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257화 (외전 완) (257/257)

외전 36화.

“무슨 그런……. 하나 기르는 것도 버거워 죽겠는데 딸도 아니고 아들만 둘이라니? 그런 끔찍한 소리가 어디 있어요? 애 기르는 게 장난이에요?”

“길러 보지도 않고 말은 잘하는군.”

“길러 본 사람들이 입을 모아 말을 하는 데 겪어 보지 않아도 뻔하잖아요. 요즘 파울로가 아들 기르느라고 얼마나 고생하고 있는지 아세요? 저는 그렇다 치고 미레아 쪽이 부담이라고요.”

“어…… 나는 둘 정도는 괜찮을 것 같은데. 아무래도 형제가 있는 쪽이 좋지 않을까?”

미레아의 말에도 아리스가 혀를 차며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건 일단 하나 낳고 천천히 생각하자. 그래도 나는 하나면 충분하단 말이야.”

라케드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물었다.

“그보다 제인스터의 성을 쓰는 건가? 네 쪽이 아니고?”

“혼혈이기는 한데 그렇다고 마이련식 이름은 애매하잖아요. 적어도 세로킨에서 자랄 건데…….”

“어차피 제인스터란 성도 세로킨에서 쓰는 성이 아닌데.”

프레솔라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과자를 오물거리고 있다가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혼자 배시시 웃었다.

“얘, 프레솔라. 네 생각은 어떠니? 카엘이랑 라이오스 중에 어느 게 더 좋아 보여?”

미레아가 불쑥 질문하자 뜻밖에도 프레솔라는 제법 고심하는 얼굴을 했다. 그리고 나름 신중한 대답을 내놓았다.

“형 쪽이 카엘, 동생 쪽이 라이오스.”

“그러니까…… 둘째 계획은 아직 좀 이르다니까…….”

아리스가 마른세수를 하든 말든 프레솔라는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또다시 질문 세례를 퍼부었다.

“누나랑 형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야?”

그 질문에 미레아의 귀 끝이 빨개졌지만 아리스는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많이?”

“그래.”

“언제까지?”

“평생?”

“정말?”

“정말로. 죽어서도 계속.”

꼬치꼬치 캐묻는 프레솔라의 질문에 아리스가 성실하게 답변하면 할수록 라케드는 염병한다는 얼굴을 했다. 프레솔라는 미레아를 보고는 비슷한 질문을 던졌다.

“누나도?”

“응…….”

느리게 대답하는 미레아에게 아리스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꼬투리를 잡았다.

“왜 말꼬리를 늘려? 꼭 억지로 대답하는 것 같잖아.”

“남들 앞에선 민망하단 말이야.”

“전에는 잘만 말해 놓고.”

“그건……!”

“프레솔라, 얘야. 저 누나도 형을 아주 많이 사랑한단다. 부끄러움이 많아서 그래.”

프레솔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라케드는 손으로 자신의 두 눈을 가리더니 짜증 섞인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제발 염병은 나 없는 데서 떨어라.”

이제 다른 질문이 더 남아 있지 않는지 프레솔라는 과자를 다 먹지도 않았는데 손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먹지 않아?”

미레아의 말에 프레솔라가 손을 내저었다.

“이제 괜찮아.”

프레솔라가 아리스의 무릎 위에서 깡충 뛰어내리자 라케드가 제안했다.

“하루 묵고 갈 텐가?”

하지만 라케드의 그 따듯한 제안을 미레아와 아리스는 의심쩍게 받아들였다.

“……웬일이세요?”

“역시 됐다. 그냥 꺼져라.”

라케드가 손을 휘휘 내저었지만 두 사람은 이미 계획을 다 세운 후 방문한 차였다. 단지 그것을 라케드가 먼저 말을 꺼낸 것이 의외였을 뿐이었다.

“아니에요, 묵고 갈게요.”

“사실 묵고 갈 생각으로 왔거든요.”

라케드가 테이블 위에 있던 종을 흔들자 근방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종 아이가 다가왔다. 라케드는 그에게 두 사람을 방으로 안내해 주라고 부탁했다. 이동하기 위해 두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프레솔라가 두 눈을 반짝이며 미레아를 올려다보았다.

“누나랑 형, 자고 가?”

“응.”

“우와.”

프레솔라가 지나치게 기뻐하자 미레아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왜? 좋니?”

“응, 좋아.”

만난 지 몇 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어쩌다 이렇게 호감을 사게 된 것인지 모르겠으나 프레솔라는 미레아를 아주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다. 방까지 이동하는 내내 프레솔라가 미레아의 옆에서 얼쩡거리자 보다 못한 라케드가 한마디 했다.

“미레아를 너무 귀찮게 굴지 말아라. 홑몸이 아니니까.”

“귀찮게 안 해요.”

프레솔라는 얼른 고개를 젓고는 미레아에게 정중한 태도로 물었다.

“귀찮게 안 할 테니까 누나 방에서 책 읽어도 돼?”

“뭐, 그 정도는 괜찮아.”

“고마워!”

프레솔라는 활짝 웃으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럼 나 읽을 책 가져올게!”

그러면서 책을 가지러 뛰어갔다.

“복도에서 뛰지 마.”

라케드의 살벌한 경고가 등 뒤에서 들려오자 프레솔라는 얼른 속도를 줄였지만 그래도 빠른 걸음인 것은 여전했다.

라케드는 두 사람에게 넓은 방 하나를 내주고 시종 아이와 함께 자리를 피해 주었다. 미레아는 짐 정리를 하다 갑자기 고개를 갸웃거렸다.

“용들은 무성이라 인간을 만나지 못하면 어릴 때 성별에 대한 개념이 없지 않나?”

“그런가?”

“그런데 왜 나를 누나라고 불렀지?”

미레아의 의문에 아리스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책에서 봤겠지. 인간의 번식 방법도 안다잖아.”

“언니도 아니고 누나라 그러기에 말이야.”

용들은 중성적으로 생겨서 분위기에 따라 여자처럼 보이기도 하고 남자처럼 보이기도 했다. 프레솔라는 특히 아직 어렸기 때문에 여자아이처럼 상당히 곱상하게 생긴 외형이었다. 그래서 미레아는 그 점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어쩐지 그 아이와 대화하는 것도 마치 예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처럼 편안했고 말이다. 여러모로 특이한 아이였다.

“아이고, 중요한 건진 딱히 모르겠고 모처럼 할 일도 딱히 없는데 잠깐 누워 있어야겠다.”

자신의 짐 정리를 대충 끝낸 미레아는 침대 위에 벌렁 누웠다. 그리고 그럴 의도는 없었지만 저도 모르게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었다. 괜찮다고는 했어도 역시 비공정을 오래 타고 있던 것이 피곤했었나 보다.

아리스가 미레아의 베개를 제대로 받쳐 주고 이불을 잘 덮어 주고 있는데 작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손님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아 아리스는 소리가 나지 않게 방문을 열고는 상대방에게 자신의 입가에 손가락을 올려 보였다.

“쉿.”

그런 아리스의 행동을 따라 한 프레솔라의 한쪽 팔에는 어린아이가 읽을 만한 것 치고는 두꺼운 책이 들려 있었다.

“누나가 자고 있으니까 깨우지 마.”

아리스가 속삭이자 프레솔라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발소리가 나지 않게 카펫을 조심스럽게 밟았다. 그는 침대 옆으로 다가가 새근거리는 숨소리를 내며 자는 미레아의 얼굴을 한번 확인하더니 아리스에게는 말도 걸지 않고 창가에 있는 소파로 향했다.

등받이에 몸을 푹 기대어 앉고는 책을 펼친 아이는 정말로 책만 읽다 갈 생각으로 보였다. 아리스는 그런 프레솔라를 내버려 두고 침대 옆에 앉아 미레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요 속에 프레솔라가 책장을 넘기는 소리만 들려왔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누군가 노크를 하며 그들을 불렀다. 식사 시간을 알리러 온 시종이었다. 아리스가 미레아를 흔들어 깨우자 미레아는 눈을 찌푸리며 일어났다.

“내가 언제 잠든 거지……?”

“침대에 눕자마자.”

“요새 잠이 늘었어.”

미레아가 기지개를 쭉 켜며 하품을 늘어지게 했다. 그러다 책을 덮고 조용히 앉아 있는 프레솔라를 발견하고 멋쩍게 웃었다.

“미안해, 자느라고 놀아 주지도 못했네.”

“아니, 괜찮아. 놀아 주지 않아도 돼.”

그리고는 들고 있던 책을 내보였다.

“나는 책 읽고 있으면 되니까.”

“음…… 그럼 대신 식사 같이할까?”

미레아의 제안에 프레솔라의 얼굴이 환해졌다. 아무래도 미레아의 옆에 찰싹 붙어 다니는 것이 그렇게도 좋은 모양이었다. 그는 미레아의 손을 잡고 식당으로 내려가 그녀의 맞은편 자리에서 작은 입을 오물거리며 열심히 음식들을 입으로 넘겼다. 이번에는 아까와는 달리 다른 질문도 던지지 않고 조용히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올라가는 미레아에게 프레솔라가 손을 흔들었다.

“잘 자.”

미레아와 함께 다니는 것은 이것으로 충분했는지 프레솔라는 선선히 물러났다. 하지만 이번엔 아쉬운 쪽은 미레아였다. 오랜만에 어린아이를 상대하는 것이 생각보다 재미있었는데 말이다. 아쉬워하는 미레아를 보며 아리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걱정이다…….”

“뭐가?”

“난 어린애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모르겠는데…….”

아빠 노릇을 잘할 자신이 없다며 시무룩하게 있는 아리스의 손을 미레아가 따듯하게 잡아 주었다.

“괜찮아. 닥치면 다 하게 되어 있어.”

하지만 아리스는 여전히 한숨만 푹푹 내쉴 뿐이었다. 미레아는 모처럼 아리스가 자신 없어 하는 모습을 본 것이 재미있어서 옆에서 웃었다.

* * *

다음 날, 짐을 챙기고 나와 비공정의 이륙 준비를 하는 아리스를 미레아는 프레솔라와 함께 구경하고 있었다. 프레솔라는 미레아의 손을 꽉 붙잡았다. 마치 떨어지기 싫다는 듯이 말이다. 라케드는 팔짱을 끼고 서 있다가 그들이 짐을 전부 비공정에 싣자 무뚝뚝하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식장에서 보자.”

“진짜 오실 건가 보네요?”

아직도 라케드를 완전히 믿지 못한 아리스가 반신반의하며 묻자 상대방은 어깨를 으쓱였다.

“의리로 가 주마.”

“황송해라.”

미레아는 프레솔라의 눈높이에 맞춰서 무릎을 굽혔다.

“프레솔라, 누나는 이제 가 볼 시간이야.”

“응.”

프레솔라의 얼굴에 잠시 서운함이 스쳐 지나갔지만 이내 평소의 얼굴로 돌아와 고개를 끄덕였다.

“잘 있어라, 꼬마.”

아리스가 그의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렸다. 미레아가 그를 흘겨보며 그가 엉망으로 만든 은색 머리카락을 손으로 잘 매만져 주었다.

“됐다.”

미소 짓는 미레아에게 프레솔라가 자신의 고사리 같은 손을 내밀었다. 미레아는 의아해하는 얼굴을 했지만 일단 그의 요구대로 자신의 손을 그 위에 올려놓았다. 그는 아리스에게도 똑같이 했다. 아리스 역시 프레솔라의 손을 잡아 주자 그는 어린아이치고는 상당히 결연한 얼굴로 말했다.

“누나랑 형은 앞으로 행복하게 살 거지?”

미레아와 아리스는 서로를 한번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럼.”

“행복해야지.”

“그럼 나는 누나랑 형보다 훨씬 오래 살 거니까, 정말로 그런지 항상 보고 있을게.”

왜 자신들을 감시하겠다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미레아와 아리스는 그저 어린아이의 의미 없는 말로 생각해 넘겼다. 하지만 프레솔라는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아가도 행복하게 사는지 보고 있을게.”

“그것참 든든한데.”

“그러니까 서로 사랑하면서 행복하게 살아.”

애늙은이 같은 말에 미레아와 아리스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고마워, 프레솔라.”

“그건 당연한 거야.”

“응.”

프레솔라는 고개를 살짝 까닥이고는 천천히 뒷걸음질하며 물러났다.

“누나, 안녕.”

“그래, 잘 있어. 만나서 반가웠어.”

“정말로 지켜볼 거야.”

미레아가 웃는 사이 프레솔라는 어디론가로 달려 나갔다. 작은 뒤통수가 보이지 않게 되자 라케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세계는 너희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없어진다 해도 이제 용들이 지켜볼 거야. 이 아이들이 말이야. 프레솔라 역시 그러하겠지.”

“그렇군요.”

미레아의 대답에 라케드가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그들을 돌아보며 따듯하게 웃었다.

“너희가 넘겨 준 세상이다. 그러니 뒤는 우리에게 맡겨.”

아리스는 하마터면 라케드에게 어디 아프냐고 물을 뻔하여 자신의 입술을 꾹 닫았다. 그런 아리스의 인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라케드는 마저 걷기 시작했다.

아리스와 미레아가 그들이 타고 온 비공정을 이륙시켜 떠나는 것을 확인한 라케드는 편안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자, 그럼.”

라케드는 건물 기둥 사이에서 몸을 숨기고 있는 프레솔라를 찾아내었다. 아이는 이제는 점처럼 보이는 비공정을 한참 동안 올려다보고 있었다. 손을 까닥거리면서 부르자 쪼르르 다가온 프레솔라에게 라케드는 허리에 손을 얹고 물었다.

“미련이라도 남았냐?”

프레솔라가 희미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젓자 라케드는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그럼 이제 들어가자.”

라케드의 부름에 프레솔라는 아쉽다는 기색을 내비쳤지만 그래도 어딘가 후련해 보이는 얼굴로 그를 따랐다.

잘 가, 누나. 이번에는 항상 지켜봐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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