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낙화유수-3화 (4/38)

3장. 변화하는 세상

어느새 계절은 한여름이었다.

내가 사람들의 눈을 피해 태왕의 병을 살핀 것도 벌써 두 달이 흘렀다. 그간 최선을 다해 병을 돌보았지만 생각만큼 그의 몸이 나아지지 않았다.

원인은 알고 있었다. 침과 약으로 그의 증상만 돌보고 있을 뿐, 원인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으니 쉽게 병이 낫지 않는 것이다.

나는 정원에 아무렇게나 드러누워 두 달 전 태왕을 진맥했던 일을 떠올렸다. 맥에는 사람의 기운이 흐르기 때문에 맥의 흐름을 살피면 몸이 안고 있는 문제를 곧장 알 수 있었다.

태왕은 베일 것만 같이 날카로운 맥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리 강하게 눌러도 맥이 사그라들지 않고 오히려 손을 밀어내듯 팽팽하게 뛰었다.

진간맥이었다.

진간은 건강의 이상을 알려 주는 다섯 진장맥 중의 하나로 간에 깊은 병이 들었을 때 관찰되는 맥이었다. 한의학에서 이르기를, 진장맥이 느껴지는 사람은 생사의 기로에 서 있으니 각별히 살펴야 한다고 했다.

홀로 안고 감출 수 있는 가벼운 병이 아니었다. 속으로 느껴지는 고통은 물론이고 외관으로도 병세가 완연했어야 옳다.

하지만 태왕은 달랐다. 몸속은 엉망인데 얼굴에는 병색 하나 비치지 않았다. 그는 홀로 안는 것도, 속으로 삼키는 것도 익숙한 사람이었다.

간화는 마음에서 오는 병이다. 그러니 지금 필요한 것도 약이 아닌 휴식이었다. 몸이 아니라 마음이 쉬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고구려의 태왕이 아닌가. 모두의 위에 선 대가로 모두의 견제를 받고 있는 그에게 마음의 휴식은 요원한 일이었다.

나는 하늘을 향해 손을 뻗어 얼굴로 쏟아지는 햇살을 가려 보았다. 손가락 틈으로 햇살이 반짝거렸다.

하늘의 태양을 인간의 손으로 가릴 수는 없는 법. 담덕이 제 손이 작다며 투덜거리던 그 심정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태왕은 오래 살지 못하고 죽는다.

역사가 그렇게 말했고, 그를 직접 진맥한 나도 그리 느꼈다. 태왕에게 허락된 생의 날은 얼마일까.

기억을 더듬어 떠올린 고구려 역사에서는 ‘광개토 대왕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고 했다. 병에 시달리던 선왕의 죽음으로 인해서였다.

하지만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는걸.

어차피 죽을 것을 안다고 해도 포기할 수는 없다. 의술을 배운 사람으로서의 다짐이기도 하지만, 벌써부터 어른인 체를 하려는 어린애의 친구로서도 그랬다. 나는 단 하루라도 태왕의 생을 연장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볼 작정이었다.

하루아침에 귀족들이 마음을 바꿔 폐하께 힘을 실어 줄 리는 없어. 그러니 병의 근원은 해결할 수 없지. 그러니 폐하께서 얻은 마음의 화가 간에 이르지 않도록 침과 약을 써야 해.

다행히도 이곳 고구려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의학 수준이 높았다. 사람들은 약재를 쓰는 법을 알고 침과 뜸에 거부감이 없었고, 거리의 약방에서조차 쉽게 약재를 구할 수 있었으니 생활 전반에 의학이 뿌리내리고 있음이 분명했다.

물론 그럼에도 의학은 특별했다. 약재 쓰는 것이야 서책을 보며 익힐 수 있지만, 진맥을 하고 침과 뜸을 시술하는 건 소수의 사람만이 가진 재주였다. 궁에는 왕실의 병을 돌보는 태의가 있었으나 민간에서는 의원이 귀했다.

이 시기 의학은 미묘하게 무속 신앙과 궤를 같이해 각 부족의 무녀들이 의원을 자처하며 아픈 사람들을 치료하고 다녔다. 개중에는 훌륭한 의학 지식을 가진 무녀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근거 없는 민간요법에 의존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하늘의 노여움을 사 병을 얻었다’거나, ‘정성이 부족해 하늘이 병을 쫓아 주지 않는다’는 우스운 말들을 쉽게 믿었다. 그런 현실에서 귀족가 어린 아가씨가 의술을 배웠다는 건 여러모로 이상했다.

그것을 알았기에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내 재주를 다른 사람에게 떠벌리지 않았다. 아버지의 두통을 줄여 주는 차를 건네거나, 제신의 상처를 치혈해 주는 정도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특이한 재주를 가진 아이’로 통했다.

하지만 태왕의 병을 돌보겠다 나선 이상 지난날들처럼 조용히 지내기는 힘들 것이다. 본격적으로 환자를 맡은 이상, 나는 진지하게 한 사람의 의원으로서 최선의 의술을 펼쳐야 한다.

하지만 현대의 한의학은 지금보다 훨씬 수준이 높다. 필연적으로 ‘그런 재주를 어디서 배웠느냐’는 질문이 올 것이 뻔했다.

물론 진실을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저는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한의학을 배웠는데, 화재 사고로 죽어 눈을 떠 보니 여기였습니다. 그래서 의술을 압니다’라고 말하면 미친놈 취급이나 받을 것이 분명하다.

미리 변명거리를 생각해 둬야겠어.

이것저것 말을 짜 맞추면 어떻게든 변명이 통하기는 할 것이니 크게 걱정스럽지 않았다.

정작 부담스러운 사실은 ‘태왕의 수명’에 관여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에 대한 고민이었다.

왕의 목숨은 국가의 흥망성쇠와 그 흐름을 같이했다. 담덕의 할아버지, 고국원왕이 백제의 화살을 맞고 세상을 뜬 후 한동안 고구려가 기를 펴지 못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 한의학은 지금 세상에 퍼져 있는 의학보다 수준이 훨씬 높아. 정상적으로는 이 세상에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지식이지. 그런데 그 지식으로 태왕의 수명을 늘린다면…… 이것이 후세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내가 평범한 절노부의 아이 우희였다면 고민할 필요가 없는 문제였다. 하지만 내게는 대한민국 사람으로서의 기억이 있었다.

심지어 나는 ‘우희’보다 ‘소진’으로서 더 긴 세월을 살았다. 그래서 지금도 나는 우희보다 소진이라는 이름이 더 익숙했다.

내가 알고 있는 역사가 바뀔지도 몰라.

역사라는 거대한 이름에 온몸이 싸해졌다. 하지만 물러설 수는 없었다. 역사는 멀리 있지만 내 사람들은 가까이 있었다.

아들보다 딸을 더 귀하게 여겨 주신 아버지, 아버지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동생에게 질투조차 않았던 오라비 제신, 평소에는 얄밉게 굴다가도 내가 우울해지면 제일 먼저 달려와 종알거리는 서, 내게 마음을 열고 모든 속마음을 기꺼이 보여 준 친구 담덕.

이 모두가 지금 이 시간, 고구려에 살고 있었다.

나는 연우희야. 역사가 어떻게 바뀐대도,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역사를 모두 바꾼대도 좋아. 그냥 지금 이 순간 내 삶에 충실할 거야. 내 집, 내 가족, 내 친구. 그 모든 것이 이 순간에 있으니까.

소진으로 살아갈 때 나는 혼자였다. ‘내 집’이라고 부를 만한 따듯한 장소도, ‘내 가족’이라 소개할 혈육도, 찾아가 속 이야기를 털어놓을 ‘내 친구’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내게 있지 않나. 그것들을 모두 지키고 싶었다.

나는 햇빛을 가리고 있던 손을 바닥으로 내리고 두 눈을 감았다. 얼굴에 닿는 햇살이 따가웠지만 견딜 만했다.

그래. 손으로 태양을 가릴 수 없다면 눈을 감고 걸으면 되는 거야.

“우희야!”

그때 멀리서 서의 외침이 들려왔다.

썩 다급한 외침에 눈을 뜨니 헐레벌떡 뛰어온 서가 내 앞에서 숨을 고르고 있었다.

“무슨 일인데 그리 급하게 달려와?”

“전쟁을, 백제와 전쟁을 할 거래!”

“뭐?”

나는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놀라서 되묻는 목소리에 서가 다급하게 덧붙인 말은 더욱 놀라웠다.

“절노부 병사들도 보낸다는데, 숙부님과 제신 형님도 거기 따라가신대.”

“아버지와 오라버니가? 도대체 왜?”

“절노부 병사들을 지휘할 사람이 없어서 그렇대. 우리 아버지는 국내성을 떠날 수가 없어서…….”

“정말이야? 네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아니고?”

“아니야! 지금 궁에서 제신 형님과 이야기를 하고 오는 길이란 말이야. 숙부께서도 출병 준비를 위해 오늘 아침 급하게 국내성에 오셨대. 지금 태왕 폐하와 이야기 중이시고. 그걸 듣곤 놀라서 집으로 온 거야. 너한테 빨리 알려 주려고.”

잔뜩 찌푸려진 얼굴에 거짓은 없었다.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네가 잘못 안 거야.”

“아니라니까? 내가 정말로……”

“직접 듣기 전까진 못 믿겠어.”

나는 그대로 서를 지나쳐 정원을 빠져나갔다. 당장 궁으로 가 상황을 물을 생각이었지만 채 집을 빠져나가기도 전에 제신이 나타났다.

“오라버니!”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니? 오늘은 궁에도 가지 않을 거라 들었는데.”

다급한 내 부름이 무색하게도 제신은 여유만만이었다. 그 모습을 보니 서가 정말 헛소리를 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피어났다.

“서가 이상한 소리를 하잖아. 아버지와 오라버니가 전쟁에 나간다고 그런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아.”

말이 이어질수록 제신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무척이나 난처하게 웃는 얼굴을 보니 겨우 찾았던 희망의 불씨가 맥없이 꺼져버렸다.

“정말이야? 서의 말이 진실이었어?”

“서 그 녀석, 서둘러 뛰어가기에 어디로 가나 했더니…… 네게 소식을 전하러 간 거였구나.”

“……정말 전쟁에 나간다고?”

“그렇게 됐다.”

마치 옆 동네에 산책이라도 가는 것 같은 태평한 말투였다.

나는 기가 막혀 제신의 팔을 붙잡았다.

“그렇게 됐다니. 이렇게 태평하게 할 이야기야? 전쟁이라고, 전쟁.”

“이번 전쟁은 그리 심각하지 않을 거야.”

“세상에 심각하지 않은 전쟁이 어딨어?”

“그래. 전쟁은 다 심각하지. 그래도 이번 백제 원정은 싸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목적이 있으니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위험하진 않을 거다.”

불안해서 어쩔 줄 모르는 나를 달래기 위해서였는지 제신은 평소보다 더 차분했다. 내 팔을 잡아 자신의 방으로 이끌더니 자리에 앉히고 따뜻한 차까지 내주었다.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일에 나는 말을 잊은 채 멍하니 끌려갈 뿐이었다.

“이번 출정은 경고 차원에서 나가는 것이다.”

손에 잡힌 차를 습관적으로 한 모금 마셨더니 그제야 제신이 입을 열었다.

“우리가 오랫동안 후연과 싸우면서 북방에 더 많은 군사들을 배치해 두었잖니. 백제가 그것을 알고는 우리의 남쪽을 치려 한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올해 봄부터 성벽을 쌓는다고 분주하더니 이번엔 병사들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다고 해. 그러니 병력을 이끌고 내려가 함부로 움직일 시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 줘야지.”

친절한 제신의 설명에도 도저히 기분이 풀어지지 않았다. 뚱한 얼굴로 차만 마시고 있으니 그가 웃음을 흘리며 내 머리를 토닥였다.

“이해하지? 우리가 왜 출병해야 하는지.”

“이해해. 하지만 그게 왜 하필 오라버니와 아버지인지는 모르겠어. 후연과의 전쟁에서도 우리 절노부 병사들이 제일 선봉에 섰잖아. 그때도 아버지가 병사를 이끌고 나가셨지. 한데 이번엔 오라버니까지 같이 간다고? 왜 항상 우리만 전쟁에 나서야 해?”

“호시탐탐 폐하의 약점 잡기를 노리는 소노부는 물론이고, 관노와 순노도 그들의 눈치를 보느라 바빠 병사를 내어주지 못하겠다 했어. 폐하의 우군인 우리 절노부 병사들만이 용감하게 출병을 선언했다. 고추가께서는 국내성을 떠날 수 없고, 하 형님은 북을 지켜야 하니 아버지께서 나서겠다 하신 게야.”

익숙한 상황이었다. 태왕이 즉위한 이후 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몇 번이나 이런 식으로 일이 진행되었다. 왕권이 불안하니 국내성을 지키는 중앙군은 함부로 밖에 나설 수 없고, 다른 부족들도 모두 출병을 거부하니 결국 절노부만 밖으로 나돌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절노부에도 많은 가문들이 있었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아버지가 꼭 해결사를 자처할 필요는 없었다.

“다른 숙부님도, 아니, 다른 집안도 있잖아.”

“백부님과 폐하께서 가장 믿는 사람이 우리 아버지인 걸 어쩌겠니. 게다가 너도 알잖아. 우리 아버지 성정. 어디 이런 일을 마다하실 분이니? 전쟁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고구려 사내 아니시냐.”

“백부님도 그걸 아시니 매번 아버지를 찾는 거야. 절대 거절 않으실 걸 아니까. 후연과 싸우실 때 그리 크게 다치셨으면서…… 이번에도 나갈 마음이 드신대?”

“아무렴. 지난번에 부상을 입어 체면을 구겼으니 이번엔 명예 회복을 하시겠다고 벌써부터 전의를 불태우고 계신걸. 그 모습을 뵈니 나도 말릴 수가 없더라. 부상을 당하시고 한동안 우울해하셨잖니.”

그 부분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었다.

용맹한 고구려 용사로서 자부심이 높던 아버지는 부상 이후 자존심에 상처를 입어 한동안 의기소침했다. 기운을 내시라 마음을 다스리는 데 좋은 약초를 구해다 차를 우려 드린 것도 나였다.

“……하지만 한쪽 눈을 잃으신 뒤로 거리를 제대로 잡지 못하시잖아. 전쟁에 나설 몸 상태가 아니셔.”

“그래서 내가 따라가겠다고 한 거다. 말로는 후방에서 지휘만 할 테니 괜찮을 거라는데, 우리 아버지 성격에 그러실 분도 아니고…… 영 불안해서 내가 따라가 지켜 드리기로 했다.”

“난 싫어. 아버지와 오라버니, 둘 모두 전쟁에 나가지 않았으면 해.”

“전쟁에 나서는 건 고구려 용사의 의무이자 명예다. 그것을 막는 건 죽으라는 것과 다름없어.”

“명예가 그리 중요해? 살아야 명예도 말할 수 있는 거잖아. 난 아버지와 오라버니가 비겁하다고 모두의 손가락질을 받더라도 살아서 내 곁에 있기를 바라.”

“그리 위험하진 않을 거야. 백제를 견제하기 위한 공격이니 큰 전쟁으로 번지진 않을 거다. 우리뿐만 아니라 백제도 전면전을 원하진 않을 테니까.”

“그래도 난 싫어.”

두 번째 생에서야 비로소 처음 얻은 가족이었다. 조금의 불안함이라도 있는 한 그들을 잃을까 봐 전전긍긍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네가 이리 떼를 쓰는 건 흔치 않은데. 그리 불안하니?”

“지난번 후연을 치러 갈 때도 그랬어. 위험하지 않다고, 안전하게 돌아올 거라고. 그랬는데 한쪽 눈을 잃으셨잖아. 이번엔 목이 달아나지 말라는 법 있어?”

“그래서 이번에 내가 함께 가잖냐. 이 오라비의 실력을 못 믿는 건 아니겠지?”

제신의 실력이라면 유명했다. 어려서부터 활과 검을 잘 다뤄서 사냥제라도 있는 날이면 언제나 가장 많은 동물을 잡아 왔다.

하지만 사냥과 전쟁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오라버니가 혼자 잘한다고 되는 거면 그게 전쟁이야?”

나는 답답한 마음에 뜨거운 차를 벌컥 들이켰다.

내 말에는 언제든 귀 기울여 주는 아버지와 제신이지만 이 문제만큼은 내 뜻을 따라 주지 않을 것이다. 고구려 사내들에게 전쟁은 그런 문제였다.

“나도 같이 갈까?”

“뭐?”

탁자에 머리를 묻으며 웅얼거리니 제신이 놀라서 되물었다.

“네가 가긴 어딜 가? 국내성에 얌전히 있어라.”

“오라버니는 아버질 지키니, 난 오라버니를 지킬게.”

“우스운 소리. 활도 제대로 못 쏘면서 누가 누굴 지켜? 네가 따라나서면 혹 하나 붙이는 셈이니 오히려 더 위험하다.”

제신이 웃으며 내 머리를 헤집었다. 나는 여전히 탁자에 얼굴을 묻은 채 그에게 물었다.

“출발은?”

“내일 새벽에 은밀히 나설 거야.”

생각보다 빠른 날짜에 절로 머리가 번쩍 들렸다.

“왜 이렇게 급해?”

“우리가 백제의 움직임을 알고 있는데 그쪽이라고 모르겠어? 우리 움직임을 들키기 전에 먼저 자리를 잡아야 해. 그래서 급하게 가는 것이고.”

“……배웅 나갈게.”

“당연히 그래야지. 오늘 저녁에 같이 식사나 하자. 우리 가족끼리만.”

“아버지가 좋아하는 음식을 준비하라고 할게.”

“그래. 그건 네게 맡기마.”

여전히 펴질 줄 모르는 내 얼굴에 제신이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내가 아버지를 단단히 지킬 것이니. 넌 여기에서 폐하와 태자님을 지켜. 아버지께서는 그분들을 위해 전쟁에 나가시는 거니까, 네게 아주 중요한 임무를 맡기는 거야. 알았지?”

“응. 알겠어.”

작은 대답에 제신의 다정한 손길이 어깨를 토닥였다. 그래도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 * *

우리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식사하고,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차를 나눠 마셨다. 새벽 출정 시간이 올 때까지 누구도 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야기를 나눴다.

대부분은 시답잖은 이야기들이었다. 연못에 사는 물고기나 정원에 자라는 나무에 대해서 웃기지도 않은 토론을 나눴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순식간에 흘러 출정 시간이 다가왔다.

아버지와 제신의 갑옷은 내가 직접 입혀 주었다. 아직 작은 키 때문에 달래의 도움을 받아야 했지만 마지막 끈을 묶는 건 내 몫이었다.

본래 전쟁에 사내들을 보낼 때는 집안의 여인들이 갑옷과 무기를 챙겨 주었다. 어머니가 나를 낳다 돌아가셨으니 내가 그들의 도구를 챙겨야 했다.

“우희야.”

“예.”

아버지가 갑옷 끈이 제대로 묶였나 확인하는 나를 불렀다. 왜 그러시나 싶어 앞으로 다가가니 아버지의 품에서 천으로 둘둘 만 물체가 하나 튀어나왔다.

“받거라.”

“이게 뭡니까?”

물었지만 대답은 없었다. 대신 아버지는 어서 물건을 받으라는 듯 손을 한 번 더 까딱였다.

의아한 얼굴로 물건을 받아 감긴 천을 풀었더니 생각지도 못한 물건이 나왔다. 침을 놓을 때 사용하는 침구였다.

“아버지? 이런 것을 어떻게……?”

놀라서 고개를 드니 아버지가 드물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중원에서 구해 온 것이다. 거기서도 제일 좋은 것으로 구해 오라 했으니 쓸 만하겠지.”

아버지의 장담처럼 질이 좋은 침구였다. 감탄하는 나를 보며 아버지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네가 평소 이런 일에 관심이 많았지. 올해 탄일에 선물로 주려고 준비해 둔 것인데, 아무래도 그러긴 힘들 것 같아 미리 주는 것이다.”

“아버지.”

비로소 아버지가 먼 길을 떠난다는 것이 실감 났다. 눈물이 날 것 같아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울라고 준 것이 아닌데 어찌 그래. 떠나는 날에는 웃으면서 보내 줘야지.”

“예. 그리할 겁니다.”

나는 애써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아버지의 눈을 보는 건 힘들었다. 눈을 보면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그래. 그리 웃어야 내 딸이지. 건강히 잘 지내고 있거라. 금방 돌아올 터이니.”

아버지의 큰 손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한동안 이 따뜻한 손길을 받지 못할 것이다.

극구 만류하는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고 나는 성문까지 아버지와 제신의 뒤를 따랐다. 성문 밖에 나가 살펴본 병력의 규모는 크지 않았다.

애초에 전면전을 위한 출병이 아니었으니 많은 병사들이 나설 이유가 없었다. 백제의 성 앞에서 진을 치고 그들에게 긴장감을 심어 주는 것이 이번 원정의 목적이었다.

“제신이를 배웅하러 온 거냐?”

착잡한 마음으로 병사들을 살피는데 뒤에서 누군가 내 어깨를 감쌌다.

목소리만 들어도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얄미운 비녀 도둑 운이었다.

“네. 그쪽도 오라버니를 배웅하러…….”

가벼운 마음으로 물으며 고개를 돌리다 그의 복장을 보고 말문이 막혔다. 그 역시 갑옷을 입고 있었다.

“그쪽도 출병을 합니까?”

“응. 그렇게 됐다.”

“소노부에서는 병력을 보내지 않는다 하던데요.”

놀라서 묻으니 그가 여상스럽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응. 나만 가는 거야.”

“네? 도대체 왜요?”

소노부 병사들이 출병하지 않는데 그 집 아들이 전쟁에 나설 이유는 뭐란 말인가.

하지만 놀란 나와 달리 그는 여전히 태평한 얼굴이었다.

“제신이가 가는데, 나도 당연히 가야지. 네 오라버니는 내가 지켜 주마.”

겨우 그런 이유로 전쟁에 나설 사람이 누가 있나. 별 우스운 이유에 한숨이 나왔다.

그는 아마도 홀로 전쟁에 합류한 이유를 말해 주지 않을 모양이었다. 사실 그렇게 해 줄 이유도 없었다.

“오라버니의 짐이나 되지 마십시오. 게다가 지키긴 누굴 지킵니까? 원래 전쟁터에서는 자기를 지키는 겁니다. 누굴 지킬 생각은 말고 자기 몸이나 지키세요.”

그래도 전쟁에 나가는 사람에게 험한 말을 할 수는 없어 진심을 담아 말해 주었더니, 그가 별 이상한 것을 다 본다는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음…… 내가 어디 가서 죽으면 잘됐다고 웃을 줄 알았거든. 워낙 네게 밉보여서 말이야.”

“사람을 뭘로 보시고. 전쟁 나가는 사람에게 그런 말 할 정도로 생각 없진 않습니다.”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한데 제게 밉보인 것은 알고 계셨습니까? 그걸 알고도 아직까지 비녀를 안 주시다니…… 성격 참 이상하십니다.”

“그럴 줄 알고 오늘은 가져왔다. 손 내밀어 봐.”

그렇게 달라고 할 때는 안 주더니?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이번에는 운이 의아하게 물었다.

“넌 또 왜 날 그렇게 봐?”

“무슨 속셈이세요? 너무 순순히 준다 하니 기분이 이상하잖습니까.”

죽을 때가 되면 사람이 변한다더니.

그런 말을 속으로 삼키는데 운이 내 손을 가져가 품속에서 꺼낸 물건을 올려 주었다.

“뭘 준대도 싫다니 이걸 어쩌나.”

하지만 그가 투덜거리며 내 손 위에 놓아 준 것은 비녀가 아니었다.

“은전? 비녀가 아니라 은전입니까?”

반짝이는 은전 하나.

이제야 속셈을 알 것 같아 운을 바라보니 그가 웃는 낯으로 말했다.

“이제 비녀는 제대로 네게 산 것이다.”

“……오늘 같은 날이면 제가 은전 말고 비녀를 달라, 그렇게 나오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이러시는 거죠?”

“내가 약은 면이 좀 있다.”

“조금이 아니라 많이 약으셨습니다.”

투덜거리며 은전을 주머니에 넣는데 멀지 않은 곳에서 제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운아! 여기 있었구나?”

썩 급한 부름에 나와 운 모두 우리를 향해 달려오는 제신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라버니.”

제신은 나와 운이 단둘이 서 있는 것이 이상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와 운이라…… 의외네. 둘이 어느새 친해진 거야?”

“별로 친하진 않아.”

제신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나온 내 대답에 운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우린 별로 안 친하다.”

순순히 동의를 해 줬는데 기분이 더 나빠지는 건 뭐란 말인가.

나는 운을 무시하고 제신에게 말했다.

“출발은 언제 해?”

“폐하께서 출정하는 용사들을 격려하기 위해 나오셨다. 곧 출발이야.”

폐하라는 말에 운의 얼굴이 드물게 굳어졌다.

“그래? 그럼 어서 내려가자.”

“운.”

서두르는 운을 잠시 바라보던 제신이 그를 불러 세웠다. 어쩐지 제신의 얼굴도 심각했다.

“정말 괜찮겠어? 이리 몰래 따라나서도. 지금이라도 인사를 드리고 고추가께 허락을 받는 것이…….”

몰래?

나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소노부 해씨의 아들이 홀로 전쟁에 나서는 것이 이상하다 싶었더니, 집안에서는 전혀 모르는 일인 듯했다.

내 짐작이 맞는다면 운은 엄청난 사고를 친 것이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운은 태연했다.

“말을 올리면 허락하실까? 안 하실 것 같은데.”

그는 얄궂게 웃으며 제신의 팔을 끌어당겼다.

“나는 꼭 가야겠고, 내 부모님은 그걸 허락할 리 없으니 몰래 가는 수밖에. 그렇지 않아? 제신이의 누이?”

“예?”

예상치 못한 부름에 반사적으로 되물었더니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누이도 그렇다는군.”

“아니, 제가 언제……”

“어서 내려가자. 우리 때문에 출발이 지체되면 안 되지.”

운이 내 말을 자르며 다시 한번 제신을 끌어당겼다. 난처한 얼굴로 운을 바라보던 제신이 결국 한숨을 내쉬며 내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다녀오마, 우희야.”

나는 제신에게 손을 흔들며 마지막 인사를 고했다.

고개를 돌려 늘어선 병사들을 바라보니 그 사이에 태왕과 아버지의 모습이 있었다. 혹여나 눈이 마주칠까 아버지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끝까지 나를 바라보지 않았다.

마침내 국내성에서 백제로 병력이 출병했다.

* * *

“그 침은 쓰지 않을 테냐?”

“아.”

태왕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얼마 전부터 태왕에게 약과 함께 침을 쓰고 있었다. 아버지가 출정 전 선물로 주고 간 침을 쓴 첫 환자가 태왕인 셈이었다.

오늘은 그 침술 치료를 위해 태왕을 뵈러 온 것인데, 하도 전쟁 걱정을 하다 보니 손에 침을 든 채 딴생각에 빠지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전 그저…….”

나는 서둘러 손에 들고 있던 침을 챙겨 넣었다.

할 것이 더 남아 있지만 지금 정신으로는 제대로 된 혈 자리에 침을 찔러 넣을 자신이 없었다. 정확하지 않은 침술은 안 하느니만 못했다.

“알고 있다. 네 아비와 오라비가 전쟁에 나섰으니 불안할 테지. 하나 너무 걱정 말거라. 그리 위험한 자리였다면 나도 네 아비를 보내지 않았을 게야.”

분주히 정리하는 나를 보며 태왕도 자신의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그는 접혀 있던 소매를 풀어 내리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이번 원정은 백제를 견제하기 위함이다. 우리의 병력은 적지만 말갈의 힘을 빌릴 생각이다. 그들을 이용해 백제의 심기를 어지럽힌다면 우리는 마음 놓고 북방에 집중할 수 있겠지. 네 아비에게 준 진짜 임무가 바로 그것이다.”

제신은 물론이고 아버지에게도 듣지 못한 이야기였다. 두 사람이 내게 말하지 않을 정도의 이야기라면 기밀 중의 기밀이라는 뜻이었다.

나는 놀라서 태왕에게 물었다.

“지금 말씀하신 그건 기밀이 아닙니까?”

“그래. 기밀이다.”

“한데 어찌 제게 말씀하십니까?”

당연한 물음에 오히려 태왕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왜? 어디에 가서 이걸 죄 떠들 생각이냐?”

“당연히 아니지요. 하지만 기밀은 꼭 알아야 하는 사람만 알아서 기밀인 것인데…….”

눈치를 보며 손을 휘휘 저었더니 태왕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기밀을 말해 줄 수 없는 아이였다면 내 목숨을 맡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이 정보가 알려지면 네 아비가 위험한데, 네가 어찌 이것을 떠들고 다니겠니. 보기에는 허술해 보여도 내 그리 만만한 왕이 아니란다.”

그렇게 말은 하지만 어린아이에게 쉽게 꺼낼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내가 아버지와 제신의 걱정으로 넋을 놓고 있으니 나름의 위로를 해 준 것이다.

나는 감사함을 담아 깊게 고개를 숙였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말갈의 힘을 빌린다 하니 마음이 조금 나아졌습니다. 다음에 찾아뵐 때는 정신 차리고 침 놓을게요.”

“그래. 그리 부탁한다.”

다시 한번 제대로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서려는데 밖에서 생각지 못한 이야기가 들려왔다.

“폐하. 소노부의 고추가께서 만남을 청하고 있습니다.”

지금 나서면 소노부의 고추가와 마주칠 것이다. 그가 돌아간 후에 태왕의 방을 나서야 했다.

“잠시 이쪽에서 기다리다가 고추가가 돌아가면 나서거라.”

태왕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혹여나 밖에까지 목소리가 들릴까 가볍게 고개만 끄덕였더니 태왕이 응접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의 방은 생활 공간인 침전과 개인적인 손님을 맞이하는 응접실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치료는 조금 더 안쪽인 침전에서 하고 있었다.

“안으로 모셔라.”

“예.”

태왕이 응접실로 가 방문을 허락하자마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조금 거친 발걸음 소리가 방을 울렸다.

“오셨습니까, 고추가.”

“폐하! 어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다정한 태왕의 인사가 무색하게도 거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무리 개인적인 만남이라고는 하나 태왕에게 이처럼 소리를 높일 수 있는 사람이라니.

과연 귀족가의 대세 소노부의 고추가였다. 하지만 태왕의 기세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고추가의 화를 눌렀다.

“무엇을 말입니까?”

“몰라서 물으십니까? 제 아들 운이 말입니다. 어찌 그 아이를 이번 원정대에 포함하셨습니까? 제게 말 한마디 않으시고요!”

해운이 정말 집에는 아무런 말도 않고 전쟁에 나선 모양이었다. 사고를 아주 거하게 쳤다.

나는 속으로 혀를 내두르며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고추가. 그 문제는…….”

태왕이 무엇인가 상황을 설명하려고 했지만 고추가가 틈을 주지 않았다. 그는 잔뜩 흥분한 채로 자신이 할 말만 이어 나갈 뿐이었다.

“이 기회에 우리 운이를 아주 내치시려는 겁니까? 그 아이가 불안한 폐하와 태자님의 위치를 위협한다 생각하셔서요! 그 아이의 어미가 폐하의 육촌 누이입니다. 같은 피가 흐르는 아이를 어찌 이리 박대하십니까? 아니, 그래서 더 문제입니까?”

“고추가. 진정하세요.”

“제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습니까! 폐하께서 내 아들을 사지로 내몰았잖습니까!”

“고추가!”

크게 말하는 법이 없던 태왕이 처음으로 소리를 높였다.

강한 부름에 그제야 고추가의 말이 멈추었다. 조용해진 와중에 태왕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밤 해씨의 장남이 내게 와 출정을 청하였습니다. 고구려 용사의 결심을 마다하는 것은 그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일. 내 기꺼이 허락했습니다.”

“제게 말씀은 해 주셨어야지요!”

“고추가께서 그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어요. 아들의 일 아닙니까? 운이가 고추가께 말하지 않던가요?”

네 집안일을 네가 몰랐냐는 묘한 비난에 고추가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자 태왕이 한결 풀어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너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고추가께서도 아시잖습니까. 이번 출정의 진짜 목적이 전쟁이 아니라는 거. 한데 어찌……”

“아들놈이 말없이 원정길에 올랐습니다. 아비 된 심정으로 놀랍고 당황스러운 것이 당연하지요. 게다가 그 아이는 제 뒤를 이어 해씨 가문을 이어받을 장남입니다.”

“해씨를 이을 장남…… 그렇지요. 운이가 그런 아이지요.”

대화만으로도 두 사람 사이의 묘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어쩐지 듣지 말아야 할 대화를 들은 기분이었다.

* * *

고추가가 떠나고 난 뒤 나는 그대로 궁을 빠져나왔다. 깊게 인사하고 나서는 나를 보며 태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나 역시 어떤 것도 묻지 않았다.

평소라면 태왕을 치료하고 바로 집에 돌아갔겠지만 오늘은 영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일찍 집으로 돌아가 제신의 부재를 확인하고픈 마음이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내 마음을 알아챘는지 담덕이 나와 함께 궁 밖으로 나섰다.

우리는 처음 친구가 되기로 했던 강변에 나란히 앉아 점점 떨어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점점 주홍빛으로 물들어 가는 하늘과 강물이 예뻤다.

나는 눈동자에 그 풍경을 담으며 담덕을 불렀다.

“담덕.”

“왜?”

“그, 소노부 해씨의 장남 말이야. 너와 친척이니?”

내가 이런 것을 물을 줄은 몰랐는지 담덕은 곧장 답이 없었다. 잠시 말을 고르던 그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가깝진 않으나 같은 피가 흐르고 있어. 그의 어머니가 내 재종고모님 되신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핏줄을 따지면 우리 5부 사람들 모두가 친척 아닌가? 따져 보면 너와 나도 멀고 먼 친척일 거야. 남과 다름없지.”

“그건 그렇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다지 많지 않은 귀족 가문들이 돌고 돌다보면 결국 한 가족이 되는 게 이 바닥 고구려의 생리였다. 정략혼이라는 게 흔하지는 않아도 계급은 맞춰서 혼인들을 하니, 결국 안면 있는 사이에서 짝을 골라잡았다.

반박할 말이 없어 조용히 고개만 주억거리니 담덕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내게 물었다.

“그런데…… 그게 왜 갑자기 궁금해졌는데?”

“별일 아냐. 누가 그런 이야기를 하기에…… 으으. 사실 그렇게 궁금하진 않아.”

“뭐? 궁금하지도 않으면서 그걸 왜 물어?”

“그냥 뭐라도 다른 이야길 하고 싶어서. 그렇지 않으면 계속 불안해지거든. 폐하께선 괜찮다 하셨지만…….”

사실은 뭐라도 떠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시답잖은 이야기들을 줄줄 읊어 대다 보면 걱정이 잊힐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평소에는 그렇게 많이 떠오르던 이야깃거리가 오늘은 단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길게 한숨을 내쉬는데 순간 얼굴에 무엇인가 차가운 물이 날아왔다. 담덕과 나. 단둘만이 있는 곳에서 벌어진 일이었으니 범인이 누군지는 뻔했다.

나는 얼굴을 타고 내리는 물을 닦아 내며 물가에 선 담덕을 노려보았다.

“담덕. 지금 뭐하는……”

하지만 따져 물을 새도 없이 다시 한번 물이 날아왔다. 심지어 처음보다 더 많았다.

황당해서 자신을 노려보는 나를 향해 담덕이 얄밉게 웃었다.

“우희. 지금 다른 생각할 여유가 있어?”

“……아니. 없는 것 같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담덕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저 얼굴에도 똑같이 물을 쏟아 주어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너 거기 서!”

“너라면 서겠어?”

따라붙는 나를 보며 담덕 또한 달리기 시작했다. 어찌나 날랜지 거리가 쉽게 좁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하면 연우희가 아니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몸을 날렸다. 가볍게 공중을 떠 날아간 몸이 담덕을 향했다.

나는 코앞으로 다가온 담덕을 붙잡고는 그대로 물가에 뛰어들었다. 동귀어진. 너 죽고 나도 죽자는 무식한 방법이었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나와 담덕 모두 물에 빠졌다.

이번은 두 번째라고 당황하지도 않았다. 우리는 익숙하게 물가에서 빠져나와 익숙하게 옷의 물기를 짜냈다.

“어째 너하고만 있으면 매일 물에 빠지는 것 같아.”

“이번엔 네가 먼저 시작한 거야.”

당당하게 말하고 담덕을 보니 그의 머리 위에 가늘고 긴 나무줄기가 늘어져 있었다. 담덕은 옷의 물기를 짜내느라 제 머리 위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담덕. 너 머리에…….”

웃음을 터트리며 담덕을 머리를 가리켰더니 한참 영문을 모르던 그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머리를 더듬었다. 두어 번 손을 더듬으니 손끝에 긴 줄기가 끌려 내려왔다.

그제야 내 웃음의 이유를 알아챈 담덕이 입을 비죽였다.

“그만 웃어.”

이미 터진 웃음에 경고가 통할 리 없었다.

“그만 웃으라니까?”

오히려 내 웃음이 더욱 커지자 담덕이 다시 한번 더 내 얼굴에 물을 뿌렸다.

그 뒤는 뻔했다.

담덕은 도망가고, 나는 또다시 그를 쫓아가고, 또 결국엔 물에 빠졌다. 평생 한 번 빠질까 말까 하는 강물에 벌써 세 번이나 빠진 것이다.

우리는 물가에 앉아 서로의 모습을 바라보며 낄낄거렸다.

“이제 좀 덜 우울해?”

완전히 주홍빛으로 물든 강물에서 빠져나온 담덕이 물었다.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옆에 드러누웠다.

“아버지와 오라버니는 언제 돌아오실까?”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이 계절이 다 가기 전에…… 그때 오실 거다. 그리 믿자.”

확신이라기보다는 바람이었다. 우리 둘은 전쟁에 나선 모두가 무사히 돌아오길 바라며 태양을 삼켜 버린 강물을 바라보았다.

* * *

계절은 하릴없이 지나갔다.

여름이 가기 전 돌아올 거라 굳게 믿었던 아버지와 제신은 몇 번의 여름이 지날 때까지도 남쪽 전선에서 돌아오지 못했다. 북방 상황의 지지부진함 때문이었다.

애초에 두 사람이 남쪽으로 떠난 것은 백제와 전쟁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들은 태왕이 북방에서 후연을 공략하는 동안 백제가 뒤를 치지 못하도록 견제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한데 귀족들의 비협조적인 태도 때문에 후연 공략 준비가 더뎌지고 있었다. 자연히 남쪽으로 떠난 군단의 귀환도 늦어졌다.

그럼에도 그들은 훌륭하게 목적을 수행하고 있었다. 태왕의 병력이 국경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백제는 감히 도발을 감행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출병 첫 해 백제 국경 인근의 성을 위협하여 그들을 긴장하게 만들었고, 이듬해에는 말갈을 압박해 관미령을 치게 했다.

관미령 전투에서 패배한 뒤 백제는 한동안 조용히 움직였다. 고구려가 기선 제압을 제대로 한 것이다.

그렇게 백제의 움직임이 조용해지자 파견되었던 일부 병력들이 국내성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귀환한 사람들 중에 아버지와 제신은 없었다.

아버지가 병사들이 아직 전장에 남아 있는데 지휘자가 그들을 두고 올 수는 없다며 국경에 남기를 자처했다고 한다. 참으로 그분다운 결정이라 서운함도 들지 않았다.

대신 아버지와 제신은 서신을 자주 보냈다. 덕분에 나는 국내성으로 귀환하는 병사들이나 정기적으로 오가는 전령을 통해 생각보다 자주 그들의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서신에서 전하는 국경의 상황은 예상보다 평화로웠다.

현재 고구려의 병력은 도압성에 자리를 잡고 백제의 동향을 살피는 중인데, 백제군은 앞선 전투들에서 입은 피해를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어 공격은 꿈도 꾸지 못한다 했다.

제신은 이처럼 평화로운 상태가 계속되면 조만간 전 병력이 귀환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희망적인 말도 덧붙였다.

하지만 제신에게서 서신이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백제가 남쪽 변경을 공격했다는 급보가 들려왔다. 당연하게도 전 병력의 귀환은 백지화되었다.

아버지와 제신이 남쪽에서 백제와 크고 작은 전투를 하며 신경전을 벌이는 사이 나는 열여섯이 되었다. 두 사람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본 것도 벌써 4년 전의 일이었다.

고구려에서는 보통 이 나이 즈음에 이르면 어른이 됐다고 여기니 나는 아버지와 제신이 없는 사이 홀로 어른이 된 셈이다.

성년이 되는 해는 이곳 사람들에게 여러모로 특별했다. 아이들은 그해를 기점으로 집안에서 완전한 어른으로 대우받았고 동맹제나 전쟁에 나설 자격도 얻었다.

생일이 되면 남자는 깃털로 장식한 절풍을, 여자는 땋아 올린 반 머리에 장식할 머리꽂이 비녀를 받아 어른으로서의 외관을 갖추었다.

“올해로 네가 열여섯이니 10월 네 탄일에는 꼭 국내성으로 돌아가 선물을 주마…….”

나는 오늘 오전 전령 편으로 도착한 아버지의 서신에 적힌 말을 따라 읽으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아버지가 위태로운 전장의 한가운데서도 내 생일을 잊지 않은 것이 기쁘면서도, 그의 말이 현실이 되기 힘들다는 것을 알아 기운이 빠졌다.

여태까지의 상황으로 보건대 올해 안에 아버지가 국내성으로 돌아오시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결국 이번 생일에도 나는 혼자일 것이다.

“어르신과 도련님 모두 아가씨의 생세일에 맞춰 돌아오시는 겁니까?”

내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머리를 정돈해 주던 달래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나는 달래의 오해를 바로잡기 위해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서신에 그리 적기는 하셨지만 아무래도 힘들지 않겠니? 백제가 남쪽 변경을 공격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으니 그들을 상대하느라 바쁘실 거야. 지난번에도 국내성에 돌아오시려다가 백제가 소란스럽게 구는 바람에 계획이 바뀌었으니까.”

“하지만 이번 탄일은 특별한걸요. 지난 탄일들과는 다릅니다.”

내 말에 크게 실망을 한 모양인지 달래가 입을 비죽이며 투덜거렸다. 말투와 함께 내 머리를 빗어 주는 손길도 덩달아 거칠어졌다.

“어르신도, 도련님도 아니 오시면 누가 아가씨께 머리꽂이 비녀를 선물해 준단 말입니까? 평생에 딱 한 번뿐인 성년의 탄일인데…….”

“백부님께서 계시잖니. 집안의 큰 어른이 계시니 혹 아버지께서 못 오시더라도 부족함 없이 챙겨 주실 거야.”

“그래도 어르신께서 직접 주시는 것과는 다르지요.”

“나도 마음 같아서는 아버지께서 직접 주시는 비녀를 받고 싶다. 하지만 전장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시는 아버지께 비녀를 주러 여기까지 오시라고 할 수는 없잖니.”

“어휴. 그놈의 전쟁은 언제 끝날까요? 이게 벌써 몇 해째인지 모르겠습니다.”

“원래부터 우리 고구려는 전쟁이 끊이지 않는 나라잖아. 전쟁이 끝나 아버지가 돌아오시길 기다리느니 내가 전쟁터에 나가는 것이 더 빠를……”

별생각 없이 이어지던 말에 답이 있었다. 나는 늘어져 있던 몸을 똑바로 세우고 달래를 올려다보았다.

“그래. 그러면 되는 거잖아?”

“예?”

“내가 아버지께 가면 되는 거였어. 여태까지 왜 그런 생각을 못 했지?”

“하지만 허락하실까요? 크게 위험하지는 않다고 하셨지만 그래도 전쟁터고…… 어지간한 이유가 아니면 절대 허락하지 않으실 텐데요.”

들뜬 나의 목소리에 달래는 오히려 난처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나는 허락을 받아 낼 자신이 있었다.

“그 어지간한 이유, 내가 만들 수 있을 것 같아.”

나에게는 아버지나 백부가 절대 거스르지 못할 아군이 있지 않은가.

나는 고민할 것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궁으로 향했다.

* * *

“할 말이 있으면 해 보거라. 계속 눈치만 보지 말고.”

진맥이 끝나고서도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하는 나를 보며 태왕이 웃었다. 그 말을 기다렸던 터라 나는 당장에 그의 앞으로 다가가 고개를 조아렸다.

“폐하. 실은 제게 청이 하나 있습니다.”

“청이라…….”

나의 말에 태왕이 묘한 얼굴을 했다.

“미안하지만 네 아비를 국내성에 불러 달라는 것이면 들어줄 수가 없다. 후연 공략이 마무리되기 전까지는 남쪽 전선을 이대로 유지해야 해.”

“예. 저도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여 다른 청을 드리려고 합니다.”

“내 예상이 틀렸단 말이냐? 어디 무슨 청인지 한번 들어보자.”

“저를 도압성에 보내 주십시오.”

정말 의외의 말이었는지 태왕이 드물게 놀란 얼굴을 했다. 잠시 놀란 눈으로 나를 보던 그가 곧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네 아비가 올 수 없으니 네가 가겠다?”

“아버지와 오라버니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본 것이 벌써 4년 전입니다. 돌아올 기약이 없어 기다림에 지쳤으니 제가 직접 나서는 수밖에요. 다가오는 10월이 제 탄일인데 그날만은 가족들과 함께 보내고 싶은 마음입니다, 폐하.”

“그래. 올해 탄일은 특별하니 그럴 법도 하구나.”

태왕이 고개를 숙이며 턱을 매만졌다. 내가 올해 성년이 되는 생일을 맞이한다는 말이 그의 마음을 약하게 만든 것 같았다.

나는 그가 흔들리는 틈을 놓치지 않고 말을 덧붙였다.

“예. 폐하께서 드실 약은 충분히 준비해 두고 가겠습니다. 병증이 안정기에 접어들었으니 제가 잠시 자리를 비워도 괜찮을 겁니다.”

꾸준히 태왕의 병을 돌본 결과 지난해부터 성과가 보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토혈하는 일이 줄어들었고, 두통이 약해졌으며, 눈이 맑아졌다. 외적인 환경만 안정된다면 병증이 심각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 사실은 누구보다 태왕 스스로가 느끼고 있을 터였다. 몸으로 느껴지는 변화는 본인이 가장 잘 알아차리는 법이니 굳이 길게 설명을 할 필요가 없었다.

과연 그는 나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지난해부터 몸이 가벼워져 신기하던 참이다. 네가 고생이 많았어. 한데 그 일에 내 힘이 필요하더냐?”

“제가 도압성으로 가겠다 하면 아버지께서 반대할 것이 분명하여…….”

“네 아비가 반대하지 못할 그럴듯한 이유가 필요한 것이로구나.”

“정확하십니다.”

“얄궂은 아이로다. 여태껏 네게 진 빚이 있으니 돕지 않을 수가 없잖느냐.”

“제가 여태까지 폐하의 병을 돌본 것을 빚이라 생각하지 마세요. 하고 싶은 일이니 한 것입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 빚 하나를 크게 달아 두었다 생각했으니 오늘 이런 부탁도 쉽게 하는 게지.”

반쯤은 입에 발린 소리였던 터라 민망해져 웃음을 흘리니 태왕 역시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곧 진지한 얼굴로 변한 그가 탁자를 두드리며 생각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도압성이라……. 전선에서 조금 비켜나 있다고는 하나 그래도 전쟁터는 전쟁터다. 위험한 곳에 굳이 발걸음을 할 필요가 있겠느냐?”

“그 위험한 곳에 제 아버지와 오라버니를 보내 두었어요. 홀로 안전한 국내성에 남아 있는 동안 마음이 무거웠으니, 이제라도 마음의 짐을 덜어 볼까 합니다.”

“네 결심이 그렇다면 말리지는 않겠다. 너도 이제 어엿한 한 사람의 성인. 결정을 존중받을 자격이 있지.”

탁자를 두드리던 태왕의 손이 멈추었다. 그와 동시에 그의 시선이 나의 두 눈을 향했다.

“태자를 전선에 보낼 생각이다.”

이번에는 내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태자님을 전쟁에 내보내시려는 겁니까?”

“아니다. 갑작스런 백제의 공격으로 귀환이 미뤄져 병사들의 불만이 높아진 상황이니, 태자를 보내 그들을 격려하려고 해. 그 길에 너도 동행하면 어떻겠느냐. 이 정도면 좋은 이유가 될 것 같은데.”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이유였다. 이 명분이라면 아버지와 백부 모두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이유면 충분합니다. 감사합니다, 폐하.”

나는 태왕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그대로 담덕을 찾았다. 긴 여행길에 동행하게 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하러 간 것이었는데 의외로 담덕은 부루퉁한 얼굴을 했다.

“난 반대야.”

“도압성까지 가는 길이 심심하지 않다고 좋아할 줄 알았는데.”

“내가 어린애야? 가는 길이 심심하다고 친구를 데려가게?”

“네가 폐하께 절풍을 받은 것이 겨우 두 달 전이다. 누가 들으면 한참 전부터 어른이 된 줄 알겠어.”

“겨우 두 달이라니? 넌 아직도 비녀를 못 받았잖냐. 그건 아주 큰 차이가 있다고.”

담덕이 젠체를 하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어른이 되었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었는지 나보다 작았던 키가 어느새 훌쩍 커져 있었다. 이제 나는 그의 얼굴을 보기 위해 한참이나 고개를 치켜들어야 했다.

“예에. 그러시겠죠, 어르신.”

그 격차가 불만스러워 과장스럽게 인사를 했더니 담덕이 미간을 찌푸리며 손가락으로 내 이마를 밀었다. 나는 그 손을 치워 내며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아무튼 네가 반대해도 소용없어. 이미 폐하께서 너와 동행하라 하셨다.”

태왕이라는 든든한 뒷배를 꺼내 들자 담덕의 입이 꾹 다물렸다. 아버지라면 끔찍하게 생각하는 담덕이 그의 말을 거역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결국 담덕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아버지께서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모르겠다. 아무리 그래도 전쟁터인데 거기에 널…….”

“내 아버지와 오라버니가 거기 계셔. 너도 거기로 가고. 그런데 내가 안 될 건 뭐야? 나도 고구려의 용맹한 용사라고.”

“네가 고구려의 용맹한 용사라고? 아직까지 과녁에 화살 하나 제대로 못 맞히면서?”

“예전보단 많이 나아졌거든!”

“내 가르침을 받고도 그 정도밖에 못 쏘는 건 너 하나뿐이다.”

“……배움이 느리다고 사람을 나무라지 말랬어.”

“말은 어찌 이리 잘하는지. 말하는 것만큼 활도 잘 쏘면 무슨 걱정이야?”

긴 한숨과 함께 담덕이 내 머리를 토닥였다. 어느새 훌쩍 커 버린 손 탓에 진짜 어린애 취급을 받는 기분이었지만, 곧 아버지와 제신을 만나러 간다는 생각에 그마저도 대수롭지 않게 여겨졌다.

출발일은 닷새 후. 나는 곧 아버지와 제신을 만날 수 있다.

* * *

출발을 앞두고 나는 꽤 분주해졌다. 개인적으로 길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태자의 공식적인 행렬에 참가하는 모양새가 되었으니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많았다.

무엇보다 짐을 최소화하는 것이 가장 큰일이었다. 나는 필요한 것을 고민하며 몇 번이나 짐을 싸고 풀기를 반복했다.

“정말 혼자 괜찮으시겠습니까?”

분주하게 움직이는 나를 보며 달래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홀로 떠나 본 적이 없는 아가씨의 긴 여정이 벌써부터 불안한 모양이었다.

달래는 내가 도압성에 가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놀라서 발을 동동 구르더니, 마차가 아닌 말을 타고 간다는 이야기까지 알게 되었을 때는 거의 기절을 할 지경이었다.

“뭐가 그리 걱정이야? 태자님의 일행으로 가는 것이니 행렬에는 부족함이 전혀 없을 거다.”

“그리 부족함이 없어 마차도 준비하지 않는답니까?”

“고생하는 병사들을 격려하러 가는 것인데 어찌 우아하게 마차를 타고 가겠니? 태자님이 그러자고 하셨어도 당연히 안 된다 말렸을 게다. 게다가 난 마차보다 말이 더 편한걸. 내 말 타는 실력은 너도 알잖니.”

“마차가 없으면 옷은 어디서 갈아입으실 건데요? 함께 노숙도 하게 될 터인데 잠은 또 어찌 주무시고요.”

확실히 마차가 있으면 편한 일이 많았다. 짐을 많이 가져갈 수도 있고, 휴식을 취하거나 잠을 잘 때도 유용하게 쓸 수 있었다.

하지만 마차 하나가 들어가면 행렬의 속도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마차를 가져가면 일정이 곱절로 늘어나게 돼. 조금 불편하더라도 하루빨리 목적지에 닿는 편이 더 좋지 않겠니?”

“그거야 그렇지만…….”

나의 말에 반박할 거리를 찾지 못한 달래가 우물거리다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어휴. 아가씨도 참. 사내들이 우글거리는 곳에 홀로 가시면서 너무 태평하십니다. 저는 혹여나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걱정이 되어 죽겠는데요. 어엿한 어른이 되시어 이처럼 곱디고운 여인이 되셨으니 조심, 또 조심하셔야 합니다.”

달래의 말에 나는 내 몸을 내려다보았다.

제대로 된 거울이 없는 시대라 얼굴이 어여뻐졌는지는 스스로 확인할 수 없었으나, 몸이 여인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이제 막 달거리를 시작했고, 가슴에 몽우리도 잡힌 지 오래이니 곧 어엿한 성인 여성이 될 터였다.

하지만 그건 지금보다 더 시간이 지난 후의 일 아닌가.

현대를 살다 온 나의 기준에서 이 몸은 아직까지 풋내 나는 어린아이일 뿐이었다. 이 시대 사람들은 현대에 비해 발육이 더뎌 진짜 성인이더라도 내 눈에 어려 보이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이번 여정엔 태자님이 함께하시니 태왕께서 동행할 병사들을 신중히 고르실 거야. 그러니 걱정은 그만하고 나와 함께 장터에나 가자. 아버지와 오라버니께 드릴 옷을 몇 벌 지어야 할 것 같아.”

서신을 전해 주는 사람 편에 필요한 물품들을 몇 번 보내긴 했지만 내가 직접 전하는 것과는 느낌이 다를 터였다. 이번에는 내가 손수 고른 물건들을 가져가 아버지와 제신에게 전해 줄 생각이었다.

“아버지와 오라버니의 취향은 달래 네가 제일 잘 알잖아. 그러니 이러고 있지 말고 날 좀 도와주렴.”

나는 웃으며 은근히 달래가 관심 있는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전략은 주효했다. 달래는 여전히 못마땅한 눈으로 나를 보면서도 천천히 밖으로 나갈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뭐, 두 분의 취향은 제가 꿰고 있지요.”

“그럼. 달래가 없으면 난 아무것도 못 산다니까.”

혹여나 달래의 마음이 바뀔세라 나는 재빨리 그녀의 등을 떠밀었다. 마지못해 끌려가는 척을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 작게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렇게 시장으로 나오자마자 달래는 걱정을 잊고 물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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