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248화 (248/257)

외전 27화.

“정숙하세요.”

“아, 죄송…… 아니, 지금 진심이세요? 마수 토벌이요? 제가요? 잘못 말씀하신 것 같은데요? 뭔가 착오가 있으신 게 아닐까요?”

레인이 빠르게 머리를 내저으며 항의했으나 관리 사제는 여상하게 말했다.

“착오는 없습니다. 다른 사제님들과 회의를 거친 끝에 결론 내린 것이니 받아들이세요.”

“네? 아니, 진담이세요? 네?”

레인은 끝까지 현실을 부정할 생각이었지만 상대방도 만만치 않았다.

“이렇게 된 것도 다 서리 여신님의 뜻 아니겠습니까. 이것도 여신의 안배입니다.”

레인은 아무 데나 여신의 안배랍시고 갖다 붙이지 말라고 외치고 싶은 것을 티끌만큼 남아 있던 이성 덕분에 가까스로 참아 내었다.

“하지만 사제님! 저는 마수 토벌에 참여할 수 있을 만큼 성력이 특별히 강하지도, 다른 무언가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제가 마수 토벌이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오히려 텔라인 쪽에 짐만 될 게 분명하다고요!”

“오, 그건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들은 책임지고 당신을 무사히 지켜 낼 겁니다.”

“그건 모르는 거잖아요?!”

“보세요. 다른 지원자들도 큰 걱정은 없는 얼굴이잖습니까? 좋은 경험 한다 치고 다녀오도록 하세요.”

“사제니임!”

“내일 떠나야 하니 짐은 미리 싸 두는 것이 좋을 거예요. 대부분의 생필품은 텔라인에서 부족하지 않게 제공하니 갈아입을 옷과 개인 소지품 정도만 챙기면 된다고 하더군요.”

“진심이세요?!”

하지만 관리 사제는 그녀에게 싱긋 웃어 주고는 자신의 할 일을 하러 가 버렸다. 레인은 멀거니 서 있다가 뒤늦게 사태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내일부로…… 마수를 토벌하러 가야 한단 말이지? 내가? 마수를 때려잡으러 가야 한다는 뜻이잖아?

레인은 거무죽죽하게 변하기 시작한 낯빛으로 털레털레 자신의 숙소로 향했다. 내일 떠나야 하니 관리 사제의 말대로 짐이나 챙겨야 할 때였다. 지금까지 서리 여신의 안배 아래 마수라고는 구경도 못 한 평온한 인생을 살고 있었는데 안하무인 한 누구 씨 덕분에 갑자기 마수 한복판으로 던져지게 생겼다.

이것이 다 서리 여신이 자신을 시험하기 위해 내린 시련이라면 당최 무슨 죄를 지었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여신이시여, 제가 당신께 무슨 짓이라도 했던가요?

금남 구역으로 발을 들이기 직전에 레인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케이드였다.

“저 이번에는 규칙 어기지 않았어요.”

케이드는 신녀들의 숙소 출입문에서 한걸음 떨어진 곳에서 싱글거리며 서 있었다.

“잘했지요?”

두들겨 맞는 벌을 받은 사람치고는 안색이 뺀질거릴 정도로 좋았다. 누구는 다 죽어 가는 시체처럼 버석하게 말라 가는데 말이다. 레인은 이를 으드득 갈며 눈을 치떴다.

“이게 다 당신 때문이야!”

레인의 노성에 케이드가 두 눈을 깜박거렸다. 그는 레인에게 내려진 처벌이 무엇인지 듣지 못했기 때문에 레인이 왜 이렇게까지 강한 적의를 보내는지 파악이 되지 않았다.

“사람이 지금까지 오냐오냐 봐주었으면 염치가 있어야지! 정말 끝까지 나를 물고 늘어져서 이 꼴로 만들어?!”

그렇게 케이드의 탓을 하고 나니 서러움이 밀려왔다. 마수가 무서웠다. 날마다 마수에게 잡아먹힌 사람들의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데 무섭지 않을 수가 있어야지 말이다. 영소가 쪽쪽 빨려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의 의미는 영혼이 서리 여신의 품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소리였다. 서리 여신을 모시는 사제로서는 최악의 죽음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더욱더 두려웠고 토벌에 나가고 싶지 않았다. 레인은 자신이 그다지 용감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수 토벌단에 합류할 만한 담력은 요만큼도 있지 않았다. 그래서 케이드에게 모진 말들을 쏘아붙였다.

“당신을 봐주는 것이 아니었어! 그날 바로 관리 사제님께 고해야 했다고! 이런 저급한 인간을 괜히 봐줘서…… 당신 때문에 마수 토벌단에 제가 합류하게 되었단 말입니다! 그 잘난 당신의 꾐에 홀랑 넘어간 대가가 이것이라고요! 정말로 싫어!”

그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케이드는 뒤늦게 레인에게 어떤 처벌이 내려온 건지 이해하고는 미간을 찡그리며 항변했다.

“하지만 저와 함께 자멸하는 쪽을 택한 것은 레인 신녀님인 걸요. 그렇다면 그에 대한 처벌이 마수 토벌단에 합류하는 것인 것도 감안해야지요. 인제 와서 제 탓을 하며 후회하는 겁니까?”

레인은 울컥해서 손을 확 들어 올렸다가 심호흡을 하며 다시 내렸다.

후…… 서리 여신이시여. 저치가 한 대 때릴 만큼의 가치가 있을까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니 참겠습니다.

레인은 대신 한껏 노려보며 시근덕거렸다. 케이드는 그런 레인의 눈치를 슬금슬금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수 토벌단이라 해도 사제들은 그렇게까지 위험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앞장서서 싸우는 것은 우리거든요. 애초에 이게 정말로 위험한 일이었으면 이렇게 사제 중에 무작위로 뽑아 가지 않았겠지요. 그러니 일단 진정해 보세요. 무슨 일을 하는지 대략 공지해 주었잖아요. 정말로 그 이상으로 위험할 일은 없을 것이라니까요?”

케이드가 그렇게 말했으나 사실 레인은 토벌단엔 관심이 아예 없어서 그것에 대한 공지를 유심히 듣지 않았다. 그래서 위험할 일이 없다는 케이드의 말을 반신반의하였다.

“어차피 신성력이 있는 곳은 마수들이 접근할 수 없으니 가장 안전한 것은 사제들이에요. 사제들에게는 1인당 호위조가 하나씩 붙을 것이고요. 사제들은 외부 인력이기 때문에 보호 대상 1순위거든요. 정말이에요.”

케이드의 설득에 레인의 두려움과 화가 조금씩 가라앉았지만, 아직도 그가 미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이를 북북 갈고 있는데 케이드가 아까부터 손에 들고 있던 바구니를 불쑥 내밀었다.

“화가 가라앉았으면 이거 같이 먹을래요? 일부러 포장해 왔는데.”

그는 레인이 이렇다 할 대답도 들려주지 않았는데 벤치에 앉아 자신의 옆자리를 손으로 툭툭 때렸다. 하지만 레인은 팔짱을 낀 상태로 케이드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 시선에 주눅은커녕 머쓱한 기세도 보이지 않고 케이드는 주섬주섬 바구니 안에 있던 것들을 꺼내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거 사려고 아침부터 줄을 섰어요. 여기 되게 유명해서 한정 수량만 팔고 재료 떨어지면 문 닫는다면서요? 그마저도 오전 중으로 동나기 마련이고.”

그것은 이 도시에서 유명한 가게의 롤 케이크와 타르트였다. 외출이 제한된 사제들에게는 그것을 건지기 위해 줄 설 시간이 없어서 아무리 유명하다 해도 레인은 먹어 본 적이 없었다.

“제가 고작 이딴 거로 화가 풀릴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건…….”

레인이 이를 악물고 거부했으나 케이드가 크림이 잔뜩 들어간 롤 케이크를 한입 크기로 잘라 그녀의 입에 욱여넣어 줬다. 덕분에 입가에 크림이 덕지덕지 묻었으나 일단 입에 음식물이 들어온 이상 그것을 꾸역꾸역 씹어 삼키는 수밖에 없었다.

이걸로 화가 풀릴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건…… 아주 맞는 말이야. 그럴 가치가 있는 맛이야.

……라고 솔직하게 말할 순 없었기 때문에 레인은 괜히 씩씩거리면서 케이드를 바라보았다. 케이드는 천연덕스럽게 자신의 몫으로 잘라 놓은 조각을 우물거리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인기 있을 만하네요. 제가 먹어 본 롤 케이크 중에서도 상당히 맛있는걸요? 타르트는 어떠려나.”

흥흥거리는 콧노래를 부르면서 모양이 망가지지 않게 조심스럽게 타르트를 자르는 케이드의 옆에 레인이 새침하게 앉았다. 그리고 불퉁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저는 마수 토벌단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라요.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애초에 관심이 없었던 걸요. 그런데 갑자기 마수를 토벌하러 가라니, 당연히 혼란스럽잖아요.”

“저런, 그러니까 평소에 선생님 말씀은 잘 들었어야지요.”

싱글거리며 타르트 조각을 건네는 것을 받아든 레인이 조금씩 물어 먹는 사이 케이드가 설명해주었다.

“크게 대단한 건 없어요. 아까도 말했지만, 마수와 싸우는 건 텔라인이고, 사제들은 전투조가 마수를 몰아낸 지역에 마수가 다시는 오지 못하게 신성력을 쓰는 것. 그게 전부예요. 부식이 되지 않고 오염만 진행된 땅은 신성력이 있으면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으니까요. 사제들은 마수를 볼 일도 없을걸요.”

케이드의 말에 레인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맛있는 간식을 먹으면서 그 말을 들으니 치솟았던 화가 조금씩 풀렸다.

“임무 기간도 그렇게 길지는 않을 거예요.”

“얼마나 걸리는데요?”

“대충 일주일?”

대략 하루나 이틀 이내로 생각하고 있던 레인은 케이드의 대답에 현기증이 일었다. 일주일이나 이 화상을 보면서 지내야 한다니 눈앞이 깜깜했다.

서리 여신이시여. 대체 저에게 왜 이러시는 거죠.

그렇게 속으로 한탄을 하고 있었는데 생각해 보니 무언가가 석연치 않았다. 레인은 타르트의 마지막 조각을 입에 넣어 우물거리며 손에 묻은 부스러기를 털어 내고 있는 케이드를 빤히 바라보았다.

“왜 굳이 이걸 저와 먹으려고 가져왔어요?”

레인의 물음에 케이드가 눈을 깜박이며 대답했다.

“당신 같은 신녀들은 이런 걸 사 먹을 기회가 많지는 않잖아요. 이 기회에 맛이라도 보라고 가져온 건데 입에 맞지 않았나요?”

“그건 아니지만…… 왜 자꾸 저를 잡고 늘어지냐, 이 소리예요.”

그 질문에 케이드는 턱에 호두 주름이 잡힐 정도로 입을 앙다물고 잠시 고민을 하더니 대답했다.

“이 신전에서 얼굴과 이름을 튼 사람은 당신밖에 없거든요.”

“새 친구를 사귀면 되잖아요.”

하지만 케이드는 어깨를 으쓱였다.

“저랑 놀아 줄 사람이 하나면 됐지, 굳이 둘 이상이어야 할 필요가……?”

그럴 것 같지 않게 생겨서는 어째서인지 케이드는 인간관계를 귀찮아하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레인은 케이드가 말하는 그 한 사람이 왜 자신이 되어야 하는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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