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8화.
“난 온천에서 술 마시면 금방 취한다고! 하, 현기증 나…….”
“나약해, 나약해. 이래서 어디 갖다 쓰겠어?”
“죽는다…….”
진이 미간을 찡그리며 담 너머를 응시했다. 나무 담을 사이로 한쪽은 여탕, 반대쪽은 남탕이었다.
“쟤넨 뭘 하는 거야?”
“남자들은 왜 둘만 있으면 꼭 애 같은 짓을 하는 걸까요.”
율비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더니 맑게 찰랑거리고 있는 물을 손가락으로 휘적거리며 중얼거렸다.
“세진 지역도 오염이 많이 되었지만 정화기 덕분에 이만큼 돌아올 수 있었어요. 다 미레아 덕분이에요.”
“아니, 그걸 제 덕분이라고 하기에는 다른 사람들의 공도 큰 걸요. 아리스만 해도…….”
미레아가 쑥스러움에 손을 내저었다.
“그럼 다 함께 한 것이니까 우리 모두의 공이라고 해 두죠.”
그러더니 은현은 가져온 바구니에서 술병을 꺼내 흔들어 보았다.
“어때요? 미레아 양도 한 잔?”
미레아는 그것을 누구처럼 사양하지 않았다. 얼른 잔을 받아 든 미레아는 노곤해지는 기분을 느끼다 돌연 두 눈을 빛내며 은현에게 말했다.
“그런데 전부터 궁금한 게 하나 있었는데요.”
“네, 말하세요.”
은현의 허락에 미레아가 냉큼 말했다.
“아리스의 아버지…… 마라피네스 대공 각하와는 어떻게 만나신 거예요? 마이련과 루아드 사이에 접점이 많은 건 아니잖아요. 두 분의 연애 이야기가 궁금해요!”
“음…….”
은현이 뜻을 알 듯 모를 듯 한 미소를 머금었다.
“여기저기 말하고 다닌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많이 궁금해하더라고요. 하지만 별건 없어요. 오히려 심심한 이야기인데…….”
“미친놈아, 징그럽게 발가벗은 상태로 달라붙지 마!”
은현의 말 사이로 아리스의 외침이 들려왔다. 결국, 진이 담 너머로 바구니를 냅다 집어 던지며 외쳤다.
“닥쳐!”
그 덕인지 둘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은현이 작게 웃으며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정말 별일 아니랍니다. 그이가 마이련에 유학 차 왔었을 때 만났어요. 사실 이 이야기는 남들에게 자세히 하진 않았어요. 아리스도 딱 여기까지밖에 모른답니다.”
“오…….”
미레아의 호응에 은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이는 당시에 황실의 일가였지만 황위 계승 서열 중에서 제일 하위였기 때문에 행동에 제약이 크지 않았었어요. 그래서 이것저것 신문물과 여러 국가의 문명을 배우고 싶어 해서 세계 이곳저곳으로 공부하러 다녔답니다.”
“그랬군요.”
“그 무렵의 저는 10대 후반이었는데 여성들만 다닐 수 있는 고급 아카데미에 재학 중이었어요. 사실 당시만 해도 여자들이 고급 아카데미까지 진학하는 경우가 많지는 않았답니다. 그이가 온 것은 당연히 우리 학교에 재학하기 위해 온 것은 아니었고…… 마이련의 문화에 대한 최고 권위자가 우리 학교 교수님이셨거든요. 그래서 그 밑에서 이것저것 배워 보라며 추천을 받아 임시로 조교 역할을 하러 왔었어요.”
“그건 의외네요.”
“그이는 의외로 학구열이 높았답니다.”
그렇게 웃던 은현이 갑자기 어두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왜 우리 아들은 그 모양이지요.”
아리스에 대한 박한 평에 미레아가 눈을 깜박였다.
“네? 하지만 아리스는 머리가 엄청 좋잖아요. 이미 성인이 되기도 전에 고급 아카데미 과정의 과목을 수료한 게 많았다고 들었는데…….”
“머리가 좋은 것과 학구열이 높은 것과는 별개더라고요. 딱 필요한 만큼만 공부하고 빠져나가더군요. 그 머리도 조금 더 공부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지 않나요?”
“하하하.”
은현의 평을 듣자니 참으로 얄미운 녀석이었다.
“아무튼, 그러다 저와 만나게 되었어요. 그이가 조교로 있던 교수님이 제 지도 교수님이셨거든요.”
은현의 말에 미레아의 눈이 초승달 모양으로 휘며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그렇게 자주 보시다 그리된 것이군요?”
제법 낭만적이라며 평을 하려는데 은현이 고개를 저었다.
“사실 그렇게 자주 보지 않았어요. 처음 본 바로 다음 날 제게 고백했거든요.”
“……네?”
“아니, 잘 알지도 못하면서 바로 다음 날 교제하지 않겠냐며 고백했다니까요? 저는 그 사람 이름도 몰랐단 말이에요? 고백할 때 처음 들었다고요. 그런데 생각해 봐요. 제가 얼마나 당황스러워했겠어요?”
“어…… 그렇군요.”
미레아는 뭐 그런 저돌적인 사람이 다 있나 싶었다. 당시를 회상하자 은현도 어이가 없는지 헛기침을 한번 했다.
“아무튼, 그 자리에서 바로 좋다, 싫다, 대답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단 말이지요. 그래서 일단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그랬어요. 말은 그렇게 했어도, 싫다고 차 버릴 생각이었지만 말이에요. 그래도 바로 거절하자니 어쩐지 좀 미안하잖아요? 나름의 제 배려였지요.”
미레아와 진은 물론 율비네마저 흥미롭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도중에 아카데미에서 돌아다니다 몇 번 마주치기는 하였으나 마라피네스는 제 대답을 재촉하지는 않았어요. 그냥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가볍게 인사만 하고 지나갔어요. 선을 지킬 줄 알았지요. 그 덕에 제게 조금은 점수를 딸 수 있었답니다.”
“아, 그래서 마음이 바뀌셔서 교제를 허락하셨군요?”
미레아의 기대감 어린 추측에 은현은 도리질했다.
“아니요. 딱히요.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요.”
그 이야기를 들은 셋은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불쌍한 마라피네스 대공…….
“뭐, 어쨌든 어차피 차 버릴 건데 시간만 끄는 것도 예의가 아니다 싶었지요. 그래서 어느 날 복도에서 우연히 단둘이 마주쳤을 때 기회다 싶어서 그를 불러 세웠어요. 그리고 나름 용기를 내어 말했답니다. 당신과 교제는 할 수 없을 것 같다고요.”
그 말에 사람들이 작게 탄식했다. 불쌍한 마라피네스 대공!
“그래서요? 어떻게 됐어요?”
진의 채근에 은현이 돌연 싸늘하게 식은 얼굴로 대답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제게 뭐라고 대답했는지 아세요? ‘난 당신이 누군지도 모르고, 교제고 뭐고 할 생각조차 없는데 무슨 헛소리야? 내 신분에 혹하기라도 해서 그래?’라고 말했답니다.”
“네?!”
율비네가 꺾인 목소리를 내었다. 미레아와 진의 얼굴에도 역시 경악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게 끝이 아니었어요. ‘당신처럼 접근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니까 뻔한 수작질은 그만두는 게 좋을 거야.’라고 아주 근거 없는 자신감이 철철 넘치는 소리를 지껄였지요.”
그녀의 말을 들은 세 사람은 어떤 얼굴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은현의 눈치만 보았다. 하지만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그래서 어떻게 되었어요?”
“그 자리에서 뺨을 때렸어요.”
과연 무신의 가문 류가의 자제. 자신을 향한 모욕에 대해서는 참지 않지.
“다시 생각해 보니 한 대만 때린 건 너무 관대한 처사였네요. 더 팼어야 했어…….”
온화한 성격인 줄 알았는데 그녀의 혈관에도 무사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증거가 눈앞에 있었다.
“어…… 그런데 대공 각하께서는 왜 그런 말씀을 하신 건가요? 그분의 성격상 그렇게까지 무례하게 굴지는 않으셨을 텐데…….”
율비네의 물음에 돌연 은현이 씩 웃었다.
“사실은 그게, 알고 보니까 제가 때린 사람이 그이가 아니고 메르티어스였지 뭐예요?”
그러면서 깔깔거리며 웃었다.
“저는 당시에 그이가 쌍둥이였다는 걸 전혀 모르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똑같이 생긴 메르티어스를 보고 우리 그이인 줄 알고 그런 말을 했었던 거고, 우리 그이와 저 사이에 그런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했던 메르티어스 역시 영문을 알 수 없었으니 그런 말을 했던 거였어요!”
미레아, 율비네, 진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입을 딱 벌리던 그때, 나무 담 너머에서 아리스와 열이 폭소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담 너머에서 은현의 이야기를 숨죽이며 듣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열이 꺽꺽거리면서 숨이 넘어가는 소리를 내었고 아리스는 숨을 헐떡거리며 담장 너머로 말했다.
“아니, 그렇게 재미있는 일을 왜 지금까지 비밀로 하셨던 거예요? 아, 웃겨서 미치겠다.”
아리스의 웃음소리에 은현 역시 소리를 내며 웃었다.
“딱히 이야기할 필요성을 못 느꼈으니까? 물어보지 않았잖니.”
은현은 사람들의 흥분이 가라앉을 때까지 침착하게 기다려 주었다.
“어쨌든 이후에 그런 사정을 전해 들은 마라피네스가 사색이 되어 메르티어스를 데리고 저를 찾아왔더군요. 메르티어스는 우리 사이의 일을 몰랐다고는 하나 그가 한 말들은 명백하게 제게 모욕적인 언사였으니 말이에요. 당시에는 저도 그에게 좀 미안하기도 했고. 어쨌든 사과는 받아 주었죠.”
은현은 잠시 추억을 회상하고 말을 이었다.
“그 이후 저는 그의 형과는 달리 제법 반듯하고 겸양도 갖춘 마라피네스에게 호감을 느꼈어요.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어요. 마라피네스는 마이련 사람이 아니니 언젠가는 본국으로 돌아가야 했지요. 그래서 당시의 저는 그와 교제를 해 봤자 언젠가는 끝이 있으리라 생각했어요.”
사람들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에게 호감을 느꼈다고는 하나 역시 거절하는 수밖에 없었답니다.”
이야기의 전개가 그러한데 어떻게 결혼까지 간 것인지 청자들은 흥미진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 그런데 이 이후는 정말 별것 없었어요. 그냥 흔한 이야기인데…….”
은현이 멋쩍게 웃었다.
“일단 본국으로 돌아간 마라피네스는 몇 년 후 마이련으로 다시 돌아왔답니다.”
그 대목에서 사람들은 숨까지 참고 은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루아드 제국에서도 저를 잊지 못하고 있다가 다시 청혼하러 돌아온 것이지요.”
워후! 진이 휘파람을 불었다.
“그런데 제 의사야 어쨌든 일단 아버지께서 허락해 주실 리 없잖아요? 생각해 봐요. 아무리 황족이기는 하지만 권력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계승 서열 끝자락의 타국 사람이 딸을 달라는데 선뜻 그러마 하시겠어요? 그리고 권력이 있어도 걱정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