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8화.
케이드는 레인이 간식을 다 먹은 것을 확인하고는 자리를 털며 일어났다.
“내일 아침에 일찍 출발해야 하니 오늘은 어서 짐을 챙긴 후 쉬는 게 좋을 거예요.”
케이드가 위험할 것은 없다고 설명을 해 주었다 해도 레인은 그저 피곤한 일에 휘말리는 것은 질색이었기 때문에 인상을 팍 쓸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마시고요. 그래도 나름 재미있을 거예요. 롤랑드 평원에 가 보신 적 있으세요? 거기 밤하늘이 정말 장관이거든요. 마수로부터 그 땅을 되찾으면 다시 그 하늘을 볼 수 있을 거예요. 기대되지 않아요?”
“롤랑드 평원이 어디인데요?”
레인의 말에 케이드가 의외라는 얼굴을 했다.
“아니, 롤랑드 평원을 몰라요? 그 유명한 데를?”
그 말에 레인이 얼굴을 붉혔다.
“저는 다른 곳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걸요.”
“잘 모른다고요?”
“사실은 셀렘 밖으로 나가 본 적이 없어서요.”
레인이 몸을 담고 있는 신전은 로아메나 대륙 북동쪽에 있는 나라인 유리겐의 수도, 셀렘에 자리 잡고 있었다. 레인은 어려서 부모를 잃고 그녀를 맡아 줄 이렇다 할 친척이 없어서 보육원에 갈 운명이었는데, 그럴 바에는 서리 여신을 모시는 신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어린 나이에 성직자가 된 것이었다.
그렇다 보니 성인이 될 때까지만 해도 셀렘 주변만 오갈 일이 있었을 뿐 여행 같은 것은 꿈도 꿀 수 없어서 우물 안 개구리 신세였다. 순례길을 가 본 경험도 없었다.
사실 여행이나 다른 곳에 대해 관심이 크지는 않았기 때문에 불편함이나 아쉬움을 느끼고 있지는 않았으나 케이드가 그 점을 지적하니 저도 모르게 그 사실이 부끄러웠다. 하지만 케이드는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듯 활짝 웃었다.
“그럼 더욱 잘됐네요. 첫 감상이란 제법 중요한 것이지요. 한 번밖에 없는 기회잖아요?”
그 말을 듣고 보니 레인은 롤랑드 평원이란 곳에 호기심이 저절로 일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레인의 반응에 케이드는 씩 웃어 주었다. 그리고는 이전처럼 더 치대지 않고 깔끔하게 물러났다.
“오늘 푹 쉬고 내일 봐요.”
레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케이드가 손을 흔들며 멀어졌다. 그는 가면서 무엇이 그리 아쉬운지 도중에 몇 번 그녀를 돌아보았으나 레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신의 숙소로 향하고 있어서 그것을 알지 못하였다.
* * *
레인은 토벌단을 태우고 가기 위해 도착한 비공정을 보고 저도 모르게 입을 작게 벌렸다. 그녀가 여태 본 비공정들보다 훨씬 큰 규모를 자랑하였으나 발록의 말에 따르면 이건 중형 규모라고 했다. 이것만 해도 어마어마해 보이는데 대형은 얼마나 더 커다랄지 레인으로서는 상상이 잘 가지 않았다.
“짐 드는 거 도와드릴까요?”
어느새 레인의 옆으로 다가온 케이드가 그녀의 산더미 같은 짐을 가리키며 물었다. 중요한 것은 어지간하면 지급되니 간단하게 꾸려도 괜찮다는 안내를 받았다 해도 혹시 모르니까 하는 마음으로 이것저것 챙겨 넣다 보니 짐이 불어난 것은 정말 순식간이었다.
그리고 레인은 여행 경험이 거의 없어 여행할 때 정말 중요한 짐과 필요 없는 짐을 구별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전부 다 필요할 것 같아서 넣었기 때문에 커다란 짐 가방을 홀로 끙끙거리면서 옮기고 있었다.
악의까지는 아니라 해도 케이드에게 품은 얄미운 감정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기 때문에 레인은 도도한 얼굴로 힘 하나 들지 않는다는 듯 보란 듯이 성큼성큼 걸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팔이 끊어질 것처럼 아팠고 다시 생각해 보니 얄미운 사람은 고생 좀 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이거 드세요.”
명령조로 말하며 턱짓으로 케이드를 부려 보니 나쁘지 않았다. 레인의 짐을 무거운 기색도 없이 양손에 든 케이드는 몸소 앞장서서 그녀가 배정받은 방까지 안내해 주었다.
레인이 묵을 곳은 생각보다 깔끔한 곳이었다. 케이드가 방 한쪽 구석에 짐들을 내려 주며 간단한 설명을 해 주었다.
“무슨 일이 있을 때 저 벨로 호출하면 사람이 올 거예요. 식사 시간은 정해져 있어서 때를 놓치면 굶을 수밖에 없으니까 잊지 않는 쪽이 좋을 겁니다.”
“네.”
“아마도 오늘 밤에 롤랑드 평원에 도착하면 내일 아침부터 작전에 투입되니 식사는 든든히 하시고 푹 쉬세요. 작전에 대한 브리핑은 식사 후에 있을 예정이에요.”
“네…….”
작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레인의 안색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그것을 눈치챈 케이드가 얼른 손을 내저었다.
“계속 똑같은 말을 반복하게 되는데, 그렇게까지 위험한 일은 없을 테니 너무 걱정 마세요. 위험하다면 저 같은 사람들이 위험하지요. 마수와 코앞에서 싸우는데.”
하지만 그 말 역시 레인을 안심시킬 만한 말은 아니었다.
“그 말은 케이드 씨에겐 위험한 일이 생길 수도 있는 것 아닌가요?”
뜻밖에 걱정 어린 말에 케이드가 두 눈을 끔벅이다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빙빙 꼬며 말했다.
“어…… 위험하다 해도 저는 괜찮을 거예요. 아마.”
“아마는 뭔가요? 역시 위험하단 소리잖아요.”
그 말에 케이드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다른 건 몰라도 이거 하나만은 장담할게요. 평범한 인간 중에서는 저를 상대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은 거의 없을 거예요. 그러니까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저는 어지간한 일에는 꿈쩍도 하지 않을 자신이 있답니다!”
그것이 단순한 허세인지 아니면 그저 농인지 알 수 없었으나 케이드의 얼굴은 제법 자신만만해 보였다.
“그러니 텔라인에서 저를 탐낼 만하죠.”
케이드는 기지개를 쭉 켜더니 레인에게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그럼 식사 맛있게 하고 브리핑 때 보도록 해요.”
하지만 레인은 그 느끼한 몸짓을 질색하며 미간을 찡그렸다. 그녀가 그러든 말든 케이드는 손을 팔랑팔랑 흔들며 자기 갈 길을 가 버렸다.
* * *
롤랑드 평원은 조금만 있으면 부식이 일어날 정도로 마수에 의한 오염이 상당히 진행된 곳이다. 그것을 최대한 늦추기 위해 대규모의 토벌단이 조직된 것이었다.
롤랑드 평원을 장악한 마수 토벌 작전은 이러했다. 마수들을 전투조들이 토벌하여 일정 구획을 확보하게 되면 신성력으로 그 구역을 마수로부터 봉쇄한다. 신성력으로 마수들이 접근하는 것을 막을뿐더러 오염이 부식으로 진행되는 것까지 막을 수 있다. 그러니 꾸준히 신성력을 주입하기만 한다면 시간은 오래 걸리겠지만 정상적인 땅으로 변할 때까지 관리할 계획이었다.
레인은 뒤늦게 알았지만 토벌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이번 토벌은 1차 작전으로, 롤랑드 평원의 일부만 확보할 계획이었다. 이후에는 반년에 거쳐 총 8차까지 작전이 이루어질 계획이었다. 이번에 모인 사제들은 모든 토벌에 참여할 필요는 없었다. 사제들의 파견은 각 신전에서 돌아가며 개별적으로 하기로 했다.
그 말에 레인은 크게 안도했다. 일주일만 참으면 신전으로 돌아갈 수 있었으니 말이다. 당장 제 코가 석 자인데 이후의 토벌은 자신 같은 초짜가 알 게 뭐란 말이냐. 더 실력 좋은 남들이 알아서 하겠지.
케이드의 말대로 마수를 몰아내는 위험한 일들은 전투조가 하고 사제들은 안전이 확보된 구역에서 신성력 결계만 만들면 되었다.
브리핑이 이어지는 동안 레인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수첩에 설명을 열심히 받아 적었다. 방법 자체는 상당히 단순하게 설명할 수 있었어도 동선이나 작전은 구역마다 다를 수밖에 없어서 머리가 복잡했다. 이런 경험이라고는 없던 레인은 자신감이 뚝 떨어진 얼굴로 이걸 과연 자신이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우울하게 있었다.
도중에 사제들의 호위조가 결정되었고 레인은 3번 팀으로 배정이 되었다. 자신을 호위해 줄 대원들과 인사를 나누며 모여 앉은 레인은 저도 모르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케이드는 사제들 호위조가 아닌 듯 남아 있는 전투 요원조가 모인 제일 앞에 앉아 볼펜으로 장난을 치고 있었다.
레인에게 말했던 것이 단순한 허세가 아니라면 가장 강하다 그랬으니 선봉에 서는 것이 당연할 것이었다.
“저기…….”
호위조로 배정된 텔라인 요원을 레인이 어색하게 불렀다. 바로 옆에 앉아 있던 호리호리한 체형을 한 남자가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신녀님. 지크라고 불러 주세요. 아, 저쪽은 차례대로 루나, 페일이에요. 이렇게 셋이 신녀님을 지킬 겁니다.”
한 팀이 된 그들은 상냥해 보이는 얼굴들이었기 때문에 전투 요원들이라 하면 전부 우락부락하고 무서운 인상일 것이라는 생각하는 레인의 편견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케이드도 검을 다루는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레인의 뇌리에 박힌 한량의 인상이 강해서 그런가. 그가 싸운다는 것을 상상하자니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레인은 지크가 자신의 말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허겁지겁 질문했다.
“마수와 싸운다는 건 역시 많이 위험한가요?”
레인의 말에 지크가 눈썹을 늘어트리며 말했다.
“위험하기는 하지만 신녀님께서는 괜찮으실 겁니다. 저희가 있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안전하게 귀가하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케이드와 같은 말이었다.
“저도 여러분을 믿으니 제 안위에 대해서는 그렇게 걱정은 하지 않아요. 하지만 마수와 직접 싸우시는 분들 말이에요. 얼마나 위험한 건가요?”
레인의 질문에 지크는 적당한 대답을 고르며 말했다.
“음…… 상황에 따라서 다르지요. 정말로 위험한 작전에서는 많이 죽기도 하고…… 단순한 퇴치 일에서는 크게 다칠 일도 없지만 말이에요.”
하지만 이번 임무는 단순히 마수 한두 마리만 잡고 끝나는 일이 아니었다. 레인은 이런 일에 대해 전문가는 아니었어도 지크의 표현대로 정말로 위험한 작전이란 것쯤은 알고 있었다.
자신은 괜찮다 해도 대체 얼마나 죽고 다칠까. 이 자리에 있는 사람 중 상당수는 내일이면 이 세상에 없을 수도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럼 케이드 씨도 위험한 곳에 배치되는 건가요?”
레인이 케이드를 지목하여 말하자 그것이 뜻밖이었는지 지크가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
“뭐, 그렇죠. 케이드 씨는 최전방에 배치될 예정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