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낙화유수-13화 (14/38)

12장. 구부득고(求不得苦)

제신과 나는 수곡성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또다시 늦은 밤까지 이야기의 불을 밝혔다.

“아버지가 확실해.”

제신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지난 몇 달간 아버지를 쫓으며 들은 이야기들을 내게 전하면서 몇 번이고 그렇게 확신했다.

“인상착의가 아버지와 완전히 똑같아. 큰 체격에, 외눈박이, 무엇보다 아버지의 검을 본 사람이 있어.”

“아버지의 검?”

“너도 기억하지? 아버지의 검 자루에 달린 흑요석.”

아버지의 검 자루에는 어른 엄지손톱만 한 크기의 흑요석이 달려 있었다. 검은색이 우리 절노부를 뜻하는 색이었기 때문에 일부러 장식해 둔 것이다.

절노부에서 그런 검을 쓰는 용사는 백부와 아버지, 제신을 비롯한 연씨의 직계들뿐이었다.

도압성 전투에 연씨의 직계는 아버지와 제신만 참여했으니 정말 그 검을 가진 사람이 도압성에서 북부로 향했다면 아버지가 틀림없었다.

“정말 그 사람이 아버지라면 어째서 곧장 국내성이나 절노부로 돌아오지 않고 이리 오랜 시간을 배회하신 걸까? 인근 성에 들러 우리에게 안부를 전하거나 도움을 청할 수도 있었을 텐데.”

내가 줄곧 품고 있던 의문이었다. 제신도 비슷한 고민을 한 것 같았다. 그는 조금 어두워진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내가 어찌 아버지의 뜻을 알겠어? 다만…… 함께 싸운 병사들을 그렇게 잃고, 성까지 함락당했으니 자존심이 많이 상하셨을 거야. 곧장 돌아오기 힘드셨겠지.”

우스운 이유였지만 가능성이 없지도 않았다.

고구려 용사로서 아버지의 자존심은 대단했다. 한쪽 눈을 잃고 자존심이 상해 한동안 앓아누웠던 분이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하긴. 아버지라면 그럴 법도 해.”

나는 웃으며 제신의 말에 동조했다.

“절노부 땅에 있는 하 형님께 연통을 넣었으니, 곧 소식이 들려오길 기다리는 수밖에.”

길게 한숨을 내쉬는 제신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으니 그가 애써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내 이야기는 이 정도로 되었으니, 이제 네 이야길 해 봐.”

“내 이야기?”

“네가 태자 전하, 아니, 우리 폐하와 혼인할 거라는 소문이 파다하던걸. 어찌 이 오라비도 모르는 사이에 정인을 찾은 거냐?”

그렇게 묻는 제신의 얼굴이 짓궂었다. 그 얼굴을 보니 대단한 속사정이 없는데도 괜히 얼굴이 붉어졌다.

“정인이라니……. 나와 폐하가 어찌 그런 사이로 엮여? 태왕께는 절노부의 변하지 않는 충성이 필요하고,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는 혼인이 가장 좋잖아. 나는 견고한 동맹을 위한 고리에 불과한걸.”

“뭐?”

당연한 설명이라고 생각했는데 제신의 얼굴이 굳어졌다.

“폐하와 너의 마음이 통하여 혼인을 약속한 게 아니란 말이야?”

“왜 그리 놀라? 어렸을 적에도 나와 폐하의 혼인 이야기가 나온 적이 있었잖아.”

“정략혼이 싫은 거 아니었어?”

“싫어.”

“그런데?”

“그래도 상대가 담덕이잖아. 애틋한 마음은 아니지만 그를 돕고 싶어.”

“세상에 그런 마음도 있어?”

제신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좋아하지도 않는데 그 사람 잘되라고 혼인을 해 준다고? 말이 되냐?”

혀를 차며 나를 훑던 제신이 곧 진지한 얼굴이 되어 목소리를 낮추었다.

“혹시 백부님께서 강요를 하신 거냐? 나와 아버지가 없다고 네게 그런 강요를 하신 거라면…….”

제신의 생각이 이상한 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손을 내저으며 그의 말을 부정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어디 백부께서 그러실 분이야? 오라버니와 아버지가 안 계시는 동안 내게 얼마나 잘해 주셨는데. 내 열여섯 탄일상도 신경 써서 차려 주셨단 말이야.”

열여섯 탄일이라는 말에 제신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그의 얼굴에서 중요한 날 함께 있어 주지 못한 미안함이 느껴졌다.

무사히 돌아오기만 한다면 특별한 날 함께 있어 주지 못했던 것도 용서해 주마 마음먹었던 참이었으므로, 나는 일부러 유쾌하게 웃으며 머리에 꽂은 비녀를 가리켰다.

“오라버니가 보내 준 비녀를 매일 하고 다녔어. 내 마음에 쏙 들더라니까. 어찌 이리 내 취향을 잘 알아?”

“누이의 취향도 몰라서야 어디 오라비라고 할 수 있겠니.”

들뜬 내 목소리에 제신의 얼굴에도 미소가 걸렸다. 오랜만에 보는 미소였다.

그 모습이 썩 보기 좋아 나는 일부러 더 들뜬 목소리로 이야기를 떠들기 시작했다.

제신은 즐겁게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석현성에서 풀려나 아신 태자의 옥패를 받은 이야기에는 놀란 눈을, 선대왕인 고국양왕의 장례 이야기에는 슬픈 눈을 했다.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구나.”

제신이 작게 중얼거리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 끝에 밝은 달이 걸려 있었다.

나는 제신을 따라 탁자에 턱을 괸 채 은은하게 빛나는 달을 바라보았다.

달은 어느 곳에나 뜨니, 이 밤 우리의 곁에 없는 이들 역시 지금 내 눈에 가득 찬 달을 보고 있을 것이다.

같은 달이 뜨는 하늘 아래 있다는 것.

그것만이 나와 제신의 작은 위안이었다.

* * *

절노부에서는 아직도 소식이 없었다. 제신이 쫓던 외눈박이 사내가 아버지이고, 그가 절노부로 향했다면 벌써 도착하고도 남았을 시간이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기별이 오지 않자 제신은 크게 실망한 눈치였다. 제신은 당장에라도 아버지를 찾아 다시 집을 나설 기세였지만, 백부가 그를 말렸다.

“아직도 성에 차지 않느냐? 그리 오랜 시간을 노력했으면 되었다. 이제 현실을 받아들여야지.”

백부의 말이 옳았다. 백제에 함락당한 도압성에서 사라진 뒤 아직까지 행방이 묘한 사람. 죽었다고 보는 것이 옳았다.

하지만 머리로 생각하는 것과 마음이 납득하는 것은 달랐다. 나와 제신은 쉽게 백부의 말에 납득하지 못했다.

“하지만 제가 쫓았던 이야기 속의 남자가 아버지와 흡사합니다.”

“네가 믿고 싶은 대로 조각을 끼워 맞춘 것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느냐? 정말 네가 쫓던 자가 아비라고 확신해?”

백부의 질문에 제신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외눈박이. 큰 체구. 흑요석 장식이 달린 검.

아버지의 인상착의와 일치하는 이야기였지만, 그런 사람이 이 세상에 하나만 있으란 법도 없었다.

차마 그 사실을 제 입으로 인정할 수 없어 고개를 푹 숙인 제신을 앞에 두고 백부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만했으면 되었다. 내일 성문사로 가 네 아비의 위패를 올리자.”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정말 돌아가신 것이 맞다 하여도 시신조차 없이 어찌 위패를 올립니까?”

제신이 고개를 번쩍 들며 반박했다. 그러나 백부의 뜻도 완고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하면 평생 위패도 올리지 않고 네 아비가 구천을 떠돌게 둘 것이냐? 그것이 네가 바라는 일이야?”

백부가 외침에 제신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럴 리가 없잖습니까.”

제신의 목소리에 금세 물기가 서렸다. 옆에서 지켜보던 나의 목구멍도 시큰해졌다.

“네 아비이기도 하지만, 내 아우이기도 하다. 나 역시 마음이 무거워. 하지만 살아남은 자는, 살아남은 자들의 길을 가야 한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눈이 벌게지는 우리 남매를 보며 백부는 자리에서 일어서 우리의 손을 꼭 잡았다.

“다른 어떤 사람보다 너희들의 아버지가 그걸 바랄 것이다. 제신이 넌 찾을 만큼 찾았다. 우희 넌 기다릴 만큼 기다렸어. 이제 그만 떨치고 나아가야 할 시간이다.”

백부의 손은 다정한 말투만큼이나 따뜻했다. 사람의 온기를 전하는 이 손이 아버지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너무나도 서러웠다.

* * *

아버지의 위패를 올릴 성문사는 소수림왕 시절 지어진 절이었다.

당시 소수림왕은 불교를 대대적으로 들여오며 국내성 인근에 절 두 개를 지었다. 하나가 이불란사, 다른 하나가 우리가 찾은 성문사였다.

흔히 생각하는 사찰이 그렇듯 성문사도 조용한 산중에 묻혀 있었다. 불교가 이제 막 싹을 틔우는 시기인 탓에 찾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덕분에 우리는 무척이나 평온하고 고요한 가운데 아버지의 위패를 올릴 수 있었다.

위패는 성문사를 지키는 승려 순도 스님이 직접 써 주었다.

본래 순도 스님은 전진(前秦) 사람이었는데, 소수림왕 시절 귀화하여 고구려인이 된 후 이곳 성문사를 지키며 사람들에게 불교를 전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위패를 모신 이후 나는 매일같이 성문사를 찾았다. 가장 큰 이유는 아버지의 위패 앞에 향을 피우기 위해서였으나, 한번 찾은 성문사의 고요함이 나의 마음을 끌었던 탓도 있었다.

“오늘도 오셨습니까.”

아버지의 위패 앞에 향을 피우고 있는 내게 순도 스님이 다가왔다. 처음 고구려에 왔을 때 젊은 청년이었다는 그는 이제 어엿한 중년이 되어 있었다.

“스님.”

나는 두 손을 모아 합장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그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마주 인사를 해 왔다.

“아버님이 많이 그리우십니까?”

순도 스님이 연기가 피어오르는 향을 보며 내게 물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립다기보다는……. 아직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마지막 눈감는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하였으니, 아마 평생을 이런 기분 속에 살겠지요.”

“그리움에 향을 피우시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마음에 의심이 있으셨군요.”

“마음에 의심을 안고 향을 피우면 하늘이 노여워하실까요?”

“하늘에 빌고자 향을 피우십니까?”

“그러는 것이 아닌가요?”

나의 질문에 순도 스님이 미소를 지었다.

“하늘의 뜻은 사람의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마음을 다스리면 하늘이 그에 따라 움직이지요. 그러니 이 향을 피우는 것도 하늘이 아닌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기 위함입니다.”

순도 스님이 새로운 향을 태우며 나를 바라보았다.

“괴로움의 근원은 집착입니다. 그 근원을 태우고자 향을 피우는 것입니다. 하여 해탈향이라고도 하지요. 시주께서도 괴로움을 떨치고자 향을 피우신 것 아닙니까?”

“그리 말씀하시니 그런 것도 같습니다.”

마음이 복잡할 때마다 이곳에 와 향을 피웠으니 그 말이 맞는 것도 같았다.

“향을 피우는 것이 저 자신을 위해서라면, 제 아버지의 평온은 어찌 빌어야 합니까?”

“한 사람의 평온은 누가 대신 빌어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그 사람의 평온은 오로지 그 사람 자신에게 달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흔히 자업자득이라 하지요. 스스로 쌓은 업은 다른 사람이 대신 덜어 줄 수 없습니다. 오로지 자기 자신만이 감당할 몫이지요. 시주께서는 윤회라는 말을 아십니까?”

윤회.

소진으로 죽고, 우희로 다시 태어난 뒤 이따금씩 생각했던 말이었다.

지금 내가 한 것이 바로 윤회가 아닐까?

생각에 잠긴 나를 보며 순도 스님이 입을 열었다.

“생명을 지닌 존재들은 모두 여섯 가지의 세상에서 태어나고 죽기를 반복합니다. 이를 육도 윤회라 하지요. 현세에서 쌓은 업에 따라 내세에 태어나는 세상이 달라지고, 또다시 내세에서 쌓은 업으로 내내세의 세상이 결정되지요. 그러면서 우리는 축생이 되기도 하고, 인간이 되기도 하고, 천도에 이르기도 합니다.”

“사람으로 죽어 다시 사람이 되기도 하나요?”

“물론입니다. 현세에 쌓은 업이 그러하다면, 내세 역시 인도(人道)일 수도 있지요.”

“하면 내세에 다시 태어나 지난 현세를 기억하는 사람도 있을까요?”

어째서 나는 전생의 기억을 갖고 있는 것일까?

우희로 다시 태어나며 줄곧 가졌던 의문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 의문에는 답을 해 줄 수 없었다. 나 자신조차도 모르는 이유를 타인이 어찌 찾아 줄 수 있겠나.

그러나 윤회를 공부한 순도 스님이라면 답을 알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물론 그 희망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그런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순도 스님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찌 그런 이상한 질문을 하느냐는 듯한 얼굴이었다.

“하나 제 소견을 말하자면……”

실망감에 씁쓸하게 웃는 나를 보며 순도 스님이 다시 입을 열었다.

“꼭 그리해야 할 이유가 있어서가 아닐까요?”

“예?”

“이 세상에 이유 없이 일어나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현세의 모든 것이 업인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지난 생에 대한 기억을 가진 채로 다시 태어나는 기이한 일이 생겼다면, 분명 그리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어서일 겁니다.”

“그 이유는 어찌 알 수 있을까요?”

“어리석은 중생이 어찌 그것까지 알겠습니까. 다만 모든 답은 스스로에게 있으니, 기이한 일을 겪은 이는 이유를 찾을 수 있겠지요.”

순도 스님이 두 손을 모아 합장하며 고개를 숙였다. 나도 서둘러 손을 모아 그에게 고개를 숙이니, 멀리서 밝은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주님!”

이제는 익숙해진 성문사 동자승 도림의 목소리였다.

올해 여섯 살이 되었다는 도림은 또래에 비해 똘똘한 구석이 있는 소년이었다.

도림과는 아버지의 위패를 올리러 왔을 때 처음 만났다. 이후 사찰을 찾을 때마다 얼굴이 보이기에 몇 번 어울려 주었더니, 이제는 내가 왔다는 소식만 들리면 이리 반갑게 마중을 나올 정도였다.

“애기 스님 오셨습니까?”

도림의 눈높이에 맞춰 몸을 숙이며 물었더니 그가 입을 비죽 내밀었다. 내 말과 행동이 어린 스님의 심기를 거스른 모양이었다.

“애기 스님이 아니라 도림입니다. 제게도 어엿한 이름이 있는데, 시주님께서는 어찌 저를 매번 애기 스님이라 부르십니까?”

여섯 살 어린 스님을 애기 스님이라 부르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당사자에게는 그것이 꽤 자존심 상하는 일인 듯했다.

나는 어린 스님의 장단에 맞추어 큰 실례를 했다는 양 고개를 숙였다.

“제가 그만 실수를 했습니다. 앞으로는 도림 스님이라 부르지요.”

“그리 부탁드립니다.”

그제야 어린 도림의 얼굴이 밝아졌다.

나는 웃으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다가, 이것 역시 아이 취급을 한다며 싫어하겠지 싶어 서둘러 손을 내렸다.

“오늘도 제게 바둑을 한 수 가르쳐 주고자 오셨습니까?”

고요한 산속에 자리 잡은 사찰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몇 가지 없었다.

때문에 도림과 나는 공기 좋은 곳에서 마주 앉아 바둑을 두는 것으로 친구가 되었다.

승자는 대부분 도림이었다. 그는 어린아이였지만 바둑을 두는 머리가 비상했다.

하여 오늘도 바둑을 두자고 온 것인 줄 알았더니, 예상 밖으로 도림이 고개를 저었다.

“오늘 인사만 드리러 왔습니다.”

“인사만요?”

“예. 오늘은 제게 선약이 있거든요.”

나는 의아해져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림을 찾아올 만한 손님이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어릴 적 부모를 잃고 그 길로 불교에 귀의한 어린 스님에게는 가까이 지낼 만한 핏줄이 하나도 없다고 했다.

의아해하는 내게 도림 대신 순도 스님이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저희 사찰에 머무르며 일을 도와주는 분이 계신데, 아마 그분과 선약이 있는 듯합니다. 도림이 요즘 그분에게 바둑을 배우고 있거든요.”

“바둑이라면 날고 기는 도림 스님이 다른 이에게 바둑을 배워요?”

놀라서 물었더니 도림이 턱을 치켜들었다.

“그분의 실력이 보통이 아닙니다. 열 번을 두어 제가 열 번 다 졌다니까요. 그 후로 제가 바둑 스승으로 모시겠다 했지요.”

“그 정도로 바둑을 잘 두는 분이 있단 말입니까?”

도림의 실력도 만만치 않은데, 그가 스승으로 모시겠다 할 정도라면 정말 대단한 실력자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께서도 바둑을 즐겨 두셨지.

문득 떠오른 기억에 얼굴이 절로 흐려졌다.

나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억누르기 위해 바둑이 아닌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한데 여기에는 두 분만 계신 것이 아니었나요?”

그간 성문사를 드나들며 본 사람이라고는 순도 스님과 도림 둘뿐이었다.

사찰의 규모도 그리 크지 않아 두 스님이 꾸려 가는 줄로만 알았는데 일을 돕는 사람이 하나 더 있는 모양이었다.

“원래부터 계시던 분은 아니고, 사정이 있어 잠시 머무르는 분이십니다. 그냥 계셔도 된다 했는데…… 신세를 지니 마음이 무거우셨는지 대신 저희 일을 도와주겠다 하셔서요.”

“그렇군요. 한데 어찌 한 번도 뵙지를 못했습니다. 여기 계속 계셨다면 오가며 마주쳤을 법도 한데요.”

내 말에 순도 스님도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듣고 보니 저도 참 신기합니다. 이리저리 잘 다니시는 분인데, 어찌 시주님께서 오시는 날에는 보이질 않으시네요.”

“아무래도 그분과 저는 연이 아닌가 봅니다. 보름 동안 부지런히 드나들었는데도 지금껏 한 번도 마주치지 못한 것을 보면요.”

“그거야 모르는 일이지요. 언젠가 연이 닿으면 만나실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연이라는 것이 원래 그런 것이니까요.”

순도 스님은 그리 말했지만 지금껏 마주치지 못한 사람과 이제 와 만날 일이 있기는 할까 싶었다.

나는 말없이 웃으며 새가 지저귀는 숲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해가 떨어지고 있었다.

이제는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 * *

“아가씨, 어찌합니까? 길을 잘못 들어도 단단히 잘못 든 것 같습니다.”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산을 둘러보며 달래가 내 팔을 잡아끌었다. 그녀의 목소리에 걱정과 두려움이 가득했다.

“중간에 약초를 캐느라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 아니었는데…… 곤란하게 되었구나.”

나는 주머니에 잘 넣어 둔 약초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흔치 않은 약초가 보이기에 욕심을 내었더니 생각보다 빨리 해가 떨어져 버렸다.

지난 한 달간 몇 번이고 오갔던 길이지만, 어둠이 내려앉은 길은 밝을 때와 완전히 달라 낯설게만 느껴질 뿐이었다.

추위도 만만치 않았다. 해가 떨어진 산은 낮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서늘했다.

나는 손으로 양팔을 비비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노력이 무색하게도 어디를 둘러보나 키가 큰 나무들뿐이었다.

이래서야 방향을 가늠할 수가 없잖아.

어두운 산에는 위험 요소가 너무 많았다. 서둘러 빠져나가지 않으면 산짐승들이 달려들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기 무섭게 멀리서 늑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한두 마리 우는 소리가 아니었다. 적어도 대여섯 마리는 넘을 것 같았다.

“아가씨…….”

내 팔을 붙잡은 달래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두려운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연신 울리는 늑대 울음소리에 온몸의 핏기가 가시는 기분이었다.

재작년 도압성에 가는 길에 만났던 것과 같은 늑대들을 지금 다시 만난다면 대처할 방법이 전무했다.

지금 나와 달래의 손에는 무기로 쓸 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물론 무기가 있더라도 달려드는 늑대를 막기는 역부족일 것이다.

그러니 산짐승과 마주치기 전에 산을 내려가야만 했다.

하지만 마음이 조급해진 탓인지 아무리 걸음을 옮겨 봐도 제자리걸음이라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이런 식으로 걸어서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 방법을 바꿔야 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어. 달래야, 우리 다시 올라가자.”

“예? 내려가지 않고요?”

달래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려가는 길은 여러 갈래지만, 올라가는 길은 하나야. 정상에 성문사가 있으니 어디로든 올라가다 보면 분명 절이 나오겠지. 순도 스님께서도 하루 정도 신세 지는 것은 허락해 주실 거야.”

내 설명에 달래의 얼굴이 조금씩 밝아졌다.

“맞습니다, 맞아요! 그리하면 되겠어요, 아가씨!”

고개를 주억거리던 그녀가 앞장서서 산 위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 나에게 찰싹 붙어 떨던 사람이라고는 생각지 못할 위풍당당한 걸음이었다.

“어엇!”

그 모습이 우스워 작게 웃음을 흘리는데, 갑자기 달래의 모습이 아래로 훅 꺼졌다.

“달래야!”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달래를 붙잡았다. 하지만 내가 위에서 붙드는 힘보다 아래로 떨어지는 힘이 더 강했다.

나와 달래는 그대로 아래를 향해 떨어졌다. 다행히 낙하는 길지 않았다.

“아이고!”

달래가 엉덩이를 문지르며 아프다고 호들갑을 떨어 댔다.

“그리 소란을 피웠다간 산짐승들이 죄 몰려올걸.”

“산짐승!”

산짐승이라는 말에 달래가 입을 꾹 다물었다.

조용해진 그녀를 옆에 두고 위를 올려다보니 그리 높지 않은 절벽이 눈에 들어왔다. 길이 어두운 탓에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아래로 떨어진 듯했다.

“달래야, 올라갈 수 있겠니?”

“예. 별로 높지 않으니 쉽게 올라갈 듯합니다.”

“그래. 그럼 올라가자.”

내 말에 몸을 일으킨 달래가 손을 뻗어 절벽 위를 붙잡았다.

위쪽에 손이 닿으니 탈출은 금방이었다. 달래는 절벽 중간의 돌을 적당히 밟아 손쉽게 위로 올라갔다.

이제는 내 차례였다. 그런데 별생각 없이 몸을 일으키는 순간 발목에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악!”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며 다시 주저앉자 달래가 놀라서 나를 보았다.

“아가씨! 왜 그러세요?”

“발목이 갑자기…….”

“제가 다시 내려갈게요!”

“아니야, 그러지 마.”

나는 손을 들어 내려오려는 달래를 저지했다.

“네가 내려온다고 어찌 날 돕겠어? 어차피 너 혼자서는 날 끌어 올릴 수 없으니, 차라리 걸음을 서둘러 성문사에 가는 편이 좋겠다. 스님께 도움을 청하면 방법이 있을 거야.”

“하지만 그러면 아가씨께선 여기 혼자 계셔야 하는데요?”

달래가 걱정스럽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둑한 산의 풍경이 무척이나 스산했다.

하지만 잠시 혼자 있기가 무섭다고 달래까지 붙잡아 여기서 아침을 맞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잠시뿐인걸. 괜찮으니 서둘러 다녀오기나 하렴.”

잠시 고민하던 달래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올게요. 잠시만 기다리고 계세요!”

“그래.”

달래가 결의에 찬 눈을 하고 사라지자 그제야 다리를 살필 여유가 생겼다.

기껏해야 발목을 접질린 거겠지 뭐.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발목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상황은 내 예상과 전혀 달랐다.

“……뱀?”

내 발 근처를 배회하던 커다란 뱀이 미끄러지듯 자리를 떠나고 있었다.

그제야 발목의 통증이 아릿한 것이 아니라 찌르는 듯 날카로웠던 것이 생각났다.

발목을 접질린 게 아니라 뱀에 물린 거였나?

자세히 보니 발목에 뱀의 이빨 자국이 선명했다.

물린 자리 근처로 발목이 빠르게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불에 데기라도 한 것처럼 화끈한 통증이 뒤따랐다.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였지만, 한편으로는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다행히 신경독이 아닌 출혈독이야.

신경독을 가진 뱀에게 물렸다면 호흡 곤란으로 빠르게 사망에 이를 가능성이 높았지만, 출혈독은 이에 비해 퍼지는 속도가 느렸다.

하지만 신경독에 비해 덜 치명적이다 뿐이지 출혈독도 빠르게 처치를 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했다. 혹 목숨을 건지더라도 독에 당한 부위가 괴사해 잘라 내는 경우도 있었다.

나는 독이 퍼지지 않도록 머리끈으로 상처 윗부분을 꽉 묶었다.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강하게 묶어 두면 이 위로는 독이 퍼지지 않는다.

임시방편이기는 해도 달래가 스님을 모셔 올 때까지 버티기에는 충분할 것 같았다.

승려들은 대체로 의술에 밝았다. 거창하게 의술이라는 걸 모르더라도 약초에 대해서는 꿰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순도 스님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는 절에 자주 들르며 그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약초에 대한 그의 지식이 남다르다는 것을 진즉에 눈치챘다.

그러니 성문사로만 가면 순도 스님께서 이 정도 독은 문제없이 해결해 줄 텐데…….

뱀은 이미 도망갔지만 땅에 무엇이 더 있는지 알 수 없어 바닥에 앉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조심스레 절벽에 몸을 기댔다.

홀로 어두운 산속에 남자 달래와 있을 때보다 주변이 더 고요하게 느껴졌다.

간간이 들려오는 산짐승의 소리가 아직 멀리 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나는지 파악할 수 있는 단서는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그저 달래가 오기만을 기다리며 멍하니 발끝만 바라볼 뿐이었다.

단단히 묶은 발목 아래의 감각이 점점 둔해져 시간이 꽤 흘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생각보다 달래가 돌아오는 것이 늦었다.

혹 성문사에 가지 못하고 산짐승에게 당한 것은 아닐까?

좋지 않은 생각이 먼저 들었지만,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산을 울리는 비명 소리가 먼저 났을 것이다. 다행히도 산은 아직 고요했다.

그렇다면 내가 있는 곳을 찾지 못하는 건가?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산은 어두웠고, 달래와 나는 발길 닫는 대로 무작정 움직인 탓에 방향을 완전히 잃은 뒤였다.

더 오래 기다려야 하나?

나는 걱정스럽게 발목을 내려다보았다. 임시방편으로 독이 퍼지는 것을 막아 두기는 했지만 말 그대로 임시일 뿐이었다.

걱정이 깊어 가는 와중에 근처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바닥의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

수상한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무엇인가 내 근처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려 눈에 띄는 나뭇가지 하나를 대충 집어 들었다.

급하게 집어 든 나뭇가지는 사나운 산짐승에게 작은 생채기조차 내기 힘들 정도로 빈약했다.

그래도 손에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는 이거라도 드는 게 낫겠지.

나는 양손으로 나뭇가지를 단단히 틀어쥐고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예상대로 소리는 내 쪽으로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큰 짐승이라기에는 발소리가 가볍다.

하지만 나뭇가지가 부러질 정도였으니 완전히 작은 짐승도 아니다. 몸이 긴장으로 굳어졌다.

그냥 지나가라, 그냥 지나가.

나는 내게 가까워지는 소리가 이대로 나를 스쳐 가기를 바라며 주문처럼 같은 말을 반복했다.

하지만 소망이 무색하게도 바로 머리 위의 절벽에서 발소리가 멈추었다.

동시에 피 냄새가 코로 쏟아졌다. 두려움에 몸이 절로 떨렸다.

어떡하지? 도망쳐? 나뭇가지를 휘둘러?

다음에 취할 행동을 고민하는 그때, 머리 위가 확 밝아졌다.

뭐지?

나는 서둘러 절벽 위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누군가가 횃불을 들고 서 있었다. 타오르는 불길에 가려진 탓에 서 있는 사람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으나, 체격을 보면 어른 남자였다.

달래가 도움을 제대로 청했구나!

나는 안심하여 나뭇가지를 든 손을 아래로 내렸다.

“순도 스님이십니까?”

짐작되는 이름을 불렀으나 상대는 대답이 없었다. 의아해져서 살짝 고개를 트니, 불길에 가려져 있던 얼굴이 살짝 드러났다.

“……어?”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이 자리에 있을 수 없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나는 믿을 수 없어 눈을 비볐다. 하지만 몇 번이나 반복해도 눈앞에 선 사람의 얼굴은 변하지 않았다.

“……해운?”

나는 설마 하는 심정으로 운의 이름을 불렀다. 행색과 분위기가 내가 기억하던 것과는 많이 달랐지만, 얼굴은 분명히 그였다.

입에서 운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 상대가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가벼운 몸짓으로 절벽을 타고 아래로 내려와 내 곁에 섰다.

나는 얼떨떨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내가 지금 선 채로 꿈을 꾸나?

멍하니 눈을 깜빡이고 있으니 운이 횃불을 든 채로 몸을 숙였다.

“다쳤다던데.”

놀란 내 모습은 보이지도 않는지 운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횃불을 들지 않은 손이 치마를 살짝 들어 내 발목을 살폈다.

“독사에 물렸구나. 이 꼴로 산짐승이 돌아다니는 산에 홀로 남았다니, 대책 없는 것은 여전해.”

그렇게 말한 운이 고개를 들어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내 눈이 크게 뜨였다.

절벽 위에 있을 때는 횃불에 가려 보이지 않던 운의 왼쪽 눈이 안대로 가려져 있었던 것이다.

“빨리 돌아가서 순도 스님께 보여야겠다.”

놀란 나를 빤히 보면서도 운은 횃불만 건넬 뿐이었다.

하지만 내 손에는 아직 빈약한 나뭇가지가 들려 있었다. 그것을 본 운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걸로 다람쥐나 죽이겠느냐?”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는 나을 듯하여.”

굳어 있는 입을 움직이니 겨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스스로가 듣기에도 많이 억눌린 소리였으나 운은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무것도 없는 것과 매한가지다. 그러니 그건 버리고 횃불이나 들어.”

그러나 놀라움으로 몸이 굳어 버린 탓에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버리는 것도 못하느냐?”

결국 운이 내 손에서 나뭇가지를 빼내고 그 자리에 횃불을 쥐여 주었다.

나는 운이 하는 양을 멍하니 지켜볼 뿐이었다. 아직까지도 현실감이 없었다.

목소리도 들리고, 만져지기도 한다.

“그럼 귀신은 아닌데.”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흘러나온 말에 횃불을 쥐여 주던 운이 피식 웃었다.

“그래. 나 귀신 아니다.”

“하면 어찌 여기에 있습니까?”

귀신이 아니라는 운의 확답이 신호탄이었다. 멍하던 정신이 서서히 선명해졌다.

“행방이 묘연해 소노부에서 그리 찾아도 못 찾았다던 사람이, 다른 곳도 아닌 이곳 국내성에 있다고요?”

“소노부에서 나를 열심히 찾기는 하더구나.”

“집에서 찾는 것도 알고 계셨군요. 한데 어찌 나타나지도 않고 여기에서 이러고 계십니까? 게다가 눈에 그것은 또…….”

속으로 말을 삼키며 안대를 바라보니 웃고 있던 운의 미소가 굳어졌다.

“지금 이 자리에서 할 이야기는 아닌 듯한데.”

확실히 가벼이 꺼낼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운이 등을 돌렸다.

“업혀라. 절벽을 타고 올라가야 하니.”

“……절 업고 절벽을 오르겠다고요?”

“왜? 널 떨어뜨리기라도 할까 봐?”

“그것이 아니라…….”

나는 불안한 눈으로 절벽을 바라보았다. 혼자 오르기에는 간단해도 누군가를 업은 상태에서는 쉽지 않아 보였다.

“시간 없다. 빨리 업히라니까!”

하지만 운의 태도가 단호했다. 나는 머뭇거리며 그의 등에 업혔다.

* * *

괜찮다 장담했던 운의 태도는 허세가 아니었다.

운은 한 손으로 나를 받치고, 다른 한 손으로 벽을 짚어 거리낄 것도 없이 순식간에 절벽을 타고 올랐다.

무사히 절벽 위로 올라와 위를 향해 걷기 시작하자 이제는 다른 것이 마음에 걸렸다. 손에 든 횃불이었다.

“불을 꺼야 하는 거 아닐까요? 이걸 보면 산짐승들이 몰려올지도 모르는데…….”

산짐승들은 불빛에 예민했다. 순식간에 사람의 위치를 알아차리고 공격을 할지도 모른다.

“내려오는 길에 보이는 녀석들은 죄 죽였으니 상관없을 것이다. 나타나도 내가 처리할 수 있으니 길이 잘 보이게 제대로 들고 있기만 하면 돼.”

그제야 운의 허리춤에 검이 걸려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절벽 위에서 훅 끼쳐 왔던 피 냄새의 정체가 운이 죽인 산짐승의 것이었다는 것도 역시 알 수 있었다.

“지금 성문사에 신세를 지고 있다는 분이 그쪽이었습니까?”

“그래.”

운은 짧게 말했지만 그 속에 얼마나 많은 사연이 들어 있을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불가에 귀의하지는 않았다고 하나, 절에서 신세를 지고 계신 분이 함부로 살생을 해도 됩니까?”

나는 사정을 묻기 위해 몇 번이나 입을 오물거리다 결국 실없는 소리만 꺼내 놓았다.

원래 나와 운이 무거운 이야기를 하던 사이도 아니고, 다짜고짜 지난 사연을 묻기가 힘들었다.

우습지도 않은 질문에 산 위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던 운이 헛웃음을 흘렸다.

“지금까지 내가 쌓은 업이 이미 차고 넘치는데, 거기에 산짐승 몇 마리 더해 봐야 무슨 차이가 있다고.”

“무슨 업을 그리 쌓으셨는데요?”

“글쎄. 무슨 업을 얼마나 쌓았는지 나도 모르겠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일이 벌어지고, 사람들이 휩쓸리고, 다치고, 죽고…… 그러니 내가 어디 내 업을 가늠할 수나 있겠어?”

도압성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나는 무어라 말하기가 힘들어 몇 번이나 말을 골랐다.

“태풍이 불었는데 그게 왜 그쪽 탓입니까? 그쪽도 그냥 휩쓸린 것뿐인데.”

“내가 없었다면 오지 않았을 태풍이다. 결국 나의 업인 거지.”

“그래서 여기에 이러고 있다고요?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내 질문에 운이 소리 내어 웃었다.

“그거 묻지 않으려고 산짐승 이야길 꺼낸 거 아닌가?”

그랬다. 무거운 이야기를 꺼내지 않으려고 일부러 다른 이야길 꺼냈던 건데, 결국 얼마 가지도 못하고 곤란한 이야기였다.

“그건…… 그랬지만…….”

당황해서 우물거리고 있으니 운의 웃음소리가 더 커졌다.

“해가 바뀌었다고 조금은 진중해진 것인가 했더니…… 그대는 여전하네. 여전히 대책 없고, 돌아가는 법도 몰라. 하지만…….”

말이 이어질수록 운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결국 입을 꾹 다문 그가 한참의 침묵 끝에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태풍을 부른 것이 아니니 나의 업이 아니라 했지.”

“네. 그랬습니다.”

“그 태풍에 휩쓸린 사람 중에 그대의 아버지가 있다 해도…… 똑같이 말해 줄 건가?”

말투는 가벼웠지만 내용은 그렇지 않았다.

이상한 기분에 대답을 못 하고 있는 내게 운이 말했다.

“그대의 아버지가 나 때문에 죽었다고 해도, 똑같이 말해 줄 거야?”

아버지가 죽어? 그것도 운 때문에?

순간 머릿속이 멍해졌다.

아버지의 위패를 절에 모시고 나서도 나와 제신은 그의 죽음을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상태였다. 한데 운이 아버지의 죽음을 입에 올렸다.

“나 좀 내려 줘요.”

“네 다리가……”

“내려 달라고요. 얼굴 보고 이야기해요.”

내 말에 운의 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나는 몸을 틀어 운의 등에서 내려왔다. 분명 발목이 아파야 하는데, 조금 전 들은 말로 머릿속이 복잡해 그쪽은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나는 운의 어깨를 붙잡아 그를 돌려세웠다.

“똑바로 말해 봐요. 이상하게 말 돌리지 말고. 내 아버지가 죽었어요? 어찌 죽었는데요? 당신이 그걸 봤어요? 확실해요? 거짓말이 아니라?”

쏟아지는 의문과 함께 횃불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횃불에 허공에서 흔들려 운의 얼굴을 비춘 불이 위태롭게 일렁거렸다.

“네 아버지는…….”

천천히 입을 떼는 운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연 장군은 도압성에서 죽었다. 빠져나가지 못한 병사들의 퇴로를 확보하려고 끝까지 버티셨어. 덕분에 많은 병사들이 무사히 도압성을 빠져나갔다. 하지만 결국 밀려든 백제군을 감당하지 못하고 당하셨어.”

“성벽에 목이 걸리지 않았다 했어요. 성안에서 돌아가셨다면 분명 효수가 되었을 텐데, 그러지 않았으니 성을 안전히 빠져나가신 거라고 했어요. 다들 그렇게 말했어요.”

“성은 빠져나오셨어. 하지만 안에서 입은 상처가 너무 깊었다. 다지홀로 가 도움을 청하려고 했지만 움직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어서 성 근처를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 그대로…… 돌아가셨어.”

화살처럼 날아든 선언에 몸에서 힘이 빠졌다.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휘청거리는 내 몸을 운의 팔이 받쳐 주었다.

나는 운의 손을 뿌리치고 스스로 중심을 잡았다.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다.

“하면 시신은요.”

“불에 태웠다. 들짐승의 먹이로 남게 할 순 없어서.”

“마지막을 그쪽이 수습했다는 건가요?”

“……그래.”

단순히 전해 들은 이야기가 아니었다.

운은 아버지의 죽음을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그의 시신을 수습하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여태까지 침묵하고 있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리 잘 알면서 여태까지 왜 말하지 않았어요? 오라버니가 얼마나 아버지를 찾았는데, 내가 얼마나 아버지 생각을 많이 했는데. 왜 나타나지 않고 우리가 계속 미련 속에 살게 했어요? 도대체 왜요?”

의문과 원망이 뒤섞여 목소리가 엉망이었다. 운은 쏟아지는 내 비난을 들으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죽은 사람처럼 살고 싶었으니까.”

한숨처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운이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며 조금 더 분명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죽은 사람처럼 살고 싶었어. 누구에게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그렇게 서서히 기억에서 잊히고, 그리하여 다시는 태풍이 오지 않도록, 그렇게 살려고 했어.”

아버지가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와는 다른 이유로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죽은 사람처럼 살겠다니.

그런 결심을 하는 것이 가능한가. 사람은 모두 죽지 않기 위해 사는데, 살면서도 죽은 것처럼 있겠다는 그 말이 가능하기는 한가.

운을 바라보는 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런 생각까지 하게 된 운의 심정이 어떨지 상상하기 어려웠다.

입술을 질끈 깨무는 내게 운이 품 안을 뒤져 무엇인가를 내 앞에 내밀었다. 자세히 보니 흑요석 장식이었다.

흑색의 영롱한 보석 장식이 무척이나 눈에 익었다. 나는 금세 장식의 정체를 알아챘다.

“아버지의 검에 있던…….”

운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 손에 장식을 건넸다. 뻣뻣하게 펴진 손바닥 위에 장식이 떨어졌다.

“연 장군의 마지막 유품이야. 검은 용사와 한 몸이니 네 아버지를 태운 곳에 함께 두고 왔지만, 장식 정도는 전해 줄 수 있을 듯하여.”

운은 굳은 내 손을 감싸 주먹을 쥐게 했다. 아버지의 유품이 내 손에 완전히 전해지는 순간이었다.

“이것만은 너희에게 전해야 했어. 그래서 국내성으로 온 거야. 한데 막상 국내성에 와 너희를 보니…… 차마 용기가 나지 않더라.”

운이 힘없이 웃었다. 힘 빠진 미소에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담겨 있었다.

나는 눈앞의 이 커다란 남자가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작고 위태로워 보였다.

“도압성이 그리되어 연 장군이 죽은 건 나 때문인데, 내가 그 가족에게 유품을 전해 줄 자격이 있기나 한가. 그걸 전해 주는 것마저 사실은 내 마음 편하자고 하는 욕심 아닌가. 혹여나 모습을 드러냈다가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 밝혀지면 또다시 태풍이 부는 건 아닌가.”

나는 도압성 전쟁에서 아버지를 잃었는데, 이 사람은 자기 자신을 잃었구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했어. 이것 역시 변명에 불과하겠지만.”

빤히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는 내 시선에 운이 어색하게 웃었다.

“때리고 싶으면 때려라. 내가 이 모든 일의 원흉이니, 아비를 잃은 넌 내게 그리할 자격이 있어. 네 마음대로 해라.”

그렇게 말한 운이 두 팔을 벌렸다. 정말 무엇이라도 받아 주겠다는 얼굴이었다.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죽이고 싶으면요?”

예상하지 못했던 말인지 어색하게나마 웃고 있던 운의 입매가 완전히 굳어졌다.

나는 그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내가 당신이 원망스러워 죽이고 싶다고 하면요? 그래도 그리하라 할 건가요?”

“아니. 그건 내게 너무 편한 결말이잖아.”

망설임 없이 대답이 돌아왔다.

“난 살아야 해. 살아서 기억하고, 감당하고, 더 이상은 이런 일이 없도록 막아야지. 그러니 죽어 주는 것은 못하겠다.”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어요.”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더 이상 두 발로 서 있을 힘이 없었다.

아래로 무너지는 나를 보며 운이 당황하며 몸을 숙이는 것이 보였다.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그를 향해 외쳤다.

“당신은 너무 이기적입니다. 모두 당신 탓으로 돌리고 미워하라는데, 죽은 사람보다 못하게 살겠다는 사람을 내가 어찌 미워합니까? 당신을 미워하게 하려거든 더 뻔뻔하게 나왔어야죠!”

“……그러지 못해 미안하다.”

“그러니까 그렇게 미안해하지 말라고요. 도대체 뭐가 미안한데요? 당신이 왜 미안해하냐고?”

이번에는 대답이 없었다.

답답함에 씩씩대던 나는 그대로 운의 옷깃을 끌어당겨 그곳에 얼굴을 묻었다.

정말로 아버지가 죽었다는 것을 알아 슬프고, 눈앞의 이 남자가 답답하고, 그럼에도 누구 하나 원망할 사람이 없어서.

결국 나는 서럽게 울음을 터트렸다.

* * *

내 예상처럼 순도 스님은 능숙하게 뱀에 물린 내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

거머리를 써 독이 퍼진 피를 빨아내게 하고, 물린 자리에 직접 만들었다는 하얀 가루를 뿌려 주었다.

하얀 가루의 정체를 넌지시 물었더니 말린 뚝새풀을 갈아 만든 가루라고 했다.

뚝새풀에는 독을 풀고 부종을 진정시키는 효능이 있었다. 나의 상황에 딱 필요한 효능이었다.

치료를 마친 스님이 방을 나서자 나와 운만이 어색하게 남겨졌다.

운은 특별히 할 말이 없는지 입을 꾹 다문 채 자리만 지키고 있었고, 나는 조금 전 그의 옷을 붙잡고 엉엉 울어 버린 것이 민망해 말을 붙이기 힘들었다.

이 상태로 있다가는 날이 밝을 때까지 어색한 상태로 있을 것 같았다. 결국 내가 나서야 했다.

“근래에 제가 여기 자주 왔던 거 전부 알고 있었죠?”

“그래. 들키지 않게 잘 피해 다녔는데 결국 일이 이렇게 되었구나.”

“그렇게 열심히 피해 다녔으면서 아까 절벽에는 왜 온 겁니까?”

“네 몸종이 달려와 우리 아가씨를 좀 살려 달라고 난리를 피웠다. 큰일이라도 난 줄 알고 더 이상 몸을 숨기고만 있어선 안 되겠다 생각했지. 내 뜻대로 살겠다고 네 위험을 모른 척한다면 후에 장군을 뵐 낯이 없을 듯하여.”

“달래도 참…….”

달래가 상황을 과장해도 보통 과장한 게 아닌 모양이었다. 나는 민망함에 볼을 긁적이며 안대로 가려진 운의 눈을 가리켰다.

“그 눈은 어쩌다 그랬습니까? 안 보이는 건가요?”

“아.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운이 멋쩍게 웃으며 안대를 풀었다. 왼쪽 눈과 눈썹 사이에 길게 흉이 나 있었다.

“도압성에서 싸우다가 검에 베였는데 다행히 상처가 깊지는 않았어. 하지만 제때 치료를 못했더니 보기 나쁘게 흉이 남아서…… 마주칠 때마다 사람들이 놀라기에 흉터를 가리려고 안대를 하고 있었다.”

“그럼 멀쩡한 눈을 그리 가리고 다녔단 말이에요?”

나는 놀라서 그의 손에서 안대를 빼앗아 들었다.

“그러다 멀쩡한 눈이 상합니다. 그다지 흉하지도 않은데 뭐하러 가리고 다녀요?”

내 말에 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흉하지 않아? 하지만 만나는 사람마다 내 얼굴을 보면 놀라기에…… 심약한 아낙들이라 그랬나?”

“흉터가 크면 얼마나 크다고 그걸 보고 놀랐겠어요? 다른 이유가 있었을걸요. 시골에 훤칠한 사내가 나타나서 놀랐는지도 모르죠.”

확실히 흉이 크기는 했지만 운의 인상이 강하지 않은 탓에 무섭다는 느낌은 없었다.

“오늘부터는 그냥 다녀요. 이건 제가 버릴게요.”

나는 심드렁하게 말하며 안대를 화로에 던졌다.

“도대체 언제부터 이걸 하고 있었어요?”

“도압성에서 동음홀 쪽으로 이동하면서부터.”

“그럼 한참이나 이러고 있었단 말이잖아요!”

나는 어이없다는 듯 운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놀란다고 제대로 보이는 눈을 가리고 다니다니.

“불편하지도 않았어요? 거리가 제대로 잡히지 않았을 텐데.”

“대단한 일을 하면서 다닌 게 아니니까. 그냥 바다를 보면서 무작정 걸었어.”

“바다를…….”

그 말을 들으니 제신이 편지에 썼던 말들이 떠올랐다.

해안을 따라 국내성으로 가까워지는 이동 방향, 외눈박이, 흑요석 장식.

“오라버니가 쫓던 사람이 아버지가 아니라 그쪽이었군요.”

“제신이가 내 뒤를 따라왔어?”

“아버지인 줄 알고 그랬던 거지만…… 결과적으로는 그쪽을 따라간 것이 됐네요.”

그 사실을 알게 되면 제신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비로소 아버지의 죽음을 확인하게 되어 슬퍼할까? 오랜 친구의 생환을 반가워하며 기뻐할까?

나는 한숨을 내쉬며 운에게 물었다.

“오라버니께는 어찌 말할 겁니까?”

“글쎄…… 어찌 말하면 좋겠느냐?”

“제 의견을 묻는 것입니까?”

“네 오라비이니 네가 제일 잘 알 것 아니냐. 어찌하면 그 녀석의 원망을 덜 듣겠어?”

“이제 와 원망이 무섭습니까?”

나는 코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저한테 했던 것처럼 하십시오. 두 팔을 딱 벌리고, 때리고 싶은 만큼 때려라. 그렇게 하세요.”

일부러 운의 목소리를 따라하며 말했더니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럼 제신이는 정말로…….”

“정말로 때리겠죠. 진짜 죽기 전까지 때릴지도 몰라요.”

내 말에 운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 웃음도 어딘가 시원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진지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 말은, 그렇게 맞고 속 좀 시원해지라고요. 지금처럼 답답하게 웃지 말고. 보는 사람이 더 답답해요, 지금 모습은.”

운이 여전히 어색하게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할 말이 있는 듯 몇 번이나 달싹였지만, 끝내 다른 말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 * *

상황을 정리하자면 이랬다.

며칠 후 운은 정말로 내가 조언했던 것처럼 제신의 앞에서 두 팔을 벌린 채 ‘날 때리고 싶은 만큼 때려라’고 말했고, 제신은 정말로 죽기 직전까지 운을 때려 곤죽을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지금이었다.

나와 제신은 아버지의 위패 앞에서 향을 피우며 멀리 사라지는 연기를 바라보았다.

그간 몇 번이나 아버지의 위패 앞에서 향을 피웠지만, 오늘처럼 진심인 것은 처음이었다. 나와 제신은 마음 깊은 곳에서 아버지의 명복을 빌었다.

그 옆에 운이 멀뚱히 서 있었다. 제신은 못마땅한 얼굴로 그의 옆구리를 쳤다.

“뭐해?”

“뭘?”

“너도 피워.”

“내가?”

“그럼 안 할 생각이냐?”

제신이 운의 손에 억지로 향을 쥐여 주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운이 아버지의 위패 앞으로 다가가 향을 피웠다.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며 운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슬픈 것도 같았고, 홀가분한 것도 같았다.

“계속 여기서 지낼 생각이야?”

제신의 질문에 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도 잘 찾지 않고 조용한 곳이다. 숨어 있기에 좋아.”

“평생 숨어 살 수는 없잖아.”

“내가 나타나면 아버지께서 또 쓸데없는 생각을 하실 거야. 이편이 모두에게 좋아.”

“다른 사람에겐 모르겠지만, 너에겐 좋지 않은 결정이야. 그걸 보는 나도 마음이 편치 않고.”

제신이 한숨을 내쉬며 운의 어깨를 붙잡았다.

“평생을 이렇게 살 수는 없잖냐.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는 알지만, 이것도 일종의 회피야. 부딪칠 생각이 있다면 더 제대로 부딪쳐야지 않겠어?”

“무슨 말을 하고 싶은데? 생각한 것이 있다면 그냥 말해.”

“난 차라리 네가…… 폐하의 측근이 되면 어떨까 해.”

“뭐?”

“네가 완벽한 폐하의 사람임을 알린다면 많은 문제가 해결될 것 같은데. 네 생각은 어때?”

일리가 있는 말에 운이 입을 꾹 다물었다. 고민하는 운의 모습에 제신이 말을 덧붙였다.

“너도 알지? 고구려에 태왕을 돕는 특별한 조직이 있다는 거.”

“비로(祕獹)를 말하는 거야?”

비로는 태왕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키는 친위대이자 뒤로는 비밀스러운 첩보를 수행하는 간자들이었다.

때문에 비로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었다. 그런 조직이 있다는 것만 유명할 뿐 누가 비로에 속해 있는지도 비밀에 부쳐졌다.

물론 개중에서도 대외적으로 알려진 자가 있기는 했다. 태림과 지설이었다.

두 사람처럼 태왕의 호위를 수행하는 자들은 어쩔 수 없이 비로라는 정체가 드러났다.

“그래. 네가 비로가 되면 어때?”

제신의 말에 운이 피식 웃었다.

“소노부의 장남이 어찌 비로가 돼? 말이 안 되잖아.”

“누가 비로가 되느냐는 비로의 수장이 결정해.”

“그러니 하는 말이야. 비로의 수장이 어찌 나를 믿고 태왕의 측근으로 받아 주겠어?”

“나야.”

제신이 짧게 말했다. 운은 그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무엇이?”

“비로의 수장.”

“뭐?”

“내가 비로의 수장이야.”

“……언제부터?”

“아버지의 위패가 이곳에 모셔진 이후로.”

“장군께서 비로의 수장이었어?”

제신이 대답 대신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하지 못한 말에 운이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럼 네가 그렇게 열심히 장군의 행방을 찾아 나선 이유는 단순히 아버지의 행방을 찾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수장을 찾기 위해서라는 이유도 있었어.”

제신이 그리 말하며 내 눈치를 살폈다. 나도 지금의 이야기는 처음이었다.

“전혀 몰랐어.”

“원래 말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니까.”

“하면 지금은 왜 말하는데?”

내 질문에 제신이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난 지금 운이와 우희, 너희 둘 모두에게 비로가 되어 달라고 말하는 거야.”

“뭐?”

나와 운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주 본 운의 눈에 경악이 가득했다.

“운이 넌 수에 밝아. 다른 사람들이 한 수 앞을 볼 때, 넌 열 수 앞을 보지. 바둑을 잘 뒀던 것도 수읽기에 능해서잖아? 비로에는 그처럼 큰 그림을 보는 자가 필요해.”

“나에게 제안하는 건 그렇다고 쳐. 하지만 네 누이에게도 비로가 되라고? 대책 없이 나서길 좋아하는 이 녀석에게?”

“전면에 나서서 첩보를 수행하는 역할을 맡기고 싶은 게 아니야.”

어이없다는 듯한 운의 말에 대답한 제신이 이번에는 나를 바라보았다.

“우희, 너에겐 지금 비로 사람들이 갖지 못한 놀라운 재주가 있어.”

길게 듣지 않아도 무슨 재주를 말하는 것인지는 알 수 있었다. 내가 가진 놀라운 재주라면 하나뿐이었다.

“의술을 말하는 거구나.”

내 말에 제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임무를 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