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254화 (254/257)

외전 33화.

그 말에 케이드가 방긋 웃었다. 레인이 사제들의 방식으로 인사를 하자 케이드 역시 그녀를 따라 했다. 저쪽에서 발록이 대원들을 불러 모았다. 텔라인 부대는 이제 정말로 떠날 시간이었다.

“가 볼게요.”

케이드는 레인에게서 미련 없이 등을 돌려 발록이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간다고? 이대로?

레인은 케이드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지금이라도 달려가서 그를 붙잡고 싶다는 강한 바람이 일었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이대로 그와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더 함께 있고 싶었다. 레인은 그제야 서리 여신의 속삭임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대에게 반려가 될 사람을 보내겠다.’

반려를 만나게 된다면 확신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 말했다. 그렇다면 이 감정이 어찌 확신이 아니라 부정할 수 있겠는가.

레인은 지금까지 사랑이란 감정을 몰랐다. 사랑이란 것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 사람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 성질인지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했었다. 때문에 알아차리는 것이 늦었다. 그렇지만 늦었다 해도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이다.

비록 속삭임은 반려를 내리겠다는 내용만 있었다 해도 레인은 확신했다. 케이드가 일부는 데르카이드라 해도 그는 평범한 인간 쪽에 더 가까웠다. 서리 여신이 그의 운명에도 개입할 여지가 충분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더 늦기 전에 서리 여신이 내린 자신의 반려를 붙잡아야 했다.

그 뒤의 일은 모른다. 하지만 속삭임이 이유 없이 내려진 것이 아니라면 반려와 함께하는 것 정도는 여신께서 허락하지 않으실까.

이게…… 서리 여신께서 원하시는 내 운명이 아닐까.

“케이드 씨…….”

레인은 자신 없는 목소리로 점점 멀어져 가는 케이드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그 작은 목소리가 그에게 닿을 리 없었다. 레인은 그가 있는 방향을 향해 조금씩 걷기 시작했다.

“케이드…… 케이드 씨!”

이번에는 조금 더 용기를 내어 목소리를 내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부족했다. 레인의 걷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더니 나중에는 달리기 시작했다. 케이드는 비공정에 올라타기 위해 발 하나를 그 입구에 걸치고 있었다. 레인은 숨이 차올랐으나 그 와중에도 숨을 모아 그의 이름을 불렀다.

“케이드 제인스터!”

큰 목소리를 내자 그제야 케이드가 멈칫하더니 레인을 돌아보았다. 그는 자신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레인을 보고 놀란 것처럼 보였다. 케이드가 비공정에 걸친 발을 완전히 내리고 레인이 오고 있는 쪽으로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레인의 가슴이 바쁘게 오르락내리락하였다.

“레인 신녀님?”

“저…… 저! 당신에게 할 말이 있어요!”

숨을 헉헉 몰아 내쉬면서 레인이 다급하게 말했다.

“그렇게 급한 말이 아니면 천천히 말해 보세요.”

“아니요! 급해요!”

레인은 다짜고짜 그의 어깨를 꽉 잡더니 말했다.

“당신을 좋아해요!”

그 말에 케이드는 두 눈을 깜박이더니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라고 확신하는 얼굴로 되물었다.

“……네?”

처음에는 잔뜩 흥분하여 반쯤 오기로 말했으나 숨을 가다듬어 조금 침착해진 머리로 한 번 더 되풀이하자니 부끄러움이 확 몰려왔다. 하지만 인제 와서 자신이 한 말을 무효로 돌릴 수는 없었다.

“저는, 그러니까…….”

레인이 입에서 말을 고르다 두 눈을 질끈 감고 말을 내뱉었다.

“다, 당신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아니, 같아요가 아니고 좋아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에요. 확실해요! 저는 당신이 좋아요!”

“네?”

레인은 자신이 엄청난 용기를 내어 한 고백에 대고 멍청하게 ‘네?’만 되풀이하는 케이드를 때려 주고 싶었다.

“저는 당신을 좋아하는데 케이드 씨는 어떤 감정인지 궁금해요. 대답해 주세요.”

하지만 케이드는 눈을 느리게 깜박이며 물었다.

“제가…… 대답을 해야 하나요?”

“네?”

이번에는 레인이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제가 어떤 대답을 내놓든…… 우리의 관계가 여기서 바뀔 수 있나요?”

“그게 무슨 뜻이에요?”

레인은 케이드에게 한 발 더 다가가 따지듯 물었다.

“제가 당신을 좋아하든 아니든 케이드 씨의 감정은 우리 사이에 의미가 없다는 뜻인가요?”

“그렇지 않나요?”

“어째서요?”

“레인 신녀님께서는 여신의 종인 몸이시고…… 저는 그저 바람 따라다니는 용병인 데다 데르카이드인데…….”

요컨대 레인이 다른 사람을 마음에 품는다고 해도 그녀의 신분은 여신을 모시는 사제. 결혼은 고사하고 남녀 간의 교제 자체가 허락되지 않는 몸이었다. 레인이 사제인 이상 케이드와의 관계는 이 이상 나아갈 수 없었다. 케이드는 그 점을 지적하고 있었다.

하지만 레인은 케이드가 그렇게 말하니 억울해졌고 저도 모르게 울컥하여 케이드의 멱살을 잡아 버렸다.

“그럼 여지를 주지 말았어야지!”

레인의 말에 케이드가 두 눈을 끔벅거리며 물었다.

“제 행동이 여지를 준 것인가요?”

그 말뜻은 잘못 이해하면 너 혼자 착각하고 도끼를 찍고 있었던 것이 아니냐 하는 것으로 들릴 수 있었기 때문에 레인이 얼굴을 일그러트렸고 케이드가 아차 싶어 얼른 손을 내저었다.

“아뇨! 그러니까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고……!”

케이드는 섣불리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몇 번 벙긋거리다 목 뒤를 손으로 쓸었다. 그리고 변명하듯 웅얼거리며 말을 하기 시작했다.

“여지를 주려고 한 것이 아니고, 그저 당신이 자꾸 눈에 들어오니까 그것이 신경이 쓰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고,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었고…… 그랬던 것뿐인데. 정말로 그것이 전부였을 뿐인데…….”

말을 어물거리며 이어 가던 케이드가 아랫입술을 꾹 깨물더니 명확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맞아요. 저 신녀님 좋아해요.”

그 말에 레인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녀는 입을 조금 벌리고 이상한 신음을 내었다. 멱살을 잡고 있던 손에서 힘이 스르륵 풀렸다. 레인의 반응에 덩달아 목까지 붉어진 케이드는 하던 말을 마저 이었다.

“하지만 여지를 주려고 한 것은 아니에요. 처음부터 신녀님께 다른 것을 기대하지는 않았어요. 그냥 제 욕심이었고 제멋대로 행동한 것이었으니…… 그래서 여지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고, 신녀님께서도 여지라고 생각하실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거기까지 말하던 케이드는 돌연 억울하단 얼굴로 레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애초에 신녀님은 저 싫어하시잖아요?!”

“허어?”

레인은 미간을 찡그리고 케이드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케이드가 좋다는 표현 같은 건 한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오히려 질색팔색을 하거나 한심하게 보거나 얄미워한다거나 하는 감정이 우선이었으니 말이다. 레인이 케이드의 말을 이해한 것으로 보이자 그는 변명을 이어 갔다.

“무슨 짓을 해도 저를 싫어하시길래 신녀님이 제게 그럴 거라는 생각은 정말 요만큼도 할 수 없었단 말입니다! 나름 그런 확신이 있었으니까 그렇게 제 마음대로 굴 수 있었던 것이고…… 무슨 짓을 해도 싫어하실 텐데 그럼 조금쯤은 제멋대로 해도 괜찮지 않나요?”

케이드는 제법 억울하단 얼굴이었기 때문에 레인은 어이가 없었다.

“당신의 머릿속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없었나요?”

“…….”

케이드가 입을 꾹 다물자 레인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케이드는 차마 그녀와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눈을 내리깔았다.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가 있을까. 무언가를 할 때마다 바로 반응하면서도 마음 한쪽은 물러서 슬그머니 모른 체를 해 주는데.

“이렇게 제멋대로 구는 점 때문에 제게 미움받는 거란 자각쯤은 있으신 건가요?”

케이드는 애처럼 입을 삐죽이며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어차피 상관없잖아요. 우리 사이에 이 이상의 무언가가 생길 수는 없는데.”

딱 이 정도의 관계. 서로 어울려 다니기도 하고 밉살맞게 굴기도 하고 잠깐씩 본심을 내비치기도 하지만 금세 털어 버리고 곧 남남이 될 관계.

“……왜 저를 벌써 포기하려고 하세요?”

케이드가 레인을 바라보았다.

“남자답게 적어도 한 번쯤은 시도해 봐도 되잖아요?”

“무얼요?”

레인은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사제의 지위를 버리고 저와 함께해 주실 수는 없나요? 이런 질문.”

케이드의 눈이 커졌다. 레인은 쑥스러운지 볼을 긁적이며 너스레를 떨었다.

“묻는 건 공짜잖아요.”

“하지만 거절당하면 저도…… 상처받는데요.”

“그 정도 용기도 없이 저를 쟁취할 생각이었어요?”

“딱히 쟁취랄 것도 없고…….”

“겨우 그런 거로 상처받는 남자라면 저도 다시 생각해 봐야겠네요.”

“하지만 레인 신녀님. 우리는 만난 지 보름도 되지 않았고…….”

케이드는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말을 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나머지 인생을 전부 맡기는 건 경솔할 수 있어요.”

“하지만 당신은 목숨 걸고 저를 구해 주셨잖아요. 제 남은 인생을 전부요.”

“그렇다 해도…….”

“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이리저리 말을 뱅뱅 돌리시는 거예요?”

조금은 화가 난 레인이 케이드를 째려보자 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제 인생사는 말이지요…… 조금 사정이 복잡해요. 그래서 그 짐을 다른 사람과 나눈다는 것이 정말 괜찮은지 확신도 서지 않고…….”

“상관없어요.”

레인이 깊게 생각하지도 않고 바로 대답을 내놓자 케이드가 난처하게 웃었다.

“대답이 너무 경솔한 거 아닌가요?”

“아니요. 정말로 상관없어요. 당신은 제 반려가 될 사람이니까요. 그러니 상관없어요.”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 급진적인 표현 아닌가요? 벌써부터 반려라니.”

케이드는 그렇게 말했지만 레인에게는 서리 여신께서 정해 주신 반려다. 그렇다면 그게 무엇이 되었든 뭐가 문제란 말인가.

“당신이 누구든, 가진 사정이 무엇이든, 저는 당신이라면 사제가 되는 것을 포기하겠어요.”

아이러니하게도 레인은 사제였기 때문에 여신의 신탁이 내려진 이상 사제의 신분을 포기할 수 있었다. 아니, 포기해야 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앞으로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그것만큼은 확신해요. 제 모든 것을 걸고서라도 약속드릴 수 있어요.”

레인이 환히 웃으면서 확신에 가득 차 이야기하자 케이드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말을 들어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면…….”

케이드가 떨리는 눈으로 레인을 바라보았다.

“레인 마리어드, 저와 함께해 주시겠어요?”

레인은 양팔을 케이드의 목에 두르며 대답했다.

“네, 좋아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