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246화 (246/257)

외전 25화.

레인에게 여신의 속삭임이 내렸어도 당장 무언가가 변한 것은 아니었다. 평소와 같은 생활, 평소와 같은 기분, 평소와 같은 주변 환경. 그런 쳇바퀴와 같은 일상에 그녀가 자신에게 내린 속삭임에 대해 반쯤 잊고 지낼 무렵이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신전을 찾아왔다.

그들은 텔라인 대마수 부대 소속이었는데 마수 토벌 준비를 하는 데 힘을 빌려줄 사제가 필요하여 지원을 요청하러 왔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레인은 큰 관심이 없었으나 신전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지원자를 우선으로 선발하되 인원이 부족할 경우 징발하기도 한다는 모양이었다.

“마수 토벌이면…… 가서 죽을 수도 있지 않아? 징발이라니…….”

레인은 같은 방을 쓰는 신녀들끼리 우려 섞인 대화를 나누는 것을 조용히 들으며 성서를 읽고 있었다.

“신자(信子) 중에서 뽑겠지. 아무래도 남자들이 가는 게 더 낫지 않겠어?”

“혹시 모르잖아.”

두런두런 대화하고 있는데 누군가 창밖을 보고는 말했다.

“아, 비 온다.”

그 말에 레인 역시 밖을 살폈다. 아직 빗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을 보아하니 한두 방울 떨어지는 정도이거나 보슬비일 것이었다. 하지만 밖에 널어놓은 빨래를 그냥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빨래 걷고 올게.”

“같이 가.”

“아니야, 몇 개 되지도 않아.”

다른 신녀들의 도움을 마다하며 레인은 종종걸음으로 걸어갔다. 예상대로 비가 많이 내리치는 것은 아니었다.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껴서 날이 어두웠어도 굳이 우산을 찾아 쓸 정도는 아니었던지라 레인은 널어놓은 이불보를 걷어 커다란 바구니에 차곡차곡 쌓기 시작했다.

마지막 남은 이불보를 빨랫줄에서 걷으며 크게 나풀거리는데 그 너머로 누군가 담벼락을 뛰어넘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등장한 사람 덕분에 레인이 눈을 휘둥그레 뜨자 펄럭이는 이불보 사이로 아름다운 자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꺄악!”

그러자 상대방이 얼른 달려와 레인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쉬, 쉬. 수상한 사람 아닙니다. 아이고, 이러고 있으니 수상해 보이긴 하네…… 어쨌든 이상한 사람은 아니고요.”

상당히 눈에 띄는 빛의 붉은 머리를 한 사내였다. 나이는 20대 중반쯤일까? 그는 남자인 것을 감안해도 제법 키가 커서 레인이 목을 거의 뒤로 꺾어야지 눈을 마주칠 수 있었다. 그런 말을 빠르게 말을 속삭인 사내는 레인의 기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진정됐어요? 손 뗄 테니 소리 지르면 안 돼요?”

레인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사내는 빙긋 웃고는 그녀의 입을 막고 있던 손을 떼었다. 레인은 아직도 벌렁거리는 가슴을 손으로 누르며 불청객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사내는 죄책감 따위는 없는지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머리카락을 손으로 비비 꼬았다. 약간 나른해 보이는 눈을 가진 남자가 고개를 까닥였다.

“안녕하세요.”

“누구?”

“케이드 제인스터입니다.”

하지만 레인은 아직도 잔뜩 경계하는 얼굴로 케이드의 자기소개에 대답해 주지 않았다.

“저…… 놀라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여기는 여성 신녀들의 구역입니다. 금남 구역이라고요! 이런 곳에서 뭘 하시는 거세요?”

그 말에 케이드는 아차 싶었다.

“도망치다 보니 이쪽으로 오게 되었는데…… 신녀님들의 숙소가 있는지는 정말 몰랐습니다. 다시금 죄송합니다.”

“빨리 나가 주세요.”

“저, 그러지 말고 딱 10분만 숨겨 주실 순 없나요? 저쪽에 걸리면 저도 귀찮아서…….”

레인은 기가 막혔다. 그는 이름만 밝혔을 뿐 무엇을 하러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인지는 하나도 설명하지 않았다. 그런데 무얼 믿고 숨겨 주느니 마느니 한단 말인가.

“또 소리 지를 거예요!”

“앗, 그러지 마세요! 저 진짜 잘못 걸리면 한동안 잔소리 듣는단 말입니다.”

“대체 누구신데요?!”

“텔라인과 같이 오긴 했는데…….”

어쩐지 처음 보는 얼굴이다 싶었더니 그쪽에서 온 외부 인력이었다. 케이드는 모호한 표정을 지으며 계속해서 머리카락을 뱅글뱅글 꼬았다.

“하지만 텔라인은 아니고…….”

“그런데요?”

“그쪽 사람들이 저를 온종일 붙잡고 놔주질 않는단 말입니다. 협박당하고 있다고요.”

“무슨 협박이요?”

“그게…… 저보고 자기들 쪽으로 넘어오라고.”

“무슨 소리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와는 그다지 관련이 없는 것 같네요.”

그때, 한두 방울씩 간헐적으로 떨어지던 빗방울이 갑자기 굵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쏴아 하는 소리를 내며 쏟아져 내렸다.

“앗!”

레인이 허겁지겁 빨래 바구니를 챙기고 처마 밑으로 피하는 것을 케이드가 쫄랑쫄랑 쫓아왔다.

“왜 따라오시는 건데요?”

“아니, 저도 비는 피해야 할 것 아닙니까?”

“다른 곳에서 피하시면 되잖아요!”

“이 장대비를 뚫고 가라고요?”

케이드는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레인은 냉정했다.

“어쩔 수 없잖아요.”

“여신의 종이 왜 이렇게 매정해요.”

“금남 구역에 남자를 들이는 것은 여신의 뜻에 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레인이 새침하게 말했으나 케이드가 눈웃음을 치며 그것을 반박해 나갔다.

“아닐 텐데. 그건 인간들이 만들어 낸 규칙일 텐데.”

그 말에 불쾌해진 레인은 저도 모르게 눈을 찡그렸다.

“그쪽 분에게서 그런 말을 들을 이유는 없어 보이네요!”

하지만 케이드는 여전히 나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케이드의 말대로 처마 밑으로 나가는 순간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기 좋은 빗줄기였다. 그것을 보고 있자니 레인은 조금 마음이 약해졌다. 그리고 비록 금남 구역이기는 하나 이미 여기까지 들어온 이상 조금 더 시간을 끌어도 당장 쫓아내나 마나 죄질은 비슷할 것 같았다.

“기다려 보세요.”

레인은 빨래 바구니를 들고 안으로 들어가려다 다시 몸을 돌리고 말했다.

“제가 올 때까지 저 구석에 숨어 계시고요.”

케이드는 두 눈을 끔벅였다. 숨어 있으라니 고자질하러 가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레인의 말대로 모퉁이에 잘 숨어 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발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빼꼼 빼 보니 바구니를 두고 온 레인의 손에는 우산이 들려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케이드에게 내밀었다.

“자요. 우산 드렸으니까 이제 가실 수 있겠죠?”

그것을 건네받은 케이드는 저도 모르게 빙그레 웃었다.

“감사합니다.”

“빨리 쫓아내려고 드린 거니까 감사할 건 아니고요.”

우산을 편 케이드는 처마 밖으로 나가기 전에 레인에게 물었다.

“이름, 알려 주세요.”

“제가 왜요?”

“다음에 뵈면 이름으로 부르고 싶어서.”

하지만 레인은 차가운 얼굴로 대답했다.

“그럴 일 없습니다.”

“매정한 신녀님이네요.”

케이드는 쿡쿡 웃으면서 정중하게 인사를 하더니 다시금 담을 넘어 사라졌다.

“이상한 사람이야.”

레인은 어깨를 으쓱이며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 * *

케이드와 만난 다음 날, 레인은 아침 기도를 올리고 조례 시간에 뜻밖의 말을 듣게 되었다.

“마수 토벌에 자진하여 지원한 성직자 외에 10명가량의 공석이 생겼습니다. 혹시 추가로 지원하실 분은 안 계십니까?”

비록 강제는 아니었으나 그런 권유를 받자 사제들은 술렁였다. 레인은 허리를 펴고 앉아 주변을 살폈다. 다들 꺼리는 분위기인 것이 당연했다. 죽을지 살지 알 수 없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그 말에 텔라인의 사람 중 하나가 나섰다.

“물론 텔라인에서는 사제님들을 보호할 것입니다. 최대한 안전하게 임무에 임하실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

그는 검은 털을 지닌 거대한 덩치의 오빈족이었다. 분명, 이름이 발록이었던가. 그렇게 장담하기는 했으나 선뜻 나서는 사제는 없었다. 발록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일까지는 지원을 받고 있으니 혹여나 원하시는 사제님께서 계시면 꼭 제게 말씀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조례가 파했다. 레인은 자리를 정리하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건물 외벽에 쌓아 놓은 잡기들 사이에서 붉은색의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안녕하세요.”

“깜짝이야!”

레인은 이번에도 소리를 질러 버렸다. 그러자 상대방이 얼른 입가에 손가락을 대고 목소리를 낮췄다.

“접니다, 저요.”

뺀질뺀질하게 웃고 있는 케이드였다. 레인은 눈을 세모꼴로 뜨고 주변에 아무도 없는지 살핀 후 그에게 쏘아붙였다.

“여기서 뭘 하시는 거예요?! 분명 여기는 금남 구역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조례 시간 동안 도망 와서 있었는데요. 여기는 금남 구역이니까 이곳까지 찾으러 올 리는 없잖아요.”

케이드는 머리카락을 비비 꼬며 태평한 어조로 대답했다. 레인은 그러고 보니 조례 시간에 엄청나게 눈에 띄는 붉은색 머리가 보이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 자꾸 도망 다니는 건데요?”

“말했잖아요. 저는 텔라인이 아닌데 자꾸 자기들 쪽으로 포섭하려고 한다니까요. 그게 귀찮아서요.”

“텔라인이 아니라면 왜 그들이랑 함께 있어요?”

“저만큼 마수에 대해 잘 아는 사람도 드물거든요. 그래서 잠시 용병으로 뛰고 있는데…… 아무래도 제가 탐나나 보지요. 죄 많은 남자라니까요.”

케이드가 손을 내저으며 웃었다.

“여기는 또 왜 왔어요?”

다시 경계심 어린 목소리로 묻는 레인에게 케이드는 잠시 벽에 기대어 두었던 물건을 챙겨 왔다.

“이것 돌려드리려고요.”

그가 정중하게 건넨 우산에 시선을 둔 레인이 다시 케이드를 바라보았다.

“굳이 돌려주시지 않아도 괜찮은데요.”

하지만 케이드는 우산을 레인에게 떠넘기듯 안겨 주었다.

“이걸 핑계로 당신 얼굴을 한 번 더 보고 싶었으니까요.”

뭐라는 거야.

세속의 남자와 길게 잡담을 하지 않는 삶을 살아온 레인은 그게 수작질이라는 것을 한 번에 알아채지 못했다. 단지 조금 바보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제 얼굴을 왜 봐야 하는데요?”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 그랬는데 당신이 이름도 알려 주지 않았잖아요.”

왜 자꾸 이름을 걸고넘어지는지…….

이름을 알려 주는 쪽과 알려 주지 않는 쪽. 레인은 둘 중 어느 쪽이 이 사람을 떼어 낼 수 있는지 선택의 기로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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