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산길
주통촌을 떠난 뒤로 병사들은 부쩍 내게 살가워졌다. 특히 형오는 나를 생명의 은인이라 추켜세우며 틈만 나면 내 곁에 붙어 이것저것 챙겨 주지 못해 안달이었다.
그러는 동안 나흘이 더 지나 일행은 험한 산길에 접어들었다. 둘러 가면 더 편한 길이 있지만 일정을 줄이자니 산을 지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산길을 지날 겁니다. 여러모로 힘드시겠지만 산을 가로질러 가야 일정이 줄어드니 이해해 주십시오.”
나와 담덕 옆에 다가온 지설이 앞으로의 일정을 설명했다. 이런 산속에 마을이 있을 리 없으니 오늘은 꼼짝없이 산에서 야영을 하게 생겼다.
원정에 익숙한 병사들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산은 변수가 워낙 많아 경험 많은 용사들도 어려워한다고 했다.
그런 걸 알려 준 사람은 형오였다. 그는 식사를 위해 잠깐 멈춰 설 때마다 쪼르르 다가와 내가 모르는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대부분이 전쟁터에 원정을 나갔을 때의 일화였다. 절노부와 국내성에 얌전히 박혀 살았던 나로서는 모두 신기한 이야기들이라 흥미로운 기색을 비쳤더니, 그 이후로 형오는 대단한 수다쟁이가 되었다.
“아가씨! 이쪽에 앉아 쉬십시오.”
이번에도 야영 준비를 위해 말에서 내리자마자 형오가 제 겉옷을 벗어 바닥에 깔았다. 그 모습에 지설이 황당한 얼굴로 그의 뒤통수를 내리쳤다.
“네 더러운 옷에 앉느니 바닥이 더 깨끗하겠다. 어디 출발 이후에 한 번도 빨지 않은 옷 위에 사람을 앉혀?”
“별로 냄새도 안 납니다!”
형오가 바닥에 깐 옷에 코를 박고 억울함을 호소하자 지설이 혀를 끌끌 찼다.
“냄새가 안 나면 깨끗한 것이냐? 거참 요상한 기준이구나.”
한껏 형오를 비웃은 지설이 내 눈치를 살피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무엇보다 아가씨는 네 동무가 아니다. 어찌 틈이 날 때마다 아가씨 곁에서 떨어질 줄을 몰라? 아무 말 않으신다고 너무 친한 척 굴지는 마라. 엄연히 신분이 다른 분이시니.”
“예에…….”
지설의 훈계에 형오가 시무룩한 얼굴로 바닥에 깔았던 제 옷을 집어 들었다. 축 처진 어깨로 옷을 털고 있는 것을 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지설 님. 너무 그러지 마세요. 제가 이야기 듣는 게 즐거워 그냥 둔 것입니다.”
“그것 보십시오! 아가씨께서 괜찮으시다는데요.”
내가 제 편을 들자 형오가 순식간에 기운을 차렸다. 보란 듯이 자신을 향해 턱을 치켜드는 형오를 보며 지설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가씨께서도 너무 저 녀석을 받아주지 마십시오. 버릇 나빠집니다.”
“도압성에 도착할 때까진 계속 얼굴을 보고 가야 하는데 조금 가까워지면 어때요.”
“저희에게는 이번 도압성 일정이 전부가 아닙니다. 아가씨께서는 이 녀석들을 흔들어 놓고 떠나시면 그만이지만, 저희는 남아서 계속 기강을 잡아야 합니다. 정도를 지켜 주셨으면 합니다.”
지설의 단호함에 형오의 얼굴에서 점점 미소가 사라졌다. 이렇게 정론을 들고 나오니 나로서도 할 말이 없었다.
그의 말처럼 나는 이들의 세상에 잠깐 머물렀다 떠날 사람이었다. 잡혀 있는 질서를 흔드는 건 실례였다.
“그런 식으로는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제가 잘 몰라서 그런 것이니 앞으로도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다면 말해주세요. 저도 일행에 피해를 주기는 싫습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잠시 나를 바라보던 지설이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형오를 바라보았다.
“형오, 너는 잠시 나를 좀 따라와라.”
“예.”
형오가 잔뜩 풀이 죽은 얼굴로 지설의 뒤를 따랐다. 수풀 속으로 사라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니 담덕이 내 옆에 다가왔다.
“혹 마음이 상했다면…….”
“괜찮습니다. 지설 님의 말이 옳아요. 일행의 법칙에 제가 맞춰야지요.”
담덕은 대답 대신 내 표정에 주목하고 있었다. 그는 평소 말보다 표정이 더 진실에 가깝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내가 말을 할 때면 이런 식으로 얼굴을 빤히 보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 생각해 준다니 다행이다.”
내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았는지 담덕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제 그 어설픈 존대도 그만해라. 그게 내숭이라는 것도 이미 다 들통났으니.”
“예?”
“형오가 쓰러졌을 때 내 이름을 부르며 반말을 했잖아. 병사들도 이미 그걸 다 봤다.”
그때 상황이 워낙 다급해 담덕에게 깍듯하게 대해야 한다는 걸 완전히 잊고 평소처럼 행동했던 모양이다. 설마 하는 마음에 병사들을 보니 그들도 담덕의 말이 맞는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세상에. 그동안 내가 노력한 건 뭐지?”
지난날이 허무해져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러니 쓸데없는 노력은 이제 그만하고 평소처럼 해. 이번 도압성 길에 오른 병사들은 모두 나와 함께 떠나기를 자처한 내 사람들이니 누구도 격의 없는 행동을 책잡지 않을 거야.”
“누구도? 지설 님은 거기에 포함되지 않겠지?”
“우희, 나보다 지설의 말이 더 걱정이야? 내가 지설보다 상관이라는 걸 잊지 말아 줬으면 하는데.”
“하지만 지설 님이 우리 일행의 돈을 쥐고 있잖아. 여행길엔 돈이 곧 권력이라고.”
“뭐? 내가 지설이 아니라 돈에 밀린 거였어?”
불만 가득한 눈으로 투덜거리는 담덕 곁으로 야영 자리를 찾아보러 나섰던 태림이 돌아왔다.
“담덕 님, 이곳에서 조금만 더 가면 동굴이 나옵니다. 짐승의 흔적도 없고 습기도 적어 하루 지내긴 충분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 그럼 오늘은 그곳에 자리를 잡자.”
담덕의 승낙에 일행은 말을 이끌고 태림이 발견한 동굴로 장소를 옮겼다. 산속에서 첫 야영이라 걱정이 많았는데 이슬을 피할 동굴을 찾았으니 다행이었다.
태림의 말처럼 동굴 안의 환경은 나쁘지 않았다. 크기도 커서 병사들까지 모두 안에서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동굴에 들어서자마자 병사들은 익숙하게 자리를 정돈했다. 마른 나뭇잎을 모아 바닥에 깔고 그 위에 천을 덮어 누울 자리를 만들고, 중앙에는 불을 피워 서늘한 공기를 데웠다.
분주하게 준비를 하다 보니 금세 해가 떨어졌다. 노을이 지기 시작한 것이 얼마 되지 않았는데 과연 산의 해는 짧았다.
“담덕 님과 우희 님께서는 가장 안쪽에서 주무십시오. 혹 밖에서 산짐승이 들이닥치면 저와 병사들이 막을 겁니다.”
태림이 나와 담덕의 자리를 지정해 주었다. 동굴의 안쪽에 있어 안전한 데다 불과 가까워 가장 따뜻한 명당이었다.
“불침번 순서는?”
담덕이 입구 근처에 자리를 잡기 시작하는 병사들을 보며 물었다.
“이미 정해 두었습니다. 아가씨께선 검을 다루지 못해 경계를 설 수 없으니 번에서 제외했고, 담덕 님께선 지설과 함께 제일 첫 순서이십니다.”
“모두 공평하게 제비를 뽑아 순서를 정하라 하지 않았나.”
“공평하게 제비를 뽑은 겁니다.”
“그래서, 내가 우연히 가장 첫 순서가 되었다?”
뻔한 거짓말에 담덕이 미간을 찌푸렸다.
밤새 불을 지킬 당번을 정할 때 가장 좋은 자리는 제일 처음과 마지막이었다. 중간에 잠에서 깨지 않고 푹 잘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좋은 자리가 하필 담덕의 손에 떨어졌다.
“담덕 님께서 뽑기 운이 좋으셨던 거지요.”
뻔뻔한 거짓말에 담덕이 헛웃음을 흘렸다.
“태림. 갈수록 거짓말이 느는구나. 처음엔 빈말 하나 못하더니……. 지설과 함께 다니며 배웠나?”
태림이 대답하지 않고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에 담덕이 다시 한번 헛웃음을 흘렸다.
“이젠 말을 피할 줄도 알고.”
“송구합니다.”
“됐다. 예전보다 요령이 생겨 보기 좋으니 이번엔 속아 넘어가 주마. 하지만 두 번은 없을 거야.”
“예, 전하.”
인사하고 돌아서는 태림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린 것을 본 담덕이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봤지? 하나같이 나를 이런 취급이다. 내 말을 들어주는 척하며 다들 자기 뜻대로 한다니까.”
“다들 널 좋아해서 그래.”
“날 좋아해서 그렇다고? 퍽이나 그렇겠다. 무시나 하지 않으면 다행이지.”
“너도 알고 있으면서 왜 모른 척이야? 다들 널 좋아한다는 걸 알기 때문에 이들을 ‘내 사람들’이라 부르는 거 아니었어?”
담덕은 적과 아군의 경계가 분명한 사람이었다. 적에게는 한없이 단호하지만, 아군에게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무른 구석이 있기 때문에 누구를 아군으로 생각하는지 금세 티가 났다.
“넌 믿는 사람과 아닌 사람을 대하는 게 너무 달라. 그러니 ‘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어깨에 힘이 들어가지.”
“그럼 우희 넌?”
“나?”
“네 어깨에도 힘이 들어가 있나?”
담덕이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크고 단단한 손이 확인하듯 어깨를 만지작거리니 기분이 이상했다. 나는 몸을 틀어 담덕의 손을 벗어났다.
“내 어깨에 왜 힘이 들어가?”
“넌 나의 첫 ‘내 사람’이잖아. 그러니 누구보다 어깨에 힘이 들어가야 하는 거 아니겠어?”
담덕의 손을 벗어난 보람도 없이 그가 다시 한번 내 어깨에 손을 뻗었다.
“그러니 확인해 보자. 얼마나 힘이 들어갔는지.”
“힘 안 들어갔어!”
담덕은 내 어깨를 잡겠다고, 나는 그 손을 피하겠다고 소란이었다. 한참을 투닥거리고 있으니 동굴 입구에서 황당하다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분, 뭐하십니까?”
일행 중에서 이런 소리를 할 사람은 지설뿐이었다. 역시나 고개를 돌려 보니 입구에 선 지설이 한심한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설뿐만이 아니었다. 입구 근처에 자리를 잡고 앉았던 병사들도 어느새 나와 담덕의 소란에 주목하고 있었다. 지설과 달리 조카를 바라보는 듯한 훈훈한 시선이었다는 점만 차이가 있었다.
평소처럼 투닥대느라 주변 시선을 완전히 잊고 있었던 것이다. 나와 담덕은 민망해져 조용히 손을 내렸다.
그때 지설과 함께 자리를 비웠던 형오가 동굴 안으로 들어왔다. 낑낑대며 안으로 들어온 그는 빈손이 아니었다.
형오의 어깨에 웬만한 아이보다 더 큰 산짐승 하나가 들려 있었다. 나는 놀라서 한걸음에 그의 앞으로, 정확히는 산짐승 앞으로 다가섰다.
“이 커다란 걸 잡은 건가?”
절노부에 있을 때 제신과 사냥을 나간 적이 있긴 하지만 겨우 토끼나 노루 정도만 잡았을 뿐, 이렇게 큰 놈은 처음이었다. 역시 산짐승은 들짐승과 크기부터가 달랐다.
“멧돼지입니다. 겁도 모르고 달려들기에 잡았습니다. 마침 저녁 식사 시간이기도 했고.”
대답은 지설에게서 흘러나왔다. 멧돼지를 잡은 사람이 지설인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지설의 갑옷에만 피가 튄 흔적이 있었다.
“지설 님께서 두 방에 목을 찔러 잡으셨죠. 태림 님이면 한 방에 잡으셨겠지만요!”
형오의 말에 병사들이 와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지설이 잔소리를 할 때마다 태림보다 검도 못 쓰는 대장님이 잔소리를 한다며 투덜거리는 형오다운 너스레였다.
“그래도 이 무거운 놈을 여기까지 옮겨 온 건 접니다!”
형오가 지설의 무용담을 늘어놓으면서도 놓치지 않고 제 수고를 주장했다. 밉지 않은 자랑에 지설도 피식 웃으며 팔꿈치로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리 말할 시간에 부지런히 움직여. 다들 배가 고플 터이니.”
“예, 예. 여부가 있겠습니까.”
형오가 과장되게 고개를 끄덕이며 모닥불 옆에 멧돼지를 내려놓았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멧돼지가 바닥에 떨어졌다.
“손질은 제가 하겠습니다.”
쉬고 있던 병사 중 하나가 일어서 손질을 자처했다. 품속에서 작은 단도를 꺼내 익숙하게 해체 작업을 시작하는 모습에 쉬고 있던 병사들도 우르르 주변에 몰려들었다.
“오랜만에 고기 좀 먹겠구만.”
“이게 얼마만의 고기야? 드디어 제대로 된 식사를 하겠어.”
병사들은 벌써부터 신이 나서 떠들어 댔다. 국내성을 떠나 매일 육포로 연명하고, 마을에 들렀을 때도 주먹밥 정도만 얻어먹었으니 고기가 그리울 법도 했다.
“생각보다 이런 걸 잘 보시는군요.”
멧돼지 해체하는 과정을 바라보고 있었더니 지설이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의 머릿속의 나는 전형적인 귀족 가문 아가씨인 모양이었다.
순간 하늘거리고 우아한 해운의 누이 영의 모습이 스쳐 갔다. 아마 지설이 생각하는 귀족 가문 아가씨는 그 아이 같은 느낌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피를 보고, 살을 가르고 찢는 일에 거부감이 전혀 없었다. 의술을 배운 자로서 그런 거부감이 있다면 힘들었다.
그래도 처음 해부학 수업을 들을 땐 울면서 강의실을 뛰쳐나갔었지.
한의대에서 해부학 수업을 한다면 놀라는 이들도 많았지만, 한의학에서도 서양 의학처럼 해부학을 중요시했다.
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체의 구조를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그러니 드라마에서도 허준 선생이 사람의 배를 갈라 인체의 구조를 보지 않았나.
게다가 고구려는 전쟁이 잦은 나라였다. 하필 집안 남자들은 그 전쟁에 나가지 못해 안달이었다. 집을 나섰다 돌아오면 어디 하나 다쳐 오는 것이 일상이니 익숙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대고구려인으로 태어나 피 보는 일에 익숙하지 않다면 곤란하지요. 제 아버지와 오라버니도 툭하면 피를 흘리며 돌아오시는걸요.”
“그렇습니까. 제 생각보다 아가씨께선…….”
말을 하던 지설이 중간에 입을 꾹 다물었다. 나는 다시 지설의 입이 열리길 기다렸지만, 그 전에 삼삼오오 모여 있던 병사들 중 하나가 그의 곁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대장님, 오랜만의 고기인데 그것도 함께 개봉하면 어떻겠습니까?”
“그것?”
“그 주통촌에서 고맙다며 주었던…….”
병사가 은근히 말을 흘리며 말에 걸어 둔 호리병을 가리켰다. 주통촌을 떠날 때 마을 사람들이 고맙다며 내어준 과실주였다.
“어찌할까요, 담덕 님?”
지설이 담덕에게 의견을 구했다.
주통촌에서는 안전한 마을 안에 있어 반주를 허락했지만 지금은 언제 위협이 있을지 모를 산속이었다. 지설 본인의 독단적인 판단으로 술을 허락할 상황이 아니었다.
“취하지 않을 정도로만 목을 축이는 건 나쁘지 않겠지. 추운 밤 몸을 데우기도 좋고.”
담덕의 입에서 허락의 말이 흘러나오자 병사들의 얼굴이 미소가 걸렸다.
행동이 제일 날랜 사람은 형오였다. 그는 담덕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말에 달려가 호리병을 한 아름 가져왔다.
“이럴 때만 행동이 빠르지.”
지설의 타박에도 형오는 싱글벙글 이었다. 고기에 술이니 들뜰 만도 했다.
병사들은 분주하게 움직여 멧돼지를 불 위에 올렸다. 먹음직스러운 멧돼지 통구이가 준비된 것이다.
멧돼지가 익기를 기다리며 일행들은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았다. 담덕과 태림, 지설도 그 안에 있었다.
며칠 시간을 함께 보냈다고 편해졌는지 병사들은 담덕에게도 농담을 던지며 웃었다.
그럴 때마다 지설이 못마땅한 얼굴로 병사들을 노려보았으나, 그럴 때마다 담덕이 손을 들어 지설을 제지했다. 좋은 분위기를 망치지 말라는 뜻이었다.
“다 익었습니다. 드십시오.”
병사가 잘 익은 멧돼지 살을 잘라 맛을 본 뒤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새로운 덩어리를 잘라 나뭇가지에 꽂았다. 먹음직스러운 멧돼지 꼬치구이였다.
그렇게 준비된 음식은 제일 먼저 담덕에게 전해졌다. 꼬치를 받아 든 담덕은 자연스럽게 그것을 내게 건넸다.
“응? 이걸 왜 내게 줘?”
너무 자연스러운 행동에 반사적으로 꼬치를 받아 들고서야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이번에도 담덕이 나를 챙기고 있었다.
누가 보면 담덕이 아니라 내가 태자인 줄 알겠네.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담덕의 손에 다시 꼬치를 돌려주었다.
“너부터 먹어야 돼.”
내 말에 담덕이 미간을 찌푸렸다.
“먹는 순서가 뭐가 중요해?”
“그럼 옆에 있는 형오에게 먼저 주든지. 난 챙겨 주지 않아도 돼.”
나는 담덕의 항변을 무시하고 꼬치를 나눠 주는 병사에게 새로운 꼬치를 받아 왔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꼬치를 한 입 베어 무는 나를 보며 담덕이 황당한 눈을 했다.
“왜 병사가 주는 건 먹고, 내가 주는 건 안 먹는데?”
“너 그거 아주 유치한 질문인 건 아니?”
“너야말로 유치해. 내가 널 챙겨 주는 게 왜 그리 싫은데?”
“너도 싫다며. 내가 널 위해서 시중들길 자처하는 거. 한데 이번 여행길 내내 네가 꼭 나를 시중드는 것처럼 바지런을 떨고 있잖아.”
나는 병사들의 눈치를 보며 목소리 크기를 낮추었다.
“난 네 친구지 지켜 줘야 할 짐짝이 아니란 말야. 나와 친구 하자는 건 네 바람 아니었어? 세상 누가 친구에게 이러니?”
“그거야…….”
담덕이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꾹 다물었다.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는 않는데,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니 각자 몸은 각자 챙기는 것으로 합시다, 태자님.”
나는 담덕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린 뒤 손에 든 꼬치를 한 입 더 베어 물었다. 오랜만에 따뜻한 음식을 먹으니 절로 미소가 걸렸다.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오랜만에 식사다운 식사를 하게 된 탓인지 모두들 평소보다 들뜬 얼굴이었다.
고기에 곁들인 술도 한몫을 했다. 병사들은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며 웃기도 하고, 누군가 쏟아내는 무용담에 진지한 얼굴로 귀를 기울이기도 했다.
“아가씨도 한 잔 드시겠습니까?”
떠들썩한 병사들의 소리를 듣고 있던 내 앞에 형오가 다가왔다. 그가 내민 손에 술이 담긴 호리병이 들려 있었다.
“안 돼.”
“좋지.”
담덕과 내 입에서 동시에 대답이 흘러나왔다.
“되는 겁니까, 안 되는 겁니까?”
형오의 어리둥절한 눈이 나와 담덕을 향했다. 나는 담덕을 흘겨보며 다시 한번 분명히 내 의견을 전달했다.
“된다니까.”
“안 된다고 했어.”
하지만 이번에도 담덕이 끼어들었다.
“왜 네가 대답하는 건데?”
“네 고약한 술버릇을 누가 감당하라고? 절대 안 된다.”
“나 술버릇 없어.”
“없기는.”
담덕이 코웃음을 쳤다.
“아예 정신을 놓아서 기억을 못하는 거겠지.”
정신을 놓을 정도로 술을 많이 마신 건 그가 성인이 되던 해의 탄일로 겨우 몇 달 전의 일이었다. 담덕이 드디어 성인으로서 한몫을 하게 되었으니 그걸 함께 축하하자며 술판을 벌인 것이다.
고구려는 워낙 술이 흔한 국가라 적당한 나이가 되면 성인이 아니라도 술을 마실 수 있었다. 덕분에 나와 담덕도 어려서부터 종종 술을 함께했는데, 그날처럼 많이 마신 건 처음이었다.
부어라 마셔라 하며 술을 마시다 보니 금세 취했고, 나는 현대의 말을 빌리자면 ‘필름이 끊겨’ 곯아떨어졌다.
“그냥 잠들었다며?”
내가 술에 취해 기절하듯 잠들어 버렸다는 건 담덕이 자신의 입으로 직접 한 말이었다. 술에 취한 나를 업고 집에 데려다준 사람도 담덕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 그가 다른 말을 했다.
“네가 주정이란 주정은 다 부려서, 그걸 알면 민망해할까 봐 그냥 잠들었다 해 준 것이다.”
“거짓말.”
“거짓말 아냐.”
“그럼 내가 그때 무슨 주정을 부렸는지 말해 보시죠, 태자님?”
“그날 네가 나한테.”
막힘없이 말을 이어 가던 담덕이 입을 꾹 다물었다. 나는 답답해져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그날 너한테, 뭐?”
“그…….”
다시 한번 물어도 담덕은 대답이 없었다. 그는 대답 대신 손으로 자신의 입을 가렸다. 그러는 담덕의 귓가가 시뻘겠다.
반응이 이러하니 진심으로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나를 놀리기 위한 거짓말인 줄 알았는데, 담덕의 반응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몰라. 아무튼 마시지 마. 특히 이렇게 사내놈들 많은 데선 안 돼.”
황망하게 중얼거리는 나를 향해 다시 한번 단호하게 말한 담덕이 형오의 손에 들려 있던 병을 낚아챘다.
“이 술은 내가 마시지.”
* * *
떠들썩하게 식사를 마치고 나니 금세 밤이 찾아왔다.
술을 한잔 걸친 병사들은 벌써부터 잠이 들었다. 중간에 불침번을 위해 일어나야 하니 조금이라도 빨리 잠들어 잠을 보충하는 게 상책이었다.
첫 불침번을 맡은 담덕은 모닥불 앞에 앉아 불을 지키며 아직 잠들지 않은 나를 힐끗거렸다.
“왜 안 자고 있어?”
“잠이 안 와.”
“자리가 불편해서?”
담덕이 짐짓 걱정스럽게 물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궁금해서.”
나는 누웠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담덕의 곁에 다가가 앉았다.
“도대체 내가 그날 무슨 짓을 했는데?”
“그날?”
“네 탄일에, 같이 술 마셨던 그날.”
“아직도 그 이야기야?”
담덕이 미간을 찌푸리며 활활 타오르는 불로 시선을 돌렸다. 그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는 명백한 의사 표시였다.
그런 담덕의 태도에 나는 오히려 더욱 궁금증이 일었다. 이렇게까지 말을 아낄 일이라면 얼마나 대단한 진상을 부렸는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말해 보래도.”
“말하면 너 후회해.”
“괜찮아. 민망해서 죽을 것 같아도 내가 무슨 주정을 했는지 아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래야 다시는 술을 안 마시지.”
“진짜 알고 싶어?”
“응.”
내 대답에 담덕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이 평소와 묘하게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네가 알고 싶다고 한 거야. 난 숨겨 주려고 했어.”
마지막으로 경고한 담덕이 손을 뻗어 내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그때 넌 담덕, 하고 날 부르면서 내 머릴 만졌어. 난 그래, 하고 대답했지.”
머리카락을 매만지던 손이 그대로 미끄러져 귀와 목을 감쌌다. 예민한 곳에 닿은 커다란 손에 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그러고는 이렇게 날 잡더니 내 목을 끌어당겼어. 우린 아주 가까워졌지.”
담덕이 팔에 힘을 줘 나를 끌어당겼다. 강하지 않은 힘이었지만 나는 그대로 그의 손에 딸려 갔다.
그는 서로의 코끝이 닿을 것 같은 가까운 거리가 되어서야 손의 힘을 풀었다. 코앞에서 나를 보면서도 담덕의 눈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내가 물었어. 너 왜 이래? 그랬더니 네가 그러더라고. 나도 몰라. 그리곤 웃었지.”
고요히 모닥불 타오르는 소리 사이로 담덕이 다시 말했다.
“그런 뒤에는…….”
눈을 바라보던 담덕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다.
시선을 쫓지 않았지만 그가 입술을 보고 있다는 건 알았다. 시선이 닿은 입술이 불에 덴 것처럼 화끈거렸다.
더 이상 가까워질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담덕의 얼굴이 더 가까워졌다.
“그런 뒤에 넌…….”
왜? 왜 더 가까이 오는데?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은 와중에도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서서히 의아해지려는 찰나 바로 앞에서 “풋” 하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웃음도 보통 웃음이 아닌 비웃음이었다.
“나한테 토했어.”
“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말에 눈을 번쩍 떴다. 그러자 얄밉게 웃고 있는 담덕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네가 내 얼굴에 대고 토하는 바람에 그 뒤론 너랑 다시는 술 마시지 말아야지 생각했다고.”
“내가…… 토했어……? 네 얼굴에 대고?”
“그래. 오늘도 병사들 얼굴을 붙잡고 토할까 봐 말렸다. 여기서 그 꼴을 보이면 앞으로 국내성에서 고개 들고 다니겠어?”
그랬다가는 절노부 연씨 아가씨가 사람들 얼굴에 토를 하고 다닌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돌 것이다.
“……그런 소문이 나면 절대 얼굴 못 들고 다니지.”
멍한 내 말에 담덕이 웃으며 멀어졌다.
“그러니 내가 오늘 널 말린 게지. 이 얼마나 눈물겨운 우정이냐?”
네 말이 맞는다고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는 나를 보며 담덕이 얄궂은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너 눈은 왜 감았어?”
“어?”
“눈 말이야. 내가 가까이 가니까 눈 감았잖아. 도대체 왜 그랬을까, 내 친구님은?”
그랬다. 담덕이 가까이 다가와서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입을 맞추려는 줄 알았으니까.
도대체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한 거야!
민망함에 얼굴이 불타올랐다. 친구를 두고, 그것도 코흘리개 시절부터 보아 온 이 꼬마를 두고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이 부끄러워 죽을 것 같았다.
생긴 거야 멀쩡하지만 담덕은 내게 어린애일 뿐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의 인상 때문이기도 했지만, 전생의 기억이 있는 내게 그는 한참 어린 동생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그런 녀석의 행동에 휘둘리다니.
연애를 너무 안 해서 그런가?
전생의 소진은 공부하느라 바빠서, 한의사가 된 후에는 일하느라 바빠서 연애를 못했다. 우희로서의 삶을 시작하고서도 아버지와 제신이 싸고도는 바람에 주변에 남자가 없었다.
그 결과가 이랬다. 나는 연애 따위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패배자가 되어 마냥 어리게만 봤던 담덕에게 도 휘둘리는 신세가 되었다.
“어, 그건, 내가 오해를 좀 했어.”
“무슨 오해?”
“알면서 왜 물어? 차라리 날 놀려. 그게 마음 편해.”
“정말 몰라서 묻는 건데.”
민망해서 어쩔 줄 모르는 나를 보며 담덕이 씨익 웃었다.
다 알면서 일부러 모르쇠를 하는 꼴이 얄미워서 그의 등을 두드렸지만 담덕은 아프지도 않은지 싱긋 웃을 뿐이었다. 분해서 어쩔 줄 모르는 나를 두고 담덕의 웃음이 더 커졌다.
“담덕 님.”
그때 동굴 밖에서 경계를 하고 있던 지설이 안으로 들어왔다. 담덕을 부르는 목소리가 낮고 조심스러운 것이 무슨 일이 생긴 듯했다.
“무슨 일이냐?”
심각함을 감지한 담덕이 조용히 물었다. 지설은 동굴 밖을 힐끗거리며 차분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밖에 늑대 무리가 있습니다. 저희가 피운 불을 보고 온 듯한데, 처음에는 멀리서 지켜만 보더니 조금 전부터 서서히 다가오고 있습니다.”
“대비를 해야겠군. 몇 마리 정도지?”
“다행히 그 수가 많지는 않습니다. 일곱 정도로 파악됩니다.”
“하면 괜히 소란 피울 것 없이 태림만 깨워서 정리하지.”
“예. 그리하겠습니다.”
지설이 태림을 깨우기 위해 멀어지자 담덕이 옆에 두었던 검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시 나갔다 올게. 넌 나오지 말고 안에 있어.”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검을 쓰지 못하니 도와주겠다고 따라나섰다가는 거치적거리기만 할 뿐이다.
지설이 흔들어 깨우자 태림은 처음부터 잠들지 않았던 사람처럼 금방 눈을 떴다. 묻지도 않고 몸부터 일으키는 것을 보니 정말 깨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세 사람이 무기를 챙겨 밖으로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아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사나운 늑대의 울음소리와 검 휘두르는 소리가 귀를 어지럽혔다.
그런데 소리가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세 사람이 밀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늑대는 겨우 일곱이라 했는데 왜?
나는 불안함에 활과 화살을 챙겨 동굴 입구로 걸음을 옮겼다.
밖으로 몸을 빼지 않고 얼굴만 내밀어 상황을 살피니 세 사람이 사방에서 달려드는 늑대와 싸우고 있었다. 수는 지설이 말했던 일곱보다 훨씬 많았다.
“족히 열다섯은 되는 것 같은데요?”
날아드는 늑대를 피해 검을 휘두른 태림이 불만스럽게 지설을 바라보았다. 지설은 상처 입혀 쓰러뜨린 늑대의 목에 검을 찔러 넣으며 대답했다.
“숨어 있다 갑자기 튀어나오는 걸 내가 무슨 수로 파악해?”
짜증 섞인 목소리와 함께 검을 뽑으니 피가 그의 얼굴에까지 튀었다.
“투덜거리지 말고 늑대에게 집중해. 한눈팔면 물리는 수가 있어.”
담덕이 두 사람을 다독이며 늑대를 베었다. 사납게 이를 세우던 늑대는 예리한 공격에 바닥에 쓰러져 피를 흘리며 숨을 헐떡였다.
예상보다 수가 많아 순간 밀리긴 했으나 다행히 세 사람은 잘 싸우고 있었다. 검 쓰는 실력이 좋다는 이야기가 거짓이 아니었는지 태림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며 혼자서 여덟 마리를 베어 넘겼다.
지설의 실력도 좋았지만 그는 담덕을 보호하는 데 더 많은 신경을 쓰고 있었다. 늑대를 상대하면서도 틈틈이 담덕을 살피느라 정작 자신의 앞에 있는 놈을 제대로 베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는 만약을 대비해 활에 화살을 걸어 늑대들을 향해 겨누었다. 내 실력으로는 급소를 명중시켜 한 방에 늑대를 죽이긴 힘들겠지만, 뒤가 위험한 상황에 주의 정도는 줄 수 있을 터였다.
그러는 동안 늑대는 하나둘 세 사람의 검에 쓰러져 갔다. 남은 늑대의 수가 갈수록 줄어들었다.
일곱, 여섯, 다섯, 넷, 셋…….
이제는 싸우고 있는 늑대보다 바닥에 쓰러진 놈들이 더 많았다. 이 정도면 위험한 상황은 지나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담덕 님!”
마음을 놓고 활을 내려놓으려는 찰나 지설의 외침이 들려왔다. 화들짝 놀라 담덕을 바라보니 앞에서 달려든 늑대를 상대하는 그의 사각에서 다른 늑대가 뛰어올라 그를 위협하고 있었다.
담덕의 검은 앞에 있는 늑대의 목에 꽂혀 있는 상태여서 뒤는 완전히 무방비였다. 놀란 지설이 뛰어들었지만 시간이 부족할 것 같았다.
나는 활을 든 팔을 단단히 고정하고 늑대를 향해 화살을 겨누었다.
편하게 힘을 빼고 흔들림 없이 화살을 놓는다.
담덕이 몇 번이고 일러 준 말이었다. 손에 힘을 풀자 늑대의 목을 겨눈 화살이 빠르게 날아갔다.
화살이 푹 꽂히는 소리와 함께 늑대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됐다!”
목표했던 목이 아니라 다리에 겨우 맞았지만 늑대의 행동을 막는 데는 주효했다.
“아가씨?”
갑자기 날아온 화살에 동굴 쪽을 바라본 세 사람이 나를 발견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나를 발견한 건 세 사람만이 아니었다. 내게 화살을 맞은 늑대도 나를 발견했다.
나는 황급히 화살을 하나 더 걸어 나를 향해 달려오기 시작하는 늑대에게 쏘았다. 하지만 다급함 때문이었는지 화살은 늑대를 비켜 바닥에 꽂혔을 뿐이다.
“우희!”
담덕이 나를 부르며 동굴 쪽으로 뛰어왔다. 하지만 늑대의 속도가 더 빨랐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다시 한번 화살을 날렸다. 하지만 떨리는 손으로 쏜 화살이 제대로 늑대에게 맞아 줄 리 없었다.
어느새 늑대의 얼굴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입을 쩍 벌린 늑대의 입에서 뜨겁고 찝찝한 기운이 느껴졌다.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악!”
비명을 지르며 팔을 들어 얼굴을 가리는 순간 예상했던 고통 대신 몸에 뜨거운 피가 튀었다. 서서히 눈을 뜨니 어느새 내 등 뒤에 나타난 형오가 늑대의 아가리에 검을 찔러 넣고 있었다.
“와…… 겨우 막았다…….”
형오가 찔러 넣었던 검을 빼내자 더 많은 피가 내 몸 위에 쏟아졌다. 피를 뒤집어쓴 나는 물론이고 검을 찌른 형오도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고맙다.”
떨리는 목소리로 감사 인사를 전하니 형오가 씨익 웃었다.
“제가 목숨 빚을 제대로 갚았네요.”
너스레를 떠는 목소리를 듣고서야 마음이 놓였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슬쩍 미소를 지으니 그제야 담덕과 지설이 내 앞에 다가왔다. 그 뒤로 마지막 남은 늑대까지 베어 넘긴 태림까지 합류했다.
“왜 나와 있었어?”
담덕이 피를 뒤집어쓴 나를 내려다보며 차갑게 말했다. 그가 이처럼 서늘한 태도로 나를 대한 적은 처음이었다. 놀라서 눈을 크게 뜨니 오히려 지설이 눈치를 보며 담덕을 말렸다.
“그래도 아가씨께서 화살을 날리신 덕분에 전하께서 무사하셨습니다. 뒤가 완전히 비어 있었거든요. 저나 태림이 가기에도 늦었고요.”
흔치 않게 지설이 나를 비호했지만 담덕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여전히 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가 너한테 나 도와 달랬어? 안에 있으라고 했잖아.”
“하지만 소리가 너무 가까워져서…….”
“그럼 더 안으로 들어갔어야지 왜 밖으로 나와? 너, 늑대가 얼마나 무서운 놈들인 줄 알아? 저 이빨에 물리면 너같이 단련 안 된 자들이 어찌 되는 줄 아냐고.”
담덕이 피가 뚝뚝 흐르는 검으로 쓰러진 늑대의 이빨을 가리켰다. 크고 날카로운 이빨이었다. 저 이빨이 몸에 파고들었을 것을 생각하니 절로 몸이 떨렸다.
“이제 와 무서워? 무서운 걸 아는 녀석이, 활조차 제대로 못 쏴서 늑대를 죽이지도 못하고 자극만 시킨 네가, 이제 와 무서워? 무서운 걸 알면서 나서긴 왜 나서!”
“그래도…… 네가 위험했으니까…… 도와주려고 한 거야. 그게 그렇게 잘못됐어?”
“그러니까 너한테 그런 거 바란 적 없다고 말하잖아.”
담덕이 손에 들고 있던 검을 던지듯 바닥에 꽂은 뒤 내 앞에 몸을 숙였다.
“난 네가 도와야 할 어린애가 아냐. 조그만 게 누가 누굴 돕겠다고.”
차가운 질책에 몸이 덜덜 떨렸다. 늑대에게 물릴 뻔한 것도 무서워 죽겠는데, 담덕이 화까지 내니 서러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여기에서 울면 정말 짐짝이 돼 버리고 만다.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고개를 숙였다.
“한 번에 급소를 맞추지 못한 건 내 잘못이지만, 널 도우려고 활을 쏜 건 잘못이라고 생각 안 해.”
“뭐?”
“내가 활을 안 쐈으면 네가 늑대에게 물렸을 거고, 난 그 꼴을 보기 싫었고, 그러니 난 잘못한 거 아냐. 다시 똑같은 상황이 와도 난 또 활 쏠 거야. 네가 뭐라고 하든.”
“연우희.”
“대신 활 쏘는 연습 열심히 할게. 예전이었으면 늑대 다리도 못 맞혔을 텐데 이젠 다리 정도는 맞히잖아. 더 하면 목도 한 번에 뚫을 수 있을걸.”
바닥을 보며 할 말을 쏟아냈더니 머리 위로 담덕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지설.”
“예.”
“난 얘 피 좀 씻기고 올 테니 그동안 네가 동굴을 책임지고 있어.”
“알겠습니다.”
“태림 너도 잠시 떨어져 있어라.”
“하지만……”
“이 녀석과 할 말이 있어서 그래. 한바탕 늑대 무리를 해치웠으니 한동안 우리 근처에 올 놈들은 없을 거다. 너무 걱정 마라. 나도 무기는 가져갈 테니까.”
“……예.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태림의 대답이 들려옴과 동시에 담덕이 한 팔로 내 허리를 감싸 그대로 안아 들었다. 붕 뜨는 발에 놀라 버둥거리니 담덕이 차분하게 말했다.
“가만히 있어. 잘못하면 떨어지니까.”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도 싫었지만 떨어지는 건 더 싫었다. 내 움직임이 잦아들자 그제야 담덕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담덕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물소리가 가까워졌다. 근처에 작은 개울이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어두운 밤이었지만 다행히 달빛이 있어 시야는 나쁘지 않았다. 빠르게 휙휙 스치는 풍경을 지나 개울에 도착하자마자 담덕이 나를 물에 집어넣었다.
“푸아하!”
코와 입으로 밀려드는 물에 놀라 허우적대며 중심을 잡고 서니 달빛을 등진 담덕이 내 앞에 우뚝 서 있었다.
여전히 서늘한 기세에 왜 물에 집어 던지느냐고 따지지도 못한 채 입을 꾹 다물고 있으니 담덕이 손을 뻗어 내 얼굴과 머리에 묻은 늑대의 피를 씻어 내기 시작했다.
“너는 어찌 이리 겁이 없어? 늑대가 무섭지도 않던?”
겨우 말을 꺼낸 담덕의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 나는 용기를 얻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나도 무서웠지.”
“그런데. 왜 가만히 안 있고 나섰는데? 얌전히 안에서 기다리라 하면 좀 기다리면 안 돼? 날 그렇게 못 믿겠어?”
“그래도 내가 활을 쏴서 네가 안 다쳤잖아.”
“다쳐도 내가 다쳐. 하지만 넌 안 돼.”
얼굴을 씻어 주던 손이 내 손목을 잡아끌어 자신의 가슴팍에 가져갔다. 영문을 몰라 그를 올려다보니 담덕이 물었다.
“주먹 쥐어.”
“주먹을 갑자기 왜?”
“내가 하라고 하면, 한 번쯤은 그냥 해 주면 안 되겠니?”
한숨 섞인 담덕의 말에 입을 비죽이며 주먹을 쥐었더니 금방 다음 지시가 흘러나왔다.
“이제 날 때려.”
“응?”
“여기를 주먹으로 때리라고. 온 힘을 다해서.”
차마 때릴 수가 없어 머뭇거리니 담덕이 다시 한번 나를 재촉했다.
“뭐해? 때리라니까.”
“네가 분명히 때리라고 했어. 난 몰라.”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있는 힘껏 담덕의 가슴팍에 주먹을 꽂았다.
“악!”
하지만 아프다고 비명을 지른 건 담덕이 아닌 나였다. 손목을 찡하게 울리는 고통에 울상을 지으며 손목을 감싸 쥐니 담덕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 봐. 네가 있는 힘껏 때려도 내가 아닌 네가 상하잖아. 너랑 난 몸 자체가 달라. 난 어디 한 군데 물려도 금세 쾌차할 수 있지만, 넌 그렇게 다치면 큰일이 나는 몸이라고.”
옳은 말이었다. 남자와 여자의 몸은 달랐다. 개중에서도 담덕은 건장한 편이었고, 나는 겨우 보통에 속하는 몸이었다.
하지만 신체적인 차이 때문에 나만 일방적으로 도움을 받는 건 납득할 수 없었다. 내게도 내 친구와, 내 가족과, 내 소중한 사람들을 지킬 힘이 필요했다.
내가 불만스럽게 입을 꾹 다물고 있으니 담덕이 내 머리를 토닥였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넌 그랬어. 타인을 돕겠다고 기꺼이 나서는 사람이었지. 그런 마음은 좋아. 누군가를 돕겠다 나서는 건 굉장한 일이고, 나 역시 그런 마음을 높이 사니까. 하지만 꼭 그게 무력일 필요는 없잖아.”
언젠가 제신도 비슷한 말을 했었다. 활을 배우고 가족을 지키고 싶다고 했던 나에게 네가 할 수 있는 건 따로 있다고 했다.
“난 검을 휘두르고 활을 쏘는 재능을 타고났어. 그러니 이 재주를 살려 사람들을 도울 거야. 그러니 너도 너만의 재주로 사람을 도와. 오늘처럼 날 놀라게 하지 말고.”
“하지만 모두가 싸울 때 뒤에 물러서 있는 건 싫어.”
“뒤에 물러서 있는 게 아냐. 네가 도울 수 있는 때를 기다리는 거지.”
그렇게 말한 담덕이 동굴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내가 검을 휘두르다 다쳤으면 지금 동굴에서 드러누워 잠이나 자고 있는 저 녀석들은 하나도 도움이 안 될걸. 그땐 너만이 날 도울 수 있어. 그런데 네가 그때를 얻기도 전에 다치면 네가 할 일조차 할 수 없어지는 거야.”
“때를 기다린다고…….”
자신이 했던 말을 되새기는 나를 보며 담덕이 멋쩍게 웃었다.
“그리고 조금 전엔 화내서 미안. 어쨌든 도와줘서 고맙다는 말을 먼저 했어야 했는데 네가 피를 뒤집어쓰고 있으니 내가…….”
담덕이 말끝을 흐리며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상당히 복잡한 얼굴이었다. 웃는 것도 같고, 우는 것도 같았다.
“담덕?”
조심스럽게 담덕의 이름을 부르니 비로소 그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우희야, 다치지 마라.”
진심이 담긴 목소리에 가슴이 묵직해졌다. 하지만 감동은 채 1분도 가지 않았다.
“네가 다치면 상당히 성가셔지거든.”
“뭐라고!”
잔뜩 뿔이 나 튀어오르는 나를 보며 담덕이 풋하고 웃음을 흘렸다.
* * *
개울을 나오니 물에 흠뻑 젖은 몸이 무거웠다. 젖은 몸에 밤공기가 더해지니 생각 이상으로 추워 몸이 덜덜 떨리기까지 했다.
“추워?”
그런 나를 보며 담덕이 의아하게 물었다. 똑같이 젖었는데 그는 춥지도 않은지 기색이 멀쩡했다.
“넌 안 춥다는 거야?”
“늑대를 상대하느라 열이 오른 참이었는데, 물로 식혔더니 오히려 지금이 딱 좋은걸.”
“네 몸은 도대체 어떻게 된 몸이야? 에취!”
추위에 재채기까지 하자 담덕의 얼굴이 굳어졌다. 피를 씻어 낼 생각만 했지 내가 추워할 거라는 건 예상치 못한 모양이었다.
“너랑 내 몸이 다르다고 아는 척을 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 당황스러워하는 거야?”
“그거야…….”
내 지적에 담덕이 민망한 듯 볼을 긁적였다.
“아무튼 빨리 돌아가자. 불을 쬐면 훨씬 나아질 테니까.”
“그래. 좋은 생가아아악!”
한시라도 빨리 동굴에 가고 싶은 마음에 걸음을 서두르는 순간 발밑이 허전해졌다. 나는 그대로 아래로 떨어져 내리며 비명을 질렀다. 한참이나 아래로 떨어져 내린 끝에 엉덩이가 바닥에 닿았다.
“우희? 갑자기 무슨 이이이일!”
놀라서 뒤따라온 담덕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그도 나처럼 괴상한 비명을 지르며 곧 내 옆에 떨어져 내렸다.
담덕과 나는 황당한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피를 씻어 낸 보람이 없게도 흙투성이가 되어 버린 상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
“풋.”
둘의 입에서 동시에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잠시 상황을 잊고 웃음을 흘리던 우리는 곧 정신을 차리고 위로 고개를 올렸다. 머리 위에는 동그란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아무래도 사냥꾼이 만들어 둔 구덩이에 걸린 모양인데.”
담덕이 자리에서 일어서 높이를 가늠해 보았다. 키가 큰 편인 그의 손이 닿기에도 턱없이 부족할 정도로 구멍은 깊었다.
“누가 도와주지 않으면 올라가는 건 힘들겠는데.”
“그럼 어떡하지?”
담덕에게 힘들다면 내게는 말할 것도 없었다. 난처한 얼굴로 담덕을 바라보니 그가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우리가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으면 지설과 태림이 우릴 찾아 나설 거야. 그때 도움을 청하면 될 것 같은데.”
“그래. 그러면 되겠…… 에취! 에취!”
“너 괜찮아?”
조금 전보다 더 심해진 재채기에 담덕이 놀라서 내 얼굴을 살폈다.
“입술이 새파래.”
“으응……. 조금 춥긴 해서…….”
대답을 하는 동안에도 몸이 덜덜 떨렸다. 가만히 있으니 더 추워지는 기분이라 발을 동동 굴렀더니 담덕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담덕의 시선이 물이 뚝뚝 떨어지는 내 옷자락으로 향했다. 잠시 고민하던 그가 결국 입을 열었다.
“옷 벗어 볼래?”
“응? 옷을?”
“그…… 벗어 주면 물기라도 짜 줄게. 그게 덜 추울 것 같아서.”
확실히 푹 젖은 옷을 입고 있는 것보다 낫긴 할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담덕이라도 누군가의 앞에서 옷을 죄 벗어 던지기엔 민망했다.
“뒤돌아서 있을 테니까.”
담덕이 다시 한번 강하게 말했다. 나 역시 계속 추위에 떠는 것보다 잠시 민망한 것이 나을 것 같았다.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이니 담덕이 뒤돌아섰다.
나는 재빨리 옷을 벗어 담덕의 손에 건넸다. 담덕은 약속처럼 뒤돌아선 채로 옷의 물기를 꼭 짰다.
바닥에 물이 후두둑 떨어지는 모습을 보며 남은 옷도 벗기 시작했다. 겉옷은 쉬웠지만 속저고리와 치마는 몸에 찰싹 달라붙어 벗는 것도 난항이었다.
낑낑대며 속저고리와 치마를 벗자 이젠 속옷만 남았다. 이것까지 벗는 건 너무 부끄러웠다.
“그…… 속옷은 그냥 입고 있을게.”
“……그래.”
한 박자 느린 대답이 돌아왔다.
담덕은 아무런 말도 않고 옷의 물기를 짜냈다. 어찌나 힘이 좋은지 옷을 비틀 때마다 물이 쭈욱 쏟아졌다.
나는 상황도 잊고 감탄 어린 눈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대한민국에 살았으면 따로 탈수기가 필요 없을 정도였다.
“여기.”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으니 담덕이 물기를 짜낸 옷을 건넸다. 나는 얼른 그것을 받아 들어 옷에 몸을 집어넣었다.
하지만 좁은 공간에서 서두르다 보니 옷 입는 것도 쉽지 않았다. 몇 번의 헛손질 끝에 허리치마를 입자마자 몸이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으앗!”
흔들리는 몸을 담덕이 재빨리 손을 뻗어 받아냈다. 덕분에 흙바닥에 처박히려던 몸은 안전했지만 껴안다시피 서로의 몸이 맞닿았다.
놀라서 담덕을 밀어내려는데 그가 심각한 얼굴로 오히려 나를 더 강하게 붙잡았다.
“너 몸이 너무 차갑다.”
“그런가?”
담덕의 말에 내 몸을 만져 보았지만 스스로의 체온을 가늠하기 힘들었다. 다만 몸이 떨리는 것을 보며 체온이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낄 뿐이었다.
담덕은 그런 내 모습을 심각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이나 입을 다물고 서 있던 그가 곧 자신의 상의를 벗어 내기 시작했다. 겉옷만 벗는 것인가 싶었는데 곧 안에 입은 옷까지 벗어 던졌다.
“담덕?”
의아해져 묻는 동안 담덕은 부지런히 상의를 벗어 그의 맨몸이 드러났다. 화들짝 놀란 내가 뒤돌아서자 뒤에서 담덕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내 체온으로 몸을 데우는 게 나을 것 같아.”
대답을 하기도 전에 뒤에서 따뜻한 기운이 훅 끼쳤다. 담덕이 나를 껴안은 것이다.
“하지만 내가 젖은 옷을 입고 있으면 네 체온이 많이 떨어질 텐데…….”
“괜찮아.”
“그래도…….”
아무리 담덕이 건강하다고 한들 체온이 떨어지면 좋지 않았다. 나는 붙어 있는 담덕을 억지로 밀어내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럴 거면 나도 벗을게.”
“뭐?”
“원래 체온을 나누려면 살을 맞대야 해. 내가 젖은 옷을 입고 있으면 너만 추워진다고.”
말을 마치고 애써 입었던 옷을 다시 벗기 시작하자 담덕이 당황해 내 손을 붙잡았다.
“그러지 않아도 돼. 난 정말 괜찮다니까!”
“괜찮긴 뭐가 괜찮아. 이런 건 내가 더 잘 알거든? 아무리 너라도 몸이 차가워지면 안 된다고.”
담덕의 손을 밀어내고 다시 옷을 벗기 시작하니 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어쩔 줄 모르던 그가 결국 입술을 질끈 깨물고 나를 꽉 껴안았다. 옷을 벗고 있던 자세 그대로 단단히 붙잡힌 탓에 더 이상 손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벗지 말라니까!”
“아까는 먼저 벗으라더니!”
“그건 다른 상황이잖아!”
“아무튼 난 벗을 거라고!”
서로 왁왁대며 목소리를 높이는 와중에 위에서 헛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고개를 드니 지설이 예의 그 황당한 눈으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금 그건 도대체 무슨 대화입니까?”
아직도 내가 외쳤던 ‘아무튼 난 벗을 거라고!’ 하는 소리가 구덩이 안을 맴돌고 있었다.
“게다가 그 자세는 또 뭐고요.”
지설의 지적에 나와 담덕이 후다닥 떨어졌다. 그 모습에 지설이 긴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이렇게 좋은 시간을 보내고 계신 줄 알았으면 급히 찾지 않는 건데요.”
“헛소리.”
담덕이 부러 차갑게 지설의 말을 잘라 내며 고개를 들었다.
“혼자 힘으로 올라가긴 힘들겠다. 위에서 끈이라도 내려 줘야 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아도 이미 동굴에 사람을 보냈습니다. 곧 가져올 겁니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나?”
“태자님께서 옷을 벗어 던지기 시작하실 때부터였을까요.”
“그랬으면서 입을 다물고 고약한 구경을 해?”
“썩 좋아 보이시기에 그냥 두었을 뿐입니다.”
담덕이 얼굴이 보기 좋게 구겨졌다. 그가 지설을 향해 한 소리 하려는 그때 구덩이로 형오의 얼굴이 삐져나왔다.
“왔습니다! 제가 끈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래. 근처 나무에 고정해 아래 내려보내라.”
“예. 걱정 마십시오!”
형오가 씨익 웃으며 사라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구멍 아래로 긴 끈이 내려왔다.
이걸 어떻게 타고 올라가지.
아득한 기분에 입을 쩍 벌리니 담덕이 내 머리를 가볍게 밀었다.
“타고 올라가라고 안 시켜.”
“그럼?”
“끈을 꽉 붙잡고 있어. 위에서 끌어 올리게 할 테니.”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손에 끈을 감았다. 내가 단단히 끈을 붙잡은 것을 확인한 담덕이 나를 번쩍 들어 올리자, 위에 있던 형오와 지설이 온 힘을 다해 나를 끌어 올리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힘을 쓰자 빠져나오는 것은 금방이었다. 끈에 쓸린 팔이 아려 왔지만 빠져나온 것만 해도 감지덕지였다.
나를 위에 올린 후 지설은 다시 끈을 아래로 내렸다. 담덕은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혼자서 끈을 타고 위로 올라왔다. 상의를 훌렁 벗어 던진 담덕의 꼴을 보고 지설이 미간을 찌푸렸다.
“옷은 그대로 벗어 두고 오신 겁니까?”
“흙투성이가 되어서 그냥 뒀다. 동굴로 돌아가기나 하자.”
담덕이 손을 휘휘 저으며 앞장섰다. 나도 떨리는 몸을 애써 진정시키며 재빨리 그의 뒤를 따랐다.
동굴에 도착하니 기다리고 있던 병사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가 한참이나 돌아오지 않아 온 산을 다 뒤졌다고 했다. 병사들의 휴식을 위해 늑대를 잡을 때도 깨우지 않았는데, 시답잖은 일로 소란을 피운 셈이 되어버렸다.
“다들 잠깐 나가 있어.”
그렇지 않아도 미안한데 담덕은 오자마자 병사들을 밖으로 내쫓았다. 나를 위해서였다.
“우희. 넌 옷 갈아입고.”
미안했지만 젖은 옷을 계속 입고 있을 수는 없었다.
담덕의 지시에 동굴이 텅 비자 나는 재빨리 마른 옷으로 갈아입고 불 앞에 젖은 옷을 늘어놓았다. 차마 속옷까지 늘어놓을 수는 없어 젖은 것을 대충 짐 가방 옆에 넣어 두고 동굴 밖으로 목을 배꼼 내밀었더니 병사들이 길게 하품을 하고 있었다.
“이제 들어와도 괜찮습니다.”
입구 근처를 지키고 있던 태림에게 말했더니 그가 고개를 끄덕이고 병사들을 안으로 들여보냈다. 안으로 돌아가는 병사들의 발걸음이 무척이나 무겁게 느껴졌다.
그 뒷모습을 한참이나 보고 있으니 뭐라도 해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담덕이 말했던 내 도움이 필요한 때가 바로 지금이었다.
나는 그대로 짐 가방을 뒤져 작은 함을 하나 꺼내 들었다. 아버지와 제신에게 주기 위해 만들어 온 환약인데, 함께 고생한 병사들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나눠 줄 수 있었다.
“태림.”
나는 제일 먼저 가까이 있는 태림에게 다가가 환약을 하나 건넸다. 그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내 손을 바라보았다.
“받아요. 공진단이라고, 기력 보충에 좋은 환약이에요. 녹용, 당귀, 사향, 산수유를 넣어서 만들었어요.”
척 듣기에도 귀한 약재가 들어간 환약이었다. 태림이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제게 주시는 겁니까?”
“그럼요. 어서 받아요.”
“……감사합니다.”
태림의 다음은 지설이었다.
“지설 님, 이건 공진단인데…….”
“태림에게 말하시는 걸 이미 들었습니다. 감사히 잘 먹지요.”
지설은 망설이지도 않게 환약을 입안에 집어넣었다. 쓴맛이 입에 번지는지 미간을 찌푸렸지만 몸에 좋은 약이 원래 다 그런 법이었다.
이제 병사들의 차례였다. 나눠 주기 위해 병사들에게 몸을 돌리니 벌써부터 그들이 기대에 찬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자네들도 이리 와서 받아 가. 새벽에 일어나 고생했어.”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병사들이 앞으로 몰려들었다.
“아가씨. 몸에 좋은 거라니 두 개 먹어도 됩니까?”
“주통촌에서도 내가 그랬지. 얼마나 쓰느냐도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