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240화 (240/257)

외전 19화.

그 말에 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거기서 그게 나온 것이로군요. 나를 쓰러트린다면 인정해 주마! 뭐, 이런 거요?”

미레아도 열에게 류광준은 말로 하는 대화보다는 검으로 하는 대화를 선호한다는 소리를 들은 터라 반짝이는 눈으로 알 만하단 듯 말했다.

“그래서 이기시고 사랑을 쟁취하셨군요!”

하지만 진과 미레아의 말에 은현은 정색하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뇨. 완패였죠. 검이야 쥐는 방법 정도는 알고 있다고 하나 그이는 운동 실력이 정말 별로…… 였거든요. 아리스는 저를 닮아서 다행이에요.”

맞은편에서 아리스와 열이 웃음을 참느라 끄윽끄윽거리는 소리가 담을 타고 넘어왔다.

“그럼…… 어떻게?”

“말장난을 좀 했지요.”

“말장난이요?”

“검술 대련에서 이기신 아버지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나약한 놈에게 내 딸은 못 준다! 하시는 것을 뻔뻔하게도 말이지요…….”

당시의 마라피네스는 땀에 흠뻑 젖었어도 상당히 말간 얼굴로 또렷하게 말했다.

‘그럼 따님께 저를 드리겠습니다. 분명 검술 대련의 조건이 제가 패배한다면 따님을 못 주시겠다고 한 거지, 저를 받아 주지 않겠다고 하신 건 아니잖아요?’

그 말에 류광준이 잠시 말을 잃은 사이 대련을 구경하러 나온 은현에게 비장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어떻습니까? 다른 대가는 필요 없습니다. 저는 공짜입니다! 받아 주십시오!’

진이 다시 폭소했고 미레아가 이전에 페니드란의 힘으로 마라피네스를 잠시 만났었던 당시를 회상하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런…… 이미지가 아니셨던 것 같은데…….”

하지만 은현은 질린 얼굴을 했다.

“아니요.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후에 성향이 좀 진중하고 침착해진 것이지 원래 성격이 그래요.”

“그래서요? 할아버지가 그걸 받아들이셨어요?”

“그게 말장난이기는 하나 어쨌든 약속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부분이긴 하잖니? 그래서 처음에는 데릴사위 자리라도 원하는 것인지 물었는데 그건 또 현실적으로 힘든 부분이 있었지요.”

은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미레아에게도 설명해 주었다.

“그이는 엄연히 황족이잖아요? 암묵적으로 품위 유지를 해야 하는 의무가 있었단 말이에요. 그런데 다른 가문의, 그것도 마이련 무사 집안의 데릴사위?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말이에요. 다른 황족들이 가문의 수치라며 들고일어나기 좋은 걸요.”

은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요?”

이야기에 열중하는 사람들에게 보답하기 위해 은현이 말을 이었다.

“일단 데리고 있어 주겠다고 말해 주긴 했으니 그이로서는 어쨌든 마이련에 있기만 하면 되었지요. 그래서 마이련에서 국책 사업을 벌인다는 명목으로 이쪽으로 넘어왔어요. 무려 20년짜리 사업에요. 하지만 다른 황족들은 좋아했어요. 말이 국책 사업으로 인한 인사이동이지, 따지고 보면 반쯤 유폐잖아요? 그런데 그걸 변방의 웬 미친노…… 이 아니고, 서열이 뒷순위라고는 하나 나름 황족 중에 적당한 능력을 갖춘 사람이 나타나 제 발로 가겠다 하니 이게 웬 횡재냐 했겠지요. 그래서 별다른 어려움 없이 이쪽으로 올 수 있었답니다. 덕분에 저와 하는 혼인에도 큰 반발은 없었어요.”

“그래서 진짜 데릴사위로 데려다 놨어요?”

“반쯤은 그랬지요. 집은 따로였지만…… 그런데 그것도 말만 데릴사위로 있었다가 아리스를 갖고 그냥 그이의 집에 들어가서 살았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다 그이의 계략이었다니까요. 애까지 낳았는데 아버지께서 내치겠어요?”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속으로 같은 생각을 했다.

마라피네스는…… 자존심이 없나?

그것이 얼굴에 나타났는지 은현이 알 만하단 표정을 했다.

“그러니까 그는 그런…… 사람이었어요.”

“이야, 고모부께서는 사랑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리셨구나!”

열이 첨벙거리는 소리를 내며 감탄하였으나 아리스의 생각은 달랐다. 자신의 아버지는 분명히…… 자신의 지위에 얽힌 것들이 귀찮아서 적당히 내빼고 싶어 했을 것이었다. 아리스가 어릴 때 마라피네스는 제 아들을 무릎 위에 앉혀 두고 입버릇처럼 한탄했다.

‘우리 아들은 언제 크니. 빨리 커서 아빠 일 좀 물려받으렴. 그러면 이 아빠랑 엄마는 마이련으로 가서 조용히 살련다. 아빠는 정말 일하기가 싫구나.’

일하기 싫다고 징징거리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자식 교육상 모범이 되는 부모상은 아니었다. 은현도 그것에 동의하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어쨌든 그녀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부부의 연을 맺을 수 있었어요. 지금 생각해 봐도 대체 내 무엇을 보고 하루 만에 고백하고 여기까지 온 건지 이해가 되지 않지만…… 이제는 물어볼 수 없으니.”

은현이 아쉽다는 듯 말꼬리를 흐리자 담 너머에서 아리스의 목소리가 그 말을 받았다.

“그건 제가 들어서 알고 있어요.”

“어머, 그러니?”

은현이 다소 놀란 얼굴을 하였다. 아리스는 기억을 되짚어 보며 자신이 들은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당시의 아버지는 그때까지 첫눈에 반한다는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고 했어요. 어떻게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반할 수 있겠냐고 생각하셨던 거지요. 그런데 어머니를 마주하고 지금까지 했던 생각을 철회하셨대요. 첫눈에 반하는 게 가능한 거구나, 하고. 교제하는 거로 모든 게 다 결정 나는 것은 아니니 알아 가는 건 천천히 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대요. 결혼이나 약혼도 깨는 마당에 사귀다 서로 안 맞는다는 이유로 헤어지는 게 뭐 어려운 것도 아니고.”

“세상에, 내가 못 살아…….”

은현이 민망함에 작게 웃었다. 아리스는 그 뒤에 마라피네스가 덧붙였던 말을 옮길지 말지 잠시 고민하였다. 마라피네스의 경험담이었지만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첫눈에 반하든, 천천히 반하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란다. 사랑에 빠졌다는 것이 중요하지. 시작이 어찌 되었든 둘만의 시간이 쌓인다면 그것이 사랑의 완성이란다. 아들, 알겠니?’

아리스는 그 비슷한 말을 미레아에게도 했었다. 그래서 남들 앞에서 그런 말을 하기 쑥스러웠다.

“그런 이유로 아버지는 자신의 지위를 버리고 어머니가 있는 마이련으로 미련 없이 달려갈 수 있었다, 이 말입니다. 사랑꾼이시라니까.”

아리스의 말에 다들 낭만적이지 않느냐며 황홀한 표정을 했다.

“그래서 그렇게 지내다 할아버님께서 결혼을 허락하신 후엔 마이련에서 쭉 지내신 거예요?”

미레아의 말에 은현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렇긴 했는데 그 이후는…… 다들 아시겠지만 아리스가 태어난 날 여신의 속삭임이 내려왔지요.”

사람들이 숨을 들이켰다.

“황실과 서리 교단은 우리가 자신들의 감시 아래 있기 원했어요. 그나마 마이련에 있는 동안 아리스는 그나마 안전할 수 있었어요. 외국까지 황실의 세력이 닿기는 어려웠으니까요. 하지만 우리에게 여러 줄을 대어 주던 메르티어스를 압박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요. 그래요. 루아드 황실은 우리 가족을 끌어내리기 위해 루아드에 있는 우리의 수족을 하나씩 잘라 내기 시작했어요. 마라피네스는 비록 루아드에서 갖고 있었던 것의 대부분을 두고 오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모든 것을 버릴 수는 없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루아드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어요.”

은현의 표정이 약간 어두워졌다.

“그게 아리스가 그러니까…… 3살 무렵이었던가요? 루아드로 돌아온 우리는 황실의 감시 아래 생활해야 했습니다. 그다음부터는 여러분이 알고 있는 그대로예요. 그러다 메르티어스의 아들인 디트레이트가 암살당하고 우리는 이대로 당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반란을 일으켰고…… 어머, 어쩌다 이야기가 여기까지 흘렀지? 내가 괜한 이야기까지 했나요?”

담장 너머의 아리스가 침묵했다. 은현은 덩달아 표정이 어두워진 사람들을 둘러보며 너스레를 떨었다.

“이제는 다 지난 이야기가 되어 버렸네요. 이렇게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에요.”

그리 말하며 은현은 몸의 긴장을 풀고 온천물에 몸을 완전히 담갔다.

“어떻게 견디고 또 견디다 보니 이런 날도 오게 되네요.”

그러네…… 이런 날도 오네.

아리스도 눈만 내놓고 물속으로 몸을 담갔다. 그 상태로 숨을 내쉬자 코에서 뽀글뽀글하는 공기 방울이 올라왔다. 여자들은 이제 다른 주제로 넘어갔는지 아까보다는 낮은 목소리로 저마다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계속 엿듣기 멋쩍어진 아리스가 조용히 온욕을 즐기는데 열이 술을 잔에 따라 아리스에게 다시금 권했다. 하지만 아리스는 그것을 손으로 밀어내었다. 열이 킬킬 웃으면서 그 술을 홀랑 제 입으로 털어 넣고는 말했다.

“그나저나 용케도 마이련으로 돌아오지 않고 로아메나 대륙 쪽에 남을 생각을 했네. 그게 루아드가 아닌 건 이외지만.”

“뭐, 당분간 그렇게 됐다.”

“내가 봤을 때, 당분간이 아닐 것 같은데.”

아리스가 대답 대신 웃었다.

“집안 곳간 털어먹으면서 한량 짓 하는 건 한 집에 한 명이면 족하다고 생각해.”

“어라? 나 그렇게까지 안하무인 한 놈 아니다? 나를 그렇게 보고 있었다니 정말 섭섭한데. 그보다 너야말로 아무런 상관없어? 말은 그렇게 해도 능력 좋은 놈이잖아, 너. 나는 할 줄 아는 게 마땅치 않아서 한량 짓을 하는 거지, 넌 다르잖아. 재능이 아깝다고.”

열은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으며 나열해 보았다.

“정치도 그럭저럭 잘해, 문무 겸비에 마법도 잘해, 최근에는 마도 공학도 배워, 지휘관으로서 나름 쓸 만해…… 아니, 이렇게 나열하고 보니 세상 참 불공평하네. 넌 못 하는 게 뭐냐?”

열이 아니꼽다는 듯 아리스를 바라보았지만 정작 당사자는 아무런 생각 없어 보이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재능이야 그냥 적당히 일할 정도만 있으면 됐지. 그걸로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그러겠어. 어차피 모아 둔 돈도 적지 않은데 말이지. 내 목표는 가늘고 길게 가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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