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낙화유수-12화 (13/38)

11장. 즉위

한 해가 지나고 정월. 태왕은 건강상의 이유를 들어 태자 담덕에게 양위하고 왕위에서 물러설 것을 선언했다.

백부는 소노부의 반발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걱정했으나, 그들은 왕위보다는 운의 행방을 찾는 일에 더욱 집중하고 있었다.

왕으로서의 정통성을 내세울 수 있는 인물은 담덕을 제외하면 운이 유일했다.

소노부는 한동안 조용히 숨을 죽이며 운의 행방을 찾아 나섰지만, 그다지 성과는 없었다. 아마 운을 찾을 때까지는 비슷한 상황이 계속될 터였다.

물론 운이 살아 있느냐, 죽었느냐에 따라 그 뒤의 행보는 완전히 달라지게 될 것이다.

그러는 동안 양위 준비가 착실히 진행되어 마침내 5월, 담덕이 열일곱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비로소 새로운 왕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담덕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중원의 연호를 버리고 고구려만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겠다 선포했다. 강력한 독립 국가로서의 위상을 바로잡고,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는 굳건한 왕권을 세우겠다는 이유에서였다.

새로운 연호는 영락(永樂)으로 정해졌다. 그러니 오늘부터는 영락 원년이 되는 셈이었다.

본래 즉위와 함께 담덕과 나의 국혼이 예정되어 있었으나, 건강이 급격히 악화된 선왕의 죽음으로 장례가 먼저 치러졌다. 선왕에게는 고국양왕이라는 이름이 내려졌다.

담덕은 한동안 슬픔에 빠졌다.

담덕은 아버지를 지키겠다고 일면식도 없는 소녀에게 손을 내밀었던 소년이었다. 그런 그가 아버지를 잃었으니 그 슬픔이 얼마나 깊을지는 분명했다.

그즈음부터 나는 절노부의 국내성 거처를 떠나 궁에서 지내기 시작했다. 혼인이 늦어지는 대신 나를 궁에 두어 절노부와 담덕의 관계를 보여 주려 한 것이다.

혼인을 약속해 놓고도 담덕과 나의 관계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우리는 여전히 좋은 친구였고, 주변 사람들은 그 점을 신기하게 여겼다.

“참으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지설이 뚱한 얼굴로 내 뒤에 따라붙었다. 궁 밖에 과편을 사러 나간다 하니 몇 번을 말려도 그가 기어이 따라나선 것이다.

궁에 들어온 이후 지설과 태림은 돌아가며 담덕과 나를 호위하고 있었다. 오늘은 지설이 나를 지키는 날이었다.

“무엇이요?”

“폐하와 아가씨 두 분 말입니다. 분명 약혼을 하셨다 들었는데, 어찌 도압성에 가실 때와 달라진 것이 없습니까?”

“달라져야 할 이유가 있나요? 약혼이 뭐가 그리 대단한 것이라고.”

“완전히 다릅니다. 약혼을 하면 곧 혼인을 한다는 뜻인데, 두 분께선 부부가 될 사이로는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내가 담덕과 약혼한 것이 알려진 후로 지설의 태도는 조금 더 깍듯해졌다.

그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백부마저도 나를 대할 때 더 이상 하대하지 않았다.

“어찌하면 부부가 될 사이처럼 보이는데요?”

“예를 들면……”

“예를 들면?”

주변을 둘러보던 지설이 저잣거리에서 사내 하나를 끼고 다정하게 웃고 있는 유녀를 가리켰다.

나의 시선이 지설의 손끝을 따라 움직였다.

“저렇게 다정히 팔짱도 끼고, 귓가에 이야기도 속삭이고 그리해야 부부가 될 사이처럼 보이는…….”

눈에 보이는 유녀와 사내의 모습을 설명하던 지설의 말이 점점 느려졌다.

“왜 말을 하다 말아요?”

내가 의아해서 물으니 지설이 답지 않게 당황하며 내 앞을 가로막았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과편을 사러 가신다 했지요? 어서 갑시다.”

눈에 띄게 당황하는 지설의 태도가 수상쩍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의 얼굴을 살폈다.

“그리 본다고 뭐가 달라집니까? 어서 과편이나 사러 가자니까요.”

“지설, 과편을 사려면 지설이 막고 있는 그 방향으로 가야 하거든요?”

“예?”

내 말에 지설이 낭패라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뒤를 힐끗거렸다.

“다른 쪽으로 가시죠. 다른 쪽에도 과편 정도야 팔 겁니다.”

“과편 정도야 팔겠지만, 내가 제일 좋아하는 집은 저쪽이란 말이에요.”

“사람이 살면서 다양한 걸 시도해 봐야지 하나만 계속 고집하는 건 좋지 않은 태도입니다.”

“세상에. 겨우 과편 하나에 그런 대단한 가르침을 받을 줄은 몰랐네요.”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지설을 지나쳤다. 하지만 금세 그가 내 앞을 다시 막아섰다.

나는 피하고, 지설은 막아서고.

몇 번이나 그것이 반복되니 나도 황당해졌다.

“빨리 사서 돌아가요. 왜 이러는데요? 도대체 뭐가 있기에 날 못 가게 막아요?”

나는 지설의 몸을 붙잡고 고개만 쭉 빼 그가 그토록 가리고 싶어 한 풍경으로 눈을 돌렸다.

하지만 별다른 것이 없었다. 여전히 지설이 가리켰던 ‘부부란 이래야 한다’는 유녀와 사내만 있을 뿐이었다.

“아무것도 없는데 왜 나를…….”

한숨과 함께 말을 잇던 내 목소리가 점점 줄어들었다. 그것을 느낀 지설이 올 것이 왔다는 양 제 머리를 짚었다.

“닮은 사람입니다.”

“난 아무 말 안 했어요.”

“예. 압니다. 그래도 그냥 닮은 사람입니다.”

“그래요? 우리 도련님과 꼭 닮은 사람이 국내성에 있는 줄은 몰랐네요.”

나는 유녀의 어깨에 손을 얹고 있는 사내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리 보고 저리 보아도 담덕이었다.

그러고 보니 운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국내성 유녀들 사이에서 유명한 난봉꾼이 있는데 그 사람의 이름이 가륜이라고.

설마 그게 정말 담덕이었단 말이야?

나는 생각지 못한 사실에 얼떨떨해졌다.

“오늘 정무가 바쁘시어 오찬은 함께하지 못하겠다 하시더니…… 그 정무가 바로……?”

담덕의 일정을 지설이 모를 리가 없었다. 의뭉스럽게 지설을 바라보니 그가 내게서 눈을 돌렸다.

“아가씨께서 생각하시는 그런 게 아닙니다. 제가 장담합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줄 알고요?”

내가 눈을 깜빡이며 묻자 지설이 묘한 얼굴을 했다.

“사내와 여인이 저리 다정히 있는데, 다른 생각이 전혀 안 드십니까?”

“우리 도련님은 여인을 많이 만나셔야 하는 분인걸요. 오히려 좋은 거 아닌가요?”

“허어? 그게 무슨…….”

지설이 헛웃음을 흘리며 나를 보았다. 그 소리에 유녀가 우리 쪽을 바라보았고, 담덕의 시선도 그녀를 따라 움직였다.

나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담덕의 눈이 크게 뜨였다. 유녀의 어깨에 얹고 있던 손을 황급히 내려놓는 그를 보며 내가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그 순간 담덕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옆에 있던 유녀가 의아해져 그의 옷깃을 잡아당기는 것이 보였다.

뒤이어 우아하고 단아한 손길이 걱정스럽게 담덕의 얼굴을 쓸었다.

그 손길이 뭐라고 내 속에서 무엇인가 울컥 올라왔다. 웃으며 흔들던 손도 어느새 멈춰 있었다.

“어……?”

이게 뭐지? 이건 무슨 기분이야?

속이 울렁거리며 이상했다. 나는 그대로 담덕에게서 등을 돌렸다.

“아가씨?”

갑작스러운 내 태도에 지설이 살짝 허리를 굽혀 내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과편은 안 먹을래요.”

“예? 오전부터 과편, 과편 노래를 부르시기에 일부러 나왔더니…….”

“됐어요. 갑자기 안 먹고 싶어졌어.”

나는 그대로 지설의 팔을 끌어당겨 저잣거리를 벗어났다.

* * *

“우희.”

늦은 저녁 방에서 서책을 읽고 있는 내게 담덕이 찾아왔다.

“담덕.”

나는 웃으며 담덕을 맞이했다. 하지만 담덕을 볼 때마다 그의 옆에 찰싹 붙어 있던 유녀의 얼굴이 동시에 떠올라 기분이 묘했다.

난봉꾼 담덕이라니. 생각지도 못했단 말이야.

내가 고개를 휘휘 저어 머릿속에 떠오른 상상을 없애는 동안 담덕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

“무슨 서책을 읽고 있었어?”

“내가 읽을 서책이 뭐가 있겠어? 의술에 관련된 거야.”

“이미 의술은 잘 알지 않아?”

“하지만 서책엔 내가 모르는 이야기가 더 많은걸.”

이 시대의 의학에는 미처 현대까지 전해지지 못한 다양한 처방과 견해들이 많았다.

현대의 지식을 바탕으로 보면 허무맹랑한 것도 있었지만, 의외로 현대에도 활용할 수 있을 만큼 정확하고 색다른 시도도 있었다.

때문에 나는 시간이 날 때면 이 시대의 의서를 읽고 약재를 살피며 나의 지식을 넓히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었다.

단순히 지적 호기심 때문만이 아니었다.

지난 전쟁을 겪으며 나는 사람을 살리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무거운 일인지 다시금 깨달은 상태였다. 조금 더 많은 지식, 조금 더 정확한 지식이 있어야만 사람을 살릴 수 있었다.

“낮에 지설과 저잣거리에도 나왔었지.”

내가 읽던 서책을 뒤적이던 담덕이 무심한 척 말을 던졌다. 그 말이 무어라고 이상하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응. 과편을 사려고.”

“날 보더니 급하게 돌아가던데.”

“아하하. 내가? 널 보고?”

내가 들어도 어색한 웃음이었다. 스스로가 느껴질 정도인데 담덕이 이상한 것을 못 알아차릴 리 없었다.

“날 보고 돌아간 것이 맞구나.”

담덕이 눈을 내리깔았다. 어쩐지 그의 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았다.

“지설에게 그런 말을 했다며? 내가 여인을 많이 만나면 좋은 거라고. 정말 그리 생각해?”

“……넌 왕이야. 후사를 남겨야 하고, 그러려면 많은 여인을 만나는 게 좋아. 후사가 많을수록 네 입지가 더 탄탄해질 테니까.”

내 대답을 예상했다는 듯 담덕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래. 넌 그렇게 생각하지.”

담덕이 뒤적이던 서책을 내려놓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혹시나 질투를 해 주지 않았을까 하고 물어봤다. 괜한 질문이었던 것 같지만…… 사실 나는 했었거든. 너와 지설을 보고.”

“나와 지설? 도대체 왜?”

“너, 지설의 팔을 끌어당기더라?”

나는 가만히 시장에 나섰을 때의 풍경을 떠올렸다. 그때 지설의 팔을 잡아끌기는 했다.

이상하게도 속이 울렁거려 빨리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무작정 지설을 끌어당겼었지.

“나는 내 부인이 될 사람이 다른 사내와 그러고 있는 거 아주 눈에 거슬리던데.”

“지설은 네가 붙여 준 호위인데 무슨 질투를 해?”

“그러니까 말이야.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을 붙여 두었는데도 이러하니 내가 중증인 거지.”

담덕이 선선히 고개를 저으며 내게로 다가와 허리를 굽혔다. 낮아진 키에 그와 눈높이가 같아졌다.

“내가 이처럼 중증인데 너만 멀쩡하다 이거지. 이것 참 억울한데…… 어찌하면 좋을까?”

“억울하면 너도 질투하지 않으면 되잖아.”

“그건 싫은데 어쩌나.”

담덕이 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생각하더니 곧 결론을 내린 듯 나를 빤히 보았다.

“그냥 너도 해 줄래? 질투.”

“내가 질투를 하는 것이 좋아?”

“내가 다른 여인 가까이 설 때, 다른 여인을 바라볼 때, 다른 여인의 손을 잡을 때. 그럴 때마다 화를 내 주면 안 되나?”

“……내가 그러는 게 좋아?”

여인 가까이 서고 바라볼 때마다 화를 내라니.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 아닌가?

“됐다. 내가 말을 해서 뭐하겠어.”

의아하게 눈을 깜빡이는 나를 보며 담덕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내게 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도 하지 마라. 그거 하나만은 지켜 줘. 내 부인이 되려면 그 정도는 해 줘야지. 안 그래?”

그렇게 말하는 담덕의 두 눈이 묘하게 진지해서, 나는 그의 말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고개를 주억거렸다.

* * *

담덕이 즉위한 이후 몇 개월이 순식간에 흘러 금세 새해가 밝았다. 즉위 초기 담덕의 관심은 백제와 대치하고 있는 남쪽에 향해 있었다.

고국원왕의 죽음 이후 백제를 치는 일은 고구려의 가장 큰 관심사 중 하나였지만, 담덕은 과거의 은원보다도 자신이 직접 보았던 풍경이 마음에 걸리는 듯했다.

도압성 전투로 죽어 나간 병사들과 석현성에 잡혀갔던 포로들의 처지까지. 담덕은 모든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백제를 견제한다는 점에서는 신라와 우리의 뜻이 통했다.

선대왕인 고국양왕도 백제를 견제하기 위해 신라와 손잡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동맹 관계를 공고히 하기 위해 올해 초 신라에서는 이찬 대서지의 아들 실성을 국내성에 보냈다. 일종의 볼모였다.

왕족을 볼모로 보낼 정도였으니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에는 분명한 위계가 있었다. 서로의 국력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담덕은 국내성에 지내는 실성을 홀대하지 않았다. 그에게 좋은 거처를 내어주고 불편한 것은 없는지 세심하게 살폈다.

지난 도압성 전투에서 말갈과의 관계를 제대로 정립하지 못해 사단이 났던 것을 계기로 외교 문제에도 눈을 뜬 것이다.

“서를 실성의 말벗으로 붙여 줄까 하는데, 우희 네 생각은 어때?”

“서를?”

남부에서 올라온 장계를 읽고 있던 담덕이 지나가는 말처럼 내게 물었다.

서가 신라 왕족의 말벗이라.

서라면 심성이 밝아 사람을 즐겁게 하는 재주가 있는 녀석이니 실성과도 잘 지낼 것 같았다. 하지만 그에게 말벗 이상의 역할을 원한다면 무리였다.

“정말 ‘말벗’의 역할만 하면 되는 거야?”

내 질문에 담덕이 장계 너머로 나를 바라보았다.

“정말 함께 시간을 보내며 즐겁게 해 주기만 하면 되는 것인지, 아니면 곁에서 그를 살피고 마음에 걸리는 것을 보고해야 하는 것인지 묻는 거야.”

서는 생각이 얼굴에 죄 드러나는 편이었다. 그런 속셈을 가지고 상대를 대했다가는 금방 들킬 것이 뻔했다.

내 염려를 눈치챘는지 담덕이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그런 역할을 할 사람은 따로 있어. 서는 말 그대로 말벗의 역할만 해 주면 된다. 신라에 대한 우리의 호의를 느낄 수 있도록 좋은 사람을 붙여 주려는 거야.”

“그렇다면 서만 한 사람이 없어. 그 녀석은 굉장한 수다쟁이니까 지루할 틈이 없을걸.”

“네가 그리 장담하니 안심하고 맡길 수 있겠어. 빠른 시일 내에 고추가에게 말을 전해야겠다.”

고개를 끄덕인 담덕이 다시 장계로 눈을 돌렸다.

나는 탁자에 턱을 괴고 일에 열중한 담덕을 바라보았다.

예정대로라면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어야 할 시간이었다. 하지만 담덕은 쌓여 있는 일거리를 해결하는 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일이 이런 식으로 흘러간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담덕은 내 생각보다 더 심각한 일중독이었다.

이렇게 열심히 일을 하는데도 일거리는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담덕의 성격 탓이었다.

담덕은 만족과 안심을 몰랐다. 모든 것을 의심하고 확인하지 않으면 손을 놓지 않았다.

덕분에 나라의 모든 현안이 담덕의 손을 몇 번이나 거쳐 갔고, 일거리는 날이 갈수록 증식해 갔다.

나는 아직도 한참이나 쌓여 있는 장계들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태림이나 지설이 나를 이곳, 담덕의 집무실에 데려오는 이유는 딱 하나뿐이었다. 담덕을 그만 일에서 해방해 달라는 뜻이었다.

내 역할은 이랬다. 일에 열중한 담덕을 방해할 수 없어 조용히 그의 곁을 지키다, 해가 떨어지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의 손에서 장계를 뺏어 드는 것이다.

지설이 슬쩍 말해 주기를, 담덕은 오늘도 이른 새벽부터 일을 시작했다고 했다. 그 이후 한 번도 자리를 뜨지 않고 이 시간까지 장계만 보고 있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나는 해가 떨어지는 것을 확인하고 그의 손에서 장계를 빼냈다.

담덕이 무슨 반응을 보일지는 뻔했다. 이 일중독자는 끝이라는 걸 모르기 때문에, ‘조금 더 봐야 한다’는 말이 입버릇이었다.

“조금 더 봐야……”

역시나 내 예상은 틀리지 않아서, 곧 담덕이 미간을 찌푸리며 반박했다.

물론 나는 이 못된 버릇을 막는 법도 알고 있었다.

“배고파. 나 아직 아무것도 못 먹었어.”

“먼저 먹지 않고.”

“네가 먹으면 나도 먹고, 네가 안 먹으면 나도 안 먹어. 그러니 네 미래의 부인이 굶어 죽지 않길 바란다면 어서 식사를 하러 가자고.”

그렇게 말하며 담덕의 팔을 끌었더니 그가 픽 웃으며 내 손에 끌려왔다.

체격 차이가 있으니 담덕이 끝까지 버틴다면 나로서도 그를 끌고 나올 힘은 없었다. 하지만 나는 단 한 번도 담덕을 끌고 나오지 못한 적이 없었다.

“드디어 나오셨습니까.”

집무실 입구를 지키고 있던 지설과 태림이 내가 담덕을 끌고 나오는 것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제발 쉬면서 좀 하십시오. 처음부터 이렇게 빨리 달리면 금세 지치십니다.”

즉위 이후 담덕이 일에만 계속 매달리니 지설의 걱정이 깊었다. 몸이 상할까 봐 걱정이라며 몇 번이나 말렸지만 도무지 들을 생각을 않는다고 했다.

이번에도 담덕은 지설의 말을 흘려들었다.

“일이 많은 걸 어찌하겠어? 시간은 정해져 있고, 할 일은 많으니 조금 더 깨어 있는 수밖에 없지.”

“다른 사람에 맡기셔도 됩니다. 그 많은 걸 어찌 다 혼자 보려고 하십니까?”

“그건 마음이 놓이지 않아. 일을 많이 해 피곤한 것보다, 마음이 놓이지 않아 피곤한 것이 더 괴롭다. 그러니 염려는 거기까지만 하자.”

단호한 말에 지설이 답답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담덕이 이처럼 일에 매달리는 이유는 지금 고구려의 상황과 연관이 있었다.

선대왕 시절 고구려는 상당히 힘든 시간을 보냈다. 북쪽과 남쪽의 전선 모두에서 땅을 잃었고, 내적으로는 흉년이 계속되어 백성의 삶이 팍팍해졌다.

그런 상황에서 왕위에 올랐으니 손봐야 할 부분이 한둘이 아니었다.

담덕은 선대왕이 못해서 나라 꼴이 엉망이 되었다는 말을 질색했다. 때문에 그런 소리가 더 이상 나오지 않도록 하루라도 빨리 국내외의 혼란을 수습하고자 했다.

그 첫 번째 관문은 도압성 탈환이었다.

“차라리 전쟁을 좀 미루는 것이 어떻습니까? 아직은 즉위 초기이니 내치에 더 집중하시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담덕이 눈치를 준다고 잔소리를 멈출 지설이 아니었다. 꿋꿋하게 할 말을 늘어놓는 그를 보며 담덕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불가하다. 선대왕 시절 잃은 땅을 하루빨리 회복해야 해.”

“하면 내치를 제가 회의에 맡기시든가요. 폐하께서 내치와 전쟁을 모두 이끄는 건 무리입니다.”

“준비를 마치고 남쪽으로 출병하면 자연스레 그리될 거야. 그 전까지는 내가 직접 살필 것이고.”

가만히 지설과 담덕의 대화를 듣고 있던 내가 깜짝 놀라 끼어들었다.

“잠깐. 남쪽으로 출병한다니? 직접 병사들을 이끌고 가겠다는 거야?”

“그리할 생각이야.”

재작년 우리를 절망으로 이끌었던 전장으로 나간다는 말을 하면서도 담덕은 흔들림이 없었다.

“이제 겨우 왕위에 올랐어. 바로 국내성을 비우는 건 좋지 않을 터인데.”

“국내성은 너와 고추가가 지켜 줄 거잖아.”

“뭐?”

“혼인을 하여 황후가 된 상태였다면 더 마음이 놓였겠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전쟁에 먼저 나서게 되었으니 어쩔 수 없지. 국혼은 백제와의 전쟁이 끝나면 그때 진행하자.”

“잠깐, 잠깐만!”

나는 손을 휘휘 저어 담덕의 말을 막아섰다. 담덕이 뭐가 문제냐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날 여기에 두고 가겠다는 거야? 네가 출병을 하는데?”

“그럼 따라나설 생각이었어?”

“당연한 거 아니야? 네가 전쟁터에 간다면 나도 따라갈 거야. 사람들이 다치면 내가……”

“우희.”

담덕이 나를 부르며 미간을 찌푸렸다.

“넌 의원이 아니야.”

“그래. 난 의원은 아니야. 하지만 사람을 살리는 데 도움이 되지.”

도압성에서의 일은 담덕에게뿐만 아니라 내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그곳에서 나는 내 도움이 간절한 사람들을 보았다. 다치고, 아프고, 죽어 가는 사람들.

그들에게는 내가 필요했다. 나의 지식과 재능이 가장 필요한 곳.

나는 전생에서 그런 곳을 찾지 못했다. 어디에서나 적당한 자리를 찾아 적당하게 살아왔지만, 전쟁터에서의 나는 세상 누구보다 간절히 필요한 사람이었다.

백제 땅에서 극적으로 아신을 살려냈을 때에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 강한 확신마저 느꼈었다.

“……그래.”

담덕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네 의술이 누구보다 뛰어나다는 건 나도 알아. 백제의 태자마저 살려내는 걸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으니까. 하지만 이제 넌 고구려 황후가 되어야 해. 왕이 밖에서 싸울 때 안에서 중심을 잡아 줘야 하는 사람이라고. 나와 함께 밖으로 나돌 수는 없어.”

나는 할 말을 잃고 담덕을 바라보았다. 도움을 청하기 위해 지설을 바라보았으나 그도 내 편이 아니었다.

“폐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황후의 역할은 왕이 전쟁에 나섰을 때 불안한 내부를 살피는 것입니다. 하니 아가씨께서는 여기 계셔야 합니다.”

담덕과 지설의 말은 내가 생각하던 황후와 달랐다.

선대왕께서는 내게 담덕의 배경이 되어 주라 했다. 나는 기꺼이 그러기를 바랐다. 담덕의 힘이 되어 그를 돕고 싶었다.

하지만 담덕의 배경이 된다는 것이 그저 성안에서 기다리는 것뿐이라면…….

“황후가 된다는 게 그런 의미였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성안에 박혀 네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겨우 그런 거였어?”

“내부를 단속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야. ‘겨우 그런 거’라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야.”

“그래. 그럴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알아. 내부를 단속하는 것도 중요하지. 하지만 나는 그렇게 살기 싫어, 담덕. 그러니 내게는 그 일이 ‘겨우 그런 거’야.”

왕이 비운 자리가 보이지 않도록 내조하는 것. 당연히 중요했다. 하지만 내게 주어진 역할이 그것뿐이라면 납득할 수 없었다.

국내성이 아닌 바깥의 더 큰 세상에 내가 할 일이 있었다.

한데 그런 세상을 두고 내조만 하라고?

“불안한 마음을 안은 채 널 보내고, 홀로 안전한 곳에 남아 네가 무사히 돌아오길 기도하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남편을 일터에 보내고 집에서 마냥 그를 기다리는 부인은 될 수 없었다.

이 시대를 사는 여자라면 납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게는 현대인으로서의 기억이 있었다. 스스로의 주체성을 가지고 자신의 미래를 꿈꾸는 일이 내게는 너무나 당연했다.

처음을 허무하게 끝내고 얻은 두 번째 삶.

그렇기에 더욱 간절히 하고 싶은 일이, 어떻게든 얻고 싶은 삶이 있었다.

“담덕, 넌 내가 그저 네 ‘여자’가 되길 바라니?”

담덕은 말이 없었다.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난 네 ‘여자’가 아니라, 너와 함께 걷는 동반자가 되고 싶어. 그래서 황후가 되고자 했던 거야.”

“네 마음은 알아. 하지만 황후는 그럴 수 없어.”

“담덕, 말했잖아. 난 그렇게 살 수 없다고.”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날 선 분위기에 지설이 우리의 눈치를 살폈다.

“두 분의 마음은 알겠으니 너무 날을 세우지 마시고……”

“그럼 어쩌겠다는 거야?”

분위기를 풀어 보려는 지설의 말을 자르며 담덕이 내게 물었다.

“황후로는 못 살겠다는 거야?”

“네가 말하는 그런 게 황후의 삶이라면…… 그래, 난 그렇게는 못 살아.”

내 대답에 담덕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난 수없이 전쟁에 나설 거고, 그럴 때마다 안을 지켜 줄 수 있는 황후가 필요해.”

“알아.”

“네가 못하겠다고 하면 다른 사람이라도 그 자리에 세워야 해.”

“그것도 알아.”

“그럼 넌 내가 다른 사람과 혼인해도 상관없어?”

“……그런 말이 아닌 걸 알잖아.”

“그럼 무슨 말인데.”

담덕이 굳은 얼굴로 내 앞에 다가왔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담덕의 손을 잡았다.

“꼭 황후가 그런 사람이어야만 하는 건 아니잖아. 여태까지 황후가 모두 그런 일을 했다고 해서 나까지 그래야 할 필요가 있을까?”

보통 황후라면 그려지는 인상이 비슷했다.

나라의 어머니라고 하지?

인자하고 따뜻한 사람. 차분한 말투로 사람을 다루며 모든 일에 어른스럽게 대처한다.

하지만 나는 나 자신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 되는 건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했다.

나는 어설프게 그런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느니 내가 잘하는 일을 멋지게 해내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궁을 지킬 사람이 황후밖에 없는 것도 아니었다. 충분히 대안이 있었다.

“궁을 비운 동안의 내치가 불안하다면 제가 회의에 맡겨. 오히려 나에게 맡기는 것보다 그분들이 더 잘하실걸. 나는 정치를 배운 적이 없어서 잘못했다간 나라를 말아먹을지도 몰라.”

“풉.”

심각한 분위기에 굳어 있던 지설이 웃음이 터지려는 입을 손으로 막았다.

“뭐, 우희 님에겐 그럴 능력이 충분히 있으시죠.”

지설이 내 말에 동조했다. 속으로 웃음을 삼키느라 그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해 있었다.

내 편이 하나 늘어난 건 기꺼웠지만 동조하는 내용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지설의 발을 꾹 밟아 응징하며 담덕에게 말했다.

“오래전에도 내가 그랬지. 넌 좀 더 다른 사람을 믿을 필요가 있다고. 혼자 짊어지려고 하다간 네 어깨가 무게를 감당 못 하고 부서질걸. 아무리 네가 강하다고 해도 말이야.”

어느새 담덕의 얼굴이 조금 풀어져 있었다. 내 말을 납득했다는 증거였다. 나는 조금 편해진 마음으로 지설과 태림을 가리켰다.

“여기 지설이나 태림도 있고, 우리 절노부 사람들도, 또 나도 네 옆에 있잖아. 우릴 조금 더 믿어 보는 게 어때?”

“이미 넘칠 만큼 믿고 있어.”

담덕이 피식 웃으며 내 머리를 토닥였다. 하지만 곧 들려온 말은 내 기대와 달랐다.

“그래도 전쟁터에 같이 가는 건 안 돼.”

내 얼굴이 금세 실망으로 물들었다.

“어째서?”

“네가 위험하지 않길 바라니까. 지난번 석현성에 끌려가 고생한 것을 벌써 잊은 건 아니겠지?”

아무리 나쁜 일은 빨리 잊자는 생각을 가진 나라도 그 정도로 가까운 과거를 벌써 잊을 수는 없었다.

“넌 무슨 일이 생기면 가만히 있지 못하고 나서야만 직성이 풀리니 전쟁터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또 마음대로 움직였다가 대단한 사고에 휘말릴 테니까 말이야.”

“하지만……”

“우희.”

담덕이 반박하려는 내 이름을 불렀다. 부드러웠지만 단호한 목소리였다.

“난 네가 하고 싶은 대로 살면 좋겠어. 그러니 네 행동을 강제하고 싶지는 않아. 황후로서의 답답한 삶이 싫다면…… 그래, 네 말대로 내치를 제가 회의에 맡겨도 좋겠지. 특히 절노부의 고추가께서는 제가 회의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흐를 수 있도록 많이 도와주실 거야. 애초에 우리 혼인은 그걸 위해 논의된 거니까.”

“그래. 그러니 나도 이번 전쟁에……”

“하지만,”

이번에도 담덕은 내 반박이 시작될 틈을 주지 않았다.

“네가 하고자 하는 일이 널 다치게 하고, 위험에 처하게 한다면 난 너를 말릴 수밖에 없어. 이번 전쟁도 그런 이유야.”

이제 납득했어?

담덕의 눈이 그렇게 묻고 있었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어 입을 꾹 다물었다.

* * *

납득은 무슨.

그날 담덕의 앞에서는 아무 말 않고 돌아섰지만 납득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내가 제일 앞에서 검을 휘두르겠다는 것도 아닌데.

담덕의 걱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군대에는 검과 활을 쓰는 전투병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후방에서 전투 병력을 돕는 보조 인원들도 있어야만 군대가 제대로 돌아갔다. 그런 후방의 사정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자들도 있었다.

한번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크고 작게 다치는 병사들이 수없이 쏟아진다. 군대 안에 의원이 있다면 다친 병사들을 수습하는 데 큰 도움이 될 터였다.

담덕은 크게 반대했지만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번 백제 원정에 따라갈 생각이었다. 그러려면 내 편을 만들어 둬야 했다.

나는 맞은편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지설을 불렀다.

“지설.”

“안 됩니다.”

무엇인가를 말하기도 전에 거절당했다. 나는 어이가 없어 입을 벌렸다.

“내가 뭐라고 할 줄 알고요?”

“뭐라고 하시든 전 못 들어 드립니다. 제가 아무리 폐하를 안 무서워해도 이번 일은 너무 커요.”

백제 원정을 두고 충돌하는 나와 담덕을 모두 지켜보았던 지설은 이미 내가 할 부탁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설도 인정하잖아요. 내가 함께 가면 병사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 거예요.”

“압니다. 많은 도움이 되시겠죠. 하지만 역시 제일 중요한 건 폐하의 의중입니다. 전 그걸 거스를 수 없습니다.”

참으로 부하다운 말이었다. 하지만 내가 아는 지설은 무조건 담덕의 말에 따르기만 하는 자가 아니었다.

“갑자기 사람이 변했어요, 지설. 원래는 이렇게 충실한 신하가 아니었잖아요.”

“말의 무게가 다르지 않습니까. 왕위에 오르셨으니 이젠 태자님이 아니라 폐하입니다. 태자님의 말은 무시할 수 있어도, 폐하의 말은 그럴 수가 없지요. 이제 우희 님도 현실을 받아들이십시오.”

지설을 포섭하기는 틀렸다. 나는 고개를 돌려 태림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그가 내게서 눈을 돌렸다.

“정말…… 다들 이러기에요? 앞으로 황후가 되실 분이라고 말만 하지, 내 말은 하나도 들어주질 않잖아요.”

“하면 먼저 황후가 되고 말씀하십시오. 그때는 고민이라도 좀 해 볼 테니.”

지설이 얄밉게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나오는 이상 담덕의 사람들에게서 도움을 얻기는 틀렸다.

그럼 이제 어쩐다?

“아가씨!”

고민하고 있는 내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달래였다.

달래는 본디 절노부에 속한 종이었지만, 내가 궁성에 들어오며 함께 데려와 지금은 궁의 시녀가 되어 있었다.

“무슨 일이야?”

“댁에서 서찰이 왔습니다. 제신 도련님께서 보내신 거래요.”

달래가 반갑게 웃으며 서찰을 건넸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당장에 서찰을 받아 들었다.

아버지의 행방을 찾아 고구려의 가장 남쪽부터 수색을 시작한 제신은 시간이 지나며 점차 국내성이 있는 북방을 향해 돌아오고 있었다.

그는 지난번 서찰들에서 판마곶을 출발해 장연으로, 장연을 출발해 구을현으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왔다.

해안을 따라 조금씩 북쪽으로 오고 있는 것인데, 결국 내가 있는 국내성과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제신은 아직까지 아버지와 만나지는 못했지만 점차 그와 가까워지고 있다는 확신이 든다고 했다.

북을 향해 갈수록 구체적으로 변해 가는 사람들의 목격담 때문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한쪽 눈을 잃은 아버지의 외모는 여러모로 사람들의 눈에 띄는 편이었다. 덕분에 전쟁을 치른 흔적이 역력한 외눈박이 남자에 대해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제신은 사람들의 목격담 속 사내가 아버지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북쪽을 향하는 사내의 이동 경로 때문이었다.

도압성에서 살아남았다면 아버지는 우리 가족이 있는 국내성이나 절노부 쪽으로 귀환 방향을 잡았을 것이다. 사람들 말 속의 외눈박이 사내와 가는 길이 정확히 일치했다.

제신의 서찰 속에서 희망적인 말이 늘어날 때마다 내 마음도 들뜨기 시작했다.

아버지와 제신 모두 무사히 국내성에서 만날 수 있다면 내 탄일에 나타나지 않은 것쯤이야 가벼이 용서해 줄 생각이었다.

“도련님께서 뭐라고 하시나요?”

옆에서 달래가 눈을 빛내며 내 옆을 기웃거렸다.

열심히 제신이 쓴 서찰을 보고 있지만 글을 모르는 달래에는 흰 것은 종이, 검은 것은 글씨일 뿐일 것이다.

“곧 국내성 가까이에 온다는구나.”

“예? 그럼 이제 도련님께서도 집으로 돌아오시는 겁니까?”

“여태까지 오라버니가 쫓고 있던 사람이 아버지라면 그분이 먼저 집으로 오시겠지.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제신은 아버지를 찾아 또다시 길을 떠날 것이다.

나는 그가 쫓던 사람이 아버지가 맞기를 간절히 바라며 제신의 서찰을 읽고 또 읽었다.

* * *

담덕의 군대를 따라갈 방법을 제대로 찾지 못한 채로 시간은 점점 흘러갔다.

지설의 말대로 ‘태자님’의 말과 ‘태왕 폐하’의 말은 완전히 무게가 달랐다.

담덕이 내가 백제 원정에 따르는 것을 절대 금한다는 말을 사방에 전하고 다닌 탓에 누구도 나를 도와주려고 하지 않았다.

믿었던 백부마저도 담덕의 편이었다. 그는 미래에 황후가 될 몸이니 얌전히 국내성에 남아 국혼을 준비하는 것이 옳다고 나를 설득하기까지 했다.

용의주도하고 빈틈없는 우리 태왕께서는 이미 백부마저 포섭한 뒤였던 것이다.

그에 대한 반항으로 나는 한동안 궁궐에서 나와 백부의 집에 머물렀다. 네가 내 말을 들어주지 않으니 난 너를 보지 않겠다는 유치한 반항이었다.

눈에 빤히 보이는 나의 시위에 담덕은 눈 하나도 꿈쩍하지 않았다. 담덕이 이처럼 내게 고집을 부리는 건 처음이었다.

나의 소심한 반항과는 상관없이 출병 준비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전쟁을 치르려면 중앙 태왕군의 병력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하여 제가 회의의 승인을 받아 각 부의 병력과 물자를 지원받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지난 도압성 전투에서는 다른 부족들이 협조하지 않아 태왕군과 우리 절노부 병사들만이 전쟁에 나섰고, 그 결과가 썩 좋지 않았다.

한데 이번에는 제가 회의에서 소노부를 제외한 다른 부족들 모두가 순순히 병력과 물자를 지원하겠다고 나섰다. 절노부야 당연히 태왕의 편이었으나 순노부와 관노부의 결정이 놀라웠다.

백부는 소노부가 후계자를 잃고 크게 휘청이고 있는 탓에 그들의 눈치를 보던 순노와 관노가 태왕의 편을 든 것 같다고 말했다. 덕분에 소노부 고추가의 분노가 대단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담덕의 즉위 이후 귀족 사회의 질서가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모두 담덕이 만들어 낸 변화는 아니었지만, 이러한 변화의 시기를 타고난 행운 역시 그의 능력임은 분명했다.

새로운 태왕이 나라의 원수인 백제를 치기 위해 출병한다는 소식이 퍼지자 국내성의 저잣거리도 흥분으로 들떴다.

나는 평소보다 훨씬 떠들썩한 사람들 사이를 지나 약방으로 향했다. 전쟁터에 동행할 수 있을지와는 상관없이 병사들과 담덕에게 도움이 될 약재들을 구입해 두고 싶었다.

그런 마음으로 들른 약방에서 나는 의외의 사람과 마주쳤다.

해운의 누이, 소노부 해씨의 여인, 영이었다.

이렇게 만나는 것은 도압성으로 떠나기 전 친분을 다진 이후로 처음이었다. 다시 만난 장소가 그때처럼 약방이라는 것도 놀라웠다.

“영!”

나는 반가운 마음에 영을 부르며 그녀의 곁으로 다가섰다. 그런데 그녀의 얼굴이 내 기억 속의 모습과 많이 달랐다.

내 기억 속의 영은 살포시 웃는 것이 예쁜 소녀였는데 지금 마주한 여인에게서는 웃음이 없었다. 그때의 하늘거리는 분위기는 사라지고 어쩐지 날이 바싹 서 있는 것 같았다.

반갑게 다가서던 나는 낯선 분위기에 당황해 걸음을 멈추었다.

“우희.”

약재를 살피던 영이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미소를 짓기는 했으나 여전히 그녀의 얼굴이 서늘했다.

나는 그제야 영의 오라비 운이 실종되어 그녀의 집안 분위기가 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여러모로 사정이 좋지 않으니 영이 이처럼 어두운 것도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약재를 보러 온 거야?”

나는 일부러 어두운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영도 그러기를 바랐는지 평범하게 흘러나온 내 화제에 동조해 주었다.

“응. 요즘 약재에 대해 공부하고 있거든. 서책을 열심히 읽고 있는데 글로만 보니 감이 잡히지 않더라고. 그래서 가끔 이리 나와 실물을 보는 거지.”

“어찌 약재 공부할 생각을 했어?”

나야 전생의 기억이 있어 그렇다지만, 영은 정말 전형적인 귀족가의 아가씨였다. 승려나 무녀들이 주로 익히는 의술을 그녀가 공부한다는 건 평범하지 않았다.

“지난번 너와 약방에서 만난 뒤에 약재에 대해 알아 두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거든.”

“그럼 공부를 시작한 것이 꽤 오래되었구나?”

“이야기가 그리되나?”

“그럼. 해가 벌써 두 번은 바뀌었는.”

“그렇구나. 벌써 시간이 그리되었어.”

영이 약재를 매만지며 눈을 내리깔았다.

그녀의 눈에는 감출 수 없는 슬픔이 담겨 있었다. 나와 약방에서 만났을 때 운에 대한 이야기를 했으니,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나는 부러 밝은 미소를 지으며 약방을 두리번거렸다.

“한데 주인은 어디 갔어?”

원래대로라면 바쁘게 움직이고 있어야 할 주인이 보이지 않았다.

“잠시 자리를 비웠어. 새로운 약재를 들여와야 한다며 밖으로 나서던걸.”

“그럼 약재를 사려면 한참을 기다려야겠구나.”

시간을 생각하면 내일 다시 약방을 찾는 것이 옳았으나 오랜만에 만난 영을 혼자 두고 가기가 힘들었다. 슬픔에 잠긴 모습을 보니 더욱 그랬다.

“네 이야기는 들었어. 폐하와 혼약을 하였다고.”

무슨 이야기를 꺼내야 하나 고민하는 내게 영이 먼저 말을 걸었다.

“거기까지 벌써 소문이 다 퍼졌구나.”

“소문이랄 것도 없지. 절노부 연가의 아가씨가 황후가 되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잖아.”

“그런가? 당연한 일인가?”

나는 멋쩍게 볼을 긁적였다. 내가 황후가 되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기엔 그간 거쳐 온 일들이 만만치 않았다.

어색하게 웃으며 지난 일들을 떠올리고 있으니 약방 입구가 소란스러워졌다.

약방 주인이 생각보다 빨리 돌아온 것인가 싶었는데, 고개를 돌리니 새로운 손님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 손님의 얼굴도 내게는 너무 익숙했다.

“담덕.”

별생각 없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가 나는 깜짝 놀라 영을 바라보았다. 과연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와 담덕을 훑고 있었다.

“담덕?”

영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 소리를 들은 담덕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누구야?”

담덕이 나를 향해 물었다. 나는 어색하게 두 사람 사이에 서서 서로를 소개해 주었다.

“이쪽은 소노부 해씨, 고추가의 딸 영이야. 나와는 친구로 지내고 있어.”

“소노부 해씨? 고추가의 딸?”

의외의 이름을 들은 탓인지 담덕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이쪽은…….”

영의 소개를 마친 나는 말끝을 흐리며 담덕을 보았다. 그를 영에게 소개해도 될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담덕은 생각보다 선선히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나는 담덕이다.”

“폐하.”

설마 하던 것이 진짜로 밝혀지자 영이 화들짝 놀라며 예를 갖췄다.

“궁이 아닌 밖에서까지 그런 예의를 바라지 않는다. 지금은 우희의 친구로 나온 것이니 그리 대해라.”

“감히 제가 폐하께 어찌…….”

“우희는 내게 잘도 그러는데.”

담덕이 피식 웃으며 나를 보았다.

“네 친구인데 너와는 너무 다르구나?”

장난기가 섞인 말에 나는 부루퉁하게 입을 내밀며 평소에는 하지도 않던 예를 갖추었다.

“그럼 저도 이리 인사를 올릴까요?”

“됐다. 어울리지도 않는 인사는.”

담덕이 질색을 하며 손을 저었다. 별 우스운 것을 다 본다는 미소에 나는 예의 바른 행동을 그만두었다.

“여긴 어찌 왔어?”

“절노부 저택에 다녀오는 길이다. 고추가에게 물었더니 네가 약방에 있을 거라고 하기에.”

“나는 왜 찾았는데?”

“얼마 후면 남쪽으로 출병한다. 그때까지 얼굴도 제대로 보여 주지 않을 셈이야?”

“그리 이 얼굴이 보고 싶으면 나도 데려가면 될 텐데.”

“그건 안 된다 했지.”

담덕이 손가락으로 내 이마를 튕겼다. 나는 쓰라린 이마를 문지르며 고개를 돌렸다.

“그럼 평생 보지 않으면 되겠네.”

“그런 얄미운 말을 하는 입이 바로 이 입인가?”

담덕이 미간을 찌푸리며 내 입술을 두드렸다.

나는 담덕의 손목을 붙잡아 그의 손길을 막았다. 내게 손목을 붙잡힌 담덕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나를 끌어당겼다.

“널 보러 여기까지 나왔는데, 계속 그런 소리나 할래? 궁에는 또 왜 안 들어오는데? 언제까지 시위를 할 셈이야?”

“……그러게 나도 데려가라니까.”

“그 고집은 꺾일 줄을 모르지? 그래도 안 돼. 이번엔 내 고집이 더 세다.”

이 땅에서 제일 높은 자리에 있는 왕이 고집을 부린다니 말릴 사람이 없었다.

“저…….”

작은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옆에 있던 영이 얼굴이 빨개진 채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아.”

그제야 영이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후다닥 담덕을 밀어냈다. 혼약을 한 이후 틈만 나면 가까이 붙어 오는 담덕 탓에 이처럼 곤란할 때가 종종 있었다.

때와 장소는 좀 가립시다, 폐하.

나는 눈빛으로 담덕에게 그렇게 말한 뒤 영을 바라보았다.

“미안해, 영. 우리 이야기는 다음에 해야 할 것 같은데.”

“그래, 그래야겠어. 나도 급한 일이 생각났지 뭐야. 다음에 만나.”

영이 붉은 얼굴로 횡설수설하며 약방을 빠져나갔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담덕에게 예를 갖추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담덕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정말 너와는 너무 다른데? 과연 소노부 해씨의 여식답다.”

“태평하게 그런 말이나 할 때야? 사람들이 볼 때는 너무 가까이 붙지 마.”

내 말에 담덕이 뚱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하면,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는 괜찮고?”

“보지 않는 곳에서도 마찬가지야!”

“그럼 난 언제 네 가까이 다가가는데?”

“꼭 가까이 와야 해?”

“내 부인이 될 사람 가까이 가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담덕이 손을 뻗어 내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내가 벌써 네 부인이 된 것처럼 구니까 문제지. 우린 아직 혼인도 하기 전이라고.”

“흐음.”

담덕이 묘한 웃음을 흘리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 말은 혼인한 뒤에는 내 마음대로 해도 괜찮다는 말인가?”

“도대체 마음대로 뭘 하려고…….”

어이가 없어 웃음을 흘리며 담덕을 바라보다 입이 꾹 다물렸다. 나를 내려다보는 담덕의 분위기가 이상했다.

언젠가 이런 분위기로 흐른 적이 있었다. 담덕의 개인 연무장에서였다.

그때 우리는 입을 맞췄다.

하지만 거짓말처럼 그 이후 우리 사이에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 혼약을 했고, 내가 궁에 들어가고. 단지 그뿐이었다.

“말해 봐.”

당황해서 고개를 숙이는 내 머리 위로 담덕의 목소리가 들렸다.

“혼인을 한 뒤에는 내 마음대로 해도 돼?”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부부가 되면 입맞춤은 물론이고 그 이상의 것을 하더라도 이상한 사이가 아니었다. 아무리 정략적인 이유로 한 혼인이라도 마찬가지였다.

혼인을 하자는 내게 담덕은 그런 것까지 감당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내게는 아직 모든 것이 부담스러웠다.

담덕이 정말로 나와 그런 일을 하자고 하면…….

나는 얼굴이 뜨거워지려는 것을 느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내 열여섯 탄일에 네가 그랬잖아. 내가 손대지 말라면 그러지 않겠다고.”

“그러니 지금 묻고 있는 거잖아, 네 의사.”

“그런 걸 왜 벌써부터 물어?”

“벌써부터라니. 이번 백제와의 전쟁이 끝나면 국혼을 올리게 될 텐데…… 생각보다 얼마 남지 않았다고.”

담덕이 그렇게 말하며 내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니 열심히 고민해 봐. 내가 물은 것에 대한 답이 뭔지.”

* * *

영락 2년 7월.

담덕은 4만의 대군을 이끌고 남쪽으로 떠났다. 결국 끝까지 고집을 부려 나를 국내성에 남겨 둔 채였다.

떠나기 전 담덕은 내게 이렇게 신신당부했다.

-석 달. 딱 석 달 후에 돌아올 테니 사고 치지 말고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담덕은 그렇게 장담했지만 나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석 달이라니, 정말 말도 안 되는 기간이었다.

제가 회의의 귀족들 역시 이번 백제 원정이 상당한 장기전이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이번 원정의 목표가 관미성을 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관미성은 백제의 전략적 요충지로, 사면이 절벽과 바다로 둘러싸인 천해의 요새였다.

백제는 이 관미성을 통해 서해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니 관미성을 얻을 수만 있다면 지금까지 백제가 장악해 온 바다까지 고구려의 손에 떨어지게 된다.

전장에서 날고 긴다는 장수들은 이 성 하나를 함락시키는 데만 석 달이 넘게 걸릴 거라고 예상했다.

거기에다 관미성까지 가기 위해서는 다른 백제의 성들도 무너뜨려야 했다.

전략적으로 중요한 땅이다 보니 백제는 이 예성강 방어선에 상당한 공을 들이고 있었다. 결코 쉽지 않은 전쟁이었다.

모두가 짧게는 반년, 길게는 몇 년이 넘는 전쟁이 될 것이라 입을 모아 말했다. 백부도 그중의 한 사람이었다.

주인이 자리를 비운 궁성은 전보다 활기가 없었다. 나 역시 담덕이 없는 궁에 남아 있기가 허전해 백부의 집에서 지내는 날이 더 많았다.

그러던 와중에 반가운 손님이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의 행방을 찾아 오랫동안 집을 떠나 있던 제신이었다.

“오라버니!”

“우희야.”

오랜만에 만난 제신은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앞서가는 아버지를 쫓기 위해 쉬지 않고 달렸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아버지는? 돌아오셨어?”

집에 도착한 제신은 입구에 들어서면서부터 아버지를 찾았다. 나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래? 하면 국내성이 아닌 절노부 쪽으로 가신 걸까…….”

제신이 어두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제대로 집 안에 들어오지도 않는 것이 당장에라도 절노부 쪽으로 갈 기세라, 나는 서둘러 제신의 팔을 잡아끌었다.

“하면 절노부 쪽에 연통을 보내 두자. 아버지께서 오시면 기별을 달라고.”

그러니 절노부에 갈 생각은 말고 어서 들어오라는 말이었다.

내 말을 알아들은 것인지 제신이 씨익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걱정 마라. 오랜만에 누이를 만났는데 어찌 다시 길을 떠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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