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낙화유수-2화 (3/38)

2장. 태자 담덕

국내성에 온 진짜 이유를 알게 된 후 나는 한동안 두문불출했다. 백부는 내가 갑자기 우울해진 이유를 아는 듯했지만 굳이 그것을 내색하지 않았다. 쉽게 상황을 타개할 수 없다는 걸 아는 제신도 함부로 나를 위로하지 못했다.

사정을 모르는 서만 내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 야단이었다. 그는 태학에서 공부를 마치고 올 때마다 매번 밖으로 놀러 가자고 나를 구슬렸다. 내가 좋아하는 과편과 장신구를 사러 가자며 법석이었으나 그다지 밖으로 나설 기분이 나지 않았다.

“아가씨. 밖에 손님이 오셨는데요.”

방 안에 틀어박혀 멍하니 창밖을 보고 있자니 절노부에서부터 나를 따라온 달래가 의아한 얼굴로 나를 찾아왔다.

“손님? 국내성에 날 찾아올 사람이 어딨니?”

“저도 그것이 이상한데…… 확실히 아가씨를 찾아온 것이 맞답니다. 수리취 얘기를 하면 알 거라 하시면서요.”

“아. 그 수리취 소년.”

그라면 기억에 남아 있었다. 아버지가 아프신데 의원을 부를 수 없어 직접 약초를 캤다는 소년이었다. 며칠간 소식이 없어 다른 방법을 찾은 줄 알았는데 아직 내 도움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렇지 않아도 우울한 생각에서 벗어날 무언가가 필요하던 시점이었다.

“손님은 어디로 모셨니?”

오랜만에 생기 넘치는 내 모습에 달래가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대문 밖에 계세요.”

“대문 밖? 왜 안으로 들이지 않았어?”

“저는 안에 들어와 기다리시라 했지요. 그런데 극구 사양하시고는 말만 전해달라 하셨습니다. 대문 앞에서 기다리시겠다고요.”

“그래?”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방을 나섰다. 오랜만의 외출이었다.

우울하게 방 안에 늘어진 날 보며 전전긍긍하던 달래가 화색을 하며 내 뒤를 따랐다. 마음은 고마웠지만 그녀가 따라오는 것은 곤란했다.

“음…… 달래야.”

“네. 아가씨.”

“넌 굳이 따라올 필요 없다.”

“예? 혼자서 나가시겠다고요? 그러다 일이 생기면 어쩝니까? 절대 안 됩니다.”

달래가 질색하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익숙한 절노부라면 모를까 낯선 것이 가득한 국내성에서는 절대 나를 홀로 둘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모종의 사정으로 의원을 집에 들일 수 없는 소년의 사연을 생각했을 때 달래를 데려갈 수는 없었다. 무슨 일인지 알기 전까지 최대한 소년의 사정을 아는 사람이 적은 게 좋을 것 같았다.

“국내성 지리쯤은 처음 온 날 모두 익혔어. 내가 누군지 잊었니? 그 복잡한 절노부 산골에서도 난 길 한 번 잃은 적 없다.”

“제가 길 잃을까 봐 걱정하는 줄 아십니까? 그 손님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어찌 아가씨를 혼자 보냅니까?”

“내가 잘 아는 사람이니 괜찮아.”

“언제는 국내성에 아가씨를 찾을 사람이 없다면서요!”

꼭 이럴 때는 날카롭다니까.

나는 달래의 경계심을 무너뜨리기 위해 착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거야 잠시 깜빡 잊은 것이고. 확실히 아는 사람이니 걱정 마라. 오라버니도 아는 사람이야.”

“도련님도 아시는 분이라고요?”

달래가 눈을 크게 떴다. 확실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 소년도 태학에 다니고 있었으니 당연히 제신을 알 것이다.

“그렇다니까? 못 믿겠으면 나중에 오라버니께 확인을 해도 좋아. 그때 오라버니가 그 애를 모른다고 하시면 앞으로 한 달간 네 말은 무조건 들으마.”

이렇게 강경하게 나오니 달래의 기세도 조금 줄어들었다.

무엇보다 제신과 나를 찾아온 손님이 아는 사이라는 점이 그녀를 안심시킨 것 같았다. 달래는 제신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대도 믿을 정도 그를 신뢰했다.

“금방 돌아올게. 백부님과 오라버니가 돌아오기 전까지 꼭.”

제신과 서는 태학에 공부를 하러 갔고, 백부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이른 아침부터 외출을 한 상태였다. 내 말에 달래가 가늘어진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았다.

“참말이시지요?”

“참말이지, 참말! 그렇지 않아도 오늘 할 일이 많다고 하지 않았어? 새로 맞춘 나와 오라버니의 옷을 찾으러 간댔잖아.”

“어머나, 내 정신 좀 봐!”

슬쩍 할 일을 읊어 주니 달래가 난처한 얼굴을 했다. 해가 중천에 뜨기 전까지 시장의 포목점에 주문해 둔 옷을 찾으러 가야 한다며 종알거리더니 결국 그걸 깜빡한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달래 넌 거길 다녀와. 그사이에 난 손님을 만나고 돌아올게. 그럼 되잖아?”

“예, 예! 금방 돌아오셔야 합니다!”

달래가 초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대로 하인들이 드나드는 쪽문을 향해 내달렸다. 나는 달래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대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집주인인 백부가 자리를 비운 탓에 집 안은 조용했다. 나는 보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조심스럽게 대문을 열었다.

고개만 빼꼼 내밀어 주변을 살피니 오른쪽 담벼락에 기대어 선 소년이 보였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무심히 발을 구르고 있었다.

“얘!”

나는 조용히 대문을 빠져나와 소년을 불렀다. 내 목소리에 바닥을 향해 있던 고개가 번쩍 들렸다. 얼마 전 보았을 때보다 핼쑥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혹시 상황이 더 안 좋아졌니?”

걱정스럽게 묻자 소년이 고개를 저었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아. 그냥 평소랑 똑같아.”

“네가 한동안 오질 않기에 일이 잘 풀린 줄 알았어.”

“바로 오고 싶었는데 빠져나오기가 힘들었어. 오늘도 겨우 틈을 내 빠져나온 거다.”

“아, 그러고 보니 너도 태학을 다니잖아? 지금 공부할 시간 아니야?”

갑작스레 든 생각에 물으니 소년이 머쓱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모두 성실하게 태학을 다니는 건 아니야.”

불성실한 학생의 변명에 웃음이 터졌다. 내 웃음소리에 소년이 헛기침을 했다.

“우선 자리를 옮기자. 우리 집 사람들이 보면 이것저것 묻고 피곤해질 거야.”

나는 그대로 소년의 손을 잡아끌어 집 근처를 벗어났다.

“너희 집은 어느 쪽이야?”

“우리 집?”

방향을 잡기 위해 소년의 집 위치를 물었더니 그가 난처한 듯 말을 잇지 못했다.

“설마 그것도 말 못 하는 거야?”

“……응.”

“넌 왜 이렇게 곤란한 게 많아? 의원을 부르는 것도 곤란해, 우리 집에 들어오는 곤란해, 너희 집이 어디 있는지 말하는 것도 곤란해…… 어휴. 곤란한 것투성이네.”

비밀도 많고 안 되는 것도 많은 소년이었다. 답답함에 멈춰서 그를 바라보니, 그가 어색한 얼굴로 붙잡힌 팔목을 빼냈다.

“너희 아버지를 살피려면 집으로 가야 하잖아.”

“그렇긴 한데, 네가 우리 집에 들어가긴 힘들어서…… 아버지를 밖으로 모셨어.”

“뭐? 아버지를? 아프신 분을 밖으로 모셨다고?”

“사실 아버지는 네가 아픈 걸 봐 줄 거라는 사실을 모르셔. 내가 친하게 지내는 친구가 있다고 하니 그 아이를 만나보고 싶다고 하셔서…….”

“잠깐.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이유가 뭐야? 그냥 아픈 걸 봐 줄 사람이 있다고 하면 되잖아.”

“아버지의 건강 상태는 절대, 누구에게도 알려져선 안 돼. 누군가에게 몸 상태를 보인다는 걸 아셨다면 아버지께선 절대 나오지 않으셨을 거야.”

나의 질문에 소년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어린 티가 나는 얼굴에 순간 어른과 같은 근엄함이 스쳐 갔다. 그 기세에 나 역시 덩달아 진지해졌다.

“그렇게 비밀스러운 일인데…… 내겐 왜 도움을 청한 거야?”

“네가 절노부 연씨니까.”

“……도무지 이해가 안 되네.”

나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다는 듯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이 아프다는 걸 알았고, 그가 치료를 거부하고 있다는 걸 알았고, 왜인지는 몰라도 내 도움은 받을 수 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그러면 너와 난 지금부터 친한 친구라는 거지?”

“도와주는 건가?”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별다른 수가 없잖아. 먼저 이름부터 말해 봐. 이 세상에 이름을 모르는 친구는 없을 거 아냐. 게다가 넌 이미 내 이름을 알고 있는데, 나만 모르다니 억울하기도 하고 말이야.”

타당한 내 주장에 소년이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가륜이야.”

“가륜? 좋아. 나이는?”

“열둘.”

“뭐? 열둘? 나와 같은 나이잖아!”

분명히 나보다 더 어리다고 생각했는데!

처음부터 반말을 한 것도 그가 더 어리다고 생각해서였다. 한데 같은 나이였다니.

나보다 키도 작고, 얼굴도 앳된 편이라 열 살 정도로 생각했는데 예상이 영 빗나갔다. 불손한 내 시선의 의미를 알아챘는지 가륜이 불만스럽게 말했다.

“……키는 곧 클 거야.”

* * *

가륜과 한참을 걸어 강변에 도착했다. 제법 먼 거리를 걸어온 터라 다리에 힘이 풀릴 지경이었다.

“얼마나 더 가야 해?”

“이제 다 왔어. 저기 강변 쪽에서 기다리고 계셔.”

그렇게 대답하며 나를 돌아본 가륜이 내 상태를 보곤 눈을 크게 떴다.

“네 얼굴이 창백한데.”

“너무 많이 걸어서 그래. 넌 아무렇지도 않아?”

“별로? 이 정도는 매일 걷는걸. 태학에서는 무예도 가르치니까…….”

가륜이 진심으로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보다 체구도 작은데 체력은 만만치 않았다.

그러고 보니 활도 예쁘게 잘 쏘는 아이였지. 무예도 곧잘 하나 봐.

나는 감탄을 담아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나한테 매일 이 정도를 걸으라 했다면 벌써 드러누웠을 거야.”

“몸 쓰는 걸 싫어하는 편이구나?”

“말 타는 건 좋아해. 조금 멀리 갈 때는 말을 타면 되잖아? 왜 굳이 걸어가는지 모르겠다니까.”

현대에서도 나는 걷는 것을 지독하게 싫어했다. 고생하는 걸 얼마나 싫어했는지 한 정거장을 가더라도 꼭 버스나 지하철을 탔고, 돈을 벌자마자 제일 먼저 산 것이 자동차였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곳 고구려에는 버스나 지하철이 없다. 그것을 대체할 말이나 마차도 귀족들이나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사람들은 걷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다음부터는 많이 걷지 않도록 해야겠네. 참고할게.”

나의 투덜거림에 가륜이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어느새 가까워진 강변을 가리켰다. 그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커다란 삿갓을 쓴 남자가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었다.

“저기 계신 저분이 우리 아버지셔.”

나는 숨을 고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서 진지하게 만나는, 나의 첫 환자였다.

진료받는다는 사실을 숨긴다고 했으니 진맥을 하거나 침을 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오로지 눈에 보이는 증상과 가륜이 주는 단서만으로 토혈의 원인을 찾아내고 약으로써 치료해야 했다.

“가륜. 네 아버지를 만나기 전에 물을 것이 있어.”

“무엇을?”

“아버지께서 토혈을 하신다고 했지? 기간이 얼마나 되었니?”

웃고 있던 가륜의 얼굴이 조금 굳어졌다. 금세 어두운 표정을 지은 그가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너무 오래돼서 언제부터였는지도 잘 모르겠어. 족히 몇 년은 되었을 거다.”

나는 가만히 토혈의 원인을 몇 가지 떠올려 보았다.

역류한 피가 검붉은 색이라면 식습관이 나빠서일 가능성이 높다. 술이나 기름진 음식을 즐기는 사람에게 흔한 현상이었다.

여기에 덩어리진 피까지 섞여 나오면 간의 기운이 틀어진 것이다. 하지만 피가 옅다면 신장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본다.

“아버지께서 토한 피를 본 적은 있어?”

가륜이 찌푸려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픈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이 괴로운 듯했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꼭 확인해야 하는 부분이었다. 나는 다시 한번 자세히 피에 대해 물었다.

“피의 색은 어땠니?”

“짙고 탁해서 누가 보아도 건강하지 않은 피였어. 그 안에 핏덩어리까지 섞여 있어서 보통 병은 아니겠구나 했지.”

“그럼…… 혹 아버지께서 어지럽다는 말을 자주 하진 않으셔? 심한 날에는 정신이 혼미해 몸을 못 가누시고.”

내 말에 가륜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걸 어떻게 알았어?”

“눈이 침침하다고도 하셨지?”

“맞아. 그 말도 자주 하셨어!”

이제는 귀신이라도 본 얼굴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의 반응에 관심을 가지는 대신 머릿속으로 빠르게 증상을 정리했다.

“역시 그랬구나.”

종합해 보면 간의 문제일 가능성이 높다.

가륜이 말한 것은 모두 간에 화가 쌓여 생기는 증상이었다. 불안하고 긴장한 마음으로 인하여 생기는 병인지라 심리적 압박을 해소해야만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물론 한의사가 거기까지 손쓸 수는 없었다. 내가 관여할 수 있는 영역은 증상을 없애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마음을 안정시켜 근본적인 문제까지 없애도록 돕는다면 더 좋을 테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가륜의 아버지가 앓고 있는 병을 확진할 수는 없었다.

“우선 알겠어. 네 아버지를 보면 더 확실하게 답이 나올 것 같아.”

내 말에 가륜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가륜은 한시라도 빨리 내게 아버지의 상태를 보여주고 싶었던지 걸음을 빠르게 해 그의 곁으로 다가섰다.

“아버지!”

가륜의 외침에 강을 향해 있던 남자의 시선이 우리를 향했다. 그는 깊게 눌러 썼던 삿갓을 들어 올리며 나와 가륜을 바라보았다.

“왔구나.”

반갑게 인사하는 얼굴은 인자하고 따뜻했으나, 오랜 병으로 인해서였는지 기운이 없었다. 아들을 바라보며 싱긋 웃어 보인 그의 눈이 곧 나와 부딪혔다.

나는 고개를 숙이며 그에게 인사했다.

“연씨 가문의 우희입니다.”

“그래, 반갑구나. 나는 이련이라 한다.”

“예. 이리 뵙게 되어 기뻐요.”

나는 웃으며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한의학에서는 간의 기운을 눈을 통해 볼 수 있다고 말한다. 간화 증상이 있는 사람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다고 보는데, 이련의 눈이 꼭 그랬다. 가만히 살피니 눈뿐만이 아니라 얼굴에도 붉은 기운이 돌았다.

간에 양기가 몰려 있으니 이걸 풀어 줘야 해.

침을 쓰면 더 좋겠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니 약으로만 치료를 해야 한다. 이런 경우에는 주로 노회환이나 단황련산을 썼다. 하지만 노회환에는 들어가는 약재가 많아 구하기가 까다로웠다.

그렇다면 우선은 단황련산을 써 보자. 필요한 약재가 황련 하나뿐이라 사정이 어려운 가륜의 집에도 부담이 덜할 거야.

머릿속으로 빠르게 생각을 정리하는 나를 두고 이련이 웃었다.

“내가 더 반갑구나. 이 녀석이 낯을 가려 쉽게 사람을 사귀지 않는데, 얼마 전 갑자기 친구를 사귀었다 하기에 신기하여 한번 보고 싶다 했어.”

친구를 사귀었다는 말에 아버지가 이리 기뻐하다니. 가륜에게는 정말 친구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태학에서도 홀로 떨어져서는 홀로 있었지.

안쓰러운 눈으로 가륜을 바라보니 그가 영문을 몰라 눈을 깜빡였다.

괜찮아. 앞으로는 내가 같이 놀아 줄게.

그렇게 마음속으로 속삭이는데 이련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질문을 던졌다.

“한데 연씨라면…… 국내성에 온 것이 오래되지 않았을 터인데 어찌 내 아들과 친해졌을꼬?”

“오라버니와 사촌을 따라 태학에 갔다가 우연히 만났습니다. 활을 멋지게 쏘기에 제가 말을 걸었지요.”

능청스러운 내 거짓말에 가륜이 입을 벌렸다. 내가 이렇게 능구렁이처럼 말할 줄은 몰랐던 듯했다.

“활 쏘는 것을 좋아하느냐?”

“예. 절노부에 있을 때도 매일 활 쏘는 연습을 했습니다. 실력이 영 나아지질 않아서 늘 타박을 듣지만요.”

“허허. 그래? 그럼 우리 담……”

“아버지!”

가륜이 서둘러 너털웃음을 터트리는 이련의 말을 막았다.

갑작스런 외침에 나와 이련이 놀라서 바라보니 그가 어색하게 웃으며 낚싯대를 가리켰다.

“물고기가 미끼를 문 것 같습니다.”

정말이었다. 대충 강변에 걸쳐 둔 낚싯대가 요란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어찌나 힘이 좋은 놈이 물었는지 금방이라도 낚싯대가 강물에 빠질 것 같았다.

“어어! 이러다 놓치겠습니다!”

위태롭게 흔들리는 낚싯대를 보자 절로 걸음이 움직였다.

나는 막 물속으로 빠지려는 낚싯대를 붙잡고 가륜과 이련을 바라보았다. 내가 직접 나설 줄은 몰랐는지 두 사람이 멍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 참, 뭐하고 계십니까? 이러다 물고기가 미끼만 먹고 도망가겠습니다!”

나의 재촉에 가륜이 먼저 달려와 낚싯대 잡는 것을 거들었다. 하지만 그래 봤자 고작 어린애 두 명이었다.

“어어어!”

“으어어!”

우리는 힘 좋은 물고기에게 장렬하게 패배했다. 외마디 비명과 함께 우리의 몸이 그대로 강물에 처박혔다.

입과 코로 물이 쏟아졌다.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팔을 허우적거렸더니 금세 바닥에 손이 닿았다. 강과 땅의 경계에 빠진 터라 수심이 많이 깊지 않았던 모양이다.

손이 닿는 것을 확인하자 마음이 한결 차분해졌다. 침착하게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니 물이 겨우 무릎 정도에서 찰박거렸다. 함께 빠졌던 가륜도 막 물에서 빠져나와 흠뻑 젖어 버린 제 옷을 살피고 있었다.

“괜찮으냐?”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이련이 다급하게 나와 가륜의 곁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나는 내 상태보다 물고기에 더 관심이 많았다.

“물고기는요?”

“넌 지금 그게 중요해?”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된 가륜이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그것은 이련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대답도 않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나를 보더니 헛웃음을 흘리며 우리 사이에 둥둥 떠 있는 낚싯대를 집어 들었다. 조금 전까지 맹렬하게 흔들리던 낚싯대는 죽은 듯이 조용했다.

“이미 물고기는 떠나 버린 모양이구나.”

이련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나는 썩 걱정스러웠다.

제신이 일러 주기를 귀족이라고 다 같은 귀족이 아니라고 했다. 우리 집은 아버지가 고추가의 친동생이라 사정이 나은 것이지, 일부 귀족들은 평민들과 비슷하게 어려운 생활을 한다고 말이다. 고구려의 상황이 안팎으로 혼란스러운 최근에는 그런 현상이 더 심해졌다고도 덧붙였다.

길게 말은 하지 않았지만 가륜의 집이 딱 그랬다. 얼마나 사정이 좋지 않으면 태학에서도 은근히 따돌림을 당하며, 아픈 아버지가 있는 데도 의원을 못 부르겠나. 그런 집에서 끼니를 제대로 때울 리 없었다.

“놓쳐서 어떡하죠? 제법 큰 물고기 같았으니 좋은 찬거리가 되었을 텐데…….”

“뭐라고? 찬거리?”

내 입에서 나올 말을 예상 못했는지 이련이 눈을 크게 떴다.

“절노부 연씨 집은 직접 고기를 잡아 먹느냐?”

물론 우리 집에서는 그런 일을 하지 않는다. 식재료는 모두 집에서 일하는 하인들이 조달해 오기 때문에, 나는 그것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상 위에 오르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아니라고 말하면 물고기를 잡으려 낚싯대를 던졌던 이련이 민망해질 것 같았다. 나는 선의의 거짓말을 하기로 했다.

“예에…… 뭐…… 한 번씩은 그러기도 하지요.”

대충 둘러댔더니 이련이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진정 그렇단 말이야? 이것 참 놀랍구나. 고추가를 만났을 때 그런 말은 듣지 못했는데 말이야.”

“고추가라면…… 저희 백부님을 아십니까?”

이련의 말에 이번에는 내가 놀라서 되물었다. 그의 말투를 보면 단순히 아는 것이 아니라 꽤 가까운 사이 같았다.

고개를 돌려 가륜을 바라보니 그는 어쩐지 난처한 얼굴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당연하지. 내가 어찌 그를 모르겠느냐? 고추가를 국내성에 부른 것도 나인 것을.”

“네? 그게 무슨……?”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백부를 국내성으로 불러들인 사람은 고구려의 태왕이라고 했다. 소노부를 위시한 귀족들의 견제가 심해 절노부의 도움을 받고자 수장인 백부님께 도움을 청했다고.

한데 지금 가륜의 아버지는 자신이 백부를 부른 장본인이라 말하고 있었다.

“백부님께서는 중요하게 할 일이 있어 국내성에 오신 거예요. ‘귀하신 분’의 부름을 받고요.”

“그래. 네 말이 옳다.”

“한데 이련 님께서는 본인이 제 백부를 국내성에 불렀다 하셨습니다.”

“그리했지.”

“하면…… 이련 님께서 그 ‘귀하신 분’입니까?”

스스로 내린 결론에 놀라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막았다. 놀란 나를 보며 이련은, 아니, 고구려의 태왕은 인자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많이 놀란 모양이구나. 담덕이 네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이냐?”

“담덕이라면…….”

광개토 대왕의 이름이다. 고구려 역사를 잘 공부하지 않은 나도 잘 알고 있는 유명한 이름!

나는 태왕의 시선을 따라 맞은편에 서 있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의 이름은 가륜이 아니라 담덕이었다.

세상에. 내가 광개토 대왕을 만났어.

광개토 대왕은 우리나라 역사에 길이 남은 정복 군주다. 전쟁을 통해 고구려의 이름을 만천하에 알린 영웅.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그를 알았다. 그런데 그 유명한 사람이 지금 내 앞에 있는 것이다.

내 상상 속의 광개토 대왕은 커다란 칼을 휘두르며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적들을 제압하는 사람이었다. 전설 속의 무신 같은 이미지랄까.

하지만 눈앞의 소년은 상상보다 작고 평범했다. 오히려 곱상하게 생겨 서생이라는 말이 더 잘 어울렸다.

“담덕,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멍하게 담덕을 바라보고 있으니 태왕이 엄한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그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광개토 대왕을 만났다고 감탄만 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나는 무려 그 광개토 대왕에게 사기를 당했다! 광개토 대왕에게 사기를 당해 본 대한민국 사람은 아마 나 하나뿐이겠지.

어이가 없어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사정이 어려운 줄 알고 마음을 썼는데, 사정이 어렵기는커녕 일국의 태자였다니.

그것도 보통 태자인가? 나와 정략결혼을 할지도 모르는 태자였다. 정체를 알았다면 결코 가까이하지 않았을 사람이었다.

담덕도 그걸 알기에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은 게 아닐까.

“날 속였구나.”

스스로도 느껴질 정도로 서늘한 말투에 가륜이, 아니, 담덕이 놀란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일부러 그런 게 아냐. 나는……”

“아니. 넌 일부러 그런 거야. 정체를 말할 기회는 많았잖아. 속일 생각이 없었다면 내가 네 이름을 물었을 때 진짜 이름을 말해 줬을 거야. 하지만 넌 그러지 않았어.”

말을 하면 할수록 배신감이 치밀어 올랐다. 자신은 내가 누구인지 알면서 본인은 정체를 숨겼다. 단단히 놀림을 당한 기분이었다.

“감히 태왕과 태자의 앞에서 소리 높였으니 용서하세요. 저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나는 그대로 물을 빠져나와 집을 향해 걸었다. 뒤쪽에서 물이 튀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담덕이 나를 쫓아왔다.

“잠깐만! 내 이야기 좀 들어 줘.”

하지만 나는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걸음을 빨리하며 내가 할 말만 쏟아냈다.

“태왕께서는 간에 화가 몰려 토혈을 하신 거예요. 그럴 땐 보통 단황련산을 씁니다.”

“연우희.”

“황련을 구해 가루를 내어 사용하면 많이 나아지실 겁니다. 하지만 약을 먹는 것보다도 근본적으로 간에 화가 쌓이지 않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해요.”

“우희야.”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하지 않도록 옆에서 많이 도와주세요. 그러면 쾌차하실 겁니다.”

“잠깐 서서 내 말 좀 들어!”

연신 내 이름을 부르던 담덕이 결국 억지로 나를 붙잡아 세웠다.

그는 입을 꾹 다문 나를 보고서는 할 말을 잃은 듯했다. 여태까지 그에게는 제법 호감이 있어 이렇게 싸늘하게 군 적이 없었다.

담덕은 난처하게 머리를 긁적이다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하다. 내가 네 기분을 생각하지 못했어. 내 상황만 생각했다.”

“네. 그러셨습니다. 사과는 받을게요.”

“잠깐만, 잠깐만!”

고개를 꾸벅 숙이고 돌아서려는 나를 담덕이 다급하게 붙잡았다.

“그렇게 가면 내 마음이 불편하다. 게다가 왜 갑자기 높임말을 써? 나랑 친구 해 준다고 했잖아.”

“대고구려의 태자께 제가 어찌 말을 놓습니까? 그리고 제가 친구하기로 한 사람은 가륜입니다. 담덕이 아니라요.”

“그럼 담덕하고도 친구 하자. 그러면 되잖아.”

“그게 그렇게 쉽습니까?”

“가륜과 담덕이 그렇게 다른가? 가륜하고는 쉽게 친구가 되었잖아. 그런데 왜 담덕은 안 되는데? 내가 태자라서?”

그렇게 묻는 담덕의 얼굴이 어느새 어두워져 있었다. 나를 붙잡았던 그의 손이 툭하고 아래로 떨어졌다.

“친구도 쉽게 못 만들고…… 이럴 줄 알았으면 태자 같은 거 안 됐을 거야.”

말을 하기 시작한 담덕은 어째서인지 점점 시무룩해지기 시작했다.

“아버지도 태왕이 안 되시는 게 나았어. 궁에 온 뒤로 계속 아프고 힘드신데 왜 이걸 계속해야 돼? 지금이라도 왕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한테 하라고 하고 원래 집으로 돌아갔으면 좋겠어. 여기 온 뒤로 좋은 일이라곤 정말 하나도 없어.”

점점 시무룩해지는 담덕을 보고 있자니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분명 내가 화를 내야 하는 상황인데, 그래야 하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어째 내가 그를 위로해야 하는 상황이 되어있었다.

“어, 좋은 일이 하나쯤은 있었을걸요.”

“없어.”

“아닌데. 있었을 텐데…….”

“없다니까! 난 여기에 친구 하나도 없단 말이야. 너도 내가 태자라서 친구 못 하겠다며?”

“그게 꼭 태자라서가 아니라…….”

항변해 보았지만 이미 자신만의 세상에 빠져든 담덕은 내 말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

“내가 태자라는 걸 알면 다들 그래. 힘없는 귀족가의 자제들은 날 어려워하고, 힘 있는 귀족가의 자제들은 내가 자격도 없는 놈이라고 비웃어. 너는 어느 쪽이야? 내가 어려워? 아니면 날 비웃을 건가?”

오해가 더 깊어지기 전에 그의 생각을 막아야 했다.

“으으, 둘 다 아닙니다!”

답답한 마음을 가득 담아 버럭 소리를 질렀더니 담덕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멍청한 그 표정을 보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전…… 전 태자님이랑 혼인 안 할 겁니다!”

“뭐?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러니까 괜히 가까워져서 어른들께 오해를 사고 싶지 않습니다.”

“아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냐니까? 난 친구가 되자고 했지 혼인해 달라고 한 적 없어!”

얼빠진 얼굴에 말문이 막혔다. 그는 정말 영문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럼 처음 만났을 때 절 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던 건요?”

“그건 너에 대한 소문 때문이었지. 절노부 연씨 아가씨가 절세미인이라는 소문이 파다해서, 네가 온다는 이야기가 돌면서부터 드디어 그 자태를 보겠다며 한동안 국내성이 떠들썩했어.”

담덕의 말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아버지의 콩깍지가 만들어 낸 소문이 여기까지 퍼졌을 줄이야!

달아오른 내 얼굴을 보며 담덕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혼인이라는 말은 도대체 왜 나온 거야?”

“그건…… 백부님께서 국내성에 온 게 혼인 때문이라고 들었거든요. 절노부는 대대로 왕비를 배출했으니까, 태자와 절 혼인시켜서 왕가에 힘을 실어 주려는 계획이라고…….”

나의 설명에 담덕이 꽤 당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 어, 음…… 난 전혀 모르는 일인데?”

“모른다고요? 전혀?”

“전혀 몰라. 내가 태자라는 걸 말하면 다른 사람처럼 거리를 두려고 할까 봐 말을 못 한 건데 그런 오해를 할 줄은…….”

담덕의 확답에 머리가 멍해졌다. 그는 굳어 버린 날 보며 어색하게 웃음을 흘렸다.

“아무래도 혼인 이야기는 어른들 사이에서 오간 말인가 보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 나도 너랑 혼인할 생각은 없으니까. 진짜 너랑 혼인하라고 하셔도 안 한다고 할게. 내게 필요한 건 친구지, 부인이 아니야.”

정략혼의 당사자인 담덕이 내 편이다. 그 사실을 깨닫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말입니까?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저랑 혼인 안 하실 거라고요?”

“그렇다니까. 내가 거부하면 아버지께서도 별수 없으실 거야. 아버진 내 말이라면 뭐든 들어주시니까 이것도 그리되겠지.”

자신감 넘치는 대답에 며칠간 끙끙 앓았던 고민이 한순간에 날아 가 버렸다.

“다행입니다. 꼼짝 없이 혼인하게 될 줄 알았거든요. 워낙 상황이 좋지 않다기에…….”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안심해도 좋아.”

“고맙습니다. 그리 말해주시니 마음이 한결 편해요.”

비로소 마음을 놓고 활짝 웃는 나를 보며 담덕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나랑 친구가 되어 주는 거야?”

고민할 것도 없는 문제였다. 나는 웃는 낯으로 새침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내일 너희 집에 놀러 가도 돼? 활 쏘는 법 좀 가르쳐 줘. 너 활 되게 잘 쏘더라.”

친구가 되어 주겠다는 말이었다. 속뜻을 알아차린 담덕의 얼굴에도 활짝 미소가 피었다.

“당연하지! 꼭 놀러 와!”

* * *

반쯤은 농담으로 한 말이었는데 담덕은 그 이후 정말 나를 궁으로 초대했다. 맛있는 것도 나눠 먹고, 활 쏘는 방법도 알려 주었다.

한 번으로 끝날 줄 알았던 초대는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계속되어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나는 사흘이 멀다 하고 궁을 드나들고 있었다.

달래는 한동안 우울하게 집에만 박혀있던 아가씨의 외출이 잦아지자 속사정도 모르고 기뻐했다. 드디어 절노부에 있을 때의 말괄량이 아가씨가 돌아왔다며 외출을 할 때마다 신이 났다. 달래의 취미가 ‘아가씨 치장하기’였기 때문이다.

달래는 내가 외출을 할 때마다 예쁜 옷과 장신구들을 늘어놓고 콧노래를 부르면서도 내가 문턱 닳도록 드나드는 ‘친구 집’이 궁궐이며, 나를 초대한 ‘친구분’이 고구려의 태자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달래뿐만이 아니었다. 나와 담덕의 친분은 꽤 비밀스러워서 우리의 친분을 아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우리의 유치한 싸움을 모두 목격한 태왕과 그에게 사정을 전해 들은 백부, 내 일에서라면 모르는 일이 없는 제신 정도가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 축에 꼈다.

모두 태왕의 배려 덕분이었다. 그는 담덕과의 친분이 널리 알려지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나를 배려해 소문이 돌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 주었다.

거기에는 제신의 도움도 있었다. 담덕을 만나러 궁에 가는 날이면 나는 제신을 만나러 태학에 가는 것처럼 입궁해 그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덕분에 나와 제신의 우애가 과장되어 세상에 둘도 없이 애틋한 남매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돌았다.

의도치 않게 누이라면 껌뻑 죽는 오라버니가 되어 버린 제신은 불만스럽게 입을 비죽였지만, 감히 태왕의 부탁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오늘도 나는 제신을 핑계로 입궁을 준비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담덕의 초대가 있을 때만 궁을 드나들었는데,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 헤어지면서 자연스레 다음 만남을 기약하게 됐다. 이번에는 함께 사냥터로 가 토끼라도 잡아 볼 요량이었다.

굳이 말로 한 약속이 아니었다. 약속을 하지 않아도 함께할 것이 넘쳐 났다.

궁궐 정원에 같이 심은 나무는 닷새마다 한 번씩 물을 줘야 했고, 정을 붙인 담덕의 매는 내가 궐 밖에서 사 온 육포를 아주 좋아했다.

담덕의 개인 훈련장에는 내가 쓰는 활과 태왕이 직접 선물해 준 검은 말도 한 마리 있었다.

말에게는 가륜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담덕이 내게 거짓말로 일러 주었던 이름이었다.

내가 말을 보며 ‘가륜! 여기서 함부로 똥을 싸면 어떡해!’라고 외칠 때면 담덕은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입을 달싹이곤 했다.

“오늘도 시장에 들렀다 가실 거지요?”

붉은 끈으로 예쁘게 머리를 정돈 해 준 달래가 기다렸다는 듯 돈주머니를 내밀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머니를 받아 들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은전 다섯 개.

이 정도면 충분하겠다. 오히려 남겠는걸.

오늘은 시장에 들러 담덕의 매에게 줄 육포와 태왕께 올릴 탕약의 재료를 살 예정이었다. 은전 네 개 정도면 넉넉하게 살 수 있을 테다. 남은 돈으로는 과편을 사서 담덕과 함께 나눠 먹어도 좋을 것 같았다.

“그럼 다녀오마!”

“예.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달래가 웃으며 나를 배웅했다. 처음에는 국내성이 위험하다며 온갖 호들갑을 다 떨더니, 이곳의 치안 상태가 아주 뛰어나다는 것을 알곤 태도를 바꾸었다. 왕이 머무르는 곳답게 국내성은 안전하기로 손꼽히는 도시였다.

나는 익숙하게 시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조용한 고구려에서 유일하게 떠들썩한 곳이 바로 이 시장이었다.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시장에 있을 때면, 내가 있는 곳이 꿈이나 상상이 아닌 현실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가장 먼저 들른 곳은 약방이었다.

담덕과 친구가 되기로 한 이후 나는 정기적으로 태왕을 관찰하며 약을 만들어 주고 있었다. 분명 증상에 맞는 약을 지어 전하고 있는데도 큰 차도가 없어 나와 담덕 모두 걱정을 하는 중이었다.

속 시원하게 진맥을 한 뒤 침을 놓고 싶었지만 담덕은 그리하면 아버지께서 다시는 자신이 드리는 약을 드시지 않을 거라며 고개를 저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조금 더 강도가 센 약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아이고, 또 오셨습니까?”

약방에 들어서자마자 주인이 환한 얼굴로 나를 반겼다. 조그만 아이가 약재에 대해 물으며 드나드는 것이 신기했던지 그는 항상 친절하게 나를 대해 주었다.

“전에 부탁드린 약재는 들어왔어?”

“목단피와 우방자를 말씀하시는 게지요?”

“거기에 적복령까지.”

“아차, 적복령! 그것도 필요하다 하셨죠.”

주인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구석에 쌓인 약재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아직 정돈을 해 두지 않은 것을 보니 약재가 들어온 것이 오래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어찌 이리 때를 잘 맞춰 오셨습니까. 그렇잖아도 오늘 아침에 막 도착했습니다. 특별히 주문하신 것 말고도 더 필요한 약재가 있으십니까?”

“감초와 당귀, 치자도 함께 넣어 줘. 아, 청피와 천궁도 있어야 해.”

“예. 다 챙겨 드리지요.”

가득 쌓인 약재 사이에서 원하는 것을 찾아낸 주인이 능숙하게 약재를 종이에 싸기 시작했다.

나는 재빨리 그의 곁에 따라붙어 약재의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 모양이며 향 모두 훌륭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주인이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어찌 이리 어린 아가씨가 약재를 잘 아십니까?”

감탄과 호기심이 섞인 눈에 나는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아무래도 어린아이가 약재를 잘 아는 것은 이상할 것 같아 주인에게는 언제나 어른의 심부름을 왔다고 둘러대고 있었다.

“우리 어르신이 잘 아시는 게지. 나는 그저 사 오라 하시는 약재를 그대로 전하는 것뿐인걸.”

“어려운 약재 이름을 다 외우는 것도 대단한 겁니다. 그 어르신이 누군지는 몰라도, 따님을 참 잘 두셨어요.”

그러면서 주인은 제 손자가 약재 이름을 잘 외지 못해 약방 일을 물려주기 힘들 것 같다며 신세 한탄을 했다. 나의 반만큼만 총명했다면 걱정이 없을 거라는 말에 어색하게 웃는 사이 그가 약재 포장을 마쳤다.

“여기 있습니다. 은전 세 개만 주십시오.”

예상했던 가격 그대로였다. 나는 웃으며 주머니 속에서 은전을 꺼냈다.

주인의 손에 막 돈을 올려놓으니 입구에서 또 다른 손님이 들어섰다.

“어서 오십…… 아이고, 도련님! 오랜만에 오셨습니다. 어찌 직접 오셨어요? 계속 사람을 보내시더니.”

“오늘은 직접 약재를 보고 가져가려고 왔지.”

사무적으로 인사하려던 주인이 들어선 손님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크게 반색했다. 내게서 받은 돈도 대충 탁자 위에 올려 두고 ‘도련님’에게 달려갔을 정도였다.

아주 대단한 손님인 모양인데?

호기심에 고개를 돌려 입구를 보니 나도 잘 아는 얼굴이 서 있었다. 제신의 친구이자 내 비녀를 훔쳐 간 도둑, 해운이었다.

“잘 지내셨습니까, 비녀 도둑님?”

마뜩찮은 부름에 주인과 인사를 나누고 있던 운이 내게 시선을 돌렸다. 도둑이란 호칭에도 그는 여유로운 얼굴로 웃음을 흘렸다.

“덕분에 난 잘 지냈지. 그러는 그쪽은 어때? 오라버니와 떨어지기 싫어 매일 궁에 드나든다는 제신이의 누이?”

“어디서 헛소문을 들으셨는지…… 매일 드나드는 건 아닙니다.”

“그래? 얼마나 자주 드나들었는지 난 매일인 줄 알았지.”

“제 소문에 그렇게 귀를 기울이고 있었으면서, 어찌 아직까지 제 비녀는 돌려주러 오지 않으셨습니까?”

“그 비녀는 아직 그대에겐 어울리지 않는다니까. 지금 하고 있는 붉은 머리끈이 더 어여쁜걸.”

운이 내 머리에 길게 늘어뜨린 붉은 머리끈을 가리키며 싱긋 웃었다. 그 미소가 썩 예뻐서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그렇게 말한다고 제가 비녀를 포기할 것 같습니까?”

민망함에 시선을 피하며 투덜거렸더니 그가 크게 웃으며 내 앞으로 다가왔다.

“포기하지 마. 나도 그 편이 재미있어서 좋으니까.”

“……성격 안 좋다는 소리 많이 듣지 않습니까?”

“별로?”

운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붉은 머리끈을 매만졌다. 이 사람이 왜 이러나 싶어 올려다보니 그가 웃는 낯으로 물었다.

“그런데 제신이의 누이가 여긴 어쩐 일이야? 연씨 집안에 환자가 있다는 말은 내 듣지 못했는데.”

“뭐, 아픈 사람이 있어야만 약방에 오는 건 아니니까요.”

대충 둘러대는 말에 운의 시선이 내 손에 들린 약재로 향했다. 양이 제법 되는 것이 몸을 보하자고 먹을 정도는 아니었다.

일부러 감추면 더 의심을 살 것 같아 나는 당당하게 약재를 든 채 그에게 물었다.

“그러는 도둑님은 여기에 어쩐 일이십니까?”

“해씨의 막내가 오랫동안 아프다는 이야기는 꽤 유명한데…… 몰랐나?”

그러고 보니 제신으로부터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친구의 동생이 어려서부터 몸이 약해 병치레가 잦다고 했다.

그때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는데, 그 집이 바로 소노부 해씨 집이었던 모양이다.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그쪽 가문의 일이라는 건 몰랐지만.”

동생이 오랫동안 아프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운에 대한 경계심이 조금 풀어졌다. 한의사로서의 본능이었다. 환자나 환자의 가족들에게는 나도 모르게 마음이 풀리는 경향이 있었다.

게다가 동생의 약재를 직접 사러 오는 다감한 오라버니라고?

의외의 면에 새삼스러운 눈으로 운을 바라보았더니 그런 기색을 눈치챈 그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내가 원래 정이 많은 사내다.”

조금 나아질 뻔했던 평가가 되지도 않는 젠체에 다시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많은 정으로 열심히 약재 고르십시오. 저는 이만 가겠습니다.”

나는 운과 주인에게 인사한 뒤 그대로 약방을 나왔다. 매에게 줄 육포도 사고 담덕과 나눠 먹을 과편도 사려면 시간이 빠듯했다.

하지만 운이 나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이렇게 만났는데 그냥 가려고?”

약재를 사러 왔다더니 운은 어느새 약방을 빠져나와 내 뒤를 바짝 따르고 있었다. 그와 엮이면 나만 피곤해질 것이 분명하니 모르는 척이 상책이었다.

나는 일부러 그에게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육포를 파는 상인 앞에 섰다.

“육포를 사러 왔어. 조금 덜 말린 것으로……”

“덜 말린 것은 냄새가 심할 텐데?”

운이 상인과 나 사이에 불쑥 끼어들었다.

일부러 모른 척하고 있는 것을 다 알면서 어찌 이리 뻔뻔할까.

황당하다는 눈으로 운을 보니 그가 바짝 말린 육포를 가리켰다.

“먹으려면 이쪽이 더 낫다. 바싹 말린 것으로.”

“그냥 덜 말린 것으로 줘.”

나는 운의 말을 무시하며 상인에게 은전 하나를 건넸다.

하지만 운도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네. 덜 말린 거 말고 바싹 말린 것으로 줘.”

“돈을 준 건 나라는 걸 잊지 말게. 덜 말린 것으로 줘.”

두 귀족의 기 싸움에 이번에도 상인만 난처한 얼굴이었다. 나와 운이 한마디씩 할 때마다 그의 손이 덜 말린 육포와 바싹 말린 육포 사이를 안쓰럽게 오갔다.

“덜 말린 것은 냄새가 심해서 먹지 못할 거라니까?”

“압니다! 제가 먹을 게 아니니 그냥 두십시오.”

짜증이 나서 미간을 찌푸리며 소리를 질렀더니 운이 기분 좋게 미소를 지었다.

“이제야 대꾸를 하는군. 이보게. 육포는 그냥 덜 말린 것으로 주게.”

“확실히 덜 말린 육포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니까.”

상인이 미심쩍은 눈으로 운을 바라보자 그가 여전히 웃는 낯으로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으로도 모자랐는지 어서 육포를 싸 달라며 상인을 재촉하기까지 했다.

“돈은 이 아가씨가 냈으니 이분의 말을 들어야지. 뭐하나? 어서 챙겨 주지 않고.”

그제야 상인도 안심하고 덜 말린 육포를 싸기 시작했다. 그 과정을 모두 지켜본 나는 기가 막혀 죽을 지경이었다.

“……제 속을 긁으려고 일부러 바싹 말린 육포 타령을 한 겁니까?”

“이렇게 안 했으면 계속 무시했을 거 아냐?”

“당연히 그랬겠죠. 이렇게 저를 피곤하게 하시니까요.”

나는 상인이 때맞춰 건넨 육포를 받아 들고는 다시 걸음을 뗐다. 운은 마치 일행인 양 자연스럽게 내 옆에 따라붙었다.

“언제까지 따라오실 겁니까?”

나는 그를 흘겨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 크고 제멋대로인 혹을 떼어 놓지 않고는 궁에 갈 수가 없었다.

“절 충분히 귀찮게 하셨으니 그만 돌아가십시오. 약재를 사러 오셨다면서요?”

“약재는 그리 급한 게 아니니 괜찮다. 못 봤으면 모를까, 제신이의 누이가 이리 혼자 돌아다니고 있는 것을 봤는데 어찌 그냥 둬? 혼자서는 심심할 테니 말동무나 해 주마.”

“그쪽이랑 같이 다니느니 그냥 심심한 게 낫습니다. 됐으니 그만 가십시오.”

“대우가 영 나쁜걸. 그래도 네 오라버니의 가장 친한 친구라고.”

“오라버니의 가장 친한 친구지 저의 가장 친한 친구는 아니지 않습니까? 제게 제대로 대우를 받고 싶다면 비녀를 돌려주시든가요. 그럼 세상에서 제일 친절한 친구 누이를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이것 참 한마디도 지지 않으니…….”

운이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런 그를 무시하고 어느새 닿은 좌판 앞의 과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색색의 예쁜 과편을 보니 나도 모르게 얼굴의 근육이 풀렸다.

과편은 거리에서 파는 여러 먹거리 중에서도 값이 꽤 나가는 편이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고구려의 음식은 현대의 먹거리에 비해 심심한 편이었으나 과편은 달고, 시큼하고, 부드러운 것이 현대의 먹거리 못지않았다.

맛도 다양했다. 봄에는 앵두로 만든 붉은빛 과편이 주를 이루고, 여름에 접어들면서부터는 살구로 만든 것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한다. 오미자나 오얏으로 만든 것도 있었다.

“과편을 참…… 좋아하는구나.”

과편을 바라보는 나를 향해 운이 말했다. 그는 ‘좋아하니?’라고 묻지 않고 ‘좋아하는구나’라고 확신했다. 사랑스러운 눈으로 과편을 바라보는 날 보면 모를 수가 없는 사실이었다.

“예. 아주 좋아합니다.”

나는 알록달록한 과편에 정신이 팔려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는 신이 나서 살 것을 고르기 시작했다.

봄과 여름의 사이에 있는 계절이라 앵두로 만든 과편과 살구로 만든 과편이 모두 한자리에 있었다. 나로서는 가장 행복한 계절이었다.

“한데 약재와 육포와 과편이라. 참으로 이상한 조합이구나.”

가벼이 나온 운의 말이 묘하게 핵심을 찔렀다. 분주히 과편을 고르던 손이 잠시 멈칫했으나 잠시뿐이었다.

나는 곧 평정을 찾고 못 들은 척 다시 손을 움직였다. 주머니에 남은 은전 하나를 건네고 과편을 받아 들었더니 운이 물었다.

“과편은 네 것임이 분명한데…… 약재와 육포는 누구의 것일까?”

“제 일에 아주 관심이 많으시군요.”

“내 친우 제신이의 누이가 아니냐. 당연히 관심이 가지 않겠니.”

“그렇게 질척거리는 사내는 매력 없습니다, 도둑님.”

“질척……? 내가 질척거린다고?”

예상하지 못한 단어 선택에 운이 얼빠진 얼굴을 했다.

“앞으로는 좀 덜 질척거려 보세요.”

나는 그새를 놓치지 않고 그에게 꾸벅 인사하고는 서둘러 자리를 빠져나왔다.

빠르게 걸으며 뒤를 바라보니 운이 여전히 얼빠진 얼굴로 좌판 앞에 서 있었다. 혹여나 뒤늦게 정신을 차린 그가 또 따라올까 싶어 나는 더욱 걸음을 빨리했다.

* * *

담덕과 나는 훈련장 구석의 나무 아래 앉아 과편을 나눠 먹었다. 나는 과편에 대한 보답으로 활쏘기를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다.

담덕은 조금 귀찮은 얼굴을 하면서도 알겠노라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무리 가르쳐도 늘지 않는 답답한 내 실력 때문인지, 이렇게 뇌물이라도 올리지 않으면 그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 선생 노릇을 피하곤 했다.

“그런데 너, 오늘은 조금 늦게 입궁했다?”

과녁을 앞에 두고 자세를 잡는 나를 향해 담덕이 물었다.

“으응…… 조금 귀찮은 사람이 붙었거든. 떼어 내고 오느라 조금 늦었지 뭐.”

나는 활시위를 당기는 데 집중하며 대충 대답했다. 담덕은 내 등으로 손을 뻗어 자세를 바로 잡아 주며 슬쩍 나를 올려보았다.

“귀찮은 사람?”

“있어. 소노부 해씨 집의 운이라고. 내 오라비의 친구인데…… 너도 알아?”

“소노부 해씨의 운?”

그 이름과 함께 등에 닿아 있던 담덕의 손이 멈칫하는 것이 느껴졌다.

“네 오라비와 그 사람이 친한 건 안다. 태학에서 자주 어울려 다니거든.”

“아, 태학에서 봤겠구나. 너와도 친하니?”

“친하냐고? 해운과?”

담덕이 흔치 않게 차가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낯선 목소리에 놀라서 그를 바라보니 담덕은 내 자세를 잡아 주며 과녁을 노려보고 있었다.

“놔.”

“응?”

“활시위, 놓으라고.”

“으, 으응.”

나는 서둘러 과녁으로 시선을 돌리며 활시위를 놓았다.

손을 떠나 날아간 화살은 바람을 가르며 과녁에 명중했다. 과녁의 정중앙이었다.

이렇게 깨끗하게 중앙을 맞힌 건 처음이라 놀라서 담덕을 바라보니 그는 여전히 과녁을 바라보고 있었다.

“활은 이렇게 쏘면 된다.”

그렇게 말하고 다시 나를 바라보는 얼굴에는 살짝 미소가 걸려 있었다. 평소와 같은 모습인데도 어쩐지 그 얼굴이 낯설었다.

나는 어색함을 벗어나고자 다시 화살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와 사이가 좋지 않은 모양이네?”

활 쏘는 자세를 잡으며 물었지만 담덕은 대답이 없었다. 단순한 질문이라고 생각했는데 담덕은 머릿속이 복잡한 눈치였다.

그의 대답은 내가 화살을 두 개 더 쏘고 난 후에야 들려왔다.

“그와 사이가 나쁘냐 물으면…… 그건 아냐. 그냥 거리가 있을 뿐이지. 서로의 존재는 확실히 알고 있지만 누구 하나 먼저 다가서지 않는다.”

담덕의 도움 없이 쏜 화살은 과녁의 구석에 겨우 박혀있었다. 나는 흥미를 잃고 애꿎은 활을 매만졌다.

“그래? 내게 하는 것을 봐서는 태학에서도 여기저기 시비를 걸고 다닐 것 같았는데.”

“시비? 그 해운이?”

내 말에 담덕이 세상에서 제일 우스운 소리를 들었다는 양 웃음을 흘렸다.

“행여나 더러운 것이 묻을까 고고한 학처럼 구는 자야. 그를 따르는 자는 많지만 네 오라비가 오기 전까지는 태학의 어느 누구와도 어울리지 않았다. 한데 시비라니. 우스운 얘기구나.”

“……지금 우리가 말하는 사람이 같은 사람인 건 확실하지?”

담덕이 말하는 운과 내가 아는 운이 너무 달랐다.

그간 내가 본 운은 사람을 귀찮게 하는 구석은 있을지 몰라도 누군가를 깔보고 배척할 자 같지는 않았다. 첫 만남부터 능청스럽게 말을 걸어오던 모습을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우희, 넌 조금 특이하다.”

의아하게 묻는 나를 보며 담덕이 묘한 얼굴로 말했다.

“넌 네가 똑똑하다는 걸 알지? 아는 것이 많으니 말과 행동에 거침이 없다. 내게도 네 총명함과 자신감이 보여. 한데 그에 비해 네가 사는 세상을 잘 모르는 것 같을 때가 있어.”

내가 사는 세상이라면 똑똑히 알고 있다. 삼국 시대의 고구려. 쉴 새 없이 전쟁이 일어나는 혼돈의 시대였다.

어디 내가 사는 세상만 알 뿐인가? 자세히는 아니지만,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르는 미래도 알고 있다.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소년은 후일 왕위를 물려받고 이 땅을 넓혀 고구려 최고의 전성기를 가져올 것이다.

하지만 담덕은 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나를 두고 이 세상을 모른다고 했다.

“지금도 그래. 소노부와 태왕의 관계가 아슬아슬하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 내게 해씨의 장남과 친하냐고 물었지. 내가 어떻게 그와 가까울 수 있겠어? 그의 집안이 내 아버지를 끌어내리려 하는데. 게다가 너 역시 소노부와 대립하는 절노부 사람이잖아. 넌 가끔…… 그 모든 것을 잊은 사람처럼 말해.”

모두 옳은 말이었다.

유력한 귀족 가문의 딸로 태어나 어쩔 수 없이 정치판에 휩쓸릴 운명이었지만, 사실 나는 가문의 은원이나 왕권을 놓고 벌이는 신경전들이 크게 와닿지 않았다. 담덕의 모든 걱정들이 무색하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다른 귀족들이 아무리 애를 써도 어차피 다음 태왕은 담덕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그 어떤 것도 걱정스럽지 않았다.

게다가 나와 담덕은 아직 열두 살 아이 아닌가?

정치 싸움 같은 것은 모두 어른들의 전유물이었다. 아이는 아이답게 어울리고 싶은 사람과 어울리고, 먹고 싶은 것을 먹고, 하고 싶은 것을 하면 그만이었다.

“담덕. 우린 이제 겨우 열두 살이잖아. 벌써부터 그런 일에 마음 쓰지 않아도 돼. 몇 년이 지나 어른이 되면 어쩔 수 없이 맞이하게 될 일이니, 지금은 아이의 특권을 마음껏 즐겨야지.”

“그게 말처럼 쉽다면 진즉 그리했어. 하지만 그것이 쉽지 않아. 궁에 들어온 후로 모든 것이 그래. 지켜야 할 것은 너무 큰데, 내 손은 이리 작아서 그런가.”

담덕이 무심하게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말처럼 소년의 손은 작았다.

하지만 나는 그 손이 크게 자랄 것을 알고 있었다. 모든 아이들의 손이 그렇듯 그의 손도 자연히 어른이 될 것이다.

“조급해하지 마. 우리는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면 돼.”

“내가 할 수 있는 게 뭘까? 그런 게 있기나 할 걸까?”

담덕의 눈은 여전히 자신의 손에 닿아 있었다. 푹 숙여진 고개 때문인지 담덕의 어깨가 더욱 왜소해 보였다. 그 어깨 위에 얼마나 많은 짐이 있는 걸까.

“겨우 열두 살이면서. 뭘 그렇게 복잡하게 굴어?”

나는 안쓰러움과 답답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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