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0화.
하지만 열이 혀를 쯧쯧 찼다.
“그건 네가 혼자일 때 이야기지. 마누라까지 추가로 건사하려면 고작 그런 거로 되겠어?”
“쿨럭…….”
열의 말이 당혹스러워 아리스는 저도 모르게 사레에 들렸다.
“마누라라니…….”
“마누라 아니야? 결혼할 거잖아.”
“아니…… 저기요.”
“설마하니 지금 와서 결혼은 아직 확정된 게 아니네, 어쨌네 하면 너는 이번에야말로 할아버지 손에 죽을걸? 삼작노리개까지 주신 걸 보아하니 완전히 이 집 사람으로 받아들이신 것 같은데, 그딴 소리 한 번 더 지껄였다가는 그땐 식충이 소리로 끝나지 않을 거야.”
거기까지 말한 열이 몸을 붙여와 은밀하게 속삭였다.
“아니면 진짜로 식충이 한량 노릇이 희망 사항이야……?”
“나한테 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그 주둥이 다무는 게 좋을 거야. 그럴 리가 있나.”
“그럼 뭐가 문제야?”
“분위기에 떠밀려서 청혼하고 싶지 않단 말이야. 나도 아직 자리 잡기 전이고, 미레아도 자기 생활이 있고…….”
열은 그게 다 정리되면 어차피 청혼할 게 아니냐며 재차 물을 생각이었는데 아리스의 말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그러다 일이 틀어질 수도 있는 거고…….”
그 대목을 말하는 아리스의 얼굴은 한껏 어두워져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기엔 미레아가 부담스러워할 테니까 입 다물고 있어.”
“하여간 복잡하게 사는 놈.”
열이 다시 혀를 끌끌 찼다. 왜 미레아만 얽혀 있으면 이렇게 매사 부정적으로 변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원래의 주제로 돌아가서 말하자면, 우리 둘이 은행 이자만으로도 놀고먹을 수 있게 저금 든든하게 해 놨으니까 문제는 없다고. 정말 문제는 미레아가 지나치게 성실해서 일을 그만두지 않는다는 점이지만.”
그 말에 열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건…… 이해가 안 가는 걸?”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아리스도 열을 따라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그 둘에게는 일하지 않아도 놀고먹을 수 있는 재산이 있는데 일을 찾아서 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행위였다.
“하긴, 둘만 오붓하게 지내기엔 문제가 될 것이 없어도 애라도 있으면 얘기가 달라지지. 애 기르는 데 돈이 얼마나 많이 드는지 알아? 정말 하염없이 든다고. 그것도 미리미리 대비해야지.”
“……류열. 제발 멀리 가지 좀 말자. 결혼 계획도 아직인데 무슨 애야. 그리고 내가 낳고 싶다고 혼자 낳을 수 있냐?”
그러는 사이 나무 담 반대편에서 조금 부산스러운 소리가 넘어왔다. 아무래도 여자들이 자리를 정리하고 나가는 모양이었다.
“우리도 슬슬 일어나자.”
그 제안에 아리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탕에서 일어나는데 열이 병째로 술을 꼴깍꼴깍 넘기면서 아리스에게는 다른 병을 주었다. 아리스가 술은 거절하고 싶어서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젓자 열이 눈썹 끝을 늘어트리며 말했다.
“그거 진짜 식혜니까 마저 마셔. 남기기 아깝잖아? 내가 뭐 맨날 거짓말만 하고 사는지 알아?”
그 말에 아리스는 열이 내민 병을 건네받고 입 안으로 몇 모금 넘긴 후 뒤늦게 병에서 입을 떼어 내며 포효했다.
“미친놈아, 술 맞잖아!”
남이 열을 내든 말든 류열은 비열한 얼굴로 낄낄거리면서 웃었다.
* * *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난 미레아와 아리스는 두통에 관자놀이께를 꾹꾹 누르며 아침 식사 자리에 나타났다. 아리스가 광이 나는 얼굴로 해장국을 퍼먹고 있는 열을 보며 못마땅하다는 듯 말했다.
“류열…… 왜 혼자서만 멀쩡한 거야…….”
열은 순진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지난밤에 그들은 열을 끼고 오랜만에 만난 젊은 사람들끼리 술자리를 함께했다. 열이 숨겨 놓은 고급 술들을 꺼내 놓고 부어라 마셔라 하고 있는데 어느 순간 열의 페이스에 휘말리기 시작하더니 ‘적당히’라는 단어가 사라져 버렸다.
가장 먼저 율비네가 쓰러졌고 미레아와 진은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기억이 끊겼다. 심지어 어지간하면 술에 취하지 않는 그 아리스마저 나가떨어졌다. 그렇게 사람들을 쓰러트린 열은 그들이 감기 들지 않게 나란히 눕혀 이불을 덮어 주고는 자기 혼자 제 방으로 가서 곱게 잠들었다.
열을 뺀 다른 사람들은 아직도 숙취가 올라오고 있었다. 그래서 시원하게 끓인 해장국을 벌컥벌컥 들이켜면서 정신을 차려야 했다.
그들은 아침 식사 후 제사상을 차릴 것들을 간단하게 챙겨 마라피네스의 묘소로 향했다. 그의 묘는 본가에서 그리 멀지 않은 선산에 모셔 놓았기 때문에 가는데 힘들 것은 없었다. 길을 아는 은현이 앞섰고 그 뒤를 미레아와 아리스, 율비네, 류진이 뒤따랐다. 류열은 또 어딘가로 내빼서 보이질 않았다.
묘소 앞에 제사상을 차리고 향을 피우면서 아리스가 문안 인사를 드렸다.
“아버지,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셨나요?”
거기까지 말하다 말고 아리스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니…… 돌아가신 분께 잘 지냈냐고 묻자니 좀 웃기는데…….”
그 말에 뒤에서 진이 작게 웃었다. 아리스는 머쓱하게 말을 이었다.
“저는 잘 지냈답니다. 오늘은 미레아도 같이 왔어요. 아버지를 뵈러 일부러 같이 와 줬거든요. 좋아해 주셨으면 좋겠네요.”
미레아가 쑥스러워하며 웃었다.
“지금쯤이면 영소의 강에서 자유롭게 흘러가고 계실까요? 보고 싶네요.”
아리스는 술잔까지 올리고 절을 두 번 올렸다. 그리고 뒤에서 어색하게 서 있던 미레아에게도 향을 건넸다. 미레아는 아리스가 했던 것을 따라 하며 절을 두 번 올리고 말했다.
“전에 저와 한 번 뵌 적이 있지요? 혹시 계신 곳에서 제 부모님과 동생을 만나게 되신다면 잘 부탁드려요. 그리고 아리스는…….”
미레아는 아리스를 한번 힐끔 보더니, 말을 이었다.
“저도 부족한 게 많지만 제가 옆에서 잘 돌볼게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 발언에 일행들은 미레아를 한번 보았다가 아리스를 보며 키득거렸다.
“저기, 미레아? 그건 보통 내가 해야 하는 말이거든?”
아리스는 선수를 빼앗긴 탓에 다소 허탈해하는 목소리였다.
“왜? 듬직한걸? 그렇지요, 고모님?”
“내가 염치가 없네요. 저런 아들이지만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진과 은현이 한마디씩 덧붙이자 아리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들은 마라피네스의 묘소 옆에서 한동안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지난번, 아리스가 클라인에서 마라피네스와 케이드의 유해를 수습한 이후로는 처음 찾아뵙는 것이었지만 할 말이 많지는 않았다. 죽은 자들이 어떠한 안식을 얻는지 한번 보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슬픔마저 풍화되었기 때문일까. 그리움은 남아 있었지만 정말로 그것이 다였다.
전에 미레아는 아리스에게 죽음으로부터 시작하는 이야기도 있기 마련이라는 말을 했었더랬다. 그러니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죽은 자들의 이야기는 아직도 이어져 있기 마련이니. 그들의 이야기는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앞으로 뻗어 나가고 있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슬슬 돌아갈까요?”
은현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다들 그녀를 따랐다.
* * *
묘소에서 돌아온 이후 아리스와 미레아는 손님으로서 딱히 할 일이 있는 것은 아니라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사이 진이 개떡을 만들었다며 식구들을 불러 모았다. 못생겼지만 맛은 좋은 갓 지은 떡을 먹고 있는데 율비네가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더니 말을 꺼냈다.
“전부터 말씀드리고 싶었는데…… 아리스, 저도 이제 독립이란 것을 하는 게 어떨까요?”
“독립?”
“물론 아리스에게 받은 은혜는 평생 잊을 수 없고 모른 체할 생각이 없어 제 주군으로 모시고 있는 몸이나…… 이제는 서로의 신분과 처지가 조금 달라지지 않았습니까. 아리스는 더는 황실의 사람이 아니고, 저도 이제 더는 당신의 기사가 아니지요. 그 말인즉슨, 우리는 이제 남남이라는 소리입니다. 제 인생에 주종 관계랍시고 이러쿵저러쿵 끼어들 이유가 없다는 소리지요. 게다가 이제 아리스는 제가 필요 없으니까요.”
“그렇지.”
아리스는 굳이 빼지 않고 율비네가 필요 없다는 표현에도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율비네를 무시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 역시 자립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 보니 율비네를 끌어들일 수 없다는 의미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율비네가 없다면 아쉬운 게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동안 쏠쏠하게 부려먹었으니 이제 슬슬 놔줘야 할 때가 되긴 했다. 율비네가 아리스를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은 앞으로 미레아가 해 줄 수 있는 일들이었다. 그러니 앞으로는 아리스에게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자신의 길을 찾아가야 할 때가 온 것이었다. 아리스는 율비네가 자신만의 계획을 세웠다면 그것에 대한 지지 역시 해 줄 생각이었다.
율비네는 말이 나온 김에 이 자리에서 당당하게 선언했다.
“저, 율비네 엘레시드! 아리스 전하의 보좌관이자 기사직에서 사임하겠습니다! 불허는 제 쪽에서 받지 않겠습니다. 아까 말했듯, 우리의 주종 관계는 이제 의미가 없는 것이니까요. 결정했습니다. 이대로 독립하겠습니다.”
“좋아.”
아리스는 섭섭한 기색도 없이 상당히 깔끔한 대답을 들려주었다. 율비네는 잠시 혀로 입술을 축이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조만간 저도 록산으로 가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 말에 사람들이 의아한 얼굴로 율비네를 바라보았다. 독립한다더니 왜 아리스가 지내고 있는 록산에 간다는 건지?
“왜?”
아리스가 떡을 우물거리던 것을 멈추고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그는 이미 한번 율비네가 록산으로 가는 것을 에둘러서 반대한 적이 있었다. 미레아와 오붓하게 지내는 것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율비네는 어깨를 으쓱였다.
“제가 전에도 말씀드린 것 같은데, 저 라슈발렌에서 스카우트 제의 왔다니까요? 이참에 그쪽에서 일이라도 해 볼까 하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