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244화 (244/257)

외전 23화.

다음 날 아침, 미레아는 일부러 일찍 일어났다. 그녀의 옆에서는 아리스가 거의 어제와 다름없는 자세로 잠들어 있었다. 미레아가 침대 밖으로 나오면서 부스럭거리자 아리스가 실눈을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좋은 아침.”

그는 다소 잠긴 목소리로 아침 인사를 건넸다.

“너무 일찍 일어난 거 아니야?”

미레아가 우려 섞인 말을 건넸으나 아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어제 일찍 잤더니 일찍 눈이 떠진 것뿐이야.”

“그래?”

미레아는 늘어지라고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쭉 켜더니 자연스러운 태도로 옆방으로 갔다. 아리스가 의아한 눈으로 그 뒤를 좇았는데 미레아는 작업실에서 바로 페니드란을 꺼내 들고 왔다.

“……페니드란은 왜?”

아리스가 다소 찔리는 기분으로 묻자 미레아는 그것을 무시하는 대신 페니드란에게 물었다.

“자, 간밤의 일을 보고해 봐.”

그 말에 아리스의 얼굴이 굳었다. 그리고 그가 말리기도 전에 페니드란이 냉큼 간밤의 일을 일러바쳤다.

― 얘 거의 안 잤어.

“야!”

아리스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날카롭게 쏘아 대는데도 페니드란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 잠깐씩 선잠을 자는 것 같기는 했는데 대부분은 깨어 있던데?

“너 조용히 안 해?”

― 선잠을 자다 일어난 것도 지금으로부터 두 시간은 더 전인 것 같아.

“너어…….”

아리스는 페니드란에게 이를 갈다 말고 아무 말이 없는 미레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차갑게 식었다기에는 다소 심란한 눈으로 아리스를 지그시 응시하고 있었다.

“…….”

“아니, 그러니까…… 정말로 평소에는 잘 자는데 어제는…….”

“너 평소에도 이런 식이야?”

“아니야.”

“정말?”

― 그것도 거짓말이래요오. 아리스는 맨날 맨날 미레아에게 거짓말만 한대요오.

페니드란이 노래를 흥얼거리는 것 같은 어투로 끼어들자 미레아의 눈이 더 매서워졌다. 아리스는 페니드란을 원망할 새도 없이 변명하기 위한 말을 쥐어짜 내야 했다.

“그으…… 게에…….”

미레아의 심문이 이어지자 아리스는 점점 말꼬리를 흐리더니 이실직고하였다.

“맞아. 나 요새 잠을 거의 못 자고 있어.”

미레아가 자신의 이마를 때리며 탄식했다.

“왜 잠을 못 자는 거야? 뭐가 문제야?”

“글쎄…….”

“언제부터 잘 못 잤는데?”

아리스는 또 거짓말을 해 봤자 페니드란의 진술이 있으면 미레아에게 신용도만 깎인다는 것을 깨닫고 솔직하게 불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두 달인가, 석 달 전부터?”

“뭐?! 그렇게 오래?!”

아리스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레아는 한숨을 내쉬다 말고 날짜를 셈해 보더니 더더욱 심란해진 얼굴로 말했다.

“두 달에서 석 달 전이면 나랑 같이 한 침대를 쓰기 시작했을 무렵부터네?”

“그런가?”

“그래! 설마 나 때문이야?”

“아냐, 아냐! 너 때문이 아니고…….”

아리스는 눈가를 비비며 시선을 피하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 사실…… 옆에 누가 있으면 잠 못 자…….”

“뭐?! 그럼 나 때문인 게 맞잖아!”

“아니, 너는 문제가 없어. 문제가 있다면…… 나지…….”

잔뜩 시무룩해진 아리스의 표정에 미레아는 어쩐지 죄책감이 들었다. 계속 서 있는 상태로 이야기하는 대신 미레아는 아리스를 데리고 부엌으로 내려가 의자에 앉히고는 심신 안정에 좋은 허브차를 한 잔 따라 주었다.

“자, 말해 봐. 대체 잠을 왜 못 자는 거야?”

미레아의 말에 아리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 전까지 내 상황이 썩 좋지 않았었잖아.”

“그렇지.”

“적도 많았고.”

그 대목에서 미레아가 딱하단 얼굴로 아리스를 바라보았다. 자기 일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좋지 못했다.

“어릴 때부터 암살당할 뻔도 했고, 독살당할 뻔도 했고, 배신도 당하고 하다 보니 그냥…… 아무도 믿을 수 없었고 신경도 예민해져 있었고…….”

아리스가 지금까지 그런 내색을 전혀 하지 않았으니 미레아는 그에 대한 자세한 내막은 잘 몰랐다. 언제나처럼 뻔뻔한 태도로 넘겨 버리는 줄 알았는데 막상 그가 하는 말을 들어 보니 그 속이 말이 아니었다.

아리스는 무덤덤하게 말하고 있었으나 미레아의 심정은 참담했다. 굳이 더 묻지 않아도 상당히 축약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고 실제로는 더 했을 것이다.

“아무튼, 그런 경험이 몇 번 있고 난 이후엔 누가 옆에 있으면 신경이 곤두서서…… 잠을 제대로 못 자…….”

지금까지 잘 몰랐는데 그 말을 듣고 자세히 보니 그의 눈에는 다소 피로감이 서려 있었다.

“너 정말…… 그럼 석 달 동안 거의 못 잤다는 거야?”

“자기는 했어. 너 없는 사이에…….”

“그래도 밤에 자는 거랑 낮에 잠깐 눈 붙이는 거랑 같을 순 없잖아.”

“아니야, 정말 괜찮아.”

“하지만, 하지만…… 나는 네가 그런 줄도 모르고 혼자…….”

아리스의 상태도 모르고 밤사이 홀로 쿨쿨 자고 있었다는 사실에 미레아는 속상함이 밀려와서 눈물을 글썽였다. 미레아가 눈물을 떨구기 일보 직전이자 아리스는 허둥지둥하며 미레아를 달랬다.

“아니야. 아니야, 난 괜찮아. 정말이라니까? 그렇게까지 무리 되지 않았다고. 네가 자는 모습 보는 것도 좋았고. 울지 마…….”

미레아가 찔끔 새어 나온 눈물을 훔치며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줘.”

“응, 뭐든 말해 봐.”

“오늘 밤부터 따로 자자.”

그 말에 아리스가 펄쩍 뛰었다.

“뭐?! 싫어!”

“아니, 지금 잠을 보충하는 게 더 중요하지, 나랑 같이 자는 게 중요해?”

“응, 중요해.”

아리스가 애절하게 고개를 끄덕였음에도 미레아 역시 미간을 찡그리며 대꾸했다.

“정말 걱정돼서 그래!”

“그렇다고 따로 자는 건 싫단 말이야. 석 달 동안 제법 익숙해져서 밤에는 오히려 네가 있는 쪽이 더 안정되는 것 같고…….”

“그럼 뭐 해. 잠을 못 자는데.”

“미레아…….”

아리스가 끄응 거리며 앓는 소리를 내었어도 미레아는 자신의 의견을 바꿀 생각이 없었다.

“오늘 밤은 각방이야. 내 방문 잠그고 잘 거니까 기어들어 올 생각은 하지 말고.”

아리스는 하늘이 무너졌다는 소리를 들은 얼굴을 했다.

* * *

그날 밤, 오랜만에 자신의 작은 침대에 홀로 누운 미레아는 침침한 눈으로 천장을 노려보고 있었다. 졸리지 않은 것이 아닌데 잠이 쉽게 오지 않았다. 천장을 보던 눈을 억지로 질끈 감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하지만 오히려 정신이 또랑또랑해지고 있었다. 한참을 뒤척이던 미레아는 침대에서 부스스하게 일어났다.

“옆구리가 허전하다…….”

미레아는 자신의 바로 옆자리가 차갑게 식어 있는 것이 낯설게 느껴졌다. 어둠에 익은 눈으로 시계를 보니 새벽 2시였다.

“으…….”

입맛을 다시며 머리를 벅벅 긁던 미레아는 결국 우유라도 데워 먹을 생각으로 방을 나왔다. 미레아가 계단을 내려오니 부엌 불이 켜져 있었다. 밝은 빛에 미간을 찡그리며 거실로 내려오자 3인용 소파에 길게 누운 아리스가 눈에 들어왔다.

아리스는 얼굴 위에 펼친 마도 공학책을 덮고 있다가 미레아가 내려온 인기척에 머리를 들었다. 그는 다소 당황한 얼굴이었다. 그가 몸을 일으키다 손 옆에 있던 병을 쳐서 쓰러트렸는데 내용물에서 나는 냄새로 보아하니 술이었다.

미레아는 밀려오는 배신감에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너 침대에서 곱게 자랬더니 이 밤중에 여기서 뭐 해! 그 술병은 뭐야?!”

“아니, 이거라도 읽으면 좀 잠이 오지 않을까 하다가…….”

“책은 그렇다 치고 지금 술을 마시고 있던 거야? 잠이 오지 않는다고?”

“이런 시도라도 해 봐야지.”

아리스가 툴툴거렸지만 그는 크게 취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잘 취하는 체질이 아니었으니 술병의 절반도 비지 않았는데 취기가 올라올 리 없었다.

“그러는 너는 왜 여기 있어?”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아리스를 착잡한 심정으로 바라보던 미레아는 머쓱한 얼굴로 대답했다.

“잠이 안 와서…… 너야말로 어차피 누워 있을 거면 방에서 눕지 왜 이런데 누워 있어.”

“침대가 너무 넓어…….”

“뭐가 넓어? 너 1인용 침대 쓰잖아.”

“혼자 있으니까 불안하단 말이야.”

“혼자서는 잘 잔다며.”

“네가 없으니까 이젠 혼자서도 못 자겠어.”

구구절절 덧붙이는 변명이 궁색하다 하기엔 미레아도 비슷한 기분이 들어서 일어난 것인지라 면박을 줄 수 없었다. 미레아도 그렇고 아리스도 그렇고 3달 동안 서로의 온기를 나누며 잠들다 인제 와서 혼자 자려 하니 그것대로 잠을 잘 수 없었다. 미레아는 자신의 우유를 데우면서 아리스의 몫까지 따랐다. 아리스는 우유를 마시면서 퀭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술로 안 되면 수면제라도 먹을까.”

“하지만 평생 그걸 먹을 수는 없잖아. 나중에는 정말로 수면제 없이는 잠이 안 올 수 있어서 좋지 않다고. 자연스럽게 잠드는 버릇을 들여야지.”

미레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리스는 이 이상의 별다른 대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티는 내고 있지 않았어도 미레아의 말대로 피로는 점점 더 쌓이고 있어서 조만간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니 이런 식으로 잠을 못 자면 술이나 약의 힘이라도 빌려야지 어쩌겠는가. 알코올 중독이나 약에 대한 내성보다는 수면 부족으로 죽는 쪽이 더 빠를 것 같았다.

“그럼 어떡해.”

“음…….”

미레아는 잠시 방법을 고심하다 되는대로 막 던졌다.

“자기 전에 지칠 때까지 운동하는 건 어때?”

“그건 맨날 하잖아.”

그 말에 내포된 의미 때문에 미레아는 아리스의 등을 철썩철썩 때렸다.

“말을 해도! 정말 말을 해도! 진지하게 생각하란 말이야!”

“아야! 아! 알았어! 알았다고! 그리고 사실 내가 진짜 지칠 때까지 하면 네가……!”

“입 다물어!”

얼굴이 빨개진 상태로 시근덕거리던 미레아는 다시 고민에 빠졌다.

“그러면…… 할 수만 있다면 쿤둘렌을 데려다 놓고 네가 잠들 때까지 마법학 강의를 해 달라고 할 수도 있어.”

“진심이야?”

“시도는 해 봐야 하지 않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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