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242화 (242/257)

외전 21화.

지금까지 율비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미레아가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꺼냈다.

“저기 그런데요…… 율비네, 그 독립을 해 봤자…… 록산으로 이사 올 거잖아요? 기숙 아파트로 들어가 봤자 트램 타면 우리 집이랑 10분 거리일 텐데……? 그럼 아리스랑도 한동네 사람이 되는 건데요? 기왕 독립할 거면 아예 멀리 가 버리는 쪽이 더 낫지 않을까요?”

미레아의 말대로였다. 율비네가 독립한다 쳐도 거의 매일 봐야 하는 상황이나 다름없었다. 특히 같은 현장직으로 배정된다면 미레아와는 뻔질나게 마주칠 것이 뻔했다. 그 말에 율비네의 독립을 지지해 주겠다고 생각했던 아리스의 얼굴에 잠시 싫은 기색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거리의 문제가 아닙니다. 아리스와 저의 관계가 더는 어떠한 계약으로 묶여 있지 않는다는 것이 제일 중요하지요.”

율비네의 설득에 미레아는 그건 맞는 말인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미레아의 지지에 율비네가 그것 보라며 아리스에게 눈치를 줬다. 아리스는 아직도 완전히 이해한 것 같은 얼굴은 아니었으나 율비네의 의견이 그렇다 하니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좋아. 애초에 우리의 주종 관계는 몇 달 전에 내가 황실에서 나올 때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율비네가 손을 내밀었다.

“조만간 록산에서 봅시다. 친구 대 친구의 관계로요.”

아리스가 눈썹을 늘어트리며 그 손을 힘 있게 맞잡고는 멋쩍게 말했다.

“친구 대 친구라…… 율비네가 그렇게 말하니 좀 어색하네.”

“그건 네가 친구가 없어서 그래.”

어느새 나타나서 개떡을 날름날름 집어먹던 열이 아리스의 귓가에서 속닥거렸다. 아리스가 소스라치며 열의 숨결이 스치고 지나간 귀를 손으로 벅벅 문질렀다.

“너 죽여 버리겠어!”

하지만 열은 아리스가 달려들기도 전에 개떡을 입과 양손에 하나씩 들고 쫑쫑거리면서 도망갔다. 아리스가 열의 뒤통수에 대고 마이련어로 욕설 몇 마디를 내뱉어 주는 동안 미레아가 조금 신난 목소리로 율비네에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율비네는 우리 집에 온 적이 없군요. 이참에 놀러 오세요. 방도 여러 개인데 기숙 아파트 자리 날 때까지 머물러도 좋을 것 같아요.”

그렇게 말하는 미레아의 뒤에서 아리스가 안광을 뿜으며 바라보고 있었기에 율비네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얼른 사양했다.

“아하하, 놀러 가는 것 정도야 마다하지 않겠지만 그렇게까지 신세를 질 수야 없지요. 제가 독립을 할 때 거리는 중요하지 않다고는 했지만 그렇게 매일 아침, 저녁으로 얼굴을 보는 것은 저도 부담스럽거든요.”

“그래도 율비네가 같은 동네로 온다니 좋네요! 자주 볼 수 있고, 같이 놀 수도 있고.”

아리스는 미레아가 어떤 점에서 저런 말을 하는 것인지 알 것 같아서 마음 한구석이 쓰렸다. 미레아는 분명 절친하게 지냈던 동네 친구들을 둘이나 잃고 또래 중에 친밀한 관계라고 할 사람은 라일라가 전부였던지라 항상 적적함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율비네가 록산으로 온다니 저리 좋아하는 것이 분명했다.

“어머니는 여기서 계속 지내실 건가요?”

아리스의 물음에 은현은 조금 고민하며 말했다.

“당분간은 이곳에 머물 생각이긴 한데 마냥 놀고만 있을 수는 없으니…… 후학 양성이라도 하려고 한단다.”

“후학이요?”

“도장을 운영해 볼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니?”

“어…….”

은현의 질문에 아리스는 자신이 어머니에게 훈련을 받을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며 몸서리쳤다. 혹독한 수련 덕분에 죽지 않을 정도로 굴렀기 때문이었다.

수련생들이 도망가는 건 아니겠지…….

그런 걱정이 들었지만 은현이 다소 의욕적인 얼굴을 했기에 차마 부정적인 의견을 꺼낼 수 없어서 아리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살살하세요.”

“아직 내 체력이 나쁘지는 않단다.”

“아니, 어머니 쪽 말고요.”

“그럼 이제 다들 각자 갈 길이 정해진 건가요?”

율비네가 사람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참고로 류진은 텔라인의 후속 단체인 ‘프라나’라는 곳과 계약이 되어 있었다. 프라나는 마수 피해 지역의 복구 사업을 벌이고 있는 국제 단체였다. 애초에 진은 아리스의 일 때문에 잠시 외도를 했다지만 상황이 마무리되면 텔라인으로 복귀하려 그랬었다. 그런데 마수가 없어지면서 텔라인이 해체된 바람에 자연스럽게 실직자가 되었고, 덕분에 3년이나 빈둥거리면서 놀고 있던 것을 프라나에 적을 두게 된 첼시가 호출한 것이었다.

태평하게 집안 곳간이나 축내고 있자니 조만간 류열이랑 같은 취급을 당할 것이 뻔했기 때문에 류진은 첼시의 제안을 냉큼 받아들였다. 비록 지금까지 하던 것들과는 달리 앞으로는 무기를 잡을 일이 없었지만, 아리스가 그러했듯 류진은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무기를 들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꿈꾸며 마수와 싸워 온 것이 아니었던가.

율비네의 말에 진은 한심스러운 자신의 동생을 떠올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류열 빼고.”

“좋겠다, 류열.”

아리스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자 진이 부러워할 사람은 따로 있지 않느냐며 그의 뒤통수를 후려갈겨 주었다.

미레아는 손가락에 묻은 참기름을 쪽쪽 빨며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역시 형제자매의 관계는 좋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기분이 이상했다. 몇 년 동안 느끼지 못했던 그 분위기 안에 자신이 있다는 것은 상당히 어색하기도 했지만 그만큼 익숙하게 느껴졌다. 자연스럽게 그리움이 밀려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은 없는 사람들의 자리를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다 해도 앞으로 남은 긴 인생을 지나는 동안 사라진 사람들 대신 새로운 사람들이 밀려들어 온다. 그 인연들을 자신의 안에 꾸역꾸역 집어넣다 보면 뻥 뚫려 있던 공간이 점점 조금씩 메워질 것이었다.

새삼 그것을 깨달은 미레아는 스쳐 지나간 사람들에게 미안함과 동시에 안도감이 느껴졌다. 지금까지 미레아의 곁을 지나온 사람들이 없어도 그녀는 잘 지낼 수 있지만 그래도 완전히 잊지는 못할 것이었다. 앞으로 살아가는 데 있어 이 정도의 그리움이 딱 적당했다. 그것은 지금 있는 미레아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이 만들어 주었다.

미레아는 저도 모르게 제 옆자리에 앉아 있던 아리스의 손을 잡았다. 아리스는 일부러 미레아를 쳐다본다거나 하는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조용히 그 손을 맞잡아 왔다. 왜냐하면 남들 앞에서 애정 행각을 했다가 무슨 소리를 들을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 * *

다음 날, 아리스와 미레아는 록산으로 돌아갈 준비로 분주했다. 오가는 시간을 제외한다면 록산에는 겨우 3일밖에 있지 않았는데 어느새 부쩍 정이 들어 버려 떠나자니 서운했다.

광준이 아리스에게 다가오라며 손짓했다. 아리스가 그에게 귀를 갖다 대자 광준이 은밀하게 속삭였다.

“다음번에는 확실히 손주 며느리로 만들어서 데려오거라. 알았냐?”

아리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더 이상 욕먹지 않은 것이 어디냐 싶었다. 그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광준이 아리스의 등을 손바닥으로 한 대 퍽 쳤다.

“사내구실 제대로 하란 말이다!”

“네…….”

아리스는 광준의 말에 고분고분한 척을 하며 속으로는 딴생각이나 했다.

이렇게 된 이상 당분간 외가에 오는 것은 자제해야지.

광준은 아리스를 대할 때 딱딱하게 굴었던 표정을 풀더니 미레아에게 지극히 인자한 얼굴로 말했다.

“아가.”

그 목소리가 어찌나 다정하던지 그 자리에 있던 식구들은 몸을 떨었다. 저분이…… 저렇게까지 다정한 목소리를 내실 수 있는 분이셨나……?

그것을 알 리 없는 미레아만이 밝게 웃으며 광준에게 다가갔다.

“예, 할아버님.”

“네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오거라. 얼굴을 자주 보고 싶구나. 아, 네게 부담을 주는 것이 아니란다. 그저 마음 편히 가지라는 의미지, 네가 오기 싫은데 굳이 오라는 소리는 아니고…….”

광준은 말재간이 좋은 편이 아니었던지라 나름 좋은 인상을 남길 수 있는 말을 주섬주섬 찾고 있었지만 미레아는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밝게 웃으면서 고개를 꾸벅였다.

“불러만 주신다면 또 오겠습니다.”

“부르지 않아도 언제든지 편히 오거라.”

“네.”

미레아가 다소곳하게 대답하자 광준이 만족스럽게 껄껄거리며 웃었다.

이후, 그들을 율비네가 공항까지 데려다주었다. 곧 다시 보자는 율비네에게 두 사람은 손을 흔들어 주고 비공정에 탑승했다. 짐을 싣고 좌석에 착석하여 이륙을 기다리는 동안 미레아가 밝게 웃으며 말했다.

“정말 좋으신 분들이었어.”

아리스가 턱을 괴며 피식 웃었다.

“그것 봐. 내가 뭐라 그랬어. 괜찮을 거라 그랬잖아.”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시는 건 아니겠지.”

가슴 한편에 갖고 있던 불안감이 아직 완전히 가시지 않은 미레아가 의심쩍게 중얼거리자 아리스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외할아버지께서는 겉과 속이 똑같으신 분이야. 그분이 네가 마음에 들었다고 하시면 정말로 그런 것이니까 마음 편히 먹도록 해. 삼작노리개까지 받았잖아?”

“나는 그게 더 부담스러운데…… 역시 이거 다음에 뵐 때 다시 돌려드리면 안 될까?”

“뭘 또…… 줬다 뺏는 분 아니니까 그냥 갖고 있어.”

“그럼 나도 뭘 해 드려야 하려나…….”

굳이 무언가를 해 드리고 싶다면 미레아를 손주 며느리로 만들어 오는 것이 원이시니 그냥 결혼식만 올리면 될 것 같긴 한데, 아리스는 당분간 입을 다물기로 했다. 덕분에 미레아는 혼자 무슨 선물을 보내 드려야 할지 열심히 고민하기 시작했다.

정말 오랜만에 느껴 보는 가족의 따듯함이었다. 그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었던 마음 한구석의 공허함이 충만해지는 것 같아지니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서 미레아는 아리스 몰래 눈물을 얼른 훔쳤다.

어두운 밤바다에 몸을 던지고 혼자 남겨졌다며 울던 아이는 이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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