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245화 (245/257)

외전 24화.

“그게 무슨 민폐야.”

그 안에 대해서 미레아가 반쯤은 진지하게 고민하자 아리스는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 방법도 안 된다, 저 방법도 싫다 하는 사이 시계는 벌써 3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이대로 또 날밤을 새울 수는 없다는 생각에 미레아가 슬슬 침실로 올라갈 것을 제안하며 말했다.

“오늘은 내가 재워 줄까?”

“어떻게?”

“뭐…… 여러 방법을 써 보자.”

미레아는 남은 우유를 한 번에 다 마시고는 아리스를 재촉했다.

“말이 나온 김에 바로 해 보자. 속는 셈 치고 어서.”

미레아의 손을 잡고 비척거리며 자신의 다락방 침실로 올라온 아리스는 상대방이 하는 일을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침구를 적당히 매만진 후 미레아는 페니드란까지 가져와 침대 옆에 세웠다.

“이번에야말로 정말 잠드는지 확인할 거야.”

― 아, 제발. 너희들끼리 지지고 볶는데 나를 끼워 넣지 말란 말이야.

페니드란이 투덜거렸지만 둘은 그것을 무시했다. 미레아는 불을 완전히 끄는 대신 은은한 밝기의 심신 안정에 좋은 향초를 피웠다. 그리고 아리스의 침대 헤드에 반쯤 기대 눕고는 베개와 쿠션을 매만져 마치 커다란 새 둥지 같은 자리를 만들었다.

“자, 이리 와.”

아리스는 천천히 미레아의 옆에 가서 그녀의 팔을 베고 누었다. 주변으로 푹신한 쿠션이 받쳐 주니 자세를 잡기 편했다. 1인용 침대였던 탓에 둘은 서로의 몸을 바싹 붙이고 누워야 했다. 좁기는 했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 안락한 느낌이었다. 미레아는 살짝 비스듬하게 옆으로 누워 아리스와 눈을 마주쳤다.

“자장가라도 불러 줄게. 무슨 노래가 좋아?”

아리스는 그런 미레아가 너무나도 사랑스럽게 보여서 저도 모르게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글쎄…… 난 루아드에서 부르던 노래밖에 몰라서.”

“그럼 세로킨에서 부르는 노래 들려줄게.”

미레아는 아리스가 베지 않은 쪽 손으로 그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조심스러운 그 손길이 간질거리며 기분이 좋았다. 미레아가 콧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나지막하게 깔리는 노랫소리에 아리스는 스르륵 눈을 감았다.

미레아는 부드럽게 아리스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렇게 간간이 살살 긁어 주기도 하다 어느 순간 본격적으로 두피 마사지를 하기 시작했다. 그게 제법 시원하여 아리스는 기분이 노곤해졌다. 아리스의 표정이 풀어지자 미레아는 이번엔 목 뒤쪽을 주물럭거렸다. 그러다 다시 아리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자장가를 불러 주었다.

“미레아.”

“응.”

노래가 끊기고 바로 대답이 들려왔다.

“가지 마…….”

“나 어디 안 가.”

미레아가 속닥거렸다. 그래도 불안한지 아리스는 미레아의 손을 가볍게 쥐고 간절하게 말했다.

“응, 가지 마…….”

“나 여기 있잖아. 너를 해치지도 않으니 안심하고 잠들도록 해.”

아리스의 이마 위에 부드럽고 따듯한 입술이 내려앉았다.

“네가 무서워하는 것들에게서 내가 지켜 줄게.”

“…….”

“평생 지켜 줄게.”

사실 자신을 지켜 주겠다는 말은 율비네에게서도 들은 적 있지만, 평생이라는 조건이 붙으면 그녀가 ‘평생 부관이라니, 무슨 그런 끔찍한 소리를?’ 하는 얼굴을 했기 때문에 이런 말은 미레아에게서 처음 들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지켜 주겠다는 말은 자신이 해야 하는데 미레아에게 선수를 빼앗겨 버렸다. 그렇다 해도 그게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는 유일하게 기댈 곳이었지만 그 하나만으로 충분했다. 다른 것은 필요 없었다.

미레아가 아리스에게 잡힌 손의 엄지로 그의 손등을 살살 쓸어 주며 자장가를 이어 불렀다. 성대의 울림을 따라 맞닿은 가슴에서 잔잔한 떨림이 울려 왔다. 사방에서 기분 좋은 감촉들이 몰려오니 아리스는 저도 모르게 기운이 가라앉았다.

아리스의 몸에서 힘이 빠지는 것을 보고 미레아는 자신 역시 나른하게 감겨 오는 눈으로 그의 상태를 살폈다.

“잠들었어?”

미레아가 소리 없이 입을 뻥긋거리며 페니드란에게 묻자 검은 아리스의 기색을 살피고는 대답했다.

― 잠들었어. 이번엔 진짜야.

그 확언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미레아가 이내 방긋 웃었다. 그녀는 자신의 어깨를 베고 잠든 아리스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다행히도 편안하게 잠들었는지 얼굴에는 주름 하나 없이 근육이 이완되어 있었다.

깨어 있을 때는 상대방의 얼굴을 이모저모 뜯어보자니 어쩐지 부끄러운 기분이 들 때가 많아 이렇게 자세히 본 것은 오랜만이었다. 잠이 든 그는 상당히 유순한 얼굴이었다. 성장하면서 골격이 변해 지금은 어릴 때의 모습이 거의 없어졌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보아하니 그 시절 예쁘장하던 모습이 얼핏 보이는 듯했다.

짜식, 잘생겼다.

미레아는 아리스의 미모에 제가 다 뿌듯해졌다. 코도 예쁘고, 입술도 예쁘고, 얼굴선도 예쁘고, 지금은 비록 눈꺼풀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감겨 있는 눈 너머에 있는 눈동자 역시 아주 예쁘다는 것을 알고 있지. 내 남자 잘생겼다. 뭘 먹으면 이렇게 잘생겨지지?

미레아는 새삼 신기한 기분이 들어 뽀뽀라도 마구 해 주고 싶었는데 아리스가 깰까 봐 움직일 수 없었다. 대신 아리스의 머리에 제 이마를 기대고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편안하게 감았다.

그렇게 서로 체온을 나눈 것이 얼마나 지났을까. 아리스는 맞닿은 미레아의 가슴이 규칙적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느끼며 슬며시 눈을 떴다. 미레아는 입을 조금 벌리고 곤히 잠들어 있었다. 아리스는 손가락으로 미레아의 코끝을 살짝 튕겼다. 그것도 모르고 꿈쩍도 하지 않는 미레아를 보고 그는 어이없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재워 준다면서 나보다 더 깊이 잠들면 어쩌자는 거야…….”

그렇게 말하는 아리스의 목소리에도 잠기운이 묻어 있었다. 도중에 눈을 뜨긴 했으나 아리스는 전처럼 자는 척 꾸몄던 것이 아니고 페니드란의 말대로 정말로 한숨 자고 일어났던 것이다. 단지 미레아의 자장가가 멈추자 저도 모르게 정신이 들었다.

그게 아쉬워서 입맛을 쩝 다신 아리스는 자신이 베고 있는 미레아의 어깨 쪽이 불편해 보여서 자세를 다시 잡으며 그녀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미레아의 쇄골에 얼굴을 묻고 숨을 깊게 들이마시자 그녀의 따듯한 체향이 폐부까지 깊게 흘러들어 왔다.

그것에 취한 것 같은 기분이 들자 나른한 기분과 함께 스르륵 잠이 밀려왔다. 미레아가 했던 방법들이 아무래도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잘 자, 내 아가씨.”

밤사이 꿈에서 만나자.

“그리고 고마워.”

아리스는 오랜만에 느껴 보는 안도감과 안락함 속에서 잠이 들었다.

네 번째 외전. 서리 여신의 안배

“그대에게 반려가 될 사람을 보내겠다.”

그런 속삭임을 들었다.

그것은 48대 성녀의 입을 빌려 전하는 말이었지만 성대의 주인과는 다른 따듯하고 온화한, 하지만 어딘가 지독할 정도로 외로운 것 같은 목소리였다.

양 무릎을 꿇고 앉아 성녀를 독대하던 레인은 감람석 같은 눈동자를 깜박이며 저도 모르게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저의 반려라니요?”

“너의 반쪽을 말하는 것이란다.”

성녀를 통해 서리 여신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레인 마리어드는 서리 교단의 신녀였다. 이제 막 성년의 나이를 넘긴 그녀는 서리 여신만을 모시며 몸과 마음을 스스로 그녀에게 바쳤다. 교리상 성직자의 결혼은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제들은 평생 홀몸으로 서리 여신만을 위한 삶을 살았다.

그런데 반려라니.

대부분의 세월을 루아드에 있는 대신전에서 보내기 마련인 성녀께서 이 작은 나라의 수도까지 찾아온 것부터 상당히 떨리는 경험일진대, 성녀께서 레인과 단둘만 남아 이야기하기를 원한다 하셨을 때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말단 신녀였던 레인은 그렇게 높으신 분과 독대할 만큼 대단한 것이 없었고 딱히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잔뜩 긴장하여 성녀를 찾아뵈었을 때, 여신께서 직접 그녀를 지목하여 속삭임을 내려 주실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여신의 속삭임은 그렇게 흔히 접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며 그 내용도 세계의 형세와 관련된 것들이었지 일개 개인과는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그러니 그것만으로도 기절할 것 같았는데 갑자기 반려라니.

“저…… 여신이시여, 외람되오나 당신께서 말씀하신 반려의 뜻이 제가 알고 있는 그것이 맞나요?”

“걱정하지 말렴. 그가 네 반려임을 확신하게 될 것이란다.”

“아니요, 서리 여신님. 저는 당신을 모시는 종. 반려라니요, 가당치 않습니다.”

“레인 마리어드. 내가 너에게 주는 운명에 순응하렴.”

서리 여신은 그렇게 일방적인 말만 남겼고 성녀에게 연결되어 있던 신성력이 사라졌다. 강신이 끝난 여파로 느리게 눈을 깜박이는 성녀에게 레인이 다소 성급하게 물었다.

“이게 정말 서리 여신께서 제게 내리신 속삭임이 맞나요?”

“무례하구나.”

성녀의 말에 레인이 움찔거렸다. 하지만 여신의 말을 부정하고 싶지 않았어도 이건 너무 뜬구름 잡는 소리 아니던가. 애초에 레인 마리어드는 특별할 것이 없는 신녀였다. 그런 자신에게 속삭임을 내리다니 서리 여신의 뜻을 도통 헤아릴 수 없었다.

“여신의 의도를 모르겠습니다. 애초에 제게 왜 속삭임이 내려왔는지도 모르겠고…….”

“인간은 여신의 의도를 전부 알 수 없다. 그저 순응할 뿐.”

“하지만…….”

레인이 조심스럽게 반론을 꺼내려 했으나 성녀의 표정을 읽기 힘들었다. 성녀는 이 이상 해석을 내놓을 생각이 없는지 옷매를 추스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레인은 그제야 뒤늦게 일어날 수 있었다.

“이것으로 끝인가요? 저는 이제…… 무엇을 하면 되나요?”

“반려를 내리시겠다 하셨지 무엇을 하라는 소리는 하지 않으셨잖니.”

“어…….”

레인은 정말 이것으로 된 건가 싶었지만 그럴수록 더더욱 여신의 의도를 가늠할 수 없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데?

“알고 있겠지만 여신의 속삭임은 허락 없이 타인에게 옮길 수 없다. 이것은 네게만 내린 속삭임이니 홀로 품고 있는 게 좋을 것이야. 이제 들어가서 쉬어라.”

거의 축객령이나 다름없는 말에 레인은 미적거리며 성녀에게 인사를 올렸다. 상당히 찝찝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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