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253화 (253/257)

외전 32화.

낮게 들어오는 햇빛이 눈이 부셔 눈가를 비비던 케이드가 레인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아직 기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데르카이드에게 성가를 불러 주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당신이 빨리 나으셨으면 좋겠다는 기도를 올린 건데요.”

“저는 데르카이드이고 당신은 신녀잖아요. 저는 서리 여신의 발아래 있지 않은 자, 당신은 서리 여신의 종. 제가 싫지는 않아요?”

그 말에 레인은 조금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생각보다 별다른 감흥은 없네요. 그리고 서리 여신께서는 자신의 종을 구해 준 사람이라면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할 거예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서리 여신께서는 마음이 넓으시니까요. 언제나 인간들이 문제지.”

“전부터 느끼는 건데 케이드 씨께서는 서리교의 신도도 아닌데 굉장히 잘 아시는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신도가 아니라 해도 잘 알아요.”

케이드가 지나가는 것처럼 말을 흘렸기 때문에 레인은 제대로 듣지 못하고 다음 화제로 넘어갔다.

“마지막 날 임무가 실패했어도 다른 임무들은 전부 무사히 진행되어 이번 1차 토벌전은 이것으로 끝이라고 하네요. 먼저 확보한 구역들이 작은 범위는 아니라 앞으로 있을 토벌전에 지장이 있는 정도는 아니라고 해요.”

“그건 다행이군요.”

“사제들은 내일 신전으로 돌려보내 주시겠다 그랬어요. 오늘은 일단 주변 정리를 하고 마지막으로 신성력 결계를 보강하는 작업도 하고요…….”

“그런가요.”

그리 대답하며 케이드가 힘겹게 상체를 일으켰다. 레인이 옆에서 그를 부축해야 할지 아니면 다시 눕혀야 할지 고민을 하는 사이 케이드는 벌써 벽에 몸을 기대어 두 발로 일어났다.

환자복으로 환복한 탓에 자신이 원래 입던 옷과 신발은 그의 숙소에나 있을 것이었지만 그는 괘념치 않고 얇은 상하의를 입은 채 맨발로 휘적이며 걸었다. 조금 비틀거리기는 했으나 자신의 몸 상태가 걷는 데는 지장이 없는 것을 확인한 케이드는 레인에게 따라 일어나라며 고개를 까닥였다.

“더 쉬어야 해요.”

레인이 담요를 들고 일어났지만 케이드는 그녀의 말을 고분고분 들을 사람이 아니었다. 대신 레인이 담요를 둘러 주는 것을 얌전히 기다리며 물었다.

“지금까지 토벌하기 바빠 롤랑드 평원을 제대로 볼 기회가 없었지요?”

“네? 뭐, 그랬죠.”

레인이 대충 대답하는 것을 케이드가 그녀의 손을 잡더니 앞장서서 걸었다.

“저기요, 케이드 씨.”

“잘되었네요. 마침 시간도 지금이 딱 좋아요.”

“감기 걸린다니까요.”

하지만 케이드는 영문을 모르는 레인을 데리고 비공정의 복도를 지나 원형 계단을 올랐다. 레인의 숨이 차오르기 전에 케이드가 멈춰선 곳은 단단히 밀폐된 철문 앞이었다. 그것의 손잡이를 돌리자 금속끼리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강한 바람이 그들을 덮쳤다.

레인이 저도 모르게 뒤로 주춤거리자 케이드가 그녀를 팔로 감싸 단단히 잡아 주었다.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자 드넓은 하늘이 둘을 맞이했다.

케이드가 레인을 데리고 나온 비공정의 야외 테라스는 바람이 강하긴 했지만 그래도 위험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레인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이렇게 높은 곳에서 별다른 안전장치 없이 있는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손목을 끌고 나가는 케이드의 소맷자락에 필사적으로 매달리며 다리에 힘을 주어 버텼다.

케이드는 그 모습에 하하거리면서 웃다가 레인에게 한 대 얻어맞았다.

“싫어요! 무서워요!”

“아하하, 제가 있는데 뭐가 걱정이에요.”

“날개를 꺼내기만 해도 마력 고갈이 일어난다면서요!”

그러면서 레인이 자신의 옆에 찰싹 달라붙자 케이드가 더 경쾌하게 웃었다. 레인을 테라스의 정중앙까지 끌고 온 케이드가 그녀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자, 봐 봐요.”

하지만 레인은 눈을 질끈 감고 도리질을 했다.

“정말 무서울 거 하나도 없다니까요?”

그래도 요지부동인 레인의 태도에 케이드는 남은 손으로 레인의 옆구리를 간지럼 태웠다. 덕분에 레인은 몸을 뒤틀며 눈을 번쩍 뜰 수밖에 없었다.

“꺄하하! 뭐 하는 짓이에요!”

“그러니까, 보라니까요.”

케이드가 턱짓을 한 쪽을 바라보니 오색 빛깔로 아름답게 물든 광활한 하늘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어머나…….”

레인이 저도 모르게 입가에 손을 올리고 감탄했다. 수채화 물감들이 도화지 위에서 서로 얽히며 번지듯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위에는 저녁노을이 아름다운 색채를 자아내었다. 해가 떨어지는 지평선 반대 방향은 이미 어두운 쪽빛으로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는데 작게 빛나는 다이아몬드를 잔뜩 뿌려 놓은 것같이 수많은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레인의 반응에 케이드가 의기양양한 태도로 으스대었다.

“제가 그랬죠? 롤랑드 평원의 밤하늘은 정말 장관이라고.”

레인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자 케이드가 작게 웃었다. 그리고 벽에 등을 기대어 앉고는 옆자리를 손으로 톡톡 두드렸다. 레인이 조심스럽게 다가가 앉으려 하는데 케이드가 잠시 그녀를 기다리게 하더니 레인이 둘러 주었던 담요를 넓게 펼쳐 깔아 주었다. 레인은 그것을 얼른 마다하며 담요를 다시 케이드에게 둘러 주려 그랬다. 그러나 케이드는 억지로 레인을 담요 위에 앉혔다.

“당신 너무 얇게 입고 나와서 안 돼요.”

“이제 여름인데요, 뭐. 이 정도로 어떻게 되지 않아요. 저 튼튼하다고요.”

레인은 여전히 머뭇거리는 기색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케이드의 옆에 얌전히 앉았다.

“조금만 더 기다려 봐요. 해가 완전히 지면 그것대로 더 멋지니까.”

그 말에 레인은 케이드의 옆에 나란히 앉아 지평선 너머로 해가 완전히 넘어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평소에는 잘만 떠들더니 뜻밖에도 케이드는 별말이 없었다. 레인은 먼저 나서서 대화 물꼬를 트는 편이 아닌 데다 딱히 이렇다 할 대화 주제를 찾지도 못한 탓에 함께 정적을 지켰다. 그러다 보니 어색한 기분만 밀려 들어왔다. 차라리 상대방이 무슨 말이라도 해 주었으면 하는 기분이 들어 입술을 조금 내밀며 옆자리에 앉은 케이드를 훔쳐보았다.

힐끔 시선을 돌리자 붉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는 케이드의 옆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해가 져서 그늘진 그의 얼굴선은 제법 수려했다. 왜 지금까지 몰랐나 싶을 정도였다. 살짝 나른하게 빠진 눈꼬리가 어쩐지 나이답지 않게 권태로워 보였다. 원래라면 선명한 자색인 눈동자는 달빛을 받으니 지금은 남색처럼 보였다.

케이드의 얼굴을 훔쳐보던 레인은 저도 모르게 부끄러워져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저런 타입은 여자들에게도 인기가 많겠지. 새삼스럽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레인은 어릴 때부터 주변의 남자들이라고는 같은 사제 아니면 신도들이 전부였기 때문에 평범한 사람들은 이럴 때 어떤 대화를 주고받는지 잘 알지 못했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하늘은 어느덧 완연한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그렇지만 무거운 암흑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까보다 더 많은 별이 나왔고 가장 밝은 빛을 발하는 보름달 덕분에 밤하늘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도 화려했다. 레인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고 한참을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제야 케이드가 입을 열었다.

“멋지지요?”

“네…… 롤랑드 평원이 왜 유명한지 알 것 같아요.”

“원래는 끝없이 펼쳐진 푸른 초원과 함께 봐야 하는데…… 오염이 진행된 땅이다 보니 흙밖에 없어서 그건 아쉽네요. 다음에 또 기회가 된다면 그때는 꼭 다시 와서 보시길 바라요.”

레인은 그게 과연 언제일지는 모르겠으나 정말로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때도 이런 식으로 케이드와…….

저도 모르게 제멋대로 그런 생각이 들자 그녀는 생각을 더 잇지 못하도록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그때,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여름이라 그래도 밤의 평원은 제법 쌀쌀했기 때문에 레인은 슬슬 오한이 들기 시작했다. 자신은 담요를 깔고 앉았는데도 추운데 얇은 옷만 걸치고 맨바닥에 앉은 케이드는 춥지 않은지 걱정이 되었다.

“케이드 씨, 그만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날이 춥네요.”

그 말에 케이드가 레인을 돌아보았다가 눈꼬리를 늘어트리며 말했다.

“그럼 5분만 더요. 눈에 더 담고 싶어서 그래요.”

“그래도…….”

“한 번만 봐주세요. 어차피 내일이면 헤어지잖아요.”

그 말에 레인의 가슴 한구석에서 무언가가 철렁이며 내려앉았다. 대신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딱 5분 만이에요.”

케이드가 턱을 괴고 눈에 하늘을 담았다. 레인은 케이드처럼 하늘을 바라보고는 있는 동안 옆에서 미미하게 느껴지는 온기가 왜 그리 신경이 쓰이는 건지, 그리고 5분이 왜 이리 짧게만 느껴지는 건지 알 수 없었다.

* * *

다음날, 토벌단은 셀렘의 서리교 신전에 사제들을 데려다주었다. 사제들은 일주일 사이에 서로 친해진 대원들과 소소하게 작별 인사를 나누며 자신의 보금자리로 돌아갔다.

레인 역시 3팀이었던 사람들과 서운함이 섞인 인사를 나누고 있는데 저쪽에서 빈둥거리고 있는 케이드가 눈에 들어왔다. 케이드가 어딘가로 가 버리기 전에 그와도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 레인은 그의 뒤로 살금살금 다가가 놀래 주려 그랬다. 그가 지금까지 얄밉게 군 대가라고 생각했다.

“어흥!”

“꺄악!”

그러나 케이드가 먼저 돌아보며 얼굴을 들이밀자 놀란 것은 오히려 레인 쪽이었다. 레인이 분해서 이를 갈고 있는 것을 보고 깔깔거리며 케이드가 우쭐거렸다.

“기척이 고대로 다 들리는데 저를 뭐라고 생각하세요?”

“으으…….”

레인이 인상을 팍 쓰자 케이드가 손을 내밀었다.

“잘 지내세요.”

작별 인사를 하려고 불러 세운 것이긴 한데 막상 정말 인사를 나누려고 하니 서운함이 밀려왔다. 서운함이라는 감정이 든다는 것이 뜻밖이었다. 같이 있는 내내 징글맞은 화상이었는데 그래도 마지막에는 정이 조금이라도 드는 게 사람 관계인가 보다.

레인은 케이드가 내민 손을 맞잡았다. 그의 손은 레인의 손보다 훨씬 컸으며 뜨거웠다.

“케이드 씨께도 여신의 은총이 내내 함께하길 기도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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