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247화 (247/257)

외전 26화.

“이름 안 알려 주면 알려 줄 때까지 쫓아다닐 거예요.”

“레인 마리어드예요.”

케이드의 엄포에 레인이 얼른 대답했다.

“레인…….”

케이드는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그 이름을 듣고 웃으면서 입 안에서 되뇄다.

“왜, 왜 웃는 건가요? 뭐가 웃겨요?”

“처음 본 날 비가 왔는데 당신 이름도 레인이길래…….”

“제 이름이랑 비랑 무슨 관계인데요?”

“지금은 사어가 된 옛 언어대로라면 레인은 비라는 뜻이잖아요.”

그런 말은 처음 들어 본 레인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까지 레인이란 이름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이런 식으로 말해 준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다.

“어쨌든 어제는 우산 고마웠어요, 레인 신녀님.”

감사 인사를 마지막으로 깔끔하게 떨어진 케이드는 손을 팔랑팔랑 흔들며 돌아갔다. 이번에도 담을 넘어 사라진 것은 물론이었다. 레인은 그 광경을 황당하게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하여간 진짜 이상한 사람이야.”

* * *

“레인 신녀님, 안녕하세요. 이거 먹을래요?”

레인이 다음 날 만난 케이드는 또 신녀들의 숙소 마당에 숨어들어서는 몰래 찐 감자를 먹고 있었다. 레인은 이쯤이 되니 어처구니없었다.

“또 도망인가요?”

“그렇지요.”

“그러니까 여기는 금남 구역이라고요!”

“제가 뭘 하던가요? 그냥 얌전히 숨어만 있잖아요.”

“뭘 하든 얌전히 있든 규칙이 그러한 걸 어찌합니까!”

내밀었던 찐 감자를 레인이 받아 들 생각을 하지 않자 케이드는 그것을 자신의 입으로 집어넣고는 말했다.

“그 규칙이 왜 생겼는지 알아볼까요? 여성과 남성이 불필요한 접촉을 하다 보면 음심이 생기기 마련이지요. 여신만을 섬겨야 하는데 눈을 이성에게로 돌려 버리니 이성과 만남을 삼가는 것이고요. 하지만 저는 보다시피 다른 신녀님들을 피해 이렇게 숨어 있잖아요? 그렇다면 저와 마주쳐서 마음에 바람이 든다든가 하는 일은 생기지 않겠지요? 그러면 짠! 규칙의 취지와 어긋나지 않으니 문제없잖아요?”

“저기요. 이보세요. 그럼 뭐 합니까. 저는 안 피하시잖아요.”

“혹시 저를 보고 음심이 생기시나요?”

“미쳤어요?”

레인이 눈을 홉뜨자 케이드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러면 뭐가 문제예요? 그리고 당신은 이르지 않을 거잖아요.”

“글쎄요.”

“저 이를 거예요?”

“네.”

“음…… 그럼 저는 그제와 어제 저를 숨겨 주고 몰래 보내 준 것을 다른 사제님들께 이르도록 하지요.”

“이 망나니 같은 인간이?! 사람이 호의를 베풀었으면 좀……!”

케이드가 능청스레 한 말에 레인이 울컥했다.

“그러니까 일러 보세요. 저는 혼자 죽지 않습니다!”

와…… 진짜 저질이다.

레인은 이를 북북 갈았다. 하지만 케이드는 여전히 뺀질뺀질한 얼굴로 물었다.

“그런 이유로 내일도 도시락 싸 들고 올게요. 혹시 드시고 싶은 거 있어요? 저라면 외부 음식도 가져올 수 있는데.”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다지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 아니었다. 레인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름 알려 드렸잖아요. 왜 쫓아다니시는 거예요?”

“이름을 알려 주지 않으면 쫓아다닌다 그랬지, 이름을 알려 주면 쫓아다니지 않는다고 말한 적은 없는데요.”

레인의 얼굴에 살짝 금이 갔다. 어디서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장난을……! 레인은 케이드를 상대하는 것이 점점 짜증나기 시작했다.

“대체 마수 토벌은 언제쯤 가시는 건가요?”

케이드는 찐 감자를 쩝쩝거리며 대답했다.

“아마도 모레?”

생각보다 날이 빨랐다. 좋아, 이틀만 참자.

“원래는 좀 더 빨리 출발하려 그랬는데 사제 중에 모집 인원이 아직 다 차지 않았거든요.”

“몇 명이 부족한데요?”

“한 명이요.”

겨우 한 명 정도면 적당한 사람을 차출하여 보내면 그만이었기 때문에 레인은 그다지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 한 명이 꼭 필요한가요? 그 정도면 적당히 있는 사람들로 메꿔도 될 텐데.”

“원래는 더 많을수록 좋은데 추리고 추린 수가 이 정도예요. 한 명 한 명이 아쉬운 상황이지요.”

“모쪼록 빨리 구하기 바라요.”

케이드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마 내일까지 지원자가 없으면 있는 사람 중에서 차출할 것 같아요. 보아하니 당신은 그렇게까지 높은 지위의 성직자가 아니니 차출 인원에서 제외될 거예요.”

레인은 그 말을 들으니 조금 안심이 되었다. 그녀는 마수를 본 적이 없었다. 다만 들리는 말에 의하면 그보다 더 끔찍한 것은 없다고 했다. 아마 자신이 마수와 맞부딪히게 된다면 몸이 얼어붙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설마 이런 사람을 차출해 가겠어? 레인은 서리 여신께서 적당한 사람을 선별하실 수 있다고 굳게 믿으며 어디까지나 남의 일이라 생각했다.

감자를 다 먹고 손가락을 쪽쪽 빤 케이드는 바지에 남아 있는 잔재를 쓱쓱 닦아 버리더니 이번엔 아예 자리에 편하게 두 다리를 쭉 뻗고 앉았다. 감자를 다 먹으면 갈 줄 알았는데 아예 주저앉는 꼴을 보고는 레인은 저도 모르게 한마디 했다.

“왜 안 가시는 거예요?”

“제가 가고 싶을 때 갈 건데요.”

“그게 언제인데요?”

“글쎄요. 아마 저녁 시간쯤엔 발록도 저를 붙잡는 걸 포기하지 않을까 싶은데…….”

“그래서, 그때까지 있겠다고요?”

레인이 눈을 뾰족하게 떴으나 케이드는 여전히 헤실거리는 표정이었다.

“그때까지 제 말벗이나 해 주면 좋고.”

“역시 다른 사제님께 고하는 게 좋겠네요!”

“어라? 저는 같이 죽지 않는다니까요?”

하지만 레인은 이 얄미운 남자에게 한 방 먹일 수만 있다면 자신을 희생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녀는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된 것 같은 케이드에게 음산하게 웃어 주었다.

“네, 저와 함께 장렬히 산화해 보시죠.”

그러더니 빠른 걸음으로 숙소 안으로 들어가며 외쳤다.

“남자다! 금남 구역에 남자가 들어왔다!”

그 말에 노한 신녀들이 약속이나 한 듯 우르르 몰려나왔다.

“대체 어떤 불경한 자가……!”

그들은 두리번거리며 감히 여신의 종들이 머무르는 곳에 함부로 발을 들인 불청객을 찾으려 했으나 케이드는 벌써 꽁무니를 뺀 후였다.

하지만 레인이 한번 마음을 먹은 이상 그건 그다지 효과 있는 대응이 아니었다. 결국, 저녁 시간이 되기 전에 신녀들의 숙소를 총괄하는 관리 사제와 텔라인 쪽 책임자인 발록의 앞에는 레인과 케이드가 나란히 서게 되었다.

“고자질쟁이…….”

케이드가 중얼거렸으나 레인은 새침하게 고개를 꼿꼿하게 들었다. 발록은 눈치껏 그의 정수리를 지휘봉으로 딱 때리며 주둥이를 막았다. 헛기침을 한 발록은 사제에게 고개를 수그리며 말했다.

“부하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에 대해 사죄를 드리고 싶군요.”

“저는 댁 부하가 아닌데요.”

케이드의 정수리는 다시금 지휘봉에 얻어맞았다. 그것을 묵묵히 보고 있던 레인과 관리 사제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관리 사제는 케이드의 언행을 보더니 흐린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레인 마리어드. 대략적인 상황은 알 것 같구나…… 네가 고생했다.”

레인은 어깨를 으쓱였다.

“하나, 금남 구역에 남자가 들어왔음에도 그를 숨겨 주고 바로 고하지 않은 점은 엄연히 잘못된 행위이다. 내가 여기에 더 말을 보태 봤자 네가 더 잘 알겠지.”

“네.”

“그러니 규칙은 규칙…… 벌을 피하기는 힘들 것이야.”

레인은 그것에 대해서 어떤 벌이든 달게 받을 생각이었다.

나와 함께 죽자, 케이드 제인스터!

“네게 내려질 벌에 대해서는 다른 사제들과 이야기를 나눠 본 후 결정하도록 하겠다. 그리고 케이드 제인스터 씨.”

관리 사제는 케이드를 엄히 불렀다.

“원래 금남 구역에 함부로 침입한 침입자들에게는 제법 엄한 벌이 내려집니다.”

“에이…… 그래도 조금 봐주면 안 되나요? 어차피 난 모레면 떠날 사람인데…….”

“네, 그게 문제입니다. 모레 떠나는 텔라인 소속의 사람을 함부로 벌할 수는 없는 일이지요.”

그러고는 발록을 힐끔 보자 그 역시 케이드가 얄미워 죽겠다는 얼굴을 하면서도 관리 사제에게는 선처를 요구하는 무언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그래도 다른 소란은 부리지 않고 조용히 숨어만 있었다니 그것을 감안해 주기는 하겠습니다. 그러니 처벌을 조금 경감해서…….”

케이드가 바싹 긴장하여 침을 꿀떡 삼켰다.

“거꾸로 매단 후 매질을 한 후 창고에 하루 가두어 두는 거로 하죠.”

그 말에 케이드가 황당하단 얼굴로 말했다.

“예? 아니, 잠깐만요. 그게 경감된 거라고요?”

“원래라면 신체 일부를 잘랐습니다.”

“신체의 일부? 손가락?”

케이드의 조심스러운 말에 관리 사제가 케이드의 가랑이 사이를 웃으면서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뜻하는 것을 깨달은 케이드가 새하얀 얼굴로 꽥 항변했다.

“신을 모시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무서워?!”

하지만 정숙한 신녀들을 호시탐탐 노리는 늑대 같은 남자들이 어디 한둘이어야지 말이다. 그래서 금남 구역에 발을 들인 남자들에게는 상당히 엄한 처벌이 내려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레인은 케이드에게 승자의 미소를 지었고 케이드는 억울하단 얼굴로 레인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이 기 싸움의 승자는 레인인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다음 날 아침까지는 말이다.

* * *

“레인 마리어드. 당신의 처벌은 텔라인의 마수 토벌대에 합류하여 임무를 수행하는 것입니다.”

관리 사제의 말을 들은 레인은 처음에는 그의 말이 전혀 예상치도 못한 내용인 덕분에 한 번에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래서 멍청한 얼굴로 반문했다.

“……네?”

“마수 토벌 임무에 참여하세요. 그렇지 않아도 딱 한 자리가 비었는데 당신이 들어가면 되겠네요.”

자신이 내린 처사가 마음에 들었는지 관리 사제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홀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레인은 경악스럽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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