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낙화유수-11화 (12/38)

10장. 탄일

“괜찮…… 그런…… 왜……”

“저도…… 시키신…… 전부……”

아득한 정신 사이로 사람들의 목소리가 울렸다. 소리가 울릴 때마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머리 아파…… 조용히 좀…….”

내가 겨우 입을 열어 불만을 표현하자 귓가를 울리던 소리가 거짓말처럼 뚝 그쳤다.

그렇게 귀를 울리던 소리가 멈추자 이제는 목이 탔다.

극심한 갈증에 나는 어디 있는 줄도 모르는 물을 향해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었다.

“무울…….”

하지만 손에 잡힌 건 물이 아니었다.

간절히 원하던 물이 아니라 물컹거리고 따뜻한 것이 손에 닿자 나는 짜증스럽게 눈을 뜨며 상체를 일으켰다.

번쩍 뜬 눈 앞에는 담덕이 있었다. 묘하게 일그러진 그의 얼굴에서는 어쩐지 현실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꿈인가?”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더니 금세 담덕의 손가락이 내 이마를 튕겼다.

“꿈이겠느냐?”

담덕의 손이 닿은 이마가 얼얼했다.

꿈이라면 이렇게 머리가 아플 리 없지.

“꿈이 아니구나…….”

“그래. 꿈이 아니다.”

담덕이 긴 한숨을 내쉬며 내 손을 꼭 잡았다. 내가 무의식적으로 잡은 것이 담덕의 손이었던 듯했다.

“아가씨, 여기 물입니다.”

제대로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멍하게 앉아 있으니 옆에서 태림이 물을 건넸다.

“고마워요.”

하지만 내가 손을 뻗기도 전에 담덕의 손이 먼저 그릇을 받아 들어 내게 물을 먹여 주었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물을 받아먹으며 멋쩍게 웃었더니 담덕이 헛웃음을 흘렸다.

“너, 네가 얼마 만에 깨어난 줄은 알고 그런 말을 해?”

담덕의 얼굴이 심각했다.

나는 생각보다 예민한 담덕의 태도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독을 먹기는 했어도 양이 얼마 되지 않았으니, 기절도 길어 봐야 하루를 넘지 않았을 것이다.

“하루 정도 지나지 않았어?”

태연하게 내 생각을 말했더니 다시 한번 이마에 담덕의 손가락이 날아들었다.

“하루? 하루우우?”

담덕이 기가 찬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내게 말했다.

“나흘이다, 나흘!”

“나흘?”

담덕의 말에 되레 내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왜 나흘이나 정신을 못 차렸지?”

“지금 그걸 내게 묻는 거냐?”

나는 어이없음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담덕의 눈을 피해 그의 등 뒤로 시선을 돌렸다. 누구든 내 편을 찾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뒤에 선 태림과 지설의 눈빛도 담덕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무리를 많이 하신 탓에 독이 빠르게 퍼져 몸속 깊이 침투한 것 같다고 했습니다. 때문에 회복이 느려졌고요.”

영문을 몰라 어색하게 웃는 내게 지설이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대충 상황이 어찌 된 것인지는 알 것 같았다.

확실히 몸 상태가 좋지 않기는 했다. 석현성에 잡혀 온 이후 제대로 잠을 자 본 적이 없었으니 몸의 면역력이 무척 떨어졌을 것이다.

그 상태에서 독을 먹었으니 소량이라도 크게 작용을 했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상황을 납득하다 곧 중요한 사실을 떠올렸다.

“맞다. 아신 태자는? 아신 태자는 어찌 되었어?”

내 질문에 지설과 태림이 묘한 표정으로 눈빛을 교환했다. 그건 담덕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반응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왜? 혹시 잘못되었어? 태자의 병을 고치지 못한 거야?”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완벽하다고 생각했는데 어딘가 빈틈이 있었던 것일까?

어디에서 실수를 한 거지?

심각하게 지난 행동을 되새기는 나를 보며 담덕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잘되었어.”

“응?”

“잘되었다고. 아신 태자는 깨끗하게 나았다. 그러니 지금 네 목이 제대로 붙어 있지.”

담덕이 말해 주었지만 실감이 나지 않았다.

얼떨떨한 눈으로 지설과 태림을 바라보니 그들도 고개를 끄덕여 담덕의 말이 진실이라는 걸 확인해 주었다.

모두의 확인을 받고서야 긴장이 풀렸다.

“다행이다…….”

긴장과 함께 무너지는 내 몸을 담덕이 재빨리 손을 뻗어 지탱했다.

긴장이 완전히 풀렸는지 도무지 담덕의 손을 벗어날 힘이 없었다. 나는 그대로 그의 팔에 몸을 기대어 상황을 물었다.

“그럼 우리를 전부 고구려로 돌려보내 준대?”

“응. 그런 약속이었으니까.”

“아무런 조건 없이? 지금 당장?”

“그렇다니까.”

믿을 수 없다는 듯 몇 번이고 되묻는 나를 보며 담덕이 내 머리를 헤집었다.

“이미 다른 인질들은 고구려로 돌아갔어. 도압성이 함락당했으니 우선 다지홀로 보냈다. 우리 일행만 네가 정신을 차리지 못해서 여기 남았고.”

“오라버니는? 오라버니도 다지홀로 갔어?”

내 질문에 담덕이 고개를 저었다.

“제신은 연 장군의 행방을 찾기 위해 떠났다. 네가 깨어나는 걸 확인하고 출발하겠다 했는데 생각보다 늦어져서…… 계속 네 곁을 지키다가 오늘 아침에 떠났다.”

“아버지의 행방…….”

“도압성 인근을 비롯해서 백제 땅까지 수색을 할 생각인가 봐. 꼭 아버지를 찾아올 테니 걱정 말고 국내성에서 기다리라 했어.”

그렇게 말한 담덕이 등 뒤에 선 지설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지설이 품속에서 서찰을 하나 꺼내 내게 내밀었다.

“그가 남기고 간 서찰입니다. 아가씨께 전해 달라 부탁하더군요.”

나는 재빨리 손을 뻗어 제신의 서찰을 받아 들었다.

[우희야.

이 서찰을 보고 있다면 네가 무사히 깨어났다는 뜻이겠지.

깨어나는 것을 보고 떠나고 싶었지만, 함께 석현성에 잡혀 있던 병사 하나가 아버지를 보았다는 곳이 마음에 걸려 출발을 서둘렀다.

나는 아버지를 찾아 무사히 국내성으로 돌아갈 터이니 그곳에서 다시 만나자.

도압성에서처럼 또다시 나를 쫓아왔다가는 크게 혼을 낼 테니 부디 태자님을 따라 집으로 돌아가거라.

더 많은 이야기는 우리의 집, 따뜻하고 안온한 그곳에서 나눌 수 있을 테니 길게 적지 않겠다.

네 탄일이 오기 전 다시 만나자. 그간 건강히 지내길 바란다.

제신.]

제신의 성격답게 할 말만을 적은 간략한 서신이었다.

오늘 아침에 떠났다 했으니 이 서신 역시 조금 전에 쓴 것이 분명할 터.

나는 남아 있는 제신의 기운을 느껴 보고자 서신의 글씨를 손으로 쓸어내렸다. 그러자 느껴질 리 없는 온기가 남아 있는 것도 같았다.

“빨리 국내성으로 돌아가고 싶어.”

국내성을 떠난 뒤로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 제신의 말처럼 그와 아버지가 돌아오길 기다리고 싶었다.

담덕도 내 말에 동의하는지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나야말로 국내성이 아주 그립다. 하지만…….”

담덕이 조금 곤란한 얼굴로 등 뒤의 지설을 바라보았다. 나도 덩달아 무슨 일인가 싶어 지설을 바라보니 그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신 태자가 아가씨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신 태자가요? 날 왜요?”

나는 영문을 몰라 눈을 깜빡였다.

내가 나흘 만에 깨어났다고 했으니 아신 태자는 사흘 전에 이미 쾌차했을 것이다.

몸이 나으면 당장에 석현성을 떠나 백제의 수도 위례성으로 돌아갈 줄 알았는데, 그가 아직도 이곳에 남아 있는 것이 의아했다.

나 같으면 파상풍에 걸린 기분 나쁜 성 따위 금방 떠나 버리고 싶었을 텐데.

“그의 생각을 저희가 어찌 알겠습니까. 하지만 백제의 태자가 만남을 청하는데 거절할 명분도 없어 아가씨께서 깨어나는 대로 기별을 주겠다 했습니다.”

“그렇죠. 백제 태자의 요청을 어찌 거절하겠어요. 만나 보죠.”

내가 당장에라도 그를 만날 기세로 침상에서 내려오자 담덕이 내 어깨를 잡아 눌러 다시 나를 침상에 앉혔다.

“어찌 이리 급해? 이제 막 깨어났으니 조금 더 쉬어라. 태자에게는 잠시 후에 기별을 할 테니까.”

담덕의 말을 듣고 보니 아직 몸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 사실을 깨닫고 멋쩍게 웃으니 담덕이 찌푸린 얼굴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너는 너무 행동이 앞선다. 제발 몸을 사리라고 내가 몇 번을 말해?”

“하지만 이게 나인 걸 어떡해.”

“그래. 그게 너인 걸 어쩌겠니. 넌 아무 문제없다. 그런 네가 좋다고 곁에 머무는 내가 문제겠지.”

픽 웃은 담덕의 손이 다시 한번 내 머리를 헤집었다.

* * *

기력을 보하는 약을 먹고, 든든하게 오찬까지 든 후에 나는 아신을 찾았다.

아신은 방이 아닌 정원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늘 어두운 방에서만 보던 사람을 밝은 정원에서 보니 기분이 남달랐다.

“왔군.”

늘 병에 지쳐 있던 아신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얼굴에는 아직 투병의 흔적이 남아 있었지만, 깔끔하게 차려입은 옷과 멀끔하게 정리된 얼굴이 그를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이게 했다.

병상에서 일어선 그는 내 생각보다 훨씬 인상이 강하고 몸집이 컸다.

“……태자님.”

낯선 모습에 어색하게 인사를 했더니 아신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내게 당당하게 소리치던 모습은 어디 가고 이제 와서 그러지?”

“이제 태자님께선 제 환자가 아니시니까요.”

“너의 그런 모습을 다시 보려면 또 환자가 되어야 하는 거로군.”

“그건 제가 사양하겠습니다. 태자님처럼 대단한 환자는 힘들어서요.”

“그랬나? 힘들긴 했겠지.”

아신이 힘없이 웃으며 내 앞으로 다가왔다.

“절 보자고 하셨다고요.”

“그래.”

“치료는 무사히 잘 끝났습니다. 독에 대한 의문은 이미 풀리신 줄 알았는데요.”

나의 말에 아신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걸 묻고자 부른 것이 아니다.”

“그럼 무엇을 묻고자 하십니까?”

내 말에 아신이 잠시 머뭇거리더니 곧 입을 열었다.

“……네 이름.”

“예?”

“네 이름 말이다. 그걸 물어보려고.”

“고작 제 이름을요?”

황당해져서 물으니 아신은 대답이 없었다.

내 이름 정도야 몇 번이고 들었을 텐데, 고작 그걸 묻겠다고 사람을 불렀다니. 긴장했던 것이 무색했다.

“다른 사람을 통해 들으셨겠지만 제 이름은 우희입니다.”

“우희?”

“예. 밝아 오는 햇살을 만난다는 뜻입니다.”

“그렇구나. 너와 썩 잘 어울려.”

그렇게 말한 아신이 입을 꾹 다물고 나를 바라보았다. 어째서인지 모르겠으나 그는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사실 오늘 만나고자 한 것은……”

한참이나 머뭇거리던 아신이 겨우 입을 열었다.

“변명을 하기 위해서다.”

“변명이요?”

“그래. 그리고 청하고자 하는 것이 있어서이기도 해.”

“변명과 청이라.”

나는 웃으며 아신을 바라보았다.

“어떤 것부터 먼저 하시겠습니까?”

“먼저 변명부터 하지.”

“어떤 것에 대한 변명입니까?”

“내가 독에 예민하게 반응한 이유.”

웃고 있던 내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사람이 독을 먹는 일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태자가 다시 그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나로서는 불안했다.

그런 내 기분을 눈치챘는지 아신이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널 탓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하면 어찌 그 이야기를 다시 꺼내십니까?”

“그것이 후에 할 청과 관련이 있다.”

아신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나를 바라보았다.

“고구려에도 내 이야기가 많이 들리는 것으로 안다. 내 처지가 어떤지는 알고 있겠지?”

“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구려의 주적인 백제의 망나니 태자에 대한 이야기는 저잣거리에 나선 이야기꾼들의 좋은 소재였다.

어린 나이에 선왕이 죽어 그 뒤를 잇지 못하고 숙부에게 왕위를 빼앗긴 태자. 그 현실을 견디지 못해 망나니처럼 포악하게 산다고 했다.

딱 이야기꾼들이 좋아할 만한 이야기 아닌가.

실제로 만난 아신도 그런 면이 없잖아 있었다.

성내에서 일하는 시녀나 하인들은 물론이고 진가모를 비롯한 백제군들까지 아신을 대하는 것을 어려워했다.

“그걸 모두 알고 있다면 이야기가 쉽겠군.”

아신이 그렇게 말하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나는 멀어지는 아신의 목소리를 쫓아 그의 뒤로 따라붙었다.

“나는 선왕의 핏줄로, 지금의 왕은 내 숙부다. 본디 태자인 내가 왕위에 올랐어야 옳으나 나이가 어려 숙부께서 그 자리를 차지했지. 이것이 얼마나 많은 분란을 일으키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지금 백제의 상황은 미묘했다.

정통성은 태자인 아신이 강하지만, 왕위는 이미 현왕인 진사왕이 차지해 버렸다.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지금 우리 백제는 왕인 숙부를 지지하는 자, 선왕의 핏줄인 나를 지지하는 자로 나뉘어 왕위를 둘러싼 갈등이 심각해. 이 상황에서 가장 편하게 혼란이 수습되는 경우는 무엇이겠나?”

나는 답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입에 담을 수 없는 답이었다.

그러나 나를 대신해 아신이 그 답을 입에 올렸다.

“둘 중 한쪽이 죽으면 된다.”

생각보다 망설임 없이 나온 대답에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왕이 죽는 것도, 태자가 죽는 것도.

어느 쪽이든 위험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런 말을 꺼낸 사람치고 아신은 지나치게 태연했다.

“철이 들고서부터 줄곧 죽음의 위협에 시달렸어. 대놓고 자객이 오는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교묘하게 독살을 시도하는 경우도 많았지. 죽을 고비를 넘긴 적도 많았다. 어떻게든 살아남긴 했지만 괴로웠던 기억만은 선명히 가지고 있어. 내가 독에 민감한 것은 이 때문이다.”

“짐작은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독을 약으로 쓰겠다고 말씀드리지 못했던 것이고요.”

“그래. 그랬겠지.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래. 하지만 그때는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로지 내가 독을 먹었다는 것, 또다시 그 위험에 빠졌다는 것만 떠올랐지. 꼴사나운 모습이었어.”

아신이 비죽 웃었다. 스스로를 향한 비웃음이었다.

“당연한 반응입니다. 그 모습을 꼴사납다 하실 이유는 없어요.”

“그래? 하지만 너는 일부러 독을 삼키지 않았나. 내게 신뢰를 주기 위해서였지. 참으로 강심장이었다.”

“전 의원이니까요. 말씀드렸다시피 환자를 고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합니다.”

“그래. 그런 태도.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아신이 웃으며 나를 보았다.

“하여 이런 청을 하는 것이다. 백제에, 아니, 내 곁에 남지 않겠느냐?”

“예?”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놀라서 눈을 크게 뜨니 아신이 멋쩍은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 노발대발해 놓고는 이런 제안을 하는 것이 우습겠지. 하지만 진심이다. 내게는 너 같은 사람이 필요해.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내 생명을 지켜 줄 사람.”

“의원이 필요하신 겁니까? 백제에도 훌륭한 의원이 많다 들었습니다. 궁성에는 더 많을 것이고요.”

궁에서 일하는 의원들은 그 나라에서도 최고의 실력자들이었다. 그들을 두고 굳이 고구려인인 내게 이런 청을 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아신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네 말대로 이미 내 곁에 훌륭한 의원은 많다. 하지만 내게는 훌륭한 의원이 아니라, 믿을 만한 의원이 필요해.”

“제가 믿을 만한 의원입니까? 고구려 사람인데도요?”

“네가 그러지 않았어? 넌 그냥 의원이고, 난 그냥 환자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사실이니까요.”

“그렇게 말한 사람은 여태까지 너 하나뿐이다. 다들 나를 그냥 환자로 보지 않아. 그래서 날 그냥 환자로 봐 줄 사람이 필요하다. 백제의 아신 태자가 아니라, 한 사람의 환자로 봐 줄 사람. 그리하여 어떤 정치적 입장에도 흔들리지 않고 환자인 나를 치료해 줄 사람. 그런 사람이 내겐 필요해.”

“태자님께선 제가 그런 사람이 되리라 생각하시는 거고요.”

“그래.”

아신이 확신에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청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무엇이든 내어주마. 좋은 집, 좋은 옷…… 그 어떤 것이든.”

“그리 말씀해 주신 것은 감사하나 그럴 수가 없습니다.”

“……백제에 살아야 하는 것이 마음에 걸려 그러느냐?”

“그것도 한 이유입니다만 전부는 아닙니다.”

“하면?”

“그런 식으로 지켜 주고 싶은 사람이 이미 있습니다. 어떤 위치 때문이 아니라, 그저 그 사람이라서 곁을 지켜 주고 싶은 사람이요. 그래서 태자님의 제안은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나는 오래전 아이답지 않게 많은 짐을 짊어지고 있던 한 소년의 곁을 지키겠노라고 다짐했다. 하니 지금 아신이 어떤 대가를 준다 하더라도 그를 따라갈 수는 없었다.

말을 이어 가는 내 표정을 보던 아신이 아쉬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 생각이 쉬이 바뀌지는 않을 것 같구나.”

“그렇습니다.”

“후에 난 백제의 왕이 될 것이다. 그때 이 대단한 연줄을 잡지 못한 것을 후회할 것인데.”

아신은 자신이 왕이 될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숙부와 목숨을 건 기 싸움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랬다.

아신 역시 삼국 시대 속에서 이름을 알렸던 영웅 중 하나겠지?

내가 소진일 시절 미처 보지 못했던 후대의 기록 속에 분명 아신에 대한 것들도 많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제가 후회할 일은 없을 겁니다. 제가 잡은 연줄이 너무 대단하여서요.”

나는 오늘 아침 눈을 뜨자마자 보았던 내 대단한 연줄의 얼굴을 떠올리며 싱긋 웃었다.

* * *

“아신이 뭐라고 했어?”

국내성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며 담덕이 슬쩍 물었다. 관심 없는 척을 하더니 궁금하기는 한 모양이었다.

“자기 옆에 남으라던데.”

“뭐?”

담덕이 짐을 정리하던 손을 멈추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놀란 사람은 담덕뿐만이 아니었다. 옆에서 검을 손질하던 태림, 돌아갈 길을 파악하기 위해 지도를 살피던 지설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다들 왜 그렇게 봐요?”

과한 반응에 영문을 몰라 눈을 깜빡이자 세 사람이 눈빛을 교환하더니, 결국 지설이 손을 들고 나섰다.

“어떤 의미로요?”

“어떤 의미냐고요?”

“예. 어떤 의미로 옆에 남으라고 하던가요, 아신 태자가?”

“믿을 만한 의원이 필요하대요. 내 치료가 상당히 인상적이었나 봐요.”

내 대답에 지설의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그건 담덕도 마찬가지였다. 평소보다 두 배는 커졌던 그의 눈이 어느새 평소와 같은 크기로 돌아와 있었던 것이다.

태림의 시선은 아예 검으로 돌아가 있었다. 완벽한 일상의 모습이었다.

“좋은 옷도, 좋은 집도, 아무튼 원하는 건 다 줄 테니까 곁에 있으랬어요. 의원이 꼭 필요한 것 같더라고요.”

하지만 이어진 나의 말에 세 남자가 다시 펄쩍 뛰었다.

“예? 그건 마치…….”

지설이 미간을 찌푸린 채 담덕의 눈치를 살폈다.

말을 꺼낸 건 나인데 왜 담덕의 눈치를 살펴?

의아하게 지설과 담덕을 훑으니, 의외로 멀리 앉아 있던 태림이 나섰다.

“그건 마치 청혼 같군요.”

“청혼이라고요?”

어이없는 말에 나는 웃음을 터트리며 손을 저었다.

“닷새예요. 겨우 닷새 본 사람에게 청혼은 무슨. 게다가 내게 의원이 필요하다고 몇 번이나 강조했는걸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이제는 태림까지 담덕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눈빛을 받으면서도 담덕은 말이 없었다.

입을 꾹 다문 채 다시 짐 정리에 집중하는 담덕의 곁으로 다가간 지설이 팔꿈치로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어쩌실 겁니까?”

“무엇이?”

“백제의 태자가 생각보다 행동이 빠르지 않습니까. 우리 태자님은 이렇게 느린데.”

지설의 말에 담덕의 얼굴이 완전히 구겨졌다.

“말조심해라. 아직 백제 땅을 벗어나기 전이다. 누가 들으라고 태자님이래?”

“지금 그런 것을 걱정하실 때가 아니신 듯한데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거기까지만 해라.”

“지금까지 지켜본 바로는 갈 길이 먼 것 같아 드리는 말씀입니다. 제가 얼마나 답답하면 이럽니까?”

“갈 길이 멀어도 내 길이 멀지, 네 길이 멀어? 그만 입 다물어라.”

나는 투닥거리는 두 사람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 가는 길이 그리 멀다는 말이에요?”

내 질문에 두 사람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이쪽이 더 머네.”

지설의 입에서 길고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 * *

드디어 국내성으로 출발하는 날이 밝았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아신은 직접 성문 앞까지 나와 우리 일행을 배웅했다.

국내성으로 떠날 준비를 하는 동안 아신은 우리 일행이 불편하지 않도록 많은 편의를 봐주었다. 그의 적극적인 도움에 진가모가 곤란해했을 정도였다.

돌아가는 길에 탈 말을 찾아 준 것도 아신이었다.

도압성에 가륜을 두고 온 탓에 내게는 국내성까지 타고 갈 말이 없었다. 이 시기에는 말이 귀해 군대의 대단한 재산으로 분류되었으므로, 수완이 좋은 지설도 타국에서 말을 쉽게 구하지 못했다.

그 사정을 알고 아신이 나섰다. 그는 석현성의 마구간을 열어 주인 없는 말 하나를 내게 주었다.

그렇게 마음을 쓴 탓인지 아신은 떠나는 우리를 보고 상당히 아쉬운 눈치였다.

“혹시라도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 와라. 내 생각은 변함없으니까.”

“그럴 일 없습니다. 말씀드렸잖아요. 제가 잡은 연줄이 대단하다고요.”

“혹 그 연줄이 저자인가?”

아신의 시선이 못마땅한 얼굴로 삐딱하게 선 담덕을 향했다.

“왜요? 저 사람이 그리 대단해 보입니까?”

“그보다는…….”

아신이 묘하게 웃으며 말끝을 흐렸다. 잠시 고민하던 그가 품 안을 뒤져 작은 옥패를 꺼냈다.

“받아라.”

“이게 뭡니까?”

“나를 증명하는 옥패다. 혹 백제 땅에서 곤란한 일이 생기거든 이걸 보여 줘. 그럼 잘 해결될 것이다.”

“이 귀한 걸 제게 주셔도 됩니까? 이미 말까지 받았는데…….”

생각보다 대단한 물건이라 차마 받지 못하고 있으니 아신이 억지로 내 손에 옥패를 쥐여 주었다.

“귀하기는. 여기저기 뿌리고 다니는 것이니 감격할 것 없다. 생명의 은인에게 이 정도는 줘야 내 마음이 편하지.”

“생명의 은인이라고 하기엔…… 치료하는 내내 그다지 좋은 대접을 해 주신 건 아니었지만…….”

“그러니 지금 이걸로 보답하겠다잖아.”

아신이 투덜거리며 제 머리를 헤집었다.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척 보기에도 귀해 보이는 패였다.

하지만 생명의 은인 운운하는 그의 사례를 거절하기도 힘들었다.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결국 나는 그가 내민 패를 품 안에 챙겨 넣었다.

그것을 본 아신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고, 어쩐 일인지 담덕의 얼굴은 더욱 일그러졌다.

“보세요. 어찌하실 겁니까? 예?”

잔뜩 기분이 상한 담덕 옆에서 지설이 연신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 * *

우리는 백제 땅을 지나 다시 다지홀로 방향을 잡았다. 백제의 성들을 피해 갔다면 한참이나 시간이 걸렸을 텐데, 아신이 준 패 덕분에 그럴 필요가 없어 여정이 훨씬 편해졌다.

“그 태자가 준 패, 상당히 쓸모가 많은데요.”

지설이 패를 바라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으레 새로운 성에 들어갈 때면 검문검색이 있기 마련인데 그때 이 패를 보여 주면 더 물을 것도 없이 통과를 시켜 주었다.

“이거 전쟁에서 쓰면 크게 유용할지도.”

지설은 금세 머리를 굴려 이 패의 쓰임을 찾아냈다. 하지만 나는 이 패를 그렇게 사용하게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안 돼요. 그런 뜻으로 받은 게 아니니 사람에게 해가 되는 일에는 쓸 수 없어요.”

나의 단호한 반응에 지설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아가씨라면 그런 말을 하실 줄 알았지만…… 역시 아깝군요. 이곳 남쪽 전선은 백제와의 싸움으로 항상 골머리를 앓는 곳이니 무슨 수라도 써야 하는데 말이지요.”

“그래도 이건 아니에요.”

나는 재빨리 옥패를 품 안에 집어넣었다.

지금의 나는 고구려 사람이니 고구려에 좋은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생각이었다.

그래도 사람의 목숨을 살려 주고 좋은 뜻으로 받은 패를 누군가를 죽이는 일에 사용하게 할 수 없었다. 기본적인 양심의 문제였다.

“어?”

아쉬움에 몇 번이나 나를 힐끗대던 지설이 곧 하늘에서 날아오는 새를 보며 눈을 크게 떴다.

그것은 조용히 움직이던 태림도 마찬가지였다.

주변의 눈치를 살피던 태림이 하늘을 향해 손을 뻗자, 허공을 유영하던 새가 그대로 그의 손 위에 내려앉았다.

자세히 보니 새의 발목에 작은 종이가 묶여 있었다.

전령새인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새를 살피는 동안 태림이 익숙한 손길로 새의 다리에 묶인 종이를 풀어냈다.

종이는 곧장 담덕에게 흘러갔다. 얼핏 보니 검지손가락보다 조금 긴 길이의 종이에 검은 글씨가 깨알같이 적혀 있었다.

일반적인 글씨는 아니었다. 내가 알아보지 못하는 것을 보면 암호화된 군사 언어인 듯했다.

“뭐라고 적혀 있습니까?”

맞은편에 선 지설이 담덕 앞으로 불쑥 고개를 내밀며 물었다. 하지만 담덕은 대답이 없었다.

의아해진 지설이 종이 속의 글씨를 자세히 읽기 시작했다. 곧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담덕 님.”

심각한 목소리였다. 지설의 목소리에 담덕이 손에 쥔 종이를 구겼다.

“휴식 없이 서둘러 달려야겠다.”

“무슨 일인데?”

나의 질문에 담덕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폐하의 건강이 급격히 나빠졌다는군.”

“하지만 국내성을 떠날 때까지만 해도 많이 좋아진 상태셨어. 한데 어찌 갑자기 이렇게…….”

“그건 국내성에 돌아가 봐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모두 서두르자.”

담덕의 말에 우리 모두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태왕의 건강에 대한 급보를 받은 뒤 우리는 휴식도 없이 며칠을 급히 달렸다. 국내성으로 돌아가기 전 다지홀에 들러 상황을 살필 생각이었으나, 급보를 받은 이상 그 정도의 여유도 부릴 수 없었다.

도압성까지 가는 길도 여유가 없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이처럼 잠도 자지 못하고 달린 것은 처음이었다. 이렇게 길을 재촉하니 국내성에 닿는 시간이 예상보다 훨씬 많이 줄어들었다.

덕분에 국내성에 도착하자마자 우리 일행은 물론이고 우리를 태웠던 말까지 녹초가 되었다.

하지만 피곤함을 느낄 새가 없었다.

담덕은 국내성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태왕을 살피기 위해 궁으로 향했다.

나도 그 뒤를 따르고 싶었으나, 먼저 백부에게 안부를 전하는 것이 순서라는 담덕의 말에 일리가 있어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우희야!”

내가 돌아왔다는 소식에 제일 먼저 서가 울 것 같은 얼굴로 문 앞까지 뛰쳐나왔다.

“도압성이 함락되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어. 네가 포로로 잡혀간 것도, 숙부의 행방을 모른다는 이야기도 전부.”

울먹거리는 서의 얼굴을 보니 비로소 집에 도착했다는 실감이 났다. 나는 애써 미소를 지어 보이며 서를 끌어안았다.

“응. 그래도 돌아왔어.”

“이 맹추 같은 녀석이, 그러게 거길 왜 가? 가서 죽었으면 어쩔 뻔했어?”

평소라면 반박을 했겠지만 걱정해 주는 사람과 부러 싸우고 싶지는 않았다.

대꾸도 없이 조금 더 강하게 서를 끌어안았더니 결국 그의 눈에서 눈물이 터졌다.

“얼마나 걱정을 했는 줄 알아? 도압성 이야길 듣고서부터 잠을 제대로 못 잤다!”

아예 통곡을 하는 서의 뒤로 백부의 모습이 보였다.

“우희야.”

그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나의 이름을 불렀다.

“백부님.”

백부의 등장에 서가 내게서 떨어지며 눈물을 훔쳤다. 짧은 시간에 벌써 서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대고구려의 용사가 어찌 쉽게 눈물을 보여! 하물며 우희가 돌아온 좋은 날이 아니냐.”

“전 용사가 아니라 그런 거 모릅니다.”

서가 입을 부루퉁하게 내밀며 고개를 휙 돌렸다.

백부는 그런 서를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곧 내 앞으로 다가왔다.

“무사히 돌아온 것을 보니 마음이 놓인다. 그간 얼굴이 많이 상했구나.”

“백부님께 괜한 걱정을 끼쳤습니다. 송구합니다.”

“가족끼리 송구할 것이 무어라고. 우선 안으로 들어가자. 씻고 휴식을 취해야지.”

“예.”

백부의 커다란 손이 내 손을 강하게 감쌌다가 떨어졌다. 덤덤한 척을 하고 있지만 내 손을 감싸 쥐었던 그의 손도 떨리고 있었다.

우리 연씨 가문 모두에게 힘든 시간이었다.

도압성은 함락당했고, 아버지는 아직 생사가 묘연했다. 거기에 제신은 아버지를 찾겠다고 남부를 떠돌고 있었다.

아마 그 모두가 이곳에 돌아오기 전까지 우리는 예전과 같은 밝은 분위기를 찾을 수 없을 터였다.

* * *

국내성으로 돌아온 지도 며칠이 지나 다시 집에 익숙해져 갈 때까지도 담덕에게서는 기별이 없었다.

폐하의 상황이 많이 좋지 않은 것일까?

하지만 그렇다면 더욱 나를 불렀을 것이다. 그간 내가 폐하의 병을 돌보았으니 말이다.

나는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을 상기하며 최대한 긍정적으로 상황을 해석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쁜 소식이 들려왔다. 담덕이 아닌 백부로부터였다.

“우희야, 잠시 이야기를 좀 할까.”

백부가 늦은 시각 내 방을 찾았다. 그간 좀처럼 없던 일이었다.

“예. 안으로 들어오세요.”

나는 호기심과 불안함이 묘하게 섞인 기분으로 그를 맞이했다.

백부를 안으로 안내해 그에게 차를 한 잔 내어주고, 내 것까지 준비해 맞은편에 앉았더니 곧 그가 입을 열었다.

“너도 들었겠지? 태왕 폐하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것 말이다.”

“예. 워낙에 소문이 많이 퍼져서요.”

담덕이 그토록 감추고 싶어 했던 태왕의 건강 문제가 온 고구려에 파다하게 퍼졌다. 담덕이 국내성을 비운 사이 벌어진 일이라 그가 손을 쓸 새가 없었던 것이다.

“하면 말하기 더 쉽겠다.”

목이 타는지 백부가 차로 입술을 축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폐하께서 양위를 준비하고 계신다.”

“예? 양위라면…….”

“조금이라도 기력이 있으실 때 태자님께 왕위를 넘겨주고자 하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나는 머리가 복잡해 쉽게 백부의 말을 따라잡지 못했다.

“그게 무슨…… 그 정도로 폐하의 병이 심각합니까? 양위를 논의해야 할 정도로요?”

“병이 심각한 것도 문제지만…… 폐하께서는 급사했을 경우 일이 이상하게 돌아갈 것을 걱정하고 계신다.”

“일이 어찌 이상하게 돌아갈 수 있단 말입니까?”

“……유언이란 마지막을 지키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조작하기가 쉽지 않더냐.”

“거기까지 걱정을 하고 계신단 말입니까?”

백부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궁 안은 모두 소노부가 장악했고, 그것을 아는 귀족들은 전부 소노부의 편에 붙었다. 그간 남부 전선에서 선전하여 폐하의 입지가 높아졌지만 이젠 그것도 아니지 않느냐. 앞으로 상황은 계속 나빠지기만 할 것이다.”

도압성은 단순히 백제와의 전쟁터 그 이상의 의미였다.

그간 태왕은 백제와의 전선에서 승리를 이어 가며 위상을 높여 왔다. 유약한 왕, 무능한 왕이라는 그림자를 덧씌우려던 일부 귀족들의 검은 속셈이 통하지 않는 상황이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 남부 전선이 무너졌다. 다시 돌아오기는 했으니 포로까지 잡혀가는 수모를 당했다.

고국원왕이 백제와의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이후로 백제는 고구려의 가장 큰 적이었다.

한데 그들과의 전쟁에서 밀렸으니 귀족들이 기다렸다는 듯 반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병이 나아질 가능성은 없나요?”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당장에라도 궁으로 달려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백부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미 병이 깊어지셨다.”

폐하의 가장 큰 아군인 백부마저 이리 말하는 상황이라면 그의 병이 깊은 것은 거짓이 아닐 터였다.

그래서 담덕이 나를 부르지 않았구나.

이미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라면 나의 의술은 필요 없었다. 나는 병을 고치는 사람이지 목숨을 붙잡아 주는 신이 아니었으니까.

“……떠나지 말걸 그랬나 봐요. 계속 이곳에서 폐하의 곁을 지켰어야 했는데.”

뒤늦게 후회가 밀려왔다. 담덕이 없으니 나라도 태왕을 지켜 주었어야 했다.

한데 내 아버지, 내 오라비가 보고 싶어 그를 외면했다.

여태까지 그가 내게 해 준 것이 얼마나 많았는데.

“죄스러우냐?”

백부나 물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백부의 표정이 묘해졌다.

“하면…… 태왕 폐하의 부탁을 들어줄 수 있겠느냐?”

“태왕께서 제게 부탁을 하셨습니까?”

“그래. 나를 통해 네게 전하라 하셨다. 들어줄 수 있겠느냐?”

“제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할 것입니다.”

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나를 위해 여러모로 힘을 써 준 그에게 보답을 하고 싶었다.

게다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으셨다니…… 어찌 거절할 수 있겠어.

결심이 선 나의 눈에 백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내 양녀가 되거라.”

하지만 백부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예?”

놀라서 되물으니 백부가 다시 한번 말했다.

“내 양녀가 되라 하였어.”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나는 혼란스러워 미간을 찌푸렸다.

“제가 백부님의 양녀가 되는 것이 어찌 태왕 폐하의 부탁을 들어 드리는 것이 됩니까?”

“우희야, 벌써 잊었느냐? 네가 내 양녀 되는 것의 의미 말이다.”

“제가 백부님의 양녀가 된다는 말은…….”

나는 눈을 내리깔아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분명 오래전 양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적이 있었다. 나는 그때의 이유를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설마.”

나는 놀라서 고개를 번쩍 들었다.

“혼인을 하라고요? 태자님과?”

백부는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그보다 강한 긍정은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주먹을 꽉 쥐어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그런, 이미 오래전에 그러지 않기로…….”

“모두 무른 것이 아니었다. 두 사람이 자라 자연스레 이어질 수 있도록 기다리려고 했던 것이지. 태왕께서 왜 네가 궁에 자유로이 출입하도록 두었다고 생각하느냐?”

그러고 보니 확실히 이상했다.

궁에 출입할 수 있는 권리는 굉장히 특별한 것이었다. 그런 권리를 고작 열둘의 어린 계집애가 가졌다.

그때의 나는 내게 주어진 특권이 태왕의 병을 돌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도 생각하면 옳지 않았다.

태왕은 너무 쉽게 내가 그의 병을 돌보는 것을 받아들였다. 내가 아무리 담덕의 친구이고, 절노부 연씨의 아이여도 그건 과했다.

내 의술을 어찌 믿고?

그는 내 의술을 믿은 것이 아니었다. 어설픈 의술이라도 자신의 몸을 내게 맡겨 조금이라도 더 담덕과 나를 가까이 두고 싶었던 것이다.

“전부…… 오늘의 이 말을 위해서…….”

충격으로 말을 잇지 못하는 나를 보며 백부가 눈을 질끈 감았다.

“더 기다려 주고 싶었다. 정말로 서로의 마음이 닿아 제대로 이뤄지기를 바랐어. 폐하도, 나도 너를 아끼니까. 정말로 그러길 바랐어.”

백부의 목소리는 한탄에 가까웠다.

나는 어렵지 않게 그의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마음이 상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순수하게 나를 믿어 주었다고 생각했는데, 그 이면에 다른 이유가 숨어 있었다.

“일이 이리 급박하게 돌아갈 줄 누가 알았겠느냐. 어느 누가 알았겠어.”

백부가 긴 한숨을 내쉬며 다시 눈을 떠 먼 산을 바라보았다.

“태자님께서는 곧 왕위에 오르실 거다. 다음 해 정월이다.”

이미 가을에서 겨울로 접어들고 있는 시점이었다. 내년 정월이라면 몇 개월 남지 않았다.

“왕위에 오르시는 분의 곁이 빈자리는 건 말이 안 되지. 즉위식과 함께 국혼이 열릴 것이야. 폐하께서는 태자님의 옆자리를 우리 절노부, 북부 연씨의 딸, 우희 네가 채워 주기를 바라고 계신다.”

마지막에 이르러 백부의 두 눈이 똑바로 나를 향했다.

“태자님은요? 태자님도…… 이걸 알고 계시나요?”

“양위에 대해서는 들으셨을 거다. 하지만 혼인에 대해서는 아직 전하지 않으셨어. 태왕께선 먼저 네 대답을 듣고 싶어 하신다.”

“제 의사를 묻지 않고 차라리 강요를 하셨다면 미워하며 따랐을 겁니다. 하지만 어찌 제 의사를 물으시는지…….”

상황이 난처했다. 나는 차마 백부의 눈을 볼 수 없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조금만…… 조금만 생각을…… 하게 해 주세요.”

“그래. 갑작스럽겠지. 네 생각이 정리되기를 기다리마.”

씁쓸함이 담긴 목소리였다.

나는 백부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내 방을 떠나고서도 한동안 눈을 뜨지 못했다.

* * *

나는 멍하니 탁자에 앉아 생각에 빠졌다.

혼인이라고? 내가? 담덕과?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였다. 언젠가 누군가와 혼인을 해 가정을 이루리라는 생각을 했지만 그게 담덕이라니.

내가 광개토 대왕과 결혼을 한다고? 그런 게 가능해?

머릿속이 복잡했다.

어린애로만 봤던 담덕과의 혼인도 당황스러웠지만, 그와의 혼인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일이 되리라는 것이 더욱 당황스러웠다.

나는 내가 그 대단한 역사의 한 줄을 차지할 수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담덕과 가까이 지내기는 했어도 친구 정도는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있었다.

역사서에 왕의 친구까지 자세히 적지는 않을 테니까.

하지만 황후는 달랐다. 역사에 선명하게 이름이 남는 것이다.

원래 이 자리는 누구의 것이지?

나는 혼란에 빠졌다.

내가 기억하는 역사 속의 담덕도 누군가와 혼인을 하고 아이를 낳았을 것이다.

그러니 그다음 왕위를 이은 장수왕이 나왔지.

그런데 만약 내가 담덕과 혼인하면, 나와 담덕의 후손이 장수왕이 아닌 다른 아이라면……

고구려의 역사는 어찌 되는 거지? 아니, 우리나라의 전체 역사가 꼬여 버리는 거 아냐?

광개토 대왕 못지않게 장수왕의 업적도 대단했다. 그는 이름만큼이나 오랜 세월을 살아가며 고구려의 역사에 지대한 공헌을 한 사람이었다.

아니, 아니지.

고구려는 일부일처지만 왕은 사정이 다르잖아. 황후가 아닌 다른 여인과의 사이에 낳은 아이가 장수왕일 수도 있어.

하긴 그래. 어차피 정략적인 결혼에 아이까지 생각하는 것도 우스워. 어차피 담덕이 여인을 더 곁에 둔다고 손가락질할 사람은 없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내가 너무 억울하잖아? 난 담덕과 혼인하면 그걸로 끝인데!

“아냐,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지금…….”

나는 그대로 탁자에 머리를 박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솔직하게 말하면 모든 것이 무서웠다.

어린 시절의 나는 역사를 바꾸는 것도 무섭지 않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내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서 지금의 삶에 충실하겠다고 다짐까지 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내가 담덕과 가까워지고, 태왕의 치료를 자처함으로써 요동칠 역사가 이처럼 중대한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두려웠다. 하지만 눈앞의 사람을 외면할 수도 없었다.

결국 결론은 제자리였다.

나는 연우희였다. 소진으로서의 기억을 가지고 있지만, 결국 이 자리에서는 우희로 숨 쉬고 있었다.

그러니 나는 열두 살의 내가 ‘우희’로서의 최선을 선택했듯, 지금 역시 ‘우희’로서의 최선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연우희로서의 최선이라면…… 역시 답은 하나인걸.”

나는 밀려드는 우울함에 탁자에 머리를 부볐다.

* * *

“담덕, 활 쏘는 거 가르쳐 줄래?”

나는 오랜만에 궁을 찾았다. 국내성에 다시 돌아온 후로는 처음이었다.

처음에는 태왕의 병이 깊어 담덕이 바빴고, 그 이후엔 백부에게 들은 이야기가 마음에 걸려 내가 일부러 담덕을 피했다.

“한동안 잘도 피해 다니더니.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어?”

담덕이 팔짱을 낀 채 나를 내려다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한동안 요리조리 피해 다니던 내가 갑자기 활을 가르쳐 달라며 나타났으니 그의 입장에서는 의아할 법도 했다.

“그냥 갑자기 활이 쏘고 싶었어. 그때 동굴에서도 말했잖아. 활 연습 열심히 해서 한 방에 늑대를 죽이는 사람이 될 거라고.”

“그건 바라지도 않는다.”

담덕이 픽 웃으며 개인 연무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활을 가르쳐 주겠다는 뜻이었다.

나는 담덕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재빨리 그의 뒤를 따랐다.

담덕은 활을 들어 익숙한 자세로 사대 앞에 섰다. 과녁은 멀리 있었지만, 거리가 그에게 큰 장애가 되지 않으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담덕.”

나는 담덕을 따라 자세를 잡으며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응.”

담덕은 여전히 과녁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는 화살을 쏠 때만큼은 어디에도 눈을 돌리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일부러 활을 쏘자고 나선 것이다.

아무래도 눈을 보고 말하는 건 서로 민망하니까…….

“폐하의 상태는 어때?”

“알면서 뭘 물어? 좋지 않지.”

생각보다 담덕의 대답은 가벼웠다. 그는 가볍게 활시위에서 손을 놓아 화살을 과녁의 중앙에 꽂았다.

“침울해 있을 줄 알았는데.”

이번엔 내 차례였다. 담덕을 따라 활시위를 놓았지만 화살은 과녁의 끄트머리만 겨우 맞혔다.

똑같이 따라 하고 있는데 어째서 내 화살은 이리 형편없이 날아가는 거야?

속으로 불만을 토로하는 사이 담덕이 다음 화살을 시위에 걸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오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어. 돌아와서 처음 폐하의 얼굴을 뵈었을 때는 참담했는데, 갈수록 현실을 받아들이게 되더라. 어른이 된 거겠지, 이제.”

담덕의 말투는 담담했다.

나는 힐끗 시선을 돌려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담담한 말투와 달리 그의 표정이 미세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역시 괜찮을 리가 없지.

나는 한숨을 내쉬며 다음 화살을 준비했다.

“나도 곧 어른이야.”

“아, 네 탄일 말이야?”

담덕이 내 말의 의미를 알겠다는 듯 맞받아쳤다.

원래는 도압성에서 가족들과 함께 탄일을 맞이할 예정이었지만, 여러모로 사정이 어긋나 결국 국내성에서 맞이하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닷새 뒤였다.

“지금 보니 탄일에 선물을 달라고 온 것이로구나?”

“뭐? 내가 선물이나 구걸하러 여기까지 올 것 같아?”

“그럼 뭔데? 한동안 뜸하다가 갑자기 여기에 온 건 이유가 있어서 아니야?”

“이유야 있지만…….”

집을 나설 때까지만 해도 할 말을 모두 정해 두었는데 정작 담덕의 앞에 오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색해서 아무 말도 못하겠는걸.

이러다가는 평생을 가도 입을 떼지 못할 것 같았다. 결국 나는 조금 더 말하기 쉬운 이야기부터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폐하께서 양위를 생각하고 계신다며?”

“단순히 생각이 아니야. 내년 정월, 내게 왕위를 넘겨주시겠대. 내가 왕이라니. 믿어져?”

“응. 넌 왕에 잘 어울려. 누구보다 내가 잘 알아.”

“어쩐 일이야? 네가 날 그리 띄워 주고.”

“띄워 주는 것이 아니라 진심이야. 넌 누구보다 훌륭한 왕이 될 거야. 장담해.”

지극히 진심이 담긴 말이었으나 담덕은 내 말을 흰소리로 들은 모양이었다.

담덕의 화살이 또다시 과녁의 중앙에 꽂혔다. 중앙을 맞히다 못해 이번에는 중앙에 꽂혀 있던 화살을 반으로 갈랐다.

“너한텐 활 귀신이 붙은 게 틀림없어.”

“그 귀신이 네게 붙으면 얼마나 좋을까.”

“활은 잘 쏘고 싶지만 귀신은 사양이야.”

그렇게 말하고 다음 화살을 쏘았더니 이번에는 과녁의 끄트머리에 맞고 화살이 바닥에 떨어졌다.

“……역시 귀신의 힘이라도 빌리는 게 좋을까?”

“역시 그게 좋겠지?”

황망하게 화살을 바라보는 나에게 담덕의 유쾌한 웃음이 닿았다.

지금이다.

나는 담덕의 웃음에 묻어 조심스럽게 원래 하고자 했던 말을 꺼냈다.

“백부님이 그러시는데, 왕이 되면 혼인을 해야 한대. 왕의 옆자리는 비어선 안 된다고.”

“아아, 그렇지.”

나는 활을 만지는 척을 하며 담덕의 얼굴을 살폈다. 그는 대수롭지 않은 듯 대답하며 화살을 쏘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다행히 담덕은 혼인에 별생각이 없는 모양이야.

나는 한시름 놓고 조금 편해진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어차피 해야 하는 거라면…… 그거 나랑 할까?”

내 말이 입 밖으로 나옴과 동시에 활시위를 붙잡고 있던 담덕의 손이 아래로 떨어졌다.

활시위를 떠난 화살은 형편없이 바닥에 처박혔다. 담덕이 이런 실수를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으하하! 야, 너 이렇게 실수를 하는 건 처음……”

박장대소하며 담덕을 바라보았더니 그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어…….”

나는 조금 당황했다.

“너 원래 활 쏠 때는 절대 다른 곳은 안 보잖아.”

“무슨 말이야?”

담덕은 내 의문에 답하는 대신 내게 질문을 던졌다.

“뭐가?”

“방금 너랑 하자고 한 거. 그거 뭐냐고.”

“아…… 혼인?”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더니 담덕의 얼굴이 멍해졌다.

“혼인…… 그, 내가 아는 그 혼인?”

“아마 그게 맞을 것 같은데…… 혼인이라는 게 여러 개야?”

“그러니까, 사내랑 여인이랑 하는 그 혼인? 같이 부부가 되어 아이도 낳고, 평생을 함께하자고 언약하는 그거?”

“응. 그거.”

내 확답에 담덕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 얼굴이 마치 ‘내가 왜 너랑 그딴 걸 해야 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황급히 손을 저으며 담덕의 오해를 막아섰다.

“아니, 아니! 오해하지 말고!”

“내가 무슨 오해를 하는데.”

“내가 혼인을 하자 말한 게 평생 나만 사랑하라거나, 서로를 닮은 애를 낳자거나 그런 게 아니거든.”

이어지는 내 설명에 담덕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아니면 뭔데?”

“그…… 정략혼이라고 해야 하나…….”

“뭐?”

“폐하께서 내게 부탁하셨거든. 내가 너와 혼인했으면 한다고.”

의아함이 섞여 있던 담덕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폐하께서 그런 부탁을 하셨다고? 네게?”

담덕이 이를 바드득 갈았다. 그의 과격한 반응에 나는 내가 죄라도 지은 것마냥 고개를 푹 숙였다.

“상황이 그렇잖아. 폐하께선 네게 든든한 배경을 주고 싶어 하셔. 그러기엔 우리 절노부가 제일이지. 그런데 너도 알다시피 절노부의 수장인 백부님께는 딸이 없어. 그나마 제일 가까운 조카가 나라서…….”

“그래서, 네가 내 배경이 되어 주겠다고?”

“응.”

“어째서?”

“넌 내 친구잖아. 난 네가 힘들지 않은 왕이었음 좋겠어. 지금의 폐하처럼 힘들게 자리를 지키려고 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왕이었으면 해.”

그것이 지난 시간 동안 이어 온 내 고민의 결론이었다.

나는 담덕이 좋았다. 이성으로서의 애정은 아니지만,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담덕이 좋았다.

그래서 담덕을 돕고 싶었다. 최대한 그가 편안하게 왕위를 지킬 수 있도록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기꺼이 그럴 생각이었다.

혼인이야 뭐가 어렵겠어?

어차피 좋아하는 사람도 딱히 없고, 열렬하게 사랑을 하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이 한 몸 우리 광개토 대왕님과 고구려의 미래를 위해 바치지 뭐.

거기까지 결론을 내리는 데 시간이 꽤 걸렸다. 나로서는 굉장한 결심을 한 셈이었다.

하지만 담덕은 나의 노력이 가상하지도 않은지 시종일관 굳은 얼굴이었다. 차갑다 못해 무섭게까지 느껴지는 얼굴에 괜히 민망해졌다.

“야…… 아무리 나랑 혼인하는 게 싫다고 해도 그렇지, 그런 반응일 것까지는 없잖아? 말한 사람 민망하게.”

나의 투덜거림에도 담덕의 표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연우희 너.”

담덕이 짓씹어 내듯 내 이름을 불렀다.

“혼인이 뭔지는 알아?”

“알아. 그러니까 하자고 한 거야.”

“난 지금 혼인한 남녀가 어찌 지내는지 아냐고 묻는 거야. 난 왕이 될 거고, 왕에게는 후사가 필요해. 그러려면 뭘 해야 하는지 알아?”

“그…….”

노골적인 말에 얼굴이 붉어졌다. 내 얼굴이 달아오르는 꼴을 지켜보던 담덕이 더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하. 그 얼굴을 보면 모르는 것도 아닌데.”

담덕이 손에 들고 있던 활을 던지듯 바닥에 내려놓으며 내 앞에 다가왔다.

“너, 날 아주 우습게 보는구나.”

순식간에 가까워진 거리에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서려니 담덕이 내 어깨를 붙잡아 걸음을 막았다.

“넌 나랑 그런 거 할 수 있어?”

“그…… 꼭 해야 하나?”

너무 가까운 거리가 어색해 시선을 피하며 물었더니 담덕이 코웃음을 쳤다.

“뭐?”

“아니, 여인을 나만 품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 후사는 진짜 네가 원하는 다른 사람에게서 얻으면 돼. 나는 네게 배경을 주기 위한 사람이니까 꼭 그러진 않아도……”

담덕이 횡설수설 이어지는 내 말을 자르며 분명하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했다.

“난 황후에게서 난 자식이 필요해. 그래야만 후계가 안정되니까.”

담덕의 큰 손이 내 턱을 붙잡았다.

“난 내 황후랑 모든 걸 할 거야. 네가 그걸 할 수 있어?”

내가 시선을 피하지 못하도록 붙든 손은 크고 뜨거웠다. 나는 어쩔 줄 몰라 활을 쥔 손에 힘을 줄 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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