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256화 (256/257)

외전 35화.

〔이제 무엇이 하고 싶으냐? 네 부탁이라면 들어주마. 네 가족에게 윤설이 빚진 것은 언제가 되었든 반드시 갚아야 하는 것이고, 내가 윤설에게 빚이 있으니 그녀를 대신하여 빚을 갚는 건 당연한 것이다.〕

휴레오는 어깨를 으쓱였다.

“음…… 잠들어 있느라고 그것까진 생각 못 했는데…….”

〔혹여 네 누이에게 못다 한 말은 없느냐?〕

“제 말은 제가 잠들기 전에 전달하고 왔어요. 비록 누나의 꿈속이었지만…… 제 진심이 닿았을 것이라 믿어요. 그리고 실제로 누나가 스스로 그를 택했으니 괜찮을 거예요.”

〔그것으로 정말 괜찮겠느냐? 휴레오 제인스터.〕

휴레오는 보비네를 돌아보며 쓰게 웃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으니까요. 나머지는 누나의 인생이에요. 제가 관여할 수 없지요. 그러니 누나를 잘 보살펴 주세요.”

〔그렇게 하마.〕

보비네는 따듯한 눈으로 휴레오를 굽어살폈다. 이것은 휴레오의 두 번째 기회였다. 이번에야말로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생각할 수 있도록 하는 두 번째 삶.

〔하고 싶은 것이 없다면, 이제 저 밖의 세계로 내보내 주마. 어디로 보내 주랴?〕

“음…….”

휴레오는 팔짱을 끼고 신중하게 생각했다.

〔네 누이와 인연이 닿게 태어나게 해 줄 수도 있단다.〕

보비네의 제안에도 휴레오는 생각을 오래 하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미 한번 인연이 닿았으니 누나와는 언젠가는 또 만나겠지요.”

〔그렇다면…….〕

“기왕이면 멋진 것으로 태어나고 싶어요. 그렇지, 가령…….”

휴레오의 이어진 대답을 들은 보비네가 빙그레 웃었다.

〔네 두 번째 생은 이전 생보다 더 즐겁기를 바라는구나.〕

보비네의 배웅을 받으며 휴레오는 망설임 없이 영소의 흐름에 몸을 던졌고 그것을 보며 보비네는 희미하게 웃었다.

* * *

“이번에 새로 태어난 용들은 얼마 안 되네요?”

어쩐 일인지 라케드가 초대한 덕에 미레아와 아리스는 용들의 성지에 와 있었다. 용들의 성지는 ‘눈물을 삼킨 바다’라 불리는 북반구의 바다 한가운데에 있는 섬을 통틀어 말하는 장소이다.

원래 배아의 방을 구성한 시설물은 그 섬 중 한구석에 숨겨져 있었는데 일전의 습격으로 인해 한번 섬을 벗어나 위치를 옮겼었다. 하지만 이제 위험한 상황이 지났고 안전하다는 판단이 서자 그것은 최근에 다시 섬으로 돌아와 자리를 잡았다.

미레아는 이미 두 번째 방문이었지만 아리스는 처음 방문한 용들의 성지였다. 덕분에 그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여기저기 구경하기 바빴다. 그들은 너른 정원에 앉아 아직 어린 용들이 아장아장 돌아다니는 것을 바라보며 귀여운 생명체들에게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제 마수도 없고 보비네가 돌아왔으니 굳이 많이 태어날 이유가 없으니까. 그리고 이제 용들의 수명은 더 늘어날 테고…… 2,000년 정도 되던 수명은 앞으로 그 이상으로 수천 년, 일부는 몇만 년이 될 수도 있다.”

용은 2,000년가량이 평균 수명으로 알려졌지만, 이것은 마수와 싸울 수 있도록 힘을 끌어내기 위해 배아기 때부터 억지로 성장을 촉진한 결과였다. 세피로스가 그러했듯 다른 용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용들은 앞으로 자연스럽게 성장하여 자연 수명을 누릴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되었다.

“와, 그럼 거의 이 세계의 흥망성쇠를 다 볼 수 있겠네요?”

“그런 셈이지.”

미레아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라케드가 손수 우려 준 차를 마셨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이 어딘지 불편했다.

몇 달 전에 라케드는 라슈발렌의 일을 정리하고 용들의 성지로 돌아갔다. 그런 라케드가 놀러 오라며 용들의 성지에 두 사람을 초대했을 때는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라케드는 아무 용건도 없이 그런 살가운 말을 건네는 사람이 아니지 않는가. 그래서 무슨 일에 휘말리는 것이 아닌가 덜덜 떨며 왔는데 라케드는 정말로 손님 대접을 해 주고 있었다.

라케드가 무섭기는 하나 사실 두 사람은 그것 말고도 용건이 따로 있었다. 그래서 언제쯤 연락을 할까 고민을 하고 있던 차였는데 라케드가 그들을 부르니 빼지 않고 만나러 가는 수밖에.

결과적으로 잘된 일이었기에 그들은 오랜만에 라케드의 얼굴을 보았다. 아리스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저희에게 무슨 할 말이라도 있으세요?”

“아니.”

생뚱맞은 대답이 돌아왔다. 대체 용건이 없는데 왜? 그런 얼굴을 한 두 사람에게 라케드가 한심스럽다는 듯 말했다.

“용건은 내가 너희에게 있는 게 아니라 너희가 내게 있겠지.”

그 말에 미레아와 아리스는 동시에 눈을 가늘게 떴다.

“어디서 들으셨어요?”

“니들 바보냐? 내 정보력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아리스가 피식 웃으며 안주머니에서 깔끔하게 접힌 봉투를 하나 꺼냈다. 그의 옆에서는 미레아가 조금 상기된 얼굴로 관자놀이께를 긁적였다.

“이거 드릴 기회를 보고 있었지요.”

아리스가 조심스럽게 말하자 라케드는 그가 내민 봉투를 손가락으로 집어 들어 까닥이더니 딱딱하게 말했다.

“못 가.”

“좀 펴 보시고 말씀하세요.”

“바빠.”

“최소한 결혼식 날짜 정도는 확인해 보시고 둘러대시든가요.”

그렇다. 그것은 아리스와 미레아의 결혼식을 알리는 청첩장이었다. 아리스의 항변에 라케드는 시큰둥한 태도로 봉투를 개봉했다. 사랑의 결실로 결혼을 합니다, 어쩌고저쩌고하는 식상한 멘트는 읽지도 않고 넘겨 보니 생각보다 식을 올리는 날짜가 일렀다. 바로 다음 달이었으니 말이다.

하여간, 추진력 하나는…….

“뭐…… 시간 빼면 못 할 것도 없긴 하겠네.”

라케드가 생색내자 미레아와 아리스가 방긋 웃었다.

그때, 저편에서 네다섯 살은 되어 보일까 싶은 아이가 도도도 달려오더니 미레아의 다리에 달랑거리며 매달렸다. 미레아가 내려다보자 아이는 반짝이는 보라색 눈동자로 미레아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머리 색은 누군가를 떠오르게 만드는 은색이었다. 시선이 마주친 아이가 방긋 웃었다.

“안녕, 누나!”

“안녕.”

초면이지만 친근하게 인사를 건네는 미레아를 향해 아이는 낯도 가리지 않고 양팔을 벌렸다. 미레아가 작게 웃으며 번쩍 안아 자신의 무릎에 앉히자 아이는 만족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라케드의 눈치를 슬쩍 보더니, 접시에 있던 과자를 슬그머니 집어 입에 넣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라케드가 그것을 묵인해 주었다. 오히려 라케드의 기색을 살피며 안절부절못하는 쪽은 미레아와 아리스였고 아이는 천하태평이었다.

“나는 프레솔라.”

묻지도 않았는데 자신의 이름을 소개하는 아이에게 미레아가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미레아 제인스터고 저쪽은 아리스 류.”

“알아.”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에게 미레아는 라케드가 미리 말을 해 주었나 싶어서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어갔다.

“그건 그렇고 너희는 생각보다 결혼을 늦게 하는군.”

“저희 27살밖에 안 됐는데요.”

아리스의 말에 라케드가 대충 셈해 보고는 대꾸했다.

“만난 지는 5년째잖냐.”

“정식 교제를 한 건 2년밖에 안 됐어요. 그래서 저희는 좀 더 있다 결혼하고 싶긴 했는데…….”

라케드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미레아를 아리스가 불안한 눈으로 보더니 결국 그녀의 무릎에 앉아있는 프레솔라를 불렀다.

“프레솔라, 이제 형이 안아 줄까?”

프레솔라가 그에게 가는 것을 주저하며 미레아의 옷깃을 꽉 잡자 아리스가 난처하게 웃으며 설명했다.

“저 누나는 지금 무리하면 안 돼서 그래. 배 속에 아기가 있거든.”

그 말에 라케드는 찻잔을 입가에 가져가려던 것을 멈추고 테이블 위에 곱게 놓인 청첩장과 두 사람을 번갈아 가면서 보았다. 그는 멋쩍게 웃는 두 사람에게 아니꼽다는 어투로 말했다.

“너희 뭔가 전후 관계가 잘못되었다고 생각 안 하냐?”

“어……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요.”

아리스가 뭐가 대수냐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서 2년 동안 미적거리던 놈들이 이제야 부랴부랴 식을 올리는 거군.”

“아하하…… 딱히 미적거리던 것은 아니고 그냥 지금까지는 급할 게 없었던 것뿐이에요.”

“그런데 이렇게 장거리 여행해도 괜찮나? 무리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

“에이, 괜찮을 거예요. 저는 임신한 줄도 모르고 신나게 총 들고 칼 들고 뛰어다녔었는데도 멀쩡했거든요. 거기에 이젠 어느 정도 안정기라서 괜찮대요.”

“자랑이다, 아주 자랑이야.”

“덕분에 제 심장이 남아나질 않습니다…….”

라케드의 빈정거림에 초탈한 목소리로 대꾸한 아리스가 프레솔라에게 재차 말했다.

“아무튼, 누나를 좀 쉬게 해 주지 않을래? 형이 안아 줄게.”

그러자 아이는 선선히 미레아의 무릎에서 내려오더니 아리스의 무릎 위로 폴짝 뛰어올랐다. 프레솔라는 웃으면서 아리스를 올려다보고 다시 과자를 집어 먹기 시작했다. 그런 프레솔라를 말리지 않고 라케드는 다시 평온한 태도로 차를 호로록 마시고 있었다. 어린아이를 다루는 게 익숙지 않은 아리스가 어색하게 프레솔라를 안고 있는데 아이가 물었다.

“배 속에 아기가 있어?”

호기심 어린 눈에 아리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옆에서 라케드가 부연 설명을 해 주었다.

“용과는 달리 인간의 번식은 남성과 여성이…….”

“그런 건 좀 우리가 없는 자리에서 따로 교육하면 안 되나요?”

라케드의 말을 끊고 아리스가 투덜거렸지만 프레솔라는 눈을 반짝이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알고 있어. 나 똑똑해.”

“그래…… 똑똑하구나.”

미레아가 구태여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아는 것인지 묻지 않고 넘어가자 아이는 다시 질문을 던졌다.

“엄마, 아빠가 되는 거야? 누나랑 형이?”

“응. 내가 엄마고, 이 형이 아빠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프레솔라는 두 사람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미레아의 배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기 이름도 있어? 이름은 뭐야?”

그러자 아리스와 미레아의 표정이 대번에 진지해졌다.

“딸이면 세실이라고 짓기로 하긴 했는데, 아들 쪽이 문제란 말이지.”

미레아가 중얼거리면서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소신껏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난 남자애면 카엘이라고 짓고 싶은데…….”

“난 라이오스가 좋다니까.”

아리스의 의견에 미레아는 고개를 저었다.

“카엘이 더 예뻐.”

“어감은 라이오스 쪽이 더 좋잖아.”

“성까지 붙일 걸 생각해야지. 카엘 제인스터랑 라이오스 제인스터랑 비교해 보라고. 그럼 전자지.”

“후자도 괜찮다니까.”

둘이 투덕거리기 시작하자 라케드가 한심하단 얼굴로 끼어들었다.

“그냥 아들을 둘 낳으면 되잖아. 그래서 각각 카엘, 라이오스라고 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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