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251화 (251/257)

외전 30화.

레인은 결국 으어엉 하며 펑펑 울어 버렸다. 케이드는 별다른 동요 없이 레인의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그래도 처음 하는 일인데 이 정도면 너무 훌륭해요. 잘했어요. 오늘 너무 수고 많았고 푹 쉬세요.”

그 다정한 태도에 레인은 점점 진정되었다. 그리고 새삼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 주는 케이드가 고마웠다.

그런데…… 고마운데…… 고맙기는 한데……?

생각해 보니 모양새가 웃겼다. 지금 자신이 여기 와 있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 이게 다 규율을 어긴 대가로 억지로 차출당한 탓 아니던가. 그리고 그 규율을 어기게 만든 장본인은? 눈앞에 있는 케이드 제인스터다. 그런데 뭐가 잘났다고 저를 위로하고 자빠졌는가!

“위로 고마워요…….”

레인이 코맹맹이 소리를 내며 하는 감사 인사에 케이드가 으쓱였다.

“딱히 위로는 아니었어요.”

“그리고 부탁이 하나 있는데요.”

“네, 말해 봐요.”

레인이 물기라고는 없는 눈으로 케이드와 시선을 맞추며 물었다.

“뺨 한 대만 때려도 돼요?”

“네?”

하지만 레인은 케이드가 승낙의 말을 꺼내기도 전에 손을 올렸고, 그녀의 손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내었으며, 뒤이어 살끼리 합을 맞추는 경쾌한 소리가 울렸다.

뻑!

엉겁결에 기습 아닌 기습을 당한 케이드가 상황 파악을 하기 위해 애를 쓰다 레인이 오른손 주먹을 반대편 손으로 쓰다듬고 있는 것을 보고 뜨악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주먹으로 때렸어!”

사람 얼굴을 주먹으로 때리는 것이 생각보다 아팠으나 레인은 다소 상쾌한 얼굴로 항변했다.

“주먹으로 때렸다 해도 제가 때려 봤자 얼마나 아프겠어요? 그보다 더한 것도 겪으시는 분이.”

케이드가 벙 찐 얼굴로 레인을 바라보자 그녀는 어깨를 으쓱였다.

“이쯤은 해 둬야 억울하지 않지. 내가 누구 때문에 여기서 이러고 있는데.”

서리 여신이시여. 전에 말씀드렸던 것은 철회하겠습니다. 설령 이치를 때릴 가치가 없다고 해도 이러니 제 기분은 좀 풀리네요.

“저와 함께 죽는 길을 선택한 건 신녀님입니다?”

하지만 레인은 귀를 후비적거리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쪽은 고작 매질 한번 당한 것 가지고 생색은.”

그렇게 말하니 할 말이 없었다. 매질은 분명 아프기는 하였으나 케이드는 튼튼했기 때문에 하루 정도 후유증을 좀 겪고 말았을 뿐 너무나도 멀쩡했기 때문이었다. 레인이 받은 벌에 비교하면 결코 공평하다고 할 수 없었다.

“내일도 이런 식일까요?”

레인의 물음에 케이드가 아직도 얼얼한 볼을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을 거예요.”

레인이 한숨을 내쉬었지만 케이드는 가벼운 어투로 말했다.

“오늘도 그랬지만 신녀님께서는 위험한 일은 없을 겁니다.”

“저만 멀쩡했죠! 저만!”

“그럼 되었지 않나요?”

“안 되었거든요?”

“하지만 우리의 역할이 그건데요. 신녀님의 안위를 지크 녀석이 목숨 걸고 지키는 게 당연한 거라고요.”

물론 머리로는 이해하였으나 레인은 자기 때문에 누군가가 죽어 나가는 것은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생각이 그녀의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 케이드가 윙크하며 반쯤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일은 제가 더 애를 써서 마수들을 후방으로는 한 마리도 보내지 않을게요.”

“케이드 씨 혼자 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닐 것 같은데요.”

“저만 믿어요.”

케이드가 자신만만하게 말했어도 레인은 그의 말을 믿는 둥 마는 둥 했다. 하지만 케이드 덕분에 진정이 많이 되었기 때문에 아까보다는 한결 가벼운 마음이 되었다.

“좀 괜찮아지셨으면 숙소까지 모셔다드릴까요?”

케이드의 제안에 뜻밖에도 레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부상자들이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떼지 않고 말했다.

“저는 저들을 위해 기도를 올리다 갈게요.”

그런 레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케이드가 조금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그래요. 당신의 목소리라면 그녀에게도 닿을 거예요.”

레인은 케이드에게 고개를 까닥이고는 종종걸음으로 의무실 쪽으로 향했다. 케이드는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레인 신녀는 괜찮을 거예요. 그렇지요, 설?”

* * *

마수와 전투.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 마수의 기습. 그런 상황을 뚫고 신성력 결계를 만들어 내는 급박한 임무. 이러한 것들이 뒤섞인 정신없는 하루하루를 어찌어찌 헤쳐 나가다 보니 어느새 임무의 마지막 날인 7일째 아침이 되었다.

그 짧은 일주일 동안 레인은 눈에 띄게 수척해져 있었지만 첫날과는 다른 기백이 서려 있었다. 임무에 익숙해졌다기보단 마음가짐이 처음과는 다소 달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저 싫은 일에 끌려 나온 것으로 시작했지만 목숨 걸고 싸우는 사람들을 보며 깨달은 바가 있었다. 자신을 이곳에 보내면서 이 또한 서리 여신의 안배라고 한 것이 이런 뜻이었을까. 그 짧은 시간 동안 레인은 성장했다.

그러나 마지막 날이라 해도 긴장을 늦출 수는 없었다. 자신이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어야 다른 동료들의 부담이 줄어들기 때문에 오늘도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임무를 시작했다.

“신녀님, 그쪽에서 비……!”

지크가 마수가 그쪽으로 향하니 레인은 물러나 있으라고 지시하려 그랬는데 레인은 오히려 그것을 정면으로 맞서며 외쳤다.

“그분의 빛살이 내리리!”

신성력이 레인의 주변으로 퍼지자 레인을 향해 덤벼들던 마수가 훌쩍 뛰며 물러났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지크가 마수를 베어 내었다.

“신녀님, 제 일을 줄여 주셔서 감사하기는 한데 너무 무리하지는 마세요.”

지크의 말에 레인이 싱긋 웃으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결계의 완성을 마치기 위해 원래 하고 있던 일로 돌아갔다. 자신의 등 뒤를 지크와 다른 동료들에게 맡기고 남은 시간 동안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는데 저 멀리서 커다란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더니 비공정에서 연달아 포격이 이루어졌다.

“뭐야? 무슨 일이야?”

다급한 지크의 무선에 누군가가 응답했다.

― 당장 거기서 물러나! 동쪽 방어선이 뚫려서 그쪽 범위까지 공중 포격 할 거니까!

지크와 다른 팀원들이 바로 레인을 불러들였다.

“레인 신녀님!”

레인이 고개를 들자 지크가 상황을 전했다.

“방어선이 돌파당했어요! 이쪽으로 마수들이 오고 있다고 합니다!”

“잠시만요, 조금만 더 하면……!”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에요! 이럴 틈이 없다고요!”

결계에 미련을 떨치지 못한 레인을 팀원들이 억지로 잡아끌어 오토바이의 사이드카에 앉혔다. 운전석에 앉은 루나에게 지크가 신신당부했다.

“루나, 우리가 여기서 시간을 버는 사이 신녀님을 안전한 곳까지 이동시켜!”

“지크 씨!”

그 말에 망설임 없이 바이크의 속도를 올린 루나의 옷자락을 잡으며 레인은 그녀와 뒤를 번갈아 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지크 씨와 다른 팀원들은요?”

“그건 신녀님께서 신경 쓰실 부분이 아니에요! 지금은 이 구역에서 이탈해야 합니다.”

“하지만!”

“전방에 있던 사람들이 후방으로 후퇴하며 전력이 보충될 것입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렇게 말하는 루나의 얼굴에도 초조함이 깃들어 있었다. 다시금 쾅쾅하며 폭격이 쏟아져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있던 곳이 불타고 있었다. 비록 최전방에 있었던 사람들의 안위는 몰라도 후방 병력이 후퇴할 시간을 벌 수 있는 정도는 될 것이었다.

레인은 팀원들의 얼굴을 하나씩 떠올렸다. 그들을 무사히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리고…… 항상 최전방에 배치되는 케이드가 어떻게 되었는지 걱정되어 미칠 것 같았다.

루나가 바이크를 급정거한 것은 그때였다.

“이런!”

그들의 앞으로 무언가가 폭격을 맞아 쿵 하며 떨어졌다. 비행 타입의 마수였다. 그것은 비록 폭격으로 충격받기는 하였으나 핵이 파괴되지 않았기 때문에 신체가 재생되고 있었다.

루나는 얼른 핸들을 꺾어 반대 방향으로 달렸다. 하지만 마수는 루나와 레인을 발견하고는 그들을 쫓아 다시 날아올랐다. 바이크를 쫓는 그것의 속도가 워낙 빨랐기 때문에 폭격을 피해 이 안쪽까지 도망쳐올 수 있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마수가 바이크를 사냥하듯 몰아붙였다.

옆쪽에서 파고들어 오는 공격을 피하고자 루나가 핸들을 꺾었지만 원심력을 이기지 못하고 바이크가 뒤집혔다. 그 덕에 레인은 사이드카에서 튕겨 나와 거친 바닥을 굴렀다. 다행히 머리를 부딪치지는 않았는데 온몸이 떨려 올 정도로 고통이 밀려왔다.

레인은 자신의 몸을 추스르기도 전에 몸을 일으켰다.

“루나 씨!”

루나는 레인보다 더 큰 충격을 받았는지 머리에서 피가 흘리는 상태로 쓰러져 있었다. 의식이 없는 루나를 향해 마수가 다가가는 것을 보고 레인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앞뒤 생각할 시간도 없이 자신의 지팡이를 바닥에 쿵 찍었다.

“이 땅에 그분의 영광을!”

레인은 자신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신성력 결계를 펼쳤다. 자신의 앞쪽까지 결계가 밀려오자 마수가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하지만 저런 체급의 마수는 종종 신성력 결계 안쪽까지 들어올 힘이 있었기 때문에 레인은 긴장을 풀 수 없었다.

무너진 앞쪽 방어선을 방비하지 못했는지 마수가 더 몰려오는 것이 보였다. 레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도 저도 할 수 있는 방도도 없이 고립됐다. 지금은 결계 덕분에 마수들이 자신들에게 접근하지 못하였어도 레인의 체력은 한계가 있기 마련이었다.

거기에 결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성물이 있어야 했는데 그것은 아까 지크가 자신을 보낼 때 다급하게 이동하느라 그 자리에 두고 올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무기라고 할 만한 것은 성직자가 짚고 다니는 긴 지팡이가 전부였다. 레인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리고 결계가 약해지지 않게 지팡이에 모인 신성력을 유지하며 천천히 루나의 옆으로 이동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