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화유수 2권
7장. 동행 (2)
“자네들이 태자님 일행을 마중하기 위해 떠난 그날 밤, 백제군의 기습이 있었네. 그때 우리 병사 다섯이 백제로 끌려갔는데, 연 장군이 이들을 돌려받겠다고 남은 병사들을 이끌고 성 밖으로 갔어.”
“성 밖이라면……”
“강이 있는 쪽에 병영을 차렸네.”
“강이라면 백제의 바로 코앞 아닙니까! 어찌 그곳에!”
제신이 머리를 감싸 쥐며 소리쳤다.
“나는 말렸지만 연 장군이 어디 내 말을 들을 사람인가? 자네라도 있었으면 말을 들었을 터인데 하필 말릴 사람이 하나도 없던 때에 일이 터져서…….”
“그리 성질머리를 죽이시라 말씀드렸는데……. 지금이라도 설득해야겠습니다. 강 앞은 백제와 가까워 빠르게 작전을 수행하긴 좋으나, 사방이 트여 있어 위치상으로 우리에게 너무 불리합니다.”
당장에라도 말에 올라탈 기세인 제신을 운이 막아섰다.
“제신. 진정해라. 네가 차분하지 못하면 네 누이가 불안해하지 않겠어?”
운의 말대로였다.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펄쩍 뛰는 제신의 모습에 내 손은 이미 땀으로 축축해져 있었다.
“좋지 않은 상황이야?”
“……급박한 상황은 아니다. 앞만 보는 아버지의 성격이 답답해서 그런 거야. 떠나기 전에도 무모하게 나서지 말고 성안에서 수성을 하셔야 다 신신당부를 했었거든.”
“그런 말을 들으실 아버지가 아니지.”
“네 말이 옳다. 내가 우리 아버지를 너무 얕본 게지.”
길게 한숨을 내쉰 제신이 이번에는 담덕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도착하자마자 소란을 피워 송구합니다. 태자님께서 먼 길을 오셨으니 제가 모시는 것이 당연하지만, 바깥 병영의 상태가 걱정스러우니 그쪽에 먼저 가볼까 합니다. 부디 무례를 허락해 주십시오.”
“상황이 그렇다니 어쩔 수 없지.”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출발하지.”
“예?”
안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던 제신이 얼빠진 얼굴로 되물었다. 담덕은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제신을 보며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위치는 짐작을 하고 있겠지? 앞장서게.”
“예? 그 말씀은……?”
“병사들이 어떤 환경에서 싸우고 있는지 궁금했는데 마침 잘되었어. 병영까지 함께 가지.”
“안 됩니다.”
제신을 향해 한 말에 지설이 빠르게 반박했다. 담덕은 그의 반대를 예상했다는 듯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웃었다.
“내가 그 말을 들을 것 같은가?”
“아뇨. 전하께서 제 말을 들으실 리가 없죠. 그래도 전 말해야겠습니다. 그곳은 백제군과 너무 가까우니 태자님은 성에 계십시오. 전 분명히 말했습니다.”
“그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니 내가 그냥 갈 거라는 것도 알겠군.”
담덕이 지설을 지나쳐 다시 말 위에 올라탔다. 말에서 내려선 지 1각도 채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다.
“우희, 너도 가겠어?”
말에 올라탄 담덕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그의 손을 잡았다.
* * *
병영은 생각보다도 더 백제 진영과 가까웠다.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반대편에 백제군의 깃발이 선명히 보일 정도였다.
“세상에. 이렇게 가깝단 말이야?”
바로 눈앞에서 펄럭이는 깃발에 놀라서 입을 벌리니 담덕이 내 어깨를 꽉 쥐었다.
“걱정 마라. 너무 가까워서 오히려 섣불리 공격하기 힘든 거리니까.”
병법에 아무런 지식이 없는 나로서는 담덕의 말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주변을 살피는 사이 태자 일행이 병영에 왔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아버지가 황급히 우리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태자님, 어찌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성에 계시지 않고요.”
고개를 숙이는 아버지는 여전했다. 내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담덕에게 고개를 숙이는 고지식함부터가 그랬다.
하지만 아버지도 세월의 흔적을 피할 수는 없었다.
나는 그의 얼굴 곳곳에 늘어난 주름을 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내 키가 조금 더 자란 탓인지 크게만 보였던 체구도 어쩐지 왜소하게 느껴졌다.
“태왕께서 도압성의 상황을 하나도 빠짐없이 보고 오라 하셨습니다. 부족한 것이 있으면 빈 곳을 채워 주라고요. 그러니 장군께서 계시는 곳도 놓칠 수가 없지요.”
“이곳에는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다들 그저…… 고향이 그리울 뿐이지요.”
아버지의 시선이 병영 앞에 서서 경계 자세를 취하고 있는 병사들을 향했다. 그들의 눈은 백제를 향한 호승심으로 불타고 있었지만, 그 눈빛이 지친 행색은 가리지 못했다.
“벌써 4년째입니다. 조금씩 돌려보내고 새로운 병력을 충원하고는 있지만…… 전쟁이 길어질수록 피로감은 더해 갈 겁니다.”
“해답은 언제나 종전이지요.”
“남으로 백제, 북으로 후연이 우리에게 검을 겨누고 있는 지금 상황에서는 불가능한 이야기지만 말입니다.”
아버지가 힘없이 웃었다. 이처럼 무기력한 그의 웃음은 처음이었다.
“막사 안으로 들어오시겠습니까? 간략한 전선 상황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그리하지요.”
아버지가 중앙 막사의 천을 들어 담덕을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 뒤를 제신과 지설, 운이 따랐다. 나 역시 그들을 따라 안으로 들어서려 했으나 아버지가 손을 들어 나를 막아섰다.
“우희. 군사 기밀이 오가는 자리이니 너는 들어올 수 없다.”
단호하고 차분한 목소리였다. 나는 하나밖에 남지 않은 아버지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웃음을 흘렸다.
“그게 4년 만에 만난 딸에게 처음 하신 말인 거 아십니까?”
내 말에 아버지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그간 잘 지냈느냐.”
“예.”
“많이 자랐구나. 떠나기 전에는 네 키가 겨우 내 가슴팍에 닿았지.”
아버지가 눈동자를 움직여 내 몸을 훑었다. 자란 것은 키뿐만이 아니었다. 4년의 세월 동안 나는 얼굴이며 체형도 완전히 달라졌다.
하지만 아버지는 많이 자랐다는 한마디로 그 세월의 변화를 대신했다. 아버지다운 말이었다.
“여전하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너 역시 여전한 것 같아 다행이다. 곧 이야기 나누자.”
아버지가 작게 웃음을 흘린 뒤 막사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막사 앞에 우두커니 선 내 뒤로 태림이 다가왔다.
“원래 부녀의 재회가 이렇습니까?”
그는 의아한 얼굴로 아버지가 사라진 막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 집은 이래요.”
뒤에서는 딸 자랑을 그렇게 하고 다닌다면서 앞에서는 무뚝뚝한 아버지가 야속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그래도 그게 아버지이니 어쩔 수 없었다.
“태림과 아버지는 어떤 편인가요?”
나의 질문에 태림이 조금 곤란한 얼굴을 했다. 잠시 말을 아끼던 그가 어렵게 입을 뗐다.
“저는 아버지가 없습니다. 어머니도요.”
나는 예상하지 못한 말에 당황했다. 태림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그가 고아라는 소리는 처음이었다.
“미안해요. 몰랐어요.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기에…….”
“제가 고아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라 아무도 입에 올리지 않았을 겁니다. 그다지 좋은 이야기도 아니니까요.”
태림은 어떻게 부모를 잃은 것일까. 그를 바라보는 내 눈빛에서 의문을 읽어냈는지 태림이 입을 열었다.
“저는 전쟁터에서 태어나 전쟁터에서 자랐습니다. 기억이 시작된 곳에서부터 줄곧 혼자였으니 부모가 누구인지도 모르지요.”
태림이 검 자루를 만지작거리며 눈을 내리깔았다.
“이 검도 살기 위해 배운 겁니다. 그래서 궁에서 검을 배우신 분들과 달리 제 검에는 법칙이나 논리가 없습니다. 그 점이 제 검을 강하게 만들었다니 우스운 일이죠.”
“하면 어찌 담덕의 호위가 되었어요?”
“전쟁터에 나섰던 개마 부대의 선대 대장이 저를 거둬 주셨습니다. 검 쓰는 것을 보더니 쓸 만하겠다며 태왕께 추천했고, 그 뒤로 담덕 님의 호위를 맡고 있지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몇 번이나 입을 오물거리다 결국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이번 생에서 나는 좋은 운을 타고 태어나 귀족가의 아가씨로 평온한 삶을 살았다.
주변 사람들도 처지가 비슷했다. 고구려에서 만난 사람들 중 태림과 같은 사정을 지닌 자는 처음이었다.
곤란해하는 나를 보며 태림이 평온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위로나 격려는 필요 없습니다. 제가 특별히 불우한 사정을 가진 건 아니니까요. 이런 이야기는 이 땅에서 아주 흔합니다. 오히려 좋은 분께서 거둬 주셨으니 운이 좋은 편이지요.”
“운이 좋은 편이라고요…….”
전쟁터에서 고아로 태어나 지금도 전쟁터에 서 있는 자신의 처지를 두고 ‘운이 좋은 편’이라고 말하는 사람.
나는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혀 태림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불운을 불운이라 생각지 못하는 것도 이 세상이 만들어 낸 불행이었다.
“안쪽의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은데, 중요한 이야기가 오갈 테니 태림도 듣는 게 좋겠어요.”
내가 막사를 가리키며 말했지만 태림이 고개를 저었다.
“태자님께서 우희 님의 곁을 떠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낙마로 다리를 다치셨을 때도 제가 우희 님을 놓쳐서 상황이 그리된 것이라 크게 꾸짖으셨습니다.”
“뭐라고요?”
그건 처음 듣는 말이었다. 멋대로 달리다 혼자 떨어진 것을 왜 태림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
“담덕도 참. 그게 왜 태림의 잘못이에요?”
“호위를 맡은 도중에 우희 님께서 다치셨으니 제 잘못이 맞습니다.”
“내가 가만히 걷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도 태림의 잘못이란 건가요?”
“원칙적으로는 그렇습니다.”
당연하다는 듯 돌아오는 대답에 할 말이 없어졌다.
“알고는 있었지만 태림도 상당한 원칙주의자네요. 주위에 그런 사람이 여럿 있어서, 내가 그런 성격을 잘 알지요.”
“그런 사람 중 하나가 바로 우희 님의 아버지시겠군요.”
“바로 알아보았어요.”
나는 웃으며 막사 앞에 흐르는 강을 가리켰다.
“나는 잠시 강변에 가 볼 생각인데, 혹여나 내가 발을 헛디뎌 물에라도 빠지면 큰일 나는 태림은 당연히 따라오겠죠?”
“물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