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낙화유수-4화 (5/38)

4장. 도압성으로

몇 년 전 도압성으로 떠나던 병력과도 비교가 안 되는 단출한 인원이었다.

담덕과 그를 수행할 장수 둘에 하사품을 옮길 병사 열, 거기에 마지막으로 나까지. 채 스물이 안 되는 사람들이 이른 아침부터 궁궐 밖으로 통하는 거대한 문 앞에 도열했다.

“태자는 나를 대신해 가는 것이다. 이를 잊지 말고 한 치의 부족함도 없이 나의 병사들에게 내 마음을 전달해야 할 것이야.”

태왕이 담덕의 어깨를 두드리며 당부했다. 말투는 엄했지만 눈빛에는 염려가 담겨 있었다. 태자가 된 후 담덕이 이렇게 멀리 국내성을 떠나는 것은 처음이었으니 그로서도 걱정이 클 터였다.

담덕도 태왕의 걱정을 알아챈 것 같았다. 그는 평소보다 더 당당하고 밝게 웃어 보이며 고개를 숙였다.

“물론입니다. 폐하의 뜻을 한 치의 부족함 없이, 무사히 전하겠습니다.”

“무사히…… 그래. 무사히 전하거라.”

태왕이 그렇게 말하며 담덕의 어깨를 꽉 부여잡았다. 어깨에서 느껴진 무게감에 담덕이 고개를 들자 태왕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제 그만 떠나 보라는 뜻이었다.

마지막으로 태왕에게 웃어 보인 담덕이 뒤돌아서서 대기하고 있던 장수 둘을 바라보았다. 순노부 사씨 가문의 지설과 평민 출신의 장수 태림으로, 담덕이 태자가 되면서부터 그를 모시고 있는 호위들이었다.

“지설, 태림. 출발하자.”

담덕의 명에 두 사람이 분주하게 움직여 병사들에게 지시를 내리자 병사들이 준비된 말 위에 올라탔다. 빠른 이동을 위해 최대한 인원과 짐을 줄여 전원 말을 타기로 한 것이다.

하사품은 최대한 분배하여 열 명의 병사들이 말에 싣고, 식량은 마을을 지나며 현지에서 조달할 계획이었다.

병사들의 준비 상태를 확인한 지설과 태림까지 말에 올라타자 나와 담덕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남겨진 말도 두 필이었다.

말 위에 안착한 사람들의 시선이 약속이나 한 듯이 나와 말을 오갔다.

조그마한 내가 이렇게 커다란 말에 제대로 오를 수나 있을지 모르겠다는 눈빛들이군.

“우희, 우리도 서두르자.”

“네, 태자님.”

다른 사람들을 의식해 말을 높이자 말에 오르려던 담덕이 놀라서 나를 바라보았다.

“너 왜…….”

“왜 그러십니까, 태자님?”

담덕의 말을 자르며 다시 한번 ‘태자님’을 강조했더니, 병사들과 내 눈치를 살피며 몇 번 망설이던 그가 결국 아무런 말도 않고 말에 올라탔다. 말 위에 안착한 그의 얼굴이 어쩐지 쑥스러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속으로 웃음을 삼키며 내게 준비된 말을 쓰다듬었다. 태왕이 선물해 준 검은 말, 가륜이었다.

쓰다듬는 손길에 가륜이 투레질을 하며 내 손에 머리를 비볐다. 도압성으로의 여정을 준비하느라 한동안 찾지 않았더니 손길이 꽤나 그리웠던 모양이었다.

“도와드리겠습니다.”

가까이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태림이 무뚝뚝한 얼굴을 한 채 내 옆에 다가와 있었다. 대답이 들려오면 곧장 말에서 내려와 나를 도울 기세였다.

“괜찮습니다. 혼자 탈 수 있어요.”

“말이 꽤 큽니다.”

‘그러니 혼자서는 힘들 겁니다’라는 이야기가 생략된 말이었다.

태림의 뒤에 선 지설도 그에게 동의한다는 듯 삐딱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담덕에게 전해 듣기로 지설이 나의 동행을 가장 많이 반대한 사람이라고 했다.

“정말 괜찮아요.”

나는 마지막으로 가륜의 콧잔등을 매만진 뒤 가볍게 그 위에 올라탔다. 군더더기 없는 동작에 병사들은 물론이고 지설과 태림까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감탄이 담긴 눈빛에 괜히 으쓱해지는 기분이었다.

놀라지 않은 사람은 담덕뿐이었다. 종종 말을 타고 산책을 나간 적이 있는 담덕은 내 기마 실력을 잘 알고 있었다.

“더 늦기 전에 출발하지. 궐문을 열어라.”

담덕의 명에 굳게 닫혀 있던 궐문이 열렸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태왕에게 눈짓으로 인사한 담덕이 말을 달려 앞서 나갔다.

그 옆을 나와 장수들이 재빨리 따라붙었다. 뒤편으로는 병사들이 말을 달려오고 있었다.

집들이 늘어선 거리를 지나 국내성 가장 바깥의 성문을 통과하자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사람이 살지 않는 자연의 풍경이었다.

다음 마을이 나오기 전까지 쉬지 않고 이동할 예정이니 한동안 풀과 흙, 나무밖에 볼 것이 없었다. 시큰둥한 얼굴로 말을 몰고 있으니 옆에서 달리던 지설이 의외라는 얼굴로 내게 이야기를 붙였다.

“말을 생각보다 능숙하게 다루시는군요.”

“제가 말은 좀 탑니다. 저희 집안 오라버니들도 기마로는 절 못 당해 내셨어요.”

내 말에 지설이 입을 꾹 다물었다. 누가 보아도 나의 말 타는 실력에는 의문을 표할 수 없었다. 내가 능숙하게 말을 다루는 모습을 잠시 살피던 지설이 곧 내게서 시신을 돌리며 정면을 바라보았다.

“금방 지칠 겁니다. 사내와 여인의 체력은 다르니까요. 그것이 일행의 발목을 잡겠지요. 그래서 저는 지금도 아가씨의 동행에는 반대입니다.”

“그렇게 말하셔도…… 이미 함께 가고 있는데요.”

“제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니 높은 분의 말씀에 따를 뿐입니다만…….”

거기까지 말한 지설이 슬쩍 담덕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을 느꼈음이 분명한데도 담덕은 정면만 바라보며 달릴 뿐이었다.

잠시 담덕을 보던 지설의 눈이 다시 나를 향했다.

“지금은 초반이라 마음이 여유롭지만 시간이 지나고 몸이 피로해지면 다들 자신밖에 챙길 수 없습니다. 곤란한 상황에 처하셔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 아가씨로 인해 일정이 지체되지 않도록 주의하셔야 할 겁니다.”

“걱정해 줘서 고맙습니다. 짐이 되지 않도록 노력할게요.”

“이건 걱정이 아니라…… 하.”

웃으며 대답하는 나를 보며 지설이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휘휘 내젓는 얼굴에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무튼 저는 경고했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지설이 말의 배를 차 앞서 나갔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담덕이 슬쩍 내 곁으로 다가왔다.

“너무 마음 상하진 마.”

그는 여전히 앞서가는 지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가지고 가는 식량이라고 해 봐야 각자 먹을 물과 육포 조금뿐이잖아. 중간에 조금이라도 지체되어 예정이 틀어지면 마을에 들르지 못하고, 마을에 들르지 못하면 식량을 조달할 수 없게 돼. 힘들고 지치는데 배까지 곯으면 다들 힘들어질 테니 신경이 많이 쓰이는 모양이다. 도압성까지의 일정과 식량 조달을 모두 저 녀석이 계산했거든.”

“지설 님이 이 일행의 병참 담당입니까?”

“나는 경험이 적고, 태림은 이런 재주가 없으니…… 맡을 사람은 지설뿐이지.”

병력을 이동할 때 가장 머리 아프고 피곤한 역할이 물자 관리와 보급을 담당하는 병참이었다. 잘해도 공이 잘 드러나지 않지만 못하면 곧장 빈틈이 보여 욕을 먹기 십상이었다.

“어려운 역할을 맡으셨네요. 배곯지 않으려면 지설 님께 잘 보여야겠는걸요? 쉽지는 않아 보이지만…….”

처음부터 비호감으로 시작했으니 이를 극복하고 잘 보이려면 갈 길이 멀었다.

지설의 뒤통수를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더니, 주위의 눈치를 살피던 담덕이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그런데 언제까지 그럴 거냐?”

“뭐가 말입니까?”

“그…… 말 높이는 거 말이야.”

그렇게 말하는 담덕의 얼굴이 묘하게 상기되어 있었다.

“설마 지금…… 부끄러워하시는 겁니까?”

“부끄러운 게 아니라 어색해서 그런다. 어울리지 않게 웬 높임말이야?”

“보는 눈이 이렇게 많은데 어찌 태자님께 말을 놓습니까.”

나는 조심스레 주변을 살폈다. 지설과 태림이야 나와 담덕의 친분을 어렴풋이 알고 있으니 상관없지만 병사들은 달랐다. 태자에게 함부로 말을 놓는 모습을 보였다간 담덕의 권위에 흠집이 날 수도 있었다.

그런 나의 넓고 깊은 생각을 존중해 줄 마음이 없는지 담덕이 혀를 끌끌 찼다.

“네가 언제부터 사람들 눈치를 봤다고 그래?”

“여태까지는 그럴 필요가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렇지요. 지금은 예의를 차려야 할 시간입니다. 어색해도 좀 참으십시오, 태자님.”

“그럼 그 태자님이라는 말이라도 하지 마라. 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니 낯간지러워 죽을 것 같다.”

질린 얼굴을 하며 고개를 내젓는 것을 보니 어색하기는 한 모양이었다. 나는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과장스럽게 눈을 크게 떴다.

“아니…… 태자님을 태자님이라고 부르지 못하게 하시면 저는 태자님을 도대체 무엇이라 불러야 합니까? 태자님은 태자님인데, 태자님을 태자님이라고 불러야지요.”

일부러 태자님이라는 말을 강조하며 말했더니 담덕이 입을 쩍 벌렸다.

“……내가 네 청개구리 같은 성격을 잠시 잊었다. 그래. 불러라. 마음껏 불러.”

“예, 태자님. 명대로 하겠습니다.”

능청스러운 대답에 길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젓는 담덕의 귀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아니, 태자님이라는 말이 그렇게 어색한가?

놀림거리를 하나 찾았으니 도압성으로 가는 길이 심심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 * *

“전하. 주통촌입니다.”

앞서 가던 지설이 뒤로 말을 몰아 담덕 옆으로 다가왔다.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눈을 돌리니 저 멀리 작은 집 몇 채가 옹기종기 모인 마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주통촌이라면…… 술을 빚어 파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로군요.”

고구려 사람에게 술은 생활의 일부였다. 밤늦게 술잔을 기울이며 춤추고, 노래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일상이었다. 동맹제라도 열리는 날이면 하루 종일 술판이 벌어졌다.

덕분에 고구려에서는 술 만들어 파는 사람들의 벌이가 제법 좋았다. 사정이 넉넉하면 마음도 너그러울 테니 그들이 모여 사는 주통촌이라면 하룻밤 신세 지기에도 나쁘지 않은 곳이었다.

잠시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는 하늘을 바라보던 담덕이 지설을 향해 물었다.

“오늘은 저기서 신세를 질 생각인가?”

“예. 우선 병사 두엇과 함께 마을로 가 상황을 살피겠습니다.”

“그래. 마을 사람들이 무장한 병사들을 보고 겁먹지 않도록 친절하게 대해라.”

“그리하겠습니다.”

담덕의 허락에 지설이 병사 둘을 이끌고 마을을 향해 달려갔다.

덜그덕 소리를 내며 멀어지는 셋을 바라보던 담덕이 곧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따라오기 힘들진 않아?”

“말 타는 것 정도는 식은 죽 먹기인 걸요. 문제없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피곤해 죽을 지경이었다. 말 타는 것쯤이야 문제가 없지만 이렇게 오랫동안 말 위에서 시간을 보낸 건 처음이었다.

어찌나 피곤한지 아직 저녁을 먹기 전인데도 밥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한시라도 빨리 잠자리로 뛰어들어 자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이런 마음을 내색할 수는 없었다. 도끼눈을 뜨고 나를 살피는 지설의 눈치가 보인 것도 있었지만, 나 때문에 속도가 늦어진다면 일행 전체가 피해를 입는다는 생각이 더욱 부담스러웠다.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니 병사들은 출발 때와 거의 비슷한 얼굴이었다. 역시 훈련받은 장수들의 체력은 남달랐다. 나도 짐이 되지 않으려면 최대한 그들에게 속도를 맞춰야 했다.

“전하. 신세 질 집을 구했습니다.”

병사들의 얼굴을 살피는 사이 지설이 돌아왔다. 다행히 마을 사람들과 이야기가 잘된 모양이었다.

하지만 좋은 성과를 얻고서도 지설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담덕도 그 점을 알아챈 것 같았다.

“잘 됐다. 그런데 무슨 문제라도 있나?”

“아닙니다. 문제라기보다는…….”

잠시 망설이던 지설이 담덕의 눈치를 보다 조심스레 입을 뗐다.

“마을 분위기가 조금 이상합니다.”

“어떻게 이상하다는 거지?”

“촌장은 친절했으나 어째서인지 표정이 어둡고 안색이 좋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살고 있다는 흔적은 분명 있는데, 나와 보는 사람이 몇 없이 조용했고요.”

“인기척은 느껴지는데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확실히 이상하긴 하군.”

“의심스러우시면 오늘은 그냥 야영을 할까요?”

최대한 마을에 들러 쉴 수 있도록 일정을 구성했지만 피치 못할 경우에는 야영을 할 수도 있다고 했다. 지설은 이에 대한 대비도 미리 해 둔 모양이었다. 하지만 잠시 고민하던 담덕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다. 앞으로 얼마나 야영을 하게 될지 모르는데 벌써부터 체력을 소비할 순 없지. 게다가 눈앞에 마을을 발견했는데도 야영을 한다면 병사들이 심적으로 더 지칠 거다. 우선 마을로 가 보자.”

“예. 그럼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지설을 따라 마을에 당도하니 그의 말처럼 분위기가 묘했다. 저녁 시간인데도 활기가 느껴지지 않고 전반적으로 기운이 가라앉아 있었다.

들어서자마자 무거운 분위기를 느낀 담덕의 얼굴이 조금 굳어졌다. 하지만 우려와 달리 말에서 내린 우리 앞에 나타난 촌장은 친절했다.

“먼저 오셨던 나리께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술을 보관하는 창고가 있는데, 거기 있던 술을 며칠 전 상인에게 넘겨 그곳이 비어 있습니다. 그곳에서 주무실 수 있도록 준비해 드리지요.”

촌장의 안내를 따라 다다른 창고는 생각보다 안락해 보였다. 바닥에 짚을 깔고 중앙에 화로까지 두니 제법 편안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국내성 거처보다야 모자라지만 야영보다는 여러모로 나은 환경이었다.

“준비해 줘서 고맙네.”

“아닙니다. 사례도 충분히 주셨고…….”

담덕의 인사에 촌장이 지설의 얼굴을 바라보며 얼버무렸다. 갑작스럽게 구한 잠자리치고는 질이 좋다 싶었더니 아무래도 그가 사례금을 두둑하게 챙겨 준 모양이었다. 역시 이 일행의 돈줄은 지설이었다.

“아가씨는 이쪽이 아닙니다.”

지설이 감탄하며 창고 안으로 들어서려는 내 팔을 붙잡았다. 의아하게 그를 올려다보니 지설이 어느새 촌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말했던 것처럼 두 분은 자네 집에서 모셔 주게.”

“여부가 있겠습니까. 두 분은 저를 따라오십시오.”

지설과 촌장이 말하는 두 사람이 나와 담덕이라는 건 분명했다. 나는 팔목을 잡은 지설의 손을 떼어 내며 눈을 크게 떴다.

“아닙니다. 저도 여기에 있겠습니다.”

“그건 도련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실 텐데요.”

촌장의 시선을 의식한 탓에 담덕을 칭하는 호칭이 ‘도련님’으로 바뀌어 있었다.

지설의 말에 고개만 돌려 담덕을 보니 그가 동의한다는 듯 묵묵히 서 있었다.

“정말 괜찮은데…….”

태자인 담덕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지설이나 태림, 병사들과 크게 사정이 다르지 않은 내가 특별한 취급을 받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피고 있으니 지설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촌장을 따라가시죠. 아가씨가 여기 계시면 도련님도 안 가신다 할 텐데 그러면 제가 아주 곤란해집니다. 게다가 이 녀석들도 편하게 못 쉬고요. 쉴 때까지 아가씨를 눈치를 보게 하실 겁니까?”

지설의 말이 옳았다. 이미 창고 안에 들어선 병사들이 우리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며 난처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확실히 귀족과 같은 곳에서 쉬라고 한다면 마음 놓고 늘어지긴 힘들겠지.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을 못 했네요. 다들 편히 쉴 수 있게 자리 피해 줄게요.”

상황을 납득한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앉으려던 자세 그대로 굳어 있던 병사들의 얼굴이 풀어졌다. 그들은 한결 편한 얼굴로 짚더미 위에 몸을 누이며 저들끼리 오늘 있었던 일들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지설 님과 태림 님도 함께 가시는 거죠?”

두 사람은 담덕의 호위이니 그를 곁에서 지켜야 하고, 그러려면 같은 곳에 머물러야 했다. 내 짐작이 맞았는지 태림이 고개를 숙였다.

“예. 제가 두 분을 모실 겁니다.”

“지설 님은요?”

“전 여기서 병사들과 있겠습니다. 아무도 없으면 이 녀석들이 어디까지 늘어질지 몰라서요. 태림은 평민 출신이지만 저보다 훨씬 검을 잘 다루니 믿으셔도 됩니다.”

나는 가만히 서서 태림과 지설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역할이 어떻게 나눠지는지 대충 알 것 같았다. 지설은 머리를, 태림은 검을 쓰는 쪽이었다.

“그럼 가시지요.”

우리의 대화가 마무리된 것을 보고 촌장이 끼어들었다. 그는 우리를 자신의 집으로 안내하며 마을에 대해 소개하기 시작했다.

“벌써 5대째 술을 만들고 있습니다. 배와 오얏을 써서 과실주를 만드는데 향이 아주 끝내주지요. 제가 저녁때 한잔 대접하겠습니다. 술 만들기 싫다고 떼를 쓰던 제 아들놈도 술맛을 한번 보더니 이 마을에 눌러앉았다니까요.”

“그런가. 한데 마을이 조용하군. 저녁 준비를 하는지 연기 나는 집은 많은데 정작 사람은 보이지 않으니 말이야.”

촌장의 자랑을 한 귀로 흘려버린 담덕이 주변을 살피며 물었다. 그의 질문에 신나서 떠들던 촌장의 입매가 굳어졌다.

“예, 뭐……. 다들 경계심이 많아서요. 외지인이 온다 하니 모두들 낯설어 집 안에 틀어박힌 게지요.”

거짓말이었다. 지설은 그가 들어섰을 때부터 이미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담덕이 더 묻기도 전에 촌장이 걸음을 멈추었다.

“이곳입니다. 두 분은 이쪽 방을 쓰시지요. 방이 하나뿐이지만 그다지 작진 않으니…….”

“방이 하나뿐이라고?”

담덕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촌장은 그 얼굴을 보며 무엇이 문제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 창고에 계시는 그 나리께 마을에 쓸 만한 방이 하나뿐이라 했더니 두 분은 남매시니 같은 방을 써도 문제없을 거라고 하시던데요.”

남매라니. 그런 설정이었나. 미리 설명은 좀 해 주지.

속으로 지설의 불친절함을 토로하는 그때 얼굴에 따가운 시선이 닿았다. 고개를 들어보니 담덕이 난처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왜 그러십니까?”

“방이 하나뿐이라잖아.”

“그게 왜요?”

“……넌 괜찮은 거냐?”

“안 괜찮을 건 또 뭡니까.”

말을 하면 할수록 담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영문을 몰라 눈을 깜빡이니 결국 그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래. 안 괜찮을 건 또 뭐냐.”

담덕의 한숨과 함께 우리는 촌장이 안내한 방 안으로 들어섰다.

촌장이 장담한 것처럼 내부는 두 사람이 지내기에 충분할 만큼 넓었다. 귀족들이 지내는 집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기본적인 가구들이 모두 갖추어져 있어 일반적인 평민들의 집보다는 사정이 나았다.

“시집간 제 딸이 지내던 방인데…… 지내기에 괜찮으실지 모르겠습니다.”

촌장이 방 안을 둘러보는 우리의 눈치를 살피며 어둠을 밝힐 등잔불을 켰다. 객관적으로도 훌륭한 방이었지만 혹여나 손님들의 마음에 차지 않을까 걱정스러운 모양이었다.

다행히도 나와 담덕 모두 환경에 까다로운 편이 아니었다.

“충분하니 걱정 말게.”

“제 안사람이 곧 식사도 안으로 들일 겁니다.”

“그럴 필요 없네. 식사는 창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할 테니까.”

“예? 창고에서 드시겠다고요?”

담덕의 말에 촌장이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놀란 것은 촌장뿐만이 아니었다. 묵묵히 담덕의 곁을 지키고 있던 태림도 그의 계획을 전혀 몰랐는지 당황스러운 눈치였다.

“담덕님. 그곳은 제대로 된 탁자도 없어 열악하니…….”

“다들 그 열악한 곳에서 식사를 하는데 어찌 나만 융숭한 대접을 받겠어? 잠자리를 여기로 잡은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태림의 말을 자르고 차분히 제 생각을 말하던 담덕의 눈길이 잠시 내게 머물렀다가 곧 촌장을 향했다.

“아무튼 식사는 다른 이들과 함께하지. 특별히 더 신경 쓸 것 없이 내 몫도 다른 이들과 똑같이 준비해 주면 그걸로 충분하네.”

“나리의 뜻이 그렇다면 그리 준비는 하겠습니다만…… 아가씨의 식사는 어찌할까요?”

촌장이 찜찜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마음 같아서는 식사도 거르고 휴식을 취하고 싶었지만, 체력을 생각하면 든든하게 먹어 두는 편이 좋을 터였다.

“내 것도 신경 쓰지 말고 같이 준비하시게.”

“예에……. 그리하지요.”

촌장이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섰다. 그가 떠나자마자 태림이 난처한 얼굴로 담덕에게 다가섰다.

“담덕님, 창고에서 식사를 하겠다고 하시면 지설이 까무러칠 겁니다.”

“아마 그렇겠지.”

“그 잔소리를 어찌 감당하시려고요?”

“홀로 좋은 음식을 먹고 마음이 불편한 것보다 지설의 잔소리를 듣고 내 마음 편한 것이 더 낫다.”

그렇게까지 말하니 태림도 할 말이 없는 모양이었다.

태림이 우물쭈물하는 사이를 놓치지 않고 담덕이 밖으로 나섰다. 어쩔 수 없이 태림도 그 뒤를 따랐다.

“지설 님과 태자님 사이에서 태림 님이 고생이 많으십니다.”

난처한 얼굴로 담덕을 따르는 태림이 안되어 보여 위로의 말을 건넸더니, 어쩐지 그가 더욱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어찌 제게 말을 높이십니까. 그저 태림으로 족합니다. 말을 편히 하십시오.”

“태자님의 호위시니 제가 예의를 갖추는 것이 당연한걸요.”

담덕의 호위는 나라에서 정식으로 내린 직위였다. 공식적으로는 가문의 이름 말고 내세울 것이 없는 나보다 태림이 더 높은 사람이었다.

“아닙니다. 출신이 미천한 자에게 연가의 아가씨께서 어찌…… 부디 편하게 대해 주십시오.”

“저야말로 태림 님께서 그리 깍듯하게 대하시면 마음이 불편합니다.”

그런 식으로 몇 번이나 더 같은 대화가 오갔다. 서로 편히 대하라며 같은 말을 반복하는 우리를 보며 결국 담덕이 나섰다.

“우희, 너는 내게도 반말을 하는 주제에 태림에게는 높임말을 한단 말이야?”

“그거야……”

“태림. 너도 그렇다. 내게는 담덕 님, 담덕 님하고 이름을 부르면서 우희에게는 아가씨라고 불러?”

“그것은…….”

정확한 담덕의 지적에 나와 태림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서로 눈빛을 교환한 우리는 결국 한 걸음씩 물러서기로 했다.

“그럼 최대한 편하게 대할게요. 태림도 날 우희라고 불러 줘요.”

“예, 우희 님. 그리하겠습니다. 도압성으로 가는 동안 잘 부탁드립니다.”

“내가 해야 할 말인걸요. 짐이 되지 않게 노력할게요.”

어색해하며 서로의 호칭을 정리하는 동안 우리의 걸음이 창고에 닿았다. 방으로 갔던 담덕이 다시 창고에 나타나자 바닥에 편안하게 늘어져 있던 지설과 병사들이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여기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혹 무슨 문제라도 생겼습니까?”

황급히 묻는 지설의 손에 커다란 주먹밥이 쥐어져 있었다. 그새 촌장의 부인이 식사를 준비해 준 모양이었다.

“밥 얻어먹으러 왔다.”

“예? 밥이요?”

의아하게 묻는 지설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담덕이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망설임 없이 중앙에 놓인 광주리 앞에 선 담덕은 그 위에 수북하게 쌓인 주먹밥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의문에 찬 병사들의 시선이 담덕의 일거수일투족을 따라 움직였다. 담덕은 그들의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듯 자연스레 짚 더미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아 주먹밥을 베어 물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지설이 입을 쩍 벌렸다.

“전하.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밥 먹고 있는데. 내가 밥 먹는 모습이 그리 신기한가? 왜 다들 나만 보고 있어? 어서 먹지 않고.”

“제 말은, 왜 여기에서 식사를 하시냐는 겁니다. 촌장에게 따로 식사를 올려 달라 부탁했는데요.”

“아. 그거 됐다고 했어. 내 취향은 이쪽이 더 맞아서. 우희, 너도 어서 먹어.”

담덕이 주먹밥 하나를 더 집어 내 쪽으로 던졌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온 주먹밥을 따라 지설과 병사들의 시선이 이번에는 내게로 향했다. 주먹밥은 가볍게 내 손 위에 안착했다.

건장한 청년들이 얼빠진 얼굴로 나와 내 손의 주먹밥을 보는 모양이 꽤 우스웠다. 나는 웃으며 주먹밥을 베어 물고 눈에 보이는 짚 더미 위에 대충 걸터앉았다. 동시에 모두의 눈이 커졌다.

“아가씨께서는 또 왜……?”

“제 취향도 이쪽이 더 맞아서요. 이 주먹밥 맛있네요. 다들 어서 먹어요. 배고플 터인데.”

내 말에 얼떨떨한 얼굴로 굳어 있던 병사들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설은 태연하게 주먹밥을 먹고 있는 담덕과 나, 체할 것 같은 불편한 얼굴로 주먹밥을 집어 들고 자신의 눈치를 보는 병사들을 살피다 헛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영문을 모를 분들입니다.”

지설이 손에 들고 있던 주먹밥을 베어 물었다. 그것이 신호가 되었는지 병사들이 한결 편해진 얼굴로 주먹밥을 먹기 시작했다.

“좋은 방, 좋은 음식을 두고 왜 여기 오신 겁니까?”

“사람 많은 쪽이 더 재밌잖아.”

지설의 질문에 담덕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는 여전히 황당한 얼굴로 자신을 보는 지설의 눈을 피해 옆자리에 앉은 병사에게 눈을 돌렸다.

사발에 든 물을 한 모금 들이켜던 병사가 담덕과 눈이 마주치자 먹던 물을 뱉으며 기침을 해 댔다.

“나도 물 한잔 주겠어?”

“아…… 이건 물이 아니라 술입니다. 이곳 주통촌에서 만드는 과실주인데 촌장이 목이나 축이라며 주었습니다.”

“과실주?”

그러고 보니 촌장이 이곳 과실주 자랑을 하며 식사 때 맛보게 해 드리겠다 했던 것이 떠올랐다. 담덕도 같은 말을 떠올렸는지 병사가 손에 든 사발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를 어떻게 오해했는지 지설이 나섰다.

“긴장을 늦추어서는 안 되지만 반주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아 허락했습니다.”

지설의 말에 일행의 지휘자인 태자의 허락 없이 술을 마셨다는 것을 깨달은 병사가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담덕은 손을 휘휘 내저으며 그를 안심시켰다.

“아아. 그 정도는 나도 이해해. 우리 고구려 용사들에게 술이란 물과 같은 존재인데 피로를 달래기 위한 술 한잔을 어찌 나무라겠어. 내게도 한 잔 주지. 촌장이 자랑하던 그 과실주 맛 한번 볼까.”

“예, 예! 전하.”

생각지 못한 말에 당황한 병사가 자신이 마시던 사발을 그대로 담덕에게 내밀었다. 지설이 미간을 찌푸리며 그의 행동을 지적하려고 했지만 담덕이 사발로 손을 뻗는 것이 더 빨랐다.

“고맙네.”

하지만 담덕의 인사가 무색하게도 그의 손에 닿기도 전에 사발에 바닥으로 떨어졌다. 태자와의 대화로 긴장한 병사가 실수를 한 모양이었다.

너그럽게 넘어가 줄 법도 한데 지설의 표정이 또 한 번 일그러졌다.

“형오, 자네 정신 좀……”

“으헉.”

지설이 실수를 연발하는 병사, 형오를 향해 못마땅한 얼굴로 훈계하려는 순간. 그가 가슴을 부여잡으며 바닥에 엎어졌다.

“형오!”

“으, 허억. 숨이…… 가슴이…… 답답……”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는 형오의 모습에 당황한 병사들이 그의 곁으로 몰려들었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는 풍경에 반사적으로 몸이 튀어 올랐다.

“다들 비켜요!”

생각보다 날카롭게 나온 외침에도 병사들은 형오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나는 그들 틈을 억지로 비집고 들어가 그의 상태를 살폈다.

형오의 어깨를 붙잡고 상태를 보니 식은땀이 온몸을 뒤덮고 있었고 계속해서 호흡이 가빴다. 어느새 팔다리는 차가워지고 피부는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우웨엑!”

그의 팔다리를 매만지는 순간 그의 입에서 토사물이 쏟아졌다. 덕분에 상의가 토사물로 뒤덮이자 병사들은 물론이고 지설과 태림, 담덕까지 놀라서 입을 벌렸다.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사람은 내게 가장 가까이 서 있던 태림이었다. 그는 형오를 내게서 떼어 내며 나를 살폈다.

“우희 님, 괜찮으십니까? 옷이 엉망이 됐습니다.”

“난 괜찮아요. 안 괜찮은 건 저 형오라는 병사죠.”

나는 내 어깨를 붙잡은 태림의 손을 떼어 내고 다시 형오에게 다가갔다. 어느새 그는 가쁜 호흡을 이기지 못하고 혼절해 있었다.

“우희, 무슨 일이야? 형오는 괜찮은가?”

담덕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나는 토사물에 목이 막히지 않도록 형오의 자세를 고쳐 주며 주먹밥과 술을 바라보았다.

“지금부터 음식에는 손대지 마.”

“음식? 음식이 상하기라도 한 건가?”

“독이야.”

“뭐?”

“이 형오라는 병사의 증상, 전형적인 중독 증상이야.”

“중독? 누군가 일부러 음식에 독을 넣었다는 겁니까?”

지설이 가장 빠르고 민감하게 반응했다. 병사들 사이를 뚫고 들어온 그의 얼굴이 서늘했다.

“그건 모르죠. 하지만 정말 독이라면 음식이 가장 가능성 높으니 이 사람이 손댔던 음식은 먹지 않는 게 안전해요.”

나는 그의 얼굴을 볼 새도 없이 형오의 옷을 풀어 헤치며 호흡 상태를 확인했다.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대니 뺨에 미약하지만 숨이 느껴졌다.

“다행히 숨은 있는데…….”

눈꺼풀을 뒤집어 눈동자를 확인하니 동공이 풀려 있었다. 재빨리 자세를 잡아 준 덕분에 토사물에 기도가 막히지는 않았지만, 이대로 더 두었다가는 숨이 점점 약해지다 결국에는 끊어지고 말 터였다.

“이 사람 오늘 먹은 게 뭐지?”

나는 형오의 옆에서 어쩔 줄 모르는 병사에게 물었다. 독은 종류에 따라 그에 맞는 해독제가 다르기 때문에 한시라도 빨리 독의 종류를 특정하는 것이 중요했다.

“점심때 먹은 육포와 물…… 지금 먹은 주먹밥과 과실주가 전부입니다.”

다급한 나의 물음에 병사가 더듬거리며 형오가 먹은 것들을 나열했다.

“점심때 마신 물과 지금 여기 있는 주먹밥, 과실주는 모두 함께 먹었다. 한데 다른 사람들은 모두 멀쩡하니 이것에 독이 든 것은 아닐 테고…….”

나는 형오의 주머니를 뒤져 그의 육포를 살폈다. 하지만 냄새며 맛 모두 보통의 육포와 똑같아 특별한 문제를 발견할 수 없었다.

“육포에도 특별히 문제가 없는데…… 정말 형오가 먹은 게 이것들뿐인가?”

“제가 알기로는 그렇습니다. 볼일을 볼 때 빼고는 계속 붙어 다녔으니 확실합니다!”

병사가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대답하는 순간 창고 입구에서 소란이 일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싸늘하게 굳은 지설이 촌장을 끌고 와 창고 안으로 내던지고 있었다.

“왜, 왜, 왜 이러십니까, 나으리!”

“몰라서 묻나?”

지설이 검을 뽑아 바닥을 나뒹구는 촌장의 목에 겨누었다. 억울함을 호소하던 촌장의 얼굴이 금세 하얗게 질렸다.

“정말, 정말입니다! 잘 곳을 내어 달라기에 잘 곳을 내주고, 먹을 것을 달라기에 먹을 것을 주었을 뿐인데 어찌 이러십니까!”

“저기 쓰러진 저놈의 꼴을 봐라. 저것을 보고도 계속 발뺌을 할 것이냐?”

지설이 턱짓으로 형오를 가리켰다. 그를 따라 고개를 돌린 촌장의 시선이 형오에게 닿자마자 그렇지 않아도 창백하던 그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기어이 귀신 놈이 외지인에게까지 가서 붙었단 말인가…….”

촌장은 완전히 넋이 나가 있었다. 그의 얼굴에 스친 것은 두려움과 절망이었다.

“헛소리하지 말고 무슨 장난을 친 것인지 어서 말해라.”

“귀신 놈이…… 우리를 모두 죽이려고…….”

“어서 말해!”

“귀신…… 귀신이…….”

계속 귀신이라는 말만 반복하는 촌장의 모습에 지설이 미간을 찌푸리며 그의 멱살을 잡아챘다.

“정말 죽고 싶은 거냐!”

“지설, 진정해라.”

여태까지 뒤에서 상황을 살피던 담덕이 촌장을 앞뒤로 흔드는 지설을 말리며 앞으로 나섰다. 지설이 씩씩대며 담덕의 말에 반발했다.

“하지만 이놈이!”

“우희도 말하지 않았나. 함께 음식을 먹은 우리가 멀쩡하니 그것에 독이 든 것은 아닐 거라고. 정말 영문을 모르는 것일 수도 있다.”

“다른 수를 쓴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확실치 않은 상황이다. 이자를 놓아줘라.”

“어찌 이리 태평하십니까! 독입니다, 독. 지금은 형오가 저리 쓰러져 있지만 그것이 전하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어. 나는 멀쩡하고, 쓰러진 것은 형오다. 지금은 그가 무사히 눈을 뜨게 하는 것이 먼저야.”

담덕의 말에 지설이 여전히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면서도 촌장을 놓아주었다. 밀어내듯 거칠게 놓아주는 손길에 넋이 나간 촌장이 종잇장처럼 가볍게 바닥에 널브러졌다.

그 모습에 담덕이 난처한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틀렸다. 이미 넋이 나갔어. 태림, 지금 상태에서는 아무 대답도 듣지 못할 테니 다른 마을 사람을 찾아와라.”

“예.”

담덕의 명을 받고 태림이 재빨리 창고를 벗어났다. 태림이 나서는 모습을 확인한 담덕이 씩씩대는 지설을 지나쳐 내게 다가왔다.

“상태는 어때? 독은 확실하고?”

“증상만 본다면 그래.”

“목숨이 위험한가?”

“이대로 두면 점점 숨 쉬기가 힘들어지고 결국 죽고 말 거야. 무슨 독을 먹은 건지 찾아서 해독약을 써야 해. 한데 먹은 것이 우리와 다르지 않다니 독의 종류를 특정하기가 힘들어.”

“해독약을 쓰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어?”

“어떻게든 임시로는 숨을 붙여 놓겠지만, 결국 해독약만이 답이야.”

고개를 내젓는 나를 보며 담덕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병사들을 위로하기 위해 떠난 길에서 병사를 잃게 생겼으니 그로서도 암담할 것이다.

그때 다시 한번 입구가 소란스러워졌다. 사람을 찾으러 갔던 태림이 돌아온 것이다.

그의 손에는 안색이 어두운 여인이 두려움 가득한 얼굴로 붙잡혀 있었다.

“그렇다면 저 여인이 답을 주길 바라는 수밖에 없군.”

담덕이 작게 중얼거리며 여인 앞에 섰다. 그녀는 담덕의 얼굴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가, 바닥에 널브러진 촌장을 보며 놀란 눈을 크게 뜨고, 쓰러진 형오를 보면서는 사색이 되었다.

그 변화를 모두 살핀 담덕이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여인에게 말했다.

“보았겠지만 상황이 좋지 않다. 내 병사가 이곳에서 식사를 하다가 쓰러졌는데, 저 녀석이 눈을 뜨지 못하면 내가 이 마을을 전부 쓸어버릴 생각이거든.”

친절한 미소와 달리 그의 목소리는 차갑고 단호했다. 여인은 덜덜 떨며 제 입을 틀어막았다.

“마, 마, 마을을……! 저희는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그저, 그저 그 귀신 놈이…….”

여인이 자신을 붙잡은 태림의 손을 뿌리치고 바닥에 바짝 엎드렸다. 담덕은 그녀를 별다른 감흥 없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귀신. 그래. 촌장도 귀신 이야기를 하더군. 사람의 잘못을 귀신의 탓으로 돌릴 생각인가?”

“아닙니다! 정말 귀신 놈의 소행입니다! 저희 마을 아이들도 그 귀신 때문에 저리되었습니다.”

“마을 아이들도 저리되었다?”

서늘하던 담덕의 목소리가 풀어졌다. 그는 무엇인가 깨달은 눈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마을 아이들, 어찌 되었는지 더 자세히 말해 줄 수 있겠나?”

“아이들, 아이들이…….”

여인이 벌벌 떨며 태림과 담덕의 눈치를 살폈다. 나는 여인의 앞으로 다가가 그녀의 시야에서 두 사람을 가리며 최대한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가 도와줄 테니 떨지 말고 말해 보게.”

따뜻한 말투에 마음이 가라앉은 것인지 여인의 떨림이 조금 잦아들었다. 여인은 쓰러진 형오를 가리키며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몇 해 전부터 아이들이 저런 식으로 먹은 것을 죄 토하더니 결국 죽었습니다. 사는 곳도, 먹은 것도, 쓰러지기 전에 한 일도 모두 다른데 하나같이 토하다 죽으니 귀신에 씐 것이 분명하다고…….”

사람의 죽음이 귀신의 소행일 리 없었다. 하지만 이 시대에는 어느 정도 통용되는 믿음이기도 했다. 답답한 마음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렇게 몇이나 죽어 나갔나?”

“모르겠습니다. 열 명이 넘고부터는 너무 무서워서 세지도 못했습니다.”

“그리 아이들이 죽어 나갈 동안 의원은 어찌 부르지 않았어?”

내 질문에 여인의 입이 꾹 다물렸다. 잦아들었던 떨림도 다시 심해지기 시작했다.

“사실대로 전부 말하게. 그래야 내가 도와줄 수 있으니.”

“처음에는 불렀습니다. 한데 의원도 원인을 모른다 했어요. 그래서 죽은 아이가 운이 없었나 싶었지요.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아이들도 그런 식으로 죽어 나가는 게 아닙니까?”

“원인 모를 이유로 아이들이 죽어 나가니 많이 놀라고 두려웠겠어.”

두 손을 꼭 잡으며 여인을 다독이자 그녀의 눈에서 결국 눈물이 터졌다.

“예. 그랬습니다. 무서웠습니다. 다시 의원을 부르고 싶었지만 술 만드는 곳에서 사람이 죽어 나간다는 소문이 나면 안 된다고, 원인도 모르게 사람이 죽어 나가는 마을에서 만든 술을 누가 사 가겠냐고 촌장님이 말렸습니다. 그 뒤로는 전혀 손쓸 수가 없이 아이들이…….”

일이 어찌 돌아갔는지 알 것 같았다.

의원을 불러도 제대로 원인을 찾아 아이들을 살릴 수 있을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괴이한 소문이 퍼지는 순간 주통촌으로서의 마을이 완전히 무너진다는 것은 명백했다.

불확실한 것에 희망을 가지거나 확실한 것을 피하거나. 촌장은 그 둘 중 확실한 것을 피하는 쪽을 선택했다.

“사람을 살리는 것보다 술을 파는 게 더 중요하던가.”

담덕이 미간을 찌푸리며 촌장을 바라보았다. 비난보다는 안타까움이 섞인 목소리였다.

한번 부정적인 소문이 돌면 이를 다시 긍정적으로 바꾸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아마 촌장으로서도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때문에 세지도 못할 만큼 많은 아이들이 죽었고, 지금 또 한 사람의 목숨이 위태로워졌다. 비밀을 지켜 마을이 번성하더라도 그 안에 살아갈 사람이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여인을 일으켜 세웠다.

“혹 비슷한 증상을 보인 이들 중에 아직 목숨이 붙어 있는 아이는 없을까?”

“며칠 전에 저렇게 쓰러진 아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거동이 불편하고 의식도 불분명해 곧 죽을 거라고……. 혹여나 귀신이 옮겨 붙을까 싶어 아무도 그 집엔 가까이 가지 않습니다. 벌써 죽었는지도 모르고요.”

아직 죽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그와 형오의 상황을 비교해 원인을 찾아볼 수 있을 터였다.

“우선 그 집으로 나를 안내해 주게.”

반가운 마음에 여인을 이끌었더니 그녀가 화들짝 놀라 내 손을 뿌리쳤다.

“안 됩니다! 저한테는 일곱 살 난 아들놈이 있습니다. 그 귀신이 저희 집에 옮겨붙으면 어쩝니까?”

“이보게. 귀신이 사람 목숨을 앗아 가는 법은 없어.”

“그럼 그 많은 아이들은 왜 죽었는데요? 귀신의 소행이 아니면 어찌 그렇게 죽어 나갑니까?”

“병은 사람이 만드는 것이지 귀신이 만드는 것이 아니야. 언제까지 귀신 핑계를 대며 손을 놓고 있을 건가?”

“귀하신 분들 집에는 귀신이 안 붙으니 모르시는 게지요. 저는 못 갑니다. 절대 못 갑니다.”

여인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뒷걸음질을 쳤다. 다시 한번 여인을 설득해 보려는 찰나 가만히 상황을 주시하던 담덕이 검을 뽑으며 앞으로 나섰다.

검집에서 검이 뽑히는 소리가 서늘하게 창고 안을 울렸다. 담덕은 검을 그대로 여인의 목에 겨누었다.

놀란 여인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눈을 크게 떴다. 덜덜 떨리는 몸 때문에 목에 금방 상처가 났다.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저 녀석이 눈을 뜨지 못하면 내가 이 마을을 전부 쓸어버릴 생각이라고.”

“흐읍.”

여인이 숨을 들이키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니 선택해. 내가 지금 검을 휘둘러 이 마을 사람 모두의 목을 벨까, 아니면 자네가 그 귀신인지 뭔지가 붙었다는 집에 우릴 데려갈까.”

“저, 저희는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무고한 사람들에게 어찌 대, 대고구려의 용사가 거, 검을 겨누십니까.”

담덕은 애처롭게 떨리는 여인의 목소리를 쉽게 무시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 내 부하가 여기 사람들이 내준 음식을 먹고 쓰러졌어. 난 그를 꼭 살려야겠으니 뭐라도 할 생각이야. 내 말이 농담 같은가? 그래서 대답 대신 쓸데없는 변명이나 늘어놓고 있는 것이고?”

한층 더 서늘해진 목소리에 여인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럼 간단하군. 안내해, 그 집으로.”

“그러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검을…….”

여인의 대답에 담덕이 검을 내렸다. 서늘한 기운이 사라지자마자 여인이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안내해라. 시간이 없다.”

여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겨우 지탱하고 창고 밖으로 나서는 여인을 보니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사람을 무력으로 짓누르는 것에 아무래도 거부감이 느껴졌다.

“이렇게 심하게 할 것까지는 없잖아.”

나는 검을 다시 정리하는 담덕의 곁에 다가가 조용히 속삭였다. 병사들 귀에 담덕을 탓하는 소리가 들어가지 않도록 그의 곁에 바짝 붙었으나, 내 노력이 무색하게도 담덕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얼굴을 굳혔다.

“한시가 급한 거 아니었어? 이게 제일 빠른 방법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야. 진짜 마을 사람들을 죽일 생각도 없었고.”

“네가 그럴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건 나도 알아. 하지만 내가 말로 설득할 수 있었어.”

“그래. 나도 네가 그럴 능력이 있다는 거 알아. 하지만 시간이 오래 걸렸겠지. 그동안 내 부하는 죽음에 가까워지겠고.”

담덕이 의식을 잃고 있는 형오를 힐끗거렸다. 시간이 급한 것은 사실이었기에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어쨌든 해결됐으니 가자. 그 집에서 뭐라도 알아낼 것이 있어야 할 텐데.”

담덕이 먼저 휘청거리는 여인의 뒤를 따랐고, 호위인 태림이 그 곁을 지켰다. 지설 역시 그들을 따라 걸음을 옮기려는 것을 내가 막아섰다.

“지설 님은 여기서 형오를 봐 주세요. 다시 구토를 할 수도 있는데, 토사물에 목이 막히지 않게 봐 줄 사람이 있어야 하거든요. 게다가……”

“그렇게 하죠.”

예상과 달리 지설은 빠르게 내 말에 납득했다. 지설을 납득시키기 위해 더 많은 설명을 준비하던 내가 당황해서 입을 오물거리자 그가 멀어지는 담덕 일행을 가리켰다.

“왜 이렇게 멍하니 서 계십니까? 시간이 없다면서요? 아가씨는 빨리 저쪽을 따라가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지설의 말이 옳았다. 나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이고는 벌써 저만치 멀어진 담덕 일행의 뒤를 따라붙었다.

* * *

“홍매야! 홍매야!”

여인이 고요한 초가 앞에서 다급하게 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애타는 부름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태림.”

기다려서는 답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는지 담덕이 태림을 부르며 고개를 까딱였다. 별다른 지시를 내리지도 않았는데도 태림이 빠르게 움직여 집 안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술독이 늘어선 창고, 이불이 반듯하게 개어진 방, 화기가 전혀 없는 부엌. 문이 하나씩 열릴 때마다 드러나는 것은 텅 빈 방뿐이었다.

이상한 곳으로 안내를 한 것인가 싶어 여인을 바라보니 그녀도 놀란 얼굴로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아니…… 애들이 어디에……?”

여인이 당황하는 사이 태림이 마지막으로 남은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다행히 이번에는 텅 빈 방이 아니었다.

방 안에는 아이가 두 명 있었다. 환자로 보이는 남자아이는 바닥에 누워 이불을 덮은 채였고, 그보다 어려 보이는 여자아이는 갑작스레 열린 문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홍매야!”

여인이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갔다.

“네 오라비는 어떠니? 아직…… 괜찮은 게야?”

익숙한 마을 사람의 부름에도 아이는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서늘한 태림과 담덕의 눈빛 때문인 것 같았다.

가만히 두었다가는 이번에도 검을 빼 들 기세였다. 그 대처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던 터라 이번에는 내가 먼저 선수를 치기로 했다.

“이름이 홍매니? 저기 누워 있는 건 네 오라비 강래고?”

가까이 다가가 눈높이를 맞추며 물으니 머뭇거리던 홍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머니는 어디 가셨어?”

“없어요.”

“그럼 아버지는?”

“아버지도…… 안 계셔요.”

조금 전 머뭇거렸던 대답에 비해 빠르고 명확한 답변이었다. 무슨 소리인가 싶어 여인을 보니 그녀가 우물거리며 상황을 설명했다.

“이 아이의 부모는 몇 달 전 산에 갔다가 산적 놈들에게 변을 당했습니다. 지독한 흉년에 먹을거리를 구하겠다고 부지런히 움직이다 결국…….”

“그럼 보살펴 줄 부모도 없는 아이들을 이리 방치했단 말이야?”

“이리 말하면 매정한 년이라 하실지 모르겠지만, 저희 집 식구들 건사하기도 힘듭니다. 몇 해째 흉년이라 저희 집 식구도 하루 한 끼 먹을까 말까인데 어찌 다른 집을 챙깁니까.”

최근 몇 년 동안 고구려는 흉년으로 힘든 상황이었다. 먹을 것이 부족해 인심이 흉흉해졌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돈벌이가 좋은 주통촌까지 어려울 정도로 국내성 밖 상황이 좋지 않았던 모양이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좋지 않단 말인가.”

담덕이 참담한 얼굴로 여인과 아이들의 몰골을 살폈다. 하나같이 비쩍 마르고 기운이 없으니 병이 창궐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문 채 홍매를 지나쳐 누워 있는 강래를 살피기 시작했다.

아이의 증상은 여인이 말했던 것처럼 형오와 비슷했다. 구토한 흔적이 있고, 호흡이 불규칙하며, 몸은 마비되어 움직임이 없다.

증상만으로 생각한다면 원인은 청산 계열의 독이다. 흔히 범죄 영화나 추리 소설에 등장해 피해자를 순식간에 죽음에 몰아넣는 무서운 독이 청산 계열의 독이었다.

그럼에도 형오나 강래의 숨이 아직까지 붙어 있을 수 있는 것은 현대의 독과 이 시대의 독이 다르기 때문이다.

현대에서 화학적으로 만들어 낸 청산 계열 독은 치사량을 먹으면 짧은 시간 안에 죽음에 이르지만, 이 시대에는 그럴 정도로 강한 독극물이 존재하지 않았다. 자연적으로 추출한 독은 파괴력이 훨씬 낮았다.

대처할 시간이 조금 더 길다는 점은 희망적이었으나, 청산 계열 독을 추출할 수 있는 식물이 너무 많다는 점이 문제였다. 정확한 원인을 찾기 못하면 해독도 요원했다.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내쉬니 옆에서 내가 하는 양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홍매가 물었다.

“우리 오라버니도 죽어요? 옆집 돌개랑 아랫집 사영이처럼? 마을 사람들이 다 그럴 거라고 했으니까 맞겠죠?”

비극적인 사실을 이야기하면서도 홍매는 담담했다. 이 마을에 그만큼 많은 죽음이 있었다는 의미였다.

“귀신이 붙어서 그런 거래요. 그래서 방법이 없대요. 귀신이 옮겨 붙으면 큰일이라고 아무도 우리 집 근처에 안 오고요.”

홍매가 확인이라도 하듯 여인을 바라보자 그녀가 불에라도 덴 듯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검을 들이대고 겁박한 뒤에야 발길을 돌렸으니 평소에는 이곳을 쳐다보지도 않았을 것이 뻔했다.

보살핌을 받지 못한 아이들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강래에게서는 물론이고 홍매의 몸에서도 묵은내가 풀풀 났다.

방 안도 엉망이긴 마찬가지였다. 발치에서 온갖 부스러기가 굴러다니는 것이 보일 정도였다.

“네 오라비가 이리된 것이 사흘 전이라 들었는데, 그럼 넌 사흘이나 여기에서 혼자 오라비를 지킨 거니?”

“네.”

“밥은 어찌하고? 힘들지 않았어?”

“이거 먹었어요.”

걱정을 담아 물었더니 홍매가 당당하게 품속에 넣어 두었던 주머니를 꺼냈다.

작은 손을 주머니 속에 넣어 내용물을 한 움큼 집은 아이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반사적으로 두 손을 펼쳤더니 그 위로 아이가 쥐고 있던 주머니 속 내용물이 쏟아졌다.

“한 끼에 한 주먹씩 먹어요. 그럼 배부르니까.”

지난 사흘간 아이의 끼니를 책임졌다는 음식의 정체를 확인한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아이가 당당히 내민 건 열매를 다 먹고 남은 과일씨였다. 그마저도 겨우 한 주먹이면 양이 많지 않았다.

“……이것만 먹으면서 사흘을 버텼다고?”

황당해서 헛웃음이 나왔다. 그건 담덕도 마찬가지였다.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멍하니 씨를 바라보는 우리에게 여인이 변명을 덧붙였다.

“과실주를 만들고 남은 것들입니다. 알맹이만 쓰고 씨는 모두 버리는데, 요즘 같이 먹을 게 없는 시기에는 이것도 아쉬워서 잘 말려 먹습니다.”

“과실주를 만들고 남았다고? 과실주에는 배와 오얏을 쓴다 하지 않았나? 거기서 나온 씨 같지는 않은데.”

담덕이 씨를 하나 집어 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과실주를 자랑하던 촌장이 배와 오얏으로 술을 만든다 한 것을 나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 씨라기엔 크기가 너무 컸다.

“주재료가 그렇다는 것이고 시기에 따라 살구나 매실이 들어가기도 합니다. 이건 살구씨네요.”

“살구? 이게 살구씨인가?”

“예. 과실주 만든 세월이 얼마인데 그걸 못 알아보겠습니까? 얼마 전이 살구 철이어서 그걸로 술을 많이 만들었습니다. 그만큼 씨도 많이 나왔고요.”

여인의 설명이 맛이 궁금해졌는지 담덕이 씨를 입에 가져갔다. 나는 서둘러 그를 제지했다.

“담덕, 먹지 마.”

단호한 목소리에 담덕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영문을 모르는 듯한 사람들의 얼굴에 머리가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살구씨에는 독성이 있어.”

“살구씨에?”

담덕이 놀란 얼굴로 제 손의 살구씨를 바라보았다.

“면역이 약한 아이들에게는 특히 위험한데, 그것을 아이들이 밥처럼 먹고 다녔다니 당연히 중독되었을 거야.”

살구씨는 단순한 과일씨가 아니었다. 한의학에서는 행인이라고 하여 약재로도 쓰는데, 필요에 의해 쓰더라도 자체에 독성이 있기 때문에 사용에 주의를 요한다고 강조할 정도였다.

“하지만 겨우 살구씨인데요. 우리 애들도 잘 먹지만 멀쩡했고, 저도 한 번씩 먹습니다.”

여인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겨우 살구씨 하나에 호들갑을 떠는 내가 이상하다는 눈치였다.

“약재로도 쓰는 것이니 먹는다고 무조건 사람을 해하진 않아. 용량이 중요한 것이지.”

“그럼 사흘 동안 살구씨로 끼니를 때웠다는 홍매는 왜 멀쩡……”

“우읍!”

여인의 항변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홍매의 입에서 토사물이 쏟아졌다. 곧장 뒤로 넘어가려는 것을 담덕이 재빨리 잡아챘다.

“우희! 이 아이의 증상이……”

“응. 다른 사람들과도 완전히 똑같아. 살구씨가 원인인 게 분명해.”

나는 재빨리 머릿속을 뒤져 살구씨의 해독법을 떠올렸다. 살구나무 뿌리를 달여 마시면 빠르면 두 시간, 늦어도 네 시간 안에는 정상으로 돌아온다고 했다.

“살구나무 뿌리가 필요해. 그걸 달일 솥과 물도.”

해독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았다. 독이 몸 안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후유증이 커지기 때문이다. 원인과 해독법을 알아냈으니 이제부터는 시간 싸움이었다.

“살구나무 뿌리는 내가 구해 오지. 촌장의 집 근처에서 본 것 같거든.”

어리둥절하게 선 사람들 사이에서 담덕이 먼저 움직였다. 그가 나서자 태림도 정신을 차렸다.

“솥은 부엌에 있었습니다. 물은 오면서 보았던 강에서 길어 오면 될 것 같고, 불을 피울 장작은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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