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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화유수 1권
서장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내가 특별하다는 것을 알았다. 아홉 살 어린 아이가 으레 갖곤 하는 귀여운 착각이 아니었다.
나는 어머니의 배 속에 있을 때부터 전생의 기억을 갖고 있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것이 정말 전생의 기억인지, 아니면 우습기만한 꿈에 불과한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내 속에는 스물여덟 대한민국 한의사 ‘김소진’으로서의 기억이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지금 나를 ‘연우희’라고 부른다. 이곳은 대한민국이 아닌 고구려고, 나는 한의사가 아닌 절노부의 어린 소녀에 불과하다.
고사리처럼 작은 내 손과 드라마 세트장 같은 주변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머릿속에 품고 있는 기억들이 그저 우스운 상상처럼 느껴지고는 했다.
전생의 김소진은 불우하게 태어나 불우하게 죽었다. 태어나자마자 버려져 고아원에서 자랐고, 돌봐 줄 사람이 없어 이를 악물고 공부해 한의사가 되었다.
머리는 제법 좋아 유능한 한의사로 이름을 날렸지만 그뿐이었다. 결국 화재 사고로 죽고 말았으니까.
막 꽃이 피기 시작하려는 찰나에 찾아온 죽음이라니. 여러모로 불행한 삶이었다.
꿈인지 진짜인지 모를 기억 속 대한민국에 비하면 이곳 고구려는 불편하기 그지없는 세상이다.
나의 무료함을 달래 주었던 휴대전화나 컴퓨터는 말할 것도 없고, 어두운 밤을 밝힐 전등조차 없다. 물을 한번 마시려면 우물에서 힘들게 길어 와야 하고, 더러워진 옷은 멀리 냇가에 나가 세탁해야 한다.
다행인 것은 그 모든 일들이 나의 몫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나는 고구려 귀족 가문의 한 축을 자랑하는 절노부 연씨 가문의 딸로 태어났다. 절노부 연씨 가문은 계루부 고씨가 왕위를 세습하기 시작한 뒤부터 쭉 왕비를 배출해 낸 유서 깊은 집안이라고 한다.
절노부의 땅은 고구려의 수도 북쪽에 있다. 하여 북부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북쪽에서도 북쪽.
그렇지 않아도 추운 겨울이 얼마나 매서울지는 말하지 않아도 분명하다. 대한민국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매서운 한겨울 바람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이 세상이 얼마나 다른 곳인지를 실감한다.
모든 것이 낯선 미지의 세상.
이번 생을 나는 어찌 살아야 할까.
오늘도 고구려 소녀 연우희로서의 생, 그 하루가 흘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