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아신 태자
아신 태자를 치료할 사람이니 몸을 깨끗하게 해야 한다는 의원의 주장에 따라 나는 오랜만에 제대로 된 목욕을 하게 되었다.
평소 달래가 준비해 주던 것처럼 호화로운 목욕은 아니었지만, 감옥에서 뒹구느라 더러워진 몸을 씻어 내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묵은 때를 벗겨 내고 시원하게 밖으로 나왔더니 처음 보는 옷이 준비되어 있었다.
준비된 옷은 이곳 저택에서 일하는 시녀들이 입는 것과 비슷했다. 인질로 잡혀 온 내가 새로이 갈아입을 옷이 없다는 것을 안 의원이 따로 준비해 준 것 같았다.
백제의 복식이라고는 해도 고구려의 것과 큰 차이는 없었다. 다만 북쪽에 치우쳐 추위가 매서운 고구려의 옷은 방한에 특화된 반면, 백제의 옷은 조금 더 가벼운 감이 있었다.
어쨌거나 기본적인 복식은 같았기 때문에 나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옷을 갈아입을 수 있었다.
준비를 마치고 나서니 의원이 서둘러 나를 아신 태자에게로 안내했다.
아신 태자가 머무르는 곳은 성안의 저택에서도 가장 깊은 곳이었다. 나는 한참을 걸어 아신 태자의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와 의원은 천으로 코와 입을 가린 채 아신의 숙소 안으로 들어섰다.
들어선 방은 한 나라의 태자가 머무르기에는 소박한 공간이었다. 크기며 분위기에 화려한 느낌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내게 주어진 방에 비하면 으리으리한 수준이었다. 아마 석현성에서도 이곳이 제일 좋은 방일 터였다.
“태자님은 안쪽에 계시네.”
의원이 방안에서도 가장 안쪽에 있는 침상으로 나를 안내했다. 아직 가까이 가기 전인데도 벌써부터 주변이 소란했다.
“꺼져, 꺼지라고!”
발작에 가까운 소리와 함께 침상에서 약사발이 날아와 발치에 떨어졌다.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 난 사발 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얼굴로 튀어 오르는 조각을 막아 냈다.
다행히 조각은 막았지만 방금 전에 갈아입은 옷은 조각과 함께 튄 약으로 엉망이 되고 말았다.
약을 가져왔을 시녀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었다.
“태자님.”
그 소란을 뚫고 의원이 조심스럽게 아신에게 다가갔다. 그의 뒤를 따라 침상 가까이 붙으니 아신의 얼굴이 보였다.
아신은 침상에 앉아 이불을 두른 채 덜덜 떨고 있었다. 얼굴은 창백했고 눈은 퀭하게 꺼져 있었다.
“의원.”
“예.”
“아무리 약을 먹어도, 나아지지가, 않는다. 어찌 된 거냐.”
의원을 향하는 매서운 눈이 질책을 담고 있었다. 의원은 황급히 고개를 숙여 아신의 눈을 피했다.
덜덜 떨고 있는 탓인지 매서운 눈에 비해 아신의 말투는 어눌했다. 열린 입 사이로 발음이 새고 있었다.
“전염병이란 놈이 본디 상당히 고약하여…….”
하지만 눈빛 하나만으로도 의원을 위협하기는 충분했다. 변명을 쏟아 내는 의원은 목소리에 두려움이 가득했다.
“그래서 고칠 수 없단 말이, 우욱!”
아신이 소리를 버럭 지르다 말고 입에서 토사물을 쏟아 냈다. 놀란 의원이 황급히 아신에게 다가가 수건으로 입을 닦아 주었지만 아신은 신경질적으로 그의 손을 쳐 내며 몸을 뒤틀었다.
“내 몸을 건들지 마라!”
“송구, 송구합니다.”
태자의 신경질적인 반응에 의원이 몸을 바짝 엎드렸다.
“이보게. 어서 살피게!”
의원이 바닥에 엎드린 채로 고개만 돌려 작은 목소리로 내게 속삭였다.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아신 앞에 섰다. 포악함을 온몸으로 내뿜고 있는 아신의 눈이 나를 향했다.
“너는 또 뭐냐?”
“오늘부터 제가 태자님의 병을 돌봐 드릴 겁니다.”
진맥을 하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아신에게 닿기 전에 그가 내 팔을 밀어냈다.
“네가 뭔데 내 병을 돌봐?”
나를 누구라고 말해야 할까.
난처함에 의원을 바라보니 바닥에 납작 엎드린 그가 고개만 들어 나를 소개했다.
“이번에 잡혀 온 고구려인들 중 하나입니다.”
“고구려인?”
“예. 그간 고구려인들을 감옥에 가둬 두었는데 그곳에서 전염병이 돌기 시작했지요. 한데 이 여인이 전염병이 번지는 것을 막아 달솔이 눈여겨보았습니다. 저 또한 대화를 나눠 보았사온데 병에 대한 지식이 보통이 아닌 것이 필시 태자님의 병을 고치리라 생각이 들었습니다.”
의원의 긴 설명에 아신의 시선이 나를 훑었다. 눈빛에 의아함이 가득한 것을 보니 의원의 설명이 영 의외인 모양이었다.
“이 계집이 말이야?”
“예. 그 계집이 말입니다.”
나는 비아냥거리는 아신의 말을 받아넘기며 그의 손목을 잡았다. 진맥을 위해서였다.
그런데 내 손이 닿자마자 아신이 몸을 떨며 경련했다. 나는 당황해서 손을 뗐다.
“왜 그러십니까?”
“병을 잘 안다는 네가 그걸 내게 물어? 사람의 손이 닿을 때마다 몸이 뒤틀려 죽을 것 같다.”
아신이 이를 바드득 갈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 나는 조금 혼란스러워졌다.
어째서? 괴질에 이런 증상은 없는데.
나는 찬찬히 아신의 외관을 살폈다.
창백한 얼굴에 퀭한 눈, 열이 심하고 오한이 들어 몸을 떨며, 구토를 심하게 하고 경련이 계속된다.
전형적인 괴질의 증상이었다. 하지만 손이 닿을 때마다 경련이 심해지는 건 이상했다.
나는 의원이 아신의 토사물을 닦기 위해 사용했던 천을 살폈다.
토사물은 음식의 형태가 거의 그대로 남아 있었다. 애초에 제대로 씹어 삼키지 않아 소화가 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고개를 들어 아신의 얼굴을 살피니 그의 입매가 묘했다. 안면 근육이 뻣뻣하게 굳어 입술이 양옆으로 퍼져 있었던 것이다.
발음이 계속 새던 것도, 음식물을 제대로 씹어 삼키지 못한 것도 모두 그래서였을 것이다.
무엇인가 이상했다.
석현성 전체에 괴질이 돌고 있고, 아신의 증상은 괴질 환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사소한 부분에서 미묘하게 증상이 어긋나고 있었다.
나는 아신의 손목을 붙잡았다. 이번에도 아신의 몸이 경련했지만 무시했다.
부맥과 긴맥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어. 이건…….
나는 아신의 손목에서 손을 떼고 그를 바라보았다.
“태자님. 혹 근래에 턱이 뻣뻣해지고 입을 벌리는 것도 힘들어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하셨습니까?”
“그랬다.”
“누군가 뒤에서 잡아채는 것처럼 머리가 뒤로 당겨지는 듯하고, 어깨도 결리진 않으세요?”
“……그것 역시 맞다.”
“작은 소리에도 몸이 뒤틀려 짜증이 나고, 불빛만 보아도 경련이 일어 몸을 주체할 수 없는데, 사람이 몸에 손을 대기까지 하면 아주 죽을 것처럼 몸이 덜덜 떨리시죠?”
“그걸 모두 어찌 알았지?”
아신이 몸을 덜덜 떨며 눈을 크게 떴다. 그는 내 말에 크게 놀란 눈치였다.
“최근에 사냥을 가셨다 들었는데요.”
“그래.”
대답하는 아신의 기세가 처음보다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내가 그의 상황을 꿰뚫어 본 것이 큰 영향을 준 것 같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의원이 나서서 아신의 짧은 대답을 보충했다.
“사냥을 나갈 때 병사들을 몇 명 대동하셨는데, 그중에 전염병에 걸린 자가 있었네. 아마 그때 태자님께 전염병이 든 것 같아.”
하지만 내 귀에는 이미 의원의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나는 코와 입을 막고 있던 천을 벗어 내리고 아신이 두르고 있는 이불을 벗겨 냈다.
“이게 무슨 짓이야!”
“뭐, 뭐하는 건가!”
아신은 물론이고 의원도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아신은 추위에 떨고 있는 자신에게서 이불을 뺏어 간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고, 의원은 내가 그전에 말한 것과는 달리 전염병 환자를 앞에 두고 코와 입을 노출하자 미친 사람 보듯 했다.
하지만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나는 그대로 손을 뻗어 아신의 상의를 벗겼다. 거침없는 손길에 아신이 짜증을 내며 나를 밀어냈지만, 지칠 대로 지친 환자의 힘을 이겨 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자네, 이게, 이게 지금 뭐하는 짓인가!”
갑작스런 나의 행동에 의원은 금방이라도 자지러질 기세였다. 그러나 지금 내게 의원의 반응은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내게 확신을 줄 흔적을 찾고 있었다. 내 생각이 맞는다면 아직 그의 몸에 흔적이 남아 있을 것이다.
나는 훤히 드러난 아신의 상의 곳곳을 살폈다.
어깨, 팔, 가슴, 복부.
하지만 모든 곳을 훑어도 내가 찾는 흔적은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하의였다.
아무리 급해도 바지를 벗길 수는 없었다.
나는 아신의 바지를 허벅지까지 걷어 올렸다. 훤히 다리가 드러나자 의원이 멍한 얼굴로 넋이 나가 있었다.
그건 아신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내 손이 닿을 때마다 경련을 일으키면서도 정신 나간 여자라도 보는 양 입을 벌리고 있었다.
아신의 양다리를 살피던 나는 곧 원하는 흔적을 찾아냈다. 종아리 뒤편 안쪽의 예민한 살에 선명한 이빨 자국이 있었다.
나는 그 자국을 매만지며 아신을 바라보았다.
“이거 뭡니까?”
“……뭐?”
넋이 나가 있던 그는 내 말을 한 번에 알아듣지 못했다.
“이 상처 뭐냐고요.”
“사냥을 나갔다가 늑대에게 물려서…….”
“치료는요? 치료는 제때 받으셨어요?”
“겨우 늑대에게 물린 것으로 무슨 치료를 받아? 살짝 깨물린 상처라 피도 나지 않아 그냥 두었다.”
영문을 몰라 더듬더듬 흘러나오는 아신의 말에 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모든 조각이 맞춰졌다.
“태자님은 전염병에 걸리신 게 아닙니다.”
“허. 자네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가?”
확신에 찬 나의 말에 의원이 헛웃음을 흘렸다. 내가 별 우스운 흰소리를 한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얼핏 보기엔 병사들 사이에 돌고 있다는 전염병과 다를 바가 없지만 묘하게 증상이 다릅니다. 몸에 경련이 심한 것이나, 몸이 뻣뻣하게 굳어져 입이 벌어지는 것, 작은 소리와 빛에도 민감하게 경련이 이는 것. 이건 병사들의 증상과 다릅니다.”
나의 말에 의원이 고개를 저으며 반박했다. 그로서도 나름의 확신이 있어 아신이 전염병에 걸렸다 판단을 내린 것인데, 그것을 내가 뒤집으려 하고 있으니 그의 입장에선 반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구토를 하셨고, 열이 높았으며, 오한으로 떨림이 멈추지 않았네. 전염병의 전형적인 증상이지.”
“예. 그렇습니다. 전염병의 걸린 자들의 흔한 증상이지요. 그래서 의원께서도 태자님의 병을 그들과 같은 전염이라 판단하셨을 겁니다. 하지만 태자님은 설사를 하지 않으셨잖습니까.”
“그런 그랬지만 전염병에 걸린 자들 중에도 설사를 하지 않는 이들이 있어. 전염병도 형태가 조금씩 다르지 않나.”
“맞습니다. 하지만 토사물조차 병사들의 것과 너무 다르지 않습니까? 병사들의 토사물은 속에서부터 올라와 완전히 소화가 된 상태였기 때문에 음식의 형태가 보이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태자님의 토사물을 보십시오.”
나는 아신의 토사물이 묻어 있는 천을 의원에게 내밀었다.
“쌀알이 그대로 살아 있습니다. 애초에 제대로 씹어 삼키지를 못하신 겁니다. 안면이 딱딱하게 굳어 버려서요.”
의원의 눈이 내가 내민 천으로 향했다. 그곳에 나의 말처럼 음식물의 형태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을 본 의원이 미간을 찌푸렸다.
“하면 도대체 뭐란 말인가? 무엇이기에 태자님께서 이러셔?”
“파상풍입니다.”
“파상풍?”
“예. 늑대에게 물린 상처로 좋지 않은 기운이 흘러들어 몸이 상한 겁니다. 파상풍의 증상이 지금 돌고 있는 전염병과 일부 겹치니 의원께서 오해를 하신 겁니다.”
“내가 진단을 잘못 내렸단 말인가?”
의원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럴 리가 없네. 태자님의 병은 전염병이 확실해.”
의원이 이런 식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건 나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병을 고치는 방법을 몰라 태자의 병이 악화된 것이라면 변명의 여지가 있었다. 어차피 이 시대에서 전염병은 고치기 힘든 병으로 정평이 나 있었으니까.
하지만 처음부터 진단을 잘못 내렸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는 판단을 잘못 내려 태자의 병을 깊어지게 만든 대역 죄인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의원으로서는 자신의 진단과 처방이 맞는다고 밀어붙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나도 물러설 수는 없었다. 나 역시 아신의 병을 고쳐야 무사히 고구려로 돌아갈 수 있는 입장이었다.
“저도 확신합니다. 태자님의 병은 전염병이 아니라 파상풍입니다.”
단호한 나의 말에 의원이 주먹을 꽉 쥐었다. 여태까지 호의적이던 그의 눈에 순식간에 적의가 가득 찼다.
“태자님. 이자를 믿지 마십시오. 지금 보니 고구려인이 태자님의 병을 일부러 방치하기 위해 이상한 병을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사람의 목숨을 두고 거짓말은 하지 않습니다. 환자가 백제인이든 고구려인이든, 저는 사람을 살릴 판단만 합니다.”
“고구려 계집이 별 우스운 소리를 다 하는구나.”
그렇게 말하는 의원의 턱이 덜덜 떨렸다. 그는 애써 떨림을 속으로 삼키며 밖을 향해 소리쳤다.
“밖에 위병 있는가! 헛소리나 지껄이는 이 계집을 다시 감옥에 처넣게!”
의원의 외침에 바깥문이 활짝 열렸다. 하지만 들어선 사람은 위병이 아니었다.
“누구 마음대로 이 계집을 감옥에 처넣으라는 거지?”
진가모였다.
특유의 험악한 얼굴로 들어선 진가모가 의원을 노려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떨고 있던 의원의 떨림이 더 심해졌다. 어찌나 떨림이 심했는지 그의 이가 딱딱 부딪히는 소리가 날 정도였다.
“쯧. 한심하구먼.”
진가모가 그 꼴을 보며 혀를 끌끌 찼다. 그는 약한 자들을 비웃는 것에 망설임이 없었다.
“듣자 하니 태자님의 병에 대해 의견이 다른 것 같은데…….”
진가모의 시선이 아신을 향하는 순간 그의 몸이 크게 뒤틀렸다.
“크허, 윽!”
아신이 헛구역질을 하며 양손으로 자신의 목을 부여잡았다. 호흡 곤란이 오는 모양이었다.
“태자님!”
황급히 아신의 곁으로 다가선 진가모가 그의 몸을 내리눌렀다. 아신이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내지 않도록 진정시키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아신의 경련은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발작에 가까운 움직임에 진가모가 이를 바드득 갈며 의원을 바라보았다.
“뭐해? 뭐라도 해야 할 것 아닌가!”
“그, 저, 으…….”
의원이 머뭇거리는 것을 본 진가모가 답답한 얼굴로 물었다.
“어찌하면 되나?”
“그것이…….”
“어찌하면 되냐니까!”
진가모의 외침에 의원이 아닌 내가 앞으로 나섰다.
“단단히 붙들고 계세요.”
나는 품속에서 침구를 꺼내 들고 아신 앞에 섰다.
경련은 심했지만 진가모가 강한 힘으로 그를 붙잡고 있었기에 침을 놓을 수는 있을 것 같았다.
경련이 심할 때는 사관에 침을 놓는다. 대장경의 합곡혈과 간경의 태충혈을 합한 4개의 혈 자리.
이 자리에 침을 놓으면 어혈을 풀어내고, 열증을 가라앉히며, 경련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나는 빠르게 혈 자리를 짚어 침을 찔러 넣었다.
깊이는 5푼에서 8푼. 너무 깊어도, 너무 얕아도 안 된다.
밀어 넣는 감각에 집중하여 부드럽게 침을 찔러 넣었더니 서서히 아신의 경련이 잦아들었다.
아신을 단단히 붙들고 있던 진가모가 그의 움직임이 완전히 멈췄을 때야 손을 놓고 몸을 일으켰다.
“의식을 잃으셨군.”
급격한 경련으로 지친 아신의 의식이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 혼절한 그를 내려다보며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경련을 심하게 하니 진이 빠져 의식을 잃은 겁니다.”
“그렇군.”
작게 고개를 끄덕인 진가모가 턱짓으로 아신의 몸에 꽂혀 있는 침을 가리켰다.
“무슨 수를 쓴 것이지?”
“혈 자리에 침을 놓아 경련을 진정시킨 겁니다.”
“혈 자리?”
“쉽게 말하면 몸의 기운이 흐르는 자립니다. 자리마다 관장하는 몸의 영역이 다른데, 필요한 곳에 침이나 뜸을 놓아 몸을 다스리지요.”
“참으로 신기하군. 고구려인들이 침술에 능하다는 소문을 들었지만 이 정도가 가능할 줄은……. 감옥에서 전염병에 걸린 자의 죽음을 막은 것도 침술이었다지?”
진가모가 신기한 눈으로 침을 바라보았다.
고구려의 의술 중에서도 침술은 유명했다. 후에 왜에서 이 기술을 배우기 위해 사람을 청할 정도였고, 중국의 가장 오래된 의학서인 황제내경에도 동방의 침술이 대단하다는 기록이 남아 있었다.
“약을 함께 쓰면 효과가 더 좋습니다. 침술로는 한계가 있어요.”
“아무래도 그렇긴 하겠지.”
진가모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아신에게 이불을 덮어 주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상황을 설명했다.
“침으로 경련을 진정시켜 놓기는 했지만, 경련을 일으키는 원인을 해결하지 못했으니 또 발작에 가까운 경련이 올 겁니다.”
“다시 이런 경련이 온다고?”
“한 번이 아닐 겁니다. 이대로 계속 두면.”
나는 슬쩍 시선을 돌려 멍하니 선 의원을 바라보았다.
진가모의 시선 역시 나를 따라 의원을 향했다. 자신을 향하는 시선에 의원이 움찔거렸다.
“의원.”
“예.”
“자네가 내린 판단과 처방이 정확하다 확신하나?”
“저는 주어진 것을 보고 제대로 판단했습니다. 태자님의 증상은 분명 비사성에 돌았던, 지금 다시 석현성에 돌고 있는 그 전염병입니다.”
“그리 확신한단 말이지.”
턱을 매만지며 잠시 생각하던 진가모의 시선이 이번에는 내게 향했다.
“너 역시 네 판단을 확신하나?”
“물론입니다. 전염병과 증상이 유사하기는 하나 파상풍이 틀림없습니다. 다리의 상처도 확인했고요.”
“만약 파상풍이 맞는다면 태자님은 어찌 되나?”
“이미 전신 경련이 왔습니다. 사실 여기까지 왔다면 치료가 쉽지 않아요. 하나 지체하면 할수록 완치할 수 있는 확률이 더 낮아질 겁니다. 한시라도 빨리 치료를 시작해야 합니다.”
내 말까지 모두 들은 진가모는 썩 곤란한 눈치였다.
“한 사람은 전염병이라 하고, 한 사람은 파상풍이라 하는데 둘 모두 자신의 판단을 확신한다…….”
진가모가 팔짱을 낀 채 손가락으로 제 팔뚝을 두드렸다. 한참의 고민 끝에 팔뚝을 두드리던 그의 손가락이 멈추었다.
고민이 끝난 것이다.
의원을 한 번 바라본 진가모의 눈이 그를 지나쳐 내게서 멈추었다.
“만약 치료하지 못하면 어쩔 것이냐?”
“전 인질로 백제에 잡힌 몸입니다. 태자님의 병을 고치지 못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목숨도 걸 수 있다는 거냐?”
“제 목숨을 건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일에 조건은 없습니다. 목숨을 건다고 더 열심히 치료하는 것도, 목숨을 걸지 않는다고 가벼이 치료하는 것도 아닌 것을요.”
나는 의식을 잃은 아신을 바라보았다. 그는 백제의 태자였지만, 그를 진맥한 순간부터 내게 아신은 단 한 사람의 환자일 뿐이었다.
“제 눈앞에 아픈 사람이 있고, 전 치료법을 압니다. 그럼 그 사람을 살려야지요. 다른 건 아무 상관 없습니다.”
내 말에 진가모가 입을 꾹 다물었다. 잠시 말이 없던 그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다시 입을 뗐다.
“그래도 나는 받아야겠다. 네가 실패하면, 네 목숨으로 책임을 져라.”
“달솔! 어찌 고구려인의 말을 믿습니까!”
가만히 대화를 지켜보던 의원이 소리치며 진가모의 앞을 막아섰다. 그가 내게 아신의 치료를 맡기기로 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진가모가 손을 들어 의원의 반박을 제지했다.
“오늘로부터 정확히 닷새를 주마.”
진가모가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미 밖은 어두워져 달이 떠올라 있었다.
“닷새 후 이 시간, 달이 하늘에 떠오르는 때. 그때까지 태자님의 병을 고쳐 낸다면 인질을 모두 고구려에 돌려보내 주마. 하지만 실패하면 감히 거짓 병을 지껄여 우리를 농락하고 태자님을 위험하게 한 네 목을 치겠다.”
나는 아신을 보며 시간을 가늠해 보았다.
닷새라면 결코 길지 않은 시간이다. 그 안에 전신 경련까지 온 파상풍을 고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포기하면?
의원은 아신의 병을 전염병이라 끝까지 주장할 것이다. 결국 그는 제대로 치료받을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할지도 모른다.
그것을 두고 볼 수는 없었다. 한의사로서의 양심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문득 우스워졌다.
내가 언제부터 한의사로서의 사명이니, 양심이니 하는 것들을 생각했다고.
하지만 병에 고통스러워하는 자들을 눈앞에서 보고 있자면 내가 아는 것을 세상에 펼치지 않는 것이 큰 죄악처럼 느껴졌다.
이 시대는 혼란하고 혹독하여 나 같이 사명감 없는 한의사의 도움이라도 간절했다.
나는 주먹을 꽉 쥐며 진가모를 바라보았다.
“조건이 있습니다.”
“말해라.”
“닷새 동안은 무조건 제 뜻대로 두십시오. 내어 달라는 것은 모두 내어주고, 해 달라는 것은 모두 해 주십시오.”
“필요한 것을 내주는 것은 어렵지 않지. 좋다. 다른 것은?”
“치료 방법에 대한 의심과 간섭은 사양하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제 방식에 따라 주셔야 합니다. 이것만 지켜 주신다면 한번 해 보겠습니다.”
잠시 생각하던 진가모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 역시 동의한다. 닷새 동안은 네 치료 방식에 무조건 따르는 것으로 하지. 이처럼 완전히 네 의사에 따르는 대신 그 책임은 무거울 것이다.”
위험한 협상의 성립이었다.
“하면 먼저 약재를 구해 주세요. 감초, 천궁, 황금이 필요합니다. 방풍과 천남성도요.”
* * *
아신의 파상풍은 진행 속도가 빠른 편이었다. 상처를 얻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빠르게 파상풍이 발병하고 전신 경련에까지 이르렀다.
나빠지는 것이 빠를수록 치료는 어렵다. 나는 병이 나빠지는 것보다 빠르게 그의 증상에 대처할 필요가 있었다.
가장 먼저 할 일은 상처를 직접적으로 다스리는 일이었다. 방풍과 천남성으로 가루를 내어 옥진산을 만든 뒤 이를 상처에 바르는 게 첫 번째였다.
다음은 탕약이다.
파상풍은 열이 있는 경우와 없는 경우로 나뉘어 약을 쓰는 법이 달라지는데, 아신의 경우는 발열이 있으므로 차가운 성질의 약을 쓰는 것이 법칙이었다.
그렇다면 처방은 감초, 천궁, 황금을 쓴 소궁황탕이 적당했다. 풍의 사기가 몸 안에까지 들어가 열이 나는 경우 쓰는 약이었다.
아신의 병세가 심상치 않은 것을 본 진가모는 빠르게 필요한 약재를 구해 주었다.
백제의 끄트머리인 이곳 석현성에서 어찌 그리 빠르게 약재를 구해 왔는지. 나는 새삼 진가모의 수완에 감탄했다.
그의 빠른 일처리에 힘입어 나는 날이 밝자마자 소궁황탕을 달이고 옥진산을 만드느라 분주했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아신의 거처 바로 옆에 딸린 부엌에 쪼그려 앉아 약탕기의 불을 살피고 있자니 절로 졸음이 몰려왔다.
“흐아암.”
나는 길게 하품하며 졸음을 쫓기 위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렇게 달아날 잠이 아니었다.
석현성에 잡혀 온 이후 줄곧 고된 노동을 한 데다, 어제 아신의 병을 살핀 이후 급하게 약재를 구하고 손질하느라 잠을 자지 못했다.
잠들면 안 돼.
나는 애써 눈을 부릅뜨며 부채를 든 손에 힘을 주었다.
제대로 약을 달이려면 은근한 화롯불에 오랫동안 약탕관을 올려 둬야 하는데, 조금만 방심하면 불이 꺼지기 십상이라 쉬지 않고 부채질을 해 주어야만 했다.
불이 꺼져서 탕약을 시간 안에 달여 내지 못하면 먹일 때를 놓쳐 예상했던 것보다 치료 기간이 더 길어지게 된다. 환자를 고쳐 내야만 하는 기간이 촉박한 내게는 곤란한 상황이었다.
그러니 잠에 들면 절대 안 되는데.
그렇게 다짐하는 것과 달리 눈꺼풀이 너무 무거웠다.
눈을 깜빡이는 횟수가 점차 적어지고, 부채질을 하던 손도 조금씩 느려졌다.
그것을 죄 느끼고 있으면서도 저항할 수 없다는 것이 우스웠다.
인간의 가장 강한 욕구가 수면욕이라더니.
나는 거스를 수 없는 욕구에 굴복해 고개를 휘청이기 시작했다. 목에 힘이 빠져 머리가 앞으로, 또 뒤로 사정없이 흔들렸다.
힘 빠진 머리가 순간 앞으로 고꾸라졌다. 몸의 균형이 완전히 무너져 앞으로 기울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잠이 확 달아났다.
하지만 몸의 중심을 제대로 잡기도 전에 머리가 숯불 위에 올려 둔 약탕관에 가까워졌다.
부딪히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커다란 손이 뒤에서 내 어깨를 끌어안았다.
“너는 어찌 사람이 이리 허술해?”
잠이 덜 깨 얼떨떨한 눈으로 뒤를 바라보니 담덕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담……”
“가륜.”
멍하니 담덕의 이름을 부르려 했더니 그가 가짜 이름으로 내 입을 막았다. 주변에 듣는 귀가 있을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여긴 어찌 왔어, 가륜?”
나는 일부러 ‘가륜’이라는 가짜 이름을 강조하며 담덕에게 물었다. 그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거리며 내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네가 아신 태자의 병 문제로 이곳 의원과 싸웠다는 이야기를 듣고 왔지.”
담덕이 내 손에 들려 있던 부채를 가져가 대신 흔들며 대답했다.
“싸운 것은 아니야. 아신 태자의 병에 관한 견해가 달랐을 뿐이지.”
“그래. 네가 태자의 병이 전염병이 아니라 했다며? 그 문제로 의원과 언성을 높였다 하던데.”
벌써 담덕에게까지 그 이야기가 흘러 들어간 모양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상황을 설명했다.
“아무리 증상을 살펴도 석현성 병사들이 앓는 전염병이 아니었어. 이미 전염병이라 진단한 의원의 입장에서는 제 판단을 뒤집기가 어려웠을 거야.”
내 설명에 담덕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네가 틀렸을 가능성은 전혀 생각지 않는 말투네.”
“하지만 그만큼 확실하단 말이야. 바지를 걷어 종아리 안쪽에 짐승에게 물린 상처가 있는 것도 확인했어. 파상풍이 분명해.”
“바지를 걷어?”
“……내 말에서 중요한 부분은 거기가 아니었는데.”
“그 부분도 중요해. 넌 네 옷을 마구 벗어 던지다 못해 이젠 사내의 옷까지 벗기는 거냐?”
담덕이 미간을 찌푸린 채 손가락으로 내 이마를 툭 건드렸다. 나는 담덕의 손을 밀어내며 당당하게 반박했다.
“환자에게는 성별이 없어. 그러니 아신 태자는 사내가 아니라 그냥 환자야. 몸에 최근에 생긴 상처가 있는지 확인해야 하는데 상대가 사내라고 살펴보지도 않을 순 없잖아.”
“먼저 물어보지 그랬어? 최근에 생긴 상처가 있는지. 뭐, 너라면 그걸 물을 생각도 못하고 옷부터 벗기려고 달려들었겠지만.”
정확한 예상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입을 꾹 다문 나를 보고 담덕이 안 봐도 눈에 훤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넌 너무 행동이 앞서. 이제 곧 어른이 되는데 조금쯤은 진중해지는 게 어때?”
“그러려고 했는데 오라버닌 내게 진중함이 안 어울린대. 내가 생각해도 그런 면이 있는 듯하고.”
오라버니를 존중해 주겠다고 높임말을 썼더니 어색함에 몸부림치던 제신이 떠올랐다.
그때의 기억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가, 그때와는 너무 다른 지금의 처지에 얼굴이 굳어졌다.
열여섯의 탄일을 가족과 함께 보내기 위해 도압성으로 향했건만. 도압성은 함락당하고 나는 제신과 포로가 되어 백제 땅에 있었다.
같은 석현성에 있으면서도 노역에 동원된 젊은 사내들과는 갇혀 있는 곳이 달라 잡혀 온 날 이후로는 제신을 보지도 못했다.
나는 담덕에게 제신의 안부를 물었다.
“오라버니는 보았어?”
내 질문에 담덕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보았어. 밤에 은밀히 찾아 이야기를 나눴는데, 날 보자마자 화를 내더라.”
“위험할까 봐 도압성에도 못 오게 한 사람이 석현성에 나타났으니 당연히 화를 냈겠지. 거기서 어찌 보냈는데……. 몸은 괜찮아 보였어?”
“아무래도 노역에 동원되어 험한 일을 하다 보니 많이 지쳐 보였다. 그래도 노역장이 성 외곽이라 전염병은 돌지 않았으니 너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직접 살필 수 없는 곳에 병이 돌지 않았다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게다가 제신이라면 어떤 상황에서든 잘 버틸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럼…… 아버지는?”
나는 담덕을 만나자마자 묻고 싶었던, 한편으로는 두려워 묻고 싶지 않았던 질문을 겨우 꺼냈다.
혹시라도 듣고 싶지 않은 말이 나올까 봐 나는 담덕을 본 이후 계속 이 질문을 입안에 꼭 묶어 두고 있었다.
“넌 다지홀에서 왔다 했지. 그럼 그곳에서 살아남은 도압성 사람들을 확인했을 것 아냐? 거기에 내 아버지가 있었어?”
“네 아버지는…….”
담덕이 내 표정을 살피며 말을 삼켰다. 좋지 않은 징조였다.
“다지홀에서 보지 못했다.”
결국 담덕의 입에서 내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은 말이 흘러나왔다. 입술을 질끈 깨무는 나를 보고 담덕이 위로하듯 내 등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장군은 강한 사람이니 쉽게 무너지지 않았을 거야. 상황이 여의치 않아 다지홀로 오지 못한 것일 뿐 살아 있을 거라고, 난 그리 생각한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어.”
“그럴 거야. 널 찾기 위해 도압성 인근을 모두 뒤졌는데 시신이 나오지 않았어. 도압성에 효수되지도 않았지. 전장을 지휘했던 장군이 도압성에서 죽었다면 그러지 않았을 리가 없어. 장군은 살아서 도압성을 빠져나갔을 거다.”
이어진 말은 마냥 희망에 찬 추측이 아니라 근거가 있는 기대였다.
“게다가 살아남은 병사들 중 하나가 확실하지 않지만 장군을 본 것 같다고 했어. 화살을 맞은 채였고, 해운이 그를 부축해 도망쳤다는군.”
“화살을 맞았다면…….”
제신의 기억과도 일치했다. 아마 그 병사가 보았다는 사람은 아버지가 맞을 것이다.
나는 조금 더 마음을 놓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무엇인가 마음에 걸리는 부분을 찾아내고 담덕을 바라보았다.
“해운? 그 사람도 다지홀에 나타나지 않았어?”
“그래. 그가 걱정되니?”
담덕이 나를 빤히 마주 보았다. 무심하게까지 느껴지는 눈에 어쩐지 어깨가 뻣뻣하게 굳었다.
얼굴도 제대로 모르는 병사들의 생사마저 걱정스러운 상황인데 운의 목숨이라고 걱정되지 않을 리 없었다.
운은 오라버니의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 나와도 자주 말을 섞어 친구까지는 아니라도 지인 정도는 된다고 말할 수 있는 사이였다.
“당연히 걱정되지.”
“그렇구나.”
담덕이 눈을 내리깔았다. 말없이 부채를 흔드는 그의 기분이 썩 좋지 않아 보였다.
나는 말없이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 깊은 생각에 빠진 담덕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조용히 그의 곁을 지키고 있으니 담덕이 입을 뗐다.
“처음 보았어.”
툭 던져진 말에 나는 담덕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약탕관에 고정되어 있었다.
“늘 말로만 들었지 전쟁을 보는 건 처음이야. 여태까진 왜 전쟁에 이겨야 하는지 몰랐거든. 그저 그러는 것이 당연하니까, 다들 그렇다고 하니까 그것에 의문을 품지 않았지. 그런데…….”
담덕이 말끝을 흐리며 부채를 꽉 쥐었다.
“적이 휩쓸고 간 전장은 잔혹해. 자비가 없고 희망도 없어. 사람들은 죽고, 살아남은 자들도 포로로 잡혀 미래를 잃지. 패배하는 순간 패배자들은 모든 것을 박탈당해. 그것이…… 전쟁이었어.”
혼잣말처럼 이어지는 담덕의 목소리에는 괴로움과 결의가 동시에 섞여 있었다.
“우희, 난 결코 지지 않는 사람이 될 거다. 내 생에 다시는 이런 일을 겪고 싶지 않으니까.”
비로소 담덕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누구도 미래를 잃지 않는 세상을 만들 거다. 나의 사람들은 그런 세상에서 살아야 해. 내가 그리 만들 거야.”
담덕이 제 말을 현실로 만든다는 걸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 넌 그럴 수 있어.”
나는 진지하게 반짝이는 담덕의 두 눈동자를 보며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 * *
파상풍은 주변의 자극에 몸이 예민하게 반응하므로 환경을 고요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때문에 나는 아신의 방에서 시녀들을 모두 물리고 홀로 남았다. 최대한 아신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주변을 밝히던 불도 최소화하고 발걸음 소리도 조심했지만 치료하는 일에는 난관이 많았다.
상처 부위에 옥진산을 바르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탕약을 먹이는 일이었다.
정신을 잃은 동안에는 의식이 없어 약을 삼키지 못하고, 의식이 있는 동안에는 경련 때문에 온몸이 뒤틀려 입에 제대로 약을 대기도 힘든 경우가 많았다.
덕분에 입안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흘리는 약이 반 이상이었다. 약을 먹어야 경련이 나아질 터인데 약조차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있으니 회복이 생각보다 훨씬 더뎠다.
경련이 계속되면 호흡 곤란이 와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고, 더 심해지면 근육 강직과 수축까지 일어난다.
강직과 수축으로 몸이 뒤로 휘어 등과 바닥 사이에 공간이 커지면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었다. 병이 너무 많이 진행되었다는 방증이기 때문이다.
몸과 바닥 사이의 공간에 모로 세운 손이 들어가면 끝이다. 거기까지 가기 전에 빠르게 치료를 진행해야만 했다.
초기에 태자의 병을 전염병으로 착각하는 바람에 좋은 시기를 놓쳤어. 경련이 시작되기 전에 치료를 시작했으면 좋았을 텐데.
시간적 여유가 있는 상황이라도 치료가 급한 상황인데 내게 주어진 시간은 고작 닷새뿐이었다. 그 안에 병을 고치려면 무슨 수라도 내야 했다.
“차도가 없군. 이리 약조차 제대로 먹이지 못해서야…… 어디 태자님을 치료할 수 있겠나?”
감시라도 하듯 아신의 방을 어슬렁거리던 의원이 혀를 끌끌 찼다.
나는 대답 없이 숟가락으로 탕약을 떠 눈을 감고 늘어져 있는 아신의 입안에 넣었다. 하지만 역시 입 밖으로 흐르는 약이 반 이상이었다.
열은 떨어졌고 경련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지만, 회복 속도가 너무 더뎠다. 이대로 계속 치료를 하면 병이 나을 것이라는 확신은 있었으나 닷새 안은 무리였다.
이래서는 안 돼.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오늘로 하루 하고도 반이 더 지났다. 해가 떨어지고 밤이 찾아오면 이틀이 지나는 것이다.
그리하면 겨우 사흘이 남아. 이 상태라면 그 안에 태자가 온전한 모습으로 눈을 뜨긴 힘들 거야. 호전은 되어도 여전히 병이 깊겠지.
“파상풍이니 뭐니 온갖 잘난 척을 하더니 꼴이 우습구나.”
“아직도 당신의 처방이 맞는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나는 빈 탕약 그릇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의원을 바라보았다.
“열이 떨어지고 구토가 멈췄어요. 때때로 심한 경련이 있긴 하지만 조금씩 나아지고 있고요.”
내 말에 의원이 주먹을 꽉 쥐었다.
“누가 뭐래도 태자님은 전염병에 걸리신 거야.”
“당신이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는 이유는 알아요. 감히 태자의 병을 잘못 진단해 그를 죽음 가까이로 몰았으니 전염병이라고 끝까지 우겨야 안전하겠죠.”
“나는 잘못 진단하지 않았다.”
“의원으로서의 책임감은 없나요? 만약 내가 제 시간 안에 태자님을 고치지 못해도 이분이 전염병에 걸렸다고 말하며 계속 전염병을 다스리는 처방을 내릴 건가요?”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지.”
“아뇨. 한번 맡은 이상 이분은 제 환자예요. 나을 수 있도록 끝까지 돕는 것이 제 일이고요.”
“……그리 말해 봤자 네게 남은 시간은 고작 사흘이야. 그 안에 못 고치면 감히 우스운 파상풍 이야기로 혼란을 준 네 목이 달아날 거다.”
의원의 눈이 창밖을 향했다. 어느새 해가 떨어지고 있었다.
“쓸데없는 짓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책임을 피하기 위해 수를 쓰지 않는지 내가 잘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엄포를 놓은 의원이 씩씩대며 밖으로 나섰다.
의원의 말에 강하게 반박하긴 했지만 나도 걱정이 많았다.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약을 많이 먹지 못하니, 조금만 먹어도 효과가 큰 약, 더 강한 약이 필요해.
나는 비어 있는 약사발을 바라보며 생각에 빠졌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약이 몇 가지 있었지만 모두 쉽게 쓰기는 힘든 것들뿐이다.
그래도 지금은 답이 그것뿐이야.
나는 그대로 방을 나서서 문 앞을 지키고 선 시녀에게 아신의 상태를 봐 달라고 부탁했다.
태자의 난폭한 성정을 잘 아는 시녀들은 홀로 그의 병을 돌보는 나를 안쓰럽게 여겨 많은 도움을 주고 있었다.
“잠시 부엌에서 탕약을 보고 올 테니 태자님의 상태가 이상하면 바로 불러 줘요.”
“예. 그리하지요. 걱정 말아요.”
시녀가 웃으며 안으로 들어서는 것을 확인한 나는 그대로 옆의 부엌으로 걸음을 옮겼다.
부엌에는 태림이 나를 대신해 약을 달이고 있었다. 덩치도 큰 사람이 좁은 부엌에 쪼그려 앉아 부채를 흔들고 있는 모습이 어쩐지 처량해 보였다.
“태림.”
“아가씨.”
내 부름에 태림이 고개를 숙였다. 담덕이 다시 태림을 내게 보내 준 덕에 내가 자리를 비울 때마다 태림이 탕약을 봐 주고 있었다.
“별다른 문제는 없었죠?”
“예.”
“다행이네요. 고구려 제일의 용사에게 이런 걸 시켜서 미안해요. 이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닌데.”
내 말에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본 태림이 머쓱하게 웃었다. 검 대신 부채가 들린 제 손이 어색하긴 한 것 같았다.
“아닙니다. 아가씨께 필요한 일이 있다면 무엇이든 해야지요. 원래 그게 호위를 맡은 자의 도리입니다. 비록 정식이 아닌 임시지만.”
그렇게 말한 태림이 다시 부채질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투박한 손으로 혹여나 불이 꺼질까 조심스럽게 부채를 흔드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 커다란 사내가 조금 귀엽게 느껴졌다.
나는 웃으며 태림의 옆에 자리를 잡고 쪼그려 앉았다. 좁은 공간에 가까이 붙은 탓인지 태림이 흠칫 놀라며 나를 보았다.
“그때 나 놓쳐서 곤란하지 않았어요?”
“도압성에서 말입니까?”
“네.”
“곤란했다기보다는…….”
태림이 말끝을 흐렸다. 무엇인가 생각하는지 부채질을 하는 손이 조금 느려졌다.
나는 그의 손목을 잡아 느려지는 부채질의 속도를 다시 높였다. 그 순간 태림이 팔을 비틀어 손목을 빼내며 내 손을 밀어냈다.
“아.”
무의식적으로 한 행동이었는지 자신의 행동을 뒤늦게 깨달은 태림이 입을 쩍 벌렸다.
“저…….”
뭐 그리 큰 실수를 했다고 안절부절못하는 태림의 얼굴에 웃음이 나왔다.
“뭘 그리 당황하고 그래요? 부채질이 또 멈췄네.”
“아.”
태림이 다시 입을 벌리며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느새 제 손이 멈췄다는 것도 몰랐던 모양이었다.
“다시 만난 날 우리 도련님께서 아주 크게 화를 내셨잖아요. 그래서 태림도 그간 벌을 받은 것은 아닌가 걱정했어요.”
의도적으로 담덕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우리 도련님’이라고 말하는 나를 보며 태림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걸 걱정하시는 분이 절 두고 가셨습니까?”
“따라오지 그랬어요. 우리 도련님이라면 몰라도 태림은 안 막았을 텐데.”
“그러려고 했습니다. 제 생각보다 아가씨의 기마술이 뛰어나셔서 따라잡지 못했지만요.”
“지금 내가 고구려 최고의 용사보다 기마술은 더 낫다고 인정받은 거죠?”
장난스럽게 턱을 치켜들었더니 태림의 입에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예. 저보다 기마술이 더 대단하시던걸요.”
“그 말 무르기 없기예요! 국내성에 돌아가면 제 기마술을 무시하던 서에게 태림이 인정해 줬다고 자랑을…….”
별생각 없이 튀어나온 국내성 이야기에 금세 기분이 가라앉았다. 서에게 자랑을 하기는커녕 그곳으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풀이 죽은 내 모습을 보았는지 태림이 무심하게 위로를 건넸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담…… 아니, 우리 도련님께서 어떻게든 하실 겁니다. 만약 일이 잘 안 풀린다고 해도요.”
“우리 도련님을 너무 믿는 거 아니에요? 여긴 백제 땅인데.”
어디를 둘러봐도 백제군뿐인 이곳 석현성에서 무슨 수를 쓸 수 있을까. 제아무리 담덕이라도 신묘한 계책을 생각해 내기는 힘들 것이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야반도주를 하는 것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이 경우엔 나와 제신을 제외한 다른 포로들의 목숨은 버리는 것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담덕은 그럴 사람이 아닌걸.
“분명 수를 찾으실 겁니다.”
태림이 생각보다 단호하게 대답했다. 흔들림 없는 그의 눈을 보고 있자니 괜히 희망을 주겠다고 없는 소리를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생각해 둔 수가 없다면 애초에 이곳에 발을 들이지도 않았을 분입니다. 그 수를 제가 감히 짐작할 수는 없지만 생각하고 계신 바가 분명 있으실 겁니다.”
“확실히 우리 도련님이 그런 성격이긴 하지만요.”
그래도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았다. 일이 쉽게 풀리려면 내가 잘하는 수밖에 없었다.
“태림.”
내가 조용히 이름을 부르니 태림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부탁할 것이 하나 있는데 들어줄 수 있어요?”
“말씀하십시오. 아가씨께 필요한 것이면 무엇이든 하는 것이 호위의 역할이라 말씀드렸잖습니까.”
“하면 전갈을 구해 줄 수 있을까요? 정확히는…… 전갈의 꼬리가 필요해요.”
담담하게 내 말을 듣고 있던 태림의 표정이 묘하게 굳어졌다.
“아가씨. 전갈의 꼬리에는……”
거기까지 말한 태림이 주변을 살피며 한층 목소리를 낮추었다. 거의 속삭임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전갈의 꼬리에는 강한 독이 있습니다. 잘못 닿으면 죽을 수도 있는 강한 독입니다.”
“나도 알고 있어요.”
“한데 전갈의 꼬리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태림이 난처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그는 의문에 가득 찬 눈으로 내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떻게든 읽어 보려는 것 같았다.
“아가씨께서 전갈의 꼬리를 구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알려지면 어찌 되는지 아십니까?”
“한바탕 난리가 나겠죠. 그러니 태림에게 부탁하는 거예요. 전갈의 꼬리, 구해 줄 수 있겠어요?”
“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만 어찌 그것을 원하시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어쩐지 긴장된 눈이었다. 나는 태림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먹일 겁니다.”
“누구에게 말입니까?”
“아신 태자에게.”
“……예?”
태림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나는 아신 태자에게 전갈의 독을 먹일 겁니다. 그래서 전갈의 독이 든 꼬리가 필요해요. 구해 줄 수 있겠어요?”
나는 다시 한번 분명하게 나의 뜻을 그에게 전달했다.
백제의 태자에게 독을 먹인다니. 아무리 태림이라도 놀랄 만한 일이겠지.
다시 들어도 변하지 않는 나의 뜻에 태림이 입을 꾹 다물었다. 한참 동안 생각에 빠져 침묵을 지킨 끝에 태림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어선 태림이 내게 부채를 내밀었다. 반사적으로 그것을 받아 드니 머리 위에서 그의 말이 울렸다.
“내일 날이 밝기 전까지 구해 오겠습니다. 부디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아가씨의 뜻을 입에 올리지 마십시오.”
* * *
약속대로 태림은 날이 밝기 전 돌아왔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습니까? 구할 수 있는 만큼 다 구해 온 겁니다.”
태림이 내민 주머니에 전갈 꼬리가 가득했다. 이 정도면 사흘은 충분히 먹일 수 있는 양이었다.
“충분해요. 고생 많았어요.”
“아닙니다. 그리 구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고……. 한데,”
나의 감사 인사를 사양하며 고개를 저은 태림이 주변을 살피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걸 정말 아신 태자에게 먹일 겁니까?”
내가 구해 달라 말해 움직이기는 했지만, 오는 도중에도 계속 의문을 가졌던 듯했다.
“네.”
단호한 대답에 태림이 묘한 얼굴을 했다.
“태자를 죽이실 겁니까?”
전갈의 꼬리에는 강한 독이 있었다. 한 마리의 독으로는 부족해도 이렇게 많은 전갈의 꼬리가 있다면 충분히 사람을 죽일 수 있다.
게다가 상대가 아파서 골골대고 있는 저 아신 태자라면 어려울 것도 없었다.
태림으로서는 당연한 의문이었다. 하지만 한의사인 내게 그보다 우스운 질문은 없었다.
“일부러 사람을 죽인다고요? 의술을 안다고 말하며 사람을 치료하고 다니는 내가요?”
내 말에 태림이 재빨리 사과하고 고개를 숙였다.
“……기분이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전 그저 전갈의 독이 일반적으로 그러한 용도로 사용되기에.”
“알아요. 전갈의 독이 원래 어찌 쓰이는지. 하지만 난 이걸 약으로 쓸 생각이에요.”
“아신 태자를 고치기 위해 독을 먹인단 말입니까?”
내 말에 태림의 표정이 더 이상해졌다. 도무지 내 말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독으로 어찌 사람을 구합니까?”
“독으로 사람이 아닌 독을 죽이는 거예요. 이독치독이라고나 할까요?”
“독으로…… 독을요?”
“이미 아신 태자의 몸에는 사기(邪氣:사람의 몸에 병을 일으키는 나쁜 기운)가 깊이 들어 있어요. 약을 써서 이 기운을 밖으로 밀어내려고 했지만…… 이미 기운이 깊이 스며들어 쉽지 않았죠. 그러니 안에서 죽이는 수밖에 없어요.”
“독이 사기만 골라 죽일 수 있습니까? 사람은 상하게 하지 않고요?”
바로 그 부분이 문제였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주머니 속 전갈 꼬리를 바라보았다.
“독은 그리 똑똑하지 않죠. 몸의 사기뿐만 아니라 다른 부분도 상하게 하니, 사기를 죽이길 기다렸다가 해독을 해 줘야 해요. 그건 침술을 이용할 거고요.”
쏟아지는 복잡한 이야기에 태림이 질린 얼굴을 했다. 잔뜩 찌푸려진 미간에서는 염려도 함께 느껴졌다.
“단순한 방법은 아니로군요.”
“어디 사람 살리는 게 쉽나요. 가벼운 병 하나 고치는 일에도 심혈을 기울여야 하는데, 하물며 이 정도까지 진행된 파상풍은…….”
나는 일부러 어렵다는 말은 입에 올리지 않았다. 말이 씨가 된다는 이야기가 있으니 괜히 부정적인 말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고. 어떻게든 치료할 수 있어.
나는 다짐을 담아 태림을 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남은 시간은 사흘이에요. 태림도 나를 좀 도와줘야겠어요.”
“어찌 도와 드리면 되겠습니까?”
“이곳 의원이 내가 어떤 치료를 하는지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하고 있어요. 아신 태자에게 전갈의 독을 쓴다는 게 알려질 수도 있다는 뜻이죠. 그리하면 의원이 가만있지 않을 거예요.”
내가 거기까지만 말했는데도 태림은 내가 하고자 하는 부탁을 금세 알아들었다.
“걱정 마십시오. 제가 아무도 치료를 방해하지 못하도록 하겠습니다.”
“믿음이 가네요.”
약재와 조력자 모두를 구했으니 이젠 치료를 시작할 시간이었다.
* * *
나는 전갈의 꼬리 7개를 가루 낸 뒤 따뜻하게 데운 술에 넣어 약을 만들었다.
전갈산. 몸에 풍사가 들어 경련이 있을 때 쓰는 약이었다.
익히 알려진 것처럼 전갈의 꼬리에는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위험한 독이 있다.
이를 백제의 태자에게 쓰는 것은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혹여 잘못되면 독살을 했다고 오해받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그러니 무조건 아신의 파상풍을 잡아야 한다. 물러설 곳은 없었다.
나는 누워 있는 아신에게로 다가가 그의 상태를 살폈다.
열이 떨어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목과 턱이 뻣뻣했다. 잊을 만하면 다시 찾아오는 경련은 말할 것도 없었다.
나는 아신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그의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손만 대도 경련이 일던 이틀 전과 달리 이제 이 정도 접촉은 무리가 없었다.
“오늘은 평소보다 조금 더 강한 약을 쓸 겁니다. 강한 약에도 몸이 버티려면 먼저 기력을 보충하셔야 해요.”
상체를 벽에 기댄 아신이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투병으로 지친 얼굴에는 생기가 없었다.
“시녀들에게 부탁해 미음을 만들어 왔으니 이걸 전부 드셔야 합니다.”
약과 함께 가져온 미음을 한 숟갈 떠 아신의 입에 가져갔지만 그가 고개를 돌려 피했다.
“식욕이 없다.”
“그래도 드셔야 합니다.”
“먹기 싫대도.”
“살고 싶으면 드십시오.”
“싫다 하지 않았느냐!”
아신이 크게 소리치며 내 손을 쳐 냈다. 제법 힘이 실린 손길에 그에게 내밀었던 숟가락이 날아가 벽에 부딪혔다.
숟가락이 날아가며 미음이 얼굴에 튀었다. 나는 얼굴에 묻은 미음을 닦아 내며 아신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아신이 다시 한번 강하게 말했다.
“분명히 말했다. 난 안 먹는다고.”
입매가 딱딱하게 경직된 탓에 아신이 말을 할 때마다 발음이 샜다. 그 모습을 보이기 싫었는지 그는 치료를 받는 내내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처럼 명확하게 의사를 표현했다는 건 말을 하는 것보다 더 싫은 것이 있다는 뜻이었다.
소문을 듣기로 아신은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라고 했다. 한데 파상풍에 걸려 수발을 받는 동안 자존심이 상할 일이 꽤 많았다.
식사를 하는 일부터가 그랬다.
입이 벌려진 채로 근육이 경직되자 식사를 할 때마다 아신의 입가는 침과 미처 삼키지 못한 음식물이 뒤섞여 엉망이 되었다.
아신은 그 우스운 모습을 보이는 게 꼴사납다 생각했는지 식사를 할 때마다 기분 나쁜 기색이 역력했다.
“혹 미음조차 제대로 삼키지 못하고 줄줄 흘리는 모습을 보이기 싫으신 겁니까?”
아무래도 정곡을 찌른 것 같았다. 아신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문 채 내게서 눈을 돌렸다.
아니 이게 무슨 어린애 같은 이유래?
순간 머리에 열이 올랐다.
누구는 자기 목숨 살려 보겠다고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고작 더러운 모습 보이기 싫다고 미음을 안 먹어?
나는 아신의 턱을 붙잡고 사발에 든 미음을 그대로 그의 입속에 들이부었다.
“크억!”
예상치 못한 일격에 아신이 반항도 하지 못하고 쏟아지는 미음을 삼켰다.
나는 사발이 완전히 빌 때까지 손을 멈추지 않을 생각이었다. 중간에 정신을 차린 아신이 나를 밀어내지만 않았다면 분명 그리했을 것이다.
“이, 이, 이!”
아신이 엉망이 된 꼴로 씩씩거렸다. 이 상황이 너무 황당하고 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