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수곡성
날이 밝고 일행은 길을 더욱 서둘렀다. 하늘을 보니 비가 올 것 같다는 태림의 말 때문이었다.
거기에 서둘러 달리면 비가 오기 전 산을 벗어나 마을에 닿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지설의 조언까지 더해지자 일행은 휴식 없이 길을 서두르기로 정했다.
새벽의 소동이 있었음에도 병사들은 기운이 넘쳤다. 그들은 아마 어제 먹은 환약 덕분인 것 같다며 나를 볼 때마다 감탄을 쏟아 냈다.
다들 이렇게 좋아하는데 진즉에 나눠 줄걸.
몸이 힘들다 보니 가방에 무엇을 넣어 두었는지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고민하며 꾸린 가방에는 공진단 외에도 아버지와 제신에게 주려고 준비해 온 약재들이 많았다.
“저기 마을이 보입니다. 다행히 비가 오기 전에 닿겠군요.”
지설이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니 과연 마을이 있었다. 지난번 신세를 졌던 주통촌과 달리 규모가 큰 성이었다.
“수곡성입니다. 우리가 조금 더 도압성에 가까워졌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이제 일정이 반 이상 지났습니다.”
오랫동안 달려왔는데 이제 겨우 일정의 반이 지났다니. 기운이 쭉 빠지는 것 같았다.
“성주에게 알리고 거처를 제공하라 하겠습니다.”
무장한 병사들이 함께이니 성주에게 알려야만 성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수곡 성주가 누구지?”
“양원익이라는 장군인데 소노부에 속한 자입니다.”
“소노부?”
“예. 고추가와 먼 친척입니다.”
“하면 우리를 마냥 환영하지는 않을 것 같군.”
담덕이 미간을 찌푸리며 멀리 우뚝 선 성을 바라보았다.
“지설 자네가 직접 가서 우리의 상황을 알리게. 태왕의 명을 받들어 도압성에 가는 길이라 하고, 왕명을 수행하는 자들에게 좋은 거처와 음식을 내어놓으라 해.”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리하겠습니다.”
* * *
“도압성으로 향하고 계신다는 소식은 이미 전해 들었습니다. 태자 전하를 이리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부디 수곡성에 계시는 동안 내 집이다 생각하고 편히 지내십시오.”
예상과 달리 수곡 성주는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이했다. 성주의 집에서 가장 좋은 방을 내어주고 저녁에는 일행을 위한 만찬을 열겠다고 했다.
“태자님과 연가의 아가씨께는 시중들 아이들도 보내지요.”
생각보다 더한 환대에 일행은 어리둥절했다. 지설은 무슨 속셈이 있어 저러는지 모르겠다며 밤을 새우고 있었으나, 당장 좋은 방에 몸을 누이니 염려도 한번에 날아가는 것 같았다.
내게는 시중을 드는 시녀가 두 명이나 붙었다. 담덕에게는 셋이 붙었다고 했다. 시녀들은 오늘 저녁에 있을 만찬을 위해 나를 씻기고 치장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성주님께서 아가씨께 만찬에 입으실 옷을 보냈습니다. 이것으로 입으시겠습니까?”
지금 입고 있는 옷은 실용성을 강조한 옷이라 만찬에 참석하기 적합지 않았다. 게다가 성주가 준 옷을 입고 나타나지 않으면 대단한 실례였다.
“그리하자.”
내가 고개를 끄덕여 의사를 표하자 시녀들이 옷을 펼쳤다. 전체적으로 고운 문양이 들어가 화려한 느낌이 나는 옷이었다.
시녀들은 능숙하게 옷을 입혔다. 오랜만에 예쁜 옷을 갖춰 입으니 스스로도 낯설었다. 거기에 화장을 하고 머리까지 만지니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우희. 이제 가야 한다.”
문밖에서 담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치장을 돕던 시녀들은 담덕의 목소리에 호들갑을 떨어 댔다.
“태자님께서 직접 아가씨를 뫼시러 오셨습니다.”
“역시 아가씨를 귀하게 여기시는 게지요.”
“방이 가까우니 나가는 길에 들르셨을 뿐이다.”
나는 시녀들의 억측을 자제시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머리를 땋아 주던 시녀가 더욱 손을 분주하게 움직여 머리 장식을 마무리했다.
문 앞에 서자 시녀들이 문을 열었다. 바로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지 담덕이 바로 앞에 있었다.
담덕도 성주가 보낸 옷을 입었는지 옷이 제법 화려했다. 한동안 편한 옷을 입던 것만 보다 차려입은 담덕을 보니 새삼 기분이 이상했다.
“이런 차림을 오랜만에 보니 참으로 어색합니다.”
시녀들을 의식해 깍듯하게 말하며 담덕을 보니 언제부터였는지 그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러십니까?”
혹시 이상한 곳이 있나 싶어 차려입은 옷 이곳저곳을 살피니 담덕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어여쁘게 차려입고 어찌 이리 부산스러워?”
“보시기에 어여쁘긴 합니까?”
“그리 묻지 않았으면 더 어여쁠 뻔하였다.”
담덕과 나는 마주 본 채 웃음을 흘리고 곧 만찬이 열릴 장소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우리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시녀들이 뒤를 따랐다.
나는 그들과의 거리를 가늠한 뒤 담덕에게 작게 속삭였다.
“이곳 성주는 소노부 사람이라 하지 않았어?”
“그랬지.”
“한데 어찌 이리 우리를 환대해? 애초에 해씨의 고추가는 네가 도압성에 가는 것도 반대했다고 했었는데.”
담덕이 고개를 끄덕였다.
태왕이 태자를 도압성에 보내 병사들의 사기를 돋울 것이라 말했을 때, 고추가가 크게 반발하여 싸움이 났던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왕가가 전선에 사람을 보내 격려한다는 것은 그곳의 주둔이 길어질 것이라는 뜻이니, 적자를 그곳에 둔 소노부의 고추가로서는 화가 날 만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태왕은 굴하지 않고 담덕을 도압성으로 보냈다. 그 결정에 고추가의 분노가 대단했었다.
한데 그의 사람이 이처럼 우리를 환대하다니. 참으로 묘한 상황이었다.
“눈앞에 태자가 있으니 어떻게든 대접을 해야겠다는 생각인지, 다른 속셈이 있는 건지…… 그걸 모르겠다.”
담덕도 머리가 복잡한 눈치였다. 차라리 홀대를 하였다면 마음이 편했을 텐데 성주의 환대가 과했다.
“잘 대접해 주는 척하고는 만찬을 엉망으로 준비했을 수도 있잖아. 긍정적으로 생각해보자.”
나의 위로 아닌 위로에 담덕이 고개를 내저었다.
“우습다. 만찬이 엉망이길 바라야 하다니.”
어이없는 상황을 한탄하며 걷다 보니 곧 만찬 장소에 도착했다. 우리의 바람과 달리 만찬 자리는 훌륭했다. 기쁜 일인지 나쁜 일인지 모를 상황에 나와 담덕이 애매하게 웃으며 자리를 찾아 앉았다.
지설과 태림은 이미 도착해 있었다. 병사들도 말석에 앉아 멀뚱히 만찬이 시작되길 기다리고 있었다.
담덕이 성주의 옆에 앉자 비로소 만찬이 시작되었다.
“오시는 길은 어떠셨습니까? 궁에 사시던 전하께는 길이 아주 험했을 텐데요.”
성주가 담덕의 잔에 술을 따르며 물었다. 그는 술이 썩 내키지 않는 눈치였지만 주인이 내놓는 술을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었다.
“길이 어디든 별다른 것 있겠소. 편하게 왔으니 너무 염려 마시오.”
“편안하셨다니 다행입니다. 앞으로 또 몇 날을 더 가야 도압성에 닿을지…… 한동안 날씨도 궂을 것 같습니다만.”
성주가 문밖을 향해 눈을 돌렸다. 굳게 닫혀 있었지만 조금 전부터 요란하게 비 내리는 소리가 들려온 참이었다.
“하루 이틀에 그칠 비가 아닙니다. 연가의 아가씨도 계시는데 비 오는 날씨는 피하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자네가 오래갈 비인지는 어찌 아나? 모두 하늘의 뜻이거늘.”
“한 지역에 오래 살다 보면 그 땅의 지혜를 체득하는 법이지요. 이맘때쯤이면 지독하게 비가 내립니다. 사흘 정도 앞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한바탕 쏟아붓고 나면 하늘이 아주 맑아지지요.”
성주가 술이 든 잔을 들어 올리자 담덕도 그를 따라 잔을 들어 올린 후 술로 입을 축였다.
“하여 드리는 말씀이온데, 비가 그칠 때까지 이곳 수곡성에 머무르심이 어떻겠습니까.”
“이곳에?”
“예. 어차피 급하지 않은 여정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굳이 빗속을 뚫고 떠나실 이유가 없잖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성주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떨어졌다. 귀한 아가씨가 비가 쏟아지는 여정을 견딜 수 있겠느냐는 눈이었다.
“……그건 나도 생각해 보지.”
성주를 따라 나를 슬쩍 바라본 담덕의 눈이 지설을 향했다. 이번 여정의 길은 모두 지설이 짰으니 그의 의견이 중요했다.
지설과 담덕이 눈짓으로 의견을 주고받는 사이 밖에서 천둥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성주의 말처럼 금방 그칠 비가 아니었다.
걱정스럽게 문 너머를 바라보고 있으니 기다렸다는 듯 문이 벌컥 열렸다. 열린 문 사이로 비에 푹 젖은 채 투구를 눌러쓴 장수 두 명이 서 있었다.
평화로운 만찬에 등장한 불청객에 지설과 태림이 검을 뽑아 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누구냐.”
지설이 날카롭게 물었다. 하지만 문 너머의 사람들은 동요하지 않고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안으로 들어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전하.”
안으로 들어선 장수가 담덕 앞에 서 투구를 벗었다. 드러난 얼굴에 담덕이 아닌 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오라버니?”
분명히 제신이었다. 놀란 내 목소리에 제신이 고개를 돌려 씨익 웃었다.
“너도 참으로 오랜만이다, 우희야.”
“혼자만 그리 반가운 인사를 하는 건가?”
제신의 옆에 있던 장수도 투구를 벗었다. 그 안에는 떠나는 날과 마찬가지로 웃는 낯을 한 운의 얼굴이 있었다. 그의 얼굴을 본 담덕의 입꼬리가 굳었다.
“소노부 해씨의 장자 운이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운은 아랑곳 않고 담덕에게 인사를 올렸다. 담덕이 손을 들어 인사를 받자 그가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어찌 이곳에 두 사람이 있지?”
담덕의 질문에 제신이 입을 열었다.
“얼마 전 태자 전하께서 도압성에 오신다는 전갈이 도착했습니다. 장군께서는 저와 운을 보내어 태자님 일행을 마중하라 하셨는데, 오는 길에 비를 만나 수곡성에 쉬어 갈까 했더니 마침 태자님 일행이 여기에 머무른다지 않습니까. 반가운 마음에 실례인 것을 알면서도 만찬 중에 들어오고 말았습니다.”
“장군께서 과한 친절을 베푸셨다. 마중할 사람을 보내실 것까지는 없으셨는데.”
“오랜만에 국내성에서 사람이 오니 기쁘셨던 게지요.”
그렇게 말하는 제신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결국 태자인 담덕이 아닌 내가 걱정되어 보낸 사람들이라는 뜻이었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성주, 두 사람을 위한 자리도 마련해 주겠소?”
“물론 그리해야지요.”
성주의 지시에 금세 두 사람의 자리가 만들어졌다. 제신은 자리가 만들어지자마자 빠르게 내 옆자리를 차지했다.
“오라버니.”
“우희야.”
4년 만에 만나는 오라비의 얼굴을 마주하니 가슴이 먹먹했다. 제신도 마찬가지였는지 그도 내 이름을 부르고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가 내 두 손을 붙잡으며 겨우 말을 꺼냈다.
“그간 많이 자랐구나. 내가 떠날 때만 해도 훨씬 작았는데.”
“그럼요. 4년이나 지났는데 저도 자라지요.”
“지내기는 어떠하냐? 백부님과 서가 잘해 주던?”
“너무 잘해 주셔서 탈입니다. 아버지와 오라버니를 두고 홀로 편히 사는 것 같아 마음이 늘 불편했어요.”
“마음 불편할 정도로 편하였다니 마음이 놓인다. 그 말을 들으시면 아버지께서도 안심하실 거야.”
그간의 이야기를 하느라 눈앞의 음식에는 눈길도 주지 않는 우리를 보며 운이 고개를 내저었다.
“누구는 누이가 와서 참으로 좋겠다. 이 좋은 음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그리 좋아?”
운은 말로는 타박을 하면서도 나와 제신 앞에 음식을 놓아 주었다.
“먼저 식사부터 하지? 이야기를 나눌 시간은 앞으로 더 많으니까.”
“그래. 맞다, 우희야. 험한 길을 달려와 배가 고플 터인데 식사부터 해야지.”
제신이 그제야 내 손을 놓았다. 그는 평소 내가 좋아하던 음식들을 찾아내 내 앞에 놓아 주며 잔뜩 들뜬 얼굴이었다.
“지금 도압성 상황은 어떻습니까?”
나와 제신의 대화가 마무리되자 지설이 운에게 물었다. 머리 역할을 하는 지설에게는 상황 파악이 제일 중요한 임무였으니 당연한 순서였다.
“늘 똑같습니다. 마무리되나 싶으면 또 백제 놈들이 쳐들어오는 통에 늘 긴장 상태죠. 게다가 흉년이 겹치는 바람에 보급도 시원찮고…… 여러모로 상황이 좋지는 않습니다.”
“역시 흉년이 문제인가요?”
“그래도 장군께서 워낙 경험이 많으신 분이라 병사들을 잘 다독여 주고 계십니다. 하지만 배를 곯는 건 큰 문제이니 지금 상황이 계속되면 아무리 장군이라 하셔도 헤쳐 나가기 힘드실 겁니다.”
“태왕께서도 그걸 걱정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저희를 보내신 거고요.”
지설의 말에 운의 눈이 담덕을 향했다.
“지금 전선에 있는 병사들에게 가장 필요한 건 왕가의 격려가 아니라 당장 먹을 곡식과 몸을 따뜻하게 할 옷입니다.”
말 속에 날카로운 구석이 있었다. 지설이 못마땅한 듯 미간을 찌푸렸지만 담덕은 동요하지 않고 차분하게 답했다.
“충분히 알고 있으니 걱정 마라. 곡식과 의복을 조달할 수 있도록 인근 상인들과 이야기를 해 두었으니 자금을 치르면 곧바로 필요한 물품을 내어줄 거다.”
담덕의 설명에 운이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장군을 비롯한 휘하 병사들 모두 태왕 폐하와 태자 전하의 은덕에 감사드릴 겁니다.”
분위기가 풀어지자 이번에는 성주가 나섰다.
“두 도련님께서도 저희 성에 잘 오셨습니다. 태자님 일행과 함께 도압성으로 떠나실 생각이십니까?”
“그렇게 생각을 하고 온 것입니다만…… 언제쯤 출발할 것으로 생각하고 계십니까?”
제신이 먼저 담덕의 의견을 구했다. 하지만 담덕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성주가 말을 가로챘다.
“태자님께서는 한시라도 바삐 도압성에 닿고자 하시나, 두 분께서도 아시다시피 이 비가 보통 비가 아닙니다. 빗속을 뚫고 도압성까지 가기는 힘드실 듯하여 비가 그칠 때까지만이라도 이 수곡성에 머무르심이 어떨까 말씀을 올린 참이었습니다.”
“그렇습니까.”
제신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담덕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하겠느냐는 얼굴이었다.
“일정 문제는 만찬 후에 나와 지설, 그리고 도압성에서 온 두 사람이 함께 모여 상의해 보도록 하지. 성주의 제안은 고마우나 도압성의 상황이 시급하다면 비를 뚫고 가는 것 정도야 무슨 문제겠나.”
“하지만…….”
“성주, 태자 전하께서 이미 뜻을 말하셨잖소.”
지설이 성주의 말을 끊었다.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던 성주의 입꼬리가 순간 파르르 떨렸다.
“예. 제가 태자 전하를 오래 모시고 싶은 마음에 조급하게 굴었습니다. 실책을 용서하십시오.”
“충정에서 비롯한 조급함임을 알고 있어. 너무 마음 쓰지 말게.”
담덕이 짧게 성주의 사죄를 받아들였다. 성주는 애써 떨리는 입꼬리를 진정시키며 술을 한 모금 들이켰다.
그런 성주를 운이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성주도 그 시선을 느꼈는지 두 사람의 눈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분위기가 미묘했다. 나는 두 사람을 주시하며 태연한 척 앞에 놓은 고기를 입안에 넣었다.
수곡 성주가 소노부 사람이라 했으니 해씨의 장남인 운과도 당연히 아는 사이일 것이다.
하지만 서로를 바라보는 눈이 같은 집안 사람이라기엔 그다지 살가워 보이지 않았다.
시선은 상당히 일방적이었다. 운을 계속 주시하는 성주와 달리 운은 눈이 마주친 이후 성주 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서로를 의식하고 있다는 건 똑같았다. 성주는 쫓고, 운은 도망치는 말 없는 기 싸움 끝에 결국 성주가 운을 불렀다.
“운 도련님도 오랜만에 뵙습니다. 지난번 국내성에서 도압성으로 내려가실 때 잠시 뵌 후 처음이지요?”
말까지 걸어왔으니 계속 성주를 무시하던 운도 더 이상 피할 수가 없었다.
“예. 몇 년 전에 뵙고 처음이군요.”
운이 입에 가져가려던 술잔을 내려놓으며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벌써 몇 해가 흘렀습니까?”
운의 대답에 성주가 과장스럽게 놀란 얼굴을 했다.
“장군께서 전쟁터에 오래 머무른 병사들을 국내성으로 귀환시키셨다던데…… 어찌 해씨의 도련님에게는 그 순서가 돌아오지 않는단 말입니까.”
묘한 비난이 섞인 어조였다. 절노부 사람인 아버지가 운이 소노부의 사람이라 귀환을 막고 있다는 듯한 말에 제신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것은…….”
운이 성주의 말에 반박하려는 제신의 어깨를 잡아 그의 말을 막았다. 자신이 해결하겠다는 뜻이었다.
“성주, 도압성에는 내가 자처해서 남은 것이니 장군을 탓할 이유가 없습니다. 장군께선 벌써 몇 번이나 제게 국내성으로 가도 좋다 하셨으니까요.”
“도련님께선 집이 그립지 않으십니까? 고추가께서 도련님의 귀환을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계신데요.”
“저라고 집이 그립지 않겠습니까. 사실 도압성에 있는 모두가 집이 그립겠지요. 하지만 적을 앞에 두고 귀환하는 건 대고구려 용사의 자존심이 허락지 않더군요. 제 자존심이 대단하다는 건 성주께서도 아실 겁니다. 고집은 자존심보다 더 세고요.”
말을 마친 운이 자리에서 일어서 벗어 두었던 투구를 집어 들었다. 투구에서 떨어진 물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아무래도 제가 낄 만찬이 아닌 것 같습니다. 먼 길을 달려오신 태자님을 위한 자리가 아닙니까. 제가 있으면 여러모로 분위기가 이상해질 것 같군요.”
뼈가 있는 운의 말에 성주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를 따라 운의 얼굴에서도 서서히 미소가 사라졌다.
망설임 없이 성주를 떠난 운의 눈이 이번에는 담덕을 향했다.
“먼저 자리를 떠나게 되어 송구합니다. 일정 문제는 제신이 잘 알고 있으니 그와 논의하시면 될 겁니다. 그럼 저는 이만.”
허락을 구하는 말이 아닌 통보였다. 일방적인 사죄만 남기고 운이 떠나자 순식간에 내부의 분위기가 차가워졌다.
가장 당황한 사람은 성주였다. 그는 운이 이렇게 자리를 떠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는지 입꼬리를 씰룩대며 운이 나선 문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풍경을 모두 지켜본 담덕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무래도 오늘은 좋은 연회를 즐길 날이 아닌가 보군. 나도 그만 일어나지.”
담덕을 따라 병사들이 엉거주춤 의자에서 엉덩이를 뗐다.
양손 가득 음식을 쥔 그들이 안타까운 눈으로 담덕과 음식을 번갈아 보았다. 오랜만에 맛보는 따뜻하고 기름진 음식을 얼마 먹지도 못하고 일어서는 것이 퍽이나 아쉬운 모양이었다.
다행히 뒤따른 담덕의 말이 그들의 아쉬움을 달래 주었다.
“지설과 태림, 제신은 나와 함께 나가서 일정을 논의하고, 나머지는 여기 남아 만찬을 계속 즐기게. 성주가 애써 차려 준 음식들이 아닌가.”
“예, 태자님!”
병사들이 씩씩하게 대답하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성주의 눈치를 살폈으나, 그는 운이 문을 박차고 나갈 때와 달리 담담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저는 차를 준비해 올리라고 전하지요. 이야기를 나누시려면 차가 필요하실 겁니다.”
“부탁하지.”
“태자님의 방으로 보내겠습니다.”
성주가 인사하고 방을 나서자 지설이 머리를 감싸 쥐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제대로 건드렸군요. 성주의 심기를 거슬렀으니 이곳에 며칠 머물러야 한다면 골치 아프게 됐습니다.”
“최대한 이곳에 머무르지 않는 쪽으로 생각해야겠지. 애초에 소노부와 연이 닿은 자의 성에서 환대를 받으며 오래 지낼 계획은 없었으니까.”
“이런 매서운 비도 저희 계획에는 없었습니다. 수곡성에 머무르는 문제는 제신 님과 논의를 나눈 후 결정할 일이니 벌써 단언하지 마십시오.”
“그건 나도 안다. 하지만 성주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비난은 부당하군. 성주에게 시비를 건 사람은 내가 아니라 해운이야. 탓하려거든 그를 탓해라 지설.”
“그거야 그렇지만….…”
담덕이 성주와 운이 나간 뒤 아직도 열려 있는 문을 바라보았다. 밖으로 쏟아지는 빗줄기가 여전히 심상치 않았다.
* * *
담덕과 제신이 일정을 논의하기 위해 자리를 떠난 뒤에도 만찬은 계속되었지만, 병사들 틈에서 홀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있을 기분은 들지 않았다.
나는 떠들썩한 병사들 틈을 조용히 빠져나와 성주가 내어준 방으로 돌아왔다. 등불로 밝혀진 실내는 아득해서 금방이라도 잠이 밀려올 것 같았다.
하지만 이대로 잠들 수는 없었다. 담덕과의 이야기가 끝나고 난 뒤 제신이 내 방으로 찾아오기로 되어 있었다. 몇 년 동안 쌓인 이야기를 잔뜩 풀어내야 했으니 하루의 긴 밤도 턱없이 부족할 터였다.
제신이 오기를 기다리며 나는 국내성에서부터 가져온 약재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국내성에서부터 몇 번이나 상태를 살펴 부족한 것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무엇이라도 집중할 일거리가 필요했다.
약재 점검에 집중하고 있으니 바람이 불 때마다 바깥 회랑을 향해 난 창이 요란하게 흔들렸다. 아무래도 고정이 잘못된 모양이었다.
처음에는 참고 넘겼지만 한참이나 덜컹거리는 소리가 신경을 건드리자 약재 정리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결국 약재에서 손을 놓고 창가로 걸음을 옮겼다.
역시나 창을 고정하는 걸쇠가 반쯤 풀려 있었다. 걸쇠를 다시 걸기 위해 손을 움직이는데 밖에서 그림자가 일렁였다.
벌써 오라버니가 오셨나?
의아한 마음에 닫으려던 창을 살짝 열었더니 누군가가 정원을 향한 난간에 걸터앉아 있었다. 자세히 얼굴을 살피니 만찬 도중 투구를 들고 나섰던 운이 그때의 모습 그대로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기…… 여기서 뭐하십니까?”
내 목소리에 밖을 바라보던 운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복도를 사이에 두고 있었지만 방 안에서 새어 나온 등불에 그의 웃고 있는 얼굴이 선명히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운이 손에 들고 있던 투구를 가볍게 흔들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기세 좋게 나오기는 했는데 생각해 보니 갈 곳이 없더군. 이리저리 방황하다 풍경이 좋아 이곳에 자리를 잡았는데, 그대의 방 앞이었나?”
“그 꼴로 계속 밖에 계셨단 말입니까?”
나는 눈을 크게 떠 운의 상태를 살폈다. 비에 푹 젖은 채 서늘한 바깥에 있었던 탓인지 그의 얼굴이 창백해 보였다.
“언제까지 밖을 떠돌 셈이십니까?”
“제신이 나를 찾으러 올 때까지?”
운이 태연하게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제신이 하루 지낼 방을 얻어 자신을 찾으러 올 때까지 기다리려면 족히 한 시진은 걸릴 텐데, 그때까지 밖을 떠돌겠다는 말이었다.
“……참으로 대책 없으십니다. 사람이 늘 그리 태평하고 무모하십니까?”
“마음이 힘든 것보단 몸이 힘든 쪽이 편하지 않아?”
운이 나른하게 웃었다. 농담 같은 가벼운 말투였지만 눈빛은 썩 진심처럼 느껴졌다.
이 사람에게는 몸이 힘든 것이 더 편할 정도의 고민이 있는 걸까.
한없이 가벼운 평소의 말투나 웃음을 보면 상상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나는 운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 창을 닫았다.
“그런 말은 정말로 몸이 힘들어 본 적 없어서 할 수 있는 겁니다. 견디지 못할 만큼 몸이 괴로워지면 지금 한 그 말, 크게 후회하실걸요!”
창에 대고 소리치며 고리를 걸어 잠그니 창 뒤로 운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대로 걸음을 옮겨 입구의 문을 활짝 열었다. 왼쪽으로 돌아 나와 조금 전 창을 통해 바라본 자리로 향하니 운이 조금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들어오십시오.”
“어디로?”
“제 방으로 들어오시라고요. 오라버니와 태자님의 이야기가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데 그때까지 계속 밖을 떠돌겠다는 겁니까? 이야기가 끝나면 오라버니께서 제 방으로 오실 겁니다. 그때까지 안에서 기다리세요.”
“날 네 방에 들여보내 준다고? 이 야심한 시각에?”
운이 묘하게 웃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위는 어둠으로 물들어 고요했다. 주변을 지나는 사람도 없는 야심한 시각임은 분명했다.
“어찌 내게 이리 친절을 베푸는 것일까, 절노부 연가의 아가씨께서?”
“그쪽은 제 오라버니의 오랜 친구입니다. 제 아버지의 명에 따라 열심히 싸우는 성실한 부하고요. 그쪽에게 친절을 베푸는 데 이 이상의 이유가 필요한가요?”
“그런가? 그대에게 나는 오라비의 친구, 아버지의 부하인가.”
잠시 멍한 얼굴로 앉았던 운이 뭐가 그리 재밌는지 곧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어찌 사람을 앞에 두고 웃습니까?”
“웃음이 나는 걸 어찌하란 말이야. 네가 나를 웃게 했으니 네 탓이 크다.”
“제가 뭘 했다고 그러시는지…….”
“그러니까 말이다. 네가 무얼 했다고 내가 지금 이리 우습지?”
운의 실없는 소리를 계속 듣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나는 차가운 공기에 서늘해지는 팔을 두 손으로 감싸며 먼저 방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무튼 들어오십시오. 안은 따뜻합니다.”
어서 들어오라 재촉하며 운을 바라보니, 그가 문밖에 멈춰 선 채 답지 않은 어색한 표정으로 방 안을 훑어보고 있었다.
“이상한 거 없습니다. 그러지 말고 그냥 들어오십시오.”
“정말 들어오라고?”
“그럼 농담인 줄 아셨습니까?”
눈을 깜빡이며 운을 보니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어찌 이리 사내를 쉽게 방에 들여?”
“지금 그쪽은 사내가 아니라 갈 곳 없어 빗속에서 방황하는 강아지입니다. 추위에 떨고 있는 모습이 측은하여 들어오라 한 것이니 마음 바뀌기 전에 어서 들어오세요.”
“내가 언제 떨었다고 그래?”
다시 한번 재촉하자 운이 투덜거리면서도 방 안으로 들어섰다.
운이 안으로 걸음을 옮길 때마다 갑옷에서 물이 왈칵 쏟아져 바닥이 금세 물로 젖었다. 그의 발밑에 생긴 작은 물웅덩이를 질린 얼굴로 보았더니 운이 난처하게 웃었다.
“이래서 밖에 있었던 건데.”
“얼마나 푹 젖어 있었던 건지……. 이 꼴을 하고서 밖에 있을 마음이 드시던가요? 우선 거기에 멈추세요.”
저 상태로 안쪽에 왔다가는 방이 온통 물바다가 되고 말 터였다. 나는 운을 저지하며 그를 문 앞에 세웠다.
“갑옷은 입구에 벗어 두는 게 좋겠어요. 투구도 같이 두시고요.”
운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투구를 문 앞에 내려놓았다. 하지만 갑옷은 혼자 벗을 수 없었다.
갑옷을 벗으려면 등 뒤의 끈을 풀어야 하니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수적이었다. 여기서 그걸 도울 사람은 나 하나뿐이었다.
“돌아서세요. 갑옷 풀어 드릴게요.”
“그대는…….”
운이 미간을 찌푸리며 웃었다. 애매한 얼굴에 고개를 갸웃거리니 운이 금세 표정을 풀고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거 알아? 그대가 사람을 가끔 한심한 어린애 취급하는 거.”
“……제가요?”
속으로는 뜨끔했지만 겉으로는 태연한 척 되물었다. 지나칠 정도로 선명한 전생의 기억 탓인지 나는 종종 나이를 잊고 어른의 입장에서 상대를 대할 때가 있었다.
그런 나를 누군가는 애어른 같다고 했고, 누군가는 어른스럽다고 했다. 운은 아마 전자의 의미로 느낀 것 같았다.
“어린애면 어린애답게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있으면 좋잖아. 벌써부터 머리 굴리면 인생이 피곤해질걸.”
언젠가 내가 담덕에게 했던 말과 비슷했다. 하지만 그때의 담덕은 열둘이었고, 지금의 나는 열여섯이었다.
열여섯 역시 충분히 어린 나이였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있을 만한 나이는 또 아니지 않나.
“저도 이제 열여섯입니다. 한 사람의 성인으로 피곤한 인생을 시작해 볼 나이가 되었죠.”
턱을 치켜드는 나를 보며 운이 웃었다.
“계산은 정확히 해야지. 아직 탄일도 안 지났으면서 무슨 열여섯이야?”
“제 탄일을 아십니까?”
의외의 말에 눈을 크게 뜨니 운이 머쓱한 얼굴로 돌아섰다.
“제신이가 매일같이 누이 이야길 떠들고 다니는데 모를 리가 있나. 아마 도압성 병사들 전부가 그대의 탄일이 언제인지 알고 있을걸.”
“전쟁터까지 나가서 그런 이야기나 늘어놓으셨단 말입니까?”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에게까지 내 이야기가 죄 퍼졌다니 민망함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전쟁터니까 그런 이야길 늘어놓는 거야. 생과 사가 오가는 위험한 곳에선 모두가 소중한 사람 이야기를 하거든.”
“그럼 그쪽은 누구 이야길 하셨습니까?”
나는 그렇게 물으며 운의 갑옷을 고정한 끈을 잡아당겼다. 그런데 쉽게 풀릴 줄 알았던 매듭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찌나 단단히 묶었는지 아무리 힘을 줘도 손이 헛돌았다.
조금만 더 힘을 쓰면 풀릴 것 같은데.
뒤에서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나의 기색에 운이 슬쩍 뒤를 돌아보곤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 열여섯이라고 어른이 다 되었다더니…… 겨우 이 매듭 하나 풀지 못해 낑낑대는 거야? 어디 이래서야 한 사람 몫을 제대로 할는지.”
“매듭을 너무 단단히 묶어서 그렇습니다. 어떤 무식한 자가 이리 끈을 단단히 묶었답니까?”
“끈을 이런 식으로 묶은 그 무식한 자가 바로 네 오라비인데.”
“…….”
운의 대답에 변명과 투덜거림이 입안으로 쏙 들어갔다. 그의 입에서 다시 한번 웃음이 터졌다.
나는 입을 꾹 다물고 매듭에 집중했다. 민망한 마음을 담아 온 힘을 다했더니 아슬아슬하던 매듭이 풀어졌다.
“못 풀겠으면 그냥 두고……”
“됐습니다! 풀었어요!”
신이 나 고개를 번쩍 드는 순간 운이 몸을 틀며 돌아섰다. 덕분에 서로의 얼굴이 코앞에서 마주쳤다.
당황한 운이 빠르게 몸을 뒤로 뺐지만 내가 매듭을 풀기 위해 끈을 잡고 있는 상태였다. 나는 당연한 듯 그에게 끌려가 앞으로 몸이 기울었다.
“엇!”
뒤늦게 끈을 놓았지만 몸은 이미 기울어 운의 품으로 안착했다. 푹 젖은 갑옷에 얼굴을 박았더니 찝찝함과 고통이 동시에 밀려왔다.
“……뭐하는 것이냐, 너는.”
머리 위에서 운의 황당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두 손으로 내 어깨를 붙잡아 거리를 벌리고는 고개를 숙여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제대로 부딪혔구나. 이마가 빨갛다.”
“그러게 갑자기 돌아보시면 어쩝니까? 뒷걸음질은 또 왜 치셨고요.”
통증이 밀려오는 이마를 매만지며 미간을 찌푸렸더니 운이 내 어깨를 놓고 다시 뒤돌아섰다.
“그런 못난 얼굴을 가까이서 보면 누구라도 놀라서 뒷걸음질 치지.”
“뭐라고요?”
“됐다. 화낼 시간에 갑옷이나 마저 벗겨라. 이러다 제신이가 올 때까지 갑옷도 못 벗겠다.”
“사람이 어찌 이리 뻔뻔하십니까?”
“뻔뻔해야 살아남는 세상 아니더냐. 나는 세상에 순응하며 사는 인간이라 어쩔 수가 없다.”
“말이나 못하면 얄밉지나 않지요.”
변하지 않은 운의 뻔뻔함을 보니 비로소 그와 다시 만났다는 실감이 났다.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그의 갑옷 끈을 마저 풀었다.
운이 갑옷을 벗어 바닥에 두었다. 안에 입은 옷은 예상대로 푹 젖어 있었다. 물을 머금은 옷을 더 입고 있는 건 무리였다.
나는 국내성에서부터 가져온 가방을 뒤져 옷 한 벌을 찾아냈다. 제신에게 주려고 가져온 옷이었으나 더 급한 사람이 있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 사람이 운이라면 제신도 기꺼이 새 옷을 양보할 것 같았다.
“이걸로 갈아입으십시오.”
“제신이의 것 아니냐?”
운이 한눈에 옷의 정체를 알아챘다. 제신이 좋아하는 색에 제신이 좋아하는 복식이니 그가 알아보지 못하는 게 더 이상했다.
“맞습니다. 오라버니와 체격이 비슷하시니 옷도 얼추 맞을 겁니다.”
“국내성에서부터 소중히 가져온 것인데 내게 주어도 되겠느냐?”
“저야 당연히 아쉽지요. 하지만 주는 제 마음보다 받을 오라버니의 마음이 더 중합니다. 그쪽이라면 오라버니께서 기꺼이 옷을 양보하실 테니 저도 그리해야지요.”
운이 나와 내 손에 들린 옷을 빤히 바라보았다.
한참 말이 없던 그가 옷을 받아 들며 묘한 얼굴을 했다.
“고맙다. 내 나중에 제신이에게 좋은 옷 한 벌 선물하마.”
“네. 그리해 주세요. 그건 제가 국내성에서부터 가져온 옷이니 그 수고까지 쳐서 아주 좋은 옷으로 돌려주셔야 합니다.”
“흥정을 잘하는 건 여전하구나.”
운이 웃으며 옷을 벗기 시작했다. 예고 없는 탈의에 당황해서 몸을 돌리니 운이 웃음을 터트렸다.
“뭘 이 정도에 놀라고 그러느냐? 그냥 보아도 상관없는데.”
“제 의사는 생각도 않으십니까? 그런 걸 봐서 어디에 씁니까?”
“후회하지 않겠어? 오늘 같은 기회가 또 오진 않을 것이다.”
“평생 안 와도 됩니다!”
“그러다 평생 사내의 몸을 보지도 못하고 죽으면 어쩌려고?”
“그럴 일 없습니다.”
이미 상의를 벗은 담덕의 맨몸을 보지 않았던가. 당당한 나의 대답에 운이 잠시 말이 없더니 곧 의미심장한 웃음을 흘렸다.
“그것 참…… 재미있는 대답이로구나.”
“재밌긴 뭐가요?”
“왜 재밌지 않겠어? 제신이가 애지중지하는 누이가 아직 열여섯 탄일도 맞이하기 전에 사내의 벗은 몸을 봤다는데.”
“봤다고 말한 적 없습니다!”
항변을 하기 위해 나도 모르게 몸이 돌아갔다. 돌아서는 순간 아차 싶었지만 다행히 운은 거의 옷을 다 입은 뒤였다.
운이 미처 여미지 못했던 상의를 정돈해 끈을 묶으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우리 아가씨께서 누구의 벗은 몸을 본 것일까?”
“봤다고 말한 적 없는데 계속 왜 그러십니까?”
“이것 봐. 지금도 ‘봤다고 말한 적 없다’고 하지 ‘본 적 없다’고는 안 하잖아.”
가볍게 말하면서 핵심을 놓치지 않는 건 여전했다. 할 말이 없어져 입만 오물거리고 있으니 운의 미소가 조금 옅어졌다.
“어울리지도 않는 머리꽂이 비녀를 고르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사내의 몸을 아는 여인이 되었다?”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습니다. 어쩌다 보게 된 것이지 그쪽이 상상하는 이상한 일 때문이 아닙니다.”
똑똑히 보고 이런 취급을 받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심지어 담덕이 옷을 훌렁 벗어 던졌을 때는 날이 어두워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내가 무슨 이상한 상상을 하는데?”
“그…….”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나를 향해 운이 얄궂은 얼굴로 다가왔다. 얼굴색이 훤히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그가 나를 빤히 쳐다보며 얼굴 곳곳을 살폈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보면 이상한 상상이 뭔지도 확실히 아는 듯한데…… 그대에게 이런 걸 누가 가르쳐 준 거야?”
“그런 걸 누가 가르쳐 준단 말입니까? 혹 누가 가르쳐 주었다 한들 그쪽과는 상관없는 일이고요.”
“상관없다니? 그대는 내 소중한 친우 제신이의 누이인데 당연히 신경 쓰이지.”
“친우의 누이를 신경 쓸 시간에 본인의 누이나 신경 쓰십시오.”
누이라고 하니 잊고 있던 영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직도 내 가방에 그녀가 제 오라비에게 주겠다며 맡긴 약재가 있었다.
“말이 나온 참이니 지금 전해 드리겠습니다.”
“무엇을?”
“영이 제게 부탁한 것이 있습니다. 허리의 통증을 줄여 주는 약재와 근황을 담은 서찰입니다.”
나는 가방에 따로 챙겨 두었던 영의 물품을 꺼내 운에게 내밀었다. 그는 상당히 놀란 눈치였다.
“영이? 내 동생 해영?”
“그쪽한테 이런 걸 맡길 다른 영이도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당연히 없지만…… 그대가 어찌 영이를 알아?”
내가 늘 집에만 박혀 지낸다는 영을 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운의 의문은 당연했다. 약방에서 사고처럼 만난 인연이니, 어쩌다 우연이 겹치지 않았더라면 나와 영은 평생을 모르고 살았을지도 모를 사이였다.
“약방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서로 비슷한 점이 많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오라버니들끼리도 친구이고, 서로가 또래이기도 하니 친구가 되기로 했지요.”
“약방에서 영이와 만나? 그 아이가 집 밖으로 나왔어?”
“조금 전부터 제게 계속 질문만 하고 있는 거 아십니까? 어서 서찰이나 읽어 보십시오.”
내 지적에 운이 머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믿기지가 않아 그랬다. 영이 그 아이는 집 밖으로 나서는 일이 거의 없거든.”
“확실히 몸 상태가 좋아 보이진 않더군요. 한데 바깥출입이 불가능할 정도는 아닌 것 같던데요?”
“무리를 하면 밖에 나서는 것도 가능하지만 아버지께서 어지간히 싸고돌아야 말이지. 적당한 외출이 건강에 좋다고 말씀을 드려도 듣질 않으셔.”
“기침을 많이 하던데…… 정확히 어디가 아픈 겁니까?”
“그걸 알면 그 아이가 지금까지 병을 달고 있겠어?”
“의원도 이유를 찾지 못한 건가요?”
운이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명한 의원, 승려, 하다못해 무녀까지, 부르지 않은 자들이 없다. 한데 누구도 그 아이의 병을 고치지 못했어. 그저 나빠지지 않게 약을 쓸 뿐이지.”
거기까지 말한 운이 내가 건넨 서찰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차분하게 영이 쓴 편지에 집중하는 그를 보며 나 역시 깊은 생각에 빠졌다. 영에 대한 일이었다.
소노부 해씨는 고구려에서 제일가는 가문이다. 내가 영의 병에 관심을 가지지 않은 것은, 그처럼 대단한 권력을 지닌 해씨 가문이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녀의 병을 돌봐 줄 사람을 찾을 수 있다 여겨서였다. 그렇다면 굳이 내가 오지랖 넓게 나설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이 땅 곳곳을 수소문해 찾아낸 사람들 중 어느 누구도 영의 병을 고치지 못했다. 해씨 가문이 어중이떠중이를 부르지는 않았을 터. 결국 영의 병이 심상치 않다는 뜻이었다.
국내성에 돌아가면 영의 상태도 한번 살펴봐야겠어.
그렇게 결심하는 사이 서찰을 전부 읽은 운이 나를 불렀다.
“우희.”
“예.”
“영이 이 서찰에 뭐라 썼는지 알고 있어?”
“이미 다 읽으셨으면서 그건 왜 물으십니까?”
“영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썼는데 혹 그대도 아는 이야기인가 해서.”
“재미있는 이야기요?”
나는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영에게서 직접 서찰을 받아 오긴 했지만 그녀가 무슨 이야기를 썼는지는 전혀 몰랐다.
“영은 그냥 안부를 전하는 편지라 하던걸요.”
“그래? 그럼 이게 영 혼자만의 생각이라는 거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서찰을 접어 품 안에 넣는 운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나쁜 이야기라도 적혀 있습니까?”
운의 표정이 좋지 않기에 걱정이 되어 물었더니 그가 선선히 고개를 저었다.
“난 재미있는 이야기가 적혀 있다 했던 것 같은데?”
“그러셨죠. 하지만 표정이 좋지 않으시기에.”
“재미있으면서도 곤란한 이야기라 그렇다.”
“재미있으면 재미있는 것이고, 곤란하면 곤란한 것이지 재미있고 곤란한 이야기도 있나요?”
“세상은 복잡하니 그런 이야기도 있다. 아직 어린 너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운이 씨익 웃으며 내 머리를 헤집었다.
나는 그의 손을 피하며 입을 비죽 내밀었다.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머리를 정돈한 건 오랜만이라 모처럼 예쁜 머리 모양이 나왔는데, 운 때문에 엉망이 되어 버렸다.
“여인의 머리를 이리 헤집는 건 실례입니다.”
“여인? 네가 여인이란 말이야?”
“그럼 제가 사내입니까?”
“사내는 아니지만 여인도 아니다. 덜 여문 꼬맹이 주제에 여인이라니? 아직 한참 멀었다.”
“저도 다 자랐습니다. 4년 전보다 키도 훌쩍 자랐는데요.”
“다 자라서 겨우 요만큼이냐?”
운은 불만스럽게 머리를 정돈하는 내 머리 위로 다시 자신의 손을 얹었다. 이번에 다가온 손은 머리를 헤집는 대신 내 키를 가늠했다.
“내 어깨에 겨우 닿는구나. 이리 작아서 어디 어른이라 할 수 있겠어?”
운이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확연한 키 차이였지만 나도 이 부분에서는 할 말이 있었다.
“제 키는 또래 아이들과 비슷합니다. 그쪽이 지나치게 큰 거라고요.”
“아까부터 계속 하고 싶었던 말인데……”
나의 항변에 운의 미간이 찌푸리며 불만을 토로했다. 하지만 불만의 내용은 내가 전혀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왜 계속 나를 ‘그쪽’이라고 부르느냐? 묘하게 거리가 느껴지는 호칭인데. 그거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럼 그쪽을 뭐라고 부릅니까?”
나의 반문에 운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도 우리 둘 사이의 애매한 관계를 정리할 호칭이 쉽게 떠오르지 않는 모양이었다.
“보십시오. 딱히 부를 호칭도 없지요? 그러니 그쪽을 그쪽이라 부를 수밖에요.”
“아무리 부를 호칭이 없어도 그렇지. 하고많은 것 중에 하필 그쪽이냐? 참으로 야박하구나.”
“그럼 그쪽은 다른 호칭이 생각나십니까?”
이번에도 입을 다물 것이라 생각했던 운이 외려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활짝 웃었다. 장난기가 섞인 웃음에 불안한 마음이 일었다.
“이참에 나도 오라버니라 부르거라.”
“예?”
“그렇잖으냐. 나는 네 오라비의 친구에다 네 친구의 오라비이기도 한데. 오라버니라 부르는 것이 제일 타당하지 않겠어?”
틀린 말은 아니다. 나보다 나이 많은 사내, 제신의 가장 가까운 친구이기도 하니 오라버니라는 호칭이 이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얄미운 얼굴을 보며 오라버니라 부르는 것은 내키지 않는단 말이지.
“자, 운 오라버니, 하고 불러 보거라.”
운이 웃으며 내게 얼굴을 들이댔다. 나는 그의 눈을 피하며 고개를 돌렸다.
“호칭이 뭐가 중요합니까?”
“중요하지는 않지. 그래도 그쪽은 너무하잖아.”
“그럼 차라리 도련님이라 부르겠습니다.”
“그건 거리감이 너무 느껴져서 싫다. 오라버니라고 부르는 게 뭐 그리 어렵다고 이러느냐?”
운이 내가 고개를 돌려 피한 쪽으로 따라와 다시 내 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부담스럽게 반짝이는 눈을 보고 있자니 굳게 닫혀 있던 문이 활짝 열렸다.
“우희야!”
제신의 목소리였다. 고개를 돌려 문을 바라보니 다급하게 달려온 제신이 웃으며 안으로 들어왔다가, 나와 운을 발견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운이 네가 어찌 여기 있어?”
나는 멍하니 선 제신을 이끌어 탁자 앞에 앉히며 상황을 설명했다.
“비에 젖은 채로 방황하고 있기에 잠시 들어와 계시라 했습니다. 오라버니를 기다리고 있다고 하셔서요.”
뒤이어 운이 설명을 추가했다.
“만찬 도중에 뛰쳐나오고 보니 오늘 묵을 방도 안내받기 전이라, 네가 이야기를 끝낼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자 생각했지. 그러다 우희를 만나서 잠시 신세를 졌다.”
“그래?”
상황을 이해했는지 제신이 고개를 끄덕이다 곧 운의 복장을 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한데 옷이 그게 뭐냐? 꼭 내 모습을 보는 것 같다.”
“네 옷을 입었으니 당연하지. 그러는 너는 옷차림이 그게 무엇이냐? 꼭…….”
운이 묘한 얼굴로 제신의 복장을 살폈다. 제신도 운처럼 비에 푹 젖은 갑옷이 아닌 정갈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제신이 입은 옷이 썩 눈에 익었다.
“태자님 옷이네요.”
내 말에 제신이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에 누이와 만나는데 비에 젖은 꼴로 가겠냐며 내어주셨다. 덕분에 내가 분에 넘치게 태자님의 옷도 다 입어 보는구나.”
“잘 어울리세요.”
“그래? 이런 색은 처음이라 어색한데…….”
평소 잘 입지 않는 하얀 옷을 어색하게 내려다보던 제신이 곧 이상한 것을 깨달았다는 양 고개를 번쩍 들었다.
“우희.”
“예?”
“어찌 내게 높임말을 써?”
크게 뜬 눈을 깜빡이던 제신이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혹 오랜만에 만나 어색해서 그러느냐?”
“몇 년 떨어져 있었다고 어색해지면 그것이 가족입니까?”
“한데 어찌 그래?”
의아한 제신의 얼굴에 나는 짐짓 젠체하며 턱을 치켜들었다.
“저도 이제 어른입니다. 그러니 격식과 예의를 갖춰 오라버니를 대해야지요.”
“뭐?”
한껏 우아한 자세를 흉내 내며 인사하는 나를 멍하니 보던 제신이 금세 웃음을 터트렸다. 말 그대로 폭소였다.
“으하하하! 안 어울리게 그게 뭐냐? 격식? 예의?”
“누이가 어른스러워지겠다는데 반응이 그게 무엇입니까?”
“됐다, 됐어. 평소 하던 대로 해라. 어색해서 죽겠다.”
이제 제신은 배까지 잡고 웃어 대기 시작했다. 어른스러운 아가씨 자태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비웃음을 당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안 어울려?”
나는 입을 부루퉁하게 내밀며 탁자에 털썩 걸터앉았다. 4년 전의 모습으로 돌아온 내 모습에 제신이 그제야 웃음을 멈추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오랜만에 만나니 고운 누이라도 되어 볼까 했지.”
“평소의 너도 곱다. 난 일부러 행동을 꾸며내지 않는 평소의 네가 제일 좋으니, 부러 어른스러운 체할 생각도 말아라.”
“어휴. 말 잘 듣고 얌전한 누이가 되어 준대도 싫다니. 참으로 이상한 오라버니야.”
“얌전하고 말 잘 들으면 그게 연우희야?”
제신의 말에 나도 웃음이 터졌다. 서로 마주 보며 웃음을 흘리고 있으니 가만히 우리 남매를 지켜보던 운이 나섰다.
“남매가 오랜만에 만나 할 이야기가 많을 테니 난 이만 자리를 피해 주지.”
“그래. 고맙다.”
제신은 운의 배려를 거절하지 않았다.
“숙소는 성주가 제공해 주었어. 이곳에서 멀지 않다. 정원을 지나 입구 바로 옆의 방이니 쉽게 찾을 수 있을 거야. 혹 잘 모르겠으면 내가 안내해 줄까?”
운이 금방이라도 자리에서 일어설 기세인 제신의 어깨를 눌러 그를 다시 앉혔다.
“모르겠으면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묻지 뭐. 누구든 알려 주지 않겠어? 내일 날이 밝으면 다시 보자.”
“조금 천천히 일어나도 상관없어. 출발이 이틀 후로 정해졌거든. 오랜만에 푹 쉬어도 될 거다.”
“휴식이라. 그것 참 반가운 소식이네.”
운이 웃으며 인사하고 방을 떠났다. 비로소 제신과 나 단둘만 남은 것이다.
“이틀 후에 출발해?”
“응. 아무래도 비가 심상치 않아서. 무리를 한다면 비를 뚫고 갈 수도 있겠지만 모두에게 힘든 길이 되겠지. 성주도 흔쾌히 쉬어 가라 했으니 이곳에 조금 더 머물기로 결론이 났다.”
“성주의 의도를 의심하고 있는 거 아니었어?”
“그래서 더 머무르자 결정한 것도 있다. 도대체 무슨 속셈인지 지켜보자 싶어서.”
성주의 뜻을 모르는 채로 수곡성을 떠나기보다는 그와 정면으로 부딪쳐 보는 쪽을 선택한 것이다. 과연 담덕다운 결정이었다.
“빈틈을 싫어하는 담덕다운 결정이네.”
“그래? 태자님이 그러신 편인가?”
“담덕은 모든 것을 파악하고 있어야 마음이 편한 사람 같아. 그렇게 살면 피곤하지 않냐고 했더니 몰라서 피곤한 게 더 싫다던데.”
어려서부터 불안한 상황 속에 지내 온 탓인지 담덕은 주변 상황에 예민했다. 철저하게 주변 상황을 파악하고 자신의 위치를 정리해 위험을 최소화하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담덕의 전략이었다.
“태자님과 많이 가까워진 모양이다? 존칭 없이 이름도 부르고, 성격도 잘 알고.”
담덕에 대해 이야기하는 나를 제신이 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나와 담덕이 자주 만나는 것이야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격의 없어진 것은 미처 알지 못했던 듯했다.
제신이 국내성을 떠날 때 나와 담덕은 막 친구가 되어 친분을 쌓기 시작하던 시점이었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났으니 그때보다 서로의 사이가 가까워졌음은 당연했다.
“그럼 4년이나 지났는걸. 이젠 정말 친구가 되었지. 그래도 공적인 자리에서는 선을 잘 지키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친구…… 정말 그뿐이야?”
내 대답에 제신이 묘한 웃음을 흘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가늘어진 두 눈이 얄궂기까지 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단순한 친구가 아닌 거 아냐? 오래전 어르신들 사이에서 오갔던 혼인 이야기가 너와 태자님 사이에서도 오갔거나…….”
제신이 조심스럽게 말끝을 흐렸다. 혼인 이야기만 나오면 내가 펄쩍 뛰는 것을 알고 있으니 그도 몸을 사리며 물은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제신의 혼인 이야기가 대수롭지 않았다.
“아직도 그 이야기야? 어르신들 사이에서도 없던 일로 하자 정리가 된 일을 이제 와서?”
“그때와 다를 바가 없단 말이야?”
“그렇지?”
의아한 제신의 눈빛에 내가 더 의아해져 물으니 그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내가 태자님을 보기로는…….”
“보기로는?”
말을 아끼는 제신이 답답해 되물었지만 그는 말이 없었다. 잠시 홀로 생각에 빠져 있던 제신이 곧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네가 아니라면 아닌 것이겠지. 오랜만에 만났으니 우리 이야기나 하자. 도압성에 가면 이리 여유롭게 앉아 이야기를 나눌 시간도 업을 것이다.”
수곡성과 달리 도압성은 말 그대로 전선이었다. 코앞에 백제군을 두고 병사인 제신이 이리 여유를 부릴 시간은 없을 것이 뻔했다.
“그럼 그간 도압성에서 있었던 이야길 들려줘. 소문으로야 많이 들었지만 뭐가 진실인지 모르겠는걸.”
“너는 국내성 이야길 들려주렴. 시골에만 처박혀 있었더니 도시 이야기가 참으로 궁금하구나.”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내가 아는 이야기를 떠들기 시작했다. 그에 화답하듯 제신도 도압성에서의 무용담을 늘어놓았다.
밤은 길었지만 이야기가 더 많았다. 요란하게 쏟아지는 빗줄기를 뚫고 우리 남매는 새벽녘을 이야기로 물들였다.
* * *
나는 길게 하품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늦은 시각까지 제신과 못다 한 이야기를 하고 동이 틀 때쯤에야 잠들었더니 일어나서도 몸이 무거웠다.
비가 쏟아져 날이 어두운 것도 피로에 한몫했다. 성주가 장담한 대로 비는 굵어진 채로 멈추지 않고 이어졌고, 고요함에 묻힌 저택은 사람을 나른하게 만들었다.
“어?”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다 창을 다시 닫으려던 나는 탁자 한구석에 놓인 작은 보따리를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영이 운에게 전해 달라 부탁했던 약재가 든 보따리였다.
어제 급히 나가더니 서찰만 챙기고 갔나 보다.
나는 보따리를 집어 들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운의 방이 정원을 지나 입구 바로 옆의 방이랬지.
잠시 고민하던 나는 그대로 방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회랑을 따라 정원을 쭉 돌아 나가니 금세 입구가 눈에 들어왔다. 입구에 붙은 방은 하나뿐이어서 나는 쉽게 운의 숙소를 발견할 수 있었다.
“계십니까?”
조심스럽게 안을 향해 외쳤지만 대답이 없었다.
“안에 안 계십니까?”
혹시 듣지 못했나 싶어 소리를 더 높였지만 대답이 없는 것은 똑같았다.
나는 문이라도 두드려 볼 요량으로 문에 손을 얹었다. 그런데 가볍게 쥔 주먹이 문에 닿기 무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