뤄?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만 제가 회의는 벌써 전쟁 준비에 돌입했잖아. 국혼 이야기는 이미 물 건너간 거 아냐?”
태평한 내 말에 담덕이 미간을 찌푸리며 장계를 내려놓았다. 일에 빠지면 집중을 깨뜨리는 법이 없는 그로서는 흔치 않은 모습이었다.
“넌 나와 혼인을 하고 싶기는 해?”
“당연히 하고 싶지. 먼저 혼인하자고 한 사람도 나인걸.”
“그건 ‘나’와 ‘너’의 혼인이 아니라, ‘태왕’과 ‘절노부’의 혼인을 말한 것이었지. 네 열여섯 탄일에 내가 제대로 혼인하자 청한 건 잊었어?”
“당연히 기억하고 있지만…… 누가 먼저 혼인하자 청한 것이 뭐가 중요해?”
“내겐 중요해. 아주 많이.”
담덕이 한숨을 내쉬며 다시 장계를 손에 들었다.
“왜 그리 초조한데?”
“이러다 정말 순노부까지 소노부 에 넘어가 버리면, 난 꼼짝없이 소노부의 여식과 혼인해야 돼. 제가 회의의 뜻은 태왕인 나로서도 거스르기 힘든 것이니까. 하지만 그건 절대로 싫어.”
“순노부도 소노부 출신 황후는 달가워하지 않아. 지설이 그랬어.”
사실 지설이 아니라 비로에서 들은 이야기였다.
하지만 내가 비로에 들어갔다는 것은 담덕에게 비밀이었으므로, 애꿎은 지설의 이름을 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담덕은 지설에게 이야기를 들었다는 내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금방 또 뒤집히는 것이 귀족들의 태도라.”
대신 담덕은 답답한 얼굴로 머리를 헤집었다. 그가 이처럼 예민하게 구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어떻게 하면 제가 회의에서 우리의 혼인을 승인할 수밖에 없을까?”
나는 그의 고민을 덜어 주기 위해 턱을 괴며 생각에 잠겼다.
고구려인으로서의 지식뿐만 아니라 현대인의 지식까지 모두 끌어들여 고민해 보았지만, 쉽게 답이 나오지 않았다.
하긴. 쉽게 답이 나올 문제면 해가 지나기 전에 벌써 해결됐겠지. 현대에서처럼 속도위반을 해 놓고 배 째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나는 일부러 과장되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먼저 애라도 만들어 와야 하는 거 아냐? 그럼 제가 회의도 어쩔 수 없이 승인하겠지 뭐. 이미 애가 있는데 어떡해?”
웃음과 함께 흘러나온 내 말에 담덕의 손에 들려 있던 장계가 툭하고 떨어졌다.
“……애를, 뭐 어째?”
딱딱하게 굳은 담덕의 얼굴이 내게 향했다. 나는 탁자 위를 구르는 장계를 바라보며 눈을 크게 떴다.
“지금 장계를 버린 거야?”
“버린 게 아니라…… 아니, 정말 버렸다고 해도 그게 중요해?”
“그게 중요하지. 다른 사람이 뺏어 들기 전까지는 일거리를 손에서 놓는 법이 없는 사람이 장계를 버렸잖아 지금.”
“버린 게 아니라 네가 황당한 소리를 하니 놀라서 놓친 거지!”
“황당한 소리인 걸 뻔히 알면서 놀라긴 왜 놀라? 상황이 답답하니 농담이나 해 본 것을 가지고.”
나는 담덕의 곁으로 다가가 탁자에 떨어진 장계를 다시 그의 손에 쥐여 주었다.
“농담? 지금 그게 농담으로 할 말이야?”
얼떨결에 장계를 받아 든 담덕이 다시 장계를 탁자에 내려놓으며 나를 보았다.
그렇게 말하는 담덕의 눈이 제법 매서웠지만, 다른 부분이 더 놀라웠던 내게는 그의 눈빛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세상에.”
담덕이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장계를 포기했다. 나는 놀라서 입을 쩍 벌렸다.
“앞으로 우리 폐하의 손에서 장계를 놓게 하려면 애 먼저 만들자는 이야기를 해야겠네.”
“……너, 그 이야기 한 번만 더 했다간 봐. 무슨 일이 생기나.”
담덕이 잠시 미간을 찌푸린 채 나를 보더니, 곧 신경질적인 손놀림으로 탁자에 내려놓은 장계를 들었다.
“특히 다른 곳에 가서 그런 농담 하지 마. 농담이 통하지 않는 상대도 있으니까. 지설에게 이야기하면 좋은 생각이라고 당장 실천하라고 할걸.”
“그에 비해 태림은 얼굴이 새빨개져서 아무 말도 못할 것 같은데? 음, 말하고 보니 정말 반응이 그럴까 궁금하네.”
“너!”
겨우 장계에 집중하던 담덕이 짧게 소리치며 다시 장계를 내려놓았다가, 장난스럽게 웃고 있는 내 얼굴을 확인하고는 맥이 빠진 듯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로 할 생각은 하지도 마.”
“안 해. 너 말고 다른 사람한테 이런 이야길 어떻게 해? 네가 그렇게 반응하니까 재미있어서 더 그러는 거잖아.”
나는 담덕의 어깨를 두드리며 작게 웃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선 진중하게 명을 내리는 태왕을 이처럼 당황하게 할 수 있다니. 얼마나 재미있는 일인가.
“연우희. 너는 정말 내가…….”
키득거리는 나를 보며 담덕이 질린 얼굴로 머리를 짚었다.
“너처럼 태왕을 우습게 보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을 거다. 감히 태왕을 놀려?”
대외적으로 담덕은 상당히 무서운 왕이었다. 모두 백제와의 전쟁에서 얻은 성과 덕분이었다.
아군은 몇 대를 걸쳐 지지부진하게 치고받았던 남쪽 성들을 순식간에 굴복시킨 것에 대한 경외심을 담아 무신(武神)이라고, 적군은 전쟁에서 무자비하게 칼날을 휘두르며 목숨을 앗아 가는 데에 대한 두려움을 담아 사신(死神)이라고 불렀다.
어느 쪽이든 무시무시하다는 점에서는 똑같았지만 내게 담덕은 그저 담덕일 뿐이었다. 열두 살 때부터 함께 지내 온 친구이자 앞으로도 그렇게 지낼 소중한 인연.
조금 더 후하게 쳐 준다면 미래에 대단한 업적을 쌓을 대왕님 정도는 되겠지.
“그게 싫으시다면 언제든 예의 바른 우희가 되겠습니다, 폐하. 말씀만 하세요.”
나는 다른 시녀들이 담덕에게 하는 모습을 떠올리며 예의 바르고 상냥하게 인사했다. 그러자 금세 담덕의 못마땅한 시선이 따라붙었다.
“내가 널 봐주고 있으니 그런단 뜻이야?”
“아무렴요. 저는 폐하께서 허락하시는 만큼만 선을 넘고, 이해해 주시는 만큼만 무례할 수 있습니다. 그러지 말라 하시면 저는 당장에라도 그 뜻을 따라야만 하는 사람인걸요.”
담덕은 이 나라의 태왕이고 나는 일개 귀족 가문의 여자애일 뿐이다. 아무리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친구라고는 하나, 그가 격의 없는 태도를 불편해했다면 아무리 막나가는 나라도 이런 태도를 고수할 수는 없었다.
결국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었다는 의미였다. 그러니 누울 자리가 없다면 당장에라도 몸을 웅크리는 수밖에.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주겠다는 눈빛으로 담덕을 보고 있으니 그가 장계로 얼굴을 덮으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넌 나를 다루는 법을 너무 잘 알아. 그러니 내가 당해 내겠어?”
혼잣말처럼 작게 중얼거리는 담덕의 목소리에는 한숨이 함께 실려 있었다.
“너만이 나를 태왕이 아닌 담덕으로 대한다. 돌아가신 선대왕께서도 날 아들이 아닌 태자로 대하셨는데…….”
담덕이 얼굴을 가리고 있던 장계를 내리며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그러니 넌 내 유일한 집이다. 마음 놓고 내 진짜를 보일 수 있는. 너도 그걸 믿고 내게 이러는 거지. 내가 그 집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는지, 그 집이 내게 얼마나 간절한지 잘 아니까.”
흔들림 없는 두 눈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그토록 담덕을 휘두르고 있는 걸까?
그렇다기엔 나를 바라보는 담덕의 눈이 너무나도 평온했다. 원망도 소망도 없는 눈빛.
지나치게 무덤덤한 눈빛을 바라보기 힘들어 나는 담덕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그리 말씀하시니 제가 대단한 사람이 된 기분입니다. 전 아무것도 없는 여자애일 뿐인데.”
“넌 대단해. 내가 만난 그 누구보다도 더.”
담덕이 손을 뻗어 고개 돌리려는 나를 끌어당겼다.
예상하지 못한 힘에 순식간에 허리가 굽혀져 몸이 담덕 쪽으로 기울었다. 나는 탁자에 손을 짚으며 겨우 몸에 중심을 잡았다.
“갑자기 왜…….”
갑작스러운 담덕의 행동에 항의하려고 고개를 들자마자 그의 얼굴이 바로 앞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피하려던 눈이 오히려 더 가까워지자 나는 어쩔 줄 몰라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도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담덕의 시선이 느껴져 얼굴이 달아오를 지경이었다.
곤란함에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리고 있으니 담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넌 어찌 이리 말 하나로 나를 정신없게 할 수 있어? 때로는 나를 하늘에 올려놓았다가, 정신을 차려 보면 바닥에 처박아 버려. 이것마저도 내가 자처한 고초인가?”
담덕의 손가락이 내 입술을 매만졌다. 아랫입술을 쓸어내리는 손가락에 묘한 열기가 느껴졌다.
기분이 이상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놓아주면 안 될까?”
“왜? 내가 이러면 싫어?”
담덕이 분위기에 맞지 않는 여상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그 평온함에 나는 더욱 당황스러워졌다.
“싫다기보단…… 조금 당황스럽다고 할까.”
내 말에 담덕이 피식 웃었다.
“애부터 만들자던 사람이 겨우 이런 걸 몰라서 당황스럽다고?”
“그러니까 그건 그냥 농담이라고 말을……”
변명을 쏟아 낼 새도 없었다. 말하려는 순간 무엇인가가 닿아 입을 막은 탓이었다.
익숙한 느낌이었다. 이미 닿았던 적이 있는 것.
놀라서 눈이 번쩍 뜨였다. 예상했던 것처럼 담덕이 내게 입을 맞추고 있었다. 그 모습을 눈으로 확인하자마자 나는 당황해서 그대로 굳어 버렸다.
담덕은 딱딱하게 굳은 내가 우습지도 않은지 손으로 한참을 매만지던 아랫입술을 집요하게 물고 핥은 뒤에야 떨어져 나갔다.
담덕이 나를 붙잡고 있던 손을 놓아주었지만, 넋이 나간 나는 도무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런 농담은 이런 것 정도는 감당할 수 있게 된 후에나 하라고, 연우희. 이것도 감당 못하면서…… 뭐? 애를 먼저 가져?”
굳어 버린 나를 보며 담덕이 무표정한 얼굴로 경고했다.
“나 우습게 보지 마. 네 눈앞에 있는 나 담덕, 고구려의 태왕, 이제 어엿한 사내야. 입 맞추는 것 정도로는 사내로 보이지도 않아? 언제까지 날 처음 만났던 그때의 열두 살 꼬마로 볼 건데?”
담덕이 자리에서 일어서 나를 똑바로 세웠다. 그가 흐트러진 머리를 정돈해 주고 구겨진 옷을 펴 주는 동안에도 나는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내가 모를 것 같아? 언제나 넌 어린 동생 대하듯 날 위에서 내려다봐. 처음 만났던 그때 그 순간부터 단 한 번도 변하질 않았어. 말로는 친구니, 폐하니 하지만 내 눈은 못 속이지.”
나를 바라보는 담덕의 눈이 깊은 머릿속까지 읽어 내릴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넌 그냥 내가 우스운 거야. 아직도 내가 너에게 손을 내밀던 그 어린 꼬마인 줄로만 아는 것 같은데…….”
담덕이 몸을 숙여 내 귓가에 속삭였다.
“날 그런 꼬마로 보고 혼인을 하자고 한 거라면, 연우희 넌 제대로 실수한 거야.”
* * *
담덕을 꼬마로 보고 혼인을 하자 한 거냐고?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소진으로서 살아온 시간과 우희로서 살아온 시간을 합하면 담덕은 내게 한참이나 어린 녀석일 뿐이니까.
그래서 담덕에게 혼인을 하자고 하면서도 다른 부분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담덕은 배경이 필요하고, 나는 그걸 도와주고 싶었다.
그런 단순한 생각만으로 결정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을까?
그러고 보면 담덕도 그런 질문을 했었다. 자신과 ‘진짜 부부가 하는 일’을 할 수 있겠느냐고.
나는 그것이 단순히 황후가 되려는 나의 의지를 확인하는 질문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지만, 어제 담덕의 태도를 보면 꼭 그것만은 아닌 듯했다.
담덕은 정말 나랑 그런 걸 할 생각인가? 입맞춤만으로도 이렇게 머리가 혼란스러운데 그 이상의 것은 어찌하지?
“왜 그러고 있어?”
멍하니 생각에 빠진 나를 보며 운이 물었다.
“예?”
“아니, 왜 그러고 있느냐고? 약초를 구하러 왔다기에 또 길을 잃을까 싶어서 귀한 시간을 내 호위를 자처했더니…… 약초를 앞에 두고 멍하니 앉아 있기만 하잖아.”
나는 운의 타박에 이곳이 어디인지, 내가 이곳에 온 이유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내곤 멈춰 있던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얼마 전 성문사에 왔다가 발견한 약초가 떨어져 채집을 하러 온 참이었다. 먼저 사찰에 들러 순도 스님과 도림에게 인사를 했더니 운이 그것을 보고 약초 채집을 돕겠다 나섰다.
“귀한 시간은 무슨……. 조용한 사찰에서 사람들 눈을 피해 휴양하고 있는 것을 누가 모르나요? 매일이 무료한 와중에 제가 오니 옳다구나 하고 따라나선 거잖아요.”
“너무 사실만 말하니 가슴이 아픈데.”
운이 장난스럽게 자신의 가슴을 움켜쥐며 내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지 말고 말해 주지 그래? 무슨 고민이 있는지. 예전에 내게 고민이 있을 땐 그대가 들어 주었으니, 이젠 내가 도와줄 차례 아닌가?”
나는 약초를 매만지며 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답답해서 누구에게든 조언을 구하고 싶었지만, 운에게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았다.
사실 운이 아닌 어느 누구에게도 하기 힘든 이야기였다.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태왕께서 저와 이렇고 저런 걸 하고 싶다 하시는데 전 어찌할까요?’라고 물을 수는 없지 않나.
“이건 저밖에 해결 못합니다. 그러니 혼자 고민할래요.”
나는 고개를 저어 내 뜻을 알리고는 단검으로 약초를 잘라 냈다.
그러자 운이 기다렸다는 듯 들고 있던 자루를 내밀었다. 나는 그 속에 약초를 넣으며 운에게 물었다.
“그러는 그쪽이야말로 새로운 고민거리가 있지 않습니까?”
“내 고민?”
“영이 말입니다. 이대로 두시려고요?”
내 말에 웃고 있던 운의 낯빛이 조금 어두워졌다. 비로에서 들었던 소노부의 계획이 그 역시 마음에 걸리는 듯했다.
“그 아이는 황후로 살 그릇이 아니야. 심약하여 능구렁이 같은 노인네들의 놀음에 휘둘리기만 할 거다. 어떻게든 그건 막아야 해.”
“하지만 소노부의 고추가께서 강하게 밀어붙이신다면 어찌 될지 몰라요. 폐하께서도 걱정하고 계실 정도인걸요.”
내 말에 운이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 보니 폐하와 혼인을 못 할까 봐 걱정을 하고 있었던 게냐?”
“걱정을 해 주는데 어찌 그리 매도하세요? 폐하와의 혼인은 제게 중요한 문제지만, 그쪽과 영이가 걱정되는 것 역시 사실입니다. 영이와는 짧지만 친분을 쌓았고, 그쪽과는…….”
딱히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말을 흐리니 운이 흥미로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쪽과는, 뭐?”
“그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