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7화.
광준은 미레아의 말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저건 성녀인가?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하지?
광준은 무인이었다. 수많은 목숨이 오가는 상황을 질리도록 겪었고 원망을 사는 일도 많았다. 어쩔 수 없는 싸움이라 해도 서로에게 무기를 겨누었던 사이의 용서와 화해는 정말로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용서를 한다고?
미레아는 자신이 대답을 잘 고른 것인지 확신이 없어 광준의 눈치를 슬슬 보았다. 하지만 광준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는 무거운 얼굴로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다시 생각해도 잘 부탁한다는 말은 미레아에게 있어서 어불성설인 것 같았다. 무슨 염치로 그런 말을 한단 말인가.
미레아는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자세 때문에 슬슬 다리가 저릴 무렵 돌연 광준이 벌떡 일어났다. 자신 역시 따라 일어나야 할 것 같아서 다리를 펴려는데 저린 탓에 미레아가 한 번 휘청였다. 광준은 미레아를 다시 앉게 하고는 서랍 안쪽 깊숙하게 보관되어 있던 무언가를 꺼내 왔다.
“원래 가문의 맏며느리 되는 녀석에게 주려고 했는데 말이다.”
미레아는 마이련어로 광준이 말한 ‘맏며느리’의 뜻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것에 대해 대충 넘기긴 했으나 그래도 무언가 중요한 것을 주려고 한다는 것은 분위기상으로 알 수 있었다.
광준이 내온 것은 화려한 장식의 삼작노리개였다. 각각 홍색, 남색, 황색의 실을 엮어 매듭을 만들고 금과 은으로 된 장식들이 매달려 있었으며 세 매듭의 중앙에 있는 것은 무려 마석 세 개를 깎아 만든 것이었다. 이것의 가치를 알아본 미레아는 광준이 그것을 내밀자 기함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설마 저걸 주겠다고?!
“너 가져가라.”
“예?!”
저건 대충 봐도 가보처럼 보이는 보물이었다. 어중이떠중이에게 물려주는 것이 아니란 것은 아무리 바보라도 알아볼 수 있었다.
“아니요! 이건 제게 너무 과분한 것 같아요! 할아버님, 이건 정말 받을 수 없어요!”
“되었다. 우리 집엔 그런 거 많단다. 하나쯤 남 줘도 아깝지 않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누가 아리스의 외조부 아니랄까 봐 미레아 앞에서 거짓말도 잘했다. 비록 가문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보는 아니었으나 그래도 대대로 맏며느리에게만 내려오는 것이었다.
아리스의 외조모 되는 류광준의 안사람이 얼마 전 세상을 떠났으니 이제 광준의 며느리이자 류견우의 안사람이 물려받을 차례였다. 그런 것을 주겠다고 하니 식구들이 알면 경악할 노릇이었다. 미레아는 그러한 내막까지는 알지 못하였으나 어쨌든 자신이 받으면 큰일 날 것 같았다.
“네가 안 받는다면 천이를 통해 전달하도록 하마.”
아리스라면 얼씨구나 이게 웬 횡재냐 하며 좋다고 받아 갈 것이 뻔했다. 그것이 눈에 선히 보여서 미레아는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얼굴로 떨떠름하게 삼작노리개를 받아 들었다. 그제야 광준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것을 지니고 있으면 재액을 막고 복을 들어오게 한다고 한단다. 소중히 여기거라.”
“네, 감사합니다.”
미레아는 삼작노리개가 아까워서 몸에 바로 찰 수도 없었다. 대신 떨리는 손으로 주섬주섬 품에 넣자 광준이 뒷짐을 지고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거 주려고 불렀다. 이제 가 보거라.”
이걸 먹고 떨어지라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예쁘게 봐 주어서 이런 것을 준 것 같았으나 미레아는 기쁘다기보단 부담스러워 죽을 것 같았다.
“네, 네……! 정말로 감사합니다. 소중히 여길게요.”
미레아가 연신 꾸벅이며 뒷걸음질로 물러나려는데 광준이 깜박한 것이 있다며 그녀를 다시 불렀다. 그리고 양손 가득 귤을 가져와 미레아의 손에 들려 주었다.
“그리고 이건 더 가져가서 먹거라. 다른 놈들에게는 말하지 말고.”
“감사합니다.”
미레아는 그것도 옷소매에 꾸역꾸역 쑤셔 넣고 이번에야말로 진짜 물러났다. 밖에서는 아까 물러났던 세 사람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미레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미레아가 경직된 얼굴로 나오는 것을 본 아리스가 얼굴을 찡그렸다.
“왜 그래?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할아버지가 싫은 소리라도 하던?”
“아, 아니, 그게 아니고요…….”
미레아는 품속에서 삼작노리개를 꺼내 아리스에게 보여 주었다. 그것이 뭔지 알아본 열과 아리스의 눈이 커졌다.
“이런 걸 받았는…….”
미레아의 입을 손으로 막은 열이 주변을 휘휘 둘러보고는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다음 속삭였다.
“야, 너 그거 다시 집어넣어. 빨리.”
미레아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품 안에 삼작노리개를 집어넣자 그제야 열이 미레아를 놓아주었다. 아리스 역시 진땀이라도 흐를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너 그거 다른 어른들 앞에서 꺼내 놓지 마. 알았어?”
그 반응들에 미레아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이거 역시 귀해도 보통 귀한 게 아니지요?!”
“왜요? 저게 뭔데요?”
열과 아리스는 율비네의 질문에도 쉬쉬하며 대답해 주지 않았다.
“어른들에게는 일단 비밀로 하고…… 할아버지가 먼저 말씀하시기 전까지는 먼저 말하지 않는 게 좋겠다.”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해.”
“이거 역시 내가 받으면 안 되는 거지요?”
“아니야, 할아버지가 네게 주겠다 하셨으면 네가 받는 게 맞지! 그건 신경 쓰지 마. 그 삼작노리개는 앞으로 네 거니까.”
열은 이 집의 맏며느리인 자신의 어머니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반응을 알 수 없으니 그게 걱정되었을 뿐이다. 아마도 광준은 이 삼작노리개에 준하는 것을 대신 물려줄 계획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맏며느리가 마음에 들어 할지는 별개의 문제였다.
그 둘의 반응에 율비네 역시 범상치 않은 의미의 물건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대충 봐도 마석이 세 개나 주렁주렁 달린 장신구인데 별것 아닐 리 없지 않은가.
“아, 그리고 이것도 받았어요.”
남들에게 말하지 말고 혼자 먹으라고 했지만 미레아는 소맷자락 안에서 귤들을 꺼내 그들에게 나눠 주었다. 열과 아리스는 그것을 보더니 입술을 댓 발 내밀며 냉큼 건네받았다. 아리스가 성미 급하게 벌써 껍질을 까며 툴툴거렸다.
“뭐야, 왜 우리는 안 줘? 우리 입은 입도 아니야?”
“이것도 귀한 건가요?”
미레아의 질문에 열이 고개를 끄덕이며 아껴 먹으려고 귤을 소매 안에 집어넣었다.
“난 올해 귤 구경도 못 했는데 할아버지가 숨겨 놓고 있었을 줄이야…….”
율비네 역시 귤을 주머니에 슬쩍 집어넣었다. 미레아는 코밑을 훔치면서 히히 웃었다. 아무래도 광준이 자신을 좋아하는 것이 확실한 듯하여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과한 것을 받은 덕에 부담스러운 건 여전했지만 말이다.
* * *
미레아를 보내고 난 후 광준은 자신의 큰아들 내외를 불러들였다.
“얘, 큰며느리야.”
“네, 아버님.”
류견우의 아내 되는 박서혜가 다소곳하게 대답하였다. 광준은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가 미레아 저 아이에게 삼작노리개를 주었단다.”
“네, 그렇습…… 네?!”
박서혜는 대답하다 말고 흔들리는 눈으로 자신의 시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지금 자신에게 넘어와야 할 물건이 누구한테 가 있다고? 서혜의 남편인 류견우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
“아버지, 잠시만요. 지금 그건 혼자 결정하신 것인가요?”
하지만 광준은 상당히 여상한 태도로 큰아들 내외에게 일렀다.
“그래. 그렇게 됐다. 그래서 말인데…….”
서혜가 느끼기로는 맏며느리로서 자신의 지위가 땅에 떨어진 것 같았다. 이러한 처사를 내린 시아버지가 미워지려는 찰라 이어지는 광준의 말에 침착함을 되찾을 수 있었다.
“네게는 삼작노리개 말고 다른 것을 주려고 한단다. 명색이 맏며느리인데 그에 걸맞은 것을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예.”
광준은 한번 헛기침을 하더니 서혜를 슬쩍 보고 젠체하며 말했다.
“가화호에 딸린 땅과 정자, 너 주마.”
그 말에 서혜는 두 눈을 크게 떴다가 얼른 표정을 갈무리했다. 그리고는 고개를 푹 숙이며 침착하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버님.”
사실 서혜는 삼작노리개가 지닌 상징성 때문에 귀하게 여기기는 하였으나 굳이 취향을 따지자면 방금 광준이 말한 가화호였다. 마이련에서 아름답기로 손꼽히는 명소로 정자가 이루는 광경은 극히 장관이었다.
멋과 운치를 즐기는 서혜가 그 호수를 탐낸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광준은 이참에 선심을 쓰는 척하며 서혜에게 그것을 넘겨주기로 하였다. 서혜도 그 결정에 불만은 없었기 때문에 여러모로 잘된 일이었다.
광준의 약속에 서혜가 싱글벙글한 것을 보고는 견우는 내심 속으로 안도했다. 아무리 그래도 미레아를 편애하는 것이 다른 식구들에게는 거북할 수도 있었는데 다행히도 광준이 형평성을 잘 잡아 주었다.
“그러니 견우 너도 그리 알고 있거라.”
“예, 아버님.”
“가서 식사 준비나 하려무나.”
광준은 크게 헛기침을 하며 아들 부부를 물렸다. 혼자 남은 광준은 자신의 현명한 결정에 홀로 뿌듯해하며 미소 지었다.
* * *
“하…… 좋다.”
뜨거운 온천에 몸을 담그자마자 미레아의 입에서 노곤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야외 온천이라 밖의 공기는 추웠으나 뜨거운 물속에 있으면 그것은 전혀 문제 되지 않았다.
저녁 식사를 한 후 은현은 미레아를 데리고 집의 뒷산에 있는 노천탕으로 안내했다. 태어나서 처음 와 본 온천에 미레아는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땅에서 뜨거운 물이 솟아난다는 것이 신기했다.
“아리스가 온천도 가 볼 만하다 그러더니 정말 좋네요. 이렇게 좋을 줄은 몰랐어요.”
은현과 류진, 율비네가 큰 수건을 두르고 미레아의 옆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와 앉았다. 미레아가 몸을 늘어트리고 발가락을 꼬물거리고 있는데 나무로 세워진 담 너머에서 짜증 섞인 아리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미친놈아! 식혜라면서? 이거 술이잖아!”
열이 깔깔거리며 웃는 소리가 함께 넘어왔다. 아리스가 투덜거리는 소리와 함께 둘이 추격전이라도 벌이는지 와당탕하는 소리가 이어졌다.