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낙화유수-7화 (8/38)

7장. 동행 (1)

저녁이 오길 기다리며 방에서 약재를 정리하고 있으니 태림이 찾아왔다.

“오늘부터 담덕 님이 아닌 우희 님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불편하시지 않도록 적당히 거리를 둘 테니 우희 님은 편하게 지내시면 됩니다.”

각이 잡힌 자세로 반듯하게 선 태림을 보니 마음이 심란했다.

병사들과 어울려 수곡성까지 오는 동안 태림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은 고구려에서 태림보다 검을 잘 다루는 사람이 없을 거라고, 아니, 백제와 신라는 물론 중원을 다 뒤져도 이런 실력자가 없을 거라며 자랑스러워했다.

그런데 이런 대단한 사람이 겨우 나를 지켜 주겠다고 이 자리에 서 있었다. 담덕의 뜻을 이해해 태림의 호위를 받기로 했지만 송구스러운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태림은 괜찮아요?”

“무엇이 말입니까?”

“원래 태자 전하를 지키는 사람이잖아요. 그런데 아무것도 아닌 나를…….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면 솔직하게 말해도 돼요. 내가 담덕에게 잘 이야기해서 원래 맡은 일을 할 수 있게 할게요.”

“제 뜻을 생각해 주시는 겁니까?”

태림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저는 태자 전하의 사람입니다. 누구를 지키든 그건 변하지 않지요. 그러니 저는 그분이 지키라는 사람을 지킬 겁니다. 어제는 그 사람이 담덕 님이었지만 오늘부터는 우희 님입니다.”

“담덕의 명령이라면 무조건 따른다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태림도 더 지키고 싶은 사람이 있지 않나요? 나를 지키느라 담덕이 위험한 상황에 처했을 때 돕지 못한다면 후회하지 않겠어요?”

태림이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어쨌든 태림은 담덕의 호위로 그의 안위가 무엇보다 중요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 점을 충분히 이해했다.

“혹시나 태림의 판단에 나보다 담덕을 지키는 게 더 중요한 순간이 온다면 내가 아니라 담덕을 지키세요. 그게 태림의 일이잖아요.”

나는 평범한 여자애지만 담덕은 후에 광개토 대왕이 될 중요한 사람이었다. 그가 태림을 내게 보냄으로써 중요한 순간에 목숨을 보전할 수 없다면 말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내 말에 수긍할 줄 알았던 태림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저는 그래도 우희 님을 지킬 겁니다.”

“어째서요?”

“제 마음보다 담덕 님의 판단과 뜻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후회가 남아도요?”

“태자님을 지키는 호위란 그림자 같은 사람이지요. 이 세상에 마음을 가진 그림자는 없습니다. 그 어떤 판단과 결정도 그림자의 몫이 아닙니다.”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내가 가진 현대의 상식과는 전혀 다른 고대 사람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이랬다. 특히 전쟁이나 충성에 대한 이 시대 사람들의 태도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래도 지설은 제 의견을 많이 내잖아요.”

“……그와 저는 상황이 많이 다릅니다.”

“지설은 귀족 가문 출신이고 태림은 평민이라서요?”

내 질문에 태림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걸 이처럼 직설적으로 물으신 분은 우희 님이 처음이십니다.”

“귀족치고는 돌려 말하는 법을 몰라요, 내가.”

“탓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우희 님은 조금 특이한 분이신 것 같습니다. 담덕 님께서도 늘 그렇게 이야기하셨죠. 그땐 어떤 부분을 두고 그러시는지 몰랐지만 지금은 알 것 같습니다.”

“그래요? 내 어디가 그리 특이한데요?”

특이하다는 건 어감이 영 나빴다. 조금 기분이 상해 입을 비죽이니 태림이 당황해 움찔거렸다.

“나쁜 뜻으로 드린 말이 아닙니다. 전 다만 우희 님은…….”

잠시 말을 흐린 태림이 곧 머릿속을 정리한 듯 입을 열었다.

“우희 님은 모두를 똑같이 대하십니다. 담덕 님도, 지설 님도, 저도, 병사들도. 모두를 같은 모습으로 대하세요. 그래서 가끔씩 이상한 기분이 듭니다. 무엇인지 모를…… 이상한…….”

태림이 다시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꾹 다물었다. 스스로도 머릿속이 복잡한 것 같았다. 나는 그의 머릿속을 명쾌하게 해 주고 싶었다.

“그게 이상한가요? 우린 모두 똑같은 사람이잖아요. 피가 흐르고 숨을 쉬는.”

고민 없는 나의 대답에 태림이 슬쩍 미소를 흘렸다. 그리 크지 않았지만 평소 표정이 거의 없는 그에겐 이 정도도 상당히 큰 웃음이었다.

“그런 점이 특이하다는 겁니다. 모두 똑같은 사람이라…….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이 땅 어디에도 없을 겁니다. 그런 분이니 담덕 님께서도 지켜 달라 하시는 거겠죠.”

태림이 다시 한번 다짐하듯 중얼거리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저는 그 뜻을 따를 겁니다.”

태림의 눈에 흔들림은 없었다. 나는 마주 웃어 주며 그의 뜻에 수긍했다.

“태림의 뜻이 그렇다면 됐어요. 어차피 나는 많이 움직이지 않으니 힘들 건 특별히 없을 거예요.”

“예. 그럼 저는 밖에 있겠습니다.”

“밖에요? 비가 오는데요?”

내 질문에 태림이 입을 꾹 다물었다.

“……혹시 이것도 특이한 반응인가요?”

“……예.”

“그럼 평소에는 호위를 어떻게 하는데요?”

평생 받아 본 적 없는 호위가 붙으니 무엇이 일반적인지 알 수가 없었다. 태림은 조금 난처한 표정으로 입을 뗐다.

“보통은 태자님께서 거리를 지정해 주십니다. 위험 요소가 있는 상황에서는 같은 공간에 있는 편이고, 비교적 안전하다면 옆방에서 지킵니다.”

“지금은 어떤 상황이죠?”

“국내성을 나선 이후로는 줄곧 경계를 높이고 있습니다.”

“그럼 나와 같은 공간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왜 밖에 나가요?”

내 질문에 태림의 얼굴이 더 곤란해졌다.

“제가 같은 공간에 있으면 불편하실 듯하여.”

“난 괜찮은데. 혹 태림이 불편해요?”

“……그런 것도 없잖아 있습니다. 여인을 호위하는 것은 처음이라 저도 어디까지 거리를 지켜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걸 알려 줘야 할 나도 이런 건 처음이라 잘 모르겠고요.”

태림과 나는 서로를 멀뚱히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정적이 흐른 끝에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잘 모르겠으니 그냥 내 방식대로 하죠.”

“예.”

“그럼 먼저 자리에 앉아서 차를 같이 마셔요.”

“예.”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던 태림이 무엇인가 이상한 걸 깨닫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예?”

“원래는 같은 공간에 있는 게 맞는다면서요. 하지만 멀뚱멀뚱 서 있게 하는 건 싫으니까 같이 차부터 한잔해요.”

“……그건 뭔가 이상한데요.”

“그림자는 판단을 안 한다면서요?”

“그렇지만 이건…….”

“뜻에 따른다면서요?”

반박이 두 번이나 거절당하자 태림이 입을 꾹 다물었다. 승리의 미소를 짓고 있는 나를 보며 태림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차는 제가 준비하겠습니다.”

* * *

약속한 저녁이 다가오자 담덕이 방으로 찾아왔다.

“오셨습니까.”

담덕은 약재를 정리하다 말고 일어서 인사하는 태림을 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뭐하는 거야?”

“보면 몰라? 약재 정리 중이야. 오랫동안 가방에 넣어 뒀더니 혹 약재에 문제가 생기지 않았나 싶어서 살펴보려고.”

태림의 맞은편에 앉아 함께 약재를 정리하고 있던 내가 대신 대답하니 담덕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건 보면 알지. 그런데 태림까지 왜 이러고 있냔 말이야.”

“내 호위를 하라고 보냈잖아.”

“그랬지.”

“그러려면 같은 공간에 있어야 하고.”

“응.”

“그런데 멍하니 방에 서 있게만 하는 건 어색하잖아. 그래서 같이 차나 마시고 약재 정리나 하자고 한 거지.”

태연한 내 대답에 긴 한숨을 내쉬며 담덕이 머리를 짚었다.

“내 호위를 이런 식으로 부려 먹는 거냐?”

“지금은 ‘내’ 호위지.”

“아주 잘나셨어.”

담덕이 고개를 내저으며 탁자 앞으로 다가왔다. 태림은 그가 다가오자 자신의 자리에서 비켜 의자를 내주었고, 담덕이 자연스럽게 그 자리에 앉았다.

자리에 앉은 담덕이 태림을 향해 눈짓을 보내자 그가 인사하고 방을 나섰다.

“태림은 식사를 어떻게 해결해?”

“나를 지킬 땐 지설과 교대를 하는 시간에 해결했어.”

“지금은?”

“지설과 태림 모두 교대할 사람이 없으니 최소한의 식사만 하고 있다.”

“……음. 내가 너무 큰 피해를 주고 있는 거 아냐?”

“그리하도록 훈련을 받은 자들이야. 아무것도 먹지 않고도 며칠을 버틸 수 있는 자들이니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시녀들이 저녁 식사를 준비해 왔다. 따로 지시를 하지 않았는데, 밖으로 나갔던 태림이 대신 말을 전한 모양이었다.

담덕과 나는 식탁으로 자리를 옮겨 시녀들이 준비해 온 음식을 나눠 먹었다.

식단은 간소했지만 바쁘게 달려오며 대충 해결했던 음식들에 비하면 만찬이나 다름없었다.

우리 둘은 빠르게 음식을 비웠다. 담덕은 원래 속도가 빠른 편이었지만, 나는 운과의 약속을 맞추기 위해 조금 무리를 했다.

평소보다 빠른 내 식사 속도에 담덕이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왜 이렇게 급하게 먹어? 체하겠다.”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던 나는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서며 담덕에게 산책을 제안했다.

“그러게 체할 것 같아. 좀 걸을까?”

물론 내 속은 멀쩡했다. 하지만 담덕은 내 핑계에 순순히 따라 주었다. 심하게 안 좋으냐며 걱정까지 해 주는 담덕의 얼굴을 보니 절로 양심이 찔려 왔다.

우리가 문을 나서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태림이 따라붙었다. 이것까지 계획하진 않았지만, 운과 마주치는 상황에 호위가 있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태림이 함께 있다면 담덕이 한결 더 마음을 놓을 수 있을 터였다.

빗물이 떨어지는 회랑을 걸어 후문에 가까워질수록 주변이 고요해졌다. 사람의 기척이 사라지고 빗소리만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우희.”

후문을 향해 걸어가던 중 담덕이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의아해져 그를 보니 담덕의 시선이 멀리 어렴풋이 보이는 후문에 꽂혀 있었다.

“돌아가자. 먼저 온 사람이 있는 것 같다.”

내 눈에는 제대로 보이지 않는데 담덕은 기척을 느낀 것 같았다. 태림을 바라보니 그 역시 검을 쥔 손에 힘을 주며 경계를 하고 있었다.

우연을 가장하기는 틀렸군.

나는 한숨을 내쉬며 진실을 말하기로 결정했다.

“아니. 돌아가지 않아. 저기 서 있는 사람을 만나러 온 거니까.”

“……저기 서 있는 자가 누군지는 알고?”

“해운이잖아. 아니야?”

담덕은 대답이 없었다. 대신 뭐라도 씹은 것처럼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왜 그를 만나기로 한 건데?”

“그건 만나서 직접 들어. 네가 들어야 할 이야기가 있는 것 같아.”

“……내가 그를 믿었으면 해?”

“난 그를 믿고 싶어. 하지만 네 믿음은 네가 판단할 문제겠지. 난 강요하지 않아.”

차분하게 대답했더니 담덕이 이를 악물며 주먹을 꽉 쥐었다. 단단히 쥔 손에 핏줄이 도드라졌다.

“다른 사람이 말했다면 절대 그자와 독대하지 않았을 거야. 하지만 너니까, 네가 제안한 거니까 만날게.”

그렇게 말한 담덕이 나를 스쳐 갔다. 운을 향해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이 안개 때문인지 흐렸다.

담덕의 뒤를 따를 줄 알았던 태림은 멀뚱히 선 채 내 옆에 남았다. 나는 그를 바라보며 고갯짓으로 담덕 쪽을 가리켰다.

“안 따라가요?”

“지금은 우희 님의 호위가 제 임무입니다.”

“……태림도 정말 사람이 앞뒤로 꽉 막혔네요.”

“우희 님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내가요?”

“담덕 님의 기분을 생각해 해씨의 장남을 믿지 않는다 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거짓을 말하지 않으셨죠. 우희 님도 충분히 꽉 막히셨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꽉 막혀 보이는 사람에게 그런 말을 들을 정도인가. 멍하니 태림을 보고 있으니 그가 후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우희 님이 가신다면 저도 갈 수 있습니다.”

“지금 보니 요령을 부릴 줄도 아네요.”

“지설 님과 함께 지내다 보니.”

과연 납득할 만한 이유였다. 지설이라면 각종 요령에는 통달을 했을 것이다.

나는 웃으며 마주 선 담덕과 운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내가 실수한 걸까요? 담덕에게 운을 만나 보라 한 것이?”

걸으며 묻는 나의 질문에 태림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답했다.

“이미 말씀드렸지만 판단은 제 몫이……”

“네. 그래요. 태림의 몫이 아니겠죠. 답을 기대한 내가 잘못이지.”

태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더니 그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검에서 손에서 놓지 않으며 경계 태세를 유지했다.

적당한 거리에 멈춰서 담덕과 운을 바라보니 둘의 얼굴이 퍽이나 심각했다. 담덕은 팔짱을 끼고 있었고, 운은 살짝 고개를 숙인 채였다.

어렴풋이 두 사람의 대화가 들려왔다. 내용은 의외였다.

“태자님, 저를 곁에 두십시오.”

“내가 소노부 해씨의 무엇을 믿고? 그간 태왕의 자리를 흔들기 위해 그대의 아비가 한 작당이 한둘인가.”

“그러니 더욱 저를 곁에 두셔야 합니다. 제가 곁에 있는 한 제 아버지는 태자님께 어떤 위해도 가할 수 없을 테니까요.”

나는 운이 수곡 성주의 속셈에 대해 말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는 조금 더 근본적인 부분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번 수곡 성주의 작당만이 아니라, 앞으로 소노부 해씨를 중심으로 일어날 수많은 위협들을 막을 방법이었다.

“아시다시피 저는 소노부 해씨의 장남입니다. 또한 희미하지만 계루부 고씨 황가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이기도 합니다. 다시 황위를 뺏고자 하는 자들에게 저는 결코 잃을 수 없는 구심점이죠.”

“스스로의 위치를 잘 알고 있군.”

“물론입니다. 제 아비가 어려서부터 몇 번이고 말하셨거든요. 언젠가 네가 태왕이 되어야 한다고. 지금의 왕은 무능하고 자격 없는 가짜라고요.”

“그래서 욕심을 품었나?”

신랄한 말에 담덕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운은 그것을 보고서도 담담했다. 오히려 그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저는 태왕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단 한 번도 그 자리에 욕심을 내 본 적이 없어요. 저는 그저 조용히 제 삶을 살고 싶을 뿐입니다. 그래서 국내성을 떠나 지금 이 전쟁터로 온 것입니다.”

“……그대의 출정이 소노부와 협의되지 않은 독단이라는 것은 들었어.”

“처음 도압성으로 출병할 때 제 아비는…….”

막히지 않고 말을 이어 가던 운이 잠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무척이나 말하기 힘든 사실을 입에 올리려는 것 같았다. 그리고 오랜 망설임 끝에 나온 이야기는 놀라웠다.

“그 병력이 몰살될 것이라 말했습니다. 그리하면 태왕의 위세가 크게 흔들려 다른 귀족들도 동요할 것이라고요.”

“……뭐?”

담덕이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이번 백제와의 전선에는 말갈의 힘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그들을 포섭해 적은 병력으로도 백제와 동등하게, 아니, 그 이상으로 맞설 수 있었죠. 한데 이 말갈이 전력에서 이탈한다면 어떻겠습니까?”

“말할 것도 없이 필패겠지.”

“그렇다면, 이 말갈을 움직일 수만 있다면 도압성의 병력을 몰살시키는 건 일도 아니지 않겠습니까?”

“……고추가가 말갈을 잡고 있다는 건가?”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운이 담덕의 질문을 다시 질문으로 돌려주었다. 미간을 찌푸리며 자신을 바라보는 담덕을 향해 운이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태자님께서 어려서부터 저를 경계하고 의심하셨다는 걸 압니다. 앞으로 계속 그러셔도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우린 서로를 신뢰하기 힘든 사람들이니까요.”

운은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풀어 담덕의 앞에 내밀었다.

자신의 유일한 무기를 풀어 상대에게 내미는 것.

알기 쉬운 충성의 표시였다. 예상치 못한 행동에 담덕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렇지만 저를 곁에 두십시오. 끊임없이 감시하셔도 좋습니다. 제게 당신의 옆을 허락하신다면 비극을 막을 수 있을 겁니다. 그들에게 제 가치가 떨어지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지금도 보십시오. 제가 도압성에 있으니 함부로 말갈을 빼내지 못했잖습니까. 제가 위험에 빠지면 곤란하니까요.”

담덕이 자신 앞에 내밀어진 검을 빤히 보았다.

“해씨의 장남이 왜 이렇게까지 나오는 거지? 대단한 자리에 오르고 싶지 않아서라면 꼭 나와 태왕 폐하를 지키지 않아도 돼.”

“제가 소중히 여기고 지키고 싶어 하는 자들의 목숨이 태자님과 태왕 폐하의 안위에 달려 있습니다. 송구하지만 제가 지키고 싶은 사람은 태자님이 아닙니다. 전 제 것을 지키고 싶은 것뿐입니다. 불손한 의도라고 욕하셔도 괜찮습니다.”

담덕을 바라보는 운의 두 눈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 두 눈이 신뢰를 준 것 같았다. 담덕이 손을 뻗어 운이 내민 그의 검을 받아 들었다.

“이유가 그러하다니 고마워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너를 곁에 두지. 네 말대로 널 믿지도 않겠다. 다만 가고자 하는 길이 같으니 동행 정도야 할 수 있겠지.”

운의 검을 살피던 담덕이 다시 그것을 운에게 내밀었다.

“널 믿지 않으니 검은 받지 않겠어. 믿지도 못하는 충성에 무슨 의미가 있겠나.”

“제게 무기를 남겨 두셔도 되겠습니까?”

“우습게 보지 마. 나를 지키는 검이 만만치 않거든.”

담덕이 슬쩍 눈을 돌려 태림을 바라보았다. 고구려 제일의 검객이라는 그의 얼굴을 확인한 운이 납득했다는 듯 피식 웃음을 흘렸다.

“확실히 제 검으로는 태자님께 생채기조차 내기 힘들겠군요.”

운의 검이 다시 그의 허리로 돌아갔다.

* * *

수곡성에 머물기로 계획했던 이틀이 지났다. 하늘에 구멍이 난 듯 쏟아지던 비는 어느새 거짓말처럼 그쳐 있었다.

국내성에서부터 함께 출발한 일행은 물론이고 도압성에서 온 제신과 운까지 모두 출발을 위해 성문 앞에 도열했다. 배웅을 위해 나온 성주는 그 풍경을 보자마자 미간을 찌푸렸다.

성주의 목적은 운이 도압성에 돌아가지 않게 묶어 두는 것이었다. 때문에 그가 수곡성에 머무르는 내내 그를 붙잡기 위해 설득을 멈추지 않았다.

그럼에도 운은 오늘 이 자리에 나와 병사들 사이에 도열해 있었다. 성주가 어두운 표정으로 그의 앞에 섰다.

“기어이 가십니까.”

“처음부터 그리하겠다 했잖습니까. 그만 포기하라 전하십시오.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 내가 있을 곳은 정해져 있습니다.”

“도련님, 언제까지 기다려 드릴 수만은 없습니다. 저희는 무슨 수라도 쓸 생각이니 웬만하면 제 발로 걸어오는 것이 서로에 좋지 않겠습니까? 돌이키기엔 이미 늦었는지도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그렇게 말한 성주가 돌아서 담덕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의미심장한 그의 경고에 운의 미간이 그대로 찌푸려졌다.

“저치는 네게 왜 그래?”

제신의 속삭임에 운이 짐짓 장난스러운 척 어깨를 으쓱거렸다.

“글쎄. 몇 년 전에 수곡성에 와서 비싼 술을 한 병 먹어 치웠는데 그것 때문에 그러나?”

“비싼 술을 너 혼자 마셨냐?”

“비싼 술은 원래 혼자 마시는 거다.”

두 사람이 시답지 않은 이야기로 낄낄대는 동안 성주와 이야기를 마친 담덕이 일행을 향해 돌아왔다.

“모두 출발하지.”

그의 지시에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이 말에 올라탔다. 마지막으로 담덕이 말 위에 오르자 다시 긴 여정이 시작되었다.

사람이 단 두 명 늘었을 뿐인데 일행의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넉살 좋게 병사들과 어울리는 운 덕분이었다.

“……해운이 저런 사람이었나?”

뒤쪽에서 와하하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담덕이 질린 얼굴로 물었다. 운의 그런 기질을 진즉에 알아보았던 나로서는 담덕의 반응이 우스울 뿐이었다.

“원래 저랬어. 네가 거리를 두느라 몰랐던 거 아냐?”

“저런 성격이라면 거리를 둔 게 더 잘한 일 같은데.”

“냉정하네.”

웃으며 담덕의 얼굴을 살피니 그의 얼굴은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기분은 조금 풀렸어?”

“내 기분이 왜?”

“해운과 만나고 난 뒤부터 오늘까지 쭉 날 피했잖아. 기분 상한 거 아니었어?”

내 지적에 담덕은 말이 없었다. 그는 후문에서 운과 대화를 나눈 후 그대로 방으로 돌아가 오늘이 되기까지 나를 찾지 않았다.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널 일부러 피한 건 아니었다. 그저 혼자 생각을 좀 하고 싶었어.”

“무슨 생각을 그리 깊이 했어?”

“여태까지 난 많은 사람들을 의심하고 살았어. 그런 의심들이 날 지켜 준다고 굳게 믿었지. 그런데…….”

담덕의 시선이 병사들과 섞여 있는 운을 향했다가 다시 정면으로 돌아왔다.

“내 생각보다 해운은 괜찮은 자였어. 완전히 믿는 건 아니지만 가는 길이 같다는 건 인정했다. 네가 먼저 나서지 않았다면 난 평생 저자의 괜찮은 면을 보지 못했겠지. 편견과 아집에 싸여 있었다고 생각해. 태자로서 좋지 못한 태도였다.”

이번에는 담덕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의 눈빛에는 의아함이 담겨 있었다.

“너는 어떻게 그를 믿을 생각을 했어?”

“그가 내 오라버니의 친구고, 내 아버지의 부하니까. 그분들이 믿는 사람이라면 나도 믿을 수 있다 생각했을 뿐이야.”

“그럼 그들은 어떻게 해운을 믿을 생각을 했던 걸까?”

그것은 나도 답할 수가 없었다. 애초에 두 사람에게 왜 운을 친구로 두었는지, 왜 부하로 두었는지 묻지 않았다.

담덕도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닌 듯했다. 그는 눈을 살짝 내리깔고 혼잣말 같은 말을 이었다.

“누군가를 믿는 게 그리 쉽게 가능한가?”

“네가 그런 말을 하니 이상하네.”

“어째서?”

“넌 나를 처음 봤을 때부터 날 믿었잖아. 내 손에 태왕 폐하의 목숨을 쉽게 맡겼지. 난 네가 사람을 너무 잘 믿어 문제 아닌가 생각했다니까.”

“그건 네가 절노부 연씨였기 때문이야. 절노부 사람이 아버지께 위해를 가할 리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난 모든 것을 이렇게 계산해야 결정할 수 있어. 널 향한 믿음마저도 그런 식으로 가졌던 거야.”

바닥을 향하던 담덕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씨익 웃는 그의 미소는 시원했지만 미간은 찌푸려져 있었다.

“역시 그건 기분 나쁘지?”

“그래서 지금은?”

나는 대답대신 그에게 되물었다.

“지금은 어떤데? 여전히 계산을 하고 날 믿니?”

나의 질문에 입으로나마 웃고 있던 담덕의 얼굴이 완전히 굳어졌다.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럼 됐어. 시작이 뭐가 중요해? 지금이 중요하지. 지금 그런 게 아니라면 됐어.”

막힘없이 흘러나온 대답에 담덕이 멍한 얼굴로 날 보더니 곧 미간을 찌푸렸다.

“넌 뭐가 그리 쉽냐?”

“나랑 친구 하자고 할 때 너는 더 쉬웠어. 안 그래, 가륜?”

나를 태운 검은 말을 바라보며 묻자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가륜이 투레질을 했다. 가륜의 이름을 부를 때면 늘 그랬듯 담덕이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말 이름은 부르지 말지?”

“왜? 가륜을 가륜이라고 부르는데 뭐가 문제야?”

“그래. 내가 뿌린 씨앗은 내가 거둬야지. 어쩌겠어.”

“어, 가륜이 똥 싸면서 달린다!”

“…….”

담덕의 얼굴이 그대로 일그러졌다.

“……역시 안 되겠어. 너 당장 말 이름 바꿔!”

“내 말 이름을 왜 바꾸래?”

“폐하께서 선물한 말이잖아. 계루부에서 난 놈이니 내 몫도 조금은 있어.”

“그런 것까지 따지는 거야? 참으로 유치하다.”

나는 일부러 얄밉게 웃어 보이고는 가륜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달리는 속도가 훨씬 빨라졌다. 담덕이 재빨리 그 옆을 따라붙었다.

“도망가 버리면 내가 포기할 줄 알고?”

“포기 안 하면?”

“그 말 이름, 오늘은 꼭 바꾸고 만다. 너 당장 거기 서!”

“그렇게 말하면 서려던 사람도 안 선다니까.”

나는 다시 한번 가륜의 옆구리를 두드렸다. 속도가 더욱 빨라지며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렸다.

마치 바람을 가르는 기분이었다. 가슴이 뻥 뚫리는 듯한 시원함에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 시원함도 오래가지 못했다. 멀리서 점처럼 작았던 물체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갈수록 형제가 선명해졌다.

자세히 보니 물체가 아닌 사람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재빨리 고삐를 당겼다. 그러자 놀란 가륜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앞발을 들었다.

가륜의 등이 뒤로 넘어갈 듯 휘어졌다. 그 위에 있던 나도 움직임에 휩쓸려 중심을 제대로 잡을 수 없었다.

결국 휘청거리던 몸이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우희!”

높은 곳에서 떨어진 탓에 숨이 턱 막혔다. 나는 어렵게 상체를 일으키며 겨우 숨을 토해 냈다.

“괜찮아?”

뒤따라온 담덕이 말에서 뛰어내려 내게 달려왔다. 나는 괜찮다는 의사를 표현하기 위해 손을 들어 보이며 사람이 있던 곳을 바라보았다.

“난 괜찮아. 그보다 사람은 괜찮아?”

“사람? 무슨 사람?”

“앞에 사람이 있었어. 그걸 보고 멈춘 건데…….”

고개를 빼고 주위를 살폈지만 사람은커녕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어느새 진정했는지 가륜만이 유유히 풀을 뜯고 있을 뿐이었다.

“어?”

나는 놀라움에 가슴을 찌르는 통증도 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담덕이 옆에서 부축을 해 주었지만 나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사람이 있던 곳을 향해 달려갔다.

다시 봐도 공간은 텅 비어 있었다. 나는 어리둥절해 입을 쩍 벌렸다.

내가 잘못 봤나? 아니야. 확실히 사람이었는데?

“잘못 본 거 아냐?”

어느새 내 뒤까지 따라온 담덕이 주위를 살피며 물었다. 주변은 인기척도 없이 고요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뒤늦게 우리를 따라잡은 일행들이 말에서 내린 나와 담덕을 보고 의아한 얼굴을 했다.

“저쪽에 사람이…….”

일행에게 저쪽에 있던 사람을 보지 못했냐고 물으려다 손을 내렸다. 나보다 훨씬 뒤에서 오던 이들이 사람의 모습을 발견했을 리 없었다.

“사람이 왜요?”

지설이 하늘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가 출발하며 해가 떨어지기 전에 마을까지 가는 것이 목표라고 했었다. 여기서 시간을 더 지체할 수는 없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래도 잘못 본 모양이에요. 다시 출발하죠.”

나는 고개를 저으며 다시 말 위로 올라탔다. 가슴에서 뻐근하게 통증이 올라왔지만 방법이 없었다.

“괜찮겠어?”

“응.”

“정말이야?”

담덕이 의심스러운 눈으로 나를 훑었다. 어디 한 곳이라도 불편한 곳을 들키면 당장에라도 말에서 끌어내려질 것 같았다.

“겨우 낙마 한 번 한 거 가지고 무슨 호들갑이야. 말에 짓밟힌 것도 아닌데.”

나는 일부러 더 당당하게 허리를 곧추세우며 어깨를 폈다.

아직까지 숨이 턱 막혀 왔지만 표정 관리가 잘되었던지 담덕이 곧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의심스러운 얼굴이었지만 우선 넘어가기로 한 모양이었다.

“별일 아니었다. 다시 출발하지.”

담덕의 지시에 다시 일행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도 태연히 일행에 합류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문제를 깨달았다.

아파. 너무 아파.

최대한 몸을 보호하면서 떨어지려 노력을 했는데도 너무 갑작스러운 상황이라 다리를 제대로 접질린 것 같았다. 말에 탄 몸이 흔들릴 때마다 발목에서부터 올라오는 고통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마을까지 버틸 수 있겠지?

아니, 사실 마을까지 버텨도 문제였다. 마을에 도착하면 잠시 쉴 수야 있겠지만 다음 날은 다시 말을 타고 달려야 했다.

그래도 잠시 쉬면서 상태를 살피면 좋을 텐데.

하지만 마을은 아직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아득한 여정에 정신까지 아득해졌다.

버티자. 버틸 수 있어.

나는 정신을 다잡으며 고삐를 꽉 움켜쥐었다.

* * *

고통을 참고 달리다 보니 점점 집중력이 떨어졌다. 온몸에 식은땀이 흐르고 눈앞이 흐려졌다.

나는 눈을 깜빡이며 시야를 유지하려고 애썼다. 땀에 젖은 손 때문에 단단히 틀어잡은 고삐가 미끄러졌지만, 고삐를 손목에 두어 번 돌려 감자 조금이나마 사정이 나아졌다.

나는 아프지 않다. 아프지 않다.

자기 암시를 걸어 보았지만 그다지 효과는 없었다.

그럼 다른 생각을 하자. 아픈 거 말고 다른 생각…… 같은 게 떠오르겠어? 아파 죽겠는데!

다른 생각을 해 보는 것도 실패였다. 무슨 짓을 해도 결론은 그냥 아프다는 거였다.

나의 이상을 가장 먼저 알아챈 사람은 호위를 맡은 이후 내 곁을 떠나지 않는 태림이었다.

“어디 불편하십니까?”

태림은 내가 상태를 알리고 싶지 않아 한다는 것을 알아챘는지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다른 사람에게라면 괜찮다고 둘러댔겠지만 태림이라면 사실을 말할 수 있었다. 그는 내가 입을 다물어 달라고 한다면 그리해 줄 사람이었다.

“조금 전에 떨어지면서 다리를 접질렸어요. 정도가 심한지 많이 아파서…….”

내 말에 태림의 시선이 발목을 향했다.

“겉으로 보기에도 많이 부었습니다. 뼈를 다치신 건 아닙니까?”

“뼈가 상했으면 아까 일어서서 달리지도 못했어요. 그냥 접질린 건 맞아요. 아주 심하게 접질렸을 뿐이죠.”

나는 심호흡을 하며 앞으로 목을 쭉 뺐다. 이렇게 하면 마을이 보일지도 모른다는 희망 때문이었다. 물론 이것 역시 쓸데없는 희망이었다.

“마을에 도착하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인지 태림이 난처한 얼굴로 사실을 지적했다.

“얼마나 더 가야 해요?”

“적어도 두 시진은…….”

“두 시진이라고요!”

나도 모르게 소리를 버럭 질렀더니 일행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내게 꽂혔다. 실수를 알아채고 입을 막았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벌써 지쳤느냐? 이리 체력이 약해서 도압성까지 제대로 가겠어?”

뒤에서 병사들과 어울리던 운이 얄미운 미소를 지으며 내게 다가왔다. 내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던 담덕이 운을 발견하자마자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돌린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예, 뭐.”

평소라면 운의 말을 열심히 받아쳐 줬겠으나 지금은 그럴 기운이 없었다. 얌전한 내 반응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가늘어진 눈으로 나를 살피던 운이 곧 눈을 크게 떴다.

“상태가 왜 이래?”

가까이에서 보면 식은땀이 흐르는 얼굴이며 창백해진 얼굴을 모를 리 없었다. 답지 않게 놀란 눈으로 나를 살피는 운에게 태림이 대신해 속삭였다.

“아까 말에 떨어지면서 발목을 접질리신 것 같답니다.”

“발목을?”

그 말에 내 발목으로 시선을 돌린 운의 얼굴이 그대로 일그러졌다.

“부었다.”

“이미 태림에게 들었습니다. 한 번 더 확인해 주실 것까진 없어요.”

“들었다면서 이리 미련하게 있어?”

“저 하나 때문에 일정이 늦어지면 안 되잖습니까. 해가 떨어지기 전까지는 마을에 닿아야 하는데요. 마을까지는 버텨 볼 생각입니다.”

“마을까지 두 시진은 족히 걸린다.”

“예. 그것도 들었습니다.”

“허. 이것 참 대책 없는 아가씨일세.”

황당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운이 말없이 속도를 높여 내 앞을 가로막았다. 놀라서 말을 멈추고 운을 바라보니 그가 웃으며 말에서 내리고 있었다.

“조금 앞으로 가.”

“예?”

“등자에서 발 빼고, 조금 앞으로 가 보라고.”

발목 상태를 봐 주려는 것인가 싶어 운의 말대로 등자에서 발을 빼자마자 빈 자리에 운의 발이 걸렸다.

“지금 뭐하는…….”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운이 고삐를 붙잡고 한 번에 말 위로 올라탔다. 등 뒤로 고개를 돌리니 내 몸이 운의 두 팔에 갇힌 채였다.

“……지금 뭐하는 겁니까?”

미처 하지 못했던 질문을 다시 했더니 운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발목 상태가 엉망인데 어찌 혼자 말을 몰아? 말은 내가 몰 테니 넌 얌전히 앉아 가기나 해라. 흔들릴 때 통증은 어쩔 수 없겠지만 등자를 고정할 때 힘은 안 들어가니 아픈 게 덜할 거다.”

확실히 등자를 고정하는 힘이 빠지니 통증이 덜하긴 했다. 하지만 사람을 두 명이나 태우면 말이 받는 피로가 곱절로 늘어났다. 가륜이 금세 지치게 될 터였다.

“말 하나가 사람 두 명의 무게를 어찌 견딥니까.”

“애초에 조그만 너 하나 태우기에는 과한 말이었다. 나와 너까지 태워도 생생할 놈이니 걱정 마라.”

운이 가륜의 옆구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운의 말에 대답하기라도 하듯 가륜이 기분 좋은 투레질을 했다.

“이것 봐라. 이놈도 괜찮다잖아.”

운이 턱을 치켜들며 젠체했다. 그의 말처럼 원래부터 가륜은 가벼운 내가 홀로 타기엔 크고 건장한 편이었다.

“뭐…… 그건 그렇겠지만…….”

더 이상 내가 반박이 없자 운이 기특하다는 듯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태림 님께는 제 말을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걱정 마십시오. 제가 잘 몰고 가겠습니다.”

태림이 주인 잃은 말의 고삐를 틀어쥐었다. 순한 말인지 낯선 사람이 줄을 끄는데도 얌전했다.

“말이 참 순하네요.”

“너무 순해서 문제다. 아무한테나 등을 내주는 통에 잠깐만 정신을 놓으면 사라져 있다니까.”

“주인과는 영 딴판이네요.”

“그러는 그대의 말도 주인과는 영 다른데? 참으로 순하고 말을 잘 들어. 이름이 뭐야?”

“가륜입니다.”

“가륜?”

별생각 없이 대답했더니 운이 놀라서 되물었다. 나는 의아해져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 왜 그리 놀라세요?”

“아, 별거 아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이름이라.”

“흔한 이름은 아닌 줄 알았는데……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국내성에 유녀들 사이에서 유명한 난봉꾼이 있어. 잘난 얼굴로 여러 유녀를 울린다는데, 그자의 이름이 가륜이라더군.”

난봉꾼 가륜이라.

나는 담덕의 얼굴에 난봉꾼의 행색을 입혀 보았다. 그러자 꽤 우스운 꼴이 그려졌다.

“……안 어울려.”

“뭐가 안 어울린단 말이야?”

내 혼잣말에 운이 물었다. 나는 서둘러 고개를 저으며 화제를 돌렸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제가 생각하는 가륜의 느낌은 난봉꾼이 아니라서요.”

“이름에도 느낌이 있나?”

“그럼요. 얼굴을 모르고 이름만 들어도 그 사람의 분위기를 상상하게 되는걸요.”

“그럼 내 이름은 어땠어?”

“그쪽이요?”

“그래. 만나기 전에 내 이름은 많이 들었을 거 아니냐.”

제신의 가장 친한 친구인 탓에 어려서부터 나는 운의 이름을 참 많이도 들었다. 늘 제신이 ‘운이’라고 부르는 탓에 해씨 집안의 도련님인 건 몰랐지만, 이름만 듣고서는 소리가 참 예쁘다 생각했었다.

“운이라는 이름은……”

“운이라는 이름은?”

운이 내 말을 따라 하며 평가를 재촉했다. 고개를 돌려 슬쩍 운의 얼굴을 보니 내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기대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변화무쌍하고 자유로운 사람이겠지 생각했습니다. 운이라는 이름이 구름을 뜻하지 않습니까? 구름은 매일 모양이 변하고 하늘을 자유롭게 떠다니니 그런 분위기가 떠올랐죠.”

“변화무쌍하고 자유로운 사람이라. 직접 만나니 어떻더냐?”

“그쪽은 종잡을 수 없고 제멋대로이니 어느 정도는 제 예상과 비슷합니다.”

“뭐라고? 변화무쌍하고 자유롭다는 게 그리도 해석이 되더냐?”

운이 웃음을 터트렸다. 제법 신랄하게 말했다 생각했는데 기분이 나쁘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난 네 이름을 듣고 우아하고 조용한 미인을 생각했지. 밝아 오는 햇살을 만난다는 뜻이라, 새벽녘의 고요함을 생각했다. 한데 직접 만나 보니 새벽녘 고요한 볕이 아니라 한낮의 태양이더구나.”

“……제가 산만하다는 것을 그리 돌려 말하시는 거죠.”

“기운이 넘친다는 게지. 나로서는 칭찬을 한 것인데 마음에 들지 않는가 보다?”

내가 불만스럽게 입을 비죽이니 운이 웃으며 내 어깨를 끌어당겼다. 등자에 발을 걸지 않은 탓에 몸이 쉽게 뒤로 기울어 등이 그의 가슴팍에 닿았다.

“편하게 기대라. 그리 뻣뻣하게 가다가 또 떨어지겠다.”

“안 떨어집니다. 조금 전엔 갑자기 사람이 뛰쳐나와서 그런 거예요.”

“보는 내가 불안하다. 그냥 기대서 가지?”

나는 몸을 앞으로 숙이고, 운은 내를 제 앞으로 끌어당겼다. 한참이나 실랑이를 한 끝에 두 손을 든 쪽은 결국 나였다.

“제가 졌습니다. 제 고집이 진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래. 내가 고집이 좀 대단하다.”

“칭찬한 거 아닙니다.”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몸의 힘을 풀었다. 어려서부터 말에 익숙했던 탓에 이런 식으로 누가 태워 주는 것은 처음이었다. 다른 사람과 함께 말을 타다니 거치적거려 불편할 줄만 알았는데 생각보다 몸이 편했다.

“자, 그럼 속도를 내 볼까?”

머리 위에서 운의 만족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집으로 날 이긴 게 그리 좋은가?

나는 평소보다 더 기분이 좋은 듯한 운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 * *

“……희야.”

희미한 의식 속으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희야.”

무거운 눈꺼풀을 애써 들어 올리자마자 눈앞에 제신의 얼굴이 있었다.

“오라버니. 이제 마을입니까?”

“그래. 조금 전에 도착했다.”

깜빡 잠이 든 것일까. 눈을 비비며 제신을 불렀더니 그가 어색한 얼굴로 내 등 뒤를 바라보았다.

“운아. 이제 일어났다.”

그제야 내 등 뒤를 편하게 받쳐 주는 따뜻한 기운의 존재가 느껴졌다. 화들짝 놀라 몸을 바로 세우며 고개를 돌리니 운이 장난스럽게 웃고 있었다.

“내 품이 그리 편하더냐?”

“제가 잠들었습니까?”

“그래. 잘도 자더라.”

믿을 수 없어 멍하니 앉은 나를 보며 피식 웃음을 흘린 운이 먼저 말에서 내려 내 몸을 아래로 내려 주었다. 생각 없이 디딘 발에 무게가 실려 미간을 찌푸리자 그가 빠르게 나를 부축했다.

“혼자 걸을 수 있겠어?”

운의 질문에 가볍게 발을 굴러 보니 통증이 대단했다. 아무래도 혼자 걷기는 무리일 것 같았다.

이거 내일에도 혼자 말 타는 건 힘들겠는데?

다친 다리를 보며 걱정하는 내 귀로 담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쳤어?”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새 담덕이 내 앞에 다가와 있었다.

“태자님.”

다가온 담덕을 보고 제신과 운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담덕은 고개를 끄덕여 그들의 인사를 받고는 조금 굳은 얼굴로 내 앞에 섰다.

“다른 사람과 함께 말을 타고 오던데.”

담덕의 시선이 운에게 슬쩍 닿았다가 떨어졌다. 내가 운과 함께 말을 타고 온 것을 담덕도 본 모양이었다.

“아까 말에서 떨어졌을 때 발목을 접질렸어. 혼자 말 타기가 어려워 보였는지 해씨의 도련님이 도와주신 거야.”

“말에서 떨어졌을 때?”

그렇지 않아도 굳어 있던 담덕의 얼굴이 더 딱딱해졌다. 그는 망설임 없이 무릎을 굽혀 몸을 낮추고는 치마를 들어 내 발목을 살폈다.

“태자님!”

“담덕!”

다른 의미의 외침이 동시에 흘러나왔다. 제신은 내 앞에서 무릎을 굽히는 태자의 모습을 보고, 나는 고민도 없이 치마를 들추는 손길에 놀라 그를 불렀다.

“완전히 부어서는.”

하지만 담덕은 우리 두 사람의 외침이 전혀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진지한 얼굴로 내 발목을 살피던 그가 곧 몸을 일으켰다.

다시 일어선 담덕의 얼굴은 완전히 일그러져 있었다.

“왜 말 안 했어? 다쳤을 때 말을 했어야지.”

“나 때문에 길이 늦어질까 봐 그랬어. 해가 떨어지기 전에 이 마을에 닿아야 한다고 들어서.”

“내가 다친 사람을 무시하고 길을 서두를 사람으로 보였어?”

“그게 아니니 말하지 않았던 거야. 내가 다쳤다고 했으면 일행을 멈췄을 거잖아.”

내 지적에 담덕은 말이 없었다. 잠시 나를 무겁게 바라보던 내게로 손을 뻗었다. 덩그러니 내밀어진 손의 의미를 알 수 없어 멀뚱히 바라보니 담덕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리 와. 그쪽에 있지 말고.”

나는 담덕이 말하는 ‘그쪽’이 운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직까지 운에게 완전히 마음을 열지 못한 것일까? 담덕은 못마땅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담덕의 기분이 더 나빠지기 전에 나는 재빨리 그의 손을 붙잡았다. 담덕의 손을 쥐자마자 그가 더 강한 힘으로 나를 붙잡아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겼다.

맥없이 담덕에게 끌려가는 나를 보며 제신이 의미심장한 눈을 했다. 다시 만나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던 밤 이후 제신은 틈만 나면 저런 눈이었다.

“태자님, 잠시 자리를 피해 드리겠습니다. 이야기 나누시지요.”

담덕이 아직 대답도 하지 않았는데, 제신은 여전히 의미심장한 눈으로 웃으며 운을 잡아끌었다. 우악스러운 제신의 손길에 운이 미간을 찌푸리며 그의 손에 끌려갔다.

두 사람은 순식간에 멀어져 나와 담덕만 덩그러니 자리에 남았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라는 거야?”

나는 제신의 의미 모를 말에 불만을 토로하며 가륜이 매여 있는 나무 아래에 주저앉았다. 흙바닥이 신경 쓰였지만 계속 서 있기에는 발목이 너무 아팠다.

주저앉은 나는 치마를 걷어 올려 신발을 벗어 던진 뒤 본격적으로 발목을 살피기 시작했다. 천으로 단단히 고정한 뒤 냉찜질을 하면 좋을 것 같았다.

발목을 감쌀 붕대 대용으로 쓸 천이 필요했다. 오래전 머리끈으로 붕대를 대신한 기억이 있어 머리로 손을 뻗는데, 그보다 담덕이 자신의 허리끈을 푸는 것이 먼저였다.

“그걸 쓰면 네 머리가 다 흐트러지잖아.”

담덕은 몸을 숙여 하얗게 드러난 내 발목을 붙잡았다. 그의 손이 어찌나 큰지 퉁퉁 부운 발목이 한 손에 붙잡혔다.

내 손과는 전혀 다른 투박한 손이 발목을 붙잡으니 기분이 묘했다. 나는 담덕의 손을 밀어내며 그의 손에 있던 끈을 잡아당겼다.

“내가 할게. 이런 건 내가 더 잘해.”

“나도 잘해.”

담덕이 다시 내 손에서 끈을 뺏어 갔다. 실랑이를 벌였다가는 끝이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담덕을 저지하길 포기하고 나무에 등을 기댔다. 편안하게 몸을 늘어뜨리고 있으니 담덕이 꼼꼼하게 천으로 내 발목을 감싸 주었다.

“정말 잘하네.”

“검을 다루다 보면 이런 식으로 많이 다치니까. 이 정도는 할 줄 알아야지.”

고개를 숙인 담덕의 머리카락이 다리를 간질였다. 이게 뭐라고 잔뜩 집중한 그의 얼굴이 우스웠다.

* * *

다음 날부터 나는 담덕의 말에 함께 탔다. 두 사람을 동시에 태울 수 있을 만큼 좋은 말이 가륜과 담덕의 말뿐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모두들 상황을 납득했다. 깐깐한 지설마저도 내 다리 상태를 보더니 ‘혼자 말을 타기는 어려우니 태자 전하의 신세를 져야겠군요’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하루 만에 짐짝 신세로 전락한 나는 아주 침통했다.

기마는 내가 자랑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재주였다. 헛것을 보는 바람에 낙마해서 짐짝 신세가 되어 버렸으니 시무룩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힘없이 담덕의 가슴에 기댄 채 주변 풍경을 바라보았다. 국내성을 떠나 보았던 풍경들과는 사뭇 차이가 있었다.

지금까지는 산맥을 타고 내려오는 길이었다면 수곡성에서 도압성까지의 길은 예성강의 지류를 따라 움직이는 여정이었다.

이 시대에는 마실 수 있는 물을 따라 마을이 형성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전반부의 여정과 달리 쉬어 갈 수 있는 마을이 많았다.

덕분에 속도도 제법 붙어 우리 일행은 예상보다 하루나 빠르게 목적지인 도압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동안 내 발목 상태도 혼자 말을 탈 수 있을 정도로 나아졌다. 아버지와 만날 때 건강한 모습을 보여 드릴 수 있게 되었으니 퍽이나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백제와 늘 격전을 벌이는 남부 전선의 요지답게 도압성 입구 곳곳에는 전투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치열한 전쟁의 단상을 눈으로 확인하니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런 곳에 지내면서도 아버지와 제신은 편지에서 안전한 곳에 머무르고 있으니 안심하라고만 했다.

“안전한 곳이라면서?”

내 눈이 화살 박힌 흔적으로 가득한 성벽을 훑고 있는 것을 본 제신이 멋쩍은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저 안에 숨어 있었으니 안전한 곳에 있었던 것이 맞지.”

“안에 숨어 있긴 뭘 숨어 있어? 선봉에서 검을 휘두르는 아버지를 따르느라 누구보다 앞에 있었을 거면서.”

아버지와 제신의 성격을 모르는 내가 아니었다. 눈 하나를 잃고도 전쟁터에 자원해서 뛰어든 사람이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국내성에서 온 사자요! 태왕 폐하께서 도압성의 병사들을 위로하고자 태자님을 보내셨으니 지금 당장 성문을 여시오!”

성문 앞에 선 일행을 대표해 지설이 외쳤다. 그 소리를 듣고 성문 위의 망루가 분주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망루 위에서 갑옷을 차려 입은 도압 성주가 모습을 드러냈다.

“신분을 어찌 증명하시겠소!”

백제와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말만으로 성문을 열어 줄 수는 없었다. 당연한 절차에 뒤쪽에 물러서 있던 제신이 앞으로 나섰다.

“성주! 저희가 수곡성에서 태자님 일행을 모셔 왔습니다!”

그가 등 뒤에서 고구려군을 뜻하는 깃발을 들어 올렸다. 깃발과 제신의 얼굴을 모두 확인한 성주의 얼굴이 환해졌다.

“드디어 오셨군요!”

반가운 소리와 함께 거대한 성문이 열렸다. 천천히 열리는 문 사이로 소규모의 일행이 들어서자마자 등 뒤의 문이 굳게 닫혔다.

“먼 길 오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태자님!”

속셈을 알 수 없던 수곡 성주와 달리 도압 성주는 확실한 태왕 측 사람이었다. 담덕은 말에서 내려 환대하는 그의 앞에서 다가섰다.

“오랜 전쟁으로 어려움이 많다고 들었소. 나 고구려의 태자 담덕, 어려움을 살피고 부족함을 채워 주라는 태왕 폐하의 명을 받고 여기 왔소.”

“태왕 폐하의 높은 은덕에 감읍할 따름입니다.”

성주가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현했다. 그는 진심으로 담덕의 방문이 기꺼워 보였다. 하지만 담덕이 찾는 사람은 성주가 아니었다.

“연 장군은 어디에 있나? 먼저 그를 만나고 싶은데.”

아버지의 위치를 묻는 담덕의 말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곧 아버지를 만난다는 기대감에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하지만 그 마음도 오래가지 못했다. 난처한 표정으로 담덕의 눈치를 살피는 성주의 입에서 나온 말 때문이었다.

“저…… 연 장군은 성안에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제가 도압성을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저택에 머무르셨잖습니까.”

놀란 제신이 실례인 것도 잊은 듯 담덕을 제치고 성주에게 물었다. 제신의 얼굴을 확인한 성주는 더욱 난처한 얼굴이 되어 긴 한숨을 내쉬었다.

목차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