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낙화유수-1화 (2/38)

1장. 국내성

무료한 고구려 생활에서 그나마 재미있는 일이라면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것이다.

고구려는 무예를 사랑하는 나라답게 여자아이들에게도 기마와 궁도를 가르쳤는데, 한문으로 가득한 서책을 읽는 것보단 이쪽이 성미에 더 맞았다. 공부라면 전생에서 질리도록 했으니 이번 생에는 미처 경험하지 못했던 색다른 것을 해 볼 참이었다.

그런 나의 마음과 달리 아버지는 걱정이 태산이었다. 매양 밖으로 쏘다니는 나를 보며 귀한 막내딸이 까막눈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버지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내 배움은 빠른 편이었다. 전생의 기억 덕분이었다.

한의학을 공부하며 자연스레 익혔던 한문과 동양 사상이 죽고 난 후 다시 태어나 ‘연우희’의 인생에 도움이 되다니. 어려운 책들과 씨름했던 지난 생의 기억이 새삼 고마워졌다.

오늘도 나는 들판에 나와 활쏘기에 매진하고 있었다. 나의 활 선생은 어려서부터 네 살 터울의 오라버니 제신이 도맡아 했다.

활 수업뿐만이 아니었다. 제신은 겨우 네 살밖에 많지 않으면서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오라버니 노릇을 톡톡히 했다.

멋진 오라버니가 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하는 소년이라니. 전생의 기억이 있는 내게는 귀엽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팔에 힘을 빼라니까? 활시위는 힘으로 당기는 게 아니라고 했잖아. 힘이 아니라 요령으로 당겨야지! 너처럼 했다간 활 두어 번만 쏴도 팔이 나가겠다.”

배움은 가까운 사람에게 얻는 게 아니라더니.

올해 열여섯 살 난 제신이 쉴 새 없이 나를 타박하며 속을 긁어 댔다. 그 잘난 입을 꾹 다물게 하려면 제신의 말처럼 ‘요령으로’ 당겨야 하겠으나 몸이 생각만큼 잘 움직여 주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 요령을 알려 줘야지. 무작정 힘을 쓰지 말라고 하면 알아듣겠어?”

“그건 진즉에 알려 줬잖아? 힘 빼고 가볍게 당기면 돼. 이렇게.”

제신은 자신의 말처럼 가볍게 활시위를 당겨 살포시 놓았다. 활을 떠난 화살은 그림처럼 아름답게 날아가 과녁의 한가운데 꽂혔다.

오라버니는 저렇게 쉽게 하는 걸 왜 나는 못해?

멍하니 그 모습을 보고 있다가 부들거리는 팔로 겨우 지탱하니 활시위가 금세 손아귀에서 빠져나갔다. 화살은 어설픈 파공음과 함께 세 걸음 앞에 곤두박질쳤다.

그 모양을 가만히 지켜보던 제신이 결국 한숨을 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우희. 내 보기에 넌 이번 생에 활쏘기는 글렀다. 매번 알려 줘도 늘 실력이 그대로니…… 그냥 너 잘하는 책이나 읽어라. 사람은 잘하는 게 다 있다고 하잖니. 활은 네 재능이 아닌 게지.”

“책보다 활이 더 좋단 말야. 나도 멋지게 매 한 마리 잡고 싶은데.”

난 그렇게 말하며 지난번 근처로 사냥을 나갔던 아버지와 제신이 잡아 왔던 매 한 마리를 떠올렸다.

-이게 정말 매라고요? 이렇게 큰데?

매는 내 생각보다 훨씬 컸다. 상상치 못한 크기에 한동안 얼이 빠져 같은 말을 반복하는 나를 보며 제신이 혀를 끌끌 찼었다.

-먼 하늘에서도 그렇게 잘 보일 정도인데, 당연히 이렇게 크지!

가끔 제신은 너무 맞는 말만 해서 나를 민망하게 만들 때가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매? 코앞의 과녁도 못 맞히면서 매?”

제신의 한껏 우습다는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 제법 진심이 묻어나는 비웃음이었다.

아니라고 항변이라도 하고 싶었으나 세 걸음 앞에 힘없이 나뒹구는 화살을 보자니 딱히 반박할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올림픽 중계를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다 활을 잘 쏘던데. 왜 내게만은 그 유전자가 오지 않은 거야? 원래 우리 민족은 전부 다 활을 잘 쏘는 거 아니었어?

맘처럼 따라 주지 않는 팔을 한껏 노려보며 다시 한번 활시위를 당겨 보았지만 여전히 팔이 후들거리며 활의 중심이 잡히지 않았다.

“분명 내 팔인데, 왜 이놈의 팔은 내 말을 안 듣지?”

결국 나는 활을 내던지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산만하게 흩어진 옷자락과 함께 재작년 생일 제신이 직접 박달나무를 깎아 만들어 준 활도 바닥을 뒹굴었다.

“그게 문제라니까. 팔만 쓰는 게 아니라 온몸으로 쏴야 한대도.”

“그러니까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니까.”

“그걸 왜 모르지? 몸이 영 둔한 것도 아닌데 말이야. 생각해 보면 기마는 나보다 네가 더 낫잖아?”

제신이 떨어진 활을 주워 들어 살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의 말처럼 기마 실력만은 내가 한 수 위였다.

사실 제신뿐만 아니라 절노부의 그 어떤 아이들보다 더 잘할 자신이 있었다. 그걸 보면 운동 신경이 나쁜 몸은 아닌데 이상하게도 활 쏘는 것만은 나아지질 않았다.

“아무래도 선생을 잘못 고른 것 같아.”

“이 녀석이 열심히 가르쳐 준 오라버니 성의도 모르고.”

들으라고 한 푸념에 제신이 가볍게 내 이마를 쳤다.

힘이 실리지 않은 손길에 배시시 웃음을 흘렸더니 제신의 얼굴이 묘해졌다. 왜 그런가 싶어 빤히 제신의 얼굴을 바라보니 그가 내 옆에 주저앉으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넌 왜 이렇게 활을 배우고 싶어 하느냐?”

“왜라니?”

“우리 고구려가 아무리 무를 숭상한다고는 해도…… 넌 굳이 활을 안 배워도 되는 입장 아니냐. 오히려 아버지께선 네 손에 굳은살이 박일까 걱정을 하시는데.”

확실히 아버지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과하다 싶을 정도로 나를 싸고도는 면이 있었다. 내가 바라는 모든 것을 들어주고자 했지만 험하고 힘든 일에 나설 때에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던 것이다.

불만스러워하는 나를 앞에 두고 아버지는 항상 같은 말을 했다.

-그러다 어디 하나라도 부러지면 어찌하느냐?

겨우 활을 쏘고 검을 휘두르는 일에 왜 뼈가 부러진단 말인가. 처음에는 황당했지만 가만히 주변을 둘러보면 금세 이해가 되었다.

내 또래의 사내아이들은 모두 어찌나 체격이 크고 골격이 단단한지 나 같은 여자아이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개중에서도 우리 가문 사람들은 특히 체격이 큰 축에 속했다. 아버지며 오라버니 모두 일반 사람들에 비해 키가 크고 몸이 단단했다.

가까운 친척들도 마찬가지였다. 백부님, 숙부님, 사촌 오라버니와 동생들. 하나같이 체격이 크고 단단했다.

오로지 나 하나만 빼고.

이상하게도 이번 대에 우리 연씨 가문에는 딸이 귀해 가까운 친척 중에서 여자아이 찾기가 힘들었다. 아주 먼 친척 중에 두엇 있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왕래를 할 만큼 가까운 사이는 아니어서 아직 얼굴을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늘 크고 건장한 사내아이들만 보던 아버지 눈에 내가 얼마나 약하게 보일지는 뻔했다. 지금 하는 활쏘기 수업도 제신이 몰래 짬을 내어 해 준 것이라, 아버지의 귀에 들어가면 한바탕 난리가 날 테다.

그런 것을 뻔히 알면서도 활을 배우려고 하는 이유는 단순했다. 이곳이 고구려이기 때문이다.

사실 처음 활을 배우고 싶어진 이유는 단순한 흥미 때문이었다. 전생에서는 한 번도 해 보지 못한 일인 데다 아버지며 오라버니며, 집안 남자들이 죄 활을 쏘니 자연스레 흥미를 가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이 세상을 알게 된 이후로는 목적이 바뀌었다.

고구려는 크고 작은 전쟁이 잦은 나라였다. 북으로는 후연이, 남으로는 백제가 백성을 괴롭히고 나라 안에도 외진 곳에는 도적들이 판을 쳤다.

사람의 목숨이 파리의 목숨처럼 쉽게 날아가는 곳.

고구려는 그런 곳이었다.

“혹 다시 전쟁이 일어나면…… 그땐 내 몸 하나 정도는 지킬 수 있어야 할 것 같아서 그래.”

내 대답에 제신이 묘한 얼굴을 했다. 그는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하지만 무척이나 신경이 쓰이는 얼굴로 내게 질문을 던졌다.

“작년 후연과의 전쟁에서 아버지가 큰 부상을 입으신 일에 충격을 받았던 것이냐?”

지난해는 후연과 큰 전쟁이 두 번이나 있었다.

초여름 고구려가 먼저 현도성을 쳐 포로 1만 명을 데려왔고, 이를 보답하기라도 하듯 겨울에는 후연이 대군을 끌고 와 고구려를 쳤다. 아버지는 그 두 전쟁 모두에 참전했고 마지막 전투에서 훈장 같은 상처를 안고 돌아왔다. 왼쪽 눈에 화살을 맞아 시력을 잃은 것이다.

한의사를 하며 많은 환자들을 보아 왔지만 피를 흘리고 목숨이 경각에 달한 사람을 본 적은 없었다. 그런 환자를 다루는 공부는 하지만 그들을 치료하는 것이 내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세상이 바라는 한의사는 허준 같은 명의가 아니었다. 나는 다이어트에 도움이 되도록 식욕을 떨어뜨리는 약을 짓고, 피부가 맑아지는 데 도움을 주는 침을 놓았다. 의술을 다루는 사람으로서의 사명감이나 목표 의식을 생각할 기회조차 없었던 것이다.

내가 그렇게 살아도 대한민국은 아무런 문제 없이 돌아갔다. 굳이 내가 나서지 않아도 아픈 사람을 도와줄 사람은 많았다.

그러나 이 세상은 완전히 달랐다. 피를 흘리고 다치는 것이 일상이라 도처에 죽음이 깔려 있었다.

환자를 돌볼 의원의 수도 적고, 치료 기술이며 지식도 현대에 비할 바가 아니며, 무엇보다 전쟁으로 죽는 것을 너무도 당연하게 여겼다.

전쟁과 죽음이 일상인 세상.

이런 시대에서 스스로의 몸을 지킬 수 없다면 남는 것은 개죽음뿐이다.

이미 나는 화재 사고로 허무하게 삶을 마감한 적이 있었다. 다시 시작된 이 생마저 슬픈 죽음으로 끝낼 수는 없었다.

그러자면 스스로를 단련해야 했다. 하지만 제신의 생각은 다른 것 같았다.

“그리 걱정할 거 없다. 전쟁이라고 해 봐야 국경 근처에서나 일어나는 일 아니냐. 게다가 넌 나와 아버지가 지켜 줄 테니 마음 놓고 있으면 된다.”

“하지만 가만히 지켜보는 건 싫어.”

지난 생에는 가족이 없었지만 이번 생에는 아버지와 오라버니가 있었다. 어머니는 나를 낳다가 돌아가셨지만 아버지와 오라버니의 입을 통해 어떤 사람인지는 많이 들었다.

두 번째 생에서야 어렵게 얻은 가족이 위험한 전쟁터를 누비는데 나 홀로 마음 편히 뒤쪽에 물러나 있을 수는 없었다. 도움은 되지 못할지라도 짐은 되고 싶지 않았다.

“기특한 생각을 하는구나.”

제신은 꽤 놀란 눈치였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던 듯했다.

하지만 따뜻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 것도 잠시뿐이었다.

“하지만 활 쏘는 실력이 이래서는 영…….”

그의 시선이 바닥을 뒹굴고 있는 화살로 향했다.

“역시 그렇지?”

금세 시무룩해지는 얼굴에 제신이 씨익 웃으며 내 머리를 흐트러트렸다.

“싸우는 데 꼭 무력만 필요한 건 아니지. 네가 잘하는 걸로 도움이 되는 건 어때?”

무슨 소리인가 싶어 제신을 바라보니 그가 하얀 천이 감긴 왼손을 들어 보였다.

전생의 기억을 살려 그를 치료해 준 흔적이었다. 검을 배우다 베였다며 피를 철철 흘리고 있기에 지혈을 하고 약초를 얹어 주었더니 그가 제법 감탄을 했었다.

“넌 어릴 때부터 이런 재주가 있었지? 두통이나 감기 기운이 있을 때 네가 준 약초를 먹으면 금세 낫곤 했다. 아버지께서도 눈이 아플 때마다 네가 우려낸 차를 마시면 통증이 씻은 듯이 사라진다고 좋아하시던걸.”

통증이나 감기 기운을 다스리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였다. 약재 두어 개로 간단하게 다스릴 수 있는 문제를 안고 끙끙 앓고 있기에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도와주었는데, 고구려에는 의원이 흔치 않아 이런 능력이 귀하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넌 이런 걸 어디서 알게 된 게냐? 약초를 쓰는 법은 승려들 중에서도 소수의 사람들이나 아는 거라 하던데.”

“서책들에 적혀 있던 것을 보고 대충 따라 한 것뿐인걸.”

“서책? 대충 보고 따라 하는 것만으로도 이리 효과가 좋단 말이야?”

“뭐, 그거야…….”

순간 핵심을 찌르는 제신의 말에 난처하게 눈을 굴리고 있으니 때마침 멀리서 우리 두 사람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련님! 아가씨!”

오라버니 또래의 몸종 달래였다. 멀리서부터 허겁지겁 달려온 달래가 우리 앞에 멈춰서 숨을 고르며 겨우 말을 내뱉었다.

“어르신께서 찾으십니다. 고추가께서 오셨어요.”

고추가는 왕족이나 귀족의 높은 사람을 부르는 칭호였다. 달래가 말하는 고추가는 절노부 연씨 가문의 수장 연호인데, 아버지의 큰형님으로 내게는 백부가 되었다.

“백부님께서? 지난달에 본가에 들러 인사를 드리지 않았느냐. 어찌 백부께서 여기까지 오신단 말이야?”

제신의 물음에 달래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저야 알 도리가 없지요. 다만 어르신과 고추가께서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시더니 두 분을 찾아오라 하셨습니다.”

“심각한 얼굴로?”

백부가 심각한 얼굴로 우리 집을 찾을 일이라면 몇 없었다. 좋은 이유보다는 나쁜 이유들이 먼저 떠올라 절로 얼굴이 어두워졌다.

“혹, 다시 전쟁이 난 걸까?”

“아닐 거다. 전쟁이 끝난 지 한 해도 지나지 않았는데…….”

내 말을 부정하는 제신의 얼굴도 어두웠다. 걱정을 애써 마음속으로 누르며 우리는 집으로 발걸음을 서둘렀다.

* * *

달래의 말처럼 아버지와 백부는 심각한 얼굴로 마주 앉아 있었다. 그 틈에 끼게 된 나와 제신은 어쩔 줄 몰라 서로의 눈치만 살필 뿐이었다.

‘역시 네가 사고를 친 거지?’

‘그러는 오라버니가 무슨 잘못을 저지른 거 아냐?’

그런 눈짓을 주고받고 있으니 한참 입을 다물고 있던 백부가 입을 열었다.

“올해 제신이 네 나이가 몇이냐?”

“열여섯입니다.”

“우희는?”

“저는 열둘이 되었지요.”

우리 나이를 몰라 하는 질문이 아닐 것이다. 백부는 이와 똑같은 질문을 올해 초 본가에서도 했었다. 당연히 우리의 대답도 그때와 똑같았다.

몇 달 전과 똑같은 답을 듣고서도 백부는 한참을 고민하더니 아버지의 안색을 살피며 다시 입을 뗐다.

“이번에 나와 서가 국내성으로 가게 되었다. 하는 여기 남아 절노부를 지킬 것이고. 나와 서는 아마 한동안 북부를 떠나 있을 것 같구나.”

서는 백부의 둘째, 하는 첫째였다.

하는 나보다 나이가 여섯 살이나 많아 서먹한 감이 있었지만 동갑내기 서와는 죽이 잘 맞아 사이가 제법 좋았다.

하지만 친한 것은 친한 것이고, 지금의 이야기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우리 앞에서 자신들의 계획을 말하는 까닭을 몰라 백부와 아버지를 번갈아 보니 이번에는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아버지가 나섰다.

“그 길에 제신이와 우희도 함께 가거라.”

“예? 저와 우희도요?”

제신이 놀라서 되물었다. 아버지는 놀란 우리 표정을 보면서도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번에 가면 서와 함께 태학에서 공부를 하게 될 게다.”

익숙한 이름에 나는 대한민국에서의 기억을 떠올렸다.

태학이라면 소수림왕이 만든 교육기관이지? 거기다 율령을 반포하고, 불교를 들여오고…….

고등학교 때 공식처럼 열심히 외웠던 것이 등장하니 괜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수능에 고구려에 관한 내용이 많이 출제되지 않아 자세히 공부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내용 정도는 알고 있었다.

나는 가만히 지금의 상황과 과거의 기억들을 조합해 보았다.

이곳이 고구려라는 것을 알게 된 후 나는 아버지께 선대왕의 시호를 물은 적이 있었다. 내가 살아가는 시대가 어디쯤인지 알 수 있을까 싶어서였다.

아버지는 선대왕의 시호가 ‘소수림’이며 지금의 왕은 그의 아우라고 했다. 소수림왕에게 자식이 없어 그의 동생이 왕위에 올랐다는 것이다.

그럼 지금 왕은 누구지?

거기까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다음 왕이 광개토 대왕인 것만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광개토 대왕은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은 왕이었다. 그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나 드라마도 많았기 때문에, 다른 고구려 시대에 비해 친숙한 느낌이 있었다.

“우희 너도 태학에 관심이 있느냐?”

아는 이야기가 나와 반가운 기색이 얼굴에까지 번졌는지 백부가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태학이라고 해 봐야 학교인데, 대한민국 정규 교육을 온전히 마친 사람이라면 다시 학교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그럼요. 내로라하는 귀족 자제들은 모두 거기서 공부를 하지 않습니까. 책도 읽고 무예도 단련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선대 태왕께서 교육의 중요성을 통감하고 태학을 만드셨다. 계루의 귀족 자제들은 죄 그곳에서 공부하지. 하니 우리 절노 아이들도 질 수는 없지 않겠느냐.”

“저도 그곳에서 공부할 수 있나요?”

태학은 남자만 교육하는 줄 알았는데?

혹시라도 태학에서 공부하라고 할까 봐 걱정스럽게 물었더니, 내가 진심으로 태학에 가고 싶어 하는 줄 알았는지 백부가 안타까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쉽게도 태학은 사내놈들만 받는다는구나. 우희는 그곳에서 공부하기가 힘들겠다.”

“참으로 아쉽습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백부님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뭐라고? 아하하.”

호탕하게 웃는 백부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제신이 질린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제신은 그 또래 아이들답게 활이나 잘 쏠 줄 알았지 사람 대하는 요령이 영 없었다. 때문에 평소에는 제멋대로 굴다가도 어른들 앞에서는 살랑거리는 나를 보며 여우라고 혀를 내두르곤 했다.

하지만 전생에서 28년, 이번 생에서는 12년. 도합 40년째를 살고 있는 내가 아닌가.

이런 처세를 못 해서는 살아온 시간이 아깝지.

“그런데 태학에 가는 것이 아니면…… 저는 왜 국내성에 갑니까?”

태학에 가지 않아도 되는 것은 다행이지만 그렇게 되면 굳이 나까지 국내성에 갈 이유가 없었다.

“그건…….”

내 질문에 백부가 평소답지 않게 말을 잇지 못했다. 그것은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두 분이 모두 벙어리가 된 연유를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거리니 백부가 서둘러 말을 정돈했다.

“우희 네가 국내성에 가 보고 싶다 노래를 부르지 않았더냐. 그곳에 거처를 얻어 한동안 지낼 터이니, 너도 이번 기회에 함께 가면 좋겠다 생각한 것이지.”

그간 국내성 구경을 하고 싶다며 아버지를 졸랐던 건 사실이었다. 그 대단하다는 고구려의 수도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절노부가 자리 잡은 북쪽은 평범한 시골 마을인데, 국내성에 몇 번 다녀온 제신의 말에 따르면 수도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라고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단 한 번도 나를 국내성에 데려간 적이 없었다. 매년 10월 수확을 기념하여 동맹제가 수도에서 열리는데 그 재미있는 구경에 제신만 데려갔다. 제신이 ‘여우 같다’고 하는 말로 아버지를 열심히 구슬려 보았지만 전부 소용없었다.

그런데 백부의 말 하나로 이렇게 쉽게 국내성 나들이가 성사되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아마 이것은 단순한 나들이가 아닐 것이다.

이번 국내성행에는 무엇인가 목적이 있다. 나로서는 아직 알 수 없는 어떤 목적.

나는 백부의 눈치를 살피며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이유가 영 의심스러웠지만 아버지가 내게 나쁜 일을 허락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은 아이처럼 기쁘게 웃으며 나들이를 떠나면 되는 거겠지.

“기대됩니다! 출발은 언제 합니까?”

밝게 웃는 나를 보며 백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이 보였다.

“우희 네가 좋아하니 내 마음이 편하구나. 출발은 닷새 뒤다. 날에 맞춰 사람을 보낼 터이니 준비를 해 두거라.”

“예, 백부님.”

“내 할 말은 다 전했으니 이만 돌아가마. 닷새 후에 보자.”

백부가 마지막으로 인사하며 자리를 떠났다. 떠나는 백부를 향해 예의 바르게 인사하던 제신이 그가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아버지의 앞에 마주 앉았다.

“아버지. 갑자기 이게 무슨 일입니까? 태학은 무엇이고, 우희는 또 왜요?”

“네가 들은 그대로다.”

“하지만 이상하잖습니까. 이제 와서 제가 무슨 태학입니까? 많이 양보해서 저야 그렇다 쳐도 우희까지 함께라는 건……”

“제신아.”

아버지가 제신을 불러 그의 말을 막았다.

“고추가께서 정한 일이다. 그분께서 우리 집안과 고구려의 앞날에 해가 될 일을 하실 분이더냐?”

“아닙니다.”

“한데 어찌 의문을 가져. 집안 어른들의 말씀에 따르면 될 일이다.”

단호한 아버지의 말에 제신은 불만스러운 표정을 하면서도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우희야.”

이번에는 아버지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여기서는 천방지축인 네 행동을 나무라는 사람이 없었지만 국내성은 다르다. 그곳은 고구려 가장 높은 귀족들이 모여 나라의 운명을 결정하는 땅이지. 네게 향하는 시선도, 평가하는 말도 많을 것이야. 매사에 행동을 조심하거라.”

“국내성을 오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저 같은 촌뜨기 꼬마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셔요.”

“그렇다면 좋겠다만…….”

나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얼굴이 복잡했다.

“네 생각과는 상황이 많이 다를 것이야.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지내야 한다.”

아버지가 이렇게까지 걱정을 하니 나로서도 더 이상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 왜 그렇게 걱정을 하세요? 단순히 나들이를 가는 것이 아닙니까?”

내 질문에 아버지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는 무엇인가 말하려는 듯 몇 번이나 입을 오물거리다 결국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내 걱정이 과해서 그런 게지. 넌 마음 편하게 나들이 다녀온다 생각하거라.”

‘너는 그렇게 생각하라’니. 사실은 그게 아니라는 뜻이었다.

아무래도 나의 첫 국내성 나들이에는 쉽게 말하기 힘든 대단한 이유가 있는 모양이었다.

모든 의문은 국내성, 그곳에서 해결될 것이다.

* * *

의문과 함께 국내성으로 가는 날이 다가왔다.

북부에서 국내성으로 가는 길은 굽이굽이 산길이었는데, 길이 보통 험한 것이 아니었다. 다행히 백부께서 편의를 봐 주신 까닭에 마차에 몸을 실었지만 흔들림이 심해 차라리 말을 타고 가는 것이 나을 지경이었다.

이럴 때면 어쩔 수 없이 편안한 승차감의 자동차가 그리워진다. 승차감 좋은 자동차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덜컹거리는 버스라도 지금의 마차보다는 낫겠다 싶었다.

문명의 이기를 그리워하며 헛구역질을 하는 내가 보이지도 않는지 서는 잔뜩 들떠 있었다. 국내성에 도착하는 길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도착이야. 곧 성문이 나오는데 그게 얼마나 큰지 모를 거다. 아마 넌 놀라서 나자빠질걸!”

수도에 몇 번 가 봤다고 출발부터 젠체하던 서는 국내성 도착을 앞둔 순간까지 신이 나서 떠들어 댔다. 사람 좋은 제신이 몇 번 맞장구를 쳐 주었더니 더욱 신이 났다.

서의 수다를 아는 백부는 이미 말이 편하다며 마차를 떠났고, 서를 부추긴 제신도 백부를 외롭게 할 수 없다며 슬그머니 그를 따랐다. 결국 나만이 서와 마차에 남아 수다의 늪에 빠지게 된 것이다.

“그래? 성문을 처음 봤을 때 넌 놀라서 나자빠졌나 봐?”

“내, 내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말이 그렇다는 거지.”

심드렁하게 대꾸했더니 정곡을 찔린 서가 말을 더듬으며 입을 다물었다.

나이 차이가 꽤 나는 하와 백부의 사랑을 잔뜩 받으며 자란 탓에 서는 아직까지도 많이 어린 편이었다. 결국 내가 다루기 쉬운 녀석이라는 뜻이었다.

물론 남들 눈에는 나와 서 모두 코흘리개 어린애일 뿐이겠지만.

이 심드렁한 얼굴을 어른들이 본다면 웬 애늙은이 같은 표정을 짓고 있냐며 웃을 것이 분명했다.

“도련님, 아가씨. 이제 성문입니다.”

서가 입을 다물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를 몰던 마부가 문 너머로 속삭였다. 작게 난 문을 열고 창밖을 살피니 과연 성벽의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높이가 적어도 5~6미터는 될 것 같았다.

서가 말하던 것처럼 뒤로 나자빠지지는 않았지만 기계도 없이 이런 건축물을 만들어 냈다니 놀라운 일임은 분명했다.

“도착하면 시장 구경부터 가자! 맛있는 주전부리랑, 장난감도 사고…….”

서는 벌써부터 시장 구경을 갈 생각으로 들떠 있었다. 이럴 때 한번 찬물을 부어 그를 진정시키는 것이 내 역할이었다.

“너와 제신 오라버니는 바로 태학에 간다던데? 정식으로 공부하기 전에 태학박사께 미리 인사를 드려야 한댔어.”

“뭐? 그게 정말이야?”

들떠 있던 서는 한순간에 절망에 빠져들었다.

“어휴, 태학엔 왜 가라 하시는지 모르겠어. 차라리 형님을 보내시지.”

“하 오라버니는 이미 출중하신걸. 굳이 태학에 갈 필요가 없잖아.”

“그럼 난 모자라서 태학에 간다는 거야?”

“그렇게 들렸어?”

“그래!”

“우리 서, 어느새 눈치가 많이 늘었구나?”

“으으, 연우희!”

서가 버럭 소리를 지름과 동시에 열린 문 사이로 백부가 나타났다. 한참 앞서가더니 속도를 조금 늦춘 모양이었다.

“서 네 목소리가 저 앞에서도 다 들린다.”

“그건 우희가……”

“백부님, 이제 다 도착했나요?”

투덜거리려는 서의 말을 재빨리 자르며 웃는 낯으로 묻자 백부가 곧장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 외성 문을 지나면 시장이 나오고, 더 가면 궁이 있지. 태학도 그곳에 있다. 아이들과 함께 공부는 못 하겠지만 구경은 할 수 있으니 함께 가련?”

태학을 다니는 건 달갑지 않지만 궁을 구경하는 건 환영이었다.

고구려의 궁궐을 구경할 기회가 또 언제 있겠어?

“예!”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보며 백부가 웃음을 터트리고는 다시 멀어졌다. 그 모습을 서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주시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널 너무 좋아하셔. 우리 앞에서는 저렇게 웃질 않으신다니까.”

“무뚝뚝한 아들만 둘 두셔서 딸이 예쁘게 보이시는 게 아닐까? 네가 한번 살갑게 굴어 봐. 그럼 좋아하실 것 같은데.”

“으으, 사내대장부가 어떻게 살살거린단 말야?”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리는 데 아들 딸이 어딨어?”

일부러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으니 서가 입을 뻐끔대다 부루퉁하게 볼을 부풀렸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넌 사람 말문을 막히게 하는 데 큰 재주가 있어.”

“칭찬 고마워.”

“칭찬 아니거든!”

입을 비죽이던 서가 곧 창밖에 펼쳐진 풍경에 밖으로 목을 뺐다.

“시장이다!”

이번 외침에는 나도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조르르 다가가 서의 옆에서 목을 빼니 사람으로 가득 찬 시장이 눈앞에 펼쳐졌다.

빽빽하게 들어찬 건물, 다급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좌판에 늘어선 물건들.

드라마에서나 보던 풍경이었지만 그보다 현실감이 있었다.

“진짜 국내성이다.”

“진짜 국내성이지!”

나의 혼잣말을 서가 신이 나서 따라 했다.

* * *

태학은 제법 학교 같은 태가 났다.

연무장에서는 각양각색의 아이들이 자유롭게 검을 단련하거나 활을 쏘았고, 건물 안에서는 태학박사의 선창에 맞춰 책을 읽는 앳된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고대나 현대나 배움의 현장은 크게 다를 바가 없는 모양이다.

백부가 제신과 서를 데리고 박사께 인사를 간 터라 나는 홀로 연무장 구석에 남겨졌다.

백부는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내가 이 자리에 얌전히 앉아 있는다면 시장에서 맛있는 과편을 사 주겠다고 했다. 스물여덟의 김소진이라면 그 말에 코웃음을 쳤겠지만, 열둘의 연우희에게는 아주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나는 스스로를 어른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내 안에 있는 기억이 늘 그렇게 속삭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나를 어린아이로 대한다.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며 살아온 것이 벌써 12년째.

나는 어느새 어린아이처럼 행동하고 생각하는 것에 익숙해졌다. 그렇다고 전생의 행동 양식이 모두 사라진 것도 아니다.

그 결과 나는 조금 어른스러운 어린아이, 혹은 조금 아이 같은 어른이 되어있었다.

그러니까 겨우 과편 하나에 넘어가 여기 멍하니 앉아 있는 게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지루한 시간을 견디는 가장 쉬운 방법은 사람을 관찰하는 것이다. 흥미로운 대상이 있을 때는 더욱 그렇다.

나는 연무장 한구석에서 묵묵히 활을 쏘는 소년을 보고 있었다.

온몸을 사용해서 활을 쏘라는 제신의 말을 아직까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내가 보고 있는 소년의 자세가 아주 바르다는 것은 확실했다. 과녁의 중앙에 수북하게 꽂힌 화살을 제하고서라도 그의 자세는 군더더기 없이 깨끗하고 예뻤다.

가볍게 활시위를 당겨 물 흐르듯 손을 놓으면 바람을 가르고 날아간 화살이 강하게 과녁에 꽂힌다. 멋진 자세였다.

소년의 뒤통수만 보일 뿐인데도 나는 그가 꽤 마음에 들었다. 자세가 바른 사람치고 나쁜 사람은 없다는 게 내 철학이었다.

하지만 나와는 달리 태학의 다른 동료들은 그를 좋아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삼삼오오 모여 훈련을 하고 있는 아이들 사이에서 소년은 혼자였다.

이거 참. 왕따는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는 문제로군.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활을 내려놓고 돌아서는 소년과 눈이 마주쳤다. 여태까지 바라보던 걸 눈치챘는지 그의 얼굴이 미미하게 찌푸려져 있었다.

확실히 다른 사람의 구경거리가 되는 건 기분 나쁜 일이지.

미안함을 담아 어색하게 웃어 보였지만 소년의 얼굴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가 여전히 불만스러운 얼굴로 활과 화살을 챙겨 연무장을 떠났다. 괜히 잘 연습하고 있던 사람을 쫓아낸 기분이라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는데, 소년이 있던 자리에 떨어진 작은 주머니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멀어지는 소년과 주머니를 황급히 번갈아 보았다. 빨리 쫓아가면 주머니를 전해 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소년, 주머니, 과편. 세 가지가 머릿속에서 빙빙 맴돌았다. 결론은 금방 내려졌다.

백부님이 오시기 전에 돌아오면 되지 뭐!

결정을 내리자마자 나는 연무장으로 뛰어들어가 주머니를 주웠다.

“뭐야? 웬 꼬마야?”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갑작스런 여자아이의 등장에 연무장에서 훈련 중이던 아이들이 놀라서 호들갑을 떨어 댔다.

나는 그들에게도 훈련을 방해한 미안함을 담아 웃어 보이고는 그대로 소년이 사라진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하지만 미처 걸음을 떼기도 전에 뒤편에서 찢어질 듯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악!”

고개를 돌려 보니 검을 들고 대련을 하고 있던 소년들 중 하나가 발목을 붙잡은 채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괜찮아?”

“일어설 수 있겠어?”

소년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넘어진 소년을 일으켰다. 하지만 주변의 도움을 받아 겨우 자리에서 일어섰던 소년은 땅에 발이 닿자마자 다시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한눈을 파니까 그렇지! 대련 중에 다른 곳을 보면 어떡해?”

갑작스러운 내 등장에 놀라 발목을 제대로 접질린 모양이었다.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나는 손에 든 주머니를 품속에 넣고 빠르게 넘어진 소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 때문에 벌어진 일이니 수습 정도는 해 줘야 할 것 같았다.

“제가 살펴봐도 될까요?”

넘어진 소년은 아프다고 구르느라 내 말을 들을 정신이 없었고, 주변에 모여든 소년들은 불쑥 자신들 틈에 끼어든 내가 못 미더운지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대답 기다리다가 한나절이 다 지나겠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넘어진 소년을 향해 몸을 숙였다.

“신발 벗길게요.”

빠르게 신발을 벗겨 발목을 확인했지만 아직 부기가 심한 상태는 아니었다. 부러졌다면 다치자마자 발목이 부어올랐을 테니 골절은 아닐 가능성이 높았다.

“발목 움직일 수 있어요? 한번 움직여 보세요.”

정신없는 와중에도 내 말을 듣기는 한 모양인지 소년이 발을 서서히 까딱였다. 부상 부위가 붓는 속도도 느리고, 움직이는 것도 가능하다면 역시 단순 염좌로 확신이 기운다.

하지만 염좌에도 정도가 있었다. 관절이나 인대의 손상 정도에 따라 치료법과 회복 기간도 달라졌다.

부상 정도를 가장 확실하게 판단할 수 있는 방법은 엑스레이를 찍는 것이다. 하지만 전기도 없는 이런 시대에 그런 기술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 그저 지켜보는 수밖에 도리가 없지.

겉으로 드러나는 증상에 대처하며 변화하는 환자의 상태를 관찰해 근본 원인을 찾아내는 것. 그것이 한의학의 기본이었다.

염좌가 어느 정도로 심하든 초기 대처는 동일했다. 다친 부위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붕대로 단단히 고정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상황이라 상처를 고정할 붕대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어떡하지. 쓸 만한 것이 딱히 눈에 보이지도 않고…….

주변을 둘러보며 잠시 고민하던 나는 머리를 묶고 있던 푸른빛 끈을 풀어냈다. 폭이 좁긴 하지만 길이가 넉넉하니 임시로 쓸 정도는 될 것 같았다.

나는 머리끈을 팽팽하게 당겨 소년의 발목을 감쌌다. 그 손길이 제법 능숙해 보였던지 주변에서 걱정스럽게 수군대던 소년들이 한층 조용해져 있었다.

“다행히 뼈가 부러지진 않은 것 같지만 얼마나 심하게 다친 건지는 시간이 조금 더 지나야 알 수 있어요.”

“뼈가 부러진 것도 아닌데 이렇게 아프단 말이야?”

조금 정신을 차린 소년이 코를 훌쩍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커다란 덩치에 맞지 않는 엄살에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부러졌으면 움직이지도 못해요. 곧 다친 부위가 부어오를 텐데 먼저 냉찜질을 해서 내부 출혈을 막아 주고, 부기가 조금 가라앉았다 싶으면 그때부턴 온찜질을 하세요.”

붕대를 감는 힘에 소년이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붕대에 집중하며 계속 말을 이었다.

“아, 가장 중요한 건 다친 곳을 보호하는 거니까 최대한 발목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고정하고 있어야 돼요. 부상이 심하지 않으면 닷새, 심하면 보름 정도 걸릴 거예요. 불편하겠지만 그렇다고 그냥 두면 회복이 느려지니……”

“그런데 넌 누구냐? 궁에 이렇게 어린 의원이 있다는 건 들어 보지 못했는데.”

붕대의 매듭을 짓고 습관처럼 설명을 이어 가던 중간에 누군가가 얼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어쩌면 당연한 물음에 끈을 묶던 손이 멈칫했다. 슬쩍 고개를 들어 보니 소년들의 눈에 의아함이 가득했다.

“어, 저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지금의 나는 연우희였다. 절노부의 어린 소녀, 귀하게 자란 귀족 가문의 아가씨.

소진일 때의 나는 당당하게 의술을 쓸 수 있었지만 우희는 달랐다. 이곳에서의 나는 의원이 아니었다.

가족들이야 내 능력을 쉽게 이해해 주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도 대충 책이나 보면서 공부했다는 내 말이 통하지는 않을 터였다.

“도와줬으면 고맙다는 말이 먼저 아닌가?”

곤란함에 우물거리고 있으니 소년들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얼굴에 박혀있던 모두의 시선이 순식간에 목소리가 들려온 뒤쪽으로 향했다.

모두의 시선이 닿은 곳에 활을 멋진 자세로 쏘던 소년이 있었다. 그의 등장에 소년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모르는 얼굴이기에 물은 것일 뿐입니다.”

“그렇다고 추궁부터 한 것이 잘한 일은 아니지.”

소년들의 변명을 가볍게 무시한 그가 이번에는 나를 바라보며 손을 내밀었다. 눈앞에 내밀어진 손은 아이의 것답지 않게 곳곳에 굳은살이 박여있었다.

손이 이렇게 될 때까지 활을 쏜 거구나. 그래서 그렇게 활을 예쁘게 쏜 거였어.

멍하니 손을 바라보며 감탄하는 사이 소년이 나를 재촉했다.

“줘.”

“응?”

“달라고, 내 주머니.”

“아.”

그제야 소년의 주머니를 품속에 넣어 둔 것을 기억해 냈다. 나는 서둘러 품속을 뒤져 소년에게 주머니를 건넸다.

“여기 있어.”

내가 주머니를 찾아 소년에게 건네는 사이 주변이 조용해져 있었다. 모두 자리를 피한 것이다. 가만히 주변을 살피니 다친 소년까지 동료의 부축을 받아 절뚝거리며 멀어지고 있었다.

나는 다시 한번 고구려 왕따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태학에는 왕족과 귀족 자제들이 모여 교육을 받는데, 집안의 힘이 약한 가문의 아이들은 종종 그 속에 어울리지 못하고 겉돈다고 했다. 아마 이 소년도 그런 쪽인 것 같았다.

“잘난 집안 애들이 왜 그렇게 유치한 짓을 하는지 모르겠다니까. 출신으로 사람을 구분하다니 얼마나 편협해?”

은근슬쩍 편을 들어 주며 어색하게 웃었더니 그가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너 내가 누군지 몰라?”

‘너 내가 누군지 몰라’라니.

이 세상에 연예인이 있는 것도 아니고 꼭 얼굴을 알아야 할 유명인이 누가 있단 말인가.

“알아야 해?”

“아니, 뭐, 그런 건 아니지만…….”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더니 소년이 얼떨떨한 얼굴을 했다. 마치 뒤통수를 거하게 한 대 맞은 얼굴이었다.

나는 곤란한 상황에서 도와준 소년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기로 했다.

“난처했는데 도와줘서 고마워. 의원도 아니면서 왜 나선 거냐고 할까 봐 걱정했거든. 난 연우희야.”

“연씨?”

반갑게 인사했더니 소년의 눈이 커졌다.

“그럼 네가 오늘 고추가와 함께 국내성에 온다던 그 절노부의 아이였어?”

“그렇긴 한데…… 내가 여기 오는 게 그렇게 유명한 일이었니?”

“절노 사람들은 북방을 지키는 걸 명예롭게 여겨 국내성에 잘 머무르지 않잖아. 안쪽에 숨어 사는 걸 수치스럽다고까지 하지. 그런데 고추가께서 수도에 머물겠다 공언을 하셨잖아. 그러니 모두가 주목하고 있다고. 게다가 넌…….”

“게다가 난 뭐?”

“너 아무것도 몰라?”

“그러니까 뭘 말하는 건데?”

되물었지만 소년은 말이 없었다. 잠시 말을 고르는 듯 주머니를 매만지던 그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모른다면 됐어.”

소년이 주머니를 받아 들어 가볍게 흔들었다.

“아무튼 나도 네 덕에 소란이 나서 주머니를 찾았으니, 서로 고마운 걸 하나씩 주고받은 셈이네. 감사 인사는 그걸로 대신하자.”

“그거, 중요한 주머니였어?”

“중요하다면 중요하겠지. 아버지께 드릴 약초가 들어 있거든.”

“약초? 아버지가 편찮으셔?”

소년의 입에서 꽤 흥미로운 주제가 흘러나왔다. 내가 되물을 줄은 몰랐던지 소년이 조금 머뭇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건강이야 항상 안 좋으셨지. 근데 최근 몇 년간 계속 문제가 터지는 바람에 더 나빠지셨어. 부디 몸을 아끼셨으면 좋겠는데.”

중얼거리는 소년을 보며 주머니를 만졌던 손에 남아 있는 향기를 맡아 보았다. 특유의 짙고 강한 향 덕분에 손쉽게 약초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수리취였다.

“아버지께서 토혈을 자주 하시니?”

내 말에 주머니를 매만지던 소년의 손이 멈추었다.

“그걸 어떻게 알았지?”

놀라움과 경계심이 동시에 섞인 목소리였다.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소년의 손에 있는 주머니에 코를 가져갔다.

“그거 수리취잖아? 수리취는 지혈을 하거나 부종이 있을 때 쓰는 약초거든. 토혈을 하는 사람에게 먹이기도 하고. 네 아버지는 다친 게 아니라 건강이 안 좋다고 했으니 토혈을 하시는 게 아닐까 생각했을 뿐이야.”

“역시 넌…… 의술에 대해 잘 아는 건가?”

“관심이 있어서 이것저것 찾아보는 편이야. 가족들이 툭하면 다치고 아파서 말이야.”

소년이 곤란한 부분을 물어 와 나는 서둘러 말을 돌렸다.

“그런데 향이 강한 걸 보면 막 따 온 것 같은데. 네가 직접 구해 온 거야?”

내 질문에 소년이 머뭇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 이번에는 내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수리취는 양지바른 산지에서 자란다. 귀족 소년이 홀로 가서 채취해 오기는 힘든 약초였다.

“의원에게 맡기지 않고? 수리취는 토혈이라는 증상을 완화해 주는 약초야. 토혈의 원인을 고치진 못한다는 뜻이지. 의원을 불러서 치료를 하는 편이 좋을 텐데.”

“의원은 부를 수 없어.”

설마 돈이 없어서 의원을 못 부르는 건가?

나는 빠르게 소년의 행색을 살폈다. 예상 외로 옷은 제대로 갖춰 입었지만 내 생각은 이미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태학의 다른 소년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는 것도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아서인가 봐.

고아라서 무시 받고 돈 때문에 전전긍긍했던 전생의 김소진이 떠올라서였을까. 주머니를 만지며 우울함에 빠진 소년의 얼굴을 보니 마음이 약해졌다.

“음…… 내가 조금 도와줄까?”

내 말에 멍하니 주머니를 바라보던 소년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렇게 대단한 실력은 아니지만 의원을 부를 수 없는 상황이라면 내가 조금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아. 물론 내가 못 미덥다면 거절해도……”

“정말 도와줄 수 있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소년의 목소리가 닿았다. 바라보는 눈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 눈에 오히려 내가 의아해졌다.

“날 믿어?”

“믿지 못할 건 뭐야?”

“아니, 난 어리고, 의원도 아닌데…….”

“하지만 도와줬잖아. 사람이 다쳤다는 걸 알고 망설임 없이 나서서 필요한 조치를 해 줬어. 그런 사람이라면 믿을 수 있어.”

망설임 없이 나섰던 건 나로 인해 벌어진 일을 수습하겠다는 가벼운 마음이었지, 내가 가진 능력에 대단한 사명감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어쩐지 민망한 기분이었다.

“그런 대단한 생각으로 나선 게 아니야.”

“나선다는 건 어려운 거야. 넌 그걸 했고, 난 널 믿어 볼래.”

거짓 없는 소년의 눈에 가볍게 꺼낸 ‘도와준다’는 말이 진심이 되어 버렸다. 나는 의지를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최선을 다해서 도와줄게.”

내 대답을 기다리던 소년이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희야! 어디 있느냐!”

소년이 무어라 말을 꺼내려는 순간 멀리서 백부의 부름이 들려왔다. 잊고 있던 그와의 약속이 떠오르자 얼굴이 순식간에 사색이 되었다.

“큰일 났다. 백부님이 저기서 꼼짝 말고 기다리라고 했는데.”

약속했던 과편은 이미 날아갔군.

나는 울상이 된 얼굴로 뒤돌아서며 소년에게 외쳤다.

“나 지금 가 봐야 할 것 같아! 나중에 절노부 연씨가 머무는 곳으로 찾아와서 우희를 찾아!”

“우희. 알았어.”

소년이 고개를 잊지 않겠다는 듯 내 이름을 입안에서 몇 번 굴렸다.

* * *

서둘러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니 세 사람이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나를 찾고 있었다. 멀리서 보았을 뿐인데도 얼굴에 걱정이 가득했다.

“백부님!”

나는 부러 밝은 목소리로 백부를 부르며 그의 곁으로 뛰어갔다. 그는 달려오는 내 얼굴을 확인하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사이를 못 참고 자리를 비웠느냐? 우희 너는 어른스러운 것 같다가도 이렇게 한 번씩 사람을 놀라게 하는구나.”

“무엇이 그리 걱정이세요? 국내성에서 제일 안전한 곳이 바로 이곳, 태왕께서 계시는 궁인걸요. 가만히 앉아 있자니 엉덩이가 아파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을 뿐입니다. 태학박사를 뵈러 가신 일은 잘 끝났습니까?”

엄하게 꾸짖는 백부의 말을 요령 좋게 흘려버리니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내 속셈을 알지만 넘어가 주겠다는 눈이었다.

“그래. 선생이 너를 궁금해하더구나.”

“저를요?”

의외의 말에 놀라서 눈을 크게 뜨니 옆에 있던 제신이 말을 거들었다.

“백부님께서 박사께 네 이야기를 하셨다. 총명한 조카가 있는데 여자아이라 태학에 들지 못해 안타깝다 하셨어. 제대로 공부하면 웬만한 사내아이들은 따라오지도 못할 거라고 말이야. 백부님께서 칭찬에 인색하신 건 고구려 사람들이 죄 아는 사실이니 당연히 박사께서 너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았겠어?”

“어휴, 이제 저는 부끄러워서 박사를 만나지 못하겠습니다. 잔뜩 기대하셨다가 부족한 저를 보면 실망하실 것이 분명하니 열심히 피해 다녀야겠습니다.”

“겸양이 지나치구나. 네가 이미 웬만한 유학 경전들을 모두 독파한 것을 우리 북부 사람들이라면 다 알고 있거늘.”

어린 나이에 그런 서책들을 읽을 수 있었던 건 전생에서 그 책들을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동양 사상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했던 까닭도 있지만, 꼭 그렇지 않더라도 대한민국에는 논어나 맹자 같은 사서삼경을 교양서로 엮어낸 책들이 많았다. 내용이 얼마나 친절한지 원문에 주석과 다양한 해석까지 달려 있었다.

그때의 기억으로 별생각 없이 경전들을 읽어 내렸더니 글 선생이 깜짝 놀라 호들갑을 떨어 댔다. 평생을 공부해도 소학 하나 못 떼는 사람이 수두룩한데, 나는 이 어린 나이에 그 어려운 책들을 모두 독파했다는 것이다.

특히 고구려는 태학을 설립하고 난 이후에야 유학을 널리 가르치기 시작했기 때문에 나처럼 높은 수준의 경전을 다 익힌 자가 손에 꼽을 정도라고 했다.

의도치 않게 하늘이 낳은 수재가 되어 버린 나는 여러모로 머쓱한 기분이었다. 전생에서 쌓은 지식으로 수재 소리를 들으니 부당한 찬양을 받는 것 같았다.

진짜 이 시대의 수재는 한 번 본 서책을 줄줄 외는 사촌 오라비 하나 생각지도 못한 해석을 말하곤 하는 제신이었다. 그런데 그들보다 더한 수재 소리를 듣고 있으니 민망할 뿐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나는 시간을 오래 들여 악으로 깡으로 해내는 노력파 쪽이었다.

“그냥 책을 읽은 것뿐입니다. 그 뜻을 모두 알고 실천에 옮길 수 있어야 진정 총명한 사람이지요. 저는 아직 그 경지에 이르지 못했으니 그런 칭찬은 이릅니다. 백부님.”

진심으로 칭찬을 거절했더니 백부가 흐뭇하게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직 자신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총명하다고 하는 게지.”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서는 단단히 뿔이 났다.

“누가 보면 제가 아니라 우희가 아버지 자식인 줄 알겠습니다. 어찌 아들을 곁에 두고 우희를 더 예뻐하십니까?”

“이리 총명하고 겸손한 아이가 어찌 예쁘지 않겠니? 이참에 우희를 내 딸로 데려올까 싶다.”

농담임이 분명한 백부의 말에 제신의 얼굴이 굳었다. 그것은 서도 마찬가지였다.

“네에? 우희가 제 동생이 된다니 저는 절대 싫습니다!”

“나도 너와 형제가 되고 싶은 마음은 눈꼽만큼도 없으니 걱정하지 마라. 그리고 왜 내가 네 동생이니? 혹 우리가 형제가 된다면 당연히 내가 손윗누이가 되지 않겠어? 내가 너보다 한 달이나 먼저 태어났는걸.”

“먼저 태어난 것이 뭐가 중요해? 난 나보다 작은 사람은 손윗사람으로 안 친다.”

“아이고, 그럼 넌 노윤에게 형님이라 부를 거야?”

노윤은 우리의 또 다른 사촌 형제였다. 나이는 이제 겨우 열 살이지만 벌써부터 제신과 키가 비슷했다. 당연하게도 서보다는 훨씬 컸다.

“으……. 그, 그건 다른 문제라고! 아무튼 난 너한테 누님이라고 안 할 거야!”

변명거리를 찾으려는 듯 눈을 이리저리 굴리던 서가 결국 소리를 버럭 지르며 고개를 돌렸다. 제신이 웃으며 그런 서의 어깨를 토닥였다.

“어차피 일어나지도 않을 일로 왜 이리 소리를 높여? 걱정마라. 우희는 내 누이니, 네 누이가 되지 않는다. 그렇지요, 백부님?”

제신의 시선이 백부를 향했다. 그의 시선을 받은 백부는 한동안 말이 없더니 곧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희는 네 누이다. 무엇을 걱정하는 게냐?”

“걱정은요. 사실이 그렇다고 말하는 것뿐입니다.”

백부와 제신 사이에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별 이상할 것도 없는 이야기에 왜 이렇게 날을 세우는 것일까?

의아한 기분에 두 사람을 빤히 바라보니 눈치 없는 서가 불쑥 끼어들었다.

“아버지, 언제까지 예서 이러고 있을 거예요? 어서 시장에 가요. 얌전히 태학박사와 만나고 오면 주전부리를 사 주마 하고 약조하셨잖습니까.”

서의 칭얼거림에 긴장감이 연기처럼 허공으로 흩어졌다. 백부는 언제 제신과 기 싸움을 벌였냐는 양 미소를 지었다.

“그래. 내가 그런 약조를 하였지. 서는 얌전히 선생의 말을 경청하였으니 약조한 대로 주전부리를 사 주마. 한데 우희는 나와의 약조를 어겼으니…… 이를 어쩐다?”

“백부님께선 제가 과편을 먹지 못해 하루 종일 우울하길 바라십니까?”

“녀석, 이제 이 백부를 협박할 줄도 아는구나.”

그렇게 말하면서도 기분 나쁜 기색이 아니었다. 백부는 웃는 낯으로 나와 서를 바라보다 제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잠시 태왕을 뵈어야 하니, 제신이가 아이들을 데리고 시장 구경을 시켜주거라. 어두워지기 전에는 거처로 돌아와야 할 것이야.”

“예. 걱정 마십시오. 제가 잘 챙기겠습니다.”

“그래. 그럼 거처에서 다시 만나자.”

우리는 멀어지는 백부님께 인사를 한 뒤 왔던 길을 거슬러 궁을 나섰다.

동맹제 때 국내성을 와 보았던 제신은 익숙하게 길을 찾아 우리를 시장에 데려다주었다.

예상보다 큰 규모에 입이 떡 벌어졌다. 시장에는 없는 것이 없었다. 먹거리는 물론이고 옷이며 생활용품들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 대한민국의 대형 마트가 부럽지 않은 풍경이었다.

“형님! 저쪽에 떡이 있습니다!”

마차에서부터 주전부리를 먹겠다고 벼르더니 서는 제대로 물을 만난 고기처럼 신이 났다. 저자에 닿자마자 좋아하는 떡을 발견하고는 제신의 팔을 끌었다. 힘이 얼마나 강했는지 그 큰 제신이 서에게 끌려갈 정도였다.

“알겠다. 알겠으니 천천히 가자.”

제신이 서를 어르며 나를 바라보았다. 어서 따라오라는 눈빛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두 사람의 뒤를 쫓았다. 그때 장신구 좌판을 벌인 상인 하나가 나를 붙잡았다.

“꼬마 아가씨, 여기 머리 장식 좀 보고 가세요.”

장신구라니. 예쁜 것을 보고 그냥 지나치면 여인이 아니었다.

나는 홀린 듯이 상인에게 이끌려 좌판 앞에 섰다. 산골인 절노부에는 이렇게 예쁜 것을 파는 상인이 없었다.

“와아.”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장신구들을 보자니 절로 감탄이 나왔다. 머리 장식뿐만 아니라 반지며 목걸이, 팔찌가 당당하게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었다.

“요즘 국내성에는 홍옥이 박힌 머리꽂이 비녀가 유행이랍니다. 뽀얀 몸체는 은으로 만들었지요.”

넋을 놓고 좌판을 구경하는 내게 상인이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가만히 그 소리를 듣고 있자니 상인이 추천하는 장신구를 꼭 사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럼 이걸…….”

나는 홀린 듯이 손을 뻗어 상인이 열변을 토한 비녀를 집었다. 아니, 집으려고 했다.

비녀의 머리를 잡은 내 손 아래로 비녀의 아랫부분을 잡은 다른 손이 있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나와 동시에 비녀를 집은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전체적으로 복장이 화려한 소년이었다.

옷차림뿐만 아니라 얼굴도 번지르르한 것이 척 보아도 귀족인 태가 났다. 잘 꾸미지 않는 북쪽의 귀족 사내들과 달리 수도의 귀족들은 사내들도 꾸미는 것을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자태를 빤히 살피자 소년이 예쁘게 미소를 지었다. 예쁘긴 했지만 사무적인 웃음이었다.

그는 웃음과 함께 비녀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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