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4화.
이후 레인 마리어드가 자신에게 반려를 내린 서리 여신의 의도를 온전히 이해한 것은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후였다.
“레인 마리어드. 당신의 따님은 여신의 조각입니다.”
어느 날 지치고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한 신녀 아이가 찾아와 자신을 보자마자 한 말에 레인은 뒤늦게 깨달았다. 어째서 그녀에게 반려를 내린 것인지, 그 의미가 무엇인지 말이다. 신녀 아이는 레인에게 재차 말했다.
“그것도 가장 강력한 조각이 될 것입니다.”
“그 조각의 역할은 무엇이지요?”
레인의 말에 신녀 아이, 리비엘로는 짧게 대답했다.
“그녀는 이 세계를 구할 겁니다.”
“어떻게요?”
“그것까지는 알 수 없습니다. 현재로서는 제가 읽을 수 있는 미래가 그리 길지 않습니다. 다만 예지 능력을 갖고 있기에 여신의 의도를 엿볼 수는 있었던 것뿐입니다. 제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당신의 따님이 이 세계를 구할 여신의 조각이라는 것뿐입니다.”
“그것을 왜 제게 말하는 것인가요?”
“라슈발렌의 차기 회장으로 내정된 세피로스 님의 밑에서 따님을 보호하세요. 그라면 여신의 조각이 완벽에 가깝도록 제 기능을 하도록 도와줄 수 있습니다.”
“가장 강력한 조각이 될 것이란 이야기는…… 다른 조각들도 있다는 소리인가요?”
레인의 질문에 리비엘로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가 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렇습니다만 따님과 함께 만들어진 다른 조각들은 어디까지나 예비 부품입니다. 어디까지나 대체품이기 때문에 상당히 불완전하지요. 하지만 당신의 따님은 다릅니다. 여신의 의도와 가장 가깝게 만들어졌으니까요. 그러니 여신의 조각으로 기능해야 할 사람은 될 수 있으면 미레아 제인스터여야 합니다.”
리비엘로는 잠시 말을 고르더니 레인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그것이 지난한 길이 될지라도 따님은…… 여신의 조각으로서 임무를 반드시 완성해야 합니다.”
리비엘로의 말을 들은 레인은 혼란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이 모든 것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아, 서리 여신이시여. 당신의 뜻은 바로 이런 것이었군요. 저의 쓰임은 당신의 뜻대로, 당신이 미리 써 둔 역사서의 한 페이지.
레인과 리비엘로의 대화를 옆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케이드는 리비엘로를 데려온 자를 향해 나지막하게 물었다.
“그거 혹시 나 때문이야? 내가 그…… 니콜라우스에게서 떨어진 페이릭의 잔재라? 그래서 미레아가 그런 운명을 타고난 거야? 어떻게 생각해, 세피로스?”
불안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케이드에게 대답하기 전에 세피로스는 잠시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은발을 쓸어 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정확하게 모르겠어.”
“하지만…….”
케이드가 무어라 말하려고 입술을 달싹이자 레인이 손을 들어 올려 그를 진정시켰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레인의 말에 리비엘로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중요한 것은 원인이 아닌 현재 굴러가고 있는 수레바퀴의 방향이지요. 그것이 어디를 향할지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하지만 케이드의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하…… 이렇게 뒤통수를 때리시겠다?”
케이드는 처음으로 서리 여신에게 화가 났다. 자신은 몰라도 자신의 딸에게까지 이런 영향을 끼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지?”
다소 신경질적인 케이드의 물음에도 리비엘로는 침착한 목소리로 대하였다.
“지금으로선 저 역시 그것까지는 모릅니다. 여신의 조각이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지는 서리 여신만이 알겠지요. 그러니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평범한 일상을 살아 주세요. 평범하게 따님을 사랑해 주세요. 여러분이 그 아이의 역할을 바꾸기 위해 무슨 일을 하더라도 여신의 조각은 때가 되면 결국 주어진 기능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맞아.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어, 케이드. 그리고 여신의 조각이라 해도 삶에 특별한 무엇인가가 있는 것이 아닌 경우가 많아.”
레인이 애써 웃어 보였다.
“너무 걱정하지 마. 이것도 다 여신의 안배야.”
반발심이 이는 얼굴을 한 케이드를 안쓰럽게 바라보던 레인이 속삭이듯 물었다.
“제 아이는 행복할까요?”
리비엘로는 그런 것까지는 예지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언제나 인간의 가능성을 믿었기 때문에 느리게 입을 열었다.
“……행복을 찾아낼 수 있을 겁니다.”
레인은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그리고 아직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케이드의 손을 꽉 잡았다. 그러자 케이드 역시 천천히 그녀의 손을 맞잡아 쥐었다. 이야기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세피로스는 턱을 괴고 앉아 어두운 록산의 밤바다를 바라보았다.
“뭐, 그런 연유로 처리할 일들이 많아 당분간 여기서 지내야 할 것 같은데…… 미안하지만, 자리가 잡히기 전까지만 신세 좀 지겠다.”
“라케드 장로는?”
“나만 왔어. 리비엘로를 대신전에서 빼내는 게 급해서.”
세피로스의 말에 케이드가 혀를 쯧 찼다.
“마음대로 해. 우리 집에 방은 많으니까.”
“너무 그렇게 날 세우지 마. 뭣하면 내가 미레아 녀석의 대부가 되어 줄게.”
“그거 참 든든하네.”
다소 빈정거림을 섞어 대꾸한 케이드는 자리를 정리하며 말했다.
“애들에게 인사는 내일 아침에 하라고. 지금은 자고 있으니까.”
그러는 사이 레인이 리비엘로를 챙겨 주었다.
“자, 신녀님도 밤이 늦었으니 간단하게 씻고 자러 가야지요? 지금은 파울로의 방이 비어 있으니 그곳을 쓰면 될 것 같아요. 거처가 정해질 때까지는 여기서 지내도록 해요.”
리비엘로는 주변 사람들을 감싸고 있는 공기가 아직 무거운 것을 느끼고는 아까 전의 담담하던 태도와는 달리 그 나이 대의 어린아이 같은 얼굴로 울상 지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레인이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정말로요.”
말은 그렇게 했어도 그것이 원망스러울 수도 있었다. 제멋대로 정해진 미래에 대해 불만을 가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레인은 비록 지금은 사제가 아니라 해도 여전히 서리 여신의 종이었고, 여신이 지시한 길을 따르는 것에 거부감은 없었다.
여신이 정해 준 인생을 살았다 해도 레인은 케이드와 함께한 이 생애엔 후회가 없었다. 그녀가 죽는 순간까지도 말이다. 그녀는 케이드를 선택함으로써 사제였다면 불가능했을 행복을 맛볼 수 있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러한 과거를 짧게 회상한 레인은 자신의 주변을 둘러쌓은 아수라장 한복판에서 정신을 다잡기 위해 노력했다. 마수들이 떼로 몰려와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그 순간에도, 레인은 자신의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서리 여신을 믿었다. 마수의 눈앞에서도 그렇게 믿었다. 자신에게 역할을 내린 그녀가 자신과 가족들을 이대로 버릴 리 없었다.
휴레오가 죽는다 해도, 미레아의 앞날에 어떤 고난이 닥친다 해도. 이것으로 끝낼 서리 여신이 아니었다. 적어도 직접 여신의 속삭임을 들은 레인은 확신할 수 있었다. 마지막의 마지막에는 웃을 수 있을 것이라 말이다.
그러니 나머지는 이제…… 서리 여신의 안배에 달렸다. 레인은 부디 자신의 기도 소리가 서리 여신에게 닿길 바랐다. 비록 짧은 생이었다 해도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렇지, 케이드?
레인은 자신의 마지막 숨을 내쉴 때 눈앞에 없는 이에게 그렇게 물었다.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알 수 있었다.
당신과 함께한 삶은, 인생은, 만남은, 걸어온 길은…… 만들어졌다 할지라도 무의미한 것이 아니었어.
다섯 번째 외전. 그대의 이야기가 먼 미래까지 닿을 수 있기를
서리 여신이시여. 당신께서 제 아이들의 영혼을 구제해 주실 것이라 믿습니다.
레인의 마지막 기도 소리를 들은 서리 여신이라 불리는 이 세계의 조율자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약간의 편법을 썼다. 본래, 서리 여신의 흐름 아래 있는 이 세계에서 죽음 이후의 것은 영소의 강에서 서로의 영소가 뒤섞여 다른 생명으로 탄생하는 것이기에 환생이란 개념은 없었으나…….
― 내가 누나를 도와주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야.
그런 말만 전달하고 다시 잠들어 있던 소년은 눈을 비비며 자신을 깨운 자를 바라보았다.
〔자…… 보자. 이제 시간이 되었군. 준비는 되었느냐? 혹시 못다 한 일이 있다면 내게 말해 보아라.〕
보비네의 말에 맑은 자색 눈동자를 가진 밤갈색 머리의 소년이 두 눈을 깜박이다 기지개를 켰다. 그는 잠시 상황을 파악한 뒤 다시 보비네를 바라보았다.
“결국 조율자가 죽었군요.”
〔나를 위해 희생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어요. 그러니 저를 이렇게 남겨 두었지요.”
본래 환생이란 것이 없던 세계. 그것은 조율자였던 서리 여신이란 존재는 만들어진 신이었기에 택해야 했던 세계였다.
불완전한 신은 원신이 그랬던 것처럼 영소의 강을 완벽하게 조율할 수 없었다. 보비네가 없어진 이후 오늘날까지 이 세계의 영소는 서로 뒤섞이며 흘렀으며 다시 세상으로 나갈 때는 온 세상으로 눈송이처럼 퍼져서 내려앉았다. 그렇게 퍼진 영소는 모여서 새로운 생명의 그릇에 들어가 새로운 영혼을 만들어 내었다. 그것이 서리 여신이 관리하던 영소의 흐름이었다.
하지만 원신인 보비네는 달랐다. 개개인의 영소를 서로 분리하여 관리할 수 있었고 그가 원하는 대로 이 세계의 법칙을 마음대로 재수정 할 수 있었다. 그러니 보비네가 돌아오면서 서리 여신의 세계에는 없던 환생이란 개념이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원래 보비네의 세계는 탄생과 죽음이 하나로 이어지는 세계였기 때문이다.
“제 엄마랑 아빠는요?”
〔너와 함께 남겨 둔 그 둘의 영소는 다소 타격을 심하게 입어서 완전하게 복구하지는 못했지만 최대한 원형에 가깝게 만들어 돌려보냈다. 세계로 내려가게 된다면 인연이 닿게 될 것이다.〕
“그건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요.”
소년이 방긋 웃었다.
〔그러니 이제 네 차례란다, 휴레오 제인스터.〕
보비네는 서리 여신이 남기고 간 휴레오의 영혼을 내려다보았다. 서리 여신은 레인이 마지막 순간 올린 기도를 잊지 않았다. 이것으로 끝내지 말아 달라는 그 부탁을 말이다. 자신이 제멋대로 그들의 역사를 써 내렸으니 그에 대한 보상은 충분히 해야 했다.
그것이 이것이었다. 자신이 제멋대로 내린 신탁으로 인해 지금까지 죽은 자들의 영소를 흩어지지 않도록 긁어모은 다음에 영소의 강에 흘려보내지 않고 한 객체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해 주는 것. 그리하여 제멋대로 끝내 버린 그들의 삶이 앞으로도 이어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그것에는 휴레오는 물론 레인과 케이드, 마라피네스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라우노와 세피로스의 계략에 휘말려 죽음을 맞이한 시오와 리비엘로의 영혼까지. 하지만 서리 여신은 그들을 환생시키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영소를 보관만 했을 뿐 이후의 일은 원신인 보비네에게 맡겼다. 그리고 보비네는 흔쾌히 일을 물려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