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위협
하류로 이어질수록 강은 점점 넓어지고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저 강의 끝에는 뭐가 있을까. 먼 곳을 바라보는 내 귓가로 태림이 속삭였다.
“저쪽으로 계속 내려가면 바다가 나옵니다.”
“바다요?”
“예. 그 바다 너머에는 중원이 있지요.”
중원이라면 중국 땅을 말하는 것이다.
저쪽으로 나가면 서해로구나.
대한민국의 소진일 때는 몇 번이나 바다를 보았지만, 우희가 된 후로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내륙에서 태어나고 자란 탓이었다.
편리한 교통수단이 없는 고구려에는 바다 구경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았다.
고작 바다 하나를 보기 위해 그 먼 길을 힘들게 달린다고?
단순히 즐기기 위해 그 정도의 수고를 들인다는 개념을 이 시대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을 터였다.
이 시대 사람들은 여유가 없었다. 그들이 처한 환경이 그랬다. 곡식이 나기 힘든 탓에 먹고사는 문제가 제일 중요했다.
어찌해서 먹고살아 간다 하더라도 전쟁이 터지면 말짱 도루묵이었다. 사람들은 검과 활을 단련해 목숨을 지킬 방법을 고민해야 했다.
살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나는 천수백 년 후 이 땅 위에 세워질 수많은 빌딩과 그 속을 여유롭게 거니는 사람들을 떠올린다.
평화로운 세상.
언젠가 이 땅에도 그런 날들이 온다. 지금의 사람들은 상상도 못 할 그 세상을 나는 알고 있었다.
“태림은 바다를 본 적이 있어요?”
“저도 아직까지 바다는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요? 하긴 태자의 호위였으니 계속 국내성에만 있었겠네요.”
나는 강변에 걸터앉아 바다로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았다.
사진이라도 있으면 태림에게 바다를 보여 줄 수 있을 텐데. 현대 문명의 이기는 대단한 곳보다 이런 사소한 곳에서 그리워졌다.
“아주 깊고 넓어요.”
툭 하고 던진 말에 태림이 나를 바라보았다.
“바다 말이에요.”
“바다를 아십니까?”
“그럼요. 아무리 멀리 시선을 던져도 끝이 보이지 않아 마치 하늘을 땅에 옮겨 둔 것 같고, 색은 어디서도 본 적 없는 푸른빛에 발을 담그면 차가운 기운이 몰려오죠. 그게 바다예요.”
“서책에서 그런 것도 나옵니까?”
나는 대답 대신 웃으며 내 옆자리를 두드렸다.
“여기 앉아 봐요.”
“옆자리에 말입니까?”
“네. 여기요.”
태림은 잠시 망설이더니 내가 몇 번이나 더 재촉하자 어쩔 수 없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저기 멀리 봐요.”
나는 강과 하늘이 맞닿는 지점을 손으로 가리켰다. 태림의 시선이 내 손끝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뇨. 아무것도 없어요.”
진지하게 손끝을 바라보던 태림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감돌았다.
“한데 어찌 보라고 하십니까?”
“태림은 뭔가를 이유 없이 본 적 없어요?”
“이유 없이…… 말입니까?”
“네. 생각 없이 흐르는 강물을 보거나, 구름이 흐르는 하늘을 보거나. 그러다 보면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복잡한 생각이 사라지는 거죠. 아, 밤하늘의 별도 좋아요. 여긴 별이 참 잘 보이더라고요.”
“그렇습니까…….”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태림은 이해하지 못한 눈치였다. 그의 시선이 내 손끝과 수평선을 난처하게 오가는 것을 보다 결국 웃음이 터졌다.
“이 쉬운 이야기가 어렵다니 당신들도 참 안타까워요.”
“당신들……이라고요?”
태림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우희 님은 ‘당신들’이 아니라는 듯한 말투로군요.”
나는 종종 현대인 소진의 입장에서 말하는 경우가 있었다. 우희와 소진을 완전히 분리할 수 없는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우희가 소진이고 소진이 우희였다.
“난 ‘당신들’이 아니죠. 머리가 딱딱하게 굳은 병사들과 날 똑같이 대하면 곤란하다고요.”
능숙하게 말을 돌리며 나는 태연하게 웃었다.
멍하니 앉아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고 있으니 막사 쪽이 소란스러워졌다.
귀가 예민한 태림은 작은 소리가 들려오기 무섭게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나는 순식간에 깨져 버린 여유가 아쉬워 미간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막사를 향해 돌아선 나는 곧 깨져 버린 여유에 아쉬워할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분위기가 이상하군요.”
태림이 심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도 그의 말에 동의했다.
성에서부터 맹렬한 기세로 달려온 전령이 하늘을 날다시피 말에서 뛰어내려 중앙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별다른 생각 없이 전령이 달려온 도압성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그대로 굳어 버렸다.
성에서 불길이 치솟아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태림! 성에 불이!”
놀라서 소리쳤지만 이미 태림도 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우희! 태림!”
그때 막사 안에서 담덕이 다급하게 걸어 나오며 우리를 불렀다.
“기습이다. 도압성에 백제군이 쳐들어왔어.”
“백제의 진영은 여기서 훤히 보입니다. 어떻게 이쪽의 눈을 피해 성을 친단 말입니까?”
태림이 여전히 고요한 백제의 막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말처럼 깃발이 휘날리는 백제의 막사는 여전히 평온했다.
“눈속임이다. 백제의 본진은 저 막사가 아니라 성에 쳐들어와 있는 쪽이겠지. 며칠 전의 기습도 우리 본진을 밖으로 끌어내려는 수작이었을 거야.”
담덕이 이를 바드득 갈며 성을 노려보았다. 아버지의 얼굴 역시 심각했다.
“하지만 전조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럴 가능성을 처음부터 염두에 두고 정찰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성에서부터 달려온 전령도 아버지의 말을 거들었다.
“장군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백제의 막사뿐만 아니라 성으로 향하는 길목에도 정찰대를 두었는데, 백제군의 움직임에 대한 보고는 전혀 없었습니다.”
“정찰은 누가 맡고 있지?”
“이쪽 지리에 밝은 도압성 출신의 병사들과 백산말갈의 용병들입니다.”
“말갈이라.”
담덕이 미간을 찌푸리며 운을 바라보았다. 운 역시 말갈이라는 이름이 나올 때부터 담덕을 보고 있었다. 의미심장한 눈빛이 두 사람 사이를 오갔다.
“우선 성부터 구해야 합니다.”
운이 앞으로 나서 의견을 냈다. 담덕도 그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성안에는 민간인들이 살고 있어. 성벽이 완전히 뚫리기 전에 돌아가 함락을 막아야 한다.”
“게다가 도압성의 위치가 백제와의 전선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이곳이 뚫리면 그 위로 예성강 지류를 따라 수곡성까지 위험해집니다.”
이어진 지설의 말에 담덕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연 장군,이곳의 병력이 얼마나 됩니까.”
“2천의 병력이 나와 있습니다.”
“성에는 몇이나 남아 있습니까?”
“천 정도입니다.”
“그중에 백산말갈의 용병들 수는요?”
“5백은 족히 넘습니다.”
아버지의 말에 담덕이 턱을 매만졌다.
“제신.”
“네.”
“백제의 병력은 얼마나 된다 했지?”
“본진이 왔다면…… 4천은 될 겁니다.”
우리 병력을 모두 합쳐도 부족한 수였다. 거기에 말갈을 제하면 더 부족해진다.
“전하.”
아버지가 고민하고 있는 담덕을 불렀다.
“전하께서는 몸을 피하시지요.”
“뭐라고요? 지금 내게 피하라 했습니까?”
“예. 그리 말했습니다.”
“연 장군.”
담덕이 미간을 찌푸렸다.
“나 고구려의 태자 담덕, 용맹한 용사들의 가장 앞에 서야 할 자, 그런 내게 전쟁을 피하라 하는 겁니까?”
“처음부터 전하의 전투가 아니었습니다. 이 전장의 지휘자는 저지요. 저는 지휘자로서 전하께서 이 전투에 참여하는 것을 허락지 않겠습니다.”
“지금 한 명의 병력이 아쉬운 상황에서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전하의 목숨을 한 명의 병력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당장의 승리를 얻고자 전하의 목숨을 담보로 거는 어리석은 짓은 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의 태도는 단호했다. 흔들림 없는 말에 담덕이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미안하지만, 그 말은 따를 수 없습니다.”
“눈앞에 전장을 두고 피하는 것이 분하시겠지요. 이해합니다만 그래도 그리하셔야 합니다.”
아버지는 벗어 둔 투구를 쓰며 담덕을 바라보았다. 투구 사이로 형형한 눈빛이 담덕을 향했다.
“저 같은 칼잡이들은 죽을 때까지 자존심을 세워도 됩니다. 하지만 군주는 다르지요. 군주에게는 자존심을 굽혀야 할 때가 있어요.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이 땅을 지킬 수 있습니다, 전하. 부디 자존심을 굽히세요.”
아버지는 담덕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도압성에서 온 병사들은 나를 따라라. 성을 지키러 간다.”
“예!”
아버지가 말에 올라타 외치자 병사들이 그 뒤를 따랐다. 제신과 운도 함께였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성으로 달려가는 병사들의 선두에 선 아버지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국내성에서 출병하는 순간에도 나를 보지 않았던 아버지였다. 그런데 어째서 지금 이 순간 내 얼굴을 보신단 말인가.
불길함이 스쳐 갔다. 나는 생각할 것도 없이 달려가 눈에 보이는 말 위에 올라탔다.
“우희 님!”
태림이 놀라서 나를 따라왔지만 이미 말에 오른 나를 따라잡기는 역부족이었다.
나는 거세게 말의 옆구리를 걷어차 성으로 향하는 병력의 뒤를 쫓았다.
* * *
성벽에 가까워지니 고구려군의 깃발을 확인한 아군이 문을 열어 병력을 안에 들였다.
아군이 들어오자마자 성문은 다시 굳게 닫혔다. 나는 귀환하는 병력의 끝을 따라 아슬아슬하게 성안에 들어올 수 있었다.
말에서 내려 주변을 살피니 성안은 아수라장이었다.
바깥에서는 안으로 불화살이 쏟아졌고, 그걸 피하겠다고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녔다.
간접적으로 전쟁을 보기는 했지만 눈앞에서 이런 풍경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나는 두려움에 손이 덜덜 떨리는 것을 애써 진정시키며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성문 앞에는 가륜이 묶여 있었다. 병영으로 향할 때 담덕의 말을 함께 타고 갔기 때문에 가륜은 이곳에 남겨진 것이다.
소란에 놀랐는지 앞발을 들며 흥분하는 가륜에게 다가가 그의 목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익숙한 냄새를 맡은 가륜이 점차 진정했다.
나는 가륜의 등에 얹어 둔 내 가방 두 개 중 약재가 든 것을 챙겨 옆으로 멨다.
나머지 하나에는 내 옷이 들어 있었는데, 이 상황에 그것까지 챙길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무기도 필요했다. 나는 가륜의 옆구리에 걸어 둔 활과 화살통을 등에 멨다. 제대로 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빈손으로 돌아다니는 것보다는 사정이 나을 터였다.
“으아악!”
발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성벽으로 올라가는 계단 위에서 화살을 맞은 병사가 쿵 하고 떨어졌다.
화살을 맞은 가슴을 움켜쥔 채 발작하는 병사를 보며 나도 모르게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 쳤지만 그건 시작일 뿐이었다.
쏟아지는 화살 비에 여기저기서 화살 맞은 병사들이 떨어져 내렸다. 매캐한 연기와 비명 소리가 뒤섞여 마치 지옥의 풍경을 보는 것 같았다.
“사, 살려……. 크억!”
그때 바닥을 뒹굴던 병사 하나가 내 치맛자락을 잡아끌었다. 복부에 화살을 네 발이나 맞은 병사였다.
나는 괴력을 뿜어내는 그의 손에 이끌려 바닥에 처박혔다. 앞으로 넘어진 채 손으로 바닥을 짚었더니 무엇인가 축축한 것이 닿았다.
사람들이 흘린 피였다. 비릿한 냄새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냐. 정신 차리고 할 수 있는 걸 해야지. 이렇게 멍청하게 있으려고 한의학을 공부했어?
나는 다급하게 가방을 뒤져 초오산을 꺼내 들었다. 화살을 네 발이나 빼면 맨정신으로는 고통이 심해 견디기 힘들 테니 마취가 필요했다.
초오산은 원래는 술에 타서 먹여야 효과가 빠르지만 지금은 술을 구할 수가 없었다.
나는 고통에 몸을 뒤트는 병사의 입을 억지로 벌려 초오산을 털어 넣은 뒤 입을 틀어막았다.
“조금만 참아요!”
초오산이 몸 안에서 퍼지기 시작하자 점차 병사의 움직임이 잦아들었다. 나는 그가 완전히 발작을 멈추길 기다렸다.
술에 섞여 마셨다면 흡수가 더 빨랐을 테지만…….
지금은 마취가 되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곧 병사가 완전히 늘어졌다. 나는 눈을 뒤집어 그의 의식이 사라졌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그의 배에 꽂힌 화살을 뽑아냈다.
화살을 뽑아내자마자 피가 솟구쳐 얼굴에 튀었다.
나는 재빨리 겉옷을 벗어 병사의 복부를 눌렀다. 지혈을 위해서였다.
어느 정도 피가 멈추면 이제 병풀을 쓸 차례였다. 나는 가방을 뒤져 병풀가루를 꺼내 상처 부위에 올렸다.
병풀은 살균과 지혈, 염증 완화에 효과가 있으니 상처 치료에 효과적이었다. 현대에서 쓰는 상처 연고에도 병풀 성분이 들어가 있을 정도였다.
마지막으로 병사의 옷을 찢어 붕대를 대신해 상처 부위를 압박하니 대충 상황이 마무리되었다.
마취가 되어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병사를 끌어 성문 구석에 둔 뒤 허리를 펴자 조금 전보다 더 참혹해진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깊게 심호흡을 하고 눈에 보이는 부상자들을 닥치는 대로 치료하기 시작했다.
아버지와 제신을 위해 가져온 약재들을 모조리 털어 넣었지만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이들을 치료해야 도압성을 지키는 전력에 도움이 될 수 있다. 병법이나 무예에 재주가 없는 나로서는 유일하게 이것만이 이 성을 지키는 길이었다.
정신없이 부상자들을 치료하고 있는데 성문 쪽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무엇인가 부서지는 소리였다.
“성문이 부서졌다!”
“도망치지 마라! 끝까지 버텨!”
필사적인 외침 사이로 백제군이 함성을 지르며 쏟아지기 시작했다.
검과 검이 맞부딪히는 소리와 비명 소리가 복잡하게 귓가를 울렸다.
나는 다리에 크게 화상을 입은 병사의 다리에 자운고를 바르며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자운고는 지치와 당귀로 만든 연고인데 피부의 온도를 낮춰 주는 진정 효과가 있어 화상에 특히 좋았다. 혹시나 싶어 소량만 만들어 왔는데 실제로 쓰임이 있을 줄은 몰랐다.
그러는 동안 검 부딪히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고맙,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끝까지 다리에 연고를 발라 주는 나를 향해 병사가 연신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나는 웃으며 그를 일으켜 세웠다.
“연고를 발랐으니 좋아질 겁니다. 이 상태로 싸우는 건 무리이니 몸을 피해요.”
“예, 예!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끝까지 인사를 하는 병사의 등을 떠밀어 다시 주변을 살피는데 누군가 내 뒷목을 낚아채 말 위에 태웠다.
화들짝 놀라 뒤를 바라보니 제신이 화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네가 어찌 여기 있어! 태자님 곁에 남은 것이 아니었어?”
“또 아버지와 오라버니만 보내라고? 내가 어찌 그래?”
“네가 여기 있는 걸 알면 아버지께서 맘 편히 싸우실 수 있겠어?”
“그래서 온 거야! 내가 있으니 몸을 좀 아끼시라고! 내 얼굴을 보아야 몸을 사리실 것 아냐!”
나의 외침에 제신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래도 넌 여기 있어선 안 돼. 성을 빠져나가자. 상황이 좋지 않아. 결국 퇴각 명령이 떨어졌다.”
제신이 말을 몰아 성의 더 깊은 곳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불안한 얼굴로 성문 쪽을 살폈다.
“아버지는?”
제신은 말이 없었다. 입을 꾹 다문 것이 일부러 대답을 피하는 것이 분명했다.
“아버지는!”
“나도 모른다!”
나의 외침에 제신이 소리쳤다. 어느새 그의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하지만 널 지키라 하셨어. 난 아버지 말씀을 따를 거야.”
제신의 말이 묘했다. 나는 주먹을 꽉 쥐며 고개를 숙였다. 차마 제신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돌아가셨어?”
“……화살을 맞으셨어. 내가 마지막으로 본 모습은 그게 전부야. 그러니 아직 나쁜 생각은 말자.”
* * *
나와 제신은 성 뒤편의 작은 문을 통해 가까스로 도압성을 빠져나왔다. 멀리서 바라본 도압성은 완전히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처음 도착했을 때의 평화로운 분위기는 이제 생각도 나지 않았다. 일행을 반겨 주던 성주의 얼굴로 희미하게 머릿속을 스쳐 갔다.
“무사히 퇴각하면 접선하기로 한 장소가 있다. 살아남은 자들은 전부 다지홀에 모일 거야. 아버지께서도 거기로 오실 거다.”
제신이 그렇게 말하며 도압성 반대 방향으로 말머리를 틀었다. 강의 지류를 따라 올라가 수곡성 방향이었다.
“아주 꼴이 엉망이구나.”
머리 위에서 제신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정신없이 부상자들을 치료하느라 꼴이 말이 아니었다.
“다친 사람들을 치료하느라……. 그 사람들도 무사히 빠져나왔으면 좋을 텐데.”
“무사히 빠져나왔을 거야. 그러지 못했더라도 항복하면 무참히 죽이진 않을 테니 걱정 마라.”
나는 제신의 말이 진실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향할 다지홀은 도압성이나 수곡성에 비해 규모는 작았지만 두 성의 사이에서 중간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곳이었다.
도압성에 향하는 모든 물자와 병력이 수곡성에서 다지홀을 거쳐 왔으므로, 도압성이 함락당할 경우 다지홀이 그다음 방어선이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큰 성에 비하면 적은 수였지만 다지홀에도 방어를 위한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다. 여기에 수곡성의 병력이 추가로 합류한다면 도압성의 탈환도 노려 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면 백산말갈이 소노부와 손을 잡았다는 거냐?”
“내가 듣기로는 그래.”
다지홀로 향하는 동안 나는 제신에게 말갈과 소노부의 관계를 전해 주었다.
제신은 처음부터 말갈이 소노부와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에 크게 놀란 눈치였다.
그간 백산말갈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말갈의 여러 부족 중에서도 백산과 속말은 태왕에 우호적인 집단이었다.
“백산이 어째서 소노부와 손을 잡은 것이지?”
“소노부가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주지 않았을까? 말갈은 본디 한곳에 정착하지 않는 자들이니 그들에게 영원한 의리를 기대할 수는 없어. 그건 태왕께서도 알고 계셨을 거야.”
말갈처럼 정착하지 않는 자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하루를 사는 일이었다. 그들에게는 의리보다 실리가, 과거의 인연보다는 미래의 이익이 더 중요했다.
“지금의 태왕께선 믿음이 많은 분이시다. 그간 백제와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백산이니, 그들을 깊게 믿으신 것도 당연해. 나조차도 지난 4년간 그들을 믿었으니.”
제신이 한숨을 내쉬었다.
“말갈이야 원래부터 그런 습성을 가졌다 하나 소노부가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구나. 도압성을 내어주면 백제와의 전선 전부가 위험해지는데, 고작 태왕 폐하를 흔들겠다고 백제에 도압성을 내어줘?”
“단순히 태왕 폐하를 흔드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나는 차마 말을 마치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소노부는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를 원하고 있었다. 그 구심점은 계루부와 소노부의 피를 모두 이어받은 운이었다.
억지로라도 그를 데려오겠다는 건 이런 의미였나.
나는 의미심장했던 수곡 성주의 말을 떠올렸다.
-언제까지 기다려 드릴 수만은 없습니다. 저희는 무슨 수라도 쓸 생각이니 웬만하면 제 발로 걸어오는 것이 서로에 좋지 않겠습니까? 돌이키기엔 이미 늦었는지도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운은 자신이 도압성에 있는 한 모두가 안전할 거라 믿었다. 하지만 4년이라는 긴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소노부는 다른 작전을 세우고 있었다.
앞으로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머릿속이 복잡해져 한숨을 내쉬는 그때 제신이 황급히 말의 고삐를 잡아당겼다.
“히이이잉!”
놀란 말이 요란하게 울며 앞발을 들었다. 도압성으로 가는 길에 낙마했던 상황과 비슷했다.
하지만 제신이 떨어지지 않게 잘 붙잡은 덕분에 다시 말에서 떨어지는 불상사는 없었다. 나는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며 제신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무슨 일이야?”
“앞에 사람이…….”
서둘러 정면을 바라보니 말 앞에 어린 소년이 주저앉아 있었다.
“얘, 괜찮니?”
상태를 살피기 위해 나는 재빨리 말에서 내려 소년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가까이에서 보니 소년의 모습이 묘하게 눈에 익었다.
“어, 너는 그때…….”
옷차림이며 생김새가 말을 몰던 내 앞에 뛰어들었다 사라진 사람과 똑같았다.
그것을 깨닫자마자 고개를 든 소년과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주저앉아 끙끙대던 소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도, 도망쳐야 돼요!”
“뭐?”
“빨리, 빨리 도망가야 된다고요!”
소년이 황급하게 말하며 초조한 얼굴로 숲속을 바라보았다.
소년의 눈을 따라 숲속으로 고개를 돌리니 그 속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튀어나왔다. 검으로 무장한 병사들이었다. 그 수가 열 명. 적지 않았다.
“도망은 늦은 것 같구나, 꼬마야.”
소년의 눈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나는 소년을 내 등 뒤에 숨기며 앞으로 나섰다.
“당신들, 누구인데 이리 어린 아이에게 검을 겨누는 거죠?”
“그러는 아가씨는 누군데 겁도 없이 우리 앞에 섰어?”
병사들 사이에서 와하하 하고 웃음이 터졌다. 그들이 검을 질질 끌며 앞으로 다가오자 소년이 내 옷자락을 꽉 쥐며 벌벌 떨었다.
“멈춰.”
병사들이 내 앞으로 다가오기 전 제신이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자신들을 향해 검을 겨누는 제신을 보면서도 병사들은 여유를 잃지 않았다. 수적으로 그들이 우세했다.
“우리와 싸우려고?”
그들의 질문에 제신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아무리 제신이라도 열 명을 이길 수는 없었다.
“무기를 버려라. 그럼 죽이지는 않겠다.”
제신의 눈이 나를 향했다.
어차피 싸워서는 승산이 없었다. 나는 제신이 무리하게 싸우지 않기를 바랐다.
검을 버리라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니 제신의 손에서 검이 떨어졌다.
그 모습에 무리의 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떨어진 제신의 검을 멀리 발로 찼다.
“허탕만 쳤구먼. 어쨌든 저놈들도 모두 데려가자. 인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
인질?
나와 제신의 눈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 * *
병사들의 손에 끌려온 곳에는 벌써 많은 사람들이 잡혀 와 있었다. 병사로 보이는 자들도, 평범한 주민으로 보이는 자들도 있었다.
우리는 양손이 묶인 채 그 속으로 아무렇게나 던져졌다. 바닥에 넘어져 손에 묻은 흙을 털어 내고 있으니 제신이 내게 속삭였다.
“아무래도 백제의 병사들에게 잡혀 온 것 같다.”
제신의 눈이 주변을 둘러싼 병사들을 살피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갑옷이며 무기가 백제의 것이야.”
“왜 이렇게 사람들을 잡아 두는 걸까? 이미 도압성을 얻었는데 인질까지 잡아 둘 필요가 있어?”
“도압성 말고 또 원하는 게 있다는 뜻이겠지.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조심스레 주변을 둘러보았다. 잡혀 있는 사람의 수가 족히 2백은 되는 것 같았다.
주변에는 무장을 한 병사들이 우리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지키고 있었다.
일부러 무기를 드러내고 사납게 눈을 부라리는 병사들에 사람들은 잔뜩 겁을 먹었다. 금방이라도 병사들의 검이 자신의 목을 치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 같았다.
그때 주변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이 소란스러워졌다. 작은 소란에도 사람들은 깜짝 놀라 소란의 중심지를 바라보았다.
“어찌 되었나? 보고해라.”
풍채가 대단한 장군 하나가 안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병사들을 자연스럽게 하대하고 명령했다. 그 태도 덕분에 나는 그가 이 병사들을 지휘하는 장군이라는 걸 금세 눈치챘다.
“말씀하신 대로 주변을 수색했습니다, 달솔.”
달솔이라면 백제 16관등 중에서 두 번째에 해당하는 높은 자리였다.
“진가모다.”
제신이 옆에서 작게 속삭였다.
“백제의 예성강 방어선을 책임지는 자인데, 이리 가까이에서 보는 건 나도 처음이다.”
제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으니 곧 병사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흘러나왔다.
“수색을 하며 눈에 보이는 자들은 죄 잡아들였습니다만…… 그중에 담덕 태자는 없었습니다.”
태자.
나와 제신은 놀란 마음을 애써 감추며 눈빛을 교환했다.
백제군의 목적은 인질을 잡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태자인 담덕을 찾고 있었다.
태왕군 사이에서 담덕이 도압성에 온다는 건 비밀이 아니었지만 그 소식이 백제에까지 알려졌다면 문제가 있었다.
“정말 주변을 다 뒤졌나?”
“물론입니다. 다지홀로 가는 길목까지 지키고 있다가, 지나가는 놈들은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두 잡아들였습니다.”
“그런데도 잡지 못해? 성을 칠 때 태자가 강변 병영에 있다 하지 않았나. 빠져나갈 시간이 부족했어.”
“어쩌면 병영에 태자가 있었다는 정보가 잘못된 건 아니었을까요?”
“고문한 병사들 입에서 나온 이야기다. 태자는 분명 여기에 있어. 더 수색한다.”
“하지만 달솔, 도압성에 오래 머물 수는 없습니다. 곧 석현성으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병사의 말에 진가모가 짜증스럽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아신 태자가 거기 와 있다 했던가?”
“예.”
“무슨 일로?”
“그것이…… 사냥을, 하셔야겠다고……”
망설이며 흘러나온 병사의 말에 진가모가 코웃음을 쳤다.
“고구려와 마주하고 있는 이 상황에 사냥? 어이가 없군.”
“달솔.”
병사가 진가모를 달래듯 그를 불렀다. 결국 그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마지막으로 동음홀을 수색하고 돌아가지.”
“동음홀은 수곡성과 반대 방향입니다. 담덕 태자가 피신하려 했다면 그쪽으로는 가지 않았을 겁니다.”
“우리가 이런 생각을 할 거라는 걸 알고 동음홀로 향했을 수도 있다. 밑져야 본전이니 그쪽도 수색한다.”
“예.”
고개를 숙인 병사가 진가모의 뜻을 알리기 위해 몸을 돌리자, 이번에는 그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다른 병사가 앞으로 나섰다.
“달솔, 여기 잡아들인 자들은 어찌할까요?”
진가모의 시선이 우리에게 향했다. 그의 무심한 시선이 벌벌 떨고 있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훑었다.
“인질을 잡아 두면 어떻게든 쓸모가 있겠지. 모두 석현성으로 데려간다.”
“전부 말입니까?”
“그래. 전부.”
병사의 질문에 진가모의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하지만 저항하거나 도망치려는 자가 있다면 그 자리에서 죽여도 좋다.”
마지막 말은 병사가 아닌 인질들에게 하는 말이었다.
그 말에 나와 함께 끌려온 소년이 두려움에 소리 없는 눈물을 터트렸다. 공포에 질려 울음소리도 낼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것을 발견한 진가모가 비죽 웃었다.
“고구려 놈들은 전부 겁쟁이로군. 겁먹은 개새끼처럼 벌벌 떠는 꼴을 보라지.”
진가모의 모욕에 제신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지만 지금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무력한 인질들의 반응에 백제 병사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 * *
다행히 백제군은 담덕을 찾아 내지 못했다.
동음홀 수색을 떠났던 병사들이 소득 없이 돌아오는 것을 보고 나와 제신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담덕이 어디로 갔는지는 몰라도 무사히 몸을 피한 것 같았다. 몰아치는 불행 중에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동음홀 수색이 무위로 돌아가자 백제군은 곧장 석현성으로 방향을 잡았다.
석현성으로 향하는 길은 힘들었다. 손이 앞으로 단단히 묶인 채 물 한 모금 제대로 마시지 못하고 며칠을 걸었으니 당연했다.
백제 병사들은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체력이 약한 노인과 어린아이 몇몇이 뒤처지자 망설임 없이 그들을 베었다.
그렇게 사람이 두엇 죽고 나자 남은 인질들은 이를 악물고 행렬에 따라붙었다. 죽고 싶지 않다면 뒤처지지 않는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울던 사람들도 갈수록 눈물이 줄었다. 울면 체력이 떨어지고, 체력이 떨어지면 뒤처져 죽임을 당한다는 걸 깨달은 탓이었다.
사람들은 갈수록 말이 없어졌다. 입이 바싹 마르고 눈에 생기가 사라졌다.
내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버지가 싸고도는 통에 집에서만 곱게 자란 내게 대단한 체력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런 나를 제신이 받쳐 주었다. 혼자 걷는 것도 힘들 텐데, 그는 나를 부축하며 내 무게까지 감당했다.
“이러다 오라버니까지 지치겠어.”
“난 단련된 몸이니 괜찮아. 어서 내게 더 기대.”
제신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그의 얼굴도 창백했다.
내가 고개를 저으며 홀로 섰지만 제신이 나를 끌어당겨 억지로 자신에게 기대게 했다. 내게는 그 손길을 거부할 힘도 없었다.
나와 제신 모두 이러다 죽겠다 싶을 즈음 행렬이 석현성에 도착했다.
우뚝 솟은 백제의 성을 보고 인질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적국의 성에 도착했다는 사실이 이처럼 기쁘다니 참으로 우스웠다.
석현성에 도착하자마자 병사들은 인질들을 분류하기 시작했다.
먼저 여자와 남자를 구분하고, 남자들 중에서도 젊은 자들을 또 다시 가려냈다.
그렇게 총 세 무리로 나눠진 인질들은 각각 다른 장소로 끌려갔다. 제신과 나도 병사들의 손에 의해 다른 무리로 편입되었다.
헤어지는 순간 제신과 나는 무사히 버티자는 눈빛을 주고받았다.
죽이지 않고 데려왔다는 것은 고구려와의 협상에 이용하겠다는 뜻이니, 죽지만 않고 버틴다면 다시 고구려로 돌아갈 수도 있을 터였다.
여자들이 끌려온 곳은 어두운 감옥이었다. 맞은편 감옥에는 나이 든 남자들이 갇혔고, 제신이 포함된 젊은 남자 무리는 보이지 않았다.
눅눅한 볏짚이 깔린 감옥의 벽에 등을 기대고 있으니 누군가가 훌쩍거리며 울음을 터트렸다. 여태껏 억눌러 왔던 울음이었다.
한 사람이 울기 시작하자 감옥은 금세 울음바다가 되었다.
세상이 끝난 것처럼 울기 시작하는 사람들 틈에서 나는 현실을 실감했다.
여기서 죽을 수도 있는 걸까?
석현성까지 오는 동안 인질들을 대했던 백제군의 태도를 생각하면 이곳에서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두 다리를 끌어안아 무릎 위에 턱을 괴었다.
소진으로서 이미 한 번 죽어 봤기 때문인지 내게는 죽음이 익숙했다. 하지만 익숙한 것과 괜찮은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나는 죽기 싫었다. 첫 번째 생을 어이없는 화재 사고로 마감하고 두 번째 생을 맞이하며 이번만은 제대로 살아 보자 결심하지 않았나.
나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울고 있는 사람들을 살피고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난 안 울어. 죽지 않을 거니까.
* * *
백제는 인질들을 그냥 두지 않았다. 낮에는 밖으로 끌고 와 일을 시키고, 날이 저물면 다시 감옥에 집어넣었다.
여자들은 주로 백제 병사들이 벗어 둔 옷과 더러워진 이불 따위를 세탁하는 일을 맡았다. 겨울로 접어들며 싸늘해진 날씨에 차가운 강물로 빨래를 하니 손이 깨질 것 같았다.
젊은 남자들은 성의 보수에 동원됐고, 노인들은 짚신을 엮는다고 했다.
일이 끝나면 백제군들은 어린아이 주먹만 한 작은 주먹밥을 나눠 주었다. 아무런 간도 되어 있지 않은 주먹밥이었지만 사람들은 그것도 아쉬워 순식간에 먹어 치웠다.
여기에 끌려온 것도 벌써 나흘째인가?
나는 날짜를 가늠하며 강물에 옷을 담갔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옷에는 흙이 잔뜩 묻어 있었다. 누렇게 변색된 것은 분명 땀이 말라비틀어진 흔적일 것이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옷을 박박 문질렀다.
그 손길이 어색해 보였던지 옆에서 빨래를 하던 단아한 인상의 여인이 슬쩍 충고를 건넸다.
“그렇게 말고, 이렇게 해요.”
“이렇게요?”
“금방 따라 하시네요.”
친절하게 시범까지 보이는 여자를 따라 손을 움직였더니 그녀가 피곤한 얼굴로 웃었다.
“보아하니 귀한 집 아가씨 같은데 어찌 여기 끌려왔어요?”
여인이 나의 모습을 살피며 물었다.
며칠 감옥에서 뒹굴며 더러워지긴 했어도 입은 옷의 질이 달랐다. 여인은 여전히 색이 고운 내 옷차림을 보며 신분을 짐작한 것 같았다.
“그렇게 쉽게 보이나요?”
“뭐가요?”
“귀한 집 아가씨라는 거 말이에요. 옷 때문인가…….”
목숨을 오래 보전하려면 인질들 사이에서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괜히 병사들 눈에 띄었다가 곤란한 일에 휘말릴 수도 있었다.
고급스러운 문양이 박힌 겉옷이라도 벗어 버려야 하나 고민하고 있으니 여인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옷 때문이 아니라 말투며 행동이 그래요. 딱 봐도 귀한 집 아가씨인걸요.”
말투야 그렇다고 해도 행동이 뭐가 다르다는 거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내 표정에 여인이 다시 미소를 지었다.
“원래 자기는 자기 행동이 안 보이는 법이니까요.”
“하지만 그쪽도 말투며 행동이 예사롭지 않은걸요.”
“전 성주님 댁의 하녀였어요.”
“도압성의?”
“예.”
여인은 성안에 있다가 끌려온 모양이었다. 나는 여인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자리를 잡았다.
“이렇게 인질로 잡혀 온 사람들은 우리가 처음인가요?”
“아뇨. 예전에도 몇 번 있었죠.”
“그 사람들은 어찌 되었어요?”
내 질문에 여인이 난처한 표정이 되었다.
“알고 싶은가요?”
그 난처한 표정이 모든 것을 말해 주었다.
“……결과가 좋지 않았군요.”
“돌아온 사람이 있기는 했어요. 대부분 반병신이 되어 사람 구실을 못했지만.”
“그게 더 절망적이네요.”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럼 그렇게 돌아온 사람들은…….”
다시 한번 여인을 향해 입을 떼는 순간 뒤에서 우리를 감시하고 있던 병사가 위협적인 얼굴로 눈을 부라렸다.
“조용히 일에 집중해.”
절로 입이 꾹 다물렸다. 검을 들고 있는 병사를 거역하면서까지 수다를 떨 이유는 없었다.
나와 여인은 작게 미소를 주고받으며 다시 빨래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때 갑자기 가장 끝에서 빨래를 하던 여자 하나가 힘없이 강을 향해 고꾸라졌다.
여자는 강에 처박히고서도 움직임이 없었다. 당황한 병사 하나가 놀라서 여자를 향해 뛰어갔다.
“뭐야! 무슨 일이야?”
병사가 여자의 목덜미를 잡아 물 밖으로 그녀를 끌어냈다. 물 밖으로 드러난 여자의 입에서 연신 토사물이 쏟아져 나왔다.
“이건 또 왜 이래?”
병사가 더러운 것을 만졌다는 양 기분 나쁜 얼굴로 여자를 바닥에 던졌다. 거친 행동에 빨래를 하던 여자들이 숨을 들이켰다.
바닥에 내던져진 여자의 몸이 뻣뻣하게 경련을 일으켰다. 낯빛은 창백했고, 눈과 볼이 움푹 패었다.
“으악! 이 여자 똥을 지렸잖아?”
병사의 말처럼 여자의 하의에 갈색으로 변이 묻어난 자국이 있었다.
물기가 많은 설사였다. 병사가 질린 얼굴로 여자를 걷어찼다.
구토, 설사로 인한 탈수 증상, 몸의 경련, 창백하고 퀭한 얼굴.
여자의 상태를 눈으로 살피던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에게로 달려갔다.
“뭐하는 거야!”
병사가 사납게 소리쳤다. 하지만 나는 그대로 쓰러진 여자의 손목을 잡았다.
“이년이 도대체 뭐하는 거야? 자리에 돌아가!”
병사가 소란스럽게 떠드는 와중에도 나는 여자의 맥에 집중했다. 과연 평범한 맥이 아니었다.
맥을 확인한 뒤 이번엔 이마로 손을 뻗었다. 과연 열이 펄펄 끓었다.
“이년이!”
어떤 확신이 머리를 스치는 순간 병사가 다가와 내 어깨를 걷어찼다. 강한 힘에 몸이 맥없이 넘어갔다.
“이 사람, 의원에게 보여야 돼요.”
나는 바닥을 짚고 몸을 일으켜 병사를 향해 말했다.
병사는 별 우스운 소리를 다 듣는다는 양 코웃음을 치며 몸을 숙이더니, 손가락으로 내 뺨을 툭툭 쳤다.
“의원? 고작 인질 따위에 의원? 하도 오래 잡혀 있었더니 정신이 아주 돌아 버렸구나? 응?”
“다 죽고 싶지 않으면 지금 당장 의원을 부르는 게 좋을걸요.”
“뭐?”
단호한 내 말에 병사가 얼이 빠진 얼굴이 됐다. 사납게 굴면 겁을 먹을 줄 알았는데 이처럼 당당하게 나오니 황당한 모양이었다.
나는 뺨을 두드리는 병사를 올려다보며 여자를 가리켰다.
“저 사람 괴질이에요.”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잘 발생하는 병이었다.
더러운 감옥에 지내는 데다, 음식도 바닥에 구르는 것을 주워 먹었으니 이런 병이 걸리지 않으면 더 이상하지.
게다가 고된 노동으로 면역력이 떨어져 있는 상황이니 병이 생기기엔 더없이 좋은 환경이었다.
이런 병은 한 사람이 걸리면 비슷한 환경에서 생활하거나 같은 물과 음식을 먹는 자들 사이에 삽시간에 퍼지니 초기에 잘 다루는 게 중요했다.
하지만 병사는 한 번에 내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괴질?”
이 시대에는 괴질이라는 말이 없나?
나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헤집었다. 여자의 병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결국 나는 내가 아는 이름을 전부 쏟아 내기 시작했다.
“곽란, 호열자, 뭐, 아무튼 전염병이라고요.”
“전염병이라고?”
다행히 마지막 말은 통한 것 같았다. 병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당장 의원을 불러요. 이 사람 격리해서 빨리 치료해야 돼요. 아니면 여기 있는 사람들, 아니, 석현성에 있는 사람들 다 죽어요.”
“……뭐?”
조금 더 강해진 말에 병사가 주춤거렸다.
“갑자기…… 이게 무슨…….”
당황한 병사들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눈짓으로 의견을 공유하던 그들이 곧 결론을 내렸다.
“거짓말이면 네년은 죽을 줄 알아!”
병사 하나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나를 위협한 뒤 몸을 돌려 어디론가 뛰어가기 시작했다. 아마 상부에 보고라도 하려는 것 같았다.
백제군이 인질의 병까지 고쳐 줄까?
나는 불안한 얼굴로 쓰러진 여자를 바라보았다.
* * *
전염병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탓인지 백제군의 대처는 발 빨랐다. 군대 안에 전염병이 돌기 시작하면 사람이 쉴 새 없이 죽어 나가 병력 손실이 컸다.
그 때문인지 진가모가 직접 나섰다. 다급하게 달려온 그의 옆에는 숨이 턱 끝까지 닿은 의원도 있었다.
“맞습니다. 몇 해 전 비사성(比史城)에 돌았던 전염병과 증상이 똑같습니다.”
쓰러진 여자를 한참이나 살피던 의원은 참담한 목소리로 여자의 병이 전염병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진가모의 얼굴이 그대로 굳었다.
“그해 비사성에서 사람이 몇이나 죽었지?”
“살아남은 사람을 세는 것이 더 빠를 것입니다.”
“곤란하군. 하필 지금 이 시기에…….”
쓰러진 여자를 짜증스러운 눈으로 바라본 진가모가 의원에게 지시했다.
“병사들 중에 같은 증세를 보이는 자가 있는지 살피고 병이 퍼지지 않게 하게. 인질들과 접촉했던 병사들부터 그들과 어울려 지낸 병사들 모두 철저히 살펴.”
“예. 그리 하겠습니다. 저 계집은 어찌할까요?”
“인질에 수고를 쏟을 필요가 있겠나. 병사들에게 옮기지 않게 멀리 갖다 버려.”
진가모가 고민 없이 답하며 등을 돌렸다.
버린다고?
믿을 수 없는 말에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인질의 병을 고쳐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 시대에 전염병이 얼마나 무서운 지는 안다. 기본적인 위생 수준이 떨어지기 때문에 병이 순식간에 퍼져 막는 것도, 치료하는 것도 어려웠다.
그렇다고 사람을 갖다 버리라니?
절대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의원은 아주 쉽게 진가모의 지시를 받아들였다.
“이대로 두면 안 됩니다. 빨리 치워야 합니다.”
의원의 지시에 눈치를 보던 병사 두 명이 나섰다. 한 명은 여자의 팔을, 다른 한 명은 여자의 다리를 들어 그녀를 옮기기 시작했다.
“뭐해? 너희들은 빨리 움직여! 날이 새도록 빨래를 할 생각이야?”
끌려 나가는 여자를 바라보던 우리를 향해 병사들이 외쳤다.
사나운 기세에 인질들은 다시 자리로 돌아가 수북하게 쌓인 옷을 집어 들었다.
손은 평소처럼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얼굴은 모두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들의 눈에서 병에 걸리면 자신도 저렇게 버려질 것이라는 공포가 느껴졌다.
* * *
바로 다음 날부터 문제가 터졌다. 어제 쓰러진 여자와 비슷한 증상으로 앓아누운 이들이 생겨난 것이다.
그 수가 한둘이 아니었다. 열 명이 넘는 사람이 한 번에 구토와 설사를 해 대자 모두가 혼란에 빠졌다.
하지만 나로서는 어느 정도 예상했던 부분이었다.
괴질은 잠복기가 길었다. 때문에 한 명이 눈에 드러나는 증상이 보일 때에는 이미 많은 사람이 병에 걸려 있을 확률이 높았다.
백제군은 병에 걸린 인질과 그렇지 않은 이들을 분리하지 않았다. 병에 걸린 자들을 치료하려는 노력도 당연히 없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방치했다. 병에 걸리면 어쩔 수 없고 아니면 말라는 식이었다.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환자가 하나둘씩 늘어났다. 이대로라면 꼼짝없이 인질들 모두가 죽을 판이었다. 무슨 수라도 써야 했다.
나는 제일 먼저 감옥 안의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이대로 있다간 우리도 병에 걸려 죽을 거예요. 그러지 않으려면 지금부터 제 말을 잘 들어야 돼요. 잘만 하면 우리 모두 병에 걸리지 않고, 병에 걸린 사람들도 나을 수 있어요.”
절망에 빠진 눈들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믿는 것은 아니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귀를 기울이는 듯했다.
“먼저 병에 걸린 사람들을 한쪽으로 옮겨 둬요. 병에 걸린 사람과 뒤섞여 지내면 금방 병이 옮으니까요. 옮길 때는 천으로 코와 입을 막아요.”
망설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도압성에서 하녀로 일했다던 여자가 먼저 움직였다.
한 팔로 코와 입을 막고 환자들을 한쪽 구석으로 끌기 시작하는 그녀의 모습에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 환자 옮기기에 합류했다.
그러자 순식간에 감옥 안의 구역이 나뉘었다. 한쪽 벽은 환자들, 반대편 벽은 건강한 사람들의 구역이었다.
나는 환자들의 구역에 서서 사람들에게 당부했다.
“이쪽으로는 가까이 오지 말아요. 병 걸린 사람들의 침, 토사물, 변에 접촉하면 백이면 백 병에 걸려요.”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멀쩡한 사람들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병에 대한 공포심을 심어 주는 건 좋지 않았으나 이렇게 단호하게 말해야만 환자와의 접촉을 조심할 것 같았다.
이 시대에는 병균에 대한 개념이 없어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 병이 전염되는지 알지 못했다. 그렇다면 차라리 아예 손을 대지 못하게 하는 쪽이 편했다.
“같은 공간에 있는 건 어쩔 수 없으니 몸을 자주 씻어요. 매일 빨래를 하러 강에 나가니 이건 어렵지 않을 거예요.”
개인위생에만 신경 써도 막을 수 있는 병이 많았다. 특히 전염병에는 스스로의 몸을 청결하게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식사와 물도 공유해선 안 돼요. 병에 걸린 사람과 최대한 접촉을 줄여야 하니 이를 명심하세요.”
사람들에게 설명을 마친 뒤 나는 환자들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환자는 총 넷이었다. 진행 정도는 달랐지만 증상 자체는 동일했다.
써야 할 약 몇 가지가 떠올랐지만 지금은 필요한 약재를 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약재를 구한다 하더라도 약을 달일 환경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우선은 구토와 설사를 멈추게 해서 탈수 증상이 오는 것을 막아야 돼.
아쉬운 대로 침을 사용하면 구토와 복통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다행히도 침은 가지고 있었다. 백제군이 가지고 있던 가방을 뺏어 가지 않은 덕분이었다.
도압성에서 부상병들을 치료하느라 약재를 거의 다 써 버렸지만, 침이라도 있으니 다행이었다.
나는 침을 꺼내 환자 앞에 자리를 잡았다.
구토와 설사를 잡으려면 비장과 위의 기능을 잡아야 한다. 나는 머릿속으로 혈 자리를 정리했다.
태백혈, 이내정, 활육문, 거기에 열을 잡아 줄 침혈까지.
나는 먼저 환자의 신발을 벗겨 엄지발가락 안쪽의 뼈가 튀어나온 부분에 침을 놓았다. 태백혈이었다.
이내정은 두 번째 발가락 아래쪽에, 활육문은 복부로 올라와 배꼽에서 위로 한 치 위, 옆으로 두 치를 가면 있다.
마지막으로 침혈은 귀다. 귓불과 뼈의 경계 부분이었다.
빠르게 혈 자리를 찾아 침을 놓는 나를 보더니 도압성 하녀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뭔가 도와 드릴 게 있을까요?”
“옆에 오면 병이 옮을지도 몰라요.”
“알아요. 말씀하셨잖아요. 그런데 아가씨도 여기 있잖아요.”
하녀가 살포시 웃었다.
“혼자서는 힘드실 거예요. 시킬 일이 있으면 제게 시키세요.”
“……고마워요. 이름이 뭐죠?”
“소람입니다.”
“그래요, 소람. 그럼 부탁할게요.”
나는 토사물로 얼룩진 환자들의 얼굴을 가리켰다.
“토사물에 목이 막히면 병으로 죽기 전에 숨이 막혀 죽어요. 그러니 환자들을 옆으로 뉘이고 토사물을 닦아 줘요. 토사물을 닦은 천은 깨끗하게 씻거나 태워 버려야 해요. 할 수 있겠어요?”
“어렵지 않네요. 할 수 있습니다.”
“좋아요. 그럼 먼저 천으로 코와 입을 가려요.”
소람이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노력했지만 손쓰기에 늦을 정도로 병이 발현한 세 명이 차례로 숨을 거두었다.
백제군은 매일 아침 우리를 빨래터에 데려가러 올 때마다 시체를 치웠다. 빨래를 하는 동안 멀리서 매캐한 냄새가 난 것을 보면 시체를 태워 버린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남은 한 명의 상태가 나빠지지 않고 있다는 것과 다른 사람들에게 병이 번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침마다 시체를 치우던 백제 병사들은 어느 날부터 시체가 나오지 않자 놀란 눈치였다.
병사들은 심각한 얼굴로 자기들끼리 무어라 수군거리더니, 다음 날 의원과 함께 감옥에 나타났다.
“정말로 멀쩡하군.”
의원은 놀란 얼굴로 감옥 안을 살폈다. 구석에 한 명 남아 있는 환자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오랜 감옥 생활에 지쳐 있을 뿐 멀쩡한 얼굴이었다.
“분명 처음 병을 알아봤다는 자의 솜씨겠군. 누구지?”
의원의 질문에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내 얼굴을 확인한 그가 나를 불렀다.
“잠시 나와 이야기를 좀 하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 감옥 입구로 다가섰다. 그러자 병사가 문을 열어 나를 밖으로 내보내 주었다.
빨래를 하기 위해서가 아닌 다른 이유로 감옥에서 나온 건 처음이었다. 어색해서 주변을 둘러보고 있으니 의원이 고갯짓으로 바깥을 가리켰다.
“따라오게.”
감옥을 벗어난 의원은 건물 밖으로 나와서야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에는 근심과 걱정이 가득했다.
“내가 자네를 왜 불렀는지 알겠나?
“한 공간에 있는데도 전염병이 더 번지지 않은 까닭이 궁금하신 거 아닙니까?”
“정확하네.”
고개를 끄덕인 의원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지금 석현성은 전염병으로 골치를 썩고 있네. 처음 병에 걸렸던 여인을 옮겼던 병사 둘이 증상을 보였는데, 그 뒤로 빠르게 병사들 사이에 병이 퍼졌지. 벌써 몇 명이 죽어 나갔는지…….”
병사들은 늘 붙어 다니고 위생 상태가 대체로 좋지 않다. 생활 환경도 청결하지 않았다. 병이 빠르게 퍼지는 건 당연했다.
“그런데 감옥을 지키는 병사들이 말하기를, 고구려의 인질들 사이에 병이 퍼지지 않더라 하더군. 무슨 수를 쓴 것인가?”
“알려 드리는 건 어렵지 않으나, 그 대가로 받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뭐든 말해 보게. 전염병을 잡을 수만 있다면 뭐가 대수겠나.”
“인질로 잡혀 있는 몸이니 바라는 것은 하나뿐입니다. 제가 전염병을 잡는 데 도움이 되면, 인질들을 다시 고구려 땅으로 보내 주십시오.”
내 말에 의원이 미묘한 얼굴을 했다.
“고구려 땅으로 다시 보내 달라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이미 자네들의 귀환은 결정되었잖은가.”
“네? 귀환이 결정되어요?”
“인질의 반환을 논의하고자 고구려에서 사신이 와 있네. 아직 확정은 아니지만 협상이 시작된 이상 귀환은 기정사실이지.”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고구려 사신이 왔다니!
감옥과 빨래터만 오가느라 전혀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그럼 그렇지. 태왕께서 인질을 그냥 버려둘 리 없지!
애국심이 차올라 고구려 만세, 태왕 폐하 만세를 외치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러니 전염병을 잡을 방법을 말해 보게.”
의원이 놀라움과 반가움으로 들뜬 나를 재촉했다. 하지만 나로서도 순순히 말해 줄 수는 없었다.
“하면 고구려에서 왔다는 사신을 만나게 해 주세요.”
나의 말에 의원의 얼굴이 굳었다.
“그건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네.”
처음부터 그에게 확답을 얻고자 한 말이 아니었다. 일개 의원에게 그런 일을 결정할 권한이 없다는 건 진즉에 알고 있었다.
“알고 있습니다. 결정은 달솔께서 하셔야겠지요. 제 의견을 전해주십시오.”
기다렸다는 듯 나온 말에 의원이 잠시 생각하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내 달솔께 의견을 여쭙지.”
심각한 얼굴로 감옥을 떠났던 의원은 이틀이 지나도 소식이 없었다. 금세 답을 들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나는 실망을 감출 수 없었다.
나는 강물에 더러운 옷을 휘휘 저으며 우리를 감시하는 병사들을 살폈다.
처음 잡혀 오던 날에는 네 명이 우리를 감시했는데 지금은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첫날 전염병에 걸린 여자를 옮긴 두 사람이 병에 걸렸고, 남은 둘 중 하나도 며칠 전 병에 걸린 것이 확인되어 자취를 감추었다.
일이 그렇게 되자 백제군은 인질을 감시하는 인력을 재투입하지 않았다. 인질들과 가까이하면 병이 옮을 수도 있다는 판단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